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선거는 민주적인가?‘ 요약1장 직접 민주주의와 대표성; 아테네의 관리 선발우리는 고전적 민주정으로 알려져 있는 아테네 정체를 분석함으로써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를 구분할 수 있다. 추첨은 직접 민주주의의 특징 가운데 하나일 뿐만 아니라 아테네인들은 추첨과 더불어 대의 민주주의의 특징인 선거를 적절히 병행했기 때문이다.직접 민주주의하면 대부분 ‘민회’를 떠올리지만, 아테네 민주주의에서는 주요 권력을 민회보다는 추첨을 통해 선출된 행정관이 수행했다. 그리고 아테네인들은 정치적으로 가장 주요 권한을 갖는 결정적인 통치체인 평의회, 시민 법정의 재판관들인 헬리아스타이, 입법 활동에서 결정역할을 하는 위원회인 노모테타이 등 행정관 보다 더 중요한 직책들도 모두 추첨으로 뽑았다.그들에게 관직교체에서 민주정의 기본적인 원칙은 모든 시민이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위치를 번갈아 가며 차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시민의 덕, 혹은 탁월함이라 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교체의 원칙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 근본적인 원칙이 추첨에 의한 선발을 합리적인 해결책으로 만들었다.추첨은 또한 평등의 원칙과 연관되어 있다. 추첨의 산술적 평등은 그것을 통해 권력이 아닌 권력을 가질 수 있는 확률이 동일하게 배분된다는 뜻이었다. 가능성의 평등인 것이다. 이렇게 추첨은 근본적인 민주주의적 가치를 표현했으며, 아테네인들은 직관적으로 선거는 그와 같은 평등을 보장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4장 민주주의적 귀족정선거의 귀족주의적 효과에 대해 여러 가지 논쟁이 존재하지만 그 핵심은 모든 시민이 투표권을 가졌다 할지라도 선출된 사람이 그들을 선출한 사람과 유사하지 않다는 것이다.순수 이론에서는 선거에 대한 추상적 분석으로부터 불평등주의적이고 귀족주의적 결과를 연역함으로써, 선거의 귀족주의적 특성을 살피고 있다. 마넹은 선거를 불평등적이고 귀족주의적으로 만드는 네 가지 요인들로 후보에 대한 투표자들의 불평등한 대우, 선택의 상황에서 요구되는 후보의 탁월성, 주의를 끄는 데 있어서 두드러짐이 가져다주는 이점들, 정보 선전비용을 들고 있다. 결과적으로 선거를 통해서는 그 자체의 속성상 선거권자와 닮은 대표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선거가 불평등주의적이고 귀족주의적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예 부인할 수는 없다. 비록 대표가 위임 명령이나 지시에 의해 구속된다고 하더라도, 선거는 대표가 그들을 뽑는 사람들과 비슷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귀족주의적 특성을 가지지만, 반대로 선거는 대표를 선출하고 면직시키는 과정에서 개별 시민에게 동등한 발언권을 준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또한 근대적 자연권 개념은 자유 의지, 이성 또는 의식 등 그것이 어떻게 불리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의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통치할 수 있는 권리는 권력 행사의 대상이 될 사람의 자유로운 동의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 그와 관련하여 탁월함과 두드러짐이라는 후보 선출의 기준은 투표자들의 판단에 의해 달라질 수 있으므로 투표자는 넓은 범위의 자유를 갖고 있다 할 수 있다. 또 한 개인이 객관적으로 모든 면에서 탁월하다고 해도, 그것이 동료 시민들에게 인지되지 않으면 당선될 수 없기 때문에 권력은 다른 사람들의 동의에 의해서 부여된다고 할 수 있다.6장 대의 정부의 변형들19세기 후반부터 유권자들의 의견 표출을 조직화하는 정당이 대의 정부의 구성 요소로 간주되었고, 그것은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보다 많은 민주적 동일성과 유사성을 향한 진보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정치적 대의성의 위기를 목도하고 있으며, 그 원인의 분석과 그것을 둘러싼 사태들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정당 민주주의와 관련된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유의미하다.그리고 필자는 대의 정부들의 전형으로서 의회 정치, 정당 민주주의, 청중 민주주의를 들며, 정기적인 대표 선출, 대표의 부분적 독립, 여론의 자유, 토론에 의한 판결 이후의 정책 결정이라는 대의제의 네 가지 원칙을 중심으로 특히, 대표성이라는 관점에서 각각의 행태들을 비교하고 있다.Part 2.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에 대한 나의 생각오랫동안 대의제는, 특정 정당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변함없이 충성하는 대다수의 유권자와 정당 사이의 강력하고 안정적인 신뢰관계에 기초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늘날 대의 민주주의는 낮은 투표율과 국민들의 무관심, 정당 사이의 맹목적 비난과 그로인한 사회적 갈등, 미디어의 여론 지배 등으로 공공연하게 ‘위기’를 선언한 지 오래이다. 그런데 지난 2008년 11월 美 대륙에서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은 바로 이러한 대의 민주주의의 위기 논란에 대단히 의미심장한 방점을 찍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흑인 대통령의 탄생이라는 현상적 성과를 넘어 전 국민의 대단위적 정치참여와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현으로 ‘선거는 민주주의의 축제’라는 오래된 말이 그대로 실현된 인류 정치사에서의 하나의 분수령이었다.무엇이 유권자들을 다시 불러 모아 정치 과정에 참여시키고, 직접 민주주의의 이상에 한 걸음 다가가게 하였는가? 혹자는 그것을 오바마 대통령의 ‘개인적 매력’과 청중을 매료시키는 ‘정치적 수사’라 말한다. 분명 그는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적절한 악센트와 뛰어난 웅변력을 가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연설이 대중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언어로 정제되어,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을 대변했다는 것이다. 바로 대표와 대표되는 자들 간의 유사성을 몸소 실현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수백 년 동안 차별받아 온 사회적 약자가 전 세계적 패권국가인 미국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위대한 혁명인가, 신화인가?프랑스 혁명은 세계사에 있어서 한마디로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자본주의 적 질서가 경제와 정치에서 관철되었고, 개인주의와 합리주의가 법과 제도에 공히 뿌리 내렸으며, 시민국가가 창설되고 사상의 자유가 견고하게 확립되는 등 인류는 전근대적인 봉건제 사회에서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프랑스 혁명이 근대 세계를 이끈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은 각종 역사서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 되었고, 이러한 견해는 대부분의 혁명사가들 또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는 부분이다. 혁명이 발발한 이후 오랜 연구 성과로 프랑스 혁명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그 중 정통적인 해석은 르페브르, 소불 등을 중심으로 프랑스 혁명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혁명의 위대한 유산을 강조하며, 혁명의 본질이 혁명의 이데아에 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지 2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면서 1950년대에 들어 학계를 지배해 오던 정통적 해석에 대해 이의와 도전이 제기되었다. 이른바 수정주의 학파는 단기적으로 시기를 구분하여 혁명의 본질은 혁명의 개체적인 현상에 있다고 확신하였다. 본 레포트에서는 정통주의 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인 죠르주 르페브르와 수정주의 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인 알프레드 코반의 견해를 비교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의 실체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다시금 그 의미를 재정립해 볼 수 있도록 하겠다.먼저 르페브르는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사회가 기본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봉건적인 ‘구체제’라는 것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고,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군주가 영토적, 행정적 틀은 형성하였지만 국민적 통합은 불안전했다는 것이다. 절대 왕권이 귀족이나 성직자와 같이 직종에 따라 조직된 집단에게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사회 도처에 불평등이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절대주위는 이들에게서 이득을 보고 있었다.이러한 봉건제에는 여러 문제족과 같은 권력과 자유를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특권의 폐지와 권리의 평등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직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대륙의 여러 나라들의 영향을 받아 부르주아지는 소수에 불과하였고, 계몽전제군주제에 가까웠다.르페브르는 여기서 절대주의 국가와 대비되는 영국과 미국의 혁명 이후 사회를 훑어보며 그 한계점에 대해 서술하고, 이어서 봉건적 사회 분위기 속 당시 프랑스의 특징을 묘사하였다. 첫째, 프랑스는 대륙 국가였기 때문에 귀족들의 성향이 군사적이었고, 그들은 점점 빈곤화되면서 더욱 배타적이고 점차 폐쇄적인 경향을 띄게 되었다. 둘째,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는 관직매매가 매우 유행했다. 왕권은 그것을 통해 부르주아지 재산의 일부를 잠식하였고, 그로 인해 특권계급은 점차 부르주아 가문의 침투로 새로워져 갔다. 이러한 법복귀족은 재산관리 면에서는 부르주아적이었고, 사회적으로는 위로는 귀족, 중간은 관직보유자, 아래로는 평민을 포함하는 중간계급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왕권이 명사들과 더불어 통치한다는 합리주의를 주장하였다. 다음 셋째, 철학이나 과학연구의 전개가 활발했다. 물론 절대 권력은 교회와 협력하여 사상을 감시하였으나 다른 국가들처럼 강제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혁명이 발발하기 직전 봉건적 성격은 오히려 강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특권계급이 장악하고 있던 지방 삼부회의 행정적 역할은 증대되어 갔으며, 지사직과 주교직은 귀족들의 의해 장악되었고, 고등법원은 평민들에게 폐쇄적으로 되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평민에게는 일반사병을 거치지 않고는 장교가 되는 것이 금지되었다. 지배계급의 이론가들은 영주권을 정당화하였다.르페브르는 이제 혁명을 국면으로 나누어 살피면서 혁명의 진행과정과 그 성과들을 기술한다. 그는 먼저 프랑스 혁명이 1787년 삼부회 소집으로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국왕은 삼부회를 소집하였고, 특권계급은 왕권이 약화되면 그들의 특권의 보루가 파괴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국왕의 요구를 아예 거부한 단으로까지 진행되지 않았다. 그런데 특권계급과 왕권이 외국에 호소하여 내란이 발생하였고, 이리하여 부르주아지의 일부는 민중계급과 협력하여 특권계급을 타파하고 망명귀족의 재산을 몰수하며 성직자의 영향력을 뿌리 뽑으려고 시도하였다. 마침내 혁명은 보통 선거제를 채택하였으며, 공화정을 선포하였고, 노예를 해방시켰다. 그리고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고 교육과 부조업무를 세속화했으며 호적업무를 떠맡는 등 민주화를 실행했다.르페브르가 프랑스 혁명의 특징으로 보는 것은 무엇보다 자연법에 호소함으로써 보편성을 자신의 과업에 부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런 특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냈다는 것이다. 또 프랑스 혁명은 백인만을 해방한 것이 아니라 아예 노예제를 폐지하였고, 종교적으로 어떠한 종교에도 구속되지 않을 권리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의 가장 큰 특징은 ‘평등의 혁명’이라는 것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혁명은 국민주권의 원칙을 크게 강조하였다. 민중은 혁명이 각 개인과 마찬가지로 민족까지 해방시킬 것이라 믿었고, 그것은 민족자결권으로 대표되었다.이러한 프랑스 혁명의 결과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혁명군에 의해서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또 부르주아지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의 원칙 아래 경제적 자유를 선포하고, 농노제를 폐지했으며, 십일조와 영주적 부과조로부터 토지를 해방하고, 농노상속 불능제를 폐지하는 등 자본주의로의 길을 개척하였다. 또한 프랑스 혁명은 이러한 이기적인 이해관계와는 무관하게 감성적인 호소력도 지니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은 곧 ‘바스티유 함락 사건’이 상징하는 민중봉기와 ‘라 마르세예즈’가 불렀던 해방전쟁을 연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혁명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사람들의 희생의 대가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르주아지들이 경제적 능력에 따른 제한적 민주주의 주장하였지만 1793년 헌법에서 결국 온전한 참정권을 획득한다. 1789년 부르주아지들이 투표권과 피선거권에 있어 일정한 세금납부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일반 민중에게 있어 평등이란 환상에 불과하개시켰고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95년에 잠시 사라진 듯 보였으나, 1830년 이후 공화파가 재등장했을 때 다시 실시되면서 이후 프랑스 정치의 기본 방향이 되어 갔다.르페브르는 이렇게 프랑스 혁명을 정치 혁명을 넘어 사회 혁명의 전형적인 모델로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그러나 알프레드 코반은 이렇게 황홀한 역사적 감동의 순간을 마치 음악이 흘러나오는 오디오의 stop 버튼을 누르듯 단번에 차단해 버린다. 1954년 코반은 런던대학 교수 취임 강연에서 ‘프랑스 혁명은 신화’라고 주장하였다. 그 태도는 자못 당당하여 하나의 선언에 가까웠으며, 그것도 ‘프랑스 혁명은 있었는가?’ 라는 도발적인 물음에서 ‘프랑스 혁명은 무엇이었나?’라는 보다 온건한 화두로 바꾸어 강연한 것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역사적 사건들의 정통적인 해석과 태제들에서 그렇듯이 프랑스 혁명의 확고한 정통주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프랑스 혁명을 ‘신화’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정통주의 해석은 ‘프랑스 혁명은 봉건적 질서를 타파하고, 부르주아 지배가 그것을 대체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는 일단 이 해석을 ‘봉건제’와 ‘부르주아지의 반란’ 두 차원에서 반박하고 있다.만약 프랑스 혁명으로 봉건적 질서가 사라졌다고 한다면, 이것은 분명 당시 프랑스 사회에 봉건적 질서가 굳게 뿌리박혀 있었음을 전제해야할 것이다. 코반은 여기서부터 문제제기를 시작한다. 프랑스의 봉건제는 프랑스 혁명 이전에 이미 사라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첫째, 코반에 의하면 이미 프랑스 혁명 당시 토지의 1/3이 농민의 수중에 있었고, 나머지 중 상당한 비율이 삼림이나 황무지에 속했다고 한다. 또 둘째, 18세기의 봉토(奉土)는 단지 ‘토지 재산의 기묘한 형태’였을 뿐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토지보유농민이 비록 그의 재산이 명백한 의무조항이 내포되어 있고, 그것이 법률적인 용어로는 ‘영주에 이익에 대한 예속’이라고 묘사되었지만 진정한 소유자는 농민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봉건적 부과조가 남아 있부도 그들로 하여금 납부를 재개하도록 강제할 힘을 가지지 못하였다고 한다.따라서 당시의 영주적 권리체계는 중세적 사회질서인 봉건제와는 다른 것이었으며, 제헌의회가 봉건적 부과조를 모두 폐지했다는 것도 기정사실을 인정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다음은 ‘부르주아지의 반란’에 대한 반박이다. 코반은 여기서 구성원들의 직업 분포 등 성분을 분석함으로써 부르주아지의 정체를 밝히는 데에 주목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부르주아지들은 공장주, 금융가, 대상인 등 산업자본가가 핵심이 아니라 법률가, 의사, 지주 등 변방 부르주아지들이 혁명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혁명 이전 특권 귀족들은 각종 고위 관직들을 차지하고 높은 보수를 받았지만 실질적인 업무는 그 밑에 있는 제 3신분에 의해서 거의 이루어졌다. 따라서 제 3신분의 부르주아지는 귀족을 제외한, 프랑스의 실질적인 업무를 수행했던 사람들 모두를 뜻한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의 범위는 매우 넓고 모호하다. 또 여기에서 그들이 일으켰던 혁명의 동기가 결코 경제적 불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보통 부르주아지라고 하면 산업자본가, 제조업자, 상인 등을 이야기하는데, 프랑스 혁명의 주도세력이었던 제 3신분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13%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 3신분은 누구인가? 바로 ‘법률가’이다. 당시에는 법률가라는 것이 실제적인 사회적 지위나 기능 보다는 사회적 분류를 나타내는 것이었고, 사법과 행정이 하나로 혼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법률가라는 개념이 국가공무원을 모두 포함한다고 해도 그들이 후에 산업자본주의와 시장경제질서를 낳았다는 프랑스 혁명의 주도 세력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힘이 빠지는 소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어지는 입법의회와 국민공회에서도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대로였으며, 다만 의사, 교수, 교사, 장교 등 전문직업인들과 평민 가운데 재능 있는 사람들이 모여 혁명을 이어나가게 된다.따라서 코반이 말하는 프랑스 혁명의 부르주아 혁명적 의미는 관리와 전문직업인계급이 보잘것없는 지위에서 정부 내의 다.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는 근대 현실주의 정치철학의 시조로서 르네상스 시대를 살았고, 같은 시대의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과 함께 인류역사의 한 방향을 제시하였다. 정치를 보는 그의 현실주의적 시각은 오늘날의 정치제도와 우리가 정치, 혹은 인간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정치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의 문을 연 정치가의 이론을 알아야 함은 물론일 것이다.그가 준 큰 영향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밸리는 이후 많은 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마키아밸리는 악(惡)을 가르치는 선생이다.’라는 류의 비판들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마키아밸리 식의 이론은 정치사회(Political Society)만큼이나 오래전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다만 종교가 모든 생활의 준칙이 되던 시대에 아무도 그러한 의견을 대놓고 주장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밸리는 그런 오래된 정치사상과 정치행위를 자신의 이름을 걸고 논하였고, 그로 인해 그는 사악한 정치사상과 정치행위의 전형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이다. 실제로 그가 말한 한 구절 한 구절에는 ‘선’이라는 기준으로 판단하면 ‘악’이 될 수밖에 없는 것도 많다. 그러나 이 책, 『군주론』에서는 그 ‘악’을 ‘선’의 기준이 아닌 ‘군주’의 기준으로 파악하였으며, 집권, 찬탈, 존경, 멸시 등의 현실적 상황을 지배자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고 났을 때 마키아밸리는 결코 악의 교사가 아니며, 열렬한 애국자이거나 과학을 추구한 학자 또는 그 둘 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의 이론에 상당 부분 동조하고 있다. 특히 군주가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도덕과 폭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부분, 즉, 반도덕적이 아닌 탈도덕적이어야 한다는 부분이 가장 감명 깊었다. 그가 이야기한 것들을 봤을 때 마키아밸리가 원했던 국가는 현대에서 보면 강력한 전제 군주는 없지만 ‘미국’과 비슷한 모습인 듯하다. 미국이 현재 세계에서 가장전한다. 특히 이 15장은 ‘인간으로서의 군주에 대한 찬양과 비난’에 관한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의견을 개진하며 이상적인 정치제도나 형태에 대해 추상적으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인간을 인식해야 한다며 이전의 철학자들의 이론과 결별을 고한다. 즉, 인간의 이상적인 행동 원칙을 따질 것이 아니라 현실의 실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현실에서의 도덕적 인간은 손해만 보는 인물일 뿐이다.만일 군주가 자기의 정권을 유지하려면 비도덕적인 것이라도 배워야 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도덕적 행동이건 비도덕적 행동이건 행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찬양받거나 혹은 비난받기도 할 군주의 여러 가지 자질들을 살펴본다면 끝이 없다. 만약 이러한 사항 중에서 좋은 일만 골라서 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군주가 있다면 물론 그러한 군주는 만백성에게서 찬사 받을 것이다. 그러나 군주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좋은 자질만 갖출 수는 없으며, 또 항상 미덕만 골라 실천하기도 어렵다. 그는 자기 나라를 잃었을 경우 얼마나 큰 역사의 오명을 쓸 것인지 두려워해야 하고 따라서 신중히 행동해야 한다. 그러므로 군주는 국가를 보위(保衛)하기 위해서 악평이 필요하다면 그 악평에 의해 비난받는 것 정도는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칭찬받는 일이거나 악평을 받는 일이거나 필요한 경우에는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 군주는 때에 따라서 겉으로는 미덕으로 보이지만 그 미덕으로 국가가 망할 수 있고, 또 겉으로는 악덕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자신을 안정과 번영으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16 -다음은 “관용과 인색”에 대한 부분이다. 군주로서 제일가는 자질은 관대한 통치를 하여 명성을 떨치는 자질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명성을 얻는 일에만 이끌려서 행동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비극을 초래할 것이다. 군주가 명성에만 이끌려 펼치는 관용이 국민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국민들은 그것을 악덕으로 인식하고 비난할 것이기 때문시 군주를 향해 인색한 놈이라 욕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군주는 인색함보다 오히려 관대함에서 백성들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게 되는 것이다.그러므로 관용의 미덕을 실천하고도 욕을 먹을 바에는 차라리 군주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이 인색하다고 불리우는 악평에 개의치 말아야 한다. 다소 인색하다는 평을 들을지라도 그로 인해 나라가 굳건하고 안정되게 유지된다면 백성들은 군주가 아무리 인색해도 가장 관대한 군주라고 인식할 것이다. 백성들은 일단 자신의 생활이 안정되고 나서야 그 정권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평가하는 속성이 있다. 아무리 도덕적이고 관용적인 군주라도 생활이 불안정하고 부족하면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다. 또 군주의 관용이란 가난한 백성들에게 베푸는 것이므로 그것은 끝이 없다. 그는 역사에서 보더라도 위대한 일은 모두 인색한 군주에 의해 성취되었으며 관대한 군주는 재앙만 만났다는 것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한다.마키아밸리는 여기서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군주와 정권의 몰락의 형태를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 이러한 원칙은 분명 현대에 이르기까지 틀림없이 지켜지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만 보더라도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 중에는 다소 억압적이고 반민주적인 정부이지만 국가의 부가 증진되고 안정적인 물가로 생활이 여유로웠던 1980년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마키아밸리는 당시의 이태리에서 들 수 있었던 성공한 ‘인색한 지도자’의 예로서 교황 줄리어스 2세,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 등을 꼽고 있다. 군주는 인색한 자라고 불리어지는 것에 대하여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으며 인색함은 군주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악덕 중의 하나이다. 물론 관용으로서 권력을 잡은 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아직 군주에 오르기 전의 상황이다. 그때는 관대하다는 명성이 결정적인 도움이 되지만 군주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다. 또 세상에는 자신의 군대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관용을 베푼 사람들인 경우도 많았 대상만은 되지 않는 인색함의 악덕에서 통치의 원리를 찾는 것이 보다 현명하다.- #17 -다음은 “잔인과 동정심”에 대한 부분이다. 마키아밸리는 이 17장에서 그의 이론의 연속선상에서 군주는 과연 사랑을 받는 것이 좋은가?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좋은가? 라는 두 개의 선택지 중에 과감하게 군주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군주는 잔인하다는 평을 듣는 것보다 동정심이 많고 인자하다는 평판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군주는 그의 백성들이 단결하고 복종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라면 잔인하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두 번의 잔인한 행동은 너무나 인자한 나머지 혼란을 초래하고, 그 혼란이 약탈과 강도를 성행케 하는 것보다는 더욱 자비로움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잔인한 그림자에 스스로 놀라는 일이 있으면 안 된다. 군주가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 또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 두 가지 모두를 갖추고 자신이 자유자재로 골라 쓰면 그보다 좋은 것이 없겠지만, 그러한 능력이 없다면 사랑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는 길이 바람직하다. 여기서 마키아밸리의 인간관이 명백하게 드러나는데, 그는 인간을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거짓말을 잘하고 사기성이 많다. 또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고 이기적이다‘라고 묘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는 그들에 대해 사랑으로 신의를 지키려 하는 것 보다 오히려 공포로서 자신에 대한 충성과 조력을 변함없이 유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군주는 이렇게 자신을 아무나 함부로 도전하지 못할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만일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최소한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금물이다. 따라서 증오를 받지 않고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평성의 잣대를 엄정하게 하여 어떤 자를 처단할 일이 있다면 그에게 처벌을 받아야만 하는 정당성과 명백한 이유가 있어야 하며, 반드시 일벌백계(一罰百戒)로 처벌해야 한다. 또한 신하나 타인의 재산에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단지 백성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지 않고자 노력할 뿐이다.- #18 -마지막으로 “군주의 언행”에 대한 부분이다. 마키아밸리는 이 장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군주의 바람직한 행동양식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군주의 행동은 교활해서는 안 되고 공명정대(公明正大)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몇 가지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자기가 한 말은 가볍게 잊어버리고 백성을 기만했지만 끝에 가서는 그러한 군주들이 정직한 군주들보다 더욱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군주는 반은 인간이 되고, 반은 짐승이 되어 인간과 짐승의 특성을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섞어서 백성을 통치해야 한다. 그가 야수의 행동을 배우기 위해서는 여우와 사자를 보면 된다. 그래서 군주는 여우의 교활함과 사자의 용맹함을 동시에 갖추어 필요에 따라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군주는 그의 공약이 자신을 불리하게 만들 때에는 그의 말을 지킬 수 없으며 또 지켜서도 안 된다. 자기 자신을 불리하게 만들 약속을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반드시 지켜야 할 이유는 없다. 인간이란 본래 사악함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주는 자기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아름답게 색칠할 줄 알아야 한다. 가장 훌륭한 군주로 알려진 사람들은 대개 교활한 여우의 특성을 가장 잘 따른 사람들이다. 군주는 어떤 면을 보면 최대의 거짓말쟁이, 또는 최대의 사기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군주는 모든 좋은 자질을 갖추어야 할 필요성은 없으나 최소한 그런 것들을 갖춘 듯이 포장할 필요는 있다. 그러면 그 허위성이 군주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보이는 것에 의해 판단할 뿐더러, 군주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백성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의 행동이 다 그렇지만 특히 군주로서의 행동은 자신의 잘잘못을 호소할 법정이 없다. 무슨 일이든지 결과에 대한 최후의 책임을 자신이 진다. 결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소크라테스는 우선 자신의 변명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신이 평소의 말버릇으로 이야기하더라도 놀라지 말고 다만 옳은 말을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만을 살펴달라고 부탁한다. 본론으로 들어가면서 소크라테스는 고소장을 제출한 실제의 고발자들을 ‘두 번째 고발자’라 부르고, 자신을 그러한 고소에 이르게 한 보이지 않는 편견들에 의한 이전부터의 낡은 고발을 ‘최초의 고발자’라 부르면서 먼저 그 최초의 고발자들을 비판한다. 그들이 한 고소의 내용이란 “소크라테스는 하늘 위에 있는 것을 사색하고 땅 밑에 있는 일을 탐구하며 약한 논리를 강하게 하는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아테네인들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무신론자들의 생각에 소피스트들의 언행을 더하여 오해하는 등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을 하나는 최근의 고발자, 그리고 또 하나는 전부터 고발해온 자들로 나누며 후자에 대해서 먼저 답변하는 것의 정당성을 인정해줄 것을 희망하며 변명을 시작한다.그는 출발점으로 돌아가 자신에 대한 비방을 불러일으킨 고발에 대해서 따지고자 한다. 그를 고발한 내용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소크라테스라는 자는 땅 밑과 하늘이 일을 탐구하여 약한 주장을 강하게 만드는 따위의 부질없는 짓을 하고, 또한 남에게도 그것과 같은 터무니없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죄를 범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부인하고 사물에 대해 간단하게든 상세한 일이든 언급한 일이 없으며 또한 자신이 남들을 가르치는 대가로 돈을 받고 있다는 소문도 마찬가지로 근거가 없다고 한다. 오히려 정말로 인류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가르친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은 그에게는 영광이라 말하며, 자신은 그럴만한 지식이 없다고 변명한다.다음으로 자신에 대한 이러한 편견이 나온 까닭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자신의 지혜를 둘러싼 편견인데 그러나 사실 자신은 이러한 지혜를 갖고 있지 못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혜롭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고 자신을 헐뜯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지혜가 있다면 그 지혜에 관해서 설명할 증인으로 델포이 신을 내세우는데, 그의 친구인 카이레폰이 델포이 신전에 가서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사람이 있는가라는 신탁을 구하자 델포이의 무녀는 ‘그보다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라고 답했다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겐 크든 작든 간에 지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신의 말에 반증을 갖고 자신보다 더 현명한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고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찾아간 유명한 정치인이나 시인, 장인들은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은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소크라테스는 그들에게 설명하려고 노력하였고 그 결과 그는 그들에게서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알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이 그들보다는 약간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과정으로 말미암아 그는 최악의 그리고 가장 위험한 적을 만들었으며 또한 많은 비방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현인(賢人)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 자진해서 자신을 따르는 한가한 부유층 청년들은 마치 자신들이 지혜가 있는 체하며 사람들에게 묻고 떠드는 것을 좋아하고 가끔 자신을 모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묻고 따지기도 하는데, 그들에게 검증당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에게 화를 낸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도대체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비행을 하며, 또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들은 아는 바도 없고 대답할 수도 없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학문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하는 비난, 즉 ‘공중과 땅 밑의 일’이라던가 ‘신을 믿지 않는다.’, ‘약한 이론을 강하게 한다.’는 상투적인 비난을 되풀이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멜레토스, 아나토스 및 리콘 등 세 사람이 자신을 고발한 이유라 한다.이어지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다음 고발은 그는 젊은이들을 타락하게 만들고 나라에서 인정하는 신들이 아닌 새로운 신령을 믿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와의 대화를 통해 결국 아테네인들 모두가 청년들을 선도하고 향상시키는데, 자신만이 타락시킨다는 말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청년들을 부패시키는 자는 단 한 명뿐이고 그 외의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선도한다면 그들은 참으로 행복한 환경 속에서 산다는 것이라고 하며, 이것을 모르는 멜레토스가 청소년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라 비난한다. 그래도 계속 그가 고의적으로 청년들을 타락시킨다고 멜레토스가 주장하자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함께 사는 사람을 타락시키면 나 자신이 그 사람으로부터 손해를 입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할 만큼 무지몽매하지 않다고 변명한다. 또한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철저한 무신론자이며 그것은 그가 태양은 돌이며 달은 흙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소장에 써진 '소크라테스가 신이나 정령의 힘을 가르치고 또 믿는다.'는 글을 인용해 ‘정령이나 신의 힘은 믿으면서 정령이나 신의 존재는 믿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변명을 한다. 이것으로 멜레토스의 고소에 대해서는 충분히 변명하였고 더 이상의 변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많은 사람의 적의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만일 자신이 파멸한다면 이 때문일 것이라 말한다. 또한 조금이라도 훌륭한 사람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험을 헤아려서는 안 된다며 그는 어떤 일을 하면서 오직 올바른 행위를 하느냐 나쁜 행위를 하느냐 하는 것만 고려해야 한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지혜로움을 가장하는 것이지 진정한 지혜로움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비록 몇 번을 사형 당하더라도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신이 아테네에 보내준 선물인 자신을 처벌함으로써 시민들이 신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시민들을 변명하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신이 보내준 사람이라는 증거를 제시하는데 그 증거는 바로 ‘소크라테스의 가난’이다. 소크라테스는 공개적으로 나서서 국가에 대해 충고하지 않는 이유를 신이 자신이 정치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올바른 반대였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만약 정치에 관여했더라면 오래 전에 이미 생명을 잃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국가에서 행해지고 있는 많은 불법 행위와 부정행위에 정직하게 대결함으로써 다른 대중들과 싸움을 일으키는 사람은 생명을 보존하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죽음이 두려워서 부정에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예전 평의원이었을 때 혼자만 정의 편에 섰던 일을 말한다.소크라테스는 “어째서 사람들은 오랜 시간을 당신과 지내기를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들은 지혜가 있는 체 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음이 검증되는 이야기가 재미있기 때문이라 답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시험하는 것은 신이 자신에게 부과한 의무라고 변명한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곧 발각될 것이며, 만약 자신이 청년을 타락시키고 있거나 또는 타락시킨 적이 있다면 이제는 어른이 되어 그들이 고발자로 나서서 복수를 해야 마땅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멜레토스는 그의 연설 가운데 방청객으로 온 크리톤, 크리토뷸로스, 아이스키네스 등 소크라테스의 지인들 중의 몇 명을 증인으로 언급했어야 옳았을 것이며, 만일 그가 잊고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증인으로 세우도록 하자고 말한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위해 증언을 하려 할 것이며 그들은 자신이 진실을 위해 말하고 멜레토스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 한다. 멜레토스가 제기한 고소이유에 대한 논박이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생각한 소크라테스는 이제 자신이 무신론자도 아니고 소피스트도 아니라면 수치스럽게도 왜 이런 죽을 지경에 까지올 정도의 처신을 하였는가라는 의구심들에 대해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 수치가 아니라, 죽음이 무서워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 수치임을 이야기한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읽고 있는 책, 이 ‘책’은 언제부터 현재의 형태로 인쇄되어 제작된 것일까? 매일 매일 책을 읽으면서도 이러한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듯하다. 그만큼 책에 대한 중요성과 의미를 잊고 산다고 할까. 종이의 발명과 인쇄술의 보급으로 책은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올 수 있었다. 한 기술의 혁신과 보급이 사람들의 사고방식, 나아가 그 이후 사회의 모습까지 변화시키는 일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전(全)인류는 책을 통해 선대(先代)의 지식을 얻고, 교훈을 얻으며, 그 속에서 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책의 본격적인 실용화를 가져온 인쇄술의 발명과 발전이 미치는 영향은 비단 출판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적의 출판의 제작과 판매, 구입을 둘러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중국 사회 전반적인 면까지 아우른다. 종전의 중국 인쇄사는 기술사적인 면에 치중하고, 인쇄술, 특히 활자 인쇄의 발명을 구텐베르크의 발명보다 앞서는 것으로 보려 하는 중국의 일종의 민족주의 때문에 송대에 치우쳐왔다. 저자는 이러한 중국 인쇄사를 보다 균형 있게 접근하면서, 인쇄와 출판의 기술적인 발전보다는 내용적인 발전과 그것들이 반영하는 당시 사회와 문화에 대해서 풍부한 사료와 치밀한 분석을 통해 상당히 신빙성 있게 설명하고 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중국 출판문화에서 비약적 발전이 있었던 시기가 바로 가정에서부터 융경 ? 만력 ? 천계 ? 숭정 연간에 이르는 명조(明朝)의 말기였고, 당시 출판문화의 선진지역은 강남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저자 오오키 야스시는 이 ‘명말 강남의 출판문화’라는 책을 통해서 먼저 명말에 일어난 서적출판 수량의 변화 실태와 그 배경을 살펴보고 이어 그것이 학술문화와 사회상에 끼친 영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또 ‘출판’이라는 특정한 기술적 분야가 명말과 그 이후의 학술문화 및 사회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본다.제 1장에서는 명말 강남 지역의 서적출판 상황을 출판 수량의 증가, 출판 장소의 변화, 출판 형태의 변화로 나누어 살펴보 책을 판각한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다. 중국의 출판에는 관각(官刻)·가각(家刻)·방각(坊刻) 이렇게 세 종류가 있다. 초창기에는 대부분이 관청에서 이루어진 출판(官刻)이었다. 우선 당시 출판업이 매우 비용이 드는 사업으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 시험에 필요한 경서의 경우 국가가 그 표준을 정해 세상에 널리 알릴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관각본의 수량은 명대에 들어와 크게 증가하였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서파(書?)를 만들던 습관이 있다. 지방관들은 임기가 끝나 부임지에서 북경으로 돌아올 때, 일서일파(一書一?)를 예물로 삼았다. 이러한 서파는 내용은 조잡하나 겉모양만 크고 호화롭게 만들어 예물로 쓰였는데 바로 인쇄술의 발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한편으로 인쇄술의 발전에 더욱 자극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관각본으로 출판된 책들 중에는 ‘삼국지연의’나 ‘수호전’같은 관의 주관으로 간행된 통속 소설들도 있었다.하지만 명대 이래 청말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온 것은 가각(家刻)이었다. 가각이란, 개인이 출자하여 각공을 고용해서 책을 간행한 형태의 출판을 말한다. 앞에서 자손이나 문인들이 선인(先人)의 문집을 간행했던 일들이 증가했다고 했는데 이것들이 거의 가각본이었다. 이것은 조상에 대한 일종의 효행에 해당하였으며, 또 책을 출판한 본인에게도 그와 같이 훌륭한 선조가 있다는 권위를 나타내는 일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자기가 소장한 진귀한 책을 판각하는 일은, 명성을 획득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족보 또한 가각본의 한 종류였다. 족보를 인쇄할 때는 목활자가 주로 사용되었다. 이는 사람 이름으로 같은 글자가 많이 사용되었고, 또 조판이 완성된 뒤에 이를 임의로 고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남아 있는 족보가 거의 정덕 · 가정 연간 이후의 것이라는 사실을 보면, 족보의 보급 또한 인쇄술의 보급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가각본 제작의 구체적인 과정은 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그렇다면 책을 판각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까? 청말(淸末) 부찰의 ‘부충숙공문집(傅忠肅公文集)’에는 189장, 73,020자에 이르는 책을 간각하는데 9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270일로 계산하면 하루에 0.7장, 즉 270자라는 숫자가 나온다. 만약 명조체로 했다면 훨씬 단기간에 완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둘째, 원재료의 공급과 각공도 명말 강남의 출판업이 융성하게 만든 주요인이었다. 책을 간행할 때 필요한 원재료에는 판목을 만들기 위한 목재, 먹 그리고 종이가 있는데 모두 따지고 보면 목재가 그 원료이다.명초 좋은 종이의 산지로는 사천과 강서, 안휘 등 절강 지방에 집중되어 있었다. 가정 연간에 들어 강서·절강 외에 새롭게 복건의 죽지가 등장하여 제조법의 개량을 통해 싸고 튼튼한 종이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먹은 안휘가 유명했다. 특히 명대에는 흡현에서 유명한 먹이 만들어졌고, 주로 강서·안휘 지역이 산지의 주를 이루었다. 목재 또한 산악 지역인 휘주가 주요한 생산지였다고 추정된다. 휘주에는 발달한 목재문화가 있었고, 그 목조 기술이 계속 전승되었다고 한다.가정·만력 연간 이후 출판의 중심지가 된 남경·소주 등 강남의 평야에 위치한 여러 도시의 주변에는, 실용적인 목재로 이용할만한 수목이 적어서 출판에 필요한 목재도, 종이도 먹도 이 부근에서는 자급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 이것들이 풍부하게 생산되던 곳은 안휘·강서 등 산이 많은 지역이었다. 이들 사이에 물자의 유통이 이루어졌고, 유통의 주체는 휘주의 흡현을 근거로 한 신안상인(新安商人)이었다. 이들은 주로 소금과 차의 매매, 고리대금업에 종사하였는데, 목재 또한 이들의 중요한 영업 항목 중 하나였다. 장강을 연하여 남경·소주라는 큰 소비지를 가지고 있었던 휘주는 목재산지로서 좋은 장소였고, 신안상인 중에는 목재의 운반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종이의 산지였던 강서·복건 지역도 신안상인의 행동반경이어서 이들의 유통이 강남지역의 출판에 자극을 주었던 것으 내용인 팔고문(八股文)의 문선집(文選集) 외에 사서오경의 본문을 시험용으로 해설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고, 현존하는 과거용 참고서에는 만력 연간부터 명말에 걸쳐 출판된 것들이 매우 많다. 이는 당시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문인 결사의 활동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명대에는 과거수험생의 저변이 넓어져 종래에는 과거와 상관없을 사람들까지도 과거를 준비하게 되어 중간계층이 확산되며 중국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에 식자층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상승하였다. 따라서 명말의 ‘신식자층의 증가’와 ‘서적출판의 성황’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중간계층에서 강남지역의 상인들의 경우는 앞서 말했듯이 집안에 상당한 양의 장서를 지닌 사람이 많았으며, 또한 당시의 빠뜨릴 수 없는 독자(讀者)로 ‘여성’이 있다. 여성의 경우 과거시험의 수험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책이라 하여도 경서 등과는 관계가 없었지만 한가한 대가(大家)의 여성 중에는 소설을 읽던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스스로 문자를 읽을 수 없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읽어달라고 하는 향유 방법이 있었으니, 엄밀한 의미에서의 독자라고는 할 수 없어도 ‘구입자’라고는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명말의 강남에서는 높은 문화 수준을 반영하여, 시를 짓거나 희곡·탄사 등을 직접 창작하였던 여성도 등장하였다. 대표적인 희곡작가로 ‘원원몽(鴛鴛夢)’을 지은 섭소환이 유명하고, 탄사의 작가로는 ‘천우화(天雨花)’를 지은 도정회, ‘재생연(再生緣)’을 지은 진단생이 있다.넷째, 마지막으로 ‘책의 가격’이 어떠했는가를 보자. 서적의 가격은 대부분 봉면에 주인(朱印)으로 날인하는 방식으로 표시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서적 유통의 어느 단계에서 찍혔는지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이것은 단지 말단의 한 서점에서 붙인 가격에 불과할지도 모르고 당시에는 책값이 정확히 정해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소베 아키라의 연구를 보면 ‘만력 연간에 거질의 일용 유서의 정가가 대략 은1량이었고, 후대에 인쇄된 조잡한 판본의 경우, 숭정 연간에는 등의 인쇄물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 민중들이 무엇을 인쇄한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이 사건은 책의 출판과 관계가 깊었던 사인(士人)계층이 주도하여 ‘인쇄물의 배포’를 통해 여론조작을 일으킨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셋째, 명말의 정치사를 크게 움직인 태풍의 눈으로, 천계 연간에서는 환관 위충현과 ‘동림파’간의 대립을, 숭정 연간에서는 동림파의 뒤를 계승한 복사(復社)의 성립을 꼽을 수 있다. 동림파와 복사는 모두 강남 지방에서 일어난 것인데 강남을 무대로 하여 각지의 사인(士人)을 결집시켰던 이들 당사(黨社)의 여론이 당시 북경의 조정을 좌우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광범위한 여론 형성 과정에는 역시나 인쇄물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명실록’ 권483, 만력 39년 5월 임인(壬寅)조에는 동림파를 탄핵하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동림파의 고현성이 강남지방의 여론을 좌우하여 지방관의 운명까지 결정하였고, 그가 강학을 하면 그 내용이 곧장 책으로 간행되어 세상에 전파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렇게 동림파가 지방의 여론 형성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실제적으로 ‘출판’이라는 전달 수단을 손 안에 쥐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천계 연간 동림파는 위충현의 환관세력과 대립하고 있었다. 위충현은 동림서원을 필두로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고, 동림파의 중심 인물들을 학살하는 등 동림파에 대한 대탄압을 자행하여 일시적으로 동림파 세력을 완전히 말살시켰다. 위충현의 시대는 천계제가 붕어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 후 숭정제가 즉위하자 정치적으로 실각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경세음양몽(警世陰陽夢)’ 등 위충현을 제재로 한 백화소설이 신속하게 연이어 등장하게 된다.숭정 연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복사가 성립되었다. 복사는 기사(幾社)?응사(應社) 등 각지의 문사(文社)를 통합한 것이다. 문사는 본디 팔고문의 수련기관으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이 아직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생원들이었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