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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정] 의사소통단절로 본 현대가정의 문제점
    현대 가정의 문제점 - 의사소통 단절우리 사회 어디에서건 ‘흐름’은 중요하다. 작게는 우리의 몸을 봐도 그렇고, 크게는 국가를 봐도 그렇다. 우리 몸은 심장에서 뿜어대는 피를 몸 곳곳이 보내면서 ‘흐름’이 만들어진다. 만약 이 ‘흐름’이 없다면 더 이상 몸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흐름’이 있기에 몸은 생명력을 가지고 살수 있는 것이다. 국가를 봐도 그렇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국가는 운영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다. 국민과 국가, 국가와 국민의 의사소통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국가가 있는 것이다. 의사소통이 없는 국가는 더 이상 국가로서 설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만 봐도 어떤 식으로든 국가 대 국민이 의사소통을 하며 살아간다. 그 방법이 어떻든 말이다. 국민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요구를 하고 있고, 국가에서 또한 그들의 입장을 어떤 식으로든 표명을 하는 것이다. 그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든 살기 나쁜 나라든 그건 이 ‘흐름’에서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의사소통을 하면서 그 국가는 어떤 식으로든 ‘흘러간다’는 것이다.가정 또한 마찬가지다. 가정이 어떤 식으로든 ‘흐름’을 가지려면 구성원간의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의사소통의 방법이 잘못돼서 그 불우한 가정이든지, 방법이 잘돼서 화목한 가정이 되던지 어쨌건 가족 간의 의사소통이 이루워져야 그건 가정으로 설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의사소통이 단절돼있고, 부모와 자식의 대화가 단절돼 있다면 그건 가정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한 것이 되는 것이다.우리 현대사회는 산업화 과정을 겪으면서 대화의 단절이라는 문제를 겪고 있다. 곧 ‘흐름’이 깨지는 것이다. 몸의 흐름이 깨지면 죽는 것이고, 국가의 흐름이 깨지면 파국이다. 가정의 흐름이 깨진다면 그건 가정파탄이고 가장 기본적인 사회조직이 깨지는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국가 또한 없는 것이다.나는 여기서 현대 가정의 의사소통 단절로 인한 문제점을 청소년 문제와 결부시켜 이야기 하기로 한다.먼저 가정의 기능을 말해보겠다.가족의 기능에 대해서 여러 사람의 견해를 찾아볼 수 있다. 백커(H.Becker)는 일곱가지를 열거하고 있는데, 그것은 ① 인구의 생산, ② 자녀의 보호와 관리, ③ 경제적 생산, ④ 자녀의 사회화, ⑤ 자녀의 교육, ⑥ 애정적 상호관계이다. -「현대가정의 사회화 과정이 자녀교육에 미치는 영향」여기에서 봐야할 것은 사회화 기능과 애정적 상호관계이다. 가정이란 것은 인간이 처음으로 겪는 사회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처음 사람과 대화를 하는 등 사회화 과정을 겪게 되고 이것은 한 인간의 인성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당연하다. 사회화 과정을 겪는 것의 기초가 되는 것이 상호간의 대화이다. 그러므로 의사소통은 처음 사회화를 겪는 인간에게는 개설서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애정적 상호관계 형성이다. 사랑 받고 자란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인성은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가령 학대받은 인간이나, 무시를 받고 자란 인간의 범죄율이 더 높다는 연구 결과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애정 표현의 초기 또한 대화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지금 우리가 겪는 일상이기에 쉽게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의사소통을 중요하고 가족 간에 대화는 꼭 필요한 것이 되는 것이다.가족집단은 또한 인간에 있어서 최초 교육의 장이 된다. 어려서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인간의 욕구를 표시하고, 충족하고, 적응하는 법과 습관을 지어나가고, 부모, 형제, 자매와의 접촉을 통해서 사회성을 발달시키고, 가족문화 속에서 성격의 형성과 가치관을 배워가게 되는 것이다.「현대가정의 사회화 가정이 자녀교육에 미치는 영향」이 글에서 보듯이 인간은 가족내의 작게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크게는 형제, 자매의 관계에서 사회화를 겪는다. 어쩌면 제일 편한 상대에게서 제일 조건을 가지고 처음 사회화를 겪는다는 것이다. 가령 이 과정을 뛰어넘은 인간이라면 처음 사회를 접하게 되는 기회가 낯선 사람이거나 어려운 사람일 것이다. 보통의 경우 가장 편한 사람에게서 사회화를 겪는 것과는 당연히 차이가 있을 것이다. 가족 내에서 이 과정을 겪지 못한 사람은 표현 또한 잘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의사소통을 중요한 것이다.왜 가족 간의 의사소통이 단절되었나 전통사회와 현대사회를 비교해 보겠다.전통적인 한국사회에서는 생계담당의 역할은 부부가 같이 수행했으며 가사활동 자녀양육 등의 역할은 여자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오늘의 한국 농촌에서도 여성의 노동분량은 남성의 노동분량보다 더 많은 형편이다. 한편 자녀들도 생산활동 및 가사활동과 관련된 역할의 일부를 수행해 왔다. 자녀들은 일찍부터 가내 잡역과 가내수공업에 종사하여야 했으며, 10세 전후가 되면 본격적으로 각종 노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1차 산업 위주의 전통사회에서는 가족이 생산단위였기 때문에 모든 가족이 생산활동에 참여해왔다.「현대 가정의 사회화 가정이 자녀교육에 미치는 영향」보는바와 같이 전통사회에서는 가족 간의 접촉이 많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같이 밥 먹고 같이 일하고 같이 점심 먹고 같이 일하고..이것이 전통사회의 가정의 형태였을 것이다. 지금도 이런 사회라면 접촉을 통해서 당연히 자연스러운 의사소통이 가능해질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바뀌었다. 전통사회에서처럼 단순한 지위와 역할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산업화를 겪으면서 우리의 지위와 역할을 당연해졌고, 접해야하는 사회 또한 다양해졌으며,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그의 역할은 전통사회의 어른만큼이나 많아졌다고 봐야할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가정 내에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있는 시간은 당연히 줄 수 밖에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그리고 부모들의 맞벌이로 인해 부모들이 집에 거주하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자녀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으며 부모와의 대화시간이 부족해지고 있다. 특히 도시의 아파트의 주거구조가 폐쇄적으로 됨으로써 인간 관계를 단절시키고 있으며, 부모의 권위가 약화되어 자녀에 대한 교육, 훈육, 통제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청소년 범죄 예방을 위한 가정의 역할」오늘날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자녀와 부모가 함께 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가 가족의 부양책임과 자신의 상호적 성취를 위해서 뛰다 보니, 직장에 다니는 대부분의 아버지는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가정 밖에서 지내게 됨으로서 아버지와 자녀가 같이 여가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었다. 따라서 자녀와의 대화부족, 부의 역할상실, 가정의 통제결여 등에 따른 청소년 범죄가 늘어나고 있다.「청소년 비행의 가정환경적 요인과 그 예방에 관한 연구」진술한 바와 같이 청소년들은 여가시간이 거의 없거나 있다해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청소년 범죄의 가정환경적 요인과 그 예방에 관한 연구」이처럼 가족구성원들은 다양한 사회에서 요구하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느라 가정에서의 역할은 충실치 못하고 있다. 따져본다면 구성원 모두에게 대화단절이라는 죄목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지금 가족구성원들은 가정이란 곳을 다만 휴식처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다. 가정 밖의 사회에서만 역할수행을 하고있고, 거기에서만 성취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사회가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 현대사회에서 가정이란 곳도 전통사회와는 다르게 서로 노력해야하는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의사소통 단절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구성원이 자녀들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은 자신의 여가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나이이다. 바꿔 말하면 부모의 자녀들 여가선용 책임이 있는 것이다. 자녀들의 여가시간을 작게는 대화로 크게는 이벤트로 메꾸어주어야 할 것이다.
    사회과학| 2004.05.12| 4페이지| 1,000원| 조회(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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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862년 임술농민항쟁
    1. 1862년 농민항쟁의 발생계기1) 생산력 발달에 따른 농민층 분해와 계급대립1862년 임술농민항쟁은 진주 인접의 단성현에서 시작되어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국 20여개 읍에 걸쳐 발생했다. 이 농민항쟁은 생산력 발전과 계급구성의 변화라는 토대 위에서 체제적 모순의 담지자인 농민들이 봉건사회를 부정하며 전개한 사회운동이다. 특히 선진적 미작지대이고 유통경제가 크게 발달했던 삼남지방은 농법의 발달과 노동력의 상품화가 이루어지면서 향촌 내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었고, 소농경제의 영세화와 자영농민층의 몰락이 두드러졌다. 당시 농민들은 극히 적은 양의 농업소득으로 지대, 부세부담 그리고 가계 생활자금 및 재생산기금까지 마련해야했다. 결국 이같은 상황에서 봉건지주와 소빈농, 작인사이에 경제적 이해를 둘러싼 계급대립이 첨예화되었고, 고율의 지대수취에 대항한 항조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2) 국가의 조세수탈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조선후기 부세문제는 농민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세량의 격증현상으로 단순화시킬 수 있다.당시 조세제도는 총액제로 운영되어 제도 자체의 구조적인 모순점이 내재되어 있었다. 당시 신분제의 변동으로 전국의 전결, 신역자, 민호에 대한 직접적, 개별적 파악이 어려운 상황을 감안하여 군현 단위별로 결총, 군총에 따른 세수총액을 결정해주고 수령으로 하여금 이를 징수하도록 했다. 조세의 완납여부를 수령의 평가와 결부시킨 총액제는 관의 이해만 반영된 것으로 국가 수입에는 직접적인 결손이 없게 한 제도적 장치였다. 지방 군현에서 수취되는 조세는 중앙에 상납하는 상납분과 군현 자체의 경비분으로 구분되는데 중앙재정의 규모확대와 각급 관청의 재정적 요인에 의해 조세 중과 문제가 발생했다. 거기에다 조선왕조의 방만한 수취체계와 이를 통제할수 없었던 행정통치능력의 위약성으로 수세담당자들의 중간횡령이 커다란 폐단이 잇달아 농민항쟁을 유도하는 요인이 되었다.그럼 당시 부세제도의 문제점을 전정, 군정, 환곡의 순으로 알아보겠다.전정 가운데 삼정이정책에서 혁파조항으로 명기된 도결의 문제를 살펴보겠다. 도결은 조세가 금납화 되고 토지로 집중되면서 전세와 대동세 외의 각종 결역분을 한꺼번에 결수로 묶어서 거둬들이는 조세수납체계를 일컫는다. 이는 관으로서는 매우 편리한 조세수취방식으로 운영과정에서 결과를 높이거나, 관의 자의적인 수탈 같은 폐단이 발생했고, 토지소유가 많은 일부양반들의 불만으로 결가징수에 관련해 빈농들의 조세를 양반들이 대납하고 차후 고리의 이자를 붙이는 행위의 발생으로 일반농민들의 불만도 당연히 고조되었다. 이는 조세가 토지에 집중되는 착취방식의 변화를 통한 인신지배방식이 이완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한편, 화폐납의 일반화에 따른 고가의 결가가 부가될 개연성이 컸음을 동시에 보여준다.군역세의 징수를 들러싼 문제점을 살펴보자. 조선후기 군역세는 정군은 역에 종사하고 보인은 포를 납부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당시 군역은 증가하는데 반해 신분제의 변동으로 인해 양역 농민수은 감소되는 상황이 문제가 되었고, 역을 지고 있는 양인의 신분을 강력히 규제하는 것이어서 농민의 피역저항이 두더러졌는데, 총액제의 시해에 따른 모순으로 인해 도망자에 대한 추가부담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다.환곡에서도 문제는 드러났다. 소농경제의 사회에서 그 재생산을 보장하는 사회경제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본연의 기능에서 벗어나 관청의 재정확보 방안으로 변질되었다. 19세기 재정확보의 극대화를 위해 원곡조차 농민에게 분배하는 문제, 중앙의 유정지세의 납부독촉에 대해 우선 환곡으로 납부함으로써 군현의 창고가 비게 되는 문제가 지적되었다. 또한 전과정을 지방관청에 일임해 고리대적인 운영을 하는 관청이 늘어 삼남지역의 농민항쟁을 유발시킨 주원인이 되었다. 결국 이 시기 본래 봉건적 신분제와 저급한 상품화폐경제를 기반으로 성립된 부세 제도가 조선후기에 이르러 신분제의 동요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파행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3) 사대부 토호들의 불법적인 향촌지배19세기 노론 일당 전제가 장기화되면서 지방의 사족들이 권위를 상실하고 향반, 토반 등 지방차원의 유력자로 전락해갔다. 토호라 일컫는 사대부들은 수령의 비호 하에 불법적인 지배를 해했다. 다양한 드러난 무단적인 지배를 행하던 토호들과 당시 사회의식이 성장한 빈농들간의 대립은 점차 심화되었다.2. 1862년 농민항쟁의 발생지역농민들의 반봉건항쟁은 19세기에 들어와 봉건적 사회질서가 동요된 가운데 점차 고양되었으며 1862년에 이르러 거의 전국적으로 발발하게 되었다. 형식은 소극적인 것에서부터 봉기전쟁에 이르는 적극적인 항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났고, 지역적으로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삼남지방을 비롯한 경기도, 함경도, 황해도 일부까지 전개된 농민항쟁이었다.3. 항쟁집단의 조직과 사상1) 민간신앙에 바탕한 반봉건ㆍ반유교적 사상당시 농민들은 추수를 하여도 고율의 지대와 조세를 부담하기조차 어려운 실정이었으나, 지주층은 자신의 토지에 부과한 조세조차 작인에게 전가시켜 부담을 과중시켰다. 조선후기 사회모순의 심화로 인해 유교적 사유체계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고, 국문소설, 판소리 등의 상품화는 이를 더욱 가속화 시켜 농민들의 반봉건적 의식세계가 더 구체적으로 표출되었다. 이와 함께 유교의 명분론을 부정하는 천주교, 정감록, 동학 등이 성행했고, 이들은 농민들의 생활 깊숙이 연계되어 그들이 실천적 바람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 농민들은 반봉건의 식을 지닌 채 체제적 모순을 담지하였으나 정치권력에 대한 계급적 이해의 결여로 봉건국가체제를 구체적인 타도대상으로 인식하지 못하였다.결국 농민들을 조직화시키고 봉기를 주도한 자들은 다름 아닌 몰락양반들이었다. 이들은 유교적 교양에 도덕적 사명감을 기초를 둔 양반층으로 비록 계급적으로는 봉건적이었다 할지라도 수탈과 착취에 대한 공동적인 대응이 요구될 때 농민층의 이해를 부분적으로나마 대변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런 점은 주도자들이 향촌 내에서 나름대로의 지도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논리의 근거가 되었다.2) 봉기를 주도한 몰락양반의 계급적 한계봉기에 참여한 몰락양반의 입장에서 이들은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과 지배층의 착취를 몸소 체험하였으며 몰락한 농민들의 생활에 공통적인 이해를 절실히 느꼈던 존재들이다. 하지만 계급적 처지로 볼 때 이들이 제거하고자 했던 것은 삼정의 모순이나 관속의 탐학과 같은 폐단이었을 뿐 봉건국왕의 덕정 체제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농민봉기가 정치 투쟁으로 전면화 되지 못한 체 대경제투쟁에 머물렀던 원인이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부세 징수에 있어 고율의 공동적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조세투쟁에 가담했던 것으로 지도층인 몰락양반과 농민조직 상호간의 연대는 단순결합에 불과했음을 지적할 수 있다.3) 관 주도로 이루어진 향회 조직의 문제점초기 향회는 교화를 통하여 민과 향촌사회를 유교이념 하에 통제하고, 수령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한 지배층의 모임이었으나 점차 의미가 확대되어 농민을 대표하는 향임이 참가하여 원래 기능외 조세수취를 둘러싼 제반 지방행정을 논의하고 일정한 공론을 형성하는 기구로 전변되었다. 하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아 지배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경우가 많아 봉건 권력의 조세수탈을 정당화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아 농민 스스로의 모임을 만들어 민 주도의 향회를 개최하게 된다.4) 민 주도의 조직을 통한 농민봉기민 주도의 향회에서는 불법수취를 합법화시킨 관 주도 향회의 결정을 저지하는 방법을 논의하게 되었다. 합법적으로 용인된 통문, 읍소, 의송의 방법부터 시작하였으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자 결국 전면봉기를 통한 실력행사를 계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향회는 봉기를 주도하는 결집체로 전변되었고, 공동의 이해가 합치될 때 비로소 전면봉기에 나섰던 것이다. 이로 볼 때 당시의 농민봉기는 지도부의 구축과 끊임없는 조직화 과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봉기의 주요 동인인 농민들은 한편으로는 면리제로 표현되는 기존 통치 조직 하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향촌 내 공동노동조직인 두레를 통해 조직적으로 동원되었다. 이렇게 동원될 수 있던 이유는 봉건적 모순에 대한 강렬한 시정욕구에 더불어 공동체적 강제력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5) 독자적으로 항쟁대열에 가담한 초군조직초군 이라는 용어 자체는 나무꾼을 가리키며 일반농민과 다를 바 없었다. 경작지 부족으로 인해 극빈농들은 가계보충을 위해 벌목에 매달리고 초군의 수가 증가하면서 이들의 집단성도 강화되어 책임자를 두어 그들만의 집회를 하는 등 일정한 틀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산림의 사점화 경향이 두더러 지면서 사대부들이 산직이나 초군조직을 사조직화 하여 산림 소출물을 독점하고자했다. 이로 인해 사대부와 초군 사이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은 필연지세였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초군은 자체적인 결합력이 있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봉기에 나섰고 결국 항쟁대열에 집단적으로 참여함에 따라 항쟁은 보다 구체성을 띠게 되었다. 이는 양반 토호가 주도하는 봉기와는 조직구성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고, 전면봉기 시 계급적 이해관계를 전면에 내걸며 향촌 내 지배계층인 지주 사대부에 애해 집중적으로 공격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4. 농민항쟁의 전개과정1) 동헌관속의 습격과 불법적 향촌지배에 대한 항거1862년 농민들은 대개 향회→등소운동→전면봉기→관청점령→해산(진압)의 전개과정을 보이고 있다. 농민들의 조세수탈을 담당하는 수령ㆍ이서로 대표되는 공적권력과 사대부ㆍ지주가로 대표되는 사적권력에 대한 대항이 상이하게 나타나는데 후자의 경우는 초군의 공격이 집중되는 경향을 띈다. 전면 봉기한 농민들의 공격대상은 조세수탈에 집중되었는데 당시 수취제도의 특성상 직접적인 대상은 각 군현의 수취업무를 담당하는 이서들이었다. 당시 봉건구가의 지배체계를 구조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한계성으로 단순히 이서들에 대한 공격으로 머문 군현이 대부분이지만 일부는 수령을 마을 앞까지 쫓아내어 그 자격을 상실시키는 적극적인 대항을 한 군현도 있었다.
    인문/어학| 2004.05.12| 5페이지| 1,000원| 조회(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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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1. 19세기 산업자본주의많은 역사가들은 19세기(1789년부터 1914년까지 120여 년간)를 통하여 자유시장의 이념이 사회의 중심적 구성원리로 등장하여 발전했으며, 투표권의 점진적 확대를 통한 의회민주주의의 성장과 이에 기초한 중앙집권적인 정치구도로 대두하여 확립했다고 하는 견해와 19세기는 산업자본주의가 몰고 온 급격한 사회변동에 따른 일반 하층민중의 저항운동이 본격화된 시기였다고 보는 견해, 두 가지로 크게 양분된다.이런 사회구조적 변동은 생산에 직접 종사하는 사람이 생산수단으로부터 유리되는 이른바 무산계급화라는 현상을 보였다. 격화된 무산계급화는 사회의 여러 측면에서 변화와 긴장을 가져왔다. 이전의 노동습관처럼 일몰과 일출이라는 자연리듬에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작업시간의 엄수, 작업 중 금주 등 작업장의 윤리가 부과되기 시작했다. 이는 관습을 중요시여기는 숙련공들의 강력한 저항을 유발했고, 작업장에서 노자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작업장에서 기강확립을 위해 일터 밖에서의 여가이용에 대한 간섭을 동반하였다. 노동자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합리적이고 건전하며 생산적 행위와 놀이가 강요되었다. 또한 원료나 반제품 또는 완제품의 일부를 노동자가 취득하던 관습도 이제는 상업적 횡령 이라는 범법행위로 규정되어 생산성 증대를 위한 희생물이 되어야 했다.19세기 산업화는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사유재산권 이 관습적 권리와 공유권을 잠식하고, 더 나아가서는 하층민의 문화영역 전반에 대한 지배계급의 공격을 의미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노동자들은 여러 형태의 집단적 행동을 통하여 그들의 기존 권익을 보호하고, 때로는 전혀 새로운 사회의 청사진을 모색하기도 했다.노동계급의 대응을 크게 세시기로, 즉 1789~1848년, 1848~1879년 1870~1914년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2. 이중의 혁명과 노동운동의 태동과 발전(1789~1848년)이시기는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의 시민혁명을 경험한 혁명의 시기이다. 이 거대한 변혁의 물결은 근본적인 노동운동이 태동하고 확산되노동기강을 달성하기는 어려웠으리 모르나 비교적 효과적으로 노동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다. 이러한 여러 변화들은 선대제 하의 노동자들이 보유했던 노동과정에 대한 자율적 통제권을 전면적으로 침해하게 되었다.이런 산업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진전은 노동자들에게 또 다른 불리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선대제 하에서 판매과정 중 원료와 완제품을 취득하던 관습을 사용자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불법화시켜버린 것이다. 또한 견습공제도의 법적인 뒷받침인 장인법(견습광의 수와 임금수준결정권한-전통적인 국가간섭)도 폐지시켰다. 이 법의 폐지는 노자관계에서도 시장경제의 논리가 득세하고 있는 추세를 잘 보여주었다.또 다른 역사적 현상은 인클로저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6세기 목초지 확보를 위한 것과는 달리 공유지와 황무지의 통합을 통한 대규모의 곡물생산을 위한 것이었다. 엄청난 토지집중에 의한 공유권의 박탈과 군소 경작지의 소멸은 소농과 수많은 농촌빈민의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다.이와 같은 산업화와 토지집중의 와중에서 급속한 무산계급화의 과정을 겪고 있던 18세기말의 영국 하층계급에게 프랑스혁명은 그들의 불만을 집단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표현할 계기를 주었다. 당시 영국은 18세기적 입헌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해 재산있는 개혁가가 여전히 주도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당시의 하층계급운동의 발전을 저해했다. 그러나 절대왕권이 붕괴하자 페인의 『인간의 권리』는 종래의 입헌주의를 평등주의로 대치시키면서 영국에서 최초의 민중적 급진운동에 불을 당겼다. 이 운동의 구심점이 된 것이 장인과 숙련공이 주도한 통신협회들이었다. 초기 8명으로 출발을 했으나 연말에는 수 천명의 직공과 소생산자들까지 끌여 들였고, 수많은 비숙련 노동자들도 이협의 회합에 참석하게되었다. 이러한 민중운동에도 약점과 한계는 있었다. 페인의 공화주의적 이념은 정치적 급진성은 있었으나 경제적 평등에 대한 언급을 회피함으로써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등한시했고, 또한 이 운동의 공격의 목표를 전통적인 토지귀족과 서층 이 형성되어 노조를 포함한 그들의 조직활동과 의식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1820년대 말에 오면 하나의 뚜렷한 장인문화 가 출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1830년대와 1840년대에 도래한 최초의 근대적인 경기침체는 고용주들로 하여금 이윤확보를 위한 여러방법을 추구하게 했다. 경기후퇴에 대한 자본가의 단기적인 대응은 임금삭감이었고, 이는 결국 1820년대와는 다른, 좀더 가시적이고 투쟁적인 노동운동을 야기했다. 그리고 1824년~1825년의 결사법 폐지에 힘입어, 1820년대 말부터는 노조결성이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1830년대 초부터는 광부, 건축공, 도자기공들의 노조활동이 상당히 증대했다.크게 보아서, 이렇게 활성화된 1830년대와 1840년대의 노동운동에는 두 국면이 있었다. 첫째가 1820년대 말과 1830년대 초에 대두한 초기 사회주의이한 주류인 오언주의요, 두 번째가 1830년대 후반과 1840년대를 휩쓴 차티즘이었다.로버트 오언이 제시한 산업자본주의에 대안은 사실 복고적인 측면이 많았다. 회사 복지정책과 협동부락의 건설 등 협동을 새로운 사회원리로 강조한 그의 주장은 수공업자와 숙련공들에게 큰 호소력을 가졌고, 그 결과 500여 개에 달하는 대규모의 협동조합이 결성되었다. 하지만 오언주의 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협동조합이나 협동촌락의 확산이 자본주의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것인가 라는 문제를 경시하게 만들었고, 그 한계는 곧 오언주의의 쇠퇴를 가져왔다. 1832년 1차 선거법개정에서 중산계습에만 투표권을 확대함으로서 부르주아 개혁가들과 함께 투쟁하던 노동계급을 실망시켰고, 구빈민 혜택의 범위와 수준을 크게 축소시켜버린 신민법은 정치적 권리에 대한 노동자들의 열망을 한층 더 높였다. 즉, 불평등한 계급적 입법과 부패한 정치구조가 그들이 겪고 있는 모든 해악의 근원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37년에 대두하여 1848년까지 노동계급의 대규모 운동으로 위력을 떨친 것이 차티즘이다. 이 운동은 토지와 교육에 대한 개혁은행법, 곡물법 폐지등 융통성을 발휘한 것이다. 거기에 넷째 요인인 경기회복까지 더해져 19세기 중엽에는 영국 노동운동이 온건하고 체제 순응적으로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2) 대학명에서 2월혁명까지의 프랑스 노동운동프랑스는 17세기 이래 사치품과 고가품을 주로 생산하는 수공예적 직종이 어떤 나라보다 활기를 띄며 성장해서 19세기 산업화에서도 공장제보다는 숙련공이 지배적인 소규모 작업장을 중심으로 생산량의 증대가 이뤄졌다. 즉 프랑스에서는 19세기 말에 가서야 기계화와 대규모 작업장의 출현이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장인들이 도시 노동계급 중에서 수직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가장 지배적인 세력 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 또한 자유방임의 압력을 받음에 따라 비밀조직인 직공조합을 결성했고, 이는 19세기후반에 근대적인 노조가 발전되기 이전의 노동운동의 중심적인 기구였다. 이들 소공업자들은 대혁명 초기의 급진적인 상퀼로트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적어도 1792~1794년에는 혁명정부에 가격제한, 집단행동 등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비록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상퀼로트 운동을 살아남지 못했으나 이러한 경험을 향후의 급진적인 운동에 탄탄한 기반을 마련해준 셈이다. 이러한 과정에 큰 추진력을 제공한 것이 1830년 7월 혁명이다. 루이 필리프의 부르주아 왕정 하에서 이루어진 자본주의의 진전은 격화된 노동운동을 야기했다. 경기침체, 억압적인 국가간섭에 대한 불만으로 한때 무장봉기를 하기도 했다. 새로 등장한 노동자신문들은 자본주의적 착취를 분석하고 전파하는 수단으로서 계급의식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1834년 정부의 탄압에 의해 지하로 숨어들었고, 1840년대에 가서야 다시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1848년 2월 혁명은 정치 영역에서 배제되어있던 노동자들의 참여를 크게 촉진시켰다. 그러나 법과 질서의 기치를 앞세운 정치적 탄압은 민중운동의 예봉을 꺽는데 성공했다.다시 말하면 상퀼로트로부터 출발한 프랑스의 근대적인 노동운동해 고무된 독일의 자유화에 힘입어 대규모 정치적 노동기구 인 전독일 노동자 우애단을 결성하여 점진적 개혁을 통한 수공업자와 소생산자의 권익보호를 겨양한 실질적인 운동을 지향했다. 하지만 3월 혁명의 실패로 정치적, 법률적 탄압으로 해체되거나 혹은 순수한 비정치적 단체로 존재해야만 했다. 따라서 19세기 독일 노동운동은 성숙간 계급운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한편 미국은 19세기 전반에 산업화가 막 시작되어 기존의 사회관계에 변동을 가져옴에 따라 사회, 경제적 하락을 경험하기 시작한 수공업자와 소생산자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태동했다. 고용주와 고용인들 사이의 도덕경제 적 의무와 책임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부터 섬유와 제화 등의 직종에서 대규모 중앙집중적 작업장이 등장함에 따라 이전의 소생산자와 직공, 그리고 견습공들의 지위가 위협받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노조결성과 파업, 그리고 정치적 활동을 띠게 되는데 기여했고, 비록 3년밖에 가지 않았지만, 미국전역을 망라하는 전국노조동맹이 결성되기도 했다. 또한 최초의 노동자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조결성과 정치활동은 1837년에 도래한 심각한 경기침체로 인한 대규모의 실업 때문에 급격히 쇠퇴했고, 1850년대에야 다시 활기를 회복했다. 이시기의 노동운동은 정당한 임금, 공정한 선거,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 반독점 등 평등권 실현에 있었다. 19세기 말의 성숙된 자본주의 하에서 이러한 평등권에 대한 요구가 노동계급운동의 구호로서 더 이상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이 뚜렷해졌을 때에야 비로소 사회주의 이념이 미국 노동운동에서 점차 더 큰 호소력을 갖게되었다.3. 19세기 중엽의 번영과 노동운동(1848~1870년)자본주의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860년대였다. 이 자본주의는 전반적인 사회안정에 기여했다. 즉, 노자 관계에서 볼 때, 차티즘과 2월혁명의 실패는 19세기 초반이나 19세기 말엽에 비하여 온건한 노동운동이 도래하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영국 같은 경우 영국의 기업가다.
    인문/어학| 2004.05.12| 6페이지| 1,500원| 조회(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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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 중국인도 다시 읽는 중국 사람 이야기
    중국인도 다시 읽는 중국사람 이야기얼마 전 우연히 참새는 사투리로 울까, 표준어로 울까라는 엉뚱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정확한 답은 모르지만 아마도 사투리로 울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때 전반적인 의견들이었다. 이유인 즉슨 지역마다 먹는 것이 틀릴 것이고, 그것을 소화시키는 장기 또한 틀릴 것이니 울 때 나는 소리 또한 장기의 영향을 받아 틀릴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 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인간 사회에 적용시켜 봤을 때 인간들이 지역적 특징을 가지는 기질을 가진 것을 보면 아마 참새도 그러할 것이다.우리나라 같이 작은 나라에서도 지역마다 기질적 특징은 있다. 서울사람들을 깍쟁이라 하고 충청도 사람들을 의뭉스럽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더 큰 나라인 중국이야 말로 뚜렷한 지역적 기질을 가진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이 책에서는 그 지역의 역사적 사실, 사회적 환경으로 인해 가지게 된 그 지역 민들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나열했다.1, 작은 황제 북경인북경은 중국인들 마음속에 처음부터 수도였을 것이다. 마음의 고향이라는 별칭까지 얻은 것을 보면 말이다. 북경이라는 수도가 13억 중국인들 마음속에 자리잡는 데에는 결코 짧은 시간 가지고는 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사람들 마음의 수도가 되는 데에는 수 백년간 오랑캐의 침입을 견뎌야했고, 많은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야 했을 것이다.이민족의 침입을 견디고, 서양의 침입을 견뎌내어 지금의 새로운 북경이 탄생한 것이다. 이런 새로운 변화, 문화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개방적인 성향도 북경이라는 도시가 겪은 풍파에 자연스레 적응된 기질이 아닐까 싶다. 북경은 남의 것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관용이 있다. 물론 자신의 것이 최고라는 오만이 깔려있는 상태에서 이긴 하지만 말이다. 자신의 것이 최고이니 별거 아닌 남의 것이야 관용으로 받아 들여주는 것이다. 이렇든 저렇든 세계화를 외치는 현 사회적 상황으로 봤을 때 아주 유리한 마인드임에는 분명하다.북경. 수도라 함은 황제의 도각만을 했던게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인상깊었던 내용은 나라가 흥할 때는 같이 흥해도 나라가 힘들 때 또한 같이 힘들어야 한다는 것이 수도 북경이었다 라는 내용이다. 어쩌면 북경인 자체가 곧 수도이고, 중국전체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경인들의 자신감은 여기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은 가장 최전선에서 역사의 서글픔을 맛보고 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황제와 함께 한 삶은 소박한 서민들을 허풍이나 체면을 중시하는 신기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자신들이 마치 작은 황제 인 마냥 없어도 있는 척 하는 오늘날의 신기인이 된 것이다. 북경인들의 과시욕은 마치 북경을 말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위험수위이다. 훗날을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사치를 하기 위해 돈을 벌고, 아끼고 한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세월이 바뀌고 다른 나라의 문화가 들어 온다해도 그들이 가진 생각은 아직까지 청조의 유교적인 것들이 아닌가 싶다. 체념을 중시여기는 당시처럼 어떤 뚜렷한 이상은 없지만 체면치레를 하고야 마는 기생적인 유교덕목을 꿰차고 수도 북경에서 북경인이라는 자만심으로 살아가는게 아닌가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2, 시대가 만든 상해인상해는 지금까지 도시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소비위주의 도시에서 근대 도시로 탄생한 최초의 도시이다. 전통 농업사회에서 공장이 난무하고 장사꾼으로 시끌벅적한 지금의 상해가 된 것은 불과 백 여년 전 일이다. 보통 상해인 하면 자기 이익을 챙기고, 제멋대로이고, 배타적이며, 엉덩이가 가볍고, 이기적이라고 이야기한다. 한 인간의 인성만을 따져봤을 때 상해인은 좋은 쪽에 속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 시대, 어쩌면 청조가 서양에게 바친 재물로 전락해버린 상해에서 그들이 살수 있는 길은 자신의 인성을 바꾸는 길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 3자의 입장에서 사람들이 상해인을 욕하고 비난한다고 하여도 상해인 나름으로는 그 역사를 딛고 이겨온 훈장으로 여겨질 것이다.상해인이 지금의 상해를 만들고, 상해가 지금의 상해인이 있게 상해인의 잠재적인 기질이 조계지 나름의 법을 이겨내지 못했다면 지금의 상해가 없는 것이고, 지금의 시장경제의 상해가 있기에 지금의 기질을 가진 상해인이 됐다는 것이다. 이 상관관계는 상해인이었기 때문에 성립될 수 있었을 것이다. 초기 조계지가 되었을 때 주객이 전도되어 각 관공서에는 개와 중국인은 출입금지 라는 푯말이 세워졌다. 이런 상황을 이기며 견뎌온 게 지금 상해인의 기질이다.상해인은 의리보다는 실리다. 백 여년 동안의 사회 상황 속에서 의리를 지키기에는 너무 벅찬 것이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욕하는 실리주의자가 되었지만 이 실리주의가 지금까지 상해인을 버티게 했고, 중국에서 알아주는 부자가 되어 만족하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자부심을 낫게 했을 것이다.상해인은 다른 중국사람들 보다 빨리 서양의 우월성을 인정했다. 그래서 그들의 기술을 받아들이고, 자신들도 자신의 이익을 챙일 줄을 알았던 것이다. 유교덕목을 따지던 다른 중국인들이 상해인들처럼 기(器)를 도(道)로서 받아들일 줄 알았다면 중국은 지금에 와서야 뜨고 있는 나라로 되는 게 아니라 벌써 백여년 전에 뜬 나라가 됐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상해인은 경제에 있어서는 선구자이다. 그들의 생활, 즉 자신을 위해서 벌고, 자신을 위해서 쓰는 어쩌면 서양의 개인주의를 모방한 듯한 그들의 생활을 중국식으로 받아들여 변화를 시도했다면 중국의 경제는 상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국전역에 퍼져 지금의 중국보다는 더 나은 모습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3, 자주적 개방 광동인광동인은 아열대 기후 특유의 호쾌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좋은 기후와 풍부한 물자의 영향일 듯 싶다. 이런 넉넉한 성격이 음식문화에도 영향을 주어 먹는 것은 광동에서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른 지방보다 풍부하고 다채로운 요리들이 많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좋은 기후와 풍부한 물자의 영향으로 광동인은 장래적 걱정보다는 먹어서 좋으면 그뿐이라는 넉넉한 심성을 지녔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는 것이다. 옛일이 어떠하더라도 시대래가 있다. 서양열강의 침입으로 광동은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광동 특유의 넉넉함으로 자신들의 것으로 승화시켰다. 이것이 제일 잘 들어 나는 부분이 요리법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광동민 뼛속깊이 새겨져 봉건쇄국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개방적인 시장경제를 지향했는지도 모른다.상해가 청조의 나약함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서양에 개방을 했다고 치면, 광동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 개혁, 개방 당시에 광동성 경제특구 조례 및 그 유관 규정을 통과시켰다. 정부로부터 광동의 특수한 지위를 정식으로 인정받고 자주권과 자결권을 얻어낸 것이다. 상해가 타의에 의한 변화였다면 광동은 다분이 자의에 의한 개방인 것이다. 이것이 시점이 되어 광동은 결국 상해를 넘는 경제 도시로 성장을 했고 결국은 상해에서 기술을 배우러 오는 단계까지 간 것이다. 이제 중국경제의 중심은 광동이다. 광동의 실리적인 생각이 전 중국을 뒤엎었다. 예전의 공부를 열심히 해서 관리가 되자 는 의식이 흔들리고 있다. 이른바 경제북벌이고 계획경제에 타격을 준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이 광동민의 정보, 지혜, 근면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구속이 적을수록 자연스럽게 표현할 기회가 많아지는 체조경기의 자유연기종목처럼 광동은 제재 없이 앞만 보며 자신들의 노력으로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제는 경제 북벌에서 관념의 북벌로까지 영향을 미쳤다. 예전의 돈은 온갖 악의 근원 이라는 뿌리깊은 유교적 덕목을 깨고 돈을 이성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이렇게 새로운 것을 유연하게 받아들일 줄 알고 그것을 기질적인 근면함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줄 아는 것은 비단 광동민으로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중국의 경제성장 속도를 봐도 많은 사람들이 제2의 광동민, 제3의 광동민이 되어 받아들이고 전 중국을 거대한 광동으로 만들 것이다.4, 유교적 경제 발전, 산동인산동 지역은 춘추시대의 제나라와 노나라의 영토였다. 제와 노는 상반된 문화를 가지고 경제적, 정치 외교적, 군사적으로 충돌을 겪으면서 를 접하고 있던 제나라는 경제발전과 농업을 중시하는 소비 장려의 나라였고, 비옥한 땅을 가지고 중원과 접한 지리적 환경을 가진 노나라는 농업을 숭상하는 나라였다. 이 문화가 합쳐진 체 제나라의 문화가 기반이 되었더라면 현실주의,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장사꾼적인 기질을 가진 산동인이 되었을 것이다.역사적으로 보면, 제나라의 강태공이 노나라에 건너가 노나라가 개방적 성향을 띄는데 영향을 주었고, 노나라의 공자가 유교적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제나라에 건너가 끊임없이 제의 왕을 설득하여 결국은 전 중국의 사상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춘추시대부터 산동인의 기질은 제와 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산동인을 가리켜 질박하고 의를 생각할 줄 안다. 소박하고 순수하다. 정 많고 돈독하다 라고 사람들은 이야기 하지만 시장경제의 여건에서 볼 때는 부합되지 않은 기질이다. 결정적으로 상업발전에 심리적 장애요소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광동과 달리 중앙정부의 특혜를 전혀 받지 못한 곳이기도 하다. 장점이라면 고통을 참고, 이길 줄 아는 정신뿐이었다. 이런 정신 역시 뿌리깊은 유교적 전통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들은 고진감래의 성실성을 지니고 있어 중국민들은 산동민의 상업적 특질을 가리켜 성실파라고 한다. 결국 이런 성실파의 노력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결국 북경의 채소시장을 독점하고야 마는 성공을 거둔 것이다. 광동에서 할 수 없는 일 제외하고는 뭐든 할 수 있다 라는 제한적인 자신감을 보인다면 어려운 여건에서 헤쳐 나온 이들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한다 라는 절박한 자심감을 보인다. 이런 마음으로 결국 북경거리의 자동차를 산동차로 뒤엎어버린 것이다.이들은 유교사상의 배출지인 만큼 교육을 중시한다. 공부보다는 돈을 중시하는 광동인과의 차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같은 돈을 벌어도 기품이 있고 교양이 있어 보이는 것이다. 역사상 최초의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던 역사적 배경을 띄고 춘추시대부터 차별 없는 교육을 주장하며 인재양성에 힘써왔다. 옛날엔 그 인재를 관리로 쓰여졌고, 지금은 경제시장의
    독후감/창작| 2004.05.12| 5페이지| 1,500원| 조회(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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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정] 유교사상에 입각한 전통상례
    ▶유교 사상에 입각한 전통적인 상례상례(喪禮)란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순간부터 시체를 매장해 묘지를 조성하고, 근친들이 그 죽음을 슬퍼하여 근신해 복을 입는 방법과 일정한 기간 동안 복을 다 입고 평상 생활로 돌아갈 때까지 각종 제례의 의식 절차를 정한 예를 말한다. {) 『전통 상례의 제수에 관한 연구』 조민숙상례의 경우 결혼의례나 출산 의례에 비해 그 관행이 많이 유지되고 있어 통과 의례 가운데에서 가장 전통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유교식 상례가 정착한 것은 고려말 조선 초기부터이다. 고려말에 송나라의 주자 가례가 도입되었고 조선조 초ㆍ중기에 정암 조광조의 유교식 개혁정치가 실시됨에 따라 그것이 강화되었다.{) 『한국인의 전통과 사상』 차용준이렇게 전통 상례로서의 유교식 예절이 엄격히 정착된 후 간소화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부터 상례를 간소화 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높더니 5ㆍ16 군사정변 후 군사정부가 실정법으로 금지시키는 조치를 단행했다. 그 법이 1973년 6월 1일부터 시행된 `가정의례준칙{) 가정의례준칙 : 혼례, 상례, 제례, 회갑연 등 가정의례를 집행함에 있어 허례 허식을 일소하고, 그 의식 절차를 합리화함으로써 낭비를 억제하고 건전한 사회기풍을 진작할 목적으로 제정한 대통령령 6680호로 모든 국민은 가정 의례의 의식 절차를 이 준칙에 따라 엄숙하고 간소하게 행하도록 되어있다.`이다.상례는 다른 통과 의례와는 달리 당사자가 주체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자연히 상례는 의례 거치는 당사자가 아닌 살아남은 자들에 의해 치러진다는 특징일 지닌다. 이런 특징에 따라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통과의례의 일정한 과정을 겪는 또 다른 특징을 지니게 된다. 상례를 이런 입장에서 보면 임종(臨終), 고복(皐復), 사자상(使者床)까지의 의례가 죽은 자를 이승에서 분리시키는 분리 의례라면, 그 뒤 탈상까지는 영혼이 이승을 떠나서 저승의 성원으로 통합하기까지의 전이기에 해당된다.상례를 다루는 유교에서는 죽음을 하나의 필연적인 사실로 인정하고, 생명이 있는 곳에 죽음이 있고 시초가 있으면 종말이 있는 것이므로 이는 자연의 이치로서 죽음도 이 자연의 현상에 일부연의 이치로서 죽음도 이 자연의 현상에 일부일 뿐이고 인간의 우주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것만이 올바른 도리라고 주장한다. 이렇듯 유교에서의 죽음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 非現實로 변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生時와 존재양태의 차이는 있으나 현재로 존재한다고 믿기에 유교의 상례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여기에서는 유교의 『禮書』에 나타난 상례의 의식절차를 다뤄보겠다. 상례의 의례 절차는 초종, 습염, 소렴, 대렴, 성복, 조상, 분상, 치장, 천구, 발 급묘, 반곡, 우제, 졸곡, 부제, 소상, 대상, 담제, 길제 이렇게 모두 십구 단계로 되어있다.{) 『전통적인 관혼 상제의 연구』 장철수(1) 초종(初終)초종이란 보통 초상을 예문에서 쓰는 말로 이의 본 뜻은 사람이 운명하는 순간부터 졸곡까지를 이르나 일반적으로 쓰일 때는 운명에서 전까지를 의미한다. 운명에서 전까지 이르는 절차를 나눠보겠다.첫째가 천거정침(遷居正寢)이다. 환자의 병세가 위급하여 회춘할 가망성이 없다 판단되면 정침 즉 안방으로 옮기고, 이는 객사를 방지하여 영혼이 방황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둘째가 유언이고, 셋째가 임종이다. 넷째로는 속광(屬 )이고 이는 햇솜을 환자의 코와 이사이에 두고 숨이 끊어지면 입과 코를 막아 불순물을 막기 위한 것이다. 다섯째로는 수시(收屍)로서 숨이 끊어지면 눈이 감기고 몸을 바로 한 뒤 병풍으로 가리고 촛불을 밝힌 다음 향을 피우고 곡(哭)을 하는 것을 말한다. 여섯째로는 고복(皐復)으로 죽은 자의 웃옷을 가지고 지붕 위로 올라가서 옷을 휘두르면서 북쪽을 향해 `모월 모일 별세`라고 크게 소리지르는 것이다. 일곱째로는 사자밥을 차려 대문밖에 놓고, 여덟째로 발상을 하여 초상을 알리고 상주가 상례를 주도한다.(2) 습(襲)입관을 하기 전에 시신을 깨끗이 닦고 수의로 갈아 입힌 후부터 입관할 때까지의 절차로 염습 또는 염이라고도 한다. 시신을 정결하게 씻기고 처음으로 제사를 올린 후 반함이라 하여 시신의 입에 구슬 혹은 엽전과 쌀을 넣어준다.(3) 소렴(小殮)반함이 끝나고 난 다음 시신에 수의를 입히는 절차를 말한다. 소렴이 끝나면 영좌를 설치하고 혼백{) 신주를 만들기 전에 마포나 백지로 접어서 만드는 임시 신위를 말한다.을 모신다. 그 후 명정을 만든다. 이는 고인의 명찰과 같은 것이다.(4) 대렴(大斂)대렴포로 싸고 묶어서 입관하는 의식으로서 소렴을 한 다음날 곧 운명한 지 삼일째 되는 날 새벽 동틀 때 하는 의식이다.(5) 성복(成服)상주 이하 상인이 각자의 복재에 따라 상복을 입는 의식을 말한다. 성복은 대렴한 다음날인 운명한지 나흘째 되는 날에 성복한다.(6) 조상(早喪)흰 옷차림으로 전(奠){) 전을 올린다는 것은 염습(殮襲)이 끝날 때까지 죽은 영혼을 의지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전 은 주상(主喪)이 올려야 하지만 슬픔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직접 행하지 못하고 집사(執事) 가 대행한다. 그러나 집사는 상제를 대신하기 때문에 절은 하지 않는다. 전을 올릴 때에는 시 신(屍身)을 가린 병풍 앞이나, 시신의 동쪽(오른쪽) 어깨가 닿는 곳에 상(床)을 놓고 흰 종이 를 깐 다음 그 위에다 술과 포(脯)와 식혜(食醯)·과일 등의 제물을 죽은 사람이 생전에 쓰던 그릇에 담아 올린다.을 올릴 것을 준비하고 이때 부의로는 돈과 옷감을 준비해둔다.(7) 문상(問喪)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이 부모 상의 부음을 들으면 곡을 한 뒤에 옷을 갈아입고 길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8) 치장(治葬)말 그대로 묘지를 꾸미는 것을 말한다.(9) 천구(遷柩)빈소에 모셨던 영구를 대청으로 옮기는 것을 말하고, 이는 발인하기 하루 전날 천구할 것을 고한 후 대청에 옮겨놓는다.(10) 발인(發靷)시체를 묘지에 옮기는 의식으로 영결식이라고도 한다.(11) 급묘(及墓)시체를 매장하는 것을 말한다.(12) 반곡(反哭)신주를 영좌에 봉안하고 혼백을 상자에 담아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하며 반혼이라고도 한다.(13) 우제(虞祭)시신이 땅 속에 매장된 후에도 그 영혼이 안정을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까봐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내는 제사로 여기서 우는 혼령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우제는 초우제, 재우제, 삼우제로 세차례 지내는데, 초우제는 모신당일, 재우제는 초우제 지낸뒤 십간 중 유일이 되는 날에, 삼우제는 재우 지낸 후 돌아오는 첫 강일{) 갑, 병, 무, 경, 임에 해당한는 날이다.
    사회과학| 2004.05.12| 4페이지| 1,000원| 조회(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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