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목걸이를 읽었을 때는 마틸드의 인생이 너무 가여워서, 내가 해피엔딩으로 결말을 연결시켜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었다. 나는 그녀를 보면서, ‘마틸드가 너무 불쌍하다.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허송세월로 보낸 셈이니 얼마나 억울할까,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겠군.’이라고 생각했었으며 포레스티에 부인이 마틸드에게 물질적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대학생이 된 지금, 수업을 위해 다시 한 번 목걸이를 접했을 때는 중학교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일단, 마틸드가 목걸이를 잃고 10년 동안 고생한 것은 그녀가 자초한 불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의 분수를 모르고 헛된 공상과 사념에만 사로잡혀 있던 그녀에게 정신 차리라고 채찍질을 해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 남편에 대해 불평만 잔뜩 늘어놓는 어리석은 인간에게 내린 하늘의 벌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그렇지만 그 목걸이는 그녀에게 있어서 전화위복의 계기이다. 10년 동안의 고생을 통하여 그녀는 정신적으로 성장하였다.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 그 안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는, 소박하지만 행복한 인간이 된 셈이다. 이러한 사건이 없었더라면 마틸드는 평생 부질없는 꿈과 몽상 속에서 고통과 좌절만 느끼다가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0년 후의 그녀는, 집안일을 하다가 갖게 되는 잠깐의 휴식, 산책할 수 있는 여유, 빨래가 잘 마르는 맑은 날씨, 그리고 물건값을 흥정해서 얻어낸 약간의 잔돈들에서 소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변모한 것이다. 10년 전의 불행한 사건이 불행한 여인을 행복한 여인으로 만들어준 것이다.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한 가지 느낀 점은, 마틸드라는 여성형이 현대 사회에서는 비판받을 만한 인간형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지향점을 위해 그녀가 노력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꿈꾸고 한숨만 쉴 뿐이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싶어하면서도, 그녀는 하녀를 두고 집안일에는 손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하급관리인 남편의 쥐꼬리만한 월급에 불평만 하지, 절약하려 한다거나 자신이 소일거리를 찾아 본다거나 하지 않는다.나 같으면 마틸드처럼 창가에 앉아 신세한탄만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력만 한다면 귀족은 될 수 없어도 돈 많은 부르주아는 될 수 있지 않은가. 적어도 그녀가 원하는, 치장하는 데 충분히 돈을 들일 수 있을 만큼의 물질적 풍요는 이룰 수 있지 않을까.돈 없는 하급 관리원에게 시집갔으면서도 수동적인 인간으로만 머물러 있는 그녀가 정말 한심해 보이지 않을 수 없다.마틸드는 끊임없이 자신을 치장하고 싶어 한다. 돈 많고 이쁜 여성처럼 보이고 싶어한다. 우리는 마틸드라는 여인의 모습이 현대 사회의 여성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나 또한 그럴 때가 있다. 겉으로 보여지는 외모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과 당당함이 진정한 美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외모 지상주의에 순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남들처럼’, ‘남들보다’라는 무의식의 압박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은 항상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 물론 전혀 의식안하고 자신의 주관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도 존재하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히나 오늘날과 같은 경쟁이 팽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타인과 자신을 끊임없이 견주어 본다. 그래서 여성들은 남들보다 잘나 보이려고 명품을 사들이는 데에 혈안이 되곤 한다. 명품 구매를 위해 카드 빚을 지는 사건들을 종종 매스컴에서 접하게 된다. 몇 달 전에는, 한 여성이 삼촌의 회사 경리 일을 보면서 회사 공금을 빼돌린 후 몽땅 명품을 사는 데 그 돈을 썼다고 한다. 게다가 요즘은 몸짱이다, 얼짱이다 하면서 사회적으로 외모 지향적 풍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나를 위해서 내 자신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타인보다 더 예쁘고 잘 생기고 늘씬한 사람이 되고자 꾸며 된다.‘쟤한테 내가 어떻게 비춰질까’, ‘쟤보다 돈이 많아 보여야 할 텐데’라는 말들을 우리 머리 속에서 계속적으로 되뇌이면서.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행동, 이것은 주체성의 상실과 연결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남들 하는 것은 다 해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물들어 있다. 그래서 지나치게 유행에 민감하다.패션에서부터, 요가, 웰빙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으로까지.위와 같은 태도들은 스스로를 옭아매고 불행하게 할 뿐이다. ‘목걸이’의 마틸드처럼. 인간이 추구하는 완벽한 이상형과 완벽해질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한계 간의 괴리 속에서, 만약 그 괴리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불행하고 불만에 가득 찬 인생에서 허우적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파상은 ‘목걸이’의 주인공인 마틸드를 통해 인간의 어리석고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물론, 나의 주장들은 마틸드가 살던, 모파상이 살던, 시대 상황 속에서의 여성에게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불가능한 요구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나의 모든 해석은 현대 사회로 가정했을 때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지금 그녀와 같은 입장이라면 이렇게 할 것이다.’라는 식의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목걸이를 잃어버린 직후의 일 처리 과정은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다. 만약 내가 목걸이를 잃어버렸더라면 솔직히 친구에게 고백했을 것이다. 나에게 비싼 보석을 빌려 줄 정도라면 그만큼 친분이 두터운 사이일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했다면, 친구가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고 결말에서 보이듯, 가짜라는 것을 알려주었을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성과 속. 이 두 단어는 서로 상반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이원론적 구분은 인류 초기부터 있어온 것이므로 이는 가장 원초적인 종교적 개념이자 종교적 태도에서 나온 것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그렇다면 성과 속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이에 대해서 여러 학파들이 제시한 성속에 대한 해석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첫 번째로, 뒤르켐은 성을 창조하는 것은 사회 자체라고 말하고 있다. 공동체의 모든 일원이 동의하는 어떤 것에 대해 반대하거나 이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터부시되는 것을 깨는 행위와 동일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 내부에서 행해지는 금지는, 그 자체로서 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것에 대한 일종의 의례로서 성의로의 접근을 가능케 하는 소극적 수단으로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사회적 차원으로서의 성은 자칫 대중을 우매하게 만들고, 특정 집단이나 독재자가 대중을 지배하는 데에 효과적일 수 있다는 우려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 성직자들은 하느님과 인간을 소통시켜주는 자로서, 그들을 배반하고 반기를 드는 것이 금기시됨으로써 성직자들의 비도덕적 재물 획득이나 권력 남용과 같은 폐단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막스 베버는 성과 속의 의미를 주관적인 종교 행위, 즉 의미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종교적 혹은 주술적인 것은 근본적으로 주관적인 개인의 체험일 수밖에 없다. 주관적이고 의미론적이기 때문에 의례나 종교에 관련된 행위에서 다양한 스테레오 타입이 나오게 된다고 보고 있다.인류학적 관점에서 성과 속을 말할 때, 엑스터시가 등장한다. 이것은 현실을 초월하여 영을 접하는 경험으로서 이는 곧 그 자신이 성이 된다. 그렇게 때문에 이 엑스터시 현상에 이를 수 있는 사람들을 신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매개로서, 그 또한 거의 신성한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샤만은 유일하게 엑스터시를 체험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존대하였고, ‘무(巫 )’를 의미하는 차차웅이라는 왕의 칭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샤만의 지위가 매만, 나는 프로이트의 이 주장을 숭배?경외라는 성적 감정이 증오?미움이라는 속된 감정에서 비롯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만약 나의 해석이 옳다면, 이는 매우 아이러니컬한 현상이다.우리가 성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성을 절대적으로 불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성은 시간적?공간적 차원에서 속으로 변화될 수도 있고, 반대로 속이 성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돌을 제단으로 사용하거나 어떤 동물을 제물로 바칠 때 그것은 기존의 일반적인 돌과 동물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는, 즉 속을 넘어서는 초월의 의미를 지닌다. 반대로, 어떤 신화를 보고서의 형태로 이해하거나 경전을 연희의 목적으로 낭독할 때는 성이 세속화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전자보다 후자의 경우가 더 많이 발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분석하기를 좋아하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경전이나 신화는 과거의 문화나 사회를 조사하는 데 필요한 자료일 뿐이다. 그러나 한 번 성이 세속화되었다고 해서 회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종교 단체의 설립 등을 통해서, 혹은 공식적인 종교 행사나 축제를 통해서 충분히 잃어버렸던 성을 사회에서 다시 한 번 확보할 수 있다.성은 영어로 sacred이고 속은 profane이다. 성의 어원은 sacrum으로, 성의 실재를 인식한다는 의미를 지니며, 속의 어원인 profanum은 성전 경내 앞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나온 말이다. 어원을 통해 성속 모두 성과 관련된 특별한 의미의 장소를 뜻하는 말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과 속에 대해 알아보면서 이 둘을 공간적인 개념에서 설명해 볼 수 있다.종교적 인간은 공간의 균질과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실제 그들의 일상생활과는 단절된 공간이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공간의 연속성의 단절을 의미한다. 교회의 문과 함께 문지방 역시 공간의 연속성을 단절시키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문지방은 두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선이자 동시에 속된 세계에서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둥이 부러지면 방황하다가 땅에 드러누워 죽음을 기다렸다고 한다. 코스모스에서 카오스로의 회귀는 종교적 인간에게 있어서 질서에서 혼돈으로, 밝음에서 어둠,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카오스의 세계는 인간이 살 수 없는 세계이다. 따라서 인간이 코스모스화된 세상을 지향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이며, 인간 삶의 영역에서 카오스로부터 코스모스로 이행하는 성격이 있는 모든 행위들은 우주 창조 행위를 반복하는 제의를 통해 신성화되었다. 인간이 끊임없이 건물을 짓고 땅을 개간하는 등의 행위가, 비록 우리가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인간이 코스모스를 지향하는 존재임을 증명해주고 있다.성스러운 기둥에 대한 숭배는 아룬타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로의 개종 이전의 켈트인과 게르만인, 고대 인도, 콰키우틀족이나 나다족 등에서도 발견된다. 이 성스러운 기둥은 과연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을까.앞에서도 말했듯이 인간은 카오스의 세계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코스모스의 세계, 여기서는 초월적인 신의 세계를 의미하는, 와 교류할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였고, 그 역할을 바로 이 기둥이 한 것이다. 위 부족들의 기둥은 하늘을 떠받들고 동시에 신들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우주의 기둥이라는 관념을 지니는 것이었다.샤머니즘에서 상?중?하계의 수직적 층을 이루는 우주층을 우주산이나 우주목에 의해 하나로 연결하듯이, 우주의 기둥은 지상, 천상, 하계의 교류와 그들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우주의 기둥은 우주의 중심에 위치한다. 하늘과 지상을 연결해주는 상징으로는 기둥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은 지상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아 있는 곳으로서, 천상과 지상의 교류를 표현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팔레스타인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나라여서 노아의 홍수에도 가라앉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오로지 기독교의 하나님만을 신으로 생각했을 때를 가정한 것이라고 생각한 수 있다고 했었다. 반복적으로 그 시간들을 성스러운 것으로서 기념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시간을 의미 있는 것으로 인식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신은 오늘날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실재를 창조함과 동시에 성스러운 시간도 창조한 것이다.공간에서와 마찬가지로, 비종교적인 인간도 평소와는 이질적인 시간을 체험하기도 한다. 애인을 만나는 시간이나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있는 시간들은, 개인적으로 다른 일상의 시간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이는 종교적 인간이 경험하는, 성스러움의 의미를 지닌 시간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유키족들에게는 해(year)라는 말이 대지 혹은 세계라는 단어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또한 그들은 일년이 지나갔을 때 ‘세계가 지나갔다’고 말한다. 이 단어는 세계와 우주적 시간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세계, 다시 말해 우주가 창조된 때가 바로 태초의 시간이 생겨난 때이다. 따라서 신년을 기념하는 것은 태초의 시간을 신성화하는 것이고, 이는 우주의 창조의 재현이다. 신년이 ‘정화’의 계기, 죄난 속죄양을 쫓아내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2월 31일 자정, 해가 넘어감과 동시에 제야의 종이 울린다. 이는 새해마다 태초에 지니고 있었던 신성성을 회복하려는 행위이다. 또한 새해 첫날, 집집마다 복조리를 나누어 주는 것도, 단순히 새해를 기념하는 차원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시간을 정화하는 수단으로서 인식 할 필요가 있다. 새 해가 올 때마다 우리가 새로 태어난 것 같고, 더 자유롭고 순수해졌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우주 창조 행위의 재현이기 때문이다. 우주 창조는 신적인 것의 최고의 현현이며 힘, 넘쳐흐름, 창조성의 행위이기 때문이다.다시 한번 종교적 축제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종교적 축제나 공식 행사는 소수의 대상들에 대해서 수행되고, 그 의식이 거룩한 분위기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에서 일단 일상적인 시간과는 구별되는 것이다.종교적 축제에 이어, 성스러운 시간과 관련하여 신화를, 세계의 구조 속에 다양한 형태의 성의 현현을 계시하고 있다. 따라서 우주는 그 자체로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원시 민족은 그들의 최고신을 높음, 창공, 기상 현상 혹은 하늘의 거주자, 하늘의 주인이라고 불렀다.천공적 구조를 갖는 최고신의 역사는 인류의 종교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최고신이 멀어지는 현상은 고대 문화 단계에서부터 발견된다. 오스트레일리아 쿨린족은 그들의 최고 존재자인 분질에게 특별한 제의를 올리지 않는다. 셀크남족 역시 폭풍이 칠 때만 그들의 최고신에게 공물을 바친다. 이 두 부족의 최고신은 자신들의 일을 끝내고 은퇴하여, 인간 세상에는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돌보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대다수 아프리카 종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재난이 닥칠 때에는 마지막 희망으로서 그의 도움을 요청한다. 인력으로 어쩔 수 없을 때, 자신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에 신을 찾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찾아 볼 수 있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이러한 최고 존재자는 점차 인간에게서 멀어져 감추어진 신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간의 마지막 간청의 대상으로서 그를 부른다. 신이 인간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다시 말해 인간이 자신의 종교적, 문화적, 경제적 발견들에 점점 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사회가 발전에 나갈수록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신석기 시대에 농경 생활로 접어들면서 원시인의 경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성의 질서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고대 헤브루인들의 경우, 평화롭고 풍요로울 때마다 야훼를 버리고 그들 이웃의 신에 접근했다. 그리고 역사적인 파국을 맞이하게 됐을 때라야 다시 그들의 신에게로 돌아갔다. 극단적으로 위험한상황, 공동체의 생존 자체가 문제되는 상황에서는 평상시에 삶을 보증해 주고 고양시켜 주는 신들을 버리고, 최고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은 비겁해 보임과 동시에, 그렇게 밖에 할 수.
어떤 중년의 여성이 한복을 입고는 ‘철학관’이라고 쓰여진 간판을 내걸고 허름한 기와집에서, 화려하게 장식된 벽을 배경으로, 다소 음산하게 앉아있다. 이것이 내가 샤만, 무당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그려지던 그들의 모습이다. 기독교인인 나로서는 무교라는 것을 종교라고 생각지 않았으며, 점을 보는 것 또한 죄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교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무속인에 대해 왠지 모를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영매 -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적어도 샤머니즘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우치게 했고 무속인에 대한 연민을 갖게 하였다.한 어촌 마을에서는 5년마다 풍어제라는 별칭굿을 한다. 풍어제를 준비하면서 마을 사람들은 함께 노동하고 음식을 준비하며 공동체를 확인한다. 굿이 끝난 다음에는 마을 아낙네들이 그간의 시름을 잊고 춤을 추며 마을을 돌아다닌다. 평소에 구경거리가 전혀 없는 이 마을에서, 별칭굿은 일종의 축제, 행사이며 놀이 마당이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종교적 의례이자 대동의 축제인 것이다.어촌은 바다가 삶의 터전이자 늘 그들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어촌은 외지 사람이 찾아오는 일도 거의 없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단조롭고 고된 삶의 반복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풍어제를 연다. 그들은 샤머니즘이니 샤먼인지가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단지 그들은 인간의 힘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자연을 상대로 살아가면서 조금이나마 그 불안을 해소하고, 반복되는 고된 삶으로부터 잠시나마 해방되기 위해서 그들로서는 최선이자 유일한 방법이 ‘무’였던 것이라고 생각한다.전라남도 진도에 세습무가 한 명 살고 있다. 그녀의 자매들도 모두 무업을 이었지만 그 시대 무속인은 천대받던 직업이라, 자식들은 무업을 잇지 않게 하기 위해 모두 외지로 보냈다. 그녀는 요즘 세상이 좋아져서 한 명 쯤은 무업을 이어가게 했어도 될 뻔 했다며 대가 끊길까봐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제자를 두어 무업을 이어가려고 노력한다. 이 세습무가 한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나는 죽어서 태어나면 한 번 이쁘게 생겨 갖고 가수를 하든지 소리를 하고 싶어...’그녀의 이처럼 소박한 소원을 들으면서 가슴이 잔잔히 아려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진도에 사는 박영자는 한 맺힌 엄마의 혼이 들어온 강신무이다. 어느 날 그녀가 남의 집 굿을 하는 도중 어머니의 혼이 그녀에게 들어온다. 한 맺힌 어머니의 죽고 나서의 절규일까, 그녀는 내내 운다. 그것을 보는 다른 아낙도 울고 그녀의 남편은 애처롭게 쳐다 볼 뿐이다. 박영자는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굿을 해서 버는 돈을 갖고서는 살아가기 힘들다. 그래서 무업과 농사일을 병행한다. 심신이 이렇게 지치는데다가 죽은 엄마의 혼 때문에 힘이 들 때면 어머니를 위한 굿을 한다. 어머니는 자신이 힘들게 살아온 것을 토로하며 사위에게 딸을 힘들게 하지 말라고 얘기한다. 그 굿판에 모여 있던 다른 아낙들도 그녀와 함께 내내 눈물을 흘린다.영화 중 이런 말이 나온다. ‘굿을 하는 것은 죽은 자의 살아서 풀지 못한 한을 죽어서 풀게 해주는 산자의 몸짓이다.’솔직히,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면서 내가 신내림을 받도록 선택되어진 사람들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며, 혹시나 속하게 되면 어찌하나 하고 두려웠다. 그들에게 예비 된 무속인의 길을 그냥 받아들이고는 살아가는 모습이,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많은 젊은 여대생에게는 너무나 처절한 삶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연민과 찬사를 보내고 싶다. 어민들에게는 심신의 고통에서 벗어나 정신적 위안을 얻도록 도와주며 살아서 풀지 못한 한을 죽어서라도 풀게 해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평범하고 편안하게 살게 하는 대신 그들의 삶을 버리고 무속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하거나 선택되어졌기 때문이다.
중국어를 이번에 처음 접한 나로서는 레포트가 매우 큰 부담이 되었다. 세 달을 배운 실력으로 중국영화의 대사를 알아들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중국 영화라 하면, 말도 안 되는 무술만 잔뜩 나오는 영화라는 인식 때문에 별로 선호하지 않았던 터라 더욱 더 이번 레포트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결국, 영화를 네 번이나 보았다. 하나하나 대사를 끊어가며 듣고 또 듣기를 반복하였다. 조금씩 들리는 것도 신기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이해되지 않았던 영화의 장면이나 대사들에 대한 궁금증이 저절로 풀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영웅 의 매력에 빠져버리게 되었다.장예모 감독이 연출했던 오페라 투란도트 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반했었는데 역시나 영웅 에서도 그다운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을 했다.영웅 은 다음과 같은 첫 멘트로 시작된다.중국 역사에 영정을 노렸던 자객들의 무용담이 무수히 등장하는데 이 영화는 그들에 얽힌 전설이다.여기서 잠깐,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중국 역사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진시황과 그를 죽이려던 자객들에 대한 이야기니까 말이다. 영화의 배경은 기원전 3세기 중국으로서, 춘추전국시대의 막바지로 진나라왕 영정이 대륙을 통일시키려는 열망을 지니고 있을 시기이다.그의 대륙 정벌을 무마시키고자 그를 암살하려는 자객들이 나타나는데, 이가 바로 장천, 비설, 파검이다. 그들의 무예는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영정은 신변 보호를 위해 누구든 자신의 백보 안에는 접근하지 말라는 금지령을 내리고 엄청난 수의 화살 부대의 호위를 받는다.어느 날 영정 앞에 무명이라는 자가 나타난다. 그리고는 영정을 죽이려고 했던 장천, 비설, 파검의 칼을 그 앞에 내놓는다. 무명은 세 명의 자객을 죽였다는 공로로 영정과 십보 안에서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리하여 무명의 무용담이 펼쳐지는 가운데, 그의 의도와 정체를 둘러싸고 영정과 무명의 머리싸움이 치열하게 펼쳐지게 된다.첫 번째 이야기는 무명이 장천과의 대결에서 이기는 내용이다. 무명과 장천과의 대결 신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거문고와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칼과 칼이 부딪히는 차가운 소리가 교묘히 섞이면서 조화를 이룬다. 또한 중간에 싸움을 멈추고 무명이 눈먼 노인에게 거문고를 다시 연주해달라고 정중하게 청을 넣고, 음악이 시작되면서 싸움이 다시 시작되는 장면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 싸운다는 내용도 매우 특이했다. 싸우는 장면이라고 하면, 흔히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무자비하게 마구 싸워대는 동적인 장면들만 연상되는데, 영웅 에서 나타난 장천과 무명의 싸움은 매우 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둘의 싸움이 하나의 예술로서 비춰진다는 느낌도 들었다. 노래 뒤에 깔리는 반주처럼, 둘의 대결 뒤에는 항상 거문고와 빗소리가 잔잔하게 깔리고 있다. 그리고 둘의 대결이 절정에 이를수록, 빗방울이 떨어지는 속도와 거문고의 곡조 또한 점차 빨라진다는 데서도 일종의 감각적인 예술로서 승화된 듯 했다.다음으로, 빨간 색조가 주를 이루면서 비설과 파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비설과 파검은 서로 좋아하면서도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계속 사이가 좋지 않다. 결국, 질투로 인해 비설이 파검을 죽이고, 이에 분노를 느낀 여월이 비설과 싸우다가 여월 또한 비설의 검에 찔려서 죽고 만다. 그리하여 무명은 마음이 어지러운 상태에 있던 비설을 쉽게 해치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은행나무 숲에서의 여월과 비설의 싸움은 그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빨간 의상과 황금빛 은행 나무가 만들어내는 영상은 이 영화의 화려함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그러나 영정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장천, 파검, 그리고 비설이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릴 만큼 약한 인물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그 때부터, 파란 색을 배경으로 영정이 생각하는 무용담이 펼쳐진다. 그 내용인즉슨, 장천과 무명은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대의를 위해 장천이 일부러 무명에게 져주고, 비설과 파검의 경우에는 무명이 단 한 명만 자기를 도와주면 된다고 하자, 비설이 파검을 찌르고 대신 자신이 무명과 대결한 후 져준다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비설과 파검이 서로 사랑하는 여인으로 나온다. 비설이 무명과 싸우기 위해 사랑하는 파검을 칼로 찔러 상처를 내는 장면은 정말 가슴 아팠다. 그리고 마치 천상낙원과도 같은 호숫가에서의 무명과 파검의 대결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였다. 죽은 비설의 얼굴에 튀긴 물방울을 손으로 닦아주는 파검의 모습은 참으로 애절해 보였다.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내용은 무명이 밝히는 진실이다. 이번 이야기의 배경은 흰 색이다. 무명에게 부탁을 받은 파검은 비설과 달리, 영정을 암살하는 것에 반대한다. 어떻게든 계획을 실행하고자 하는 무명에게 파검은 모래에다가 천하 라는 글자를 쓰고는, 이것이 그가 영정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천하지 않은 이유라고 알려준다. 여기서 초록빛 배경으로 파검의 회상이 이어진다. 비설을 처음 만나게 된 때부터 함께 영정을 죽이기 위해 무술을 연마하고 왕궁에 침입하여 파검이 영정의 목에 칼을 들이댈 때까지. 녹색 장막이 드리워진 왕궁의 모습이 거대한 스케일을 여실히 보여주었다.무용담이 끝난 후, 무명은 자신이 영정을 죽이러 온 자객임을 밝힌다. 영정은 이미 무명에게서 품어져 나오는 살기로 인해 흔들리는 촛불을 보고 무명이 자객임을 짐작하고 있었다.무명 역시 영정을 죽이지 않는다. 파검처럼 천하 통일 이라는 대의를 위해서. 그렇지만 그는 결국 영정의 화살 부대에 의해 죽게 된다. 암살이 실패하자 실망한 비설은 파검과 다투다가 그를 죽이고, 그가 찔린 칼로 그와 함께 죽음을 맞게 된다.보면 볼수록 이 영화에 매료되었다. 화려하고 웅장한 영상들, 스토리 전개 방법, 주인공들의 눈빛과 몸짓, 그 어느 하나도 놓치기 아까웠다.거문고, 은행나무 숲, 호수, 광활한 벌판 모두 동양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표현해내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 구성에 따라 변화되는 주인공들의 의상 색깔, 영화에서 보여주는 색깔의 이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각각의 색깔들은 각 무용담들의 내용과 그 진실 여부를 한 번에,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빨간 색의 경우는 질투와 분노라는 격렬한 감정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빨간 옷을 입은 비설과 파검의 표정은 하나같이 차가웠다. 또 한 가지, 빨간 색은 무명이 지금 하고 있는 얘기가 새빨간 거짓말임을 암시하는 도구이기도 하다.영정이 예측한 이야기는 파란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아마도 대의를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대인들의 희생 정신과, 그 속에서 발견되는 슬픔을 나타내고자 파란 색을 사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흰 색은 진실을 의미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진실한 사랑이다. 끝까지 영정을 죽이고자 하는 비설은 암살 계획에 반대하는 파검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결국 파검은 비설에 대한 그의 진실 된 사랑을 드러내고자 그녀의 칼에 찔리고 만다. 비설 역시 파검에 대한 사랑으로 그를 뒤따라간다.비설과 파검이 처음 만나게 되고 서로 사랑을 나누며 암살 계획을 목표로 연마하고 궁에 침입해서 대결하는 장면은 모두 진실인데, 이 부분이 녹색으로 처리된 것은 아마도 회상 부분이기 때문일 것이다.이렇듯, 이 영화에서 칼라의 이미지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무명의 거짓말을 의미하는 빨강, 희생의 파랑, 진실의 하양, 회상의 녹색을 통해 보여지는 영상미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