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론의 저자는 해롤드 니콜슨 책이다. 책 자체가 번역본이기 때문에 책을 이해하는데 난해할뿐더러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하여 저자를 살아있는 인물로 간주하고 문답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책의 전반적인 내용과 저자의 생각을 이해하려 했다. 지금부터의 대화는 가상의 상황이며 니콜슨은 책의 내용을 보고 그가 생각하는 바를 본인이 서술했고 그러므로 인해 저자의 의도와 책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나 : 정치외교학을 배우는 학생으로써 외교론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책 내용이 번역본이라서 그런거 굉장히 어렵게 풀이 된것 같은데요?저자 : 우선 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책을 통해 외교학의 기본서가 부족한 학생들과 실무자들에게 한 가지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나 : 책의 내용에 앞서서 기본적으로 외교의 개념은 무엇입니까?저자 : 저의 외교는 책에서도 말한거와 같이 협상에 의하여 국제관계를 다루는 일이며, 국제관계가 대사나 사절에 의하여 조정·처리되는 방법이며 외교관의 업무 또는 기술을 의미합니다.나 : 네, 그렇군요. 그럼 외교의 역사적인 것들을 들어 보겠습니다. 외교의 기원을 어디서부터 라고 보십니까?저자 : 최초의 외교란 천사들로서 그들은 하늘과 땅 사이의 사자 역할을 하는 전령과 같은 것이었습니다.나 : 그럼 최초의 외교를 천사라고 보시는군요,, 그럼 그 이후에 외교이론의 발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저자 : 우선 저는 모와트 교수의 유럽의 외교이론 발전 3단계를 인용해 외교 이론의 발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기(476∼1475)에는 외교가 전적으로 비 조직이었던 암흑시대였습니다.특히 로마시대의 외교는 국제적 평등이니 국제적 협조니 하는 개념보다는 오히려 국제질서와 국제적 규범의 개념을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하였습니다. 그리고 2기(1473∼1914)에는 역사적으로 외교이론이 유럽의 국가체제로 인식된 정책 체제를 따르던 시대였으며 3기(1914년이후)에는 윌슨 대통령에 의해 창안되어 때로는 민주주의적 외교라는 것으로 알려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나 : 그럼 각 외교관이란 자기나라의 이익을 위하여 외국에 파견되어 거짓말을 하는 정직한 인사이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외교라는 개념 자체가 높지 않게 평가되었습니다. 그리고 19c 초반 외교관의 신분과 규율이 국제법에 의해 확립되었고 외교 업무가 정치가나 정략가와를 구별되는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을 받고 일정한 형식으로 자신의 법칙과 관례와 규범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비엔나회의 이후 엑스 라 샤펠 조약에서 외교사절 이란 대사, 교황청사절, 교황청성사, 특명사절 및 전권대사, 변리공사, 대리 대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3기는 민주주의적 외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협상과정에 의하여 독립국가들 사이의 관계를 처리하는게 주목적이면서 외교관은 공직자이기 때문에 외무장관에 종속된다. 외무장관은 내각의 일원이기 때문에 의회의 다수당에 종속된다. 의회는 대표기관이기 때문에 국민의 의사에 종속된다는 근본원리를 내포하고 있다.』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918년 즉 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에는 이 원리가 적용되지 않아 많은 혼란이 오기도 했습니다.나 : 굉장히 긴 설명 이었는데요. 마지막에 많은 혼란이 왔다고 했는데 한 가지 예를 들어 주시겠습니까?저자 : 간단한 예로 윌슨대통령의 공개외교였습니다. 윌슨은 공개외교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1918년 1월 8일에 공표한 14개 조항의 1항에서 미래에는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평화에 대한 공개적인 규약이 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향후에는 어떤 종류의 사적인 국제간의 이해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요, 이 발표가 있은 지 1년도 못되어 이미 체결된 가장 중요한 베르사이유조약에 관하여 협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협상은 공개적 이었지만 꼭 그렇게 공개적으로 귀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역사상의 어떠한 협상도 그처럼 비밀에 싸여 있었고 그처럼 신비에 싸여 있었던 것도 없었으니까요. 윌슨 대통령은 이론과 행동사이의 괴리에 있었던 것입니다.나 :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럼 다시 책의 본론으로 들어가서 구외교와 신외교가 생각하는 것은 독재국가나 준독재 국가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비엔나 체제 이후 왕실은 내각으로 바뀌면서 주권자가 있음에도 힘을 발휘 못하는 부조화가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구외교에서 신외교로 발전시킨 촉진 요소는 배타적인 국권의 개념으로부터 공통된 국제이익 개념으로 변모와 여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통신수단의 발달입니다. 결국 신외교는 대사가 독자적으로 발의하여 일을 추진하고 그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성격의 일들이 구외교보다 더 나아진 모습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나 : 네, 이쯤하면 외교의 역사에 대해서 거의 다 들어 본거 같은데요. 그럼 외교관의 자질에 대해서 말을 안 할 수가 없을꺼 같아요. 그렇다면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외교관은 의 자질은 어떤 것인가요?저자 : 우선 제가 말씀드릴 이상적인 외교관을 책에 집필한 이유는 훌륭한 외교, 그릇된 외교인가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해주는 비판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구요. 이상적인 외교관에는 총 7가지가 있는데 효과적인 외교를 수행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진실성, 정확성, 상냥하며 자신의 까다로운 성격을 억누르는 침착성, 인내심, 그리고 겸손함, 관용,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이상적인 외교관에 필요한 능력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지능, 지식, 통찰력등과 같은 것들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이겠죠.나 : 그럼 저것들을 모두 가진 외교관이 이상적인 외교관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저자 : 네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나 : 그런데 저런 이상적인 외교관 자질을 가진 외교관이 있을까요?저자 : 물론 저 모든 것을 갖춘 외교관은 찾기 힘들껍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한 프랑스의 외교관들이 저 자질의 기준에 있어 굉장히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군요.나 : 프랑스요? 그렇다면 프랑스의 외교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주시죠? 덧붙여 유럽의 나라들 중 눈에 띄는 나라들의 외교까지 설명해주세요.저자 : 알겠습니다. 우선 프랑스의 외교는 아까도 말한거와 같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유형원칙은 자국의 무게에 의하여 천평을 기울일 수 있는 경우에나 바람직한 것으로 보는 입장이지만 영국은 유럽의 지배를 모색하는 어떤 국가도 반대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영국의 외교는 독특한 경험주의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영국 외교의 주 덕목은 기사도, 객관주의, 인도주의를 꼽으며 현실주의 사이에서 훌륭한 외교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런 외교야 말로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함에 있어서 가장 도움이 되는 것임을 충심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독일의 외교는 전사적이거나 군사적 개념을 띄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뢰심을 갖게 하는 것보다는 공포심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던 거지요. 그리고 정책에 있어서 항상 권력정치의 종속적인 경향을 보여왔으며 무력을 행사하리라는 위협이 형상의 주요한 수단이라고 확신하며 국가의 존재 이유는 개인의 종교나 철학에 우선한다는 이론이 외교정책에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나 :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들어 보니 외교론 내용을 모두 이해 한 것 같은데요. 한 가지 궁금한것은요. 저렇게 각 나라들마다 외교의 형태나 성격이 틀린데 외교에 있어서 정해진 규칙이라든지 하는 것이 있습니까?저자 : 정해진 규칙은 없습니다. 다만 1차 대전 이후 원탁회의나 회담식 외교를 통해서 이루어 지고 있구요. 여기서 원탁회의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몇몇 동맹국의 수상이나 전문가가 원탁에 마주 앉아서 전쟁의 공동 수행에 요구되는 전략과 정책에 대한 긴박한 문제를 토론하는 형식이고 회담식 외교는 정책을 수립하는데에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협상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고, 막대한 시간이 절약되며, 보다높은 유동성을 취할 수 있고, 빈번한 모임중에 수상들은 서로의 얼굴을 익히게 되고 때로는 서로 신뢰할 수 있게 되는 특징을 지녀 오늘날에도 상용되고 있는 방법입니다.나 : 나 그럼 때에 따라서 조금씩은 틀리다고 할 수 있겠군요?저자 : 그렇습니다. 하지만 방법은 틀려도 외교용어자체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결과나 형태는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나 변해가고 있으며 한 국가의 특징, 외교관의 자질이나 성격 등에 의하여 언제나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외교용어나 외교절차상의 문제점들은 고치고 정리하는 과정을 거쳐야 더 평화적이고 국가나 개인적 외교에 있어서 오해가 없고 좀 더 나은 외교의 과정을 거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외교론은 번역본이었다. 번역을 해놓은 사람이 굉장히 대충했는지 아니면 책 자체가 어려운지 내용을 읽어도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굉장히 많았다. 내가 이 책을 읽기까지는 참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우선은 책 자체를 알지 못했다. 단순히 레포트라는 과정을 거치기 위하여 읽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외교학을 배우는 입장에서 해롤드 니콜슨이라는 사람자체도 몰랐다는 것이 지금에서야 무척 부끄럽다. 외교론 레포트가 결정된 날 인터넷을 뒤지니 외교하면 니콜슨이라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있었다. 나만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서 써야 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책을 읽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책은 구하기 힘들 줄 알았다. 워낙에 오래되고 낡은 책이라 사야 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다행이 도서관 4층에 보존으로 남아서 간신히 빌려 볼 수 있었다. 책을 열어 본 순간 난 가슴이 답답했다. 어려운 책을 많이 접해 보지 못해서 일까. 아니면 내가 책 원래 안 읽어서 일까.책 읽기가 그렇게 쉽지많은 않았다. 모든지 시작이 어렵고 시작이 반이라 했던가. 외교의 기원부터 시작한 외교론의 발단은 그렇게 나에 머리에 들어 왔다. 외교는 협상에 의하여 국제관계를 다루는 일이라 저자는 말했던가. 국제관계는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수도 없겠지만 베스트팔렌 조약이후 외교적용어가 등장했다고 하니 그때쯤부터 외교라 칭할 수 있는 회의나 회담이 생겼을 꺼라 생각된다. 물론 그 옛날 페르샤전쟁이나 펠로폰네소스전쟁 시대에 외교란 비슷한 개념으로 전쟁을 막기 위한 아니면 일으키기 위한 외교를 했을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외교라기보다는 힘의 논리에 의하여 힘이 강한 쪽은 짓누르고 힘이 .
1. 청의 개국① 개국 이전의 청 무역(1) 광둥무역중국 남부의 광저우에서 중국 상인과 외국 상인사이에서 행해졌던 무역 형태로 중국의 모든 대외적인 무역은 이 도시로 제한되어 있었다. 청나라와 무역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매우 제한적이었고 훗날 이것이 서양 열강으로 하여금 강제적이고 무력을 통한 조약을 맺게 하는 이유였다.(2) 공행상인정부로부터 외국 상인과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가받은 조합(독점권 소유)으로서 외국 선박을 감독하고 관세 징수를 담당하였다.② 아편전쟁(1840)(1) 원인영국은 중국에서 차, 비단 등을 수입하고 모직물과 향료 등을 수출해 왔다. 이 시기 중국의 조세제도는 ‘지정은제‘이었으므로 모든 화폐는 은이었다. 영국은 귀정법(중국 茶 수입관세 10분의 1로 인하)실시로 수입의 양이 수출보다 많은지라 은 부족현상이 두드러졌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 해 영국은 아편을 판매하기 시작한다. 아편 수입이 날로 증가하는 중국은 아편 수입을 금지시키지만 밀매형식으로 중국에 계속 유입된다. 중국의 은 유출이 심각해지면서 국민 생활이 피폐해지고 은가의 등귀현상이 나타났으며 통화제도에 혼란을 야기시켰다. 이에 중국은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광동에 파견한다. 아편 금지령을 내리고 모든 아편을 몰수, 폐기한다. 더욱이 중국인 살해 사건까지 일어나 중국과 영국의 관계는 더욱 악화된다.(2) 경과영국은 군함을 이끌고 교섭을 시도한다. 영국의 무리한 요구에 교섭은 결렬되고 양국은 무력 충돌로 이어진다. 전투는 영국에게 유리하게 진행되고 결국 중국이 항복함으로써 전쟁이 막을 내리고 난징조약이라는 양국 간의 조약이 맺어진다.(3) 의의ㆍ서양이 중국을 반(半)식민지화하는 근본 제공ㆍ중국 봉건사회의 뿌리가 흔들림ㆍ중국 근대화 운동에 자극ㆍ개국의 배경③ 난징조약(1842)(1) 주요 내용ㆍ홍콩을 영국에 할양ㆍ광주, 하문, 영파, 상해, 복주의 다섯 개 항구 개항ㆍ개항장에 영사 설치ㆍ2,100만 달러 배상금 지불ㆍ공행을 폐지하고 영국과 자유무역(2) 의의영국은 이후조의 금지 ㉡기독교 금지 ㉢무기수출 금지 ㉣일본인의 해외 이주 및 도항 금지 ㉤중국, 홀란드와의 무역을 2개의 항구로 제한할 것 등의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홀란드 어 연구에 의한 소위 난학은 허용되어서 일부 서양문물을 접할 수는 있었다.(2) 상업 자본주의의 발달에도 막부 말기, 조공 관계의 형태로 농업 생산의 착취 관계를 경제적 기반으로 한 봉건적사회분위기는 그대로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으나, 이미 도시에서부터 진행된 상업 자본주의는 지배 계급인 무사 층을 새로운 문명이 제공하는 여러 가지 편리와 쾌적으로 매혹시키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발전중인 상품경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 상급 무사 층은 점점 생활이 궁핍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수입의 증가를 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자 그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일하는 농민들을 더욱 착취하거나 상인들에게서 돈을 빌리는 방식으로 생활기반을 유지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군에게서 소량의 쌀이나 대금을 봉록으로 지급받아오며 살아온 하급 무사 층은 수입을 늘릴 수 있는 여지가 없어 경제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개국을 한 후 더욱 심해져 하급 무사 층 및 생활이 어려워진 사람들의 불만은 점점 커져나갔고 결국 후에 하급 무사 층의 주도로 반막부적 성격을 띤 존왕양이 운동이 발생하게 되었다.(3) 아편전쟁에서의 패전으로 인한 중국의 개국일본은 중국을 아시아의 중심적 위치라고 받들어왔다. 그러나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강압적인 조약을 맺는 상황을 지켜 본 일본은 큰 충격을 받고 서양 열강세력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러한 패배주의적 심리가 저변에 깔려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은 자주적인 개국을 하지 못하고 강제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게 된다.② 미국 - 가나가와 조약(1) 배경미국은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여러 서양열강들과 불평등조약을 맺을 때 자국의 면공업 수출을 위해 중국시장에 욕심을 냈다. 그러나 미국에서 중국으로 배를 운항하기 위해선 태평양을 횡단해야 했기 때치외법권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었다.ㆍ통사, 영사규정의 배제 : 일본은 끝까지 통상관계수립을 반대하였다. 단지 미국이 필수품의 대금을 금은화로 지불하고 자국의 화물을 다른 화물과 교환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통상의 길만 터놓았을 뿐이었다. 더불어 일본은 18개월 이후 양국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 미국은 시모다에 영사 또는 대표를 파견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ㆍ비준관계 : 18개월 이후 조약을 허용한다는 국서를 교환하도록 타결하였다.(4) 결과ㆍ최혜국대우 조항으로 인한 다른 열강들과의 조약체결 : 최혜국대우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빚어진 결과로 이 조약 때문에 일본은 미국과 조약한 내용의 대부분을 영국, 러시아, 홀란드 등의 나라와도 맺어야 했다.ㆍ치외법권의 인정 : 일본 내 표류한 미국인에 대해서는 일본의 국내법이 아닌 ‘공정한 법률‘을 적용시킨다는 조약을 맺음으로 국내의 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김.ㆍ일본이 맺은 최초의 근대조약 : 자주적으로 맺은 조약이 아니라는 점과 완전한 개국 조약이 아닌 점은 미흡하지만 어쨌든 일본이 최초로 맺은 근대조약이며 이를 시작으로 일본은 다른 여러 서양 열강들과도 화친조약을 맺게 된다.③ 영국, 러시아, 홀란드와의 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 이후 영국, 러시아, 홀란드는 최혜국 대우 조항을 들며 일본과의 화친조약을 맺으려 했는데, 대부분의 내용은 미일화친조약의 내용을 따르고 있다. 다음의 내용은 미일화친조약에 없었던 내용을 특징으로 삼아 기술한 것이다.(1) 영국 : 영일조약은 전권이 없는 스털링이 체결한 것으로써 국제법상 예외적인 것이었다.(2) 러시아 : 국경에 관한 규정이 있었다.미일조약에는 없었던 영사재판에 관하여 쌍무적인내용으로 규정하였다.(3) 홀란드 : 홀란드 인은 그들의 거주지인 나가사키와 데지마로부터 희망하는 지역으로 여행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었다.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처음으로 일방적인 영사재판권을 허용하게 됨으로써 불평등 조약 관계에 들어서게 되었다.④ 미일수호통상조약(1) .ㆍ일본에 있는 미국인은 신교와 예배당 건설의 자유가 있다.ㆍ일본에 거주하는 미국인은 일본인을 고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군함, 증기선, 상선 및 병기 들을 구입할 수 있으며 또 미국인의 과학자, 군인을 고용할 수 있다.ㆍ조약 내에 있는 무역장정으로 일본의 수출품은 모두 종가 5% 수입품은 몇 가지 품목을 제외하고는 종가 20%로 양국 간 관세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일본도 1866년 개세약서에 의해서 중국과 같이 5%의 수입관세를 적용받게 되었다.⑤ 홀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의 수호통상조약(1) 홀란드 : 내용의 대부분은 미일조약을 모델로 삼은 것이지만, 예외로 홀란드 인의 일본어, 일본 예술의 학습에 관한 규정을 두었다.(2) 러시아 : 러시아와의 통상조약 역시 미일조약의 내용과 흡사하나 영사재판이나 최혜국 대우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무적인 것으로 규정되었다.(3) 영국 : 영국은 미일조약에 근거하여 조약 내용을 손질하였으나 영사재판권에 대해서는 더 상세하게 규정토록 하였다.또 영국의 주요수출품인 면제품과 양모가 5% 수입관세를 받도록 하였다.(4) 프랑스 : 프랑스 대표 역시 톈진조약을 끝맺고 일본에 건너와 10월 9일 영일조약과 같은 내용으로 조약을 체결하였다.(5) 결과ㆍ이들 조약들은 불평등 조약의 3대 요소인 일반적인 영사재판권, 협정세율, 그리고 최혜국대우 조항을 모두 담고 있었다. 때문에 일본은 개국 이후 서양 열강들과 관계를 맺고 교류하는데 있어 자주적인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ㆍ통상조약으로 인해 서양 열강에서 수입품이 들어오게 되자 물가가 크게 폭등하고 일본의 금은이 해외로 유출되었다. 때문에 하층민들은 개국 이전보다 더 큰 경제적 타격을 받았고 이것은 개국으로 인한 부정적인 측면으로 점점 부각되어 갔다.ㆍ개국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불만이 점차 커지면서 천황을 받들고 서양세력을 배격하자라는 존왕양이 운동이 급속하게 퍼지게 되었고, 이 운동세력은 조정을 지지하며 칙허 없이 조약을 체결한 막부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선의 개국① 19세기 중반의 조선역사적으로 존재하였던 여러 국제정치 권역간의 충돌을 국제법칙으로 나타낸 형식이 곧 수호조약이다. 이런 조약이나 충돌을 개국조약이니 개국이나 호칭하는 것은 세계를 재패하게 된 서유럽 세계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이고 그들의 자만심을 은연 중 함축하고 있다.조선이 유교권의 질서를 고수할 수 있었던 계기는 ㉠ 지리적으로 보아 동서 항행의 요충에 위치하고 있고 ㉡ 조선 안에서 서양세력과의 교섭을 반대하는 세력이 청일에 비하여 격렬했다. 이는 후에 제너럴셔먼호 사건,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에서 구미 세력을 퇴치시킴으로써 서양 사정을 옳게 파악하지 못하고 유교권의 질서 유지를 가능하게 했다.②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년(고종 3)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가 대동강으로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서 강제로 통상을 요구하다가 군민(軍民)의 화공(火攻)으로 불타 침몰된 일.80t급 증기선으로 12파운드의 대포 2문을 비치하고 총 24명의 승무원으로 구성되었던 셔먼호는 8월 9일 즈푸를 출항하여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이때 조선 관리는 국법에 어긋난 영토침략임을 주장하며 이들의 강행을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셔먼호의 승무원은 불응, 평양 만경대(萬景臺)에까지 올라와 병인사옥(丙寅邪獄)의 보복으로 프랑스함대가 내침할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통상·교역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조선 측이 이를 완강히 거절하자 셔먼호는 중군 이현익(李玄益)을 납치하는 등 난폭한 행위를 하여 결국 평양군민과 충돌하게 되었다. 셔먼호의 대포에 맞아 조선 군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는 화공으로 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을 몰살하였다. 이후 미국은 항의각서를 보냈고 2차례에 걸친 탐문 끝에 1871년 응징적인 조선원정을 단행하였으며 후에 신미양요(辛未洋擾)의 계기가 되었다.③ 병인양요1866년(고종 3년)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사건인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한 사건.(1) 배경ㆍ1866년 초에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금압였다.
◆목차◆1. 단원제와 양원제란..?2. 단원제와 양원제의 선출방법.3. 단원제를 채택한 나라들..(한국)4. 양원제를 채택한 나라들..(지역대표제-일본 연방형양원제-미국 영국 독일)5. 양원제와 단원제의 장점과 단점6. 맺음말1. 단원제와 양원제◆ 단원제의회가 2개의 합의체로 구성되는 양원제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일원제라고도 한다. 민선의원 외에 직능대표 중심으로 또 하나의 합의체를 구성할 수 있는 양원제에 비해, 민선의원으로 구성되는 단일 합의체를 특징으로 한다.프랑스혁명 이후 양원제의 제2원을 해로운 존재로 규정하고 의회의 단원구성을 주장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국민주권의 원칙에 비추어 국민의 단일·불가분의 주권은 이원적으로 대표될 수 없다는 논리에 따른다.국정을 빨리 처리할 수 있고 의회경비가 줄어들며, 무엇보다 국민의 의사를 직접 반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국정심의가 소홀해질 수 있고 행정부에 대한 의회의 횡포를 방지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있다.한국을 비롯해 대만·독일·덴마크·폴란드·뉴질랜드·룩셈부르크 등 세계 30여 개국에서 채택하여 운영중이다. 한국은 제2공화국 때 잠시 양원제를 채택한 적이 있었으나, 제헌헌법과 제3공화국 이후의 헌법은 모두 단원제를 채택해왔다. 전세계 183개국 중에서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는 110개국(아시아의 경우 단원제 12개국, 양원제 9개국으로 숫자가 비슷한 반면 중동의 경우에는 단원제 국가가 11개국인데 비해 양원제 국가는 요르단의 1개국뿐이며, 유럽에서는 단원제 국가 26개국에 양원제 국가 24개국으로 비슷하다)◆ 양원제이원제(二院制)라고도 한다. 양원제는 의회제도의 모국(母國)인 영국에서 그 특수한 역사적 ·정치적 상황에서 채택된 것으로, 상원(House of Lords)과 하원(House of Commons)의 이원제에서 출발하였다. 단원제(單院制)는 의회가 국민에 의하여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양원제는 국민투표에 의해서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되는 다수의 제1원(院)과 투표 ·임명 ·세트, 프랑스 하원, 인도 하원, 인도네시아 상?하원, 이탈리아 상?하원, 싱가포르, 터키, 영국 하원, 캐나다 하원 등6년대만 상원, 아르헨티나 상원, 일본 상원, 필리핀 상원 등8년브라질 상원, 칠레 상원9년아르헨티나 상원, 프랑스 상원임기다양오스트리아 상원, 스위스 상원(캔턴이 임기 결정)종신직캐나다 상원(75세에 은퇴), 영국 상원2. 단원제와 양원제의 선출방법◆단원제단순다수제, 절대다수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단기이양식 비례대표제, 비례대표제와 1선거구 1인 선출제를 혼합한 제도 등을 선택적으로 채택한다. 아시아의 싱가포르에서는 83개 의석을 9개의 소선거구에서 1명씩, 15개의 집단선거구에서 4~5명씩을 선출하나 비례제는 아니다.◆양원제①하원대부분의 국가에서 직선으로 선출된다. 대만에서는 236석의 입법원 의석 중 지역구에서 176석을, 비례대표제로 70석을 뽑는 혼합선거제이다. 일본도 하원인 중의원은 500석 중 300석을 소선거구제로 뽑고, 200석은 비례대표제로 뽑는 혼합선거제이다. 일부 국가들에서는 하원의원도 직선이 아닌 방법으로 뽑는다. 아프리카의 스와질랜드에서는 하원의석 65석 중 55석은 지방의회가 지명하는 사람들로 결정하며, 나머지 10석은 국왕이 지명한다. 또한 일부에서는 소수민족에게 하원의석의 일부를 할당하거나 또는 인종간에 의석을 할당한다. 인도에서는 545석의 의석 중에서 543석은 직선으로 뽑고 나머지 2석은 영국계 인도인 사회를 대표하는 사람에게 할당한다.②상원ⅰ) 국민들이 직선으로 선출하는 방법(대만,일본,필리핀,노르웨이,벨기에, 스페인,미국,베네수엘라,아르헨티나,칠레,오스트레일리아 등)-대만의 국민대회의원은 1996년 3월까지는 간선제였으나 이후에 직선제로 바뀌었다. 334석중 228석은 1선거구 1인 선출제로 선출하고, 80석은 정당별 득표율에 따라 배분하는 비례제이고, 대만 원주민에 6석, 해외거주 대만인에 20석을 배당한다.ⅱ) 주의회가 뽑는 간선제이거나 국왕, 대통령, 총리 또는 야당지도자들이 지명하는 방법. 아를 거부할 수 있음(국회법 제84조2항)(라) 중의원의 혼합형 선거체제)① 중의원은 임기 4년의 500명 의원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 300명은 1석 선거구 1위대 표제를 통해 선출하고 나머지 200명은 명부비례대표제로 선출한다.② 9명(北海道) 내지 23명(九州)을 선출하는 11개 비례선거구(지역블록)를 둔다.③ 폐쇄형 명부의 의석배정은 동트식으로 한다.④ 1석 선거구에 당선되기 위한 최소조건으로 선거구 유효투표의 6분의 1 이상 득표를 규정하고 있다(공직선거법 95조 1항). 비례선거의 경우 의석배정 최소조건을 두지 않 는 대신 정당이 비례 선거구에 명부 입후보를 할 수 있는 최소조건을 규정하고 있다. 즉 중의원 또는 참의원 의원 5명이상을 가진 정당, 직전 선거(중의원 총선 또는 참의 원 통산선거)에서 2% 이상 득표한 정당, 비례선거 각 지역블록 정원의 20% 이상 후 보자를 낼 수 있는 정당만이 명부입후보를 할수 있다.(공직선거법 86조 2항의 정당 조건)⑤ 1석 선거구와 비례명부에 동시 입후보가 가능하다.⑥ 각 정당은 지역 비례명부에만 입후보하는 후보의 수를 10명까지 공천할 수 있다. 단 중복 입후보자는 이 10명 규칙에 적용 받지 않는다.⑦ 위 ⑥의 10명 규칙을 지키면서 중복 입후보를 허용한다는 것은 결국 같은 순위에 여 러 명의 후보가 함께 공천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의석배정 과정에서 명부 상 동순위 후보들의 순위를 가려야 할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때는 석패율(惜敗率))에 따른다.석패율은 낙선후보들이 타당의 당선후보를 상대로 ‘얼마나 선전했는가’를 비교하기 위해, 낙선한 후보의 득표수가 얼마만큼 당선후보의 득표수에 근접했는가는 백분율로 나타낸 것이다. 서로 다른 1석 선거구에 출마해 낙선한 같은 당 후보들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선거구 환경과 경쟁조건의 차이점을 공평하게 반영해야 하는데, 석패율은 또 다른 문제점을 수반하지만 중복입후보와 동순위 입후보를 허용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 는 불분명하게 나타난다. 일본 동북대학 동북정치행정연구회 아베 시로 교수팀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정당중심의 선거였다’고 평가하는 유권자가 50.1%로 가장 많았다. 하지만 실제 정당을 투표선택의 기준으로 한 유권자는 41.4%에 불과하였고, 이러한 결과는 1993년 조사결과보다 1.8% 높으나 1990년 조사결과보다는 6.2%로 낮아진 것이다. 또한 카바시마 이꾸오는 투표요인을 정당평가, 후보자 평가, 쟁점평가, 정치불만족, 단체가입, 사회적 속성 등으로 나누어 통계분석한 결과를 근거로 정당평가 요인보다 후보자 평가 요인의 영향이 컸음을 보고하고 있다.후보자 선정과정에서의 당내 경쟁은 과거 SNTV제 선거에 비해 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민당의 경우 1993년 129개 선거구에서 당선된 211명의 중의원이 있었기 때문에 선거구와 지지기반이 당내 의원들간에 중복될 수 밖에 없었고, 1996년 중의원 선거구 조정 이후 한 선거구에 복수의 현역의원이 출마를 희망하는 사례가 속출하였다. 자민당은 기본적으로 의원간의 자율적 해결을 유도하였지만 결국 이러한 문제의 해결과정에서 당내 경쟁은 심화되는 양상을 보였으며, 같은 맥락에서 1석 선거구와 비례선거구 후보 선정을 둘러싼 당내 파벌간 경쟁 행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1998년 7월의 오부치 총재 경선과정은 자민당이 과거의 파벌정치에서 크게 다라진 점이 없음을 여실히 드러낸 예라 할 수 있다.끝으로 1996년 선거는 지방의원, 지역 유지들, 기업, 후원회 등의 활동이 활발하였고, 3,300개의 자치단체는 공공사업에 관한 예산배분을 염두에 두고 당선가능성이 높은 후보를 지원하는 현상이 두드러진 선거였다. 처음 치르는 1석 선거구제 선거였기 때문에 지지기반을 조성하는 데 특별히 많은 정치자금이 소요되었고, 비례선거구의 순위경쟁에 금권적 영향이 미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도 있었다. 물론 선거비용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후보자 가족 등의 선거법 위반에 대해서도 당선무효와 피선거권의 제한을 적용하는 연좌제(連坐制)의 도입으로째, 그러나 여전히 후보선출과정에서의 지방 코크스는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제도상으로 예비선거는 코크스의 패쇄적인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제도적 고안이지만 그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셋째, 예비선거의 선거과정은 주선거관리위원회의 관리?감독하에 이루어진다. 미국과 독일의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경우에 의회 의원 후보자의 선출과정은 대게 정당의 당헌과 당규에 위임되어 있고 연방이나 주의 법률로 규정한 경우는 많지 않으며 따라서 중앙이나 지방의 공적인 선거관리기관이 관리?감독하는 것도 예외적이다.미국에서의 예비선거의 발달은 1900년대 초 일군의 진보주의적 정치인과 학자들에 의해 촉발되었다. 이 시기의 진보주의자들(progressivists)은 이익단체와 심지어 정당을 포함하는 시민사회의 특수이익을 반영하는 집단을 불신하고 개별 시민의 선한 의지와 지혜를 신뢰하여 의원후보자들을 정당간부들에 의해 지명하는 방식보다는 주정부의 관리?감독하에 유권자가 직접선출하는 직접예비선거(direct primary)의 도입을 지지하는 정치개혁론자들이었다.) 후보자의 선출권을 중앙이나 지방의 당간부로부터 유권자에게로 환원한 분권화의 정치개혁은 예비선거의 발달과 함께 진보주의자들이 의도한 바대로 잘 실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 미국의 정당들은 유럽의 다른 정당들에 비해 정당의 응집력이 떨어진다고 평가된다. 이는 분권화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지만 선거와 의회정치에서의 정당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축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실제로 학자들은 제한예비선거는 정당조직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고 완전개방예비선거는 정당조직을 약화하는 효과가 있다고 분석한다.) 둘째, 예비선거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는 예비선거에 참여하는 유권자들은 이념과 정책적으로 두 정당의 평균 이념지향보다는 좀 더 극단적이라는 점이다. 즉 공화당의 예비선거에 참여한 유권자는 참여하지 않은 유권자보다 더 보수적이고 민주당의 예비선거에 참여한 유권자는 참여하지 않은 유.)
1. 토양오염⑴원인 및 경로~광산이나 공장 등에서 배출되는 폐기물이나 농약살포 등으로 토양 속에 중금속 등 사람·가축·농작물에 유해한 특정 물질이 높은 농도로 집적·축적되는 것. 토양오염은 대체로 지하자원의 이용으로 암석 중의 무기성분이 지표에 쌓이게 되거나, 농약에 의해 합성유기염소계화합물이나 알킬수은화합물 등 천연계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 유기물질이 축적되어 유발되며, 공업단지와 도시 매연가스에 의한 산성비, 식품 포장 폐기물, 시설축산의 폐기물 등에 의해서도 발생한다.~중금속 : 토양에 유입되는 대부분의 물질은 토양의 정화작용으로 분해된다.그러나 중금속은 토양에 오래 남아 있으며, 식물의 성장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생 물체에 축적되는 경향이 있다.토양 오염을 일으키는 중금속으로는 수은, 카드뮴, 구리, 티타늄, 납, 니켈, 아연 등이 있다. 중금속은 광산이나 제련소, 염색공장 및 도자기 공장 등을 통해 토양 에 유입된다. 건전지를 머리거나 살충제를 살포하는 과정에서도 중금속 오염이 일 어난다. 특히, 광산, 발전소, 제련소, 쓰레기 처리장, 공업단지 등의 주변 토양은 국지적으로 심각하게 오염이 진행되고 있다.~농약과 비료 : 농약이나 화학 비료는 손쉽게 농업 생산량을 증가 시킨다.그러나 이들 성분 중에 농작물이 흡수하지 못하는 물질은토양 중에 잔류하여 토양을 오염시키고, 영양소를 보유하는 능력을 저하시킨 다. 우리 나라의 토양은 전박적으로 농약이나 비료의 오염도가 낮은 편이었 지만 수십년 동안 농약을 사용해왔기 때문에 토양오염과함께 토질의 척박화 가 우려되고 있으며, 또 농업 용수의 오염과 산성비, 부유 분진 등으로 말미 암아 토양 중에 유해물질이 축적되고 있다.⑵토양오염 물질~토양오염물질은 토양 중에서 분해되지 않고 잔류성이 강한 물질로, 농작물의 생육과 사람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물질을 말한다. 현재 토양환경 보전법에 의해 토양오염물 질로 관리되고 있는 물질은 중금속, 석유류(유류누출 지표물질), 농약(유기인 화합물), 독성 물질(페놀류, 시안화합물중보건상 위해를 비치고 인간이나 동식물의 생활에 해를 주어 도시민의 생활과 재산을 향유할 정당한 권리를 방해받은 상태*한국 : 대기오염 용어 자체에 대한 정의 대신 개별적인 대기오염물질에 관한 정의를 규정.그러므로 인위적인 행위에 발생된 오염물질이 사람, 동식물의 생명 또는 재 산에 해가 될 정도로 충분한 양, 충분한 시간 동안 대기중에 존재하는 상태⑵대기오염의 원인대기오염 ·소음 ·진동 등은 대부분이 교통수단에 의한 공해이다. 그 밖에 선박에 의한 해수오염, 세차장 등에서 배출되는 폐유지류로 인한 수질오염도 문제가 된다. 자동차 배기 가스에 포함된 대기 오염물질은 일산화탄소 ·탄화수소 ·질소산화물 ·납 등이 있으 며, 일산화탄소에 의한 대기오염의 99 %는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원인이다. 광화학 스모 그의 주요 원인이 되는 질소산화물 ·탄화수소 ·납 등에 의한 대기오염도 대부분이 자동차 의 배기가스에서 기인한다. 항공기에 의한 대기권 오염도 큰 문제가 되어 국제적으로 많은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소음공해의 경우 항공기 소음을 첫째로 꼽을 수 있으며, 다음으로 고속도로의 차량소음, 저속운행시 엔진의 소음, 고속운행시 타이어 소음 등을 들 수 있다. 탄화수소는 휘발유 및 디젤 차량의 감속운행시에 가장 많이 배출되며, 질소산화물은 휘발 유 ·디젤 ·LPG 등 모든 차량의 가속운행시 ·등속운행시 가장 많이 배출된다. 아황산가스 는 디젤유에서 가장 많이 배출된다.⑶대기오염의 농도표시ppm : part per million(백만분의 1)pphm : part per hundred million(일억분의 1)ppb : part per billion(십억분의 1)ppt : part per trillion(일조분의 1)입자상물질 - mg/㎥ 또는 ㎍/㎥⑷대기오염 물질아황산가스, 일산화탄소, 미량 중금속, 규산 유기물질등4. 당진지역의 경제발전으로 인한 오염⑴당진의 토양오염 원인ㄱ. 산업의 발달로 인구가 증가, 그로 인해 급격한 쓰레기양의 증가,=>쓰레기장 건설로 인한 오염ㄴ. 26gLNG : 아황산가스- 0.01g 질소산화물- 0.16g그러나 최선의 상황은 문서상의 이야기에 불과하다.정말 문제는 시설교체, 혹은 안전사고 등으로 인해 탈황시설이 정상 가동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사소한 문제라도 발생한다면 한국판 런던스모스가 불가피할 것이다.탈황시설이 정상가동 되지 않을시 현재의 최고 205%까지 아황산가스가 증가한다는 것 이며 이는 런던스모그를 능가하는 환경대재앙을 경고하는 것이다.◇ 바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엄청난 온배수* 당진화전의 온배수온배수란 뜨거운 발전터빈을 식히고 나온 더운물로 당진화전의 경우 바닷물의 평균 수온보다 7도가 높은 온배수를 배출하게 된다. 1기 1초당 약30톤 배출 8기 가동시 1시간에 144만톤이상 - 시간당 드럼통(200㎏) 7백만개 분량* 보령화력 주민의 증언"2㎞ 수역에 걸쳐 피해를 보상했지만, 즉시 4㎞ 수역까지 피해가 나타났습니다. 지금은 8㎞ 지점까지도 성치 않아 전문가에게 피해조사 용역을 맡겼습니다."◇ 그 밖의 환경피해예상* 질소산화물 급증에 따른 오존 오염급증당진화전은 연간 40,000톤의 질소산화물를 내뿜게 된다. 이는 서울시 전체 배출량의 30%에 해당하는 양인데 이런 예상도 공해방지시설이 완벽하게 가동 된다는 전제하에서 그렇다는 것 이다. 막대한 질소산화물 배출은 석문지역과 당진군 주변에 오존 오염을 급증시켜 오존경보 발령으로 인한 외출과 차량통행이 금지되는 사태가 예견되고 있다.* 수은, 카드늄, 중금속 배출로 인한 피해당진화전으로 인한 환경재앙 중 장기적으로 보아 가장 심각한 것은 중금속의 누출로 인한 것 이 될 것이다. 대기와 해양에 누출된 중금속은 생태계 사슬을 통해 인체에 축적되게 된다.일본 히로시마 예난지구의 시민단체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전 주변의 소나무에서 수은이 검출되고 있다. 석탄에는 수은 등의 중금속이 포함되어 있다. 수은은 어디에도 걸러지 지 않고 대기중에 방출된다. 이것은 우리의 오랜 기간 조사로 인해 입증되었다. 미나마따 병 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파악이 낮은 서해에서 사고를 당하게 될 경우 유 연탄으로 인한해양생태계 파괴를 피할 수 없다. 실제로 연평균 200회의 해난사고가 발생하고 있다는 통계는 이런 우려를 뒷받침하고 있다.* 회처리장의 침출수 유출* 저탄장 비산먼지와 중금속 유출* 하역낙탄 퇴적물로 인한 해양생태계파괴* 수입유연탄의 황 함유량(현재0.6%~2.5, 앞으로 2%이상의 고 유황탄 사용 가능성)* 산성비당진환경운동연합은 당진화력발전소건설을 전면적으로 반대하면서 이런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만큼 당진화력발전소는 당진지역의 환경오염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우선은 보고서에도 제시 되었듯이 가장 영향을 받는 것은 대기오염이다. 토양오염과 즉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대기오염은 화력발전소가 건설됨으로써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전국 유연탄 20%를 당진에서만 뿜게 된다면 서해안 고속도로의 건설로 차량이 급격히 늘어난 당진에 런던스모그보다 더한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따른다. 그리고 대기가 오염될수록 토양의 산성도가 급격히 올라간다. 대기에 모인 수은 등의 물질 등이 비나 다른 것에 의하여 땅에 내려 앉아토양의 산성도가 높아지고 식물들이 잘 자라지 않게 되는 것이다.◇한보철강산업의 환경오염1] 오염물질대 기수 질설비공정오염물질비고설비공정요염물질비고원료하역선내(船內)먼지살수원료야드배수SS살수원료처리컨베이어벨트먼지커버코크스SS, PH집진배수코크스로석탄분쇄기먼지, SOx집진설비세정배수Cyanide석회석가스배송설비먼지집진설비고가스세정SS집진배수소결로컨베이어,파쇄먼지, SOx집진설비제강가스세정SS, Oil집진배수고로선철제조공정먼지, 매연집진설비연속주조압연배수SS스케일세정집진배수SS, Oil열연압연배수SS스케일세정전로정련과정먼지, 매연집진설비집진배수SS. Oil진기로정련과정먼지, 매연집진설비냉연압연배수SS, Oil, PH압연유세정산세배수SS, COD압연가열로먼지, SOx집진설비도금배수SS, Cr, PH보일러연소 과정먼지, SOx집진설비강관산세배수SS, PH유화성형유야적장고철 야적비산먼지살수기타도로, 야드SS, BOD>압연공정산세 등의 배수와 스케일, 폐유, 슬러지 등 폐기물이 발생한다.=>황산하등물, 질소산화물1992년 기준 제철소에서 사용하는 연료중 포항 공장은 88%, 광양 공장은 86%를부생가스로 사용하고,나머지 l2~l4% 정도만 중유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SOx, NOx의 배출량이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포항제철소의 SOX 배출농도는 200~600ppm수준 으로 법정 기준의 절반 이하의 수준=>폐기물폐기물은 슬래그, 먼지 , 슬러지, 밀스케일, 폐유, 폐산, 폐연와 순으로 많이 발생된다. 슬래 그는 철을 용해시킬 때 용제의 작용으로 생긴 비철금속 산하물질로 제선 · 제강 공정에서 발생되며, 먼지는 전 공정에서 발생되나, 소결과 제선 공정에서 특히 많이 발생된다. 슬러지 는 폐수처리 과정에서 ,밀스케일과 폐유는 압연 공정에서, 폐산은 산세과정, 폐연와는 고로 에서 발생된다. 이들 폐기물의 연간 발생량을 보면 고로 슬래그 800만톤, 전로 슬래그 300 만톤, 먼지 70만톤, 슬러지 48만톤, 밀스케일 25만톤, 폐연와 l8만톤, 폐유 6,000톤. 폐산 3,000톤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보철강은 충남 당진에 자리 잡고 있는 철강산업체이다. 1980년대에 세워져 1997년 부도를 맞고 사라질 뻔한 기업이다. 당진에 20년 동안 자리 잡으면서 당진발전에 큰 도움을 주고 크게 기여한 한보철강이지만 환경 분야에서는 질타를 피할 수 없다. 우선은 대기오염분야이다.80년대 제철산업으로 시작한 한보철강은 시설의 미비로 각종 매연을 그대로 내보냈다. 그 덕분에 그 주위에는 항상 공기가 탁하고 흐린 날이 많았다. 그 다음으로 수질오염이다. 제철을 하는 동안에는 폐수가 많이 나오는데 한보철강에서는 그것을 정화시키지 못하고 그냥 방류했다. 그 때문에 서해안 한진 앞바다 는 오염의 정도가 심했고 어획량이 상당히 줄어 들었다. 위에 정도의 오염물질이 그대로 방출 되었을 경우 어획량 정도의 감소가 아닌 인체에 수은드의 축적, 토양의 심한 산성화, 수질의 3급수 이하의 오염, 심이다.
1.임진왜란의 배경1.우리나라의 사정* 오랜 평화로 인해서 국방을 소홀히 하고, 양반의 편당과 정치기강이 해이해져있었음.* 전체적으로 일본을 얕잡아보는 경향을 가짐.* 조세제도의 문란으로 민심이 혼란해짐.* 국제적인 변화에 대처하지 않음.* 진관체제->제승방략체제조선의 국방체제는 원래 중앙군(中央軍)과 지방군(地方軍)으로 나뉘어 있었다.중앙군은 5위(五衛)라 하여 중위(中衛)를 중심으로 전위(前衛), 후위(後衛), 좌위(左衛), 우위(右衛)로 구성되어 5위 도총부(都摠府)가 지휘했다.그러나 평화의 세월이 계속되면서 중앙군은 유명무실해져 실제 전쟁이 터졌을 때에는 그 존재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에 비해 지방군은 비록 문관 통제하에 병력은 부족했어도 그 존재는 있었고 어느 정도의 군사력을 유지해 왔다.지방군은 원래 진관제(鎭管制)로 편성되었다. 각 도의 감영이나 전략적인 요충 등 한두 곳에 주진(主鎭)을 설치하고 주진은 도내 중 읍성에 설치된 거진(巨鎭)을 거느린다. 거진은 도의 크기에 따라 적게는 3개(황해도), 많게는 20개(평안도)까지 설치되었다. 거진은 다시 군현마다 설치된 제진(諸鎭)을 거느리게 되어 있었다. 수군 체계도 육군의 진관체계와 같이 했다. 이같이 진관제는 지역 방어, 진지방어 개념으로 요새등에 상주병력을 배치해 두었다가 전쟁이 나면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도록 하는 방어체계였다.그런데 진관제는 군정이 해이해짐에 따라 상주병력이 유명무실해졌을 뿐 아니라, 설사 병력이 제대로 배치되어 있다 할지라도 병력이 요새마다 소규모로 분산 배치됨에 따라 대군으로 쳐들어오는 적군에 대항하기가 어려우며, 요새 하나가 무너지면 차례로 무너지는 약점이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은 제승방략(制勝方略)을 도입했다. 제승방략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군사를 분산시키지 않고 한 곳에 모아 두었다가 조정에서 내려온 장수의 지휘를 받아 전장으로 이동, 대규모 적군과 정면 대결하는 병력 운용 개념이다. 군사력을 집중시키는 장점이 있었으며 일종의 기동방어 개념이었다.그러나 진관 가문의 지배권 유지를 위해서일본의 전쟁은 이미 막바지에 이른 상황이다. 그러므로 통일이 종결된 이후에 휘하 무장들이 삼삼오오로 단합을 하여 저항세력으로 변할 경우 전통적인 가신집단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던 토요토미 가문의 지배권 유지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가장 손쉽게 잠정적인 적대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써 외국원정의 길을 모색하였던 것이다.2.탄금대전투1.탄금대 전투의 배경* 이일이 1593년 4월 24일 상주에서 가토에게 패함* 조령 죽령에서부터 충주로 무혈입성함.2.탄금대 전투의 병력상황* 일본군 측 : 좌익대장 - 마쓰우라 : 3천명중앙대장 - 고니시 : 7천명우익대장 - 소 요시토모 : 5천명예비대장 - 아리마 하루노부(합계 3천 7백여명) - 충주성에 위치* 4월 28일에 일본군의 제1군 일만 오천여 명 충주 남쪽의 단월역에 도착* 일본군의 주장 고니시군이 중앙을 담당하고, 소 요시토모 군이 좌익, 마쓰우라군이 우익이 되어 탄금대를 삼면에서 포위함* 충주성에 진입하려고 북상하다가 탄금대의 신립군과 접전을 벌임* 조선군 측: ·신립이 팔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탄금대로 나아 가 배수진을 침일본군의 선봉이 신립군의 대열 중앙으로 접근→신립은 기병 제 1진 천여 명을출격시켜 적을 제압→제2진 천여 명을 출격시켜 일본군을 단월역 쪽으로 격퇴→일본군이 병력을 증강시켜 재차 신립군의 전방으로 돌진→제 3진 이천여 명을 투입→일본군을 격퇴.3.탄금대 전투의 경과* 1593년 4월 25일 : 고니시 유키나가가 상주에서 이일의 군사를 격파* 1593년 4월 26일 : 신립 충주에 도착하여 단월역에 진지를 침* 1593년 4월 28일 : 고니시의 군대가 충주 남쪽 단월역에 도착정오에 전투 개시일본군은 3군으로 나누어 쳐들어옴신립은 최후에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마지막 순간이 닥치자 남한강으로 투신 하여 자결종사관 김여물과 충주목사 이종장 등 주장 신립을 따라 자결하거나 적진으로돌격하여 죽음.4.패전의 원인* 조령을 지키지 못했음* 기마병 밤길을 걷다가 어두워서 하룻밤을 쉬어가려고 인가를 찾다 보니 산중에서 등잔불이 반짝이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반갑게 달려가 보니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었다. 신장군은 대문간을 들어서며 주인을 불렀는데 여러 차례의 재촉을 받고 나타난 것은 한 어여쁜 처녀였던 것이다.신장군이「나는 과객인데 일모하기에 하룻밤을 쉬어 가고자 하는 사람이오」하고승락하기를 청하니 그 처녀는 한 마디로 거절을 하고 나서는 구슬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의아하게 생각한 신장군은 다시 말을 이었다.「어른들은 어디 갔기에소녀가 나왔으며 눈물을 흘리는 연유가 무엇인고」하고 다구쳐 물었다. 처녀는 입술을 깨물고「저의 집은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밤중이면 괴물이 나타나서가족을 차례 차례로 잡아 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이 홀로 남은 소녀의 차례입니다」하고 흐느껴 울어댔다.신장군은 자못 기이한 일인지라 한참 눈를 감고 섰다가 소녀보고 울음을 그치라고하더니 두 눈섭을 곤두세우며 말을 이었다.「걱정말라 그것은 오늘밤 내가 처치해주마」하고 장담을 하며 대문안으로 들어가 마루에 앉아서 상세한 내막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밤도 오래되니 괴물이 나타날 시간이 가까워 왔다. 신장군은 투구를 갖춘 후 문 옆에 잠복하고 서 있었다. 과연 야심경이 되자 닭의 홰 치는 소리가 나면서 공중으로부터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더니 온 집안을 한바퀴 돌아서 소녀가 있는방을 향해서 덤벼드는 찰라였다.신장군은 때를 놓칠세라 장도를 빼어들고 비호같이 덤벼들어 내려치니 괴상한 소리와 함께 마당 복판에 나 뒹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한마리의 닭이였던것이다. 신장군의 몸에서도 비지땀이 흐르고 있었다.방안을 들여다보니 처녀는 실신을 하고 누워있다. 신장군이 처녀를 소생시키고 나서 다시 닭의 내력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이 집에서 수십년간 길러온 암닭이 있었는데 알도 못낳고 보기도 싫고 잡아먹지도못하겠고 해서 강물에다 버린 일이 있었는데 얼마 후에 그 닭이 다시 찾아 들어 왔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번엔 깊은 산속에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쯤 가자니까 뒤에서「장군님! 장군님!」하는 애달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장군이 조급히 돌아보니 그 집은 화염에 싸여 있고 그 처녀는 지붕에서 손을 흔들며「장군님은 나를 버려도 나는 죽어서도 장군님을 따르겠습니다.」한마디를 남기고 분신자살을 했다고 한다.그후부터 신장군에게 무슨 애로가 있을 때면 그 처녀가 꿈에 나타나서 암시를 해주므로써 의사결정에 가끔 도움을 받아 왔다고 전해진다.그런데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장군이 도순변사로 임명을 받고 국토방위의 중책을 지게 되었었는데 신장군은 관군과 충주지방의 의병을 규합해서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소서행장부대를 조령에서 분쇄하려고 작전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조령에 포진을 하고 하룻밤에 꿈을 꾸니 역시 그 처녀가 나타났다.「장군님 어찌 그 험산에서 포진을 하려고 하십니까. 저 넓은 충주평야로 적을 유도해서 초개처럼 섬멸시키는 것이 천하명장의 기개라고 생각되옵니다.」이 꿈을 깨고보니 사실 이 오합지졸을 데리고 산중에 풀어 놔봐야 도주자가 생기는 등 대열에질서만 깨질것 같으므로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기로 작정하고 조령을 철수한 것인데 결국 패전을 하고 신장군 이하의 수천의 장병이 장열히 전사하고 말았으니 그원망은 그 처녀에게도 한목이 간 것이다.이사건은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는 사건입니다 신립장군이라면 조선시대에서 여진족을 몰아낸 유명한 명장이였는데 왜 부하수장들이 의견을 무시한채 조령(지금의 문경세재)라는 천연의 요새를 포기하고 탄금대로 갔는지는 아직두 의문입니다.만약에 문경세재로 갔더라면 싸움의 양상이 바뀌었을지 모릅니다.탄금대에서 배수의진을 친 이유는 후방의 적을 강물로 보호한다는 의미인데 이때까지만해도 조총의 위력을 몰라서 그런게 아닐까 싶습니다 백병전이였다면 탄금대의 배수진이 훌륭한 전법이였지만 사격유효거리가 있는 조총에게는 그게 통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배수의 진의 또다른는 이유는 후퇴가 없는 죽음을 건 싸움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전국시대에서 활약했던 고니시의 부대는 전쟁 경험家) 병력 7개대대 3만병력* 조선군 : 대장 권율(權慄) 부장 조경(趙敬)관군 2300명 승병 500병, 선거이(宣居怡) 2000명3.행주대첩 경과* 1593년 2월 12일 : 왜군 행주산성 공격시작고바야카와 화공시도왜군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마에노 나가야스(前野長康), 우키다 부상 * 1593년 2월 16일 : 권율 행주산성에 불지르고 파주로 퇴각* 1593년 2월 18일 : 권율 관악산으로 이동 행주에 도착, 목책세움권율은 행주, 허욱과 양천, 선거이 관악산에 주둔4.행주대첩 승리원인* 수차석포라는 특수한 무기를 사용하였다.* 내외 2중으로 만든 성책으로 적들의 일시침공을 막고 토제로 조총탄환을 피할수 있었음.* 총통기 300기를 비롯 비격진천뢰와 각종 총통들을 배치해서 화력을 갖췄음.5.행주대첩 후..* 일본군은 패배후 서울 이북으로 출병하지 않고 서울의 철수를 서두르게 됨.* 부산까지 후퇴한 일본군은 화급히 화의에 임함.임진전쟁 개전초 서울 탈환을 위해 전라도의 병사들을 주축으로 대규모의근왕병이 집결합니다. 그 병력수는 대략 5만!여기에 권율도 징집된 전라도 병사들을 이끌고 참여합니다.전라도 충청도 그리고 소수이나 경상도 병력까지 가세한 이 대규모군단은 그러나 훈련조차 부족한 오합지졸들이였습니다.결국 기세좋게 용인까지 진격햇으나 겨우 1,300명의 왜군의 기습을 받고어이없이 무너집니다. 실전경험은 고사하고 훈련도 제대로 안된 군대인지라적의 기습에 제대로 저항도 않고 혼비백산해 흩어져 달아난 겁니다.이렇게 근왕병이 어이없이 무너지자 권율도 자신의 부대를 추스려 전라도로 귀환합니다.(황진과 권율의 부대만이 병력이 흩어지지 않고 제대로 귀환했다고 합니다. 이후 이 병력으로웅치와 이치 전투를 치루게 되지요)한성탈환이 무산된뒤 권율은 부대를 정비하며 전라도 방어에 주력하고 있었습니다.그해 7월, 전라도를 점령할 임무를 띈 일본 제 6군이 경상우도를 통해 전라도로진격할 계획이 곽재우, 김면등 경상도 의병들의 활약으로 좌절되자계획을 바꿔 경상우도를 우회해 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