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교회목 차러시아의 종교 러시아 정교회의 신앙과 의식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1. 러시아의 종교러시아 정교회 - 러시아인의 주된 종교. 러시아 종교인의 약 75% - 짜르 전제의 대들보 역할 - 공산주의 시절 교회는 국가에 완전히 종속 - 1980년대 러시아 정교회의 신자 수는 5천만 명 - 이상으로 추산 이슬람교 - 1990년대 중반 19%의 신자 비율 - 러시아에서 숫자상 두 번째로 중요2. 러시아 정교회의 신앙과 의식신앙 - 진실되고 성스러운 사도의 교회 - 예수가 세운 성체에 바로 기원 교리 - 성경과 세계종교회의에서 명시했던 전통에 근거 - 정교의 가르침 - 성 삼위의 교리 -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교리 포함 성인 - 마리아가 신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지위 갖음2. 러시아 정교회의 신앙과 의식예배 - 화려함. - 전례의 형식만을 사용 - 초기 정교의 모습 남아있다. - 최고수장은 총 주교 세계종교회의 - 그리스 정교회의 모든 구성교회가 참여 - 회의의 결정을 절대 신뢰3.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끼예프루시 시대 980년 블라지미르 대공 끼예프 대공이라는 전제군주 자리에 오름. 민족통일 도모 위해 이교신앙 장려 정책 펼침. 끼예프 루시를 국가적으로 통일하기 위해 보편적 종교 찾음. 당시유행하던 그리스정교, 로마 가톨릭교, 이슬람교, 유태교. 988년 그리스 정교 수용. 민간신앙의 전통이 그리스 정교와 잘 맞아 떨어짐. 러시아 정교회는 슬라브인들의 통합을 촉진시키는데 큰 기여. 이교신앙중 으뜸인 번개의 신 “뻬룬” 과거 뻬룬이 차지하고 있던 위치를 유일신인 하나님이 대체. 기독교신앙과 민간신앙이 함께 공존3.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몽고 지배 13세기 전반 몽고군의 침입 남러시아 황폐화 모스끄바가 중심지가 됨. 몽고는 정교회를 비롯한 종교에 대해 관대 교회가 금욕주의를 특히 강조 이에 따라 수도원의 전통이 깊이 뿌리내림. 금욕주의운동.3.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비잔틴 제국의 몰락(1453) 러시아 정교회 사실상 독립 비잔틴의 유일하고 합법적인 계승자 자처 교회 분열 18세기 뾰뜨르대제 러시아 제국 건설하기 위한 근대화에 박차 러시아 정교회의 세속적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교회제도의 개혁 1700년 이후 총주교의 선출 금지 1721년 정직으로 총주교 제도를 폐지 신성종무원 설치 교회는 국가의 한 기관으로 전락 18-19세기 교회의 도덕적 권위는 쇠퇴3.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1917년 총주교제 다시 부활 교회 독립적으로 운영 교회가 뾰뜨르 대제 이전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소비에트는 부활된 총주교를 선전 대리인으로 종종 이용 볼셰비키는 교회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가지고 있었음. 따라서 볼셰비키는 교회의 영향력을 가능한 빨리 제거하기 위해 무신론을 적극 선전 교회의 모든 자산을 국유화3.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소비에트 체제 최초 5년동안 (1922-1926) 러시아 정교회의 주교 28명과 1,200명 이상의 사제들이 처형되고 박해당함. 종교회합, 종교활동을 금지하는 법률의 강화 성직자들에 대한 집요한 공격 반 종교 캠페인은 다른 모든 신앙에 대해서까지 전개 1925년 설립 전투적 무신론 연맹 정교회 및 다른 모든 종교 조직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캠페인 1939년 소련 정부는 종교활동에 대한 제한조치 약간 해제. 정교회는 이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임.3.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 -정부는 마지못해 교회에 지원 요청. -독일과 전쟁을 치르는 국가에 대해 교회가 활발히 지원 -당국에 냉담했던 사람들도 소비에뜨의 대의명분을 지지 1942년 양자간의 동맹관계 증진 -성직자들과 외국 사절단 사이의 공식적 접촉에 대한 금지 해제 -부활절 축제 허가 -사회 진보 장애물로 종교를 낙인 찍었던 것을 일시적으로 취소 러시아 정교회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됨 전쟁 기간동안 수천 개의 교회가 다시 문을 열음.3.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흐루시쵸프정권 교회의 회생을 가능하게 했던 정책을 뒤집음. 모든 종교행사 반대하는 캠페인 6년동안 전개. 흐루시쵸프의 캠페인은 후계자 브레즈네프 시대에도 게속됨. 1975년 러시아 정교회의 숫자는 약 7000개까지 감소. 러시아 정교회의 고위 성직자중 가장 저명한 사람들과 일부 종교 활동가들은 감옥에 가거나 교회를 떠나도록 강요받음 그 자리에 KGB(국가안보위원회) 요원들이 잠입되기도 함. 교회는 소비에뜨 외교정책을 지지, 전파 비러시아인 신자들의 러시아화를 촉진 탄압에도 불구 종교활동 지속3.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1953년 스딸린의 죽음 문화적 자유화 러시아 정교회의 의식과 예술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끔. 소비에뜨 정권 말기에 맑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가 점점 신뢰를 잃어가는 것에서 이득을 봄. 1980년대 중반 소련에서 겨우 3000개 가량의 정교회와 수도원 두 곳만이 활동 공산주의 통제가 약화된 10년동안 전역에 걸쳐 종교적 각성3.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1988년 고르바쵸프는 종교에 역할에 관해 토론 러시아 정교회 1000주년 공식기념 행사에서 종교적 표현의 자유가 다시 허가되었다는 징후가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감. 1989년 초 교회의 사유재산 소유 및 인쇄물 배포 권리를 명시 1990년 고르바쵸프가 제안한 종교 자유에 관한 법률안을 통과 1990년에서 1995년 사이 8000개 이상 러시아 정교회가 생김. 교구의 수 배로 증가 32개 교구가 추가됨. '구세주 그리스도 교회' 의 복원.3.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소연방의 붕괴이후 러시아 정교회 러시아 중심으로 애국심 고취, 국민통합, 정교회의 위상을 재고 1990년대 전반기 교회는 러시아인들에게 커다란 믿음을 심어줌 1990년 교회의 수장 알렉시 2세는 많은 대중들의 신뢰를 이끔. 1991년 모스끄바 부활절 예배에 보리스 옐친이 참석했던 것이 두 달 후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그의 승리를 가져온 중요 요인 총주교 알렉시는 그 해 옐친의 대톨령 취임식을 집전Thank you.{nameOfApplication=Show}
-러시아 선교 리포터-학과 : 국제문화선교학과학번 : 200310233성명 : 김대훈1. 러시아의 민족과 연방체제러시아는 150여 개의 크고 작은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로서 그 중 러시아인이 전체 81.5%를 차지하는 절대 다수 민족이며, 타타르인(3.8%), 우크라이나인(3.0%) 등도 비교적 많은 편이다. 이외 소수민족으로는 슬라브족, 체첸족, 유태인, 추바슈인, 바슈키르인, 키르키스인, 다게스탄인, 우드무르트인, 마리인, 코미인, 코미페르먀크인, 체첸인, 오세트인, 불가리아인, 고려인, 부랴트인, 야쿠트족, 카바르딘인, 카렐리야인, 헝가리인, 집시, 북방족(에벤키족, 네네츠족, 한티족, 추코트족 등)칼미크인, 잉구슈인, 투바인 등이 있다. 현재 러시아연방체제는 21개 공화국 및 자치공화국, 6개의 크라이(지방),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2개의 특별시, 1개 자치주, 10개 자치관구 등을 포함 모두 89개의 연방주체로 구성돼 있다.-> 미전도 종족이 아주 중요한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수많은 미전도 종족들이 거주하는 러시아 지역을 눈 여겨 볼 수밖에 없다. 만약 러시아 지역 전체가 복음화가 된다면 많은 미 전도종족들이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세계 복음화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2.러시아의 종교현재 러시아 국민의 대부분이 동방정교인 러시아정교를 믿는다. 러시아는 원래 공산주의 국가여서 종교를 믿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민주주의국가가 되면서, 종교의 자유가 생겼고, 러시아정교와 카톨릭이 매우 퍼져나갔다. 러시아정교는 러시아특유의 종교파로, 비슷한 예로, 그리스정교가 있다. 그 외 극소수적으로는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를 믿기도 한다.현재 러시아에 규모가 가장 큰 종교집단은 그리스도교의 분파인 러시아 정교이다.러시아 정교의 기원은 대개 10세기가 끝날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때 슬라브 왕국인 키예프루시의 통치자가 비잔티움에서 건너온 전도사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으며 그 이래로 1,000년의 세월 동안 러시아 민족의 주요종교로 자리를지 교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②우선 러시아의 강경한 대외정책으로 인해 선교사들을 위한 종교비자문제가 큰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자원외교로 자신감을 가진 러시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기 때문에 러시아 정교회의 힘이 커짐으로써 러시아 내의 개신교 선교가 큰 견제를 받고 있다.따라서 이런 정치적인 이유로 인하여 한동안 러시아 선교지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정교회는 해외에서 온 선교사들이나 타종교 세력을 불순 세력으로 보기 때문에 러시아 내에서 개신교 선교는 큰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따라서 어려운 비자문제 때문에 교회들도 러시아 파송을 꺼리고 있다.③최근 러시아 루블가격의 인상으로 인해 달러로 송금받는 선교사들의 경제적인 삶이 많이 나빠졌다. 4년 전 달러당 33루블하던 것이 금년들어 달러당 23루블 수준으로 인상되어 4년전에 비해 약 30% 정도의 루블을 덜 받고 있다. 그리고 매년 약 20% 정도의 인플레가 있다. 지난 몇년 간 한국 원화의 강세로 어느 정도 견딜만 했지만 요즘같은 원화 약세로 인해 한국 선교사들은 이중 환차손을 보고 있다. 달러를 덜 받고 그리고 루블도 덜 받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돈은 더 지불해야 한다. 그 결과 4년전에 비해 약 40-50% 정도 후원금을 매월 덜 받고 있는 셈이다.④선교를 위해 이곳에서 부동산 구입을 권하지만 사실 부동산 가격이 너무나 올라 최소한 일억에 가까운 부동산을 구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현실이다. 이 가격은 4년 전에 비해 부동산 가격이 4-5배 정도 올랐다. 따라서 이러한 비싼 부동산으로 인하여 러시아 내에서의 선교사역이 크게 방해 받고 있다 그리고 부동산 임대료 또한 너무 비싸다. OM 선교단체의 보고에 의하면 러시아 내의 부동산 임대료는 영국이나 스페인보다도 비싸다고 한다. 따라서 러시아 내에 선교사들이 거주를 위해 거의 천불에 가까운 임대료를 지불해야 한다.⑤만약 옛 소련연방에 속한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려면 모두 회 싸움이 칼로 물 베기라도 되듯이, 밤새 마음에 들지 않은 통역으로 갈등하다가도 아침이 되면 다시 일을 하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에는 홀로서기를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조금씩 돕던 선생이 1월14일이면 그만 둡니다. 선교지의 언어준비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성이 없는 정도입니다.②가정 사역에 대해서 준비하기우리는 전통적인 유교 문화에서 자랐습니다. 아마 우리 5,7세대는 그렇습니다. 50년대에 태어나서 70년도에 대학공부를 하였던 세대 말입니다. 그리고 전통적인 장로 교회에서 신앙 생활 하였던 나에게는 지금도 가부장적인 잔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지금 많은 가정사역자들의 권고에 동의하여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에서의 사역 분담, 자녀 교육의 문제, 무엇보다 아내와의 파트너쉽입니다. 모든 사역에서 나 중심이 아니라 동역자로서 아내를 인정하는 일입니다. 이 모든 가정사역에 대한 준비는 선교사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준비라고 생각합니다.③인격사역에 대해서 생각하기러시아가 단순한 사역지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착각은 자유가 아닙니까?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한 개인과의 직접적인 인격적인 만남과 대화, 그리고 교제, 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분에서 분명한 가치관 정립과 개인사역에 대한 훈련이 대단히 중요합니다.④외로워지기 훈련선교지에서 선교사는 참으로 외롭습니다. 파송 받을 때는 온갖 스포트라이터를 다 받고 사역지로 출발하지만 정작 사역지로 떨어지면 냉정한 선교현실이 있을 뿐입니다.지금까지 마치 자기가 무슨 유명한 선교사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고 방자하였던 나의 모습을 생각하면 등이 뜨겁습니다. 하지만 선교지에서 선교사는 철저하게 외로워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주위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는 외로운 전도자로서의 모습이 바로 선교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5. 러시아 선교 비자법 대처방법① 노동 비자를 얻은 후 임시영주권을 신청하고 기다리는 방법이 있다.이 방법은 한국 선교사가 세운 법 그리고 임시영주권을 신청하기 위한 자격으로는 부동산을 소유해야 하는 조건이 있는데 현재 러시아내의 부동산은 2-3년 전에 비해 부동산 가격이 너무나 올랐기 때문에 금전적인 문제로 인하여 부동산 소유가 힘들어 졌다. 그러나 방 하나짜리 아파트라도 소유하면 임시영주권 신청이 가능하기 때문에 선교단체에서는 선교사를 위한 많은 후원과 선교사 자신은 많은 기도를 통해서 임시 영주권을 취득하면 좋을 것이다.② 임시 영주권의 취득 자격이 반드시 자기 주택을 소유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러시아 인이 외국인을 자기 집에 거주등록 해주고, 추천하는 경우는 자기 부동산이 없어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에 현지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현지인에게 이러한 방법으로 도움 받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③ 수도권에서 노동비자와 임시 영주권을 취득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그러므로, 작은 위성도시나 시골지역에서 노동비자와 임시 영주권을 받는 방법이 조금 수월할 것이다.④ 노동비자를 먼저 발급받고, 다시 비용을 들여 임시 영주권을 추진하기보다는 처음부터 임시영주권 발급을 추진하는 것이 비용절감에 큰 효과가 있다.6. 동방정교가 국교인 러시아에게 선교가 필요한 이유①러시아의 국교(國敎)인 러시아 정교회의 부정적인 역할이다. 국교(國敎)는 특정 국가의 종교를 말한다. 국교는 종교의 통일을 통한 이념의 통일이 목적으로 되어 있다. 이를테면 영국의 경우,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 통일령으로 영국 성공회가 국교로 자리 잡도록 하여, 종교분쟁을 해소하였다. 현대 사회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국교가 있는 나라들이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러시아의 종교상황을 보면 러시아인을 포함한 많은 민족이 대부분 러시아 정교회의 신도이지만, 로마 가톨릭, 개신교나 이슬람교, 유대교, 불교, 힌두교, 기타 종교 등의 신도도 적지 않다. 러시아 정교회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성직자인 신부들에게 있다. 신부(神父, priest)는 일종의 국가공무원 신분에 해당된다. 이들에게서 구령의 열정이나 성문제이다. 매년 학생들이 한 학년씩 진급(進級)을 하려면 반드시 진급시험을 치러야 한다. 이 가운데 시험에 불합격한 자는 상급 학년으로 올라 갈 수 없다. 이렇게 성적 때문에 문제가 된 아이들은 유급(留級)을 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부모들이 더 공부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유급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학교에 가지 않는 방치된 어린 학생들은 일찍부터 성의 문제, 마약 문제, 알콜 중독문제 등의 나쁜 습관과 범죄에 노출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잘못된 세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빠져들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코르사코프복음교회에서 헌신하고 있는 “샤샤”라는 젊은이가 있다. 그는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다. 악보를 보고 이해하지 못하지만 한 번 들은 곡은 그대로 연주가 가능할 정도로 재능이 있는 젊은이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서 부동의 드러머이다. 복음을 통하여 이렇게 버려진 것 같은 인생들이 하나님을 만나서 귀한 인생, 값진 인생으로 변화되어야 할 이유가 있기에 사할린은 복음이 필요한 땅이다.③러시아 국민들의 그릇된 성품이다. 사회주의 국가체제가 남겨놓은 부정적인 가치관이 있다면 그것은 국민들의 거짓말, 게으름, 부정직, 불성실과 같은 부정적인 성품들이다. 선교사님의 증언을 들어보면 이 사람들의 거짓말과 사람을 속이는 습성은 악의에 찬 것이라기보다는 습관적으로 하는 것이 많다고 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들을 사랑하셨기에 복음을 선물로 주셨다. 그러기에 이들에게 복음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복음 외에는 이들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복음을 통하여 이 민족과 나라를 바꾸어 나가시길 원하고 계신다. 백 년 전에 이미 복음의 빚진 자들로 선택받은 우리가 이 일을 감당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명인 것이다.7. 러시아 선교의 가능성과 잠재력①사회복지 측면에서의 러시아 선교는 긍정적이다.->러시아 정부는 재정적으로 취약하여 지체 부 자유자들 같은 장애자들이나 정신박약아이다.
웨스트 버지니아 주1. 웨스트 버지니아주(State of West Virginia)란????웨스트 버지니아주(State of West Virginia)는 미국 중동부에 있는 주(州)를 말하는 것이다.?위치: 미국 중동부?경위도: 서경 80° 30′ 0″, 북위 39° 0′ 0″?주도: 찰스턴(Charleston)?면적(㎢): 62385?행정구분: 55카운티(County)?시간대: UTC-5/-4?소재지: 1900 Kanawha Boulevard, E., Charleston, WV 25305?주의 꽃: 아잘레아(Rhododendron)?주의 나무: 사탕단풍(Sugar Maple)?주의 새: 북부홍관조(Northern Cardinal)?인구(명): 1,812,035 (2007)?인구밀도(명/㎢): 29 (2007)웨스트버지니아 주(State of West Virginia)는 미국의 중동부에 있는 주를 말하는 것으로 과거 남북 전쟁 기간 중에 버지니아 주로부터 분리되어 만들어졌다.웨스트버지니아 주는 북쪽으로 펜실베이니아 주, 북서쪽으로 오하이오 주, 서쪽으로 켄터키 주, 남쪽으로 버지니아 주, 북북동쪽으로 메릴랜드 주와 접하고 있다. 오하이오 주와는 포토맥 강을 경계로 하고 있다. 주 전체가 애팔래치아 산맥의 산악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원래 이 지역은 아데나 혹은 마운드빌더스라고 알려진 인디언 부족이 살았고 그 뒤를 이어 17세기까지는 포트에인션트인(人)들이, 그후에는 이로쿼이족(族)과 체로키족(族)이 거주했었다. 1731년 모건모건이 지금의 버클리군(郡)인 밀크리크에 백인 영구정착지를 세웠고, 미국독립혁명 후부터 이주민들이 몰리기 시작해 1870년대에는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수천 명의 이주민들이 모여들었다.1742년 석탄이 발견되어 웨스트버지니아주 발전에 한 획을 그었다. 역청탄을 비롯한 석탄 생산량은 미국 최고 수준으로 전국 매장량의 15%를 점유하고 있다. 그 밖에도 천연가스·석유·석회암·암염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며, 합성섬유·플라스틱 등의 화학공업과 알루미늄공업·유리공업·제철업도 활발하다. 옥수수·사과 등의 농작물을 재배하며, 낙농업과 주 면적의 75%를 차지하고 있는 삼림에 힘입어 임업도 성하다.웨스트버지니아는 지형상 애팔래치아산맥계에 속한다. 특히 서쪽의 70% 정도는 앨러게니고원에 속하는데, 강물이 여러 갈래로 흐르기 때문에 거대한 규모의 불규칙한 언덕과 계곡이 형성되어 있으며 평지로 되어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주의 대부분은 오하이오강(江) 유역에 속하며 전체 지형이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기후는 습윤대륙성기후로 비교적 온화하다. 개척 초기에는 산지가 많은 지형적 영향으로 고립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주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 고유의 문화유산이 보전되었다. 수공예품·악기·민요, 그 밖의 다른 문화유산들이 산간 농촌지역에 남아 있다. 하퍼스페리 사적지, 그린브라이어 휴양지, 버클리스프링스 휴양지, 독특한 농촌문화, 산간지방의 빼어난 경관으로 관광업이 번창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모건타운에 웨스트버지니아대학교(1867), 헌팅턴에 마셜대학교(1837) 등이 있다.남북전쟁 당시 버지니아는 동쪽의 남부연합에 속해 있었으나 이해를 달리하였던 서쪽은 웨스트버지니아로 독립하여 연방에 가담하게 되었다. 면적 62,761㎢, 인구 1,808,344명(2000)이며 주도(州都)는 찰스턴이다.원래 이 지역은 아데나 혹은 마운드빌더스라고 알려진 인디언 부족이 살았던 이곳은 1742년 석탄이 발견되어 웨스트버지니아주 발전에 크나큰 역할을 했다. 록키산맥·지맥이 뻗어있어 삼림관련 임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역청탄을 비롯한 석탄 생산량은 미국 최고 수준이며 천연가스·석유·석회암·암염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다.주의 대부분이 오하이오강(江) 유역에 속하며 비교적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사적지와 빼어난 경관의 휴양지들이 많아 관광업이 번창하고 있다.웨스트 버지니아의 대표적인 학교는 웨스트 버지니아주 주립대학교이다.이 학교는 1867년 모릴법에 의한 랜드그랜트칼리지로 설립되었다. 당초의 교명은 웨스트버지니아농과대학이었으나, 다음해 지금의 교명으로 변경되었다. 농업·삼림·소비과학대학, 에버리 문리과대학, 상경대학, 창조예술대학, 치과대학, 공학·광물자원대학, 인간자원·교육대학, 펄리 아이작 리드 언론대학, 법과대학, 의과대학, 간호대학, 약학대학, 체육대학의 13개 단과대학과 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다.2. 웨스트버지니아(State of West Virginia)주의 주요도시(1)찰스톤찰스톤은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주도이며 커노와 군의 군청소재지로 유명한다. 주 한가운데 있는 도시로 앨러게니 산맥, 엘크 강과 커노와 강이 합류하는(사우스찰스턴까지 다리가 놓여 있음) 지점에 있다. 1788년 조지 클렌데닌이 이 땅을 약 5달러에 사들인 후 아버지 이름을 따서 찰스타운이라는 이름을 붙이고(1818년 찰스턴으로 개칭), 리 요새를 세웠다. 오하이오 계곡으로 가는 이주민들이 이용하던 통로에 위치했던 까닭에 이 정착지는 곧 배를 갈아타는 장소가 되었다. 다니엘 분과 사이먼 켄턴 같은 개척자들이 이곳에 매료되어 이주해왔다. 분은 1790~91년에 열린 버지니아 주의회에서 이곳을 대표해 참석했다. 1795년부터 이 지역의 염천들이 개발되었고, 최초의 증기선이 들어온 1823년에는 주요소금산지가 되었다. 남북전쟁중 분단되어 있던 이 도시는 찰스턴 전투(1862. 9. 13) 후 북군에 점령되었다. 1870년 주도가 되었으며, 2년간 경쟁도시 휠링이 모빌을 대신하기도 했으나 1877년 다시 주도가 되었다.찰스톤은 인구 약 6만명정도의 비교적 작은 도시이지만 웨스트버지니아주 제 2의 도시이다. 찰스톤시가 위치해 있는 카나와 밸리(Kanawha Valley)에는 선사시대 인디언인 어데나 호프웰문화가 꽃피우고 있다. 유럽인들이 이 곳에 도착하면서부터 인디언들이 사리지기 시작했지만 이 지역에서 전쟁은 한번도 없었다. 남부 찰스톤 다운타운에서는 몇 개의 무덤들을 아직도 발견할 수가 있다.찰스톤은 카나와강 하곡에 공업지대가 있기 때문에 근처에서 산출되는 암염·석탄·천연가스·석유·점토·목재 등을 이용한 화학·유리·금속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상업과 유통의 중심지이다. 찰스톤은 원래1787년 포트 리(Fort Lee)라는 이름으로 엘크강(Elk River)이 카나화강(Kanawha River)으로 흘러들어가는 지점과 인접한 곳에 설립되었는데 몇 년후 버지니아주의회(Virginia General Assembly)에 의해 도시설립자의 아버지인 찰스 클렌더닌(Charles Clendennin)의 이름을 빌어 찰스톤으로 합병됐다.찰스톤에는 다양한 명소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명소로는 카나화 스테이트 포리스트를 비롯, 브롤리 산책길 및 슬랙 플라자 등을 들을 수 있다. 이곳에서 교향곡 축제를 비롯한 다양한 축제가 열리고 있으며 각종 이벤트로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밖에도 많은 교육기관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찰스톤의 음식점들로는 주로 레스토랑이 많은데 조 파지오스, 캐그니스 등이 유명하다. 또한 찰스톤 타운센터, 카나화 몰과 같은 유명한 소핑 센터들도 자리하고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춘 숙박시설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찰스톤의 주요 대학으로는 1889년에 세워진 모리스하비 대학과 1891년 웨스트 버지니아 주립 대학과 1972년 웨스트버지니아대학원이 찰스톤에서 서쪽으로 13킬로미터 떨어진 인스티튜트에 세워졌다.찰스톤 대학은 37개의 학사 학위 프로그램들이 있으며 연합의 학위 과정들은 8개의 필드에서 제공되고 있다. 마스터의 학위 과정은 경영 관리학과 인적 자원 관리에서 이용할 수 있다. 주위의 교통도 매우 편리하다.찰스톤은 공업용 광물자원이 풍부한 커노와 계곡의 중심지로서, 석탄 화학제품, 강철, 유리, 목제를 생산하는 공장지대에 둘러싸여 있다. 또한 소비재 플라스틱 발달의 근원이 된 나일론과 루사이트 등 기초 화학제품 제조업이 이곳 찰스톤에서 시작되었다.(2)팬핸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좁고 긴 돌출부 지역인 팬핸들 지역의 북부에 자리하고 있는 오하이오 군의 군청소재지이다. 한때 웨스트버지니아의 주도였던 적도 있었으며,1806년에는 읍이었고 1836년에 시로 승격되었다. 휠링은 제조업을 위주로 한 산업의 중심지 역할도 하고 있으며, 자연과 더불어 전문성을 가지며 멋진 교육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휠링에는 다양한 명소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는데 주의사당 음악홀, 환경 교육 센터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또한 역사적인 유적지를 비롯한 박물관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다.이밖에도 시민들이 휴양을 즐길 수 있는 공원들과 문화 공간들이 많이 있다. 휠링의 빛의 축제와 더불어 지역 이벤트가 많이 열리고 있어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오페라와 같은 음악회가 자주 열리고 있으며 휠링의 주위는 안전하면서도 쾌적한 환경을 구성하고 있어 활기차다. 이외에도 휠링은 매력적인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휠링은 다양한 형태의 음식점들이 자리하고있는데 주로 레스토랑 형태의 음식점이 많다.그리고 휠링에는 아메스 디파트먼트 스토어를 비롯한 Artworks in Old Town과 같은 유명한 쇼핑 센터도 자리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베스트 웨스턴 휠링 인, 햄튼 인 휠링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숙박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휠링에는 스포츠 경기와 같은 즐길거리와 볼거리가 가득하며 브로드웨이 쇼와 같은 다양한 공연을 보여주고 있는 곳도 있다.휠링의 교육기관으로는 1954년의 휠링대학을 비롯하여 웨스트버지니아 노던지역사회대학이 1972년에 설립되었으며 1840년의 베서니 대학, 1837년의 웨스트버지니아주립대학이 부근에 자리하고 있다. 이밖에도 전문적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많은 전문학교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다양한 교육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그 리고 교육 협회와 같은 기타 교육 기관들도 많이 자리하고 있다.휠링은 오하이오주의 마셜군과 벨몬트 군을 포함한 그레이터 휠링지역을 이루는데 이지역은 매우 다양한 산업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철강업을 비롯한 석탄과 가스 가공업 그리고 섬유, 유리와 담배, 도자기, 판금양철 등의 다양한 제조업이 발달해 있다.
나는 국제문화선교학과 4학년 전공필수 과목인 “단기선교”라는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다. 이 과목의 과제는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건데 나는 이복수 교수님과 이용석 저자님이 지으신 [남아 및 중미 선교론]이라는 책을 읽고 이렇게 서평을 쓰게 되었다. 내가 맨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는 책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없었는데 책을 계속 읽다보니까 책의 내용구성이 잘 정리 되어서 그런지 책의 내용을 금방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잘 짜여진 책의 구성 덕분에 나는 이 책의 내용을 금방 이해할 수 있었고 이렇게 큰 어려움 없이 서평을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책의 주요내용을 제 1부 남부 아프리카 선교론과 제 2부 중앙아메리카 선교전략 이렇게 크게 2개의 단락으로 나눠서 서평해보고자 한다.제 1부 남부 아프리카 선교론우리가 알고 있는 아프리카는 정말로 큰 대륙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아프리카는 지구의 육지면적 가운데 22.3%를 차지할 정도로 넓은 영토이다. 아프리카의 일반적인 개요를 설명하자면 아프리카의 기후, 언어, 역사, 종교 등으로 나누어서 말할 수 있다. 아프리카의 기후는 지역마다 기후가 다양하지만 거의 대부분 지역이 아열대 기후 혹은 온대기후이다. 아프리카 대륙에 속한 나라의 수는 대략 55여 개국이 존재하나, 3500여개 이상의 소수민족 그룹으로 이루어진 나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부족들은 크게 버버리족, 아랍족, 흑인종, 반투족, 피그미등 다섯 종류의 종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언어 역시 2110개로 다양한데 공식언어로는 아라비아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7개국, 불어가 22개국, 영어가 21개국, 포르투칼어가 4개국, 스페인어가 1개국으로 나타난다. 아프리카의 다양한 언어들 가운데 성경전체가 번역된 언어는 130개이고 신약만 번역된 경우는 237개이고 부분적으로 번역된 경우는 250개이다. 이것을 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은 옛날 아프리카로 선교사역을 했던 믿음의 조상들이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고 아프리카 언어의 성경번역을 위해서 수없이 노력했다는 안 수많은 아프리카 지역의 많은 선교사님들이 순교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현재 아프리카의 종교적 분쟁은 바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는데 남부지역은 대부분 기독교 국가들이고 북부지역은 대부분 이슬람교 국가들이 있는데 현재 북부 아프리카에서 회교의 급속한 성장은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복음 확장에 큰 방해거리가 되고 있다. 물론 현재 북부 아프리카의 이슬람교 성장도 문제가 있겠지만 현재 남부 아프리카의 왜곡된 기독교, 변질된 기독교의 확산도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이 책은 남부 아프리카를 중점적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나는 이 책을 통해서 현재 남부 아프리카에는 전쟁과 폭동은 물론이고 변질된 기독교사상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남부 아프리카가 기독교 지역이라고 해서 선교를 등한시해서는 안 되고 남부 아프리카에서 올바른 선교사역을 통해 잘못된 기독교를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프리카에 기독교가 제일 처음 들어간 시기는 BC 1세기경으로 추측되고 있는데 성경의 신약부분에 아프리카 지역을 수차례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기독교 복음전파가 1세기에 시작되었다는 증명은 성경의 기록에도 이미 언급되어 있다. 사실 아프리카의 기독교 역사를 보면 2세기경 북아프리카에서 어거스틴, 터툴리안 등 신학의 거장들이 나타났을 만큼 기독교 문화가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후 이단들이 등장하고 이슬람교도들에게 침략을 계속 받으면서 아프리카 지역의 기독교가 수세기 동안 자취를 감추다가 15세기부터 로마 카톨릭의 아프리카 선교에 의해서 다시 아프리카 내에서 기독교의 복음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15세기때 포르투칼이 가장 먼저 아프리카에게 선교를 시도 하였지만 아프리카 지역의 왕들이 쉽게 개종하고 쉽게 돌아서는 문제점과 포르투칼 선교사들의 피상적인 선교 때문에 아프리카 선교가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결국18세기에는 아프리카 내에서 로마 카톨릭 선교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하지만 19세기초에 아프리카 대륙기독교회가 많은 지역이다. ⑥언어가 다른 종족들이 많은 지역이다. ⑦에이즈 문제가 심각한 지역이 많다. ⑧서구 선교사에 비해 한국 선교사가 불모지와 다름없는 지역인데 실제로 남부 아프리카내의 한국 선교사들이 많이 부족한 상태이다. ⑨회교의 포교가 강하게 일어나고 있는 지역이다. 따라서 늘 회교와 기독교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⑩은사주의 교회들이 성장하는 지역이다. 이러한 은사주의 경향 때문에 복음적 가르침에 강조를 두기 보다는 여러 가지의 질병과 고통에서 더욱 현실적인 도움을 바라는 잘못된 신앙으로 변질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⑪흑인 신학이 침투되어 있는 지역이 많다는 것인데 흑인 신학이란 그리스도를 흑인화 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인데 이는 인종분쟁을 일으킬수 있는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이상 남부 아프리카의 공통적인 특징을 위에서 언급했었고 이번에는 남부 아프리카 지역에 선교사역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① 인내하는 사역의 전략이 중요하다. 특히 아프리카 지역은 날씨가 덥고 환경이 안 좋은 곳이기 때문에 인내심을 갖고 선교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같다.② 선교 현지에 대한 문화의 잘못된 활용은 복음을 변질 시킬 수 있기 때문에 복음적인 토대 위에서 그들의 문화와 정서를 잘 활용하는 전략이 중요하다.③ 팀 사역을 통해서 넓은 지역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의 삶에 다양한 유익을 줄 수 있는 효과적인 사역이 중요하다.④ 아프리카 지역 내의 의료, 교육, 농업 기술 등을 맡을 수 있는 다양한 전문인 선교사의 양성이 시급하다.⑤ 목회자의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 및 연장교육이 중요한 시점이다.⑥ 남아 공화국이 주변 국가들에게 쉽게 갈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하기 때문에 남아 공화국에 교류가 가능한 교회들과의 협력이 중요하다.⑦ 언어습득이 중요하다. 남아프리카는 영어가 공용어이기 때문에 영어공부가 필수이다.⑧ 사역 초기에 학교나 농장 건물의 를 바로 하여 보다 나은 선교지 이해의 접근을 시도하기 원한 것이 글쓴이의 바램 인 것 같다. 엘살바도르는 중미에 위치하고 있는데 인구 밀도가 높은 국가이지만 중미 중에서 가장 작은 국가로, 세계에서 9번째로 작은 국가이다. 엘살바도르는 지난 1821년 9월 15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나라이며, 1981년부터 12년 간 내전을 격은 나라이지만 점차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안정을 취해 가는 나라이다. 엘살바르도의 역사를 말하자면 콜럼버스가 중남미 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엘살바르도 지역 쪽에는 원주민들이 거주했으며 유목민과 정착민의 발생으로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그들은 아스떼까 문명과 마야 문명을 발전시킨 주체가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원주민 시대를 평화롭게 보낼 것 같았지만 갑자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나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중남미 대륙으로 들어오면서 중남미 지역의 원주민들은 대부분 확살 당하고 노예로 끌려가고 스페인의 강압적인 통치 속에 살아야만 했다. 그렇게 식민지 정책으로 인하여 피해를 수세기 동안 받다가 19세기에 들어와서 독립 혁명을 통하여 마침내 스페인 식민지로 독립을 해서 탄생한 국가가 지금의 엘살바도르인 것이다. 현재 엘살바도르의 종교적인 상황은 엘살바도르 국민의 90%이상이 로마 카톨릭을 믿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의 인구는 숫자만 증가 하고 있을 뿐 영적으로는 약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중남미의 로마 카톨릭 교회가 네 가지 형태의 가톨릭주의(형식적, 명목적, 문화적, 민속적)를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중남미의 로마 카톨릭의 유산은 과거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식민지 정책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옛날 스페인과 포르투칼이 중남미를 지배하기 바로 직전인 15세기 때는 군주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교황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많이 하락하고 있는 시기였다. 또한 16세기 들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기 때문에 유럽전역에는 로마 가톨릭이 위세가 점점 떨어지고 있을 때 스페인과 포르투칼은 이에 위기를 느끼고여 다신을 섬겼던 잉카의 문화와 기독교가 접목되어서 가톨릭을 변형시킨 것이고 이러한 변질된 가톨릭은 결국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선교방법으로 인하여 현재 엘살바도르를 포함해서 남미지역의 가톨릭 대부분이 이단이라고 단정 지어도 될 만큼 가톨릭이 종교 다원화 된 것을 알 수 있다. 엘살바도르의 종교적인 상황을 보자면 첫 번째가 마야 문명에서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정신과 신앙의 성격을 뛴 토착적인 종교가 전래되어 있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스페인의 왜곡적인 선교로 인하여 이 토착신앙과 로마 가톨릭의 융합이 오늘날의 변질된 가톨릭을 만든 것이다. 현재 엘살바도르 안의 로마 가톨릭 신자 수를 통계 내어 본 결과 약 13%의 감소율을 보이고 있는 반면 가톨릭에서 비 종교인으로 또는 가톨릭에서 개신교 교인으로 개종하는 수는 날로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엘살바도르 사람들의 전체 인구의 50%는 가톨릭인 것으로 나타났지만, 그중에 매주일 성당을 찾아 미사를 드리는 수는 극소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이 점차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에 적응을 하지 못하여, 신자의 수가 날로 감소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반면, 개신교는 그 수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을 수 있다. 사실 남미 대륙에서의 개신교 선교는 19세기에 상대적으로 늦게 시작하였고 그 결과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남미 대륙 안에서의 개신교 숫자는 많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엘살바도르 안에서의 개신교 숫자의 증가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엘살바도르의 개신교 전래과정을 살펴보면 1894년 코스타리카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다른 지역을 찾았는데 때마침 그 지역이 엘살바로드 였고 이때부터 엘살바도르 지역에 선교사역이 시작된 것이다. 엘살바도르에서의 개신교 부흥 원인으로는 가톨릭과는 달리 개신교는 대중들에게 가까이 접근하였는데 근면한 성경공부와 모임 그리고 찬양을 통해서 개신교는 더욱 부흥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있다.
블러드 다이아몬드 감상문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다이아몬드 인하여 얼마나 수많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죽어가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 영화는 1999년 시에라리온 내전에서 실제로 일어난 다이아몬드 쟁탈전을 재구성한 영화이다. 전 세계에 있는 수출되고 있는 다이아몬드의 대부분이 아프리카에서 불법적인 거래를 통해서 수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우리에게 말해준다.이 영화를 보면서 실제로 서양 다이아몬드 밀수꾼들은 아프리카 반군들과 다이아몬드 거래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서양 밀수꾼들의 좋은 무기를 아프리카 반군들의 다이아몬드와 맞교환을 하게 되는데 서양 밀수꾼들은 다이아몬드를 외국에서 더 비싸게 팔수 있다는 이득을 챙기게 되고 아프리카 반군들은 더 좋은 무기를 내전을 유리하게 이끌수 있다는 이득을 챙기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불법 다이아몬드 거래로 인하여 서로 윈윈 게임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반군들은 다이아몬드 광산을 차치하여 전쟁 포로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키면서 다이아몬드를 캐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캐낸 다이아몬드를 다시 서양 밀수꾼의 무기와 거래가 되면서 아프리카 내에서 내전이 일어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내전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서 죽게 되고 그런 혹독한 과정을 거쳐서 캐낸 다이아몬드가 실제로 전세계에 수출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실도 모른 채 다이아몬드를 구입하고 있다는 문제점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면서 또한 느끼게 된 점은 바로 아프리카 내에 소년병사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반군들은 원주민 마을에 소년들을 납치하고, 그들에게 자신들은 혁명군 이라고 세뇌 교육 시킨 다음 그들에게 총을 쥐어주고 싸우게 만든다. 소년들에게 마약을 주면서 내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무분별한 학살을 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게 되면서 갈수록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는 아프리카의 현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아직도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다이아몬드 불법거래를 통해 내전자금이 만들어져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불법 다이아몬드거래가 시에라리온 뿐만 아니라 앙골라, 콩고, 코트디부아르도 다이아몬드 내전이 일어나고 있다. 나는 정말 이 영화를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욕심이 많고 그 욕심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불법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과연 지금 전 세계에서 다이아몬드를 구입하고 있는 상류층 사람들이 아프리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다이아몬드를 쉽게 구입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이 영화의 마지막 문구가 떠오른다. “아직도 아프리카의 소년병사들이 20만명이 있다” 이 소년병사들이 무엇 때문에 싸우고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학살하고 무엇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 체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나서 아프리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