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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1920~1930 한국의 사실주의 고찰
    - 목 차 -Ⅰ. 서 론Ⅱ. 한국의 사실주의 고찰1. 사실주의의 개념 및 발생 배경2. 한국의 사실주의 유입경로 및 정착과정3. 한국 사실주의의 특징Ⅲ. 한국 소설문학의 상층민과 하층민 리얼리즘의 수용양상1. 상층민의 리얼리즘 문학1) 상층민 리얼리즘의 시대배경과 개념(1) 상층민 리얼리즘의 시대적 배경(2) 상층민 리얼리즘의 개념2) 상층민 리얼리즘 양상과 그 작품적 고찰2. 하층민의 리얼리즘 문학1) 하층민 리얼리즘의 시대배경과 개념(1) 하층민 리얼리즘의 시대적 배경(2) 하류층 리얼리즘의 개념2) 하류층 리얼리즘 양상과 그 작품적 고찰(1) 농민(영세 소작인, 마름?지주)(2) 유랑민(광부, 유랑농민)(3) 도시 빈민(도시 노동자, 여급, 거지)Ⅳ. 한국 사실주의 문학의 의의와 한계Ⅴ. 결론Ⅰ. 서 론문학의 영역에 있어서 여타의 사조나 사상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사실주의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 이유는 사실주의라는 개념이 그 정리에 있어서 쉽게 단정 지어 논의 될 수 없는 광범위하고 모호성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더욱이 1920-30년대 서구의 여러 문예사조의 유입에 있어 사실주의만의 단일하고 독특한 성격을 유지하며, 그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고 살리기에는 당시 우리의 역량이 너무도 부족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사실주의를 이해하는 데는 그 어려움이 더하다 할 수 있겠다.이에 본고에서는 1920-30년대에 우리 문학에 영향을 끼친 서구의 사실주의의 기본개념을 설정하고, 그 발생배경과 유입과정에 대해 알아보며, 우리 문학과 사실주의가 어떠한 모습으로 융합되었는지 한국의 사실주의 특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본고의 목적은 서구에서 유입된 사조가 아닌 우리의 사실주의로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즉 20-30년대 우리의 시대상과 맞물려 어떠한 모습을 보였는지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고찰해 보는 것이다. 연구 방법으로는 우선 20-30년대의 소설 문학에서 보여 지는 흐름을 상층민의 사실주의와 하층민의 사실주의로 설정하여, 그 기본적인 개념과 인의 손과 발을 묶어놓았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지식인은 가난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 시기 지식인의 실업문제는 곧 가난과 직결되는 고통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시대 한국의 상층민 리얼리즘 소설의 특징을 소시민적 지식인의 삶을 그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 연구에서의 상층민이란 단지 재산이 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닌, 아는 것이 많아서 더욱 좌절할 수밖에 없는 지식인들까지 그 대상으로 본다고 하겠다.2) 상층민 리얼리즘 양상과 그 작품적 고찰(1) 염상섭의 〈삼 대〉1931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된 삼대는 염상섭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돈에 민감하며 유교적 계통을 따르려는 보수적 성격의 구세대의 전형인물인 조부 조의관과 지식인이며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제자를 취하고 기방에 드나드는 방탕한 모습을 보이는 위선적인 그의 아들 상훈, 그리고 식민지 세대의 전형이며 우유부단, 중도적 가치관을 지닌 손자 덕기 이 三代에 걸친 가족과 그 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잠재되어 있던 조씨 가문의 불화와 암투가 정면에 드러난 것은 조부의 임종을 앞두고 생긴 재산 분배 과정에서 인데, 조의관의 후취인 수원집과 그를 조의관에게 소개해준 최참봉 등은 재산을 가로챌 욕심으로 유서 변조를 계획하고 조의관을 독살한다. 의사들의 배설물 검사로 비소 중독이 판명되자 상훈은 더 명확한 사인 규명을 위해 사체 부검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집안 어른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범인 찾기도 흐지부지되고 만다. 그러나 손자 덕기가 나타나 수원집 일당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재산 관리권은 덕기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다. 상훈은 법적 상속자인 자신을 건너뛰고 아들인 덕기에게 그 권리가 넘어가지 유서와 토지문서가 든 금고를 훔쳐 달아나다 경찰에 붙잡힌다. 그리고 덕기도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자신의 친구 병화에게 자금을 대주었다는 혐의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다.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병화가 속한 조직의 리더격인 장훈이 비밀 유지를 위해 코카인으으로서 그의 發狂은 당시의 지식인과의 회의적?절망적인 심정을 상징해 보여준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와 사회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유교적?봉건적 지식인인 김광억’은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미쳐버리게 되지만, 근대사회와 시대의 흐름을 어느 정도 지각한 나 는 극단적인 狂症보다는 신경쇠약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신문화의 유입, 민족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신?구 그리고 봉건성과 근대성의 대립이라는 불안한 사회 모습을 두 인물을 통해 표현해 냈다고 볼 수 있다.(3) 채만식의 〈태평천하〉1938년《조광》에 연재된 장편소설로 윤직원(두섭)은 교양의 바탕이 없는 중인 출신으로 한말에 돈을 모아 지주의 대열에 끼어들게 된다. 권력의 배경을 가진 양반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회가 혼란했던 한말에 권력층인 지방 수령으로부터 토색질을 당하였고, 화적들로부터도 약탈을 당했으며, 그의 부친은 화적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이 때문에 그는 사회에 대한 피해 의식에서 오는 불신과 증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자기 방어 의식을 깊게 간직직하고 살아간다. 그는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 모든 사회 제도를 부정하고 적대시하며 양반의 수탈과 화적 떼의 행패는 그로 하여금 권력층과 하층민을 동시에 적으로 규정하게 했다. 윤직원의 아들 윤창식은 개화기에 고등 교육을 받은 세대였으나, 일제 치하가 되면서 그 교육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사회에 대응하여 현실을 극복해 나가는 방식을 찾지 못한 채 문제의식이 마비된 하나의 잉여 인간이 된 것이다. 윤창식의 맏아들 종수는 조부의 기대와는 달리 부친과 같은 유형의 인물이 되어가고 있고, 윤직원이 유일하게 기대하던 둘째 손자 종학은 오히려 조부가 가장 증오해 마지않은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을 그린 풍자적인 소설이다.“......착착 꺽어 죽일놈!...... 그 놈을 내가 핀지히여서, 백년 지녁을 살리라구 헐걸! 백년지녁을 살리라고 할살리라구 헐 테여...... 오냐 그놈을 삼천석거리러나는 하층민의 리얼리즘 양상을 살피고 그에 따른 작품을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1) 농민(영세 소작인, 마름?지주)1930년대 한국 농촌의 현실은 일제의 토지 수탈 정책으로 인하여 상당수의 농민들이 토지를 수탈당하거나 소작인으로 전락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소작인들은 과중한 소작료 갈취로 인하여 빈궁과 부채에 시달렸으며, 결국 그러한 사회현실은 농민을 이주민으로, 빈민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농민들을 작중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들은 이러한 농촌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작품화하였으며 궁핍으로 허덕이는 농민의 생활과 농촌의 비극을 통하여 일제 식민정책의 모순과 부조리를 우리에게 보여준다.농민의 유형은 또한 영세 소작인과, 토지와 부를 가진 자인 지주, 이 두 계층 소작인과 지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마름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들 간의 대립관계가 작품에서 형상화된다.영세 소작인들은 순박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사회적 상황은 그들을 극단적 상황으로까지 내몰게 된다. 이들에게는 윤리의식이 부재하다. 윤리 의식보다는 1차적인 생계 해결이 급급하며 이 작중 인물들은 생존을 위하여 도박 등에 빠져들거나 도둑질을 하고 매춘, 심지어는 아내를 팔기도 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이것들은 소설 작품을 위한 비극적 상황이기도 하지만 궁핍의 극한 상황에서 당 시대 농촌 현실의 단면이며 개인적인 문제를 떠나 사회적 문제라 할 수 있다.농촌 현실에 대한 작중 인물 중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마름과 지주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영세 소작인을 착취하며 이것으로 대립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이들의 대립은 소설 내에서 이야기의 긴장감을 주는 동시에 당대 농촌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요소이다. 지주들은 욕심이 많고 고집이 세며 제멋대로인 성격으로 표현된다. 이들은 경제적인 여유를 앞세워 약한 농민들을 괴롭히고 착취하면서 자신의 이익과 욕구를 충족시킨다.여러 작품에서는 지주보다 마름의 횡포가 극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소작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비인간적인 횡포를 일삼는 인물로 묘사되기도 다. 번번이 해도 번번이 실패하는 밤피할궁리로하야, 그의 좁은 가슴은 쥐어?기엇다 그럴사이에 그 궁리는 나서지안코 제신세가 어?케 불상하고 가엽슨지 몰랏다. 수백리밧게 부모를 두고 싀집을온일, 온뒤로 밤마다 날마다 당하는 지긋지긋한 고생, 더구나 오늘 싀어머니한테 두들겨 마진일이 한업시설업고 슯허서 솟아오르는 눈물을 것잡을수업섯다.노동의 피로에 이어 밤의 공포가 엄습해 오는 심리현상을 읽게 된다. 작자는 이 작품에서 순이라는 시골소녀가 얼마나 짐승같이 노역을 하고, 밤이면 짐승처럼 혹사당하는가를 독자에게 각성시키고, 인습의 노예가 된 순이의 운명을 동정하게 한다. 물론 우리는 순이의 불행한 원인이 더 근본적인 곳에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농촌사회가 오랫동안 겪어 온 ‘가난’이다. 그리고 그 가난에서 나온 무지와 노예적인 인권 경시의 민며느리라는 인습을 이어 온 것이다. 그러나 농촌의 빈궁은 작가에게 풀 수 없는 악순환의 소재인 것이다. 어린 나이에 견디기 힘든 노동과 핍박은 식민지 시대 힘없는 우리민족과 수탈을 일삼는 일제로 대비되어 생각된다. 즉 작품에서 시어머니나 남편으로 표현되는 힘을 가진 자. 즉 일제의 핍박과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할 수 없는 약한 자. 순이. 즉, 우리의 하층민의 비참한 상황이 그 당시대의 모습을 드러낸다.(2) 유랑민(광부, 유랑농민)앞에서 보았듯이 농민의 경우 땅을 수탈당하여 소작인이 되었다. 그나마 소작세로 갈취당하고 빚만 늘게 되면 경작하던 땅마저 빼앗기고 아사 상태 직전까지의 지경에 이르어 결국 고향과 터전을 버리고 유랑농민이 되거나 금광을 찾아들어 광부가 되기도 했다.농민의 타락은 그들의 잘못이 아닌 식민지 치하 농촌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라는 시대 상황으로 인한 것이므로 더 비참하고 안타깝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유랑민의 생활은 결국 농사밖에 모르던 농민의 생존 터전을 빼앗고 유랑민으로 내모는 일제의 가혹한 수탈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금광을 찾아 떠나는 농민들 또한 허황된 벼락부자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기
    인문/어학| 2007.02.13| 24페이지| 3,000원| 조회(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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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톨스토이 세아들
    줄거리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재산과 토지를 나누어 주며 말했다. "나처럼 살아가도록 하여라. 그렇게 하면 행복해질 테니까." 제 몫을 나누어 받은 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나 자기 멋대로 살기 시작한다.첫 번째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유쾌하게 살기로 마음먹는다. 일 년을 살고, 이년을 살고, 10년 20년을 살았으나 아버지에게 나눠받은 재산을 모두 써버리고 아버지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의 청을 무시하자 첫째아들은 값비싼 물건으로 아버지의 관심을 사기위해 선물한다. 첫째아들의 노력에도 아버지는 끝까지 아들의 애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에게 욕을 하기 시작했다."아버지는 지금 제게 아무것도 주시지 못할 거라면, 왜 그때 제 몫을 나눠 주셨으며 그것으로 한평생 넉넉히 살 것이라고 했습니까? 이제까지 제가 맛본 기쁨과 즐거움도 지금 겪고 있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건강이 날로 나빠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 불행의 원인은 누굽니까? 바로 아버지입니다. 행복이 제게 해를 끼친다는 것을 아버지께선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위험을 주의시키지 않고, 그냥 '나처럼 살아라, 그러면 만사가 잘 될 테니까'라고만 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하시던 대로 살면서 여러 가지 즐거움에 몸을 맡겼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본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살아도 될 만큼 충분한 돈이 있었지만, 저는 모자랐던 거지요. 아버지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아버지는 제 적입니다. 저를 속인 아버지를 저주합니다. 아버지 얼굴은 다신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버지를 증오할 겁니다. 라고 첫째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나버린다.시간이 흐르고 아버지는 첫째에게 나누어준 몫을 둘째에게도 똑같이 나눠 주었다. 그때도 아버지는 "나처럼 살아가도록 하여라. 그렇게 하면 행복해질 테니까." 라고 말할 뿐이었다. 둘째아들은 몫을 나눠 받고도 그게 기뻐하지 않았다. 형에게 일어난 일을 잘 알고 있었기에 형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 둘째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첫째와 다르게 이해한다. 그리고 둘째아들은 재산을 불리기로 마음먹는다. 아버지에게 재산을 불리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했으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둘째아들은 아버지가 어떻게 재산을 모았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했지만 알아낼 수 없었다.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재산을 모을 수 없게 되자 아버지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둘째아들은 가진 재산이 완전히 바닥났을 때 자살해 버린다.아버지는 셋째아들에게도 두 아들에게 준 것만큼 재산을 나누어 주고 같은 말을 되풀이 한다. "나처럼 살아가도록 하여라. 그렇게 하면 행복해질 테니까." 아버지에게 몫을 나누어 받은 셋째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자신의 큰형은 아버지처럼 산다는 것이 쾌락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돈을 모조리 써버리고, 둘째형은 아버지의 말을 잘못 이해하고 파멸의 구덩이로 빠져버렸다. 아버지의 말씀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셋째아들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본다. 자신이 알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태어나기까지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으며, 또 자기라는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기라는 것을 만들고 키우면서 이 세상의 모든 행복을 맛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두 형을 위해서도 마찬가지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아버지를 본받는다는 것은 이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단정했다. 그때 셋째아들은 "나처럼 살아라." 하신 아버지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남에게 좋은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을 때 아버지가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이제야말로 우리는 다시 함께 살면서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어서 내가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가서 나를 본받는 자는 정말로 행복하게 된다는 것을 일러 주고 오너라." 그래서 셋째아들은 자신과 같은 젊은이들을 찾아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 후로 자식들은 자기의 몫을 나누어 받았을 때 많이 받은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처럼 살고 행복하게 된다는 것에 대해 기뻐하게 되었다고 말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톨스토이 세 아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종교관에 대해서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단편선에 실려 있는 다른 작품들도 이러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수업시간을 통해 알고 있는 톨스토이는 당시의 타락한 그리스도교를 부정했다. 이전의 것을 버리고 원시 그리스도교로 복귀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톨스토이는 그의 신념을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톨스토이가 작품에서 나타낸 세 아들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인생이다. 이처럼 톨스토이는 우리들에게서 어떠한 이야기를 하는지 하나씩 살펴본다.첫 번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잘못 이해하고 쾌락을 쫓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아버지가 첫째에게 전한 "나처럼 살도록 하여라. 그렇게 하면 행복해질 테니까"를 잘못 이해한다.제 몫을 받은 첫째아들은 '아버지는 유쾌하게 사셨으니까 아버지처럼 유쾌하게 살려면 세상의 즐거움을 쫓으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첫째 아들은 세상의 쾌락을 쫓아 살기 시작한다. 이야기 속의 첫째아들처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첫째 아들과 같은 즐거움을 쫓아 살기를 원한다. 자유롭게 눈치 보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것들을 맘껏 즐기기를 원한다. 대중매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값비싼 것들, 남들이 가보지 못한 유토피아 같은 공간으로의 여행, 남들보다 좋은 핸드폰에 폼 나는 옷과 액세서리들로 자신을 꾸미는 것 등은 현실을 사는 우리들의 이상향이라고 여기는 것들이며 인생의 최종목표가 이 같은 쾌락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쾌락을 쫓은 그의 결말은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된다.그렇게 1년을 살고, 2년을 살고, 10년, 20년을 살았는데 행복해지기는커녕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을 모두 탕진해 버리고 빈털터리가 된다. 그러자 첫째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하기 시작한다. "아니 나는 아버지처럼 유쾌하게 살려고 받은 재산으로 인생을 즐기면서 살았는데 왜 행복해지지 않지, 오히려 모든 것을 잃고 불행해졌다고……."이 모든 게 아버지 때문이야! 아버지는 처음부터 내가 이렇게 불행해질 줄 아셨어, 왜냐하면 아버지는 인생을 즐기면서도 행복해질 만큼 충분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게 나누어주신 돈은 즐기면서 행복해지기에는 부족한 액수이기 때문이야"첫째는 아버지를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운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아버진 제 적입니다. 될 대로 되라지. 저를 속인 아버지를 저주합니다. 아버지 얼굴은 다신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버지를 저주합니다!"라고 이야기 한다.아버지는 첫째와 똑같은 몫을 둘째 아들에게도 나누어 준다. 그때도 다만 "나처럼 살도록 해라 그렇게 하면 너도 행복해질 테니까"라고 했을 뿐이었다.둘째 아들은 형처럼 아버지의 말을 잘못 이해해서 쾌락만 쫓는 생활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형처럼 쾌락에 빠져 사는 대신 받은 재산을 최대한 많이 늘리고 싶었다. 아버지보다 더 부자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재산을 모아 힘을 기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둘째 아들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재산을 모으는 것이 곧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믿고, 모든 수단을 써서 재산을 늘려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돈이 모아지지 않게 되고 그러자 둘째도 아버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한평생 구두쇠로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부자가 될 수 있었다고 소문을 낸다. 둘째 아들은 돈에 대한 탐욕이 대단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탐욕의 사람으로 소문내서 정작 자기는 돈에 대한 탐욕이 없기 때문에 결국 아버지처럼 부자가 되지 못한 것이라고 정당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둘째는 재산에 대한 탐욕으로 눈이 멀어 아버지를 비난하며 사람들에게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동안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은 없어지고 결국 절망하고 자살한다.둘째 아들은 탐욕의 인간모습이다. 아버지가 나누어준 재산을 최대한으로 부풀려서 자아실현을 이루고자 했던 사람이다.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좋았지만 둘째 아들의 목표에는 근본적인 목적이 없었다. 즉 톨스토이가 바라본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의 목적 없이 단순히 자신의 욕심에 의한 목표만 있었다. 재산을 불리고 싶어 하는 것은 자신의 욕심에 의한 것이지 그의 아버지가 원한 삶의 모습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바라본 인간의 비전은 우리 현실의 모습에 비춰 보았을 때 욕심으로 세운 세속적인 욕망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의사가 되고, 판·검사가 되고, 거부(巨富)가 되고 대통령이 되는 것은 비전이 아니다. 비전은 더 근본적이고 희망적이고 이상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적어도 내가 있는 곳이 나를 통해 사랑이 넘쳐나고, 정의가 실현되고, 다툼과 싸움이 없고, 굶주리는 자가 없고, 소외되는 자가 없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거룩한 목적이 바로 톨스토이가 말하고자하는 비전이다. 이러한 비전이 없는 목표는 인간적인 야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톨스토이가 말한 것과 같이 그분은 우리의 인간적인 야망을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야망만 있는 인간들은 그들의 야망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은 거짓되고 능력도 없다고 비난하는 것이다.아버지는 셋째아들에게도 다른 아들들처럼 같은 양의 재산을 나누어주고 같은 말을 되풀이 한다. "나처럼 살아라. 그러면 너도 행복해질 것이니" 셋째는 아버지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아버지의 생활에 대해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해 내었다. 아버지의 생활을 떠올리는 동안 셋째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아버지는 아버지 자신이 아닌 자기와 두 형에게 좋은 일을 베풀어주었다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셋째 아들은 "나처럼 살아라."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은 곧 남에게 좋은 일을 하라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곧 그의 아버지가 깨닫기 원하는 삶의 모습이었다.
    독후감/창작| 2006.12.27| 4페이지| 1,500원| 조회(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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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톨스토이와 노자의 만남
    톨스토이는 동양의 정신을 비롯하여 동방문화의 근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동양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다. 고대동양의 정신적 유산에 관심을 보이면서 자신의 보편적 진리를 찾아 헤매는 과정속에서 깨달았던 것과 비슷한 것이 동양정신 가운데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유럽인들이 아시아를 정복한 것은 그들이 정신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라고 말했다. 그의 관점에서본 동양은 근대, 현대의 경우처럼 지적시야를 넓히기 위한 일종의 지식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의 정신 발달을 위해 동양의 지혜를 배웠다.그렇다면 시간상으로 떨어진 그들을 만나게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톨스토이는 자신의 세계관이 바뀔 무렵 노자와 만나게 된다. 그는 도교의 자유로운 사유와 간결성, 단편성과 실제로 모순되지 않지만 모순되게 보이는 판단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톨스토이는 노자사상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무위에 대해서 이해하게 된다. 무위에 관한 해석에서 일부의 학자들은 동양의 정체성이나 수동성 등으로 무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노자의 무위사상은 정체와 수동성의 정신이 아니다. 노자사상은 역설과 다말하지 않음에 근거한다. 학문에서 얻은 지식은 행복뿐만 아니라 혼란의 근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들보다는 삶의 자연스러움을 믿고 거짓된 지식을 거부하는 것이 더 낫다. 또한 노자는 불행은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무리가 불필요하게 너무 많은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진실로 현명한 이는 모든 존재의 자연스러움을 따르면서 감히 행동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강제적인 것을 거부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무위를 하는 것이다. 노자사상은 단순하나 우리 인류는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톨스토이는 생각했다.노자는 최고의 가치들 중에 첫째로 덕을 꼽았다. 그는 높은 산봉우리보다는 낮은 골짜기나 계곡을 더 즐겼다. 최고의 덕은 물과 같다. 물은 모든 존재에 선을 베풀고 그들과 논쟁하지 않는다. 강한사람이 되려면 물처럼 되어야한다. 물은 흐르고 모양을 지니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온순하고 무엇보다 강하다. 기존의 외적명성과 위선적 위엄을 경시하는 도교의 가르침은 톨스토이에게 친숙한 것이었다. 노자는 또한 영웅적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부드러운 여성적 아름다움을 찬미했다. 이와 같은 사고의 발전은 자연적으로 모든 폭력을 부인하게 만든다. 이러한 사상에 근거하여 톨스토이는 민족들 상호간의 무력증강은 결국 끔찍한 비극으로 이어질 것을 이야기했다. 따라서 톨스토이는 노자와 함께 우리의 현재를 근본적으로 변화 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개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사고방향이 전환 돼야 하며 이는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 아닌 전체의 일부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것을 노자의 덕에서 찾는다. 노자의 덕은 복종이 아닌 사랑을 위한 덕이다. 가까운 이에 대한 동정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 했다. 어찌 보면 노자사상의 본질은 기독교사상의 본질과 같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톨스토이는 차이점을 찾기보다는 사람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인종과 종교의 차이가 없는 전 인류의 형제애의 핵심을 구성하는 공통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톨스토이 전쟁과 평화에 등장인물은 쿠투조프에 대해서 출간당시 많은 논쟁이 있었다. 쿠투조프가 미개한 동양적 운명론을 지닌 형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쿠투조프라는 인물에는 노자의 무위사상이 깊게 배여 있다.우선 쿠투조프와 안드레이의 대화에서 무의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 나타난다. 쿠투조프는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공격이나 돌격이 아닌 인내와 시간이라는 것을 더 중시했다. 또한 쿠투조프는 결정하지 말고 그냥 있음을 이야기 한다. 이것은 말 그대로 결정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행하면서 하지 않음을 나타내었다. 이 같은 쿠투조프의 무위는 노자에서처럼 실제로는 그의 의지가 담겨있는 행동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거부할 수 없는 일의 흐름을 보고, 그 역사의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으로 행동을 거부하고, 행동을 향한 의지적인 노력을 거부했다. 오히려 그가 전쟁에서 두려워 한 것은 나폴레옹이 자신과 같은 무위로 대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쿠투조프는 그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나폴레옹의 군대는 파멸의 조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침공에는 도덕적 정당성이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쿠투조프 장군의 승리는 전술적 운용의 승리가 아닌 의식적인 무위에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비난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아직 덜 익은 사과를 딸 필요는 없으며 그것은 괜히 나무도 사과도 못쓰게 만들며 자신의 이빨만 상하게 한다. 이 같은 그의 말은 인내와 시간이 자신의 용맹스러운 전사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또한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후퇴할 때도 쿠투조프는 적군을 섬멸하지 않는다. 그는 이것을 눈덩이에 비유하고 있는데 눈덩이를 빨리 녹일 수는 없다. 일정한 시간의 한계가 있는데 그 이전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녹일 수가 없다, 오히려 단단해질 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쿠투조프의 대화에서 노자의 무위를 찾아볼 수 있다. 사과와 눈에 대한 비유는 다음과 같이 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않는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가장 적극적 과정의 하나이다. 즉 톨스토이에게서 무위는 위대한 이해의 철학인 것이다.쿠투조프는 민중의 생각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이 민중의 생각 속으로 침투되어 그 속에서 용해되어 그것과 합류되는듯했고 민중의 생각을 신뢰했다. 바로 이것이 그로 하여금 어떤 직감으로 시간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전략을 자는 다른 인물보다는 훨씬 중요한 인물임이 강조된다. 나폴레옹이 퇴각하는 순간에도 적들에게 황금의 다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서 복수심이 아닌 동정심은 쿠투조프자신이 갖고 있는 민중사상의 반영인 것이다. 악에 대한 저항하는 길은 선행뿐이다. 그러므로 쿠투조프는 증오와 파괴를 거부한다.
    인문/어학| 2006.12.27| 2페이지| 1,500원| 조회(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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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와연극]재매체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두가지 논리
    ▶Bolter와Grusin은한 미디엄속에 또다른 미디엄의표현을 재매게라고 칭한다.영화에서 각본의 토대가된 소설을 인정하는 것은 소설의 독자들이 소설을 읽을 때 기대하는 즉시성에대한 욕망이나 환상을 깨뜨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재매게는 현대미디어의 중요한 특징이다. 뉴디지털 미디어가 이전의 구미디어를 여러 가지 다른방식으로 재매게한다.또한 거꾸로 구미디어가 디지털형태로 표현되는 경우도 확인할 수 있다.예를 들면 CD-ROM,DVD디지털화한 그림 혹은 사진을 전시하는 화랑 PC사용자의 올려받기할 수 있는 그림이나 텍스트를 제공하는 수많은 웹사이트등에서 재매게가 이루어지고 있다.이러한 재매게 이론에는 이중논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이처럼 새로운 미디어가 기존의 미디어를 도태시키는 것이 아니라 수렴되고 진화되는 현실은, 그야말로 뉴 미디어와 올드 미디어들이 상호 보완, 수렴, 통합된다는 미디어의 재매개(remediation)현상을 보여준다(Botler&Grusin, 1999). 재매개 이론은 ‘투명한 즉시성(transparent immediacy)’과 ‘하이퍼미디어시(hypermediacy)’라는 이중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레니 네로(Lenny Nero)의 미래학적 영화 Strange Days」가 보여주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의 감각적 경험까지 전송하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 네가 행하고,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나도 똑같이 행하고,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면, 미래의 첨단 미디어 기술은 모든 미디어들을 무의미하게 만들 것임에 틀림없다. 미디어 기술의 궁극적 목적은 결국 모든 미디어를 제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측이 미래학적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대의 기술이 미디어가 가지는 물질적 장애물을 가능한 한 제거하기 위하여 다양한 미디어를 개발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이러한 미디어의 궁극적 목적은 미디어를 통한 직접성의 실현이다. 그리고 이러한 리얼리티를 실현하기위해서는 어쩔수없이 다양한 미디어를 개발하게끔 한다.정보화 시대는 다양한 미디어가 급속도로 증식되고 확산되는 멀티미디어의 시대이다. 컴퓨터그래픽, 화상전화, 텔레비전, 영화, 디지털 사진, 그리고 가상현실. 현대문화는 이러한 기술들을 미디어로 보고있는것뿐 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문자만이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미디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지는 가상공간에서 이미 문자보다 더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미디어로 정착하고 있다.미디어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신의 의식을 아무런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경험하고자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러한 경험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미디어를 개발하려는 기술적측면 이다. 현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의식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수많은 미디어들의 효과인 것이다.▶직접성이란 무엇인가? 직접성이란 중간 매개물이 없는 상태 즉 realrity를 말한다. 직접성은 모든 미디어의 목적이다. 미디어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양한 미디어들을 개발할 수밖에 없다. ex)▶즉시성(직접성)의 예를 들면 몰입한다는 것은 매체를 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다른 허구의 세계를 경험하려면, 우리는 아직 컴퓨터와 연결된 입체안경과 같은 기술적 미디어를 써야 한다. 가상공간에 들어가면 우리는 구체적 현실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가상현실 역시 일인칭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가상현실이 발달하면, 우리는 결국 컴퓨터 인터페이스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우리에게 나타나는 이미지들을 구체적 현실처럼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하고 있다는 감각, 즉 현실감과 현장감을 증대시키려면 가상현실은 가능한 한 우리의 일상적 시각경험과 가까워져야 한다.▶hypermediacy란 무었인가? 직접성을 경험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미디어를 발전시킬 수밖에 없는 것들.ex)오늘날 보편화되고 있는 전자메일은 한편으로는 편지라는 문자 미디어를 인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음성과 이미지를 통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쌍방향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각각의 미디어들은 기술적, 사회적, 경제적인 네트워크에 일종의 그물 망처럼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직은 결국 미디어 전체를 하나의 기술적 인공세계로 구성한다.▶이러한 직접성의 욕구는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존재했다.예를 들면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회화에 직접적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원근법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공간을 선형 원근법을통해서 세계를 정확하게 측정하고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는 회화에 재현된 가상의 공간을 관찰자의 공간과 연결시킴으로써 회화라는 미디어를 어느 정도 지워버리는 효과를 제공한다. 우리가 그림을 바라보면서 우리와 동떨어진 세계를 인식한다기보다는 우리의 시각세계와 연결된 가상현실을 바라본다고 느낀다면, 회화의 미디어가 가지는 물질적 성격은 그만큼 약화되는 것이다.이렇게 현실을 마치 직접 경험하는 것처럼 투명하게 재현하고자 하는 미디어 기술은 그것이 회화이든, 사진이든, 컴퓨터 그래픽이든 간에 인간의 개입을 가능한 한 제거할 수 있는 미디어를 발전시켜 온 것이다.▶즉시성즉시성에 대한 우리들의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t.v프로그램 관점에서는 시청자들에게 경찰들의 위험한 급습에 동행함으로, sky다이버가 됨으로, 공간을 돌진하는 카레이서가 됨으로서 즉시성(그것이)이 무엇인지를 시청자들에게 보여준다.영화 제작자들은 관객이 실제로 그들이 그곳에 와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기 위해서 야외 촬영이나 이전 시대의 복장과 장소를 재창조해내기 위해서 판에 박힌 듯이 수백만달러의 돈을 영화에 쏟아 붓는다.인터넷의 webcam은 다양한 자연환경에 -Indianapolis의 뒤뜰에서 먹이를 주는 사람에서부터 캐나다의 록키 산맥의 전경까지- 우리를 데리고 간다.이 모든 경우에서 즉시성 논리를 미디어 그 자체는 없어져야 하고 우리들을 묘사되어지는 상황, 바로 그 실제의 자리에 남겨두어야 한다고 명령한다. 즉 우리는 레이싱카의 좌석에 앉아 있어야 하고, 산의 정상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과거에서는화가 피터 샌리담에 의해 17세기 그려진 그림과 사진사 Edward Weston의 사진과 컴퓨터의 가상 현실 시스템은 중요한 방법에서 다르지만 그것들은 매개의 존재와 매개를 사용하는 행위를 부정하고 무시함으로서 모두 즉시성을 달성하기위한 시도였다.이 모든 것들은 보여지는 사물과 공일 공안에 관찰자를 놓으려 하는 시도를 한다.눈 속임 기법 화가는 원근법을 사용하고 컴퓨터 그래픽 전문가는 원근법을 수치화하여...
    예체능| 2006.05.20| 2페이지| 1,500원| 조회(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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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문학사]한국현대문학사
    1. 한문을 주로 사용하던 식자층의 문자와 학문에 대한 의식을 정리하고,국어국문 의식이 확대되던 시기의 역사적 상황을 서술하시오.국어 국문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언어는 한문이었다. 한문을 사용한다는 것은 일단 우리 글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정서를 그대로 표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우리 글처럼 사용하기 위해서는 일정기간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했다. 하지만 교육의 기회가 평등하지 않던 당시를 생각해볼 때 주도권을 잡던 계층이 아닌 이상 한문사용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한문이 지배층을 중심으로 쓰였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지배층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한문을 진서라 하여 인간의 도리를 실어서 표현하는 일종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중화사상이 뿌리깊게 박힌 그들에게는 한자는 하층계층과 다른 존귀한 존재들만 사용하는 언어로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한자는 지배층의 권력유지 수단으로 일종의 관문 같은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한문은 당시대의 글쓰기와 글읽기가 지니는 폐쇄성을 보여주고 있다.한국사회는 문호개방이후 서양의 문물과 외세에 대항하여 개화사상, 위정척사상등 다양한 사상체계를 만들었다. 이 같은 새로운 사상은 한국인에게 외세에 대항하는 적극성을 보여주었고 그 과정에서 민족으로서 주체와 외세와의 관계를 인식하는 태도의 변화가 일어났다. 개항을 전후해서 한국인은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중국중심의 세계관을 해체하고 민족의식을 깨닫게 된다. 중국중심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일단 한문이 아닌 우리사상을 담을 수 있는 우리 글이 필요했다. 개화계몽시대의 국어국문운동은 이렇게 민족 주체의식이 확대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발생한 문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동학을 통해서 봉건사회와 지배층의 횡포에 저항하면서 외세를 배척하고 조선을 주체적으로 변혁 시키고자한 혁명운동이다. 동학의 이러한 사상은 국문을 통해서 민중에게 전달된다. 엄격한 신분질서에 묶여있던 평민계층에게 동학은 자기 주체에 대한서 새 시대의 문화성취에 대한 의욕을 보이며, 경술국치 전후의 정치?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다.소설의 형태를 본다면, 고대소설과 신소설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은 차이라 하여도 그것이 새 시대의 문학적 창의임에는 틀림없다. 한 출중한 주인공의 행적이나 일생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엮어간 작품들의 경우, 대개 그것은 신소설이거나 고대소설이거나 거의 같은 틀을 지니고 있다. 이야기 단위들은 시대나 사회배경 또는 작가의 상상력이나 소설 미학적인 취향에 따라 서로 그 내용이 다르지만, 한 출중한 인물이 어려움을 겪은 다음에 큰공이나 이상을 실현하고 성취한다는 이야기의 짜임에서는 공통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고대소설의 틀이 신소설의 틀에 영향을 끼친 것을 알 수 있다. 일생을 그리는 소설은 출생?성장?능력?고난?구출?역경?극복?성취(또는 실패)라는 삶의 궤도에 따라 짜여져 일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틀이지만, 사회의 많은 층을 동시에 보여주는 소설은 각 층의 요구나 뜻을 드러낼 많은 성격이 요청되므로 같은 시간단위 속에서 많은 인물이나 인물을 대신할 대리적 성격들이 제시되는 것이다.고대소설이나 신소설이나 대개 일생 담을 주로 한 것이 많기는 하나, 신소설에서는 현실감을 나타내기 위해 회고와 역전의 수법 등 작가의 개성과 창의에 따라 매우 다양한 화법의 형태가 선보이고 있다. 즉, 이야기나 인물들이 설정된 장면의 집중적인 형상화의 효과를 얻기 위하여 신소설에서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행동을 구성하지 않고, 오히려 장면의 효과나 감동, 주의를 집중하게 하기 위하여 서사시간을 역전하는 방식도 취하였다. 이는 시간을 소설의 미적 요소로 인식한 객관적인 한 증거라고 이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물의 행동을 생장하고 성취하는 자연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짜 맞추지 않고, 인물의 신념이나 특성 및 행동의 비중에 따라 시간의 순서를 역전하여 그 효과를 높이려 한 것이다. 이에 비해 근대소설은 시간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시간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사건의 진행설들의 경향은 그렇지 않았다. 작품의 표제도 차차 인물 중심의 고대소설에서 탈피하여 내용 암시를 주는 상징적 제목으로 대체되었고, 그것이 그 작품의 새로움을 나타내는 구실도 담당하게 되었다. 근대소설에서는 인물은 유형적인 인물이 아닌 자기 나름의 개성이 강한 인물이다. 환상적이지도 않고 우의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인물의 이름도 성격적 유형을 나타내는 이름이 아닌 그냥 당대의 흔한 이름이다. 구체적인 환경이란 인물의 행동과 사건의 진행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좌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사회현실을 의미한다. 또한 연재소설 형식으로써, 다양한 사건 제시나 토막 이야기마다 일정한 흥미를 부여하는 점에 있어서도 특색을 보였다. 말하자면, 고대소설의 양식에 의거한 신소설이었지만 상당한 면에서 새로운 창의성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소설의 특징도 이광수 이후의 현대소설과 비교하여 보면, 우연성이 많고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이야기가 우세하고 성격화 과정에서 상투적 경향이 잔존하여 있다고 할 것이다. 특히 많은 작품의 전체적 주제설정이 대체로 권선징악에 흐른 점도 문학사에서 지적되었다. 신소설 작가들이 대부분 전문적인 문학수업을 받지 않은 신문기자들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성숙된 기교나 창의성의 수준을 크게 기대할 수는 없었으리라고 보인다.3. 신소설의 성과와 한계를 정리하여 서술하시오.개화계몽 시대의 신소설은 국문 체를 서사적 문체로 정착시킨 대표적인 문학 양식이다. 신소설은 국문 체를 통해 일상적 언어에서 가능한 모든 언술을 특징적인 문장의 형태로 표현함으로써 내적인 대화적 공간을 확대하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구조를 통해서 신소설은 언문일치의 이상에 접근한 산문체의 근대성을 상당 부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신소설에서 주목되는 문체론적 징표는?더라?체의 종결형과 함께?-ㄴ다?체가 새롭게 등장한다.?-ㄴ다?체의 현재법 종결형 문장은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를 위해 쓰이고 있으며, 서사 공간 안에서 화자와 서술 대상자사이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개인의 운명은 외부적으로 주어진 이념의 속성에 의해 쓰여지기도 하고, 내면에서 비롯되는 개인의 욕망에 의해 쓰여지기도 한다. 외부적 이념에 의해 쓰여지는 경우 그 서사의 구조는 새 것과 낡은 것의 갈등을 대표하는 신구의 대립을 핵심으로 하여 성립한다. 그리고 개인의 욕망을 강조한 경우 선악의 대립구조가 등장한다. 후에 일제 식민지시대에 들어서면서 나타난 신소설의 통속화 현상은 바로 개인적 욕망을 중심으로 하는 서사구조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의 작품들은 대게 물질적인 것에 대한 인간 욕구가 당대현실 속에서는 일반화된 세속적인 삶의 원리처럼 작용하고 있음을 과장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신소설은 일제식민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신구 대립의 긴장을 상실하게 된다. 개화계몽의 목표가 되었던 바람직한 근대사회의 성립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자, 일본을 매개로 하여 문명개화 세계에 이르는 과정을 어사화 하고자했던 신소설의 문장자체도 자기 모순에 빠지게된다. 문명개화의 매계항으로 설정한 일본이 오히려 모든 것을 장악해버린 식민지 조선의 지배자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소설은 이해조 이후 재미를 추구하는 독자의 욕구대로 개인적 취행물로서의 통속적인 이야기책으로 변모되었다. 이렇게 신소설의 대중적인 흥미성에 집착은 사회 계몽적인 기능을 약화시켜 신소설은 소재주의적인 관심과 통속성으로 인하여 신소설은 소설사적인 의미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된 것이다.※신소설은 고대소설의 전통적 맥락을 이어받고 있는데, 고대소설의 구조양식을 지니면서도 새로운 창의가 나타나 묘사?문체?구성?주제의식 및 인간형의 제시에서 고대소설을 많이 극복하고 있다. 전통이 단절되었다는 견해나 신소설이 전적으로 서구적 영향 밑에서 발생되고 이룩되었다는 견해는 근원적으로 학구적 연구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표면적인 인상을 말한 것이라 하겠다. 소설의 구조에 있어서 우연성이 많았다는 사실은 신소설을 다룬 연구가들에 의하여 많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연의 문제는 단순한 합리주의적 사고에서만 논의 누〉 의 첫 가족이산장면, 〈은세계〉 에서 행복이 깨어져 버린 참상의 장면제시로부터 사건이 시작되는 점등은 옛 소설에서 안정된 상태의 인물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겪게 되는 고난을 순차적으로 제시한다는 짜임과 큰 차이가 있다. 신소설이 실제적인 삶의 내용과 경험을 존중하려고 한 증거는 이러한 이야기 짜임뿐 아니라 문장에서도 명확히 나타나고 있는데, 한글을 대담하게 한문투 문장에 적용한 것, 소설의 장면에 구어체를 적절히 이용한 점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문체의식은 우리의 일상적 삶의 내용이 일상어의 테두리에서 문제되고 있다는 증거로서, 생각의 일반화나 보편화를 기약할 수 있는 혁신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문장수사는 고대소설에서와 같이 직유법에 의존하고 있어 직유 법적인 사유나 문장의식이 지닌 사물인식의 한계성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한편, 신소설은 개화와 혁신을 표면적인 시대의 과제로 추구하였지만 작품의 내면에서는 항상 오락적 흥미나 사건 자체의 흥미 있는 변화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즉, 표면적으로 제시한 그 시대의 민족적 과제는 인정하고 다루었으면서도 그 탐구의 진지성이나 심각성이 흥미나 오락적 감각에 의하여 약화됨으로써 심한 격차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은 이 시기 작가들의 표면적인 의도와 내면적인 어긋남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것은 작가들의 생애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처럼 신소설은 문학사의 흐름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한계를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4. 한국근대문학사에서 이광수의 위치와 작품 ?무정?의 의의와 한계를 서술하시오.이광수는 자아에 대한 각성과 자기발전을 내세우면서 문학의 독자적 가치를 강조한 바 있다. 그는 문학이 개인적인 정서에 기초하여 성립된 것임을 분명히 하였고, 문학을 구시대의 윤리적 속박과 모든 관념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이광수의 태도는 문학의 근대적 인식과 개인의 개발이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광수는 문학에서 개인적 정서의 문제를 중시하면서도, 그것이 근준다.
    인문/어학| 2005.12.21| 8페이지| 2,000원| 조회(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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