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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님이 좋아하는 영화 감상문 영화 '밀양'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
    ‘의미’의 벽을 허물어야 보이는 ‘햇빛의 비밀’- 영화 을 보고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보이고 싶은 모습으로 보이려 노력한다. 그렇다면, 나의 삶은 어떤 것일까?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이 자아일까? 아니면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자아일까? 이러한 물음에 엠마뉴엘 레비나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주체는 주체가 그 자신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관념과는 다른 것이다. 주체는 이미 모든 대상에 대해서 자유롭다.”(레비나스, p80) 그는 이러한 존재론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를 두 가지 용어로 다시 분류한다. 존재와 존재자가 그것이다. 우리가 흔히 철학적 물음에서 마주하게 되는 존재는 보다 근원적이고 근본적이며 선험적 개념이다. 그것은 일종의 ‘진리’에 대한 담론이기도 하다. 그에 반해 존재자는 그러한 존재의 깜빡임, 즉 현상계에 우리가 느끼는 존재의 일면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우리가 삶을 살면서 존재와 조우하는 순간이 있을까? 아니면 ‘이것이 진정한 진리다’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있을까? 이창동의 영화 은 그러한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을 둘러싼 그 많은 반기독교 논쟁은 영화를 비판하는 기독교인들과 그들이 비판하는 영화의 껍데기를 옹호하는 혐기독교인들의 영화가 말하는 주제를 심각하게 빗겨간 쓸데없는 논쟁으로 보였을 뿐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회적 재료가 대한민국 기독교의 그 단순성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는 없다. 그러한 점에서 자신들의 치부를 들어낸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의 과잉 대응도 이해할 만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만든 이창동 감독이 만든 전작들의 사고의 깊이를 감안했을 때, 그러한 영화의 재료가 된 표면적 기독교라는 한 종교 자체에 대한 천착은 그 주제에서 한참 빗겨나 있는 듯 보인다. 즉, 이 영화는 보다 깊이 있는 철학적 문제에 침잠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논쟁 자체가 기독교인이던 비기독교인이던 실제로 무의미해보일 뿐인 것이다.영화의 제목은 중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영화의 공간적 무대가 된 경북 밀양이 하나이고, ‘비밀의 햇빛’이라는 밀양의 한자 풀이가 그 다른 하나이다. 주제를 선명히 들어 내 주는 ‘비밀의 햇빛’이란 뜻은 처음 밀양에 오게 된 신애(전도연)가 종찬(송강호)에게 물어보며 자답해주는 말이다. 정작 밀양에 토박이로 살고 있는 종찬은 그 뜻조차 모르고 있는데 말이다. 또한 신애는 종찬에게 “밀양은 어떤 곳이죠?”라고 묻는다. 종찬은 “똑같이 사람 사는 동네죠”라고 대답한다. 이 둘의 짧은 대화 속에서 영화를 이끌어 가는 두 명의 중심 캐릭터, 혹은 두 개의 대비되는 갈등 요인은 선명하게 부각된다. 이 두 갈등 점을 찾아야만 감독이 ‘기독교를 비하하는 영화가 아니다’라고 말한 부분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즉,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가 있어야만 삶이 가능한 신애, 그녀는 심지어 그 의미가 자신을 괴롭게 하고 남들에게 들어내기 힘들 경우에는 거짓으로 만들어 내 버릴 정도의 인물이다. 모든 것이 설명되어야하고 의미가 있어야 하는 삶 속에서 사는 신애와 대비되는 종찬은 이러한 언표들의 세계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인물이다. 그녀가 피아노 학원을 차렸을 때, 종찬은 어디서 구해왔는지 영어로 된 상장을 액자로 만들어 이런 것도 필요하다며 학원 벽에 붙여준다. 그에 대해 추궁하는 신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피아노 치고 있는 동네 아이에게 말을 돌려버리는 종찬이다. 물론 이 장면만 보면 그 역시 거짓으로라도 의미를 부여하려는 인물로 그려질 수 있다. 그러나 큰 맥락에서 볼 때, 그는 그런 것이 그저 사는 것에 도움이 되는 행동일 뿐이라고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런 의미부여의 대화를 슬쩍 피해버림으로써 의미의 한계를 넘어버리는 성격을 가진 것이다.다시 존재와 존재자로 돌아가 보자. 존재가 형이상학적 공간에 있는 완전의 것, 즉 이데아의 개념이라면, 존재자는 존재의 불완전한 현시이기 때문에, 존재자가 포착되는 일상의 삶은 플라톤의 설명처럼 불완전하고 본원적 존재에 대하여 거짓일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쉽게 말하면, 종찬과 같이 주어진 삶을 그저 살아나가는 것이 매순간 의미를 부여하는 신애의 삶에 비해 가볍고 가치 없는 삶인가? 다시 말해, 종교, 신념, 철학, 정치체제 등의 모든 종류의 이데올로기에 갇혀서, 그러 것 없이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레비나스는 말한다. "우리 존재(esistence)를 만드는 것은 우리 존재(existence) 자신이다. 우리는 숨쉬기 위해 숨 쉬며, 먹고 마시기 위해 먹고 마시며, 거주하기 위해 거처를 마련하며, 호기심을 만족식키기 위해 공부하며, 산책하기 위해 산책한다. 이 모든 일은 삭ㄹ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이 모든 일이 삶이다.“(레비나스, p70) 이 영화 역시 우리에게 레비나스의 판단과 비슷한 해답을 제시한다.신애의 아들이 유괴되어 죽게 된 비극의 발단은 그녀가 돈이 있는 듯 허세를 부렸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가 남편을 못잊어 그의 고향인 밀양으로 온 것 같이 구는 것도, 서울에서 왔기에 좋은 땅을 보러 다니며, 돈 많은 척 하는 것도, 모두 그녀 스스로 거짓된 의미 속에 갇혀 있음을 보여주는 행위이다. 그녀의 죽은 남편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으며, 그녀도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죽은 남편을 애틋하게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밀양에 온 것도 아니다. 사실, 그녀의 결혼 생활은 사랑이라는 큰 의미가 있지 않았으며, 그녀의 밀양행도 자신을 아는 이 없는 곳에서 현실을 도피하려 했을 뿐, 남편을 잊지 못해 그와 관련 있는 곳으로 온 것은 아니다.또한 그녀가 교회에 가서 기독교의 사랑과 용서의 가르침을 통해 상처를 치유 받고 마음의 평안을 얻은 듯 보이는 것도, 용서해 주겠다는 마음으로 찾아간 살인자와의 면회에서 그가 스스로 회개를 통해 신께 용서받음을 선포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를 느끼고 신을 저주하는 것도, 미용실에서 만난 살인자의 딸에게 끝까지 머리를 못 맡기는 것도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들을 찾으려하는 잘못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삶의 의미에 사로잡혀,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이전의 의미가 잘못되었음이 확인될 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반복하고 있을 것일 뿐이다.이에 반해, 그녀를 만나가 위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종찬은 그녀가 떠난 뒤에도 교회를 다니고 있다. 그녀의 행동 방식대로라면 종찬도 그녀가 없는 교회에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유야 어찌됐든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온 교회의 생활을 광장에 나가 다른 교인들과 찬송가를 부르며 전도도 할 정도로 자신의 일부로 품는다. 여기에서 다시, 종찬과 신애의 첫 대화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밀양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라는 신애의 말에 “뜻보고 삽니꺼? 그냥 사는 거지예!”라는 종찬의 대답이다. 이 대화야 말로 한 편의 논설문이 서론 부분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먼저 말하듯이, 이 영화의 주제가 나타나는 가장 결정적인 초반부의 대화였던 것이다.
    인문/어학| 2014.12.10| 3페이지| 1,000원| 조회(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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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감상문) 블록버스터 영화, 저항의 방식에 대해 철학적으로 고찰하다.-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블록버스터 영화, 저항의 방식에 대해 철학적으로 고찰하다영화 를 보고블록버스터 영화란 엄청난 물량을 투입해, 흥행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로 영화 자체뿐만 아니라 파생 상품의 대대적 판매까지를 목표로 하는 상업 영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영화가 가지는 예술성보다는 상업적 요소를 극대화하여 더 많은 관객 더 많은 소비층을 유혹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다. 역시 이러한 블록버스터 영화에 속한다. 그 자체가 이미 프랜차이즈화된 시리즈인 은 전 세계에 엄청난 팬 층을 가지고 있는 마블 코믹스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다. 이 영화는 이미 시리즈가 3편까지 만들어져있고, 외전 격인 등이 만들어진 상태에서, 원래 시리즈의 이전 이야기를 다루는 프리퀄 판으로 만들어졌다.이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그래픽 노블 시리즈의 주제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만화 시리즈가 처음 선을 보인 것은 60년대 이후였다. 그 당시의 미국은 흑인들의 인권 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시기로 이 작품의 모티브는 이러한 흑인 인권운동이라 할 수 있었다. 주류 사회인 백인들과는 다른 차별받는 흑인들의 문제를 이 영화는 인류와 다른 존재인 돌연변이들로 상징화 했다.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는 사회적 배경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60년대 당시의 미국 흑인 인권운동은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평화적 시위와 차별에의 비폭력적 저항, 흑인 교육의 기회 확대 등을 통한 흑인 인권 개선의 움직임이었고, 다른 한 측은 말컴 엑스가 주도한 백인에 대한 테러, 폭력 투쟁 등의 무장 인권 운동이었다. 이 서로 다른 방향의 인권 운동에 대한 태도를 가진 두 인물이 바로 시리즈에서 학교를 설립해서 돌연변이들을 교육시킴으로써 인류와의 공생을 모색 하는 찰스 자비에 박사(프로페서 엑스)와 인류에 대한 증오와 인류를 돌연변이화하거나 인류 자체의 말살을 통해 돌연변이들의 세상을 꿈꾸는 에릭 랜서(매그니토)로 형상화 된다.영화로써 시리즈의 전작들은 솔직히 이러한 상징들을 충분히 전면에 내세우지 못했다. 말 그대로 블록버스터 액션 물로써 볼거리에 치중한 측면이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시리즈의 시작점을 전하는 에서는 프로페서 엑스와 매그니토가 주인공이기 때문인지, 훨씬 더 그들이 상징하는 바에 대해서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형상화는 미국 사회의 특수성에서 출발했지만, 블록버스터를 넘어 헐리우드 영화 전체에서도 보기 드문 보편성마저 획득하는 듯 보인다.이 영화의 뛰어난 점은 바로 다수와 소수, 보편과 다름으로 인한 차별에 대항하는 방법에 대해 보여주며 쉽게 선과 악을 구분하는 단순한 이분법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이전 시리즈에서 악인으로 그려진 매그니토에 대해 오히려 이야기에 더 많이 집중하고 있다.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를 경험하고 그곳에서 자신이 가진 능력 때문에 어머니를 잃게 된 고통과 어머니를 죽인 세바스챤 쇼우에게 복수하기 위해 일생 동안 그의 뒤를 쫓는 과정 등이 오히려 프로페서 엑스의 평탄했던 삶과 대비되어서 무척 강렬하다.물론 이 영화에서도 세바스챤 쇼우라는 악인은 존재한다. 그는 다른 사람의 능력을 흡수할 수 있는 돌연변이로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냉전시대의 미국과 소련을 중간에서 이간하여 3차 대전을 발발시키려는 인물이다. 그가 전쟁을 유도하는 목적은 핵무기의 사용을 통한 인류의 전멸이다. 그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돌연변이들의 출현은 방사능이 원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핵전쟁의 방사능에 의한 인류의 전멸은 방사능에 내성이 있는 그들을 위한 시대를 여는 출발점인 것이다.그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에릭는 미국 정부를 위해서 일하는 찰스, 즉 프로페서 엑스와 만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그 마음까지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의 찰스는 돌연변이를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인류의 진화 과정으로 담론화 하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그는 이를 통해 돌연변이들이 인류와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돌연변이들을 모은다. 그의 평화적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방식은 복수심에 불타는 에릭조차도 진심으로 그를 친구로 받아들이게 만든다.에릭은 찰스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능력까지 발전시킬 수 있게 되지만, 쇼우와 마주하게 되자 자신의 복수를 결국 실행하게 된다. 마침내 쇼우를 제거하고 그의 계획을 저지하고 난 후, 에릭은 쇼우가 머리에 쓰고 있던 투구 모양의 두뇌제어 방어 장치를 뺏어 쓰게 된다. 그 유명한 매그니토의 헬멧인 것이다. 이 때 에릭이 죽은 쇼우에게 던지는 말, “사실, 당신의 말은 모두 다 맞는 말이야!”는 이 영화의 가장 명대사가 아닐까 생각된다. 돌연변이에 대한 차별에 대해 에릭 역시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인류라는 기존의 중심을 제거하고 자신들이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제거와 탈취의 폭력적인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매그니토가 쇼우의 헬멧을 뺏어 쓰는 것은 찰스의 두뇌 제어로부터 자유로워짐과 찰스의 방법이 아닌 쇼우의 방법으로 돌연변이의 활로를 모색하겠다는 그의 의지를 대변한다. 그리고 찰스와 대면하게 된 에릭은 다른 돌연변이들에게 쇼우라는 적이 없어졌을 때, 인간들이 보이게 되는 행동을 설명한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과 소련에서 출발한 전함들은 쇼우의 계략에 의해서 서로를 겨냥하다가 동시에 돌연변이들이 있는 섬을 향해서 모든 미사일과 함포들을 일제 사격하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보통의 인간들이 가지는 다름에 대한 두려움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면서, 동시에 자신들과 다른 존재를 없앰으로써 자신의 존재의 안녕을 보장하려는 치졸함을 잘 보여준다.인간들이 보이는 돌연변이들에 대한 이 태도는 매그니토의 폭력적 저항이 어느 정도 정당성을 획득하게 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폭력은 다름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두려워함으로써 그것에 가하는 다수의 폭력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또한 인간들의 행동은 쇼우나 에릭의 폭력 이데올로기와 하나도 틀림점이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어지는 돌연변이들의 노선 선택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찰, 그 와중에 모이라 요원이 쏜 총알을 튕겨내다가 매그니토가 찰스를 부상입히게 되는 장면에서 폭력에 대응하는 폭력은 또 다른 파국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부상입히고 그 탓을 인간인 모이라 요원에게 돌리며 모이라 요원의 목걸이를 졸라 그녀를 살해하려는 에릭에게 찰스는 “나를 다치게 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자네야!”라는 대사는 이러한 메시지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킨다.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차별을 받는 소수의 집단이 지배집단의 폭력에 방법으로 많은 사람이 무력 저항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지배집단의 영토화와 저항 집단의 재영토화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재영토화란 권력자들이 만들어 놓은 영역, 즉 영토화의 영역을 힘에 의해서 무너뜨리고 자신의 영역을 그 자리에 위치시킴을 의미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 지점에서 바람직한 방향의 영토화를 무력화 시키는 방법으로 탈영토화를 제안한다. 탈영토화는 재영토화의 폭력적 방법이 아니라 영토화를 내적으로 무력화시키고 그 지배 이데올로기를 담론의 장에서 무의미하게함으로 해체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간디의 저항이 그러한 좋은 예이다. 차별과 불평등, 무력에 의해서 권력을 휘두르던 집단에 그의 반대 개념인 비폭력, 불복종, 그리고 용서와 화합 등의 이성적 무기로 대응하여 결국 폭력의 의미가 무색해지게 만드는 그 근본을 없애버리는 저항이 바로 탈영토화의 전략인 것이다.
    독후감/창작| 2011.12.21| 3페이지| 1,000원| 조회(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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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감상문-교수님이 좋아하는 감상문) 혹성탈출-진화의 시작
    또 하나의 헐리웃 영웅주의; 진화의 시작이 아닌 퇴보의 반복- 을 보고영화 은 평론가들의 극찬이 이어지는 가운데 개봉했던 영화였다. 이미 1968년부터 시작된 시리즈 네 편과 2001년 팀 버튼 감독의 리메이크 판까지 전부 본 상태였기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한 기대는 남달랐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의 실망은 기대만큼 큰 것이었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도대체 평론가들이 왜 이 영화를 그렇게까지 높은 점수로 칭송하는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물론 영화가 재미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 영화에 대한 칭찬은 주제적 측면 때문으로 생각이 되는데, 솔직히 비평가들이 주고 있는 그 높은 점수에 공감하기 힘들다. 이 영화의 주제가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을뿐더러, 그 깊이에 있어서도 그다지 많은 고민을 하고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영화는 자신의 아버지가 앓고 있는 알츠하이머 병(치매)을 고치기 위해 신약을 개발하던 한 연구원이 그 실험의 임상 대상이었던 침팬지의 새끼를 기르게 되고, 이 침팬지가 그 임상 실험의 결과로 놀라운 지능을 갖게 되었으며, 인격을 가진 이 침팬지가 동물 보호소의 폭력과 억압에 항거하고 다른 유인원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들을 이끌고 봉기하게 된다는 기본 줄거리를 가진다.줄거리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영화는 영웅 신화적 내러티브를 차용한다. 그리고 그 내용의 주제를 받치는 두 개의 중심축을 가진다. 그 중 첫 번째는 생명에 대한 인위적인 조작이 불러오게 되는 파국이다. 서양의 기독교 사상에서는 생명이라는 것이 신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그것을 피조물인 인간이 조작하는 것은 신에 대한 불경이고 범죄라는 신념이 아주 강하다. 미국 사회가 그러한 신학적 신념에서 많은 부분 탈피하고 있지만, 보수적인 헐리웃의 영화판에서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현실이다.가령, 리들리 스콧 감독의 명작 에서는 우주 개발을 위해 만들어진 유전자 조작 인간들이 자신의 생명이 시한부임을 알게 되어 반란을 일으키려 도주하게 되고 그들을 뒤쫓는 수사관이 등장하며 이러한 미래의 암울함을 전달한다. 또한 그다지 흥행작은 아니었지만, 말년의 말론 브란도가 등장해서 화제가 되었던 작품 에서는 외딴 섬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반인반수의 돌연변이 생명체들이 난동을 부리며 섬에 만들어진 유전자 변형 왕국이 멸망하게 된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작인 마이클 베이의는 유명인의 난치병을 치료하기 위해 복제된 인간들이 자신이 복제품임을 알게 됨으로써 벌어지는 파국을 다루고 있다.더 나아가 헐리웃의 로봇과 인공지능 창조물에 대한 태도 역시 그 선상에서 처리되어지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스티븐 스필버그의 , 윌 스미스 주연의등이 그러한 관점에서 인간이 창조한 지능형 안드로이드가 가지는 윤리적 문제를 그리고 있다. 그 밖에도 헐리웃에서는 이 주제가 수업이 반복되고 변주되어지고 있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헐리웃에서 로봇을 소재로 하는 작품들이 일본의 애니메이션만큼 만들어지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할 때, 그러한 인간의 창조행위에 대한 거부감을 드는 전문가들이 많은 편이다. 그런 맥락에서 시리즈가 미국 내에서 흥행할 수 었었던 것도 등장하는 로봇들이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지능의 기계들이 아닌 외계의 기계 생명체라는 설정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가도 있다.이러한 영화들이 이미 지겹게 역설해 왔던, 생명체에 대한 인위적 조작의 윤리적 문제와 그로 인한 파국의 테마를 이 영화는 그저 되풀이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단지 흔한 과학 관련 영화처럼 과학자 자신의 연구에 대한 욕심이라는 억지 설정보다는 아버지의 뇌기능을 되돌리고자 한다는 휴머니즘적 설정으로 좀 더 납득할 만큼 부드럽게 바꾸어 놨을 뿐, 주제의 한 축에서 이미 이 영화는 구태의연함을 답보하고 있을 뿐이다.더구나 어미가 죽고 난 후에 알게 된 시저의 존재에 대해서, 영화의 파국을 막기 위했다면 시저를 숨긴 연구원이 시저를 숨기지 않고 도살해야 했다는 시선까지 던지고 있는 듯하다. 결국 시저를 숨기지 않고 다른 실험체들과 도살 처분 했다면, 이 파국은 결국 없었을 테니 말이다. 더군다나 이들이 만들어낸 신약이 일종의 바이러스 역할을 함으로써 피해를 보게 된다는 다음 편의 복선에서 그 바이러스로 인해 죽게 되는 최초의 피해자가 이 연구원이었다는 것은 그에 대한 응징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 무슨 해괴한 리셋 증후군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인간은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해서는 안 되지만, 자신의 실수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생명을 가차 없이 죽여야 된다는 구제역 파동에 미국산 쇠고기 판매량 올라가는 소리인가 말이다.그렇다면, 나머지 한 축은 신선할까? 아쉽게도, 그 대답은 강한 부정이다. 이 영화의 내용을 형성하는 두 번째 주제적 측면은 뛰어난 지능을 갖게 된 ‘시저’가 유인원 집단을 장악하고 인간들의 잘못에 항거하며 응징하기에 이른다는 측면이다. 이 축으로 영화를 풀었을 때, 로마의 황제를 지칭하는 ‘시저’란 이름을 가진 침팬지가 인간들의 차별과 보호소에서 관리인의 학대에 스스로의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되고 자유를 찾아 동족의 우두머리가 되어가는 과정이 마치 약자의 강자에 대한 ‘전복’내지는 ‘자유’에 관한 존재의 외침 등의 진보적 이데올로기를 표방하고 있는 듯 보인다. 따라서 이 부분을 높이 사는 평자들은 시저가 처음으로 내 뱉는 언어인 “No!”에 무한한 감동을 받은 듯 보인다. 실제로 약자가 강자를 상대로 저항하는 짜릿한 이 시퀀스는 나름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아마 이 부분에서 현실의 권력에 저항하는 촛불 시위대의 저항을 오버랩시킬 수도 있기에 더욱 마음이 설래일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레드 우드 숲으로 향하는 유인원 시위대를 저지하는 경찰과의 대치 등은 그러한 감성을 자극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그러나 그들의 봉기는 결국 폭력적인 봉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 폭력 봉기를 이끄는 한 명의 엘리트 시저는 원래의 일인자를 자신 앞에 철저하게 굴복시키고 그를 자신의 수하로 만들며, 조직이 두려워하는 존재인 덩치 큰 고릴라를 자신의 말에 따르게 함으로써 조직을 장악한다. 거기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아마 정치인을 해야 할 것이다. 정계로의 진출이 힘들다면, 조폭이 되길 권하고 싶을 정도이다. 폭력은 폭력일 뿐, 시저와 다른 동물들이 겪는 불평등이 일종의 알레고리로써 모든 약자에 대한 권력자의 폭력에 대한 항거라면, 그에 대한 방식을 제시하는 것은 좀 더 신중해야하지 않을까싶다. 아직도 슈퍼맨이 나타나서 지구를 악당의 공격으로부터 구해줄 거라는 헐리우드의 영웅서사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태의연한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감동은 너무 저렴한 것 아닐까 싶은 마음이다.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의 개념을 빌리자면, 지배집단의 영토화에 대항하는 방법에 있어서 많은 사람은 재영토화를 택한다. 이는 권력자들이 만들어 놓은 영역을 힘에 의해서 무너뜨리고 자신의 영역을 그 자리에 위치시킴을 의미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바람직한 방향의 영토화를 무력화 시키는 방법으로 탈영토화를 제안한다. 탈영토화는 영토화를 내적으로 무력화시킴으로써 가능하다. 이를테면, 간디의 저항이 그러한 좋은 예이다. 차별과 불평등, 무력에 의해서 권력을 휘두르던 집단에 그의 반대 개념인 비폭력, 불복종, 그리고 화합 등의 무기로 대응하여 결국 폭력의 의미가 무색해지게 만드는 그 근본을 없애버리는 저항이 바로 탈영토화의 전략인 것이다.
    독후감/창작| 2011.12.15| 3페이지| 1,000원| 조회(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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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언어학]남성과여성의대화차이-욕의경우
    남성과 여성의 발화차이: ‘욕’의 경우남성과 여성이 말하는 방식에는 정말로 큰 차이가 있을까?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사회 속에서 혹은 가정 속에서 끊임없이 남성과 여성과 접촉하며 어울려 살고 있다. 서로 지내면서 간혹 말다툼을 하게 되고, 싸우면서도 그 이유가 남성이나 여성이 말하는 방식과 태도라기보다는 각각의 사람 고유의 특성과 생각의 차이로 인한 견해차이 때문에 다툼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성의 차이에서 나오는 차이점이란 것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남성과 여성이 말하는 방식이 차이가 나는 경우의 가장 큰 예가 ‘욕’을 하는 경우이다. 나이와 신분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욕을 주로 하는 사람들은 남성이다. 물론 욕을 많이 하는 여성도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생활에서 욕을 하는 여성은 드물다. 그렇다면, 특별히 여성보다 남성이 욕을 많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사람이 화나거나, 흥분했을 땐, 여성이건 남성이건 욕을 쉽게 한다. 남성끼리, 여성끼리 싸울 때 폭력의 상황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싸우는 내용과 핵심을 벗어나 갖은 욕설과 험담을 내뱉는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이 싸울 때를 보면, 그 관계가 부부이거나 동료이건 간에 남성이 심한 욕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한 번은 동료지간인 K군과 L양이 싸우는 것을 보았다. L양은 K군에게 “야, 너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니가 잘못했잖아” 등의 말을 끊임없이 해대고 있었는데, K군의 한마디는 이랬다. “야 이 썅년아!” 그러자 L양은 눈물을 터뜨리며 밖으로 나갔다. 남성이 심한 욕을 했을 때 맞대응하며 심한 욕을 하는 여성은 드물다. 욕은 남성과 여성에게 모두 금기시 되어있지만, 여성에 비해 남성은 거의 거리낌없이 욕을 한다. 특히 상대를 억누르고, 제압하려 할 때 그들은 욕을 사용한다.남성들이 일상생활에서 특히 많은 욕을 하는 경우가 운전할 때이다. 한 번은 내가 아파트 정문에서 막 도로로 나가려고 하는데, 지나가던 차와 맞부딛힐뻔 한 경우가 있었다. 급히 나오려고 한 나에게도 잘못이 있었기 때문에 난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상대방인 남성 운전자는 가던 차를 멈추고 차창문을 열어 나에게 욕을 해댔다. 아파트 정문 앞을 그렇게 빨리 지나가려 했던 그 사람에게도 잘못은 있을진대, 그 사람은 나에게 욕을 해대느라 가던 길도 멈추는 것이다. 남성들이 잘못하여 위급한 운전상황에 놓일 뻔 했을 때, 여성들은 이렇게 반응하지 않는다. 순간 놀라고 불쾌하지만 그냥 계속 가던 길을 가지, 차창문을 열어 욕을 하느라 가던 길을 멈추지는 않는다. 특히 남성들은 잘못을 범한 운전자가 여성일 때, 남성 운전자가 잘못을 했을 때보다 더 많이 욕을 한다. “집에서 솥뚜껑이나 운전을 할 것이지.”, “그러면 그렇지 여자니까 저러지.” 등의 남성 운전자의 말들은 주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들이다.욕에 관하여 남성들과 여성들의 가장 큰 차이는 남성들은 일상생활에서 감탄사나, 토씨처럼 욕을 자연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H군은 말끝마다 “씨발”을 붙인다. 또 S군은 “좃됐다. 좃같다”라는 말을 한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상대방에게 하는 말들이 아니고, 조사나 감탄사처럼 혼자 하는 말들이다. 어떤 여성들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에서 욕을 하지 않고, 또 그렇게 욕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한 번은 친구인 L군에게 남자들이 욕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는 것에 대해 그 이유를 물었더니, 군대의 영향이라고 한다. 군대 생활 동안 남성들은 그러한 욕들을 너무도 흔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 욕하는 것이 몸에 배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군대의 영향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남성들이 일상생활에서 욕을 거리낌 없이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남자는 욕을 해도 된다”라는 사회적 관습 때문이다. 욕을 하는 것은 여성, 남성에게 다 나쁘고, 좋아 보이지 않은 것이지만, 욕을 하는 여성은 정말로 교육받지 못한, 교양 없는 사람이 되고, 욕을 하는 남성은 남자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전혀 교육과 교양이 없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세상의 통념이다.
    인문/어학| 2006.10.24| 2페이지| 1,000원| 조회(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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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화분석]담화속에서의 반복의 기능
    담화속에서의 반복의 기능반복은 사실 일상 생활에서 드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들 자신의 말들을 또는 다른 사람들의 말들을 반복한다. 반복에 대한 많은 형태들에 대한 전통적인 이름으로는 같은 소리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을 지칭하는 두운(alliteration), 문법적인 구조의 반복을 지칭하는 병행(parallelism), 요소들의 순서가 바뀌는 반복을 지칭하는 교차대구(chiasmus) 등이 있다. 작가들이나 웅변가들은 의식적으로 수사적인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말들을 반복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일상적인 대화자들은 특별히 의식하지 않은 상태로 상당히 자신의 말들을 반복하여 사용하는 편이다.어떤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말하는 방식이나 말들을 반복하는 것이 장려되기도 한다. 심리치료학자들은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mirroring"이나 "echoing"과 같은 반복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또한 조종사들과 항공 관제탑요원들 사이에서처럼 정확한 반복의 사용이 요구되기도 한다. 언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그들이 듣는 것을 반복하고, 언어를 배우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도 그들이 말하는 것을 확장시키고 반복시켜준다. 즉 작가와 화자들은 모든 맥락에서 그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소리, 말, 구조, 구, 의미들을 반복한다.본고에서는 반복이 담화 속에서 어떠한 기능들을 하며, 그것이 어떻게 대화 속에서 효율적으로 작용하는지, 반대로 어떻게 대화를 방해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먼저 “반복은 상대방이 듣고 있는지, 이해하는지, 혹은 동의하는지를 알아보는 "backchannelling"의 형태로서 작용”(Johnstone, 146)한다. 다음의 예)를 살펴보자.가: 난 영화든 소설이든 뭐든 간에 사실주의가 별로더라. 인간 삶이 그렇게 사실적인거냐? 안 그래? 인생이 사실적이야?나: 글쎄, 사실주의가 뭔데?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이 상황이 다 사실 아닌가?가: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하지만 우리가 지금 같이 얘기하고 있다고 해서 꼭 같은것을 바라보고,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잖아. 누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것도 달리 보이는 법이지. 그러니, 영화나 소설이 극단적으로 사실을 담 아낸다는 것이 그게 말이 되냐구. 그래서 난 이창동 영화가 별로더라구.이 대화에서 ‘가’는 ‘사실적’이라는 말을 반복함으로써 ‘나’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사실주의’에 대해 동의하는지에 대해 궁금해한다. 이러한 반복의 기능은 대화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하고, 그것들을 고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가’는 ‘사실주의’를 반복함으로써 ‘나’가 ‘사실주의’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의미를 도출해내어, 자기가 ‘사실주의’라는 말로써 의미하는 바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사용되는 반복은 듣는 사람의 환기를 불러 일으키고,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화자가 알 수 있게 해줌으로써 서로간의 대화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발화를 반복하는 것은 또한 그것을 익살스럽거나 반어적인 양상을 띄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은 화자에게 다시 사용할 수 있는 형판을 주어, 주저함을 축소시키고, 대화자들이 다음 말을 뭐라고 해야할 지 생각할 때 대화의 발판을 지킬 수 있도록 그들에게 허락해주는 역할을 한다”(Johnstone, 146).가: 니 중심에는 도대체 누가 있는데?나: 내 중심에 누가 있냐고?가: 그래. 니 중심에 부모님이 먼저냐구, 아니면 나냐구?나: 당연히 니가 우선이지.가: 내가 우선이라고, 우선이라구...나: 몇 번을 말해. 왜 자꾸 그걸 저울질하는 건데?‘가’와 ‘나’는 서로의 말들을 반복하면서, 서로들에게 생각하고, 반문할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반복은 침묵이나 다른 대응보다도 대화를 지속시키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또한 “반복은 대화자들 사이에 조화의 느낌, 화합을 줄 수 있다”(Johnstone, 146).가: 벌써 우리가 서른이구나.나: 그러게, 벌써 우리가 서른인가?가: 그 동안 해놓은 건 하나도 없는데, 나이만 먹은 것 같애. 앞으로 또 어떻게 사니?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 게 더 중요하지.가: 뾰족한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사는 게 힘들다.나: 나도 힘들지만, 우리 힘내자!‘나’는 단순히 ‘가’의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나’의 반복되는 말을 통해서 ‘가’는 ‘나’가 자신에게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두 대화자 사이에는 확고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반복의 기능은 대화자들간에 화합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인문/어학| 2006.10.24| 3페이지| 1,500원| 조회(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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