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비문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고구려사광개토왕비는 지금 중국 길림성 집안시 대비가에 서 있다. 1880년경 재발견된 이래 처음에는 그 독특한 서체 때문에 호사가들의 관심거리가 되어 여러 번 여러 방법으로 탁본을 만들어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비의 존재가 중국학계에 알려 지면서 건립연대를 규명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으로 지금은 끊어 읽기·판독·주석·문자서법·비문진위·탁본유전 등(고구려간사;이전복외) 다방면에 걸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비문은 일인들에 의한 석회도말작전이 있었다 없었다 논란이 계속된 상태에 있다. 비를 세울 당시 일본이란 나라는 없었다. 비문에 왜라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해적들을 총칭한 것이다. 일본만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 일본은 이로부터 250여 년이 지나서야 천지란 사람에 의해 국가형태를 갖추게 된다. 따라서 비문을 해석하면서 일본을 운위하는 것은 그 자체가 친일성을 갖는다.비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비문은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의 위치를 밝히고 있고, 왕세계 즉 시조왕으로부터 광개토왕까지의 왕위계승 사실을 적었으며, 광개토왕의 집정기간에 있었던 국경정비사업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역대왕의 왕릉을 지키는 능지기와 그가 필요시 동원해 부릴 수 있는 고장별 가구수를 기록하고 있으며 광개토왕이 1년간 대리청정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차례대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비문은 광개토왕을 고구려 제19대 왕으로 명기하고 있다.지금까지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제6대 대조대왕 이전의 역사를 믿지 않으려 한다거나 대조대왕 이후 몇 대의 왕이 생략된 것으로 보는 견해에 함구함으로서 이에 동조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비문을 검증하면 시조왕과 19대 (17세손) 광개토왕과의 사이에 단 일대를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다. 따라서 대조대왕 즉위년으로부터 차대왕 그리고 신대왕 퇴위년까지의 126년간의 왕위계승문제에 있어 1대 또는 2대의 왕이 빠졌으리라는 선입관을 갖고 고구려사를 해석할 것이 아니라 이들의 형제계승을 민중왕과 모본왕의 예에서 보이듯이 숙부와 생질간의 계승과 같은 방식으로 연구의 가닥을 잡아야 한다. 비문은 삼국사기가 기록하고 있는 왕세계에 한 치의 오차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개토왕은 서·북·남쪽의 광범위한 영토에 대한 국경정비사업을 완수했다.국내·외 많은 고구려사 연구자들은 비문에 기록된 백잔(백제)과 신라 관련기사들을 마치 광개토왕이 정복사업을 벌렸던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킬 의도가 있었다면 훨씬 이전에 그 일을 해치우고도 남았다. 고구려는 멸망할 때까지 백제와 신라를 '아래채에 사는 머슴' 정도로 생각하고 외적을 막는 방패로 사용했다. 백제의 경우 가끔 혼줄을 내주기는 했으나 멸망시키려는 뜻은 없었으며, 신라는 그 왕으로 능지기를 삼고 있었기 때문에 혼내줄 일도 없었고 또 그렇게 하지 않았다. 따라서 비문에 기록된 왕토(往討)나 궁솔왕토(躬率往討) 등의 기사를 가지고 신라나 백제의 토벌군이 움직인 것으로 알면 크게 어긋난다. 이때 왕은 고구려의 선왕들이 묻혀 있는 지역으로 백제가 들어와 능묘지기들의 업무를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정비한 것이다. 그래서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는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문에 기록된 토벌기사를 마치 백제와 큰 전쟁을 벌린 것으로 보면 안된다. 역사기록에 써넣을 수 없는 사항이라도 아들이 아버지의 훈적을 적고자 할 때에는 이 국경정비사업은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비문에 기록된 북쪽의 숙신(帛愼) 남쪽의 백제(百殘) 서쪽의 동부여(東夫餘)에 관한 기사들은 국경을 정비한 기사일 뿐 전쟁기사가 아님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남쪽 백제의 경우 남녀생구 1천이라든가 세포 1천필 등을 헌납 받았다는 기록은 선왕들의 능침을 지키다가 백제의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을 데리고 온 것을 말하는 것이고 세포는 그 동안의 일을 사과하는 뜻으로 백제가 준 것을 받아왔다는 것을 뜻한다. 또 58개 성과 700개의 촌락을 고구려가 취한 것은 선왕들이 묻혀 있는 곳을 되찾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의 음성·안성·양성·수원·인천·김포·통진 등지의 성과 촌락을 말한다. 이곳의 안전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왕제와 대신 등 10인을 볼모로 했다.북쪽 숙신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이 때 소속을 잃고 있던 300여 촌장을 안심시키고 앞으로 고구려가 잘 보호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그 곳에 관리를 두고 온 것을 말한다.서쪽의 동부여 역시 소속감이 해이해져 있는 것을 그 소속을 확인시켜 주고 또 중앙의 관리를 그 곳에 상주시키고 돌아온 것을 기록했다.비문에서 불공(不貢)이니 헌공(獻貢)이니 하는 기록은 고구려 중앙정부에 바쳐야 할 세금을 말하는 것이지 조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기록에 조공이라 기록한 것은 왕실간의 조공무역을 말하는 것인데 고구려는 북부여·동부여·신라·백제를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광개토왕은 비문의 기사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정복활동을 활발히 한 왕이 아니라 그동안 정복되었던 지역을 착실히 국경 안으로 편입시키는 정비작업을 한 왕이다. 왕이 정비한 국경으로 서쪽은 북부여가 위치하고 있던 빠이링마오로부터 서북쪽은 숙신이 위치한 케로렌강유역의 초이발산지역, 북쪽으로는 아블로노이산맥으로부터 스타나보이산맥까지에 걸쳐 넘나들며 차지했던 읍루 지역이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오호츠크해 및 우리의 동해까지였으며 남쪽의 국경은 두 곳으로 하나는 한반도 남쪽 속리산까지였고 다른 하나는 중국쪽으로 영정하·상간하선까지를 정비한 것이다.■ 비문은 또 능지기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비문에서는 능지기를 수묘인(守墓人)이라 표기하고 있다. 수묘인을 기록하면서 국연(國烟)과 간연(看烟)으로 분류했으며 국연 30가(家) 간연 300가 모두 합해서 330가를 정해 놓고 있다. 이 국연과 간연 330가를 지금까지 연구한 사람들의 연구 결과는 세 부류로 분류된다. 하나는 광개토왕 한 분의 왕릉을 지키는 사람들을 정해 놓은 것이라 했고(일반적 견해) 다른 하나는 약간 진전된 연구로 고국양왕(왕의 아버지)과 고국원왕(왕의 할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능을 지키는 수묘인을 정한 것이라 했으며(浜田耕策) 또 다른 하나는 조금더 진전된 연구로 광개토왕을 포함하여 국내성에 위치한 모든 왕릉을 지키는 사람들을 정해 놓은 것이라 했다(김현숙;경북대학교 석사논문). 시민강좌(일조각) 참조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지금 집안시에 있는 묘들 중 왕릉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이들 중 그 체제가 웅장하여 왕릉으로 보일 만한 것이 있긴 하나 불행하게도 이들은 왕릉이 아니다. 이들은 전쟁터에서 산화한 고구려전사들의 무덤이고 장군들의 무덤이다. 고구려왕릉은 명당혈이 있는 고을에 단기로 모셔져 있고 진시왕릉처럼 지하에 구축되어 있다.고구려는 고국원왕이 부왕인 미천왕의 시신을 전연에 빼앗겼다가 찾아와선 백천과 신계에 왕릉을 구축하고 그 곳에 부왕의 시신을 다시 모시고 자신의 수릉도 만들게 되면서 반도 내에서 왕릉길지를 찾기 시작했다. 이후 고구려는 왕릉길지를 속리산 이북지역에서 더 많이 찾게 되었고 이들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장수왕은 개로왕을 죽이면서까지 남쪽 변경을 금강선으로 내밀었다. 장수왕릉은 고구려 중원비의 위치로 보아 지금 충북 음성에 있고, 광개토왕은 음성에 전해내려오는 거북놀이의 가사로 보거나 문자왕이 중원비 제막식을 마치고 귀경하면서 바다를 망제한 것으로 보아 동해바다에 있으며, 그 곳은 지금 고성군 현내면 초도리 앞 바다의 거북섬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안장왕은 한씨 미녀를 앞세우고 당시 오곡원이라 지칭된 지금의 김포평야를 평정하고 김포·통진에다 부왕과 자신의 능묘를 만들었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등 반도 내에서 고구려는 많은 능묘길지를 찾았다. 따라서 비문에 기록된 많은 수묘인들은 이들 넓게 산재하고 있는 역대왕릉들을 지키는 능지기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시조왕으로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혹은 앞으로 능묘를 쓸 가능성이 있는 지역까지를 포괄하여 기록해 놓은 것이다.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훈적비를 세우면서 부왕이 생존시 관심을 갖고 시행한 국경정비사업을 기록했으며 또한 만 년 후에까지 고구려국가의 역대왕릉들을 변함 없이 지켜 내리게 하기 위한 원칙과 수묘인을 명기해 놓은 것이다.■ 비문은 광개토왕이 1년간 대리청정한 사실을 적고 있다.비문에 명기된 영락 5년 세재 을미(乙未)는 서기 395년을 말한다. 이 해로부터 5년을 후진시키면 영락 원년은 서기 391년 고국양왕 8년 신묘(辛卯)년이 된다. 그런데 고구려본기는 392년을 광개토왕 원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비문으로 보면 광개토왕이 왕권을 행사한 첫 해는 부왕인 고국양왕 8년 신묘년이다. 따라서 왕은 부왕이 생존하고 있는 기간에 왕권을 행사한 것이다. 고구려본기의 기사를 분석해 보면 부왕인 고국양왕은 왕 8년에 득병하여 태자의 간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음해 5월에 서거하고 있다. 부왕은 혼수상태 또는 언어불능상태 등 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중환을 앓다가 돌아가신 것이 틀림없고 왕의 자리는 한 시라도 비워 둘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광개토왕은 17세의 나이로 부왕을 대신해 왕노릇을 한 것이다. 광개토왕은 정식으로 왕이 되기 일 년 전에 왕권을 행사했다. 즉 대리청정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문이 기록하고 있는 연대는 왕 개인의 연대를 기록한 것이고 역사연대(절대연대)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영락이란 왕호가 하나 더 있게 된 것이다.
서당 교육의 현대적 시사점우선 조선 시대의 서당을 살펴보면1)서당의 인적 구성은 훈장과 학동 그리고 접장으로 이루어졌다. 훈장은 서당의 교사에 해당하는데 그 자격이 천차만별이었고, 학식의 표준도 일정치 않았다. 수준과 규모가 있는 서당의 경우에는 일정한 자격을 갖춘 훈장을 초빙하였지만, 그렇지 못한 소규모의 서당, 혹은 훈장이 자영하는 서당의 경우에는 자격미달의 훈장도 있었다. 접장은 오늘날의 보조교사와 같은 의미로 비교적 규모가 큰 서당에서는 훈장 한 사람으로는 많은 학동을 일일이 가르칠 수 없으므로, 그러한 경우 학동 가운데 나이와 지식이 많은 자를 뽑아 학동들을 가르쳤다. 접장의 수는 2, 3 명 정도가 되었는데, 접장은 하급생들을 가르치는 훈육담당교사이자 동문의 사형으로 학동들의 학업과 생활지도를 도왔으므로 서당 풍기에 미치는 영향은 훈장보다 큰 경우가 많았다. 서당의 학생들은 학동 또는 학도라고 불렀다. 그들의 연령은 5, 6세를 비롯하여 20여세까지 재학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일반적으로는 16세를 전후하여 향교나 기타 교육기관으로 진학하거나 아니면 서당을 끝으로 학업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서당은 오늘날 유치원에서부터 고등학교 정도까지의 학습자들이 동시에 학습하던 교육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2) 또한 서당 교육방법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은 학습자 개인의 수준과 학습성과에 따라 학습을 시키는 개별 교수법이다. 즉 강독, 제술, 습자 모두 개별지도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또한 강독은 날마다 학동의 실력에 맞게 범위를 정하여 배우고, 그 날의 학습량은 속독하여 서산을 놓고 읽은 횟수를 세었다. 이는 학동의 능력에 따라 달랐으며 만일 배송이 되지 못할 경우 그의 학업 성취도에 도달 할 때까지 반복시켜 완전히 이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3)그리고 서당 교육의 특징은 생활지도 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서당교육의 궁극 목적이 경전에 능통한 인간상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가의 이념에 기초한 참된 인격의 형성에 있었기 때문에 생활지도 즉 훈육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서당에서의 훈육은 다양하게 이루어졌는데, 학과목 교육뿐만 아니라, 일과와 행사 및 상벌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서당은 원칙적으로 학년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과도 특별히 정해진 것이 없었다. 다만, 학동이 아침에 서당에 오면 먼저 훈장에게 인사를 하고, 학생 서로 간에 인사를 나누는 절차를 통해 자연스럽게 예절을 익히게 했으며, 학생들의 협동심을 키우기 위해 일정부분 연대책임을 지우기도 하였다.실제적으로 서당은 현대적 개념과는 약간의 상이한 차이를 엿 볼 수 있는데 현대 교육의 개념에서 교육과정을 따로 완벽히 이수하지 않더라도 다음 학년으로 진학하는 것과는 달리 교육 내용에 더 중요도를 두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현대 사회의 교육 개념을 살펴 볼 때 자본주의를 바탕에 두고 말 그대로 전인적 교육 보다는 기술이나 정보에 근원을 둔 인재 선발로 인해 교육의 취지를 망각하기 보다는 , 서당의 교육은 교육 취지에 맞는 전인적 교육에 현대 사회의 교육보다 더 접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에 서당 교육이 현대적 교육 개념과 상이한 차이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우리 나라의 학제는 초등학교 6년에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이렇게 나누어진다. 이것은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의 교육 학제를 본받아 짜여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학제를 구분한 기준은 사실 별로 명확하지도 않고 그에 대한 확실한 근거 또한 부족하다.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1학년생을 나누는 근거는 과연 무엇일까? 사실 중학교 1학년 학생 중에서도 초등학생들보다 실력이 더 떨어지는 학생들이 많다. 학습자의 학습발달 수준과는 상관없이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진급을 하게 되는 이러한 학제는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수준과는 상관없이 진급을 하게 되어 점점 더 학습내용을 따라가지 못하고 뒤쳐지게 되고, 이에 따라 학습에 대한 흥미를 점차 잃어가게 되는 것이다.그러나 조선시대 서당에서는 일정시간이 지나면 진급을 하는 지금의 학제와는 달리 괘책례를 통해 진급을 해나갔다. 학습자의 나이나 배운 시간과는 상관없이 개인의 학습 수준과 발달 정도에 따라 진급을 하게되는 것이다. 따라서 학습 발달 속도가 느린 학생의 경우에는 자신에 수준에 맞추어 천천히 공부를 해나갈 수 있고, 또 학습 발달 속도가 빠른 학생의 경우에 자신의 수준에 맞추어 빠르게 공부를 해나갈 수도 있다.이러한 진급 방식을 현재의 교육 제도에도 도입해 좀더 효율적이고 실제적인 학제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학제 또는 학년 구분의 기준이 나이나 시간이 아닌 학습자 개인의 학습 수준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 굳이 1년이나 반년이란 시간을 기준으로 학생을 진급시킬 필요도 없다. 그때그때 학습자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는 시기를 진급하는 시기로 정해야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진급은 현 단계에서 익혀야할 학습내용을 다 익히고 다음 단계의 학습 내용을 익힐만한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 맞추어 개인의 학습발달을 기준으로 진급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또한 우리 나라의 교육과정은 전국 어느 곳이든 그 전체적인 틀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대학 입시의 영향으로 구체적인 교육 내용도 각 지역마다 어느 정도 통일되어 있다. 그러나 지역마다 자연 환경과 사회적 환경이 각각 다르므로 교육 과정이나 교육 내용 또한 달라져야 한다. 학습자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교육 환경이 교육 방법과 내용에 반영되어야 효율적인 학습이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조선시대 서당 교육은 지역적 형편과 계절적 변화를 고려해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 지역적인 특성을 고려해 교육과정 내용이 다양하게 모색되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모색은 학습자가 지역 사회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을 좀 더 풍부하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또한 자신이 현재 배우고 있는 학습 내용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 환경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주어 자신과 외부 세계에 대한 이해를 더욱 높여줄 수 있다.따라서 이러한 서당 교육의 장점을 받아들여 현재 우리 나라의 교육 과정과 그 내용도 해당 지역 사회의 특성과 계절적 변화에 맞게 재구성되어야 한다.또 조선시대 서당에서는 놀이를 학습에 이용한 일종의 유희학습이 적극 활용되었다. 이러한 유희 학습은 학습자의 흥미와 동기를 높여 효율적이 학습이 이루어지도록 해준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현재 교육은 지나치게 단편적인 지식 위주의 주입식 교육에 편중되어 있다. 아침부터 밤까지 같은 자리에 앉아서 교대로 들어오는 교사들의 강의식 설명만을 받아 적는 것이 교육의 전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의 행위는 학습자의 흥미와 동기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올바른 학습 태도를 형성하는데도 많은 걸림돌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희학습 요소를 현재 교육과정에 체계적으로 받아들여 이용한다면 학습효과를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이다.서당의 생활지도와 예법지도는 언행, 용의 등의 몸가짐에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 및 면학, 관혼상제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러한 서당의 실제적인 생활지도 또한 현대 교육에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서당교육의 궁극 목적은 경전에 능통한 인간상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가의 이념에 기초한 참된 인격의 형성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생활 지도에 많은 비중을 할애해 교육이 이루어 졌다. 그러나 현재 우리 나라의 교육은 일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이러한 생활지도 면에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교육은 대학 입시와 직업 선택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려 참된 인격 형성보다는 지식 습득을 위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따라서 일상 생활과 직접 연결된 조선시대 서당의 생활 지도 교육을 받아들여, 지식위주의 교육으로 인해 부조한 일상 생활적인 부분에서의 교육을 보완해야만 한다. 또한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을 지식이 아닌 참된 인격에서 찾는 선조들의 정신을 받아들여 잘못된 우리들의 교육목표를 바꿔 나가야 한다.또한 조선시대 서당 교육이 학습과 평가를 일정부분 학부모와 연계하여 효과적으로 수행했다는 점과 학습과 생활지도에 있어서 훈장의 보조자로서 학동 중에서 접장을 선정하여 활용한 점도 눈 여겨 볼만하다. 사실 교육은 학생과 교사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활동이 아니라 학부모와 교사, 학생이 하나가 되어 상호적으로 일어나는 활동이다. 따라서 학생의 학습과 평가에 있어서 학부모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것은 학생의 학습효과를 높일 뿐만 아니라 교육의 수준을 높이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1. 루소에 대하여...프랑스의 소설가?사상가로서 널리 알려진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는 1712년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10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10세 때에 방탕하고 우매한 아버지 마저 집을 나가 버리는 바람에 어린 루소는 숙부에게 맡겨져 어느 동판 조각사의 심부름을 하면서 소년기를 보내야 했고, 결국 16세 때에는 제네바를 뛰쳐나와 청년기를 방랑생활로 보냈다.그 동안 바랑스 부인을 알게 되어 1740년까지 부인의 집에서 기거하며 학문을 스스로 공부하였다. 그러다가 1742년 파리에서 각계 각층의 사람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그는 디도로 등에 의해 간행 중에 있는 에 협력하게 되었다.1740년에는 디종의 아카데미 현상논문에 응모하여 당선되었고, 이것이 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됨으로써 그에게는 사상가로서의 계기가 주어지게 되었다.그 후 저작에만 전념해 , , , , 등을 발표하였고, 소설 형식의 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은 출판되자마자 파리학부에 의해 제소를 당한다. 파리 고등법원은 루소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파리를 떠나 스위스?영국?프랑스 각지를 돌아다니며 방랑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 기간에 쓴 것이 자전적 작품인 이다.1768년 테레즈 르 바쇠르와 결혼하고, 1770년 다시 파리로 돌아온 루소는 심한 피해망상 속에서 자기 변호를 위한 작품 를 썼고, 계속해서 의 집필에 들어갔으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1778년 파리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2. 루소의 교육사상(1) 성선설일반적으로 은 ‘어린이의 발견’ 또는 ‘어린이의 복음서’라고 알려졌다. 이는 어린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촉구하는 뜻이며, 그의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사람들은 ‘어린이 시대’가 따로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뜻이 담겨있다.아동의 발달과정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루소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고 본다. 루소는 어린이를 감성적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감성은 결코데 이때 소극적이라는 뜻은 강압적인 교육은 안 된다는 것으로 그 밖에 어떤 복잡한 개념으로 사용된 것으로는 생각지 않는다.그가 소극적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Negative는 기독교의 원죄설에서 본 아동관과 강제적 교육에 대한 부정적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즉, 태어날 때부터 죄의 씨앗인 아이의 나쁜 성향을 바르게 시정하기 위해 선을 가르쳐야 교정이 가능하다는 뜻의 교육을 생각하는 세상에 대해, 루소는 그런 의미의 교육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본성이 선하기 때문이다.루소의 소극적인 교육은 하나의 방법 원리인 동시에 단순한 방법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루소가 선에 대한 교육이라 해도 이를 가르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해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즉, 인위적인 선은 반드시 악이 들어 있게 마련이므로, 적어도 이성이 눈뜨기 전까지의 어린이 시기에는 교육하지 않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이는 아직 도덕적 존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이를 사회악에서 보호하는 일이 소극적 교육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루소는 교육의 기술적 한계를 내다보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선의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의 힘에 의한 악의 제어는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소극적 교육은 자연에 따른 교육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교육이라 해서 어린이 혼자 자라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것이다. 갓난아기는 다른 동물에 비해 장기간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그만큼 허약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어른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자연교육은 자연의 질서를 따라야 하기 때문에 어른의 마음대로 그 성향을 바꿀 수도 없고 성장 속도를 빠르게 할 수도 없다. 또한 순서를 뛰어 넘어 속성으로 성장케 하기 위한 인위적인 방법도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극적 교육은 시간을 아끼고 단축시키는 교육이 아니다. 어린이에게 중요한 것은 하루 속히 어른이 되는 일이 아니라 어린이의 자연발달 단계에 합당한한 화술-간단한 관찰교육 -소유의 관념인 농업교육-자연물 묘사, 그림, 관찰소년기-자연현상, 지리학, 우주학, 물리학, 박물학을 가르친다-읽기-가정지리학 -천문, 기학, 문리학(가장 간단한 형태)-여러 종류의 기술을 가르친다-항해기술을 가르친다 -읽기, 쓰기 -농업, 상업교육-특정 종교의식을 가르치지 말 것-교리문답이 아닌 근본적 진리와 관련된 종교의식 = 깨우침청년기-사회관계를 연구함, -인간을 연구하는 역사교육-외국어 고전을 읽힘 -독서권장-우화, 역사, 사회, 사회인교육 -라틴어 문법교육-수학교육, 역사나 문학 분야의 고전-언어와 문학교육 -처세술을 가르친다-사회조직과 제도를 학습함-17세 이후의 종교교육(자연종교)성인기-결혼의 관계 -지식교육을 한다(22세) -시민적 관계 연구-나라의 풍습(분위기)을 익힘신생아에서 청년기까지의 성장과정을 다섯 단계로 구분하여, 각 단계의 발달과정과 이에 적합한 교육을 논의한 교육론서라 할 수 있다.제1부는 서문과 영아기의 특징을 다루었으며, 주로 신체적인 특성과 감각적인 발달에 대해 그리고 전통적인 육아법을 자연 법칙에 의존하여 비판했다. “교육은 자연, 인간, 사물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의 여러 기관이나 여러 능력의 신체적 발달은 자연교육이다”라고 교육의 참 뜻, 교육의 종류, 자연인으로 기르는 방법, 교사의 자질이나 부모의 역할 등 초두에 내건 인간의 성선론을 위시해서 제1부는 교육의 총체적인 문제를 개관한 내용을 담았다.제2부는 2세에서 12세까지의 아동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특히 손발의 단련과 사물의 감각 훈련에 관해 논의한다. 사람은 감각을 통해서만 사물을 이해할 수 있다. 감각적 이성은 인간의 최초의 이성이며 지적 이성의 기초가 된다. 따라서 생각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우리의 손, 발, 우리의 감각 기관을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발달은 상호적인 것이며 이에 대해 루소는 구체적인 예를 들고 실물교육, 직관교육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그 방법에 일관된 주장은 자연에 따르 능력으로 배울 수 있어야 하는 자율학습과 실물을 감각적으로 포착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추리하는 직관주의 교육, 그리고 어린이 자신이 기구를 만들고 직접 경험해 보는 경험주의 학습 방법이 있다.루소는 이례적으로 책에 의한 학습을 비판하였다. 책에는 어린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쓰여있기 때문에, 그리고 책은 토막으로 잘린 지식의 집합이기 때문에, 통일된 생명 있는 지식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소는 “상상력을 이루게 하는 책, 만일 책이 절대로 필요하다면 그런 책이 한 권 있다. 그것은 자연교육개론이라 할 수 있는 책이며 이 책은 당분간 에밀의 유일한 책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자연과학의 원전이며, 우리의 문답교육은 다만 이 책의 주석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책은 무엇보다 즐거운 읽기가 되는 것으로 그 책의 이름은 「로빈슨 크루소」이다.”라고 말하며 「로빈슨 크루소」를 추천하고 있다.이 시기는 어린이의 사회관계가 점차 이루어지는 때이나 루소는 가능한 한 깊은 관련은 피하게 한다. 사회 속에 있으면서 고립되어 자립적으로 생활하는 것이 행복하게 자유롭게 사는 방법이며, 에밀은 근면하고 절제를 지키며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일없이 자기 할 일을 충실히 하며 산다.이런 자주 독립적인 생활에 가장 적합한 직업은 손으로 하는 일이다. 농사짓는 일을 배우고 목공일을 배운다. 이런 생산적인 일은 자주 독립적인 생활을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며 이 시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육의 과제다. 그 밖의 예술이나 역사, 문학, 사회과학이나 종교 문화는 다음 단계에 가서 검토해야 할 내용이다.제4부는 15세에서 20세까지의 시기로 사춘기의 시기다. “우리는 두 번 태어난다. 첫 번째는 존재하기 위해, 그리고 두 번째는 살기 위해 태어난다. 처음에는 인류로 태어나고 다음에는 성으로 태어난다.”라고 말하며 이 기간을 루소는 제2의 탄생이라 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즉, 어린이 시기를 벗어나 성으로서의 인생이 시작되는, 즉 남성, 여성으로서의 인생이 출발되는 의미의 제2의 탄생도 선할 수밖에 없다. 즉 본성이 선한 신이 악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악은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따라서 악을 제거하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이다. 이런 악의 제거는 인간의 양심에 의해 가능하다. 양심은 인간의 내적인 명증이며 그 신앙의 기초가 된다. 또한 양심은 이성의 힘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안내자이며 선과 악을 어김없이 결정하는 심판자이다. 양심은 인간의 본성의 우월성과 그 행위의 도덕성을 부여하는 존재 그 자체이다. 루소의 이와 같은 양심 송가는 그의 독창성을 대표하는 가장 낭만적인 구절이라 하겠다.제4부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가 사춘기, 혹은 청년기인 만큼 성에 대한 교육도 언급되었다. 사춘기에 발달하는 신체적 욕구인 정념에 대해 루소는 비교적 많은 실례를 들어 어떻게 그런 욕구에 대처해 나가야 하는 가에 대해 상세히 적었다. 성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이 자연에 위배되는 점과 동시에 성에 대한 책임, 의무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대한 그의 주장은 역시 선구자적인 성교육론을 펴 보였다고 하겠다. 그밖에 사춘기에 형성되는 사회인으로서의 자질에 대해 허영심의 극복이나 취미의 육성, 고전 선호에 대한 것, 이성에 대한 관심과 이상적인 여성상에 대해 서술하였다.제5부는 대체로 여성교육론에 해당한 부분을 서술하였으나 이에 못지 않게 사회교육에 대해, 특히 시민교육을 위한 준비단계로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루소의 여성관은 다른 관점이 진보적인데 비해 지나치게 보수적인 색채를 띠었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아온 부분이다. 그는 “남녀가 체질에 있어서나 성격에 있어서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남자와 여자는 동일한 교육을 받지 않는 것이 순리이다.”라고 말하며 여자란 무엇인가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여자교육 일반론과 소피이라는 장차 에밀의 아내가 될 특정한 여자의 교육을 논한다. 또한 가장 이상적인 결혼의 조건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에밀이 소피이를 만나는 과정과 어떤 방법으로 연애가 시작되는지 그 주변의 인물들, 소피이의 부모이다.
전근대시대의 관학의 정치적 성격정부의 설립으로 교육의 비용을 국고로 충당하는 학교를 관학이라고 한다. 한국 역사적으로 최초의 관학은 고구려의 태학, 고려의 국자감, 조선의 성균관 등이 있다. 대체적으로 관학은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입학 자격이 주어졌는데 인종, 성별, 종교, 신분 등의 차별적 사회 배경으로 인하여 입학 자격이 주어지게 되었다. 이때 전근대적 시대의 관학에 있어서 시대가 변화하면서 관학도 점차 변화해 가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근대와 전근대를 구분하게 될 때에 그 차이점에 관하여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1)우선적으로 사회적 측면에서 근대와 전근대를 이해 할 때사회적인 근대화는 생활 수준의 향상 정도에서 예상 할 수 있다. 통신, 교통, 전기 에너지의 사용도가 근대화의 척도가 되다는 뜻이다. 이 것들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전근대적 사회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2)또한 경제적 측면에서 근대와 전근대시대를 이해 해 보면전근대적 봉건 주의 경제 체제의 존속여부에 따른다. 근대적 경제 체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다. 이 두 체제 중에서 하나를 따르고 있는 것이 근대적 경제 체제다. 또한 생산 수단의 다양화를 들 수 있다. 전근대적 봉건 체제는 모든 소유와 생산의 수단이 토지에서 나오고, 토지 소유가 곧 재산을 의미 한다. 하지만 근대적 경제 체제는 토지 외에 기술, 자본, 생산 시설(기계) 등도 포함 되고 국민들의 지적 수준도 생산 수단의 일부로 생각되는 체제다.3)마지막으로 정치적 측면을 들 수 있다.근대와 전근대를 구분하는 것은 신분제의 폐지 여부에 따른다고 보면 된다. 노예제(천민, 노비 제도)가 폐지되는 시점을 그 구분점으로 생각 할 수 있다는 것이다.서양에서는 프랑스 혁명으로 구분하고, 우리나라는 갑오개혁(이 때 신분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어, 만민 평등이 법적으로 실현 되었다)으로 구분한다.또 한가지는 양성 평등의 측면이 있는데 남성-여성이 법적으로 평등하게 되는 것을 하나의 구분점으로 삼기도 한다.전근대시대에 있어서 관학이 가지는 의미를 되 새겨 볼 때에 근대와 전근대를 나누는 기준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을 알 수 있다.다시 말해서 전근대적 시대의 관학이 가지는 개념과 근대 시대의 관학이 가지는 개념은 서로 조금은 상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는 것이다.물론 교육의 비용을 국고로 충당하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입학자격이라든가 교육 행위에 있어서 바탕이 되는 개념은 근대와 전근대시대와는 차이가 있다.우선 전근대시대의 관학은 입학자격부터 여성은 제한되어 왔으며 계급에서도 상당한 제한을 두어 교육 받을 자격 조차도 주지 않았었다. 교육 내용 또한 실 생활에 필요한 학문 보다는 생활과는 떨어진 학문을 추구하는 성향이 깊었는데 예로써 고려는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었고 조선은 대체적으로 도덕성이나 선비양성 또한 유교경전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반면 근대시대의 관학이 가지는 교육적 바탕은 교육의 기회균등사상, 외국어교육, 실업교육 등이었으며, 외국어교육의 필요성에 의하여 근대 학교가 설립되었고 교육체제의 구상이 소학교, 중학교, 전문대학, 대학으로 연결되어 이후의 학제 기본 틀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또한 구 교육을 일소하고 근대적인 교육과정을 수용하였으며 초등교육을 국민교육으로 설정하여 이후 초등교육의 의무화에 공헌하였으며, 기회균등의 원칙을 설정함으로써 교육의 민주화에 공헌하였고 외국어교육, 실업교육, 교원양성에 치중하였다.마지막으로 교육 내용에서 충량 애국의 사상을 고취하여 이후 민족주의 교육을 생성, 전개하도록 하는데 공헌했다는 것에 그 의의를 찾아 볼 수 있다.근대시대의 관학이 가지는 교육적 개념은 단순한 개념의 발상 전환이 아니라 시대적 개혁의 의지 임을 생각 해 볼 수 있다.여기서 근대 학교 설립의 역사적 의의 살펴 볼 때근대 학교의 성립은 관리양성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은 과거제를 중심으로 한 구 교육을 지양하였다는 것이다. 과거의 인재 선발의 목적과는 달리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관학은 외국어교육, 교원양성, 실업교육이라는 세 가지 면에 치중하였는데 이것 또한 실 생활과 떨어진 학문이 아닌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시대적 요구로 인해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한국 근대 학교의 성립시기는 갑오경장 이후로 보는데 이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입학 자격에 있어서 더 이상 불평등이 아니고 교육 기회에 있어서 좀더 균등한 조건에서 기인한다 할 수 있다.
공 교육의 문제점과 대책요즘 우리 사회에서 대두되고 있는 교육의 중심엔 언제나 공교육과 사교육이 위치하고 있다. 이들 각 교육이 가지는 성질은 실질적인 교육행위라 말 할 수 있을 만큼 각 교육행위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공교육은 사교육 행위를 줄일 것을 요구하고 사교육은 그런 공교육에 대하여 질적인 측면의 부각을 강조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공 교육은 사교육에 비해서 교육의 효율적 측면이 떨어진다고 평가 되기도 하고 공 교육의 정당성이란 측면에서 이제는 사교육이 기존의 공 교육이 가지는 입장을 가지게 되면서 교육을 더 이상 국가의 한 사업으로 생각 할 수 없는 상황까지 와버렸다.실질적으로 사 교육이 이렇게까지 부각되기 까지는 우리나라의 국민성인 교육열도 무시하진 못하겠지만 더 근본적으론 그런 교육열을 교육을 담당하는 국가가 책임지지 못했다는 이유에서 비롯된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공 교육이 사교육에 비해서 어떠한 면에서 비효율적이며 교육 행위에 있어 대중의 부응에 도달하지 못했는지 알아봐야 할 것이다.일단 공 교육과 사 교육이 가지는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것이란.. 공 교육이 모든 학생들의 학습욕구를 충분히 충족시킨다면 사교육이라는 말이 애당초 존립이 불가능하다.우리나라 초등학교 학급당 학생수를 생각해보면, 예전 보다 각 학급당 학생수가 많이 감소하여 교사가 학생 한명 한명에게 신경써주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여도 아직 선진국에 비하면 많은 수치다. 참고로 미국의 교육부조사에 의하면 학급당 학생수가 20명이상에서 20명 이내로 줄이면 학업성취도가 2배로 증가한다고 나왔다.그러나 우리나라는 교육부가 과다한 학급당 학생수 때문이라고 보지 않고 교사들의 무성의가 자기 내들의 교육정책 실패의 주원인으로 파악하고 있다. 사람은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는데 그렇게 파악한다는 것은 큰 오산이다.즉 무엇보다 공 교육의 획일적 입시위주 교육과 학급 편성방식, 학급당 학생수, 부실한 교육과정에 기인하는 것이 옳은 말이다. 이처럼 여러 요인을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나라의 전인 교육을 표방하는 공교육은 사 교육에 밀려 붕괴될 수밖에 없다.어쩌면 사 교육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시대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정보사회에서 우리는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교육의 내용과는 달리사회에서 생활하기엔 학교 교육의 교과내용이란 생활과 거리감이 없다고 할 순 없다. 물론 사회성이나 민주주의를 자연스럽게 터득해 나가면서 익숙해질순 있으나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내용으론 사회에 적응하기 부족하여 많은 괴리감을 줄 것이다. 따라서 그런 차이를 줄이기 위해서 학생들은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요구하게 되며 학교 교육으로선 실질적으로 그런 행위에 있어서 만족을 줄 수 있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사 교육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공 교육은 그런 괴리감을 줄 일 수 없다는 말인가.사실적으로 우리나라 교육을 살펴보면 정치적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교육부 장관도 물론 교체되었다. 물론 교육부 장관이 교체 될 때마다 교육 정책이 바뀌는데 매년 또는 수년 사이에 교육 정책이 계속적으로 바뀌면서 학업을 하는 학생들조차 지속적으로 바뀌는 교육 정책에 대해 불신 하게 되고 교사들도 물론 교육 정책에 대해서 불신 하게 되어 공 교육 자체가 존립의 위기를 맏게 되었다. 공 교육이 교육으로써 의미를 가질려고 한다면 진정 하나의 교육 목표로 일관된 교육 정책의 개편을 이룩해야 할 것 이다.또한 공 교육이 가지는 문제점을 제도적 측면에서 여러 가지 살펴 볼 수 있겠지만 제도적 측면보다는 학교 등의 교육을 담당하는 것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우선, 교사의 자질성이다.학생들이 사교육을 받는 근본적인 이유는 학교 교육만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의 방향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것도 있겠지만 그런 학교 교육에 있어서 교육 행위를 하는 교사의 자질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사 교육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사 교육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자본주의적 성격에 의해 서로 경쟁하게 되고 더 많은 이익의 창출을 위하여 교사 스스로가 더욱 학업에 열중하며 교육 행위에 임한다. 사 교육의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목적이 개개인의 이익 창출이라든가 아닌 또 다른 교육 행위자가 가지는 특정 목적에 있든지 간에 그 목적을 위해 계속적인 자기 발전을 이룩한다는 말이다. 정말 이런 자기 발전이 공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에게도 해당되는지 생각을 해봐야 한다. 공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은 먼저 검증된 시험을 통하여 교직에 몸을 담게 되므로 교사 생활의 출발은 다른 사교육 교사들의 출발보다 더 월등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공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이 가지는 교육 행위에 대한 입장은 서로 상이하게 틀리긴 하나 대체적으로 볼때엔 단순한 개개인의 이익이나 특정 목적 보다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 행위에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에 있어서 교육 행위에 다른 타 교사들보다 많은 열성을 보인다고 해서 개인마다 보수의 차이를 두는 것은 아니다. 일단 공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 사이에는 사 교육의 교사들과는 달리 자본주의가 바탕에 깔리지 않고 이미 검증된 시험을 걸렀으므로 교육 행위의 목적이나 다른 특정 목적에 상관없이 보수가 지급되기 때문에 사실상 경쟁력을 잃는다 해도 무방하다. 경쟁력을 잃게 되면서 점차 교육 행위에 있어서 나태해지고 책임의식이 점차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을 짚어 볼 때 공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의 나태함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전혀 없다는 것 또한 문제이다.그리고 수능 시험에 집중된 교육의 내용이다.청소년들이 학업 성취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의아해진다. 수능 시험을 칠려고 공부를 하는것인지 아니면 그 동안 공부한 것을 단지 수능 시험이란 검증된 시험으로 체크해보는 것인지 의문이다. 이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와는 차이가 있다. 교육의 목적을 어디에 두는 것인지 공 교육에서는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전인 교육이 교육의 목표라면 그런 취지에 맞는 제도적 뒷 받침이 있어야 할 것인데 전인 교육은 지금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엔 한낮 꿈에 불과하다. 학생들이 수능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어서 공 교육을 불신하게 되는 이유는 공 교육의 취지에 맞는 교육 정책이든가 교육 내용들이 시대적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기 때문이다. 겉으론 전인 교육이다 열린 교육이다 말을 하지만 실제 사회에선 전인 교육 보다는기술과 정보를 가진 인간을 원하기 때문이고 또 교육 정책 변화를 볼 때 교육의 내용과 행위가 그런 자본주의적 성격을 따라 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육의 목표와 취지에 상당한 모순을 낳는다.이러한 공 교육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선..1)학교교육의 정상화가 필요하다.사교육비의 기하급수적인 증가는 공 교육. 즉 학교교육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학교의 수업이 사교육방식을 따라가는 꼴이 아니라 참된 교육을 바탕으로 공교육으로서 나아가야할 방향이 있기 때문에 학교교육의 정상화가 시급하다.2)실제적으로 공 교육이 담당하지 못했던 분야에 대해서 투자가 필요하다. 사교육이 거의 모두 잠식하고 있는 미술활동이나, 체육, 음악활동을 이제는 공교육으로 융화시킬 필요가 있다. 학교에서 수업을 모두 마치고 과외교습소나 학원에 가서 하던 활동을 공교육을 담당하는 학교에서 방과 후에 시행하면 그만큼 사 교육 활동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사교육에 비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충분히 만족되는 교육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