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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워킹홀리데이 활동계획서 (한국어) - 2010년 2분기 합격
    計劃書7월~11월 : 도쿄 여행생활자보다 빠른 적응을 위해 혼자서 한 달간 여행한 경험이 있는 도쿄에서 일본생활을 시작합니다. 평일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 및 여행경비를 모으고 주말에는 요코하마, 하코네, 가마쿠라, 닛코 등 도쿄 근교여행을 할 예정입니다.또한 인터넷 동호회 가입 후, 모임을 통한 일본 사람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할 것입니다.문화 체크 - 스미다가와 하나비 참가, 아자부주반 여름 마쯔리 참가, 썸머소닉 락 페스티벌 참가, 거리 공연 및 클럽 공연 체험, 영화 및 연극 관람12월~1월 : 겨울을 겨울답게, 일본 북부여행이와테, 아오모리, 아키타, 홋카이도를 돌며 일본 겨울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만끽하고 싶습니다.문화 체크 - 료칸과 온천 체험, 라면 맛집 탐방2월~ 4월 : 오사카 여행생활자도쿄에서와 마찬가지로 오사카에서도 여행생활자가 되어 현지인 같은 생활을 하며 보다 깊숙히 일본인과 일본 문화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또한 오사카와 멀지 않은 나라, 교토, 미에 등을 여행하며 일본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살아있는 공부를 할 예정입니다.문화 체크 - 만담공연 관람, 맛집 탐방, 매화 축제 및 벚꽃놀이 이벤트 참가5~6월 : 여름을 여름답게, 일본 남부여행큐슈 열차여행 – 큐슈횡단 특급열차를 타고 벳푸에서 히토요시까지 횡단하며 여유로움과 정겨움을 느끼고 싶습니다.오키나와 여행 – 가고시마에서 배를 타고 오키나와로 가 해수욕과 해양스포츠를 즐기고 싶습니다.
    기타| 2014.07.10| 1페이지| 3,000원| 조회(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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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 샬롯의 거미줄
    읽는 내내 순득이가 생각나 혼났다.?순득이가 누구인가.열 두살에 만난 나의 첫 동물친구이다세상에 빛을 본 지 한 달이 채 안 된 상태에서 내게로 온 작은 천사이다.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단순히 순득이를 똥개라 불렀다.?나는 다 커서도 가끔 엄마한테 묻는다. “엄마 순득이 어떻게 된 거야?”아빠한테도 묻는다. “아빠, 그때 아빠친구가 순득이 잡아먹은 거지, 그치?”?벌써 16년이나 지난 이야기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정을 나누었던 기간은 1년이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난, 아무나 붙잡고 순득이 얘기를 꺼낸다.그건 윌버가 샬롯의 자식들에게 샬롯의 얘기를 해주고 싶은 마음과 비슷하다.두려운거다. 내게 너무도 소중했던 그 존재가, 내 안에 여전히 반짝이는 그 존재가 그대로 잊혀져 버릴까봐…?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친구네 집에서 인형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는데, 친구네 집으로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순득이가 오늘 멀리 간다며 작별인사를 하라는…쿵쾅거리는 가슴을 안고 집으로 한걸음에 달려왔다. 순득이가 성남에 있는 아빠 친구의 화원으로 간단다.우리집에서 유일하게 아빠는 순득이를 싫어했다.아빠에게 동물은 일을 하거나 먹이를 제공하는 생명체지, 집에서 사람과 뒹구는 동반자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아빠가 집으로 오기 전에 가출을 해야 했다.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침착해야만 했다. 우선 욕실에서 세숫대야를 가져와 그 위에 순득이 전용 담요를 깔고 순득이를 담은 뒤 비디오커버 안에 숨겨 놓았던 비상금 천원을 들고 집을 나왔다. 엄마는 말리지 않았다.그리고 슈퍼로 가 순득이가 가장 좋아하는 과자, 바나나킥을 두 봉지 사서 놀이터로 갔다.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로 바나나킥 두 봉지를 세숫대야 안에 몽땅 쏟아 부었다.웬일인지 순득이는 바나나킥을 먹지 않았다. “왜 안 먹어. 빨리 먹으란 말이야.” 나는 화를 버럭 낸 후 순득이를 부둥켜안고서 펑펑 울었다. 그리고 그날 순득이는 아빠 친구의 화원으로 갔다.?그 뒤로 나는 아빠를 졸라 함께 순득이를 보러 가곤 했다.하얗고 뽀얬던 구정물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목에는 사슬이 달려있었고, 옆에는 커다란 개 대여섯 마리가 함께 있었다.?일주일에 한번, 한 달에 한번, 세 달에 한번…그렇게 순득이를 보러 가는 발걸음은 점점 뜸해져만 갔다. 하지만 아무리 오랜만에 찾아가도 순득이는 늘 똑같은 크기로 나를 반겼다.더 이상 순득이를 만나러 가자고 아빠에게 조르지 않는 동안 나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짝사랑을 시작했으며, 이별의 그늘을 부르는 TV 속 왕자님 윤상에게 팬레터를 보냈다.?책을 읽으며 나는 간절히 바랬다. 낯선 환경 속 두려움에 떨었을 순득이에게도 부디 ‘문안이오’ 라며 따뜻하게 말을 건네주는 친구가 있었기를…?샬롯과 윌버의 멋진 우정은 여러 번 내 마음을 울컥이게 만들었다. 사실 샬롯이 윌버를 위해 정성스레 한자한자 정성스레 써 주었던 글귀들은 내가 샬롯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아직은 어리고 여린 윌버를 위해 기꺼이 ‘잠을 자지 않고’, ‘피곤함을 무릎 쓰고’, ‘필생의 역작을 만들면서’, ‘죽음을 예감하는 순간까지’ 곁에 있어주고 힘이 되어주었던 샬롯의 우정은 정말이지 ‘대단하고’ ‘근사하며’ ‘눈부시고’ ‘겸허했다’.그리고 그런 샬롯의 사랑을 먹고 성장한 윌버는 그 사랑을 그대로 윌버가 남긴 필생의 역작들에게 전해준다.?“난 너희들 어머니에게, 바로 내 생명을 빚졌단다.너희들 어머니는 총명하고, 아름답고, 마지막까지 성실했지.난 언제나 너희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단다.너희, 샬롯의 딸들에게, 나는 영원히, 언제까지나 내 우정을 맹세하노라.”?비록 자신의 집도 아닌, 인간이 멋대로 만든 동물 품평회장에서 홀로 남아 죽음을 맞이한 샬롯이지만, 그래도 그의 필생의 역작들을 윌버가 소중히 보호해 줄 것을 알고 가서 다행이다. 윌버가 아무것도 해준 것도 없는 자신에게 왜 그렇게 잘해주었냐고 묻자 샬롯은 이렇게 말했다.
    독후감/창작| 2009.02.15| 3페이지| 1,000원| 조회(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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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시아 역사] 고려 서민 생활 평가C아쉬워요
    고려시대 농민의 생활후삼국 통일 후 농민들은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욕으로 농경에 종사하였다. 왕건의 조세 감면 조치와 호족의 수취를 제한하는 명령으로 농민들의 경제적 여건은 향상되었다. 농민들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토지를 개간하고 새로운 땅을 일구었다. 고려 정부도 국가의 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해 묵은 땅을 개간하는 일을 장려하였다. 광종 때에는, 2년째에는 수확량을 토지 주인과 개간자가 반씩 나누도록 하였다. 그리고 공전을 개간한 경우에는 3년 동안 수확량 전체를 개간자가 갖도록 규정하였다. 고려 초에 새로 확보한 서북 지방은 남부 지방의 사람과 발해 유민이 이주하여 개발하였다. 대동강과 청천강 유역의 넓고 기름진 땅이 농경지로 개간되었다.고려 사회는 신분제 사회이므로 지배층은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농민들은 사회적 권리는 별로 없고 조세와 공납, 요역 등의 의무만을 지고 있었다. 공납은 지방에서 생산되는 토산물을 국가에 납부하는 것으로, 매년 일정한 공물을 바치는 상공(常貢)과 필요에 따라 임시로 내는 별공(別貢)이 있었다. 상공은 미리 정하여진 종류와 액수를 각각 주현에 할당하여 주현에서 이 공물을 집집마다 배분하여 상납게 한 것이었다. 때로는 주현에 할당된 공물을 채취, 제조, 운반하기 위해서 주민들에게 공역을 부과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납의 부담이 너무나 힘겨워서 촌락의 농민과 소 의 장인들이 공납을 피하기 위해 도망가는 경우가 많았으며, 얼마간 여유 있는 농민들은 뇌물을 바치고 빠져나갔다.요역은 국가가 농민들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수취하는 것이었다. 16세에서 59세까지의 남자는 정(丁)이라 하여 요역의 의무가 있어서 궁궐, 사찰, 관청의 축조와 성곽, 도로, 제방의 건설 등 토목 공사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힘든 노역에 동원되고 식량은 스스로 가져가야 했다. 농민들은 이 고역을 피하기 위해서 절에 들어가 중이 되기도 하고 혹은 호적을 속이기도 하였다.또한 농민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군역을 져야 했다. 2권 6위의 중앙군이 되어 개경을 수비하거나, 5도의 주현군이 되어 치안과 수비, 그리고 공역의 임무를 담당하였다.농민들이 국가와 지배층에게 바쳐야 하는 조세와 공납, 그리고 요역은 무척 무거운 부담이었다. 게다가 빈번한 홍수나 가뭄 등으로 농민의 처지는 더욱 비참하였다.그리하여 고려 정부는 농민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책을 마련하였다. 농사철에는 농민을 잡역에 동원하지 못하게 했고, 자연 재해 때에는 피해의 양에 따라 조세와 공납을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빈민 구제 기관으로 의창을 설치하여 식량이 떨어지는 농사철에 얼마간의 양곡을 농민에게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이자와 함께 걷어들였다. 개경과 서경 및 지방의 12목에는 물가 조절 기구인 상평창을 설치하여, 쌀이나 포를 값이 내렸을 때 사들이고 값이 오르면 싼값으로 시장에 내다 팔아 물가가 지나치게 오르내리는 것을 막았다.국가 기구 외에 왕실, 귀족, 사원, 관료와 지주 등도 농민들에게 양곡을 빌려주었다. 그러나 이자율이 높은 고리대여서 일시적인 도움은 되었지만 부채를 못 갚아 몰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는 지나친 고리대의 폐해를 막기 위해 이자율을 3분의 1로 제한하여, 쌀 한 섬(15말)의 이자를 최고 5말로, 포 1필의 이자를 최고 필로 규정하였다.그러나 국가의 빈민 구제 사업이나 고리대의 이자율 제한은 농민의 몰락을 막아 조세를 계속 걷기 위한 미봉적인 농민 보호책이었을 뿐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어서 농민 생활의 불안정은 크게 개선되지 못하였다.고려인의 의식주(衣食住)♧복식고려의 정치적인 대외관계는 고려의 복식제도에 3기로 변화를 가져왔다. 구분하는데 제1기는 오대와 송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였고, 제2기는 원의 침입으로 몽고 복식의 영향을 받으면서 생긴 변화 였으며, 제3기는 명의 영향권에 들면서 생긴 변화이다. 그러나 이런 대외 영향들은 주로 관복 제도에 변천을 가져왔을 뿐, 일반 복식은 우리 고유의 복식 구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복식생활에서의 두드러진 특징은 문익점에 의한 목면의 전래였다. 이것이 비단이나 명주를 마음대로 입을 수 없었던 서민의 복식 생활에 커다란 전환기를 마련해 주었다.-남자복식왕복(王服)을 비롯하여 백관복(百官服)에 이르기까지의 관복(冠服)은송(宋),중국화(中國化)된 원(元),그리고 명의 제도를 받아들였으나, 일반의 복장인 우리나라의 고유복식(固有服飾)은 서민층(庶民層)에 의해 면면히 이어져 왔다.-민서여복우리 나라의 복식는 중국의 복식과 전통적인 고유복식의 이중구조 속에서 변천해 오는 가운데 우리의 전통복식을 묵수해 온 것은 민서층에서였다.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보는 민서복을 귀녀복과 대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1) 두식쓰개에 있어서는 서민층의 여인들도 몽수를 하였는데, 아래로 내리지 않고 머리 위에 접어 올렸다고 한다. 이것은 귀부녀(貴婦女)와 달리 일을 해야하는 관계로 거치장스러움을 덜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내외를 하기 위한 몽수의 의의를 상실하고 다만 겉치레에 불과했다.2) 의복서민층의 여인들은 일하는 데 불편했을 백저포를 상용했으리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비첩조」에 관부의 잉(시녀), 관리의 첩, 민서의 처, 잡역을 하는 노비는 복식이 상류(相類)하다 한 점으로 보아 백저포를 입었을 것이나 늑건에 따른 수식만은 스스로 다르고 등차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또한 구속여자의 복에 백저포, 황상은 위로는 공후귀가로부터 아래로는 민서의 처첩에 이르기까지 분별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여자복식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식생활육식의 쇠퇴로 식물성 식품을 더욱 맛있게 먹는 법이 연구 되었고 기름과 향신료의 이용도 많이 하게 되고 사찰음식이 발달하였다.빈번해진 외국과의 교류가 점차로 민족의 식생활을 변천의 시대로 이끌게 하였다.소금의 전매가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져 식생활의 큰 변혁을 가져다 주었고, 또한 고려청자기의 놀라운 발달이 식기의 고급화를 추진하여 식생활의 발전을 문화적인 차원으로 높여 주었다. 고려시대의 질그릇은 그 시대를 살다간 우리의 선조들이 일반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한 생활용품 이었다.♧주생활고려시대의 주거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에 이르는 주거문화가 그대로 전승되었다. 특히 일반민중에게 온돌이 보편화되었다. 고려시대의 온돌은 난돌, 화돌, 빙돌등으로 불렸다. 주로 흙침대를 만들어 땅을 파서 화갱을 만들고 여기서 잠을 잤다. 당시 귀족들의 입식생활이 좌 식생활로 바뀌어 지기도 했다. 일반 백성들의 집은 움집의 형태였고 귀족계급만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 '빙돌'이라는 온돌이 있었으나 귀족계급이나 왕궁에는 온돌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반 백성들은 대부분 흙침상을 만들고 땅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누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의 장갱과 같은 난방 방식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욱실'이라는 온돌방과 '양청'이라는 마루가 건축되었음이 기록으로 전해진다.
    인문/어학| 2004.06.13| 4페이지| 1,000원| 조회(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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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학, 예술] 바로크 예술과 고전주의, 낭만주의 평가A+최고예요
    ♧바로크 예술에 대한 감상바로크 미술은 대략 1600년경부터 1750년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카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미술 양식을 말한다. '바로크'의 원뜻은 지나치다라는 남용의 뜻이지만, 이상하고 비논리적인 것에서 나온 괴상하고 과장된 형태를 뜻하게 되었으며, 르네상스와 비교해서 바로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보다 빛나는 색채, 음영과 질감의 풍부한 대비 효과, 자유롭고 표현적인 붓질 등으로 비고전적, 동적, 남성적, 불규칙적인 성격과 심한 과장성의 표현이다.회화에 있어서는 대각선적인 구도, 원근법, 단축법, 눈속임 효과의 활용등이 전체적인 특색이다. 18세기에 들어와서도 바로크는 로코코 양식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바로크시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서 미술은 회화라는 개념이 자리 잡게 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로마를 카톨릭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고자 교황이 미술 진흥 정책을 쓰게 되는데 그로 인해 바로크가 시작했다 하여 바로크를 '反종교개혁적 표현'이라고도 한다.또한 17세기 조각의 거장인 지안로렌초 베르니니의 작품은 조각이 다소 회화에 위축된 시기에 만들어지는데, 그의 작품은 조화와 균형 보다는 감정과 종교적 체험 등의 표현에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의 궁정화가였던 벨라스케즈는 카라밧지오의 사상과 기법에 커다란 영향을 받아 자연을 냉정하게 관찰하여 몇번의 단순한 필치로 작품을 완성하였는데「왕녀 마가렛」「시녀들」을 그렸다.거대한 화면에 사물을 운동감있게 배치하고 색과 명암을 풍부하게 묘사한 루벤스 등이 그 뒤를 이었으며, 집중적인 광선의 표현과 깊은 인간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던 렘브란트의 「야경」,「자화상」등은 바로크 미술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크는 16세기 고전적 르네상스의 조화·균형·완결성등에 대해 경탄과 현혹을 지향하여 양감, 광채, 동감에 호소하고 있다.그리하여 건축에서는 거대한 양식, 곡선의 활용, 자유롭고 유연한 접합부분등의 특색을 나타내고, 조각에서는 비상하는 동적인 자태와 다양한 의복의 표현등을 특색으로 하였다.바로크 예술은 전체에 종속되는 부분들의 조화를 통한 균형을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균형이란 전성기 르네상스의 이상이었던 각각으로도 완벽한 부분들이 이루는 전체적인 균형과는 다른 것이지만 매너리즘의 종종 고의적으로 조화를 깨뜨리는 점이나 로코코의 신경질적인 단편성 보다는 오히려 르네상스에서 말하는 균형과 공동되는 점이 더 많다. 바로크가 추구하는 화합은 형식적이고 자기 만족적인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신체적인 참여를 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정신적인 참여를 하게 하는 것이 바로크 작품의 특징이다.♧고전주의, 낭만주의 감상고전주의는 말 그대로 고전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시대적으로 폼페이나 헤라클레늄의 유물이 발견되면서 그리스 로마 미술에 대한 관심과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동경하게 된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런 고대인들의 삶을 재현하려 했다.표현적인 면에서도 고대 미술의 엄격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즉 균형과 비례, 그리고 실감나게 그리기 위한 노력들이 화폭을 채우고 있으며 이는 당대의 시대정신을 화폭으로 옮겨 놓으며 미술의 변화를 통해 시대 흐름까지도 읽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하지만 19세기 전반으로 접어들면서 고전주의의 이성적이고 형식적인 것에 반발하는 미술이 나타나게되고 낭만주의, 사실주의 등의 새로운 유파들이 생겨난다.
    인문/어학| 2004.06.10| 2페이지| 1,000원| 조회(1,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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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사회, 일본 문학] 전공투 운동과 기미가요
    ♧전공투 운동전공투 운동은 1960년대 후반에 일본에서 일어난 학생 운동을 지칭하는 것으로, 60년대 중반부터 여러 대학이나 학원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되어 온 대학 분쟁이, 이미 단순한 개량 투쟁이나 반대 투쟁만으로는 밀고 나갈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70년 안보 상황에의 투쟁과 결부되는 가운데, 전국적인 대학 반란의 양상을 띄고, 급진적인 투쟁으로 변모되어 갔다. 전공투란 '전국 학생 공동 투쟁 회의'의 약칭으로, 직접 민주주의에 의거한 조직의 운영을 그 원칙으로 하고, 개개의 주체가 각기 주체적으로 결의하고, 책임을 유지하면서 결집된 대중적 전투 조직이며, 투쟁하는 주체의 결집체였다.이러한 전공투 운동의 배경에는 60년대의 고도 경계 성장 정책에 의한 인플레 기조와 노동력 부족이라는 배경이 있었고, 그러한 배경 속에서 정부에 의한 대학의 '노동력 생산 공장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생산 공장'으로의 재편 등이 있었다. 이러한 공격적인 재편은, 60년대 중반부터 학비 인상, 기숙사, 학원에 대한 관리 강화, 커리큘럼 개편 등으로 잇따라 구체화되었고, 60년대 말에 이르러 목적별 대학과 대학원만 둔 대학의 구상, 쓰쿠바 대학 설치 등으로 전개되어 갔다.이러한 교육의 제국주의적 재편과 관리 체제 강화에 대한 반발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학원 투쟁의 배경이었다. 동시에 세계 각지의 스튜던트 파워, 즉 프랑스의 5월 혁명, 서독, 미국 등에서의 세계적인 학생 반란과도 공통된 구조를 갖고 있었다. 즉 정보화 사회의 진행과 고도로 발달한 그 정보화 사회 속에서의 관리조작 체제의 강화에 대한 반역이었다.따라서 이 무렵에 있어서의 학생 반란(대학의 투쟁)은, 학원이나 대학의 개별적인 영역을 넘어 '대학 혁명'의 슬로건을 등장시키고, '권력 투쟁'으로까지 치달았던 것이다. 또 전공투 운동은, 이른바 '대학 해체론', '자기 부정론'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권력 투쟁인 동시에 사상적인 운동이기도 했다.다음은 전공투의 역사에 관한 기록이다. 중요한 사건을 뽑아 연대순으로 기술한 것으로, 전공투 운동의 생생한 발자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67년 10월 8일에는 수상 사토의 베트남 방문 저지를 위한 투쟁이 하네다에서 벌어졌다. 이 날 교토 대학생인 야마자키 히로아키가 경찰과의 공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서 학살당했다.68년 1월 5일에는 사세보에 엔터프라이즈가 기항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이 벌어졌다. 전학련 1,500명이 히라세바시 위에서 기동대와 충돌하였고 이후 일주일 동안 현지에서 격투를 벌였다.같은 해인 10월 21일은 국제 반전 데이로 신주쿠, 방위청 국회 등에서 격렬한 데모를 벌였고, 기동대와 충돌, 소란죄가 적용되었다.해가 바뀌어도 전공투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69년 1월 18일에는 도쿄 대학 야스다 강당에서 공방전이 벌어져, 2일 동안에 걸친 격투를 벌였고, 간다에서는 해방구 투쟁이 있었다.69년 4월 28일에는 긴자, 오차노미즈, 신바시 등에서 기동대와 충돌한, 일명 오키나와 투쟁이 벌어졌다.같은 해 9월 5일, 드디어 전국 전공투 연합이 결성되었다. 전국의 학생 3만 4천 명이 결집한, 전공투 사상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11월 16일에는 사토 방미를 저지하려는 투쟁이 벌어져, 가마다 역 주변에서 기동대와 격돌, 약 2,000명이 체포된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듬해인 1970년 3월 31일에는 적군파 9명이 일본 항공기 요도호를 공중 납치한 사건이 있었고, 71년 1월 25일에는 적군파와 일공 혁명 좌파의 공동 정치 집회(지요다 공회당)가 벌어졌다.72년 2월 19일에는 연합적군 사카구치 히로시 등 5명이 아사마산장에서 농성, 총격전을 전개하다가 28일에 모두 체포되었다.♧기미가요기미가요의 원형은 10세기 초에 만들어진「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라는 가사집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노래는 주로 연회 등에서 축가로 불리던 가사였다고 한다. 그것은 '기미(君)'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주인이나 윗사람, 혹은 친구, 애인 등 다양한 의미로 쓰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기미'가 처음부터 천황을 상징하는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기미가요는 그것이 국가로 지칭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기미가요에 곡조가 붙은 것은 메이지유신 1년 후인 1869년이었다. 당시 사츠마(薩摩) 지방의 사무라이들에게 서양 음악을 가르치던 J. W. 펜톤(John William Fenton)이라는 영국인이 일본에도 국가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낸 것이 계기가 되어 사츠마의 포병대장이었던 오야마 이와오(大山巖)가 사츠마 지방의 민요를 모은 '호라이산(蓬來山)'이란 시집에서 기미가요를 발췌해 펜톤에게 작곡을 의뢰했다. 그러나 일본의 가사에 맞지 않는 서투른 서양식 곡조 때문에 그 평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이에 해군성은 궁내성 아악과에 기미가요의 작곡을 의뢰했는데, 당시 아악과 악장이었던 모리 히로모리(森廣守)가 곡조를 만들어 제출하자 여기에 해군의 외국인 교사였던 F. 에케르트(Franz von Eckert)라는 독일인이 서양의 화성을 붙여 오늘날의 기미가요를 완성하였다.이 곡은 '천황을 찬미하는 의례곡'으로서 1880년 11월 3일 천장절(天長節)에 궁중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어 극찬을 받았다. 그러나 당초의 기미가요는 국가로서 제정된 것이 아니었기에 천황을 위한 의례 연주곡에 머물러 있었다. 기미가요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천황의 의례곡으로 쓰여 국가로서 기능하지 못했으며 발표된지 57년만인 1937년에야 비로서 국가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인문/어학| 2004.05.16| 3페이지| 1,000원| 조회(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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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4월 07일 화요일
AI 챗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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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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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