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교육과 문화예술-목차-북한의 교육과 문화예술가. 북한의 교육1. 북한 교육의 이념과 목표2. 북한 교육제도의 변천3. 학제 및 교육과정과 방법4. 학교생활나. 문학과 예술1. 문예정책의 변화 및 기본원칙2. 분야별 실태 - 문학, 음악, 미술, 영화, 연극과 가극 등다. 사회문화변화와 대응1. 문화의 변화와 원인2. 대응과 전망가. 북한의 교육1 .북한 교육의 이념과 목표(1) 사회주의 교육1) 사회주의 교육의 기본원리① 혁명화, ② 로동계급화, ③ 공산주의화, ④ 정치사상 교양※ 정치사상 교양을 가장 중시→ 수령과 당에 끝없이 충직한 공산주의 혁명가로 키우 는 것2) 사회주의 교육이란?사람들을 자주성과 창조성을 가진 공산주의적 혁명인재로 키우는 것3) 사회주의 교육이념국가는 사회주의 교육학의 원리를 구현하여 후대들을 사회와 인민을 위하여 투쟁하는 견결한 혁명가로 지·덕·체를 갖춘 공산주의적 새 인간으로 키움4) 사회주의 교육목표혁명을 위해 철저히 자기 희생정신을 발휘하도록 하는 집단주의적 의식화를 목표로 함(2) 북한의 교육 이념1)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에서의 교육이념국가를 교육의 주체로 하고 국가는 사회주의 교육원리를 구현하여 후대들을 사회와 인민을 위하야 투쟁하는 혁명가이면서 동시에 지·덕·체를 갖춘 공산주의적 새로운 인간으로 키움2) 북한 교육의 원리① 조선 노동당에 대한 충성심② 주체사상에 대한 신념③ 투철한 혁명성④ 11년제 의무교육의 실시※즉, 교사는 직업혁명가이며 학생은 사회주의 건설의 후비대로 설정수령의 생각에 따라 숨쉬고,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대한 교육의 강조. 그래서 전인 민들은 김일성주의라고 부르는 주체사상 교육을 받아야 함3) 북한교육의 이념의 특징① 마르크스의 인간관 사회관, 역사관, 레닌의 교육관과 교육정책을 도입② 정시사상 교육 최우선의 강화-공산주의 혁명이론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공산혁명 이데올로기를 교육의 기 본 이념으로 삼고 철저한 사상교육을 통해 혁명정신의 함양③ 공산주의식 평등주의 원리-자본주의 사회의 상호 6-4제)2) 과정① 1975.9.1 - 11년제 의무교육제 전국으로 확대 실시② 1977.4.29 - ?어린이보육교양법?제정, 동년 6월1일부터 실행③ 1977.9.1 - ?근로자 중학교?신설-협동농장 및 각급 생산기관 단위④ 1977.9.5 - ?사회주의 교육에 관한 테제?발표⑤ 1982.9 - TV방송대학 개교2년제 기술학교를 전문학교로 개편⑥ 1984.9 - 평양 제1고등중학교 개교-국어, 사회과목 비중 감소-수학, 자연계, 예·체능, 정치사상과목 강화김정일 찬양 교육 강화-김정일 찬양 교과목 정식채택외국어 교육 강화-민학교 4학년 과정에 외국어과목 신설⑦ 1986.1 - 전국 대학 및 고증전문학교 최우등생대회 및 3대 혁명 붉 은기 쟁취운동 진행 1987.9 김정일 찬양화교육 적극화-김정일 학습방법 따라 배우기 운동의 일환으로 ?최우등 상쟁취운동?전개-각 사범대학에 ?김정일 혁명역사학과?신설⑧ 1988.9 - 고등전문학교를 전문학교로 개편⑨ 1988.10 - 김책공업대학을 공업종합대학으로 승격⑩ 1989 - 고등중학교 교육체계를 남녀공학으로 개편 추진⑪ 1990 - 매월 셋째 일요일을 ?대학생의 날?로 제정구소·동구 사태 관련 해외유학생 소환 조치⑫ 1990.10 - 60개 대학 명칭을 변경(중앙인민위 정령)⑬ 1991.9 - ?김일성·김정일 혁명역사?수업시간을 2배로 증대-종래 연간 60시간에서 120시간으로⑭ 1992.9 - 교과서를 김정일 우상화 내용을 개편⑮ 1992.12 - 인텔리 사상교양 강화(12.9 저선지식인대회 최초 개최)? 1993.2 - 서방권 외국어 교육 강화(중앙TV에서 영어교육방송 신설)? 1994.1 - 인민학교 및 고등중학교 학생 대상 단발 지시? 1994.9 - 인민학교~대학교 교과서에 김일성 부자?위대성?추가-김정일 중심으로 개편3. 학제 및 교육과정과 방법(1) 학제① 소학교 4년, 중학교 6년, 대학교 4년으로 구성② 기본학제와는 별도로 엘리트를 양성하는 영재학교, 외국어학교 등 각종 특수학교와 예? 체능분야의 특기르침? 체육교육 : 노동과 국방에 필요한 체력 향상을 목적① 소학교 교육과정- 13개 과목을 교육하도록 편성- 2008년 9월부터 소학교 3학년 이상의 학생들에게 영어 및 컴퓨터 조기교육 실시-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을 우상화하는 과목이 주당 1시간씩 배정- 국어와 수학의 시간배당이 전체의 57%, 자연과목은 비중이 낮음② 중학교 교육과정- 6년 동안 23개 과목을 교육, 소학교 과목과 대체로 내용이 유사함- 사상교육을 강화하고, 외국어 교육과 첨단과학 기술교육 등을 강조- 2000년대 들어 영어와 중국어가 러시아어를 누르고 가장 인기있는 외국어가 됨⇒ 북한 교육과정의 특징? 사상교육 강화는 교육을 사상혁명의 핵심적인 수단으로 간주한 것으로 교육과 정치 가 결합? 교육과정에 실습 또는 생산노동이 포함되어 있는 등 생산활동과 직접 결합? 교육의 내용과 방법이 국가에 의해 규격화되어 하달되고 있어 학습자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존재하지 않음2) 교육방법- ‘사회주의 교육에 관한 테제’에서 규정된 다섯 가지의 사회주의 교육방법에 기초① 깨우쳐 주는 교수교양a. 학생들 자신의 능동적인 사고활동을 통해 교수내용을 깨닫게 함으로써 그들의 창발성 을 발전시키는 교육방법이 강조됨b. 설명을 통한 교육, 토론과 논쟁을 통한 교육, 문답식 학습을 통한 교육, 직관을 통한 교육, 실물을 통한 교육, 긍정감화교육 등② 이론교육과 실천교육, 교육과 생산노동의 결합a. 혁명전적지 및 혁명사적지의 답사와 생산노동에 참여하도록 독려③ 조직생활과 사회정치활동의 강화a. 학생들을 정치사상적으로 단련하고 혁명적으로 교양하는데 목적b. 학생소년단, 청년동맹조직에 가입 후 녹화근위대 활동, 사회주의건설지원 운동에 참여④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의 결합a. 다양한 소조활동을 통해 이루어짐⑤ 학교전 교육, 학교교육, 성인교육의 병진a. 각각의 수준에 맞게 평생교육을 받을 수 있는 교육체계를 운영하고 있다고 주장⑥ 노력a. IT 교육의 일환으로 컴퓨터 등을 이용한 현장실습교육을 강화b. 새로운 교수방법을 비판의 대 상이었던 카프계열의 작가들까지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② 이러한 문예정책의 변화는 북한정치 상황의 변화와 외부문화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분석됨(2) 문예정책의 기본원칙1) 북한에서의 문학 ? 예술은 김일성부자체제와 당 정책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목적 문화’ 또는 ‘우상화 문화’라고 할 수 있음2) 문예정책은 어느 특정 영역에 국한하여 적용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와 결합하여 보조수 단으로 사용되며 모든 문학 ? 예술 영역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인간개조 라는 정치적 목적 아래 통일된 이념문화의 특성을 갖음-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북한에서는 당성과 노동계급성, 그리고 인민성을 예술이 추구해야 할 본질로 간주3) 당성과 노동계급성, 그리고 인민성은 원래 마르크스-레닌의 문예관에서 시작된 기본적 예술정신이었지만 주체사상 등장 이후부터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주체문예이론’으 로 대체하는 한편 그 내용 또한 변형하여 북한 문예정책의 기본으로 삼고 있음① 당성이란 것은 당에 대한 끝없는 충성을 의미하므로 문학과 예술은 당의 노선과 결정 을 관철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② 노동계급은 어느 계층보다도 혁명성이 강한 계층이므로 노동계급성의 본질적인 특성 에 따라 ‘사회주의 ?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에 복무하 여 인민대중을 공산주의 세계관으로 무장시키며 온 사회를 혁명화 ? 로동계급화’ 하 기 위한 예술이어야 함③ 인민성이란, 예술은 인민대중에게 맞도록 대중화되어야 하며 ‘인민들을 혁명사상으로 철저히 무장시켜 그들의 역할을 높이며 혁명과 건설을 힘차게 떠밀고 나가도록’ 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4) 결국 북한의 문학?예술이란 것은 오직 김일성의 주체사상만을 유일하게 옳은 것으 로 인정하므로 당이 제시하는 정책과 지도에 의해서만이 만들어지고 공연되어지는 등 철저하게 체제에 종속된 예술이라 할 수 있음(3) 문예이론1) 주체문예이론①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바탕을 둔 문예이론으로 구조적으로도 불가능4) 각 공장과 기업소 및 협동단체 등에는 아마추어 작가와 예술인의 모임인 문예소조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있음- 이러한 문예소조는 문예총과 별개의 군중문화단체로 활동하지만 이들의 창작품은 각 동맹의 전문기관지를 통해 발표될 경우도 있음2. 분야별 실태(1) 문학1) 항일혁명문학① 북한에서 해방이후의 문학은 ‘카프’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문학을 추구하던 소위 ‘카프 문학’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음- 서울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이들은 해방 후부터 단체로 월북하여 북한의 문단을 주도 하기 시작하며 ‘북조선 문학예술총동맹’을 발족② 초기 북한의 문학은 전체 북한문단의 70%를 차지하는 월북문인들의 영향력으로 인 해 전통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충실하면서도 부분적으로는 민족문학에도 치중을 하 였음③ 1947년 3월, 당 중앙위원회의 ‘북조선에 있어서의 민주주의 민족문화 건설에 관하여’ 라는 지시가 있은 후부터는 모든 문학예술이 당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놓여지기 시작 하였고 주로 건국사상을 선동하는 운동에 동원되게 되었다.④ 한국전쟁 후 김일성은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착수하여 정치와 군사는 물론 문학과 예 술에 관계된 많은 인사들이 숙청되었음- 특히 남로당의 숙청과 연계되어 ‘북조선 문학예술총동맹’이 해체되고, 이를 대신하여 1961년에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 창립- 당의 지도 하에 놓여진 문예총이 북한의 문학예술을 주도⑤ 그러나 1963년에 문예총의 위원장이었던 한설야가 숙청⑥ 1967년에는 반종파투쟁)을 거치면서 ‘항일혁명문학’이 북한 문학예술계의 확고한 위 치를 차지함- 이는 기본적으로 김일성의 유일체계에 대한 지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 ‘항일혁명문학’의 주된 내용은 김일성의 항일유격대 시절을 창작하였거나 공연한 작 품, 그리고 유격대 활동을 포함2) 주체문학① 1970년대에는 항일혁명문학과 함께 주체사상의 원칙 하에서 모든 문예정책이 강화되 는 이른바 ‘주체문예이론’이 등장하면서 북한의 문학예술이 새로운 그리고 뚜렷한 성 격을 띠고 나타나게 됨- 이
Ⅰ. 명말청초의 사상과 학문명 말에 과거준비생을 중심으로 학문과 문장을 학습하는 단체인 문사(文社)가 있었는데 이 단체는 개혁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명 말에 환관의 부패를 척결하고 유교적 이상을 고양할 수 있는 개혁방안에 고심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청조가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이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된 도덕적 원인규명과 이민족 왕조인 청조에 충성하여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 문제로 갈등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 대부분은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청조의 관계에 진출하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청조는 신유학(新儒學))을 관학(官學)으로 받아들였다. 신유학은 지주와 전호 사이의 엄격한 상하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규범과 상호관계를 중시하는 학문체계였다.강희제는 신유학의 이 같은 이론이 백성을 통치하고 사회적인 통합과 안정을 유지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에 관학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청 초기의 지식인은 공리공론에 치우친 신유학을 비판하고 경세치용을 통해 실제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학문과 민족주의적 정치관을 발전시켰다.명 말 이후 실추된 주자학이나 양명학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학파가 성립되지 않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청 초 지식인은 사상적 이론을 정립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역할을 수행하는 학문으로서 ‘경세치용’의 학을 제창했다.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왕부지(王夫之)와 같은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는 지나간 일을 기록함으로써 이후의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어지러운 사회현실을 바로잡기 위하여 잘못된 현실을 비판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명말 황제들의 전제와 부패에 대하여 비판하였고, 청조의 독재에 대해서도 문필을 통하여 대항했다. 그러나 명청 교체기에는 그와 같은 비판이나 대항이 가능했지만 이후 사상통제가 강화되고 문자옥(文字獄)을 통한 탄압이 계속되자 자신의 안전만을 위하여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세의 학문을 한다고 해도 스스로 관계에 진출하지 않아 당장 현실에 적용할 수 없었을 뿐서부터 2천년 가까이 유학은 중국 지배사상의 근간을 이루어왔다. 그 사이에 고전이 성립하고 많은 해설이 생겼으며, 유학 자신도 성장하여 파벌을 낳고, 이슬람과 불교에 필적하는 문화권을 형성했지만, 유학은 지배자의 종교이지 민중의 종교는 되지 못했다. 따라서 교학의 색채가 강해졌고, 고전의 해석에 전(傳), 의(義), 주(注), 해(解), 소(疏)라는 주렁주렁 달린 주석을 달아 비대해졌지만, 내용은 ‘가족 도덕을 추진하여 사회윤리를 만들려는 것’ 이었다. 이것이 국가 도덕을 확립하고 지배윤리를 완성한 것은 송학(宋學)이고, 주자학에 이르러 전제지배에 어울리는 이론이 성립하여 국학이었던 유학은 또 관학으로 대성했다. 원래 유학에는 지배의 규제, 인간 해방의 근거도 포함되어 있지만 여기서 국가학(國家學) ? 제왕학(帝王學)의 체제로 되었다.청대에도 물론 국가체제를 주도한 사상은 주자학이었다. 청대에 고증학이 일어났지만 기본선은 변하지 않았다. 주희의『사서집주(四書集註)』는 과거준비를 위한 교재였으며 사대부 또한 주자학의 실천윤리를 존중하고 있었고 관료체제의 골격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만큼 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3. 고증학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던 고증학(考證學)은 18세기 초부터 점차 학계의 주류를 이루기 시작하여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까지 그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고증학은 경학 ? 사학 ? 지리학 ? 천문학 ? 역학 ? 음운학) ? 금석학) 등의 분야에서 활발히 연구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와 같은 고증학의 전성은 사상의 빈곤을 수반하였다. 왜냐하면 고증학이 특정한 사상을 동반하지 않고 단지 사물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의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증학은 청 말기 공양학(公羊學)이 등장할때까지 청대 사상의 정통학파로서 그 명맥을 이어나갔다.고증학파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증거제일주의로 그 연구범위가 축소되었다. 증거 없는 추측만으로 판단하는 것을 피하고 하나의 증거만이 아니라 많은 증거를 나열하여 비교 연구하였다. 또한 오래된 증虛)에서 찾지 말고 실(實)에서 찾아야 하며 포폄(褒貶))을 논하는 것은 모두 허문(虛文)일 따름이다. 역사가는 사실을 기록하고, 그것을 읽는 사람은 그곳에서 진실을 얻고자 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실사(實事)에서 구시(求是)를 하자는 것이며, 사실의 고증없이 포폄을 논의하는 것을 헛된 것이라고 보았다. 또 역사적인 사실을 교감(校勘)하고 고제(古制)를 고증하여 밝힘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이해하고자 했다.2) 조익조익은 그의 저서『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記)』에서 이십사부정사(二十四部正史))에 대하여 광범위한 시각으로 구체적인 사례, 편찬방법상의 장단점, 사료의 출처와 진위여부, 각 왕조의 역사에서 서로 다른 점과 모순되는 점을 고증했고, 누락된 부분과 증보된 부분도 지적하였다. 또 후대 사람들이 이십사부정사를 연구할 때 참고가 되도록 고정(考訂)과 논술(論述)을 첨부하였다. 이 부분에서 조익은 단순히 사서와 사실의 고증에만 국한하지 않고 연사적 사건과 인물을 평가할 때는 분명한 자신의 의견을 첨부하였다.3) 전대흔학물을 연구할 때 고증을 중시했으며 자주 학술을 논하는 형식을 빌려 난신적자(亂臣賊子))에 의해 피살된 군주는 모두 우매하고 무도한 군주라면서 전제주의에 대해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의 저술『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考異)』는 훈고가 철저히 이루어진 역사서이다. 그는 이미 출판된『이십이사(二十二史)』)에 대한 여러 판본을 분석하고 그밖에 역사 ? 문물 ? 제도 ? 지리 ? 연혁 등 중요한 자료들을 참고하여 자세히 문자를 교감했고, 잘못된 내용, 빠진 곳, 모순되는 부분,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 등을 가려내고 분석하여 후대의 역사 연구가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5. 공양학청조 말의 학술을 일변시킨 공양학은 청조 초 이래의 고증학 연구, 대문화사업의 추진 등을 배경으로 강남의 상주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 먼저 공양학의 연구는 건륭시기 강소성 무진출신의 장존여(莊存與)로부터 시작되었다. 장존여는 육경(六經))의 학을 지향했지만, 후에는『춘상황이 계속되자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경세학 역시 이론적 근거가 되는 사상이 전제되어야 했고, 이에 위원은 공양학이 말하는 ‘미언대의’와 ‘삼과구지설’로 그 근거를 삼았다.위원의 경세학은 이와 함께 역사 ? 지리학의 연구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학문은 이조락(李兆洛)의 사지학(史地學)과 유봉록의 고증학에 의거하여 연구 되었던 것이다. 위원은 그의 저서 『고미당전집(古微堂全集)』에서 공양학의 이론에 입각하여 경세학의 근거를 밝히고 있다. 그는 현세를 변국(變局)이라고 규정하고, 공양의 ‘미언대의’에 입각하여 현세를 불변의 도(道)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세(勢)로 나누어 고찰했다. 그리고 요순시대의 정치를 이상적인 세계로 상정하고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것이 바로 치(治)라고 했다. 이 치정(治政)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 바로 그의 학문의 특색이었다.그가 “국가가 부강해야 법이 바로 선다”라고 말한 속에는 기존의 외교인 조공관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국제관계 속의 중국외교를 지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국가의 부강을 이룩하기 위한 방법으로 열강의 산업 ? 군사기술 도입의 필요성을 말했으며, 그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국가 산업정책의 전환 또한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실리실공(實利實功)’을 주장했다. 국가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서 이익을 추구해야한다는 것은 기존의 농본주의에 대항한 획기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공자진의 연구목적은 미래를 예측하는 ‘미언대의’를 밝히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현실에 댛나 정확한 인식이 긴요했다. 이와 같은 관점에 입각하여 그가 제시한 ‘농종(農宗)’ ? ‘평균(平均)’의 제론(諸論)은 현실의 정치?사회를 개혁하는 방책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서역치성의(西域置省義)’를 논하여, 신강성의 개발과 방비를 주장하는 등 새외(塞外)의 경영에도 관심을 보였다.안휘성 경현출신의 포세신(包世臣)은 공자진 ? 위원과 나란히 언급되는 경세학자이지만 그의 사상적 근거는 맹자 ? 순자의 학문이었상학, 기계학, 약학, 해부학, 논리학 및 유럽의 정치와 교육에 관한 논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서광계(徐光啓; 그리스도 교명은 서 바오로)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1632년에 내각 대학사가 된 그는 선교사들에게 고급 관료계에 출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런 선교사들은 밑에서 살펴볼 여러 분야에서 중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서양의 종교보다 서양의 기술이 더 쉽게 중국에 받아들여진 것이다.2. 화약과 화포중국화기의 역사는 세계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아라비아나 유럽보다 앞서있다. 그리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화약 또한 중국에서 발견되었다. 화기는 원대에 현저한 발달을 보인다. 지순3년(1332)에 총 뒷부분에 화안(火眼)이 있으며, 총구는 약간 넓어져서 돌 산탄을 방출하는 동화총(銅火銃)이 출현했다. 이것은 세계최고의 화기라고 평가되고 있다. 지정연간(1264~94)에는 돌덩어리를 발사하는 것으로서, 대포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동장군(銅將軍)’, 즉 화포가 사용되었다. 명대 홍무 10년이 되면 전체길이 100cm, 구경 21cm의 대형 철제화포가 출현한다. 그 뒤 명대에는 구리제 화포나 소총이 다수 제조되었지만, 결국 이후에 서방에서 도래한 화기에 의해 압도되고 말았다.화약과 화기의 서방전파는 2단계에 걸쳐 이루어졌다. 화약은 남송시대 때인 1225년 이후 바닷길을 통해 이슬람권으로 유입되었고, 이어 화기가 1258년 이후 몽골 지배영역권을 통하여 서방에 전해졌다. 그러나 유럽 여러나라가 화약사용법을 알게 된 것은 오히려 이슬람을 통해서였다. 이슬람세계에서 라틴세계로 그 제조법이 전해졌다기 보다는, 제 8차 십자군원정(1290) 이후 군사충돌 가운데서 이슬람세력이 각종 화기를 사용하는 것을 본 이후의 일일 것이다.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유럽에서는 대포 및 소총의 발달이 비약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유렵의 여러 세력이 중국과 접촉하면서 중국에 화기, 특히 대포가 역수입되기 시작했다. 대포의 전래와 중국 대포제조에 큰 역할을 담당책이다.
『동양근대사』《명청시대 사회경제사》I.세역제도1.세역제도의 문제전근대 시대에는 지금의 농업세에 해당하는 전부(田賦)와 의무노동의 전신이라 할 요역은 실로 국가를 지탱하는 재정의 양대 지주라 할 만한 것이었다. 명청시대에도 세역제를 운용함에 있어서 관리들과 토호세력의 유착 및 그로 인한 농민의 과중한 부담이 항상 문제가 되어 이에 대한 논의는 당시에도 많았고 갖가지 의견이 나왔으나 그 초점은 대체로 제도의 내용을 고치는 데 모아졌다.1)세수 원액의 준수명의 전부는 당대 후기 이래의 양세법(兩稅法)을 이어받아 하세(夏稅)와 추량(秋糧)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세량(稅糧)으로도 불렸는데 그 세액은 토지의 생산성이나 소유권 등 각종 성질에 따라 정해졌다. 납부하는 것은 현물 위주로 쌀과 밀 등의 곡물이 가장 근간이 되는 물건이었으며 본색(本色)이라고 불렸고, 다른 물건이나 화폐로 납부하는 경우 그 대체물을 절색(折色)이라 불렀다. 현물 위주로 된 이유는 원말에 주된 화폐였던 지폐는 이미 남발된 상태여서 그 지폐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상태였고 또한 전한이 심해진 뒤로는 화폐경제 자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이는 왕조를 세운 뒤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중앙과 지방의 정부나 변방이든 현물을 직접 공급하는 체계를 마련했다.또 농업 방면으로부터 재정의 근간이 되는 세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토지생산성과 같은 토지 자체의 제반 정보 및 소유주 등의 파악이 전제되어야 한다. 주원장은 그래서 홍무 14년(1381)과 홍무 20년대에 부역황책(賦役黃冊)과 어린도책(魚鱗圖冊)을 각각 완성시켜 탈루되었던 많은 토지들을 과세대상에 집어넣는데 성공했다. 주원장 정책의 지형점 중의 하나가 농민생활의 안정으로 이를 위해 자작농의 육성과 농민의 세 부담을 줄이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명초의 그 평균적인 세율은 매우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낮은 세율의 전부액수를 후대에도 계속 유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었다. 명의 황제들은 주원장같은 검소한 생활이 아닌 사치체포를 포함하여 재판에 연루된 자들을 관아에 호송하는 일이었다. 이장과 갑수는 이 두가지 일 외에 황책의 작성과 이갑 주민의 동향파악도 했는데 후자는 이갑역만이 한 것은 아니고 기타 직역(職役)과의 협조를 통해 수행되었다.하지만 후대로 가면서 이갑이 부담해야 할 역의 내용이 늘기 시작하였다. 상공물료와 지방정부의 운영경비인 공비(公費)가 모두 이갑의 부담으로 되었다. 또 일반 민호(民戶)가 짊어져야 할 또 한 종류의 역으로 잡역(雜役))이 있었다. 이 부담도 해가 갈수록 만만치 않은 것이 되었다. 이것들은 거의 다 지방정부가 담당해야 할 업무로 이것을 경비를 안들이고 요역으로 해결했다.잡역은 관청에 필요에 따라 수시로 부과되었고 그 인원이나 기한에 관한 규정이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잡역은 신사(紳士)의 호는 면제시키고 일반 민호에게 부과하는데 부담이 무거운 역은 세량을 많이 내는 호에게, 가벼운 것은 적게 내는 호에게 할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 분류작업은 황책 작성의무를 진 이장의 일이므로 지역의 부유한 호들이 이장에게 손을 써서 등급을 낮추거나 아예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그 부담은 가난한 호에게 전가된다. 이 같은 폐해는 15세기 전반의 선덕 ? 정통 연간에 이르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그 불공평함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제도개혁을 하게 되었다.2.제도개혁의 추이15세기 전반 경 이갑제는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자작농들이 전호(佃戶)가 되거나 다른 곳으로 도망가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런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농촌사회에서 빈부격차가 확대되는 등 호구의 변동상황은 컸는데 부역황책에는 그 실상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서 과세대상이 되는 토지는 감소한 반면 정부의 지출은 증가해 소농민에게 부과되는 세역이 갈수록 과중해진 상황이 주된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15세기 전반에 전국적으로 더 큰 문제였던 것은 바로 요역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잡역이 가장 심각하였다.1)균요법과 은차 ? 역차잡역의 문제는 그 부담의 과은 문은과 함께 각 호의 부담액을 계산하는 수단일 뿐이고 역차는 역차대로 운용을 하고 있었다. 화북지방의 역차와 상술한 역전 등의 역도 역시 일조편법의 단계에 가서야 모두 은납화된다.화북의 문은 ? 정은의 특징은 역은을 매년 납부한다는 것과 그 부과기준이 호등에 있다는 점이었다. 전자의 원인은 화북의 현의 규모가 작다는데 있었고, 호등을 중시하게 된 이유는 화북의 토지생산성이 낮아 농민의 부담능력이 그만큼 떨어지는 상황에서 토지 쪽에다 요역까지 부과하면 부담이 너무 커진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지만, 그 근저에는 원대에 화북지역이 화중 ? 화남과 달리 양세법이 시행되지 않고 호에 과차(科差)가 부과되던 전통도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호등 산정의 방법에도 공정성 여부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균요책의 제작이 황책과는 다르게 관부에서 맡았는데 신사같이 우면특권이 있는 호들은 제외되었으며, 부유한 호들은 관부의 서리와 결탁하여 자신의 호등을 낮추어 역에서 빠지거나 가벼운 역을 담당하는 일이 많았다. 더욱이 호등 자체가 자산을 합산하여 평가하는 것이므로 파악이 쉽지 않은 점도 문제가 되었다. 화북에서도 이제 좀 더 명확하게 공평성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개혁이 모색되었다.3)일조편법화북과 화중 ? 화남에는 각기 진행되어온 여러 갈래의 개혁이 16세기 후반에 이르면 하나로 집약되는데 이것이 일조편법(一條鞭法)이다. 일조편법은 세량과 요역의 복잡다기한 항목을 각기 하나씩 묶어서 모두 은으로 납부하게 한 것이다. 요역에 관해서 부과기준으로 호등이 아니라 십단법의 정과 토지를 취했고 매년 부담하도록 했다. 또 요역을 하나로 통합하여 은납을 하게 했는데 역전과 민장관련 요역도 대부분 은납화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세령징수과 구섭공사등의 역은 포함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세량의 경우는 우선 그 세목이 많고 토지세율이 너무 다양해서 문제였다. 은납화가 진행된 다음에도 세율부분은 마찬가지였으며 은납의 비율도 이에 따라 서로 달랐다. 각 전지별로 세율 ? 징수 물품이 달랐점 많아지게 되었는데 강희52년(1713)년에 정은의 액수를 고정시켰으며, 이제 남은 일은 정은을 완전히 토지에 부과하는 조치뿐이었다. 이 제도는 강희 말기부터 시작하여 옹정연간(1723~1735)에 대략 실현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지정은제(地丁銀制)이다. 인두세적인 요소가 강했던 정은은 마침내 완전히 지은의 부가세로 바뀌어 소멸되었다. 이제 세량의 주된 부분을 차지하게 된 지정은을 간단히 지정이라고 불렀고, 현물 납부로 남아 있던 조량과 합쳐 전량(錢糧)이라는 명칭이 세량 대신 많이 쓰이게 되었다.지정은제가 성립되자 이제까지 이갑의 요역 문제 때문에 여러 가지로 강구되었던 징수관련 제도들이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되었다. 이런 문제에 대처하게 위해 징세과정을 간소화하고 향촌을 재편하는 새로운 제도로 나온 것이 순장편리(順莊編里)이다. 순장편리 역시 옹정연간에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시행된다.하지만 전량 부문에서는 공평성과 투명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자봉투궤가 실시되는 곳에서는 유력한 호가 여러 집의 세금을 대납해주었는데 이것을 전량의 포람(包攬)이라고 하였는데 일종의 청부제적인 성격을 띠었다. 관부 역시 본인이 직접 납부하는지 여부보다는 주로 체납 여부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포람에서 수입을 얻는 자들이 중간에서 착복하는 전량은 종종 농민의 체납분으로 둔갑하여 국고에 구멍을 냈다. 포람 외에도 전량의 정해진 액수에 덧붙여 추가로 징수하는 은량의 가모나 다른 명목으로 가두어 들이는 부가세가 많아지면서 전량징수는 공평성이나 투명성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3.세역제도 개선의 결과명초 이래 세역제도의 문제 중 세량 원액의 준수는 구조적 원인으로서 문제가 되었다. 두 번째로 세량부담의 지역적 편중은 강남지방에서 특히 문제가 되었지만 이것은 청대에 들어오면서 어느 정도는 완화되었다. 세 번째 요역부담의 불균형이야 말로 가장 시급히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부분이었다.요역개혁은 결국 요역의 법제적인 소멸로 수렴되었는데 거기에 이르는 흐름을 네 단계로 보면 첫째는 요역의 은납법이 실시되었다. 넷째로 당 말기에는 쟁기의 성능이 개선되어 소 한 마리만으로도 땅을 갈 수 있어 노동력이 절감되었다. 여기에 땅을 고르는 써레도 발달하는 등 벼농사 방법이 완성단계에 이르러서 중국농업의 중심축도 완전히 강남으로 이동했다.명청시대에도 송대까지의 변화양상을 계승하면서도 몇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먼저 강남 삼각주 지역의 개발이 고도화되고 상업화와 수공업화가 진척되는 한편, 양자강 중류지역이 개발되면서 농업 중심지역이 다원화 되었다. 이에 따라 이전보다 경지면적이 4배 정도 증가하고 식량생산이 증대되면서 인구도 급증했다. 둘째로 집약농업(集約農業)이 심화되었으며, 신대륙 작물 등 새로운 작물이 전래되어 전통적인 ‘화북의 밀, 강남의 벼’라는 작물생산의 공간적 구조가 변화하고 경작공간도 크게 확대되었다. 넷째로 강남 삼각주 지역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환금작물의 생산이 확대되었다.명청시대의 농업기술이 어느 정도 진보했으며, 명청시대의 농업기술 수준으로 어떻게 18세기 이래 폭발적으로 증가한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는가라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평가에서 크게 두 가지 상반되는 평가가 있는데, 하나는 주로 서양학자의 평으로 명청시대의 농업이 질적인 변화없이 양적인 성장만 했으며, 중국농업의 질적인 변화는 서양의 근대과학기술의 도입으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다른 한쪽으로는 중국과 일본 학자들의 평으로 이때에 고도의 집약농업이 진전되었을 뿐 아니라 상당한 정도의 질적인 발전과 사회구조의 변화가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는 농업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명청시대사의 성격과 맞물리는 문제로, 다양한 연구가 필요하다.2.상업화의 진전과 농업 기술의 발달1)전문농서의 증가와 상품작물농서는 한 시대의 농업기술 수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명청시대 이전까지 중국에서 나온 농서는 양도 적을뿐 아니라 절대다수가 종합농서였다. 이에 비해 명청시대에는 농서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진다. 이는 시기적 근접성을 고려하더라도 매우 많은 양에다.
역사란 무엇인가Ⅰ. 서론Ⅱ. 본론1. 제1장 - 역사와 사실2. 제2장 - 사회와 개인3. 제3장 - 역사와 과학과 도덕4. 제4장 - 역사에서의 인과관계5. 제5장 - 진보로서의 역사6. 제6장 - 넓어지는 지평선Ⅲ. 결론Ⅰ. 서론역사는 세상을 뒤집어 놓는 큰 사건부터 일상의 세세한 일까지, 과거에 있었던 일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역사에 대해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 책은 60세가 넘은 나이에 역사가가 되었던 E.H.Carr의 강의론이다. 그는 외교관으로 꽤 오랜 세월을 지냈고 대학에서는 정치학을 강의하다가 뒤늦은 나이에 모교인 케임브리지 대학에서의 강의로 역사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쓴 이 책은 정석적인 역사가들의 틀에 박힌 담론을 넘어서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는 역사학만을 공부했던 다른 학자들에 비해 개방적이고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차별화된 독특한 역사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독특한 역사학자였던 E.H.Carr의 저서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역사학의 기본 입문서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지금 나의 앞에도 놓여 있다.Ⅱ. 본론1. 제1장 - 역사와 사실E.H.Carr는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서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관계를 규명했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그 사실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해석에 따라 재구성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역사가는 그가 사는 시대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므로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기준은 현재에 있다. 따라서 역사란 ‘현재의 역사가와 과거 사실의 끊임없는 대화’ 인 것이다.2. 제2장 - 사회와 개인E.H.Carr는 역사란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개인의 의도를 초월한 힘을 가지는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고 한다. 역사가는 개인인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과의 상호작용이라는 상호과정은 추상적인 고립된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지난날의 사회와의 대화인 것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쳐졌을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현재도 과거의 조명 속에서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 사회를 이해시키고 현재 사회에 대한 그의 지배를 증진시킨다는 것이 역사의 이중적 기능이라는 것이다.3. 제3장 - 역사와 과학과 도덕과학의 급속한 발전의 원동력은 사고하는 방식의 발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불변의 객관적 법칙을 추구하지 않고 유효한 작업가설의 형성을 추구하는 점에서 과학이나 역사학이나 동일하다고 E.H.Carr는 생각한다. 또한, E.H.Carr는 역사는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므로 도덕과는 확연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진술하고 있다.4. 제4장 - 역사에서의 인과관계역사란 역사적 의미라는 관점에서 본 선택과정이다. 현실에 대한 인식적 태도에서 뿐 아니라 인과적 태도에 있어서의 선택적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원인과 결과의 연쇄가 우연적인 것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는 것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연쇄 자체가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5. 제5장 - 진보로서의 역사역사가 진보를 하는데 그 방향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것은 과거와 현재의 역사연구만큼 중요하다. 진보는 여러 세대의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자기 가능성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진보란 처음과 끝에 구애됨이 없는 하나의 과정이다. 미래에 대한 긴 안목을 가진 역사가들만이 참다운 의미의 객관성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6. 제6장 - 넓어지는 지평선20세기 중엽은 15, 16세기 중세 세계가 무너지고 근대 세계의 기초가 형성된 이후로 가장 심각하고 가장 광범하다고 할 수 있는 변화의 과정에 놓여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 영국을 비롯한 영어 사용권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발전의 가능성, 미래에 대한 적극적 신념을 가져야 한다. E.H.Carr는 이러한 입장을 얘기하며 스스로를 ‘낙관주의자’라고 말한다.Ⅲ. 결론역사는 역사가의 해석이고,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는 변화며, 따라서 이런 변화는 우리들의 가치와 관점의 변화에 따라 언제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며 해석되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E.H.Carr는 이 책을 통해 역사적 사실, 역사에서의 개인과 사회, 역사의 과학성, 역사에서의 인과 관계, 역사에서의 진보문제 등 역사의 근본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종래의 역사철학 관계 저서처럼 난잡한 이론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지 않고, 저자 자신의 깊고 넓은 역사 연구의 체험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예를 통해 역사의 문제점을 밝히고 자신의 명료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책의 제목만 보면 이 책은 역사의 정의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을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역사를 보는 시각, 즉 ‘어떻게 역사를 볼 것인가?’ 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저자 E.H.Carr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시된 역사 기술의 여러 관점을 비교했고 역사를 기술하는 역사가의 입장 그리고 사회과학 분야 및 철학과 융화된 역사를 언급하며 역사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다.
북위(北緯)의 화북통일과 호한체제(胡漢體制)1.북위의 화북통일과 군사지배전진(前秦)은 비수전투)에서 강남의 동진(東晋)에게 패하여(383) 붕괴되고 선비족의 북위(北魏)[後魏]가 화북을 재통일하였다(439). 이후 북위는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되고(534), 다시 동위는 북제(北齊)로, 그리고 서위는 북주(北周)로 계승되어 나갔다. 수가 중국을 재통일하기까지 150년간(439~589) 화북에 건국한 북위 이하의 이들 5개 왕조를 북조(北朝)라고 한다.1) 부족연합에서 부족해산으로북위가 5호(胡) 여러 국가와 현저하게 다른 점의 하나는 그 건국 당초에 유목민 여러 부락에 대하여 해산을 단행한 것이다. 이것에 의해 북위는 5호 여러 국가의 중추인 동시에 그 한계이기도 하였던 부족제도를 뛰어넘어 더욱 개방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1) 탁발(拓跋)국가의 등장탁발국가가 역사상에 등장한 것은 시조 신원(神元)황제로 추증된 역미(力微) 때부터이다.) 역미가 탁발국가의 시조로 알려진 까닭은 그가 탁발부를 중핵으로 하는 부족연합국가의 기초를 다졌기 때문인데, 그는 치세 39년에 성락(盛樂))에 본거지를 정하고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다. 이 의식은 탁발부를 중핵으로 하는 부족연합국가의 건국제(建國祭)를 의미했다. 역미는 이 때 대인(大人))들을 향해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맺는, 곧 종래의 초략(抄略)방식을 버리고 화친방식을 취한다고 선언하였다.)(2) 제국형성 이전 탁발국가역미의 손자 의로(?盧) 시기에는 새북(塞北))을 통일하고 산서 북부의 수백 리를 손에 넣었으며, 성락?평성(平城) 등에 성을 쌓았다. 이리하여 탁발국가는 중원의 지배자로서 제1보를 내디뎠으며 이 시기에 다수의 한인을 정권 안에 끌어들여 정치?군사 양면에서 활약하게 하였다.)다음으로 십익건(什翼?) 시기에는 관료제가 정비되었다. 십익건 또한 한인사대부에게 정책을 맡겼으나 대인의 자제 다수를 근시(近侍)직책에 충당했다. 의로의 실패를 거울삼아 왕권과 부족세력과의 조화를 꾀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이처럼에서 찾을 수 있다. 사민정책의 목적은 적대적인 세력의 분쇄 및 그것이 내포하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여러 힘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데에 있었다. 따라서 사민의 대상이 된 것은 적대세력 가운데 가장 적성(敵性)이 강한 부분이고 적대세력 전체를 뿌리 채 옮긴 것은 아니다. 사민이 실행된 뒤에는 군대나 행정기관을 두고 현지를 통치하였다.이렇듯 5호 가운데서도 선비족이 화북지방을 통일할 수 있었던 배경은 유목사회의 부족제를 과감히 탈피하고 국민개병주의(國民皆兵主義))라고 할 수 있는 부병제(府兵制))를 실시하여 군사력을 강화한 점과, 아울러 정복지의 중국문화에 빨리 적응함으로써 한인의 협력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이와 같은 북위정권의 호한병립(胡漢倂立) 정책으로 중국문화를 적극 수용할 수는 있었으나, 문화수준이 낮은 선비족으로서는 문화적 우월성을 지니고 있는 한인을 통치하는 일이 용이하지 않고 여기에서 일어나는 민족적 갈등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북위가 무력으로 화북을 정복하였으면서도 결국에는 중국문화에 동화될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부락해산의 시기적 문제부락해산이 언제, 어떻게 실행되었는가에 대하여 사서(史書)는 그다지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또『위서(魏書)』「관씨지(官氏志)」에는 그 실시를 386년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해는 탁발규(拓跋珪)가 하란부(賀蘭部)의 후원을 얻어 대왕(大王)에 즉위한 해이다. 따라서 초창기인 이 시기에 이러한 대담한 조치가 취해졌다고는 믿기 어렵다. 많은 논자들의 설명처럼 강적 후연(後燕)을 중원에서 구축하고제국을 창건하기에 이른 396~398년경으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부락해산의 내용여러 부락을 일정한 지구에 정주시키고 유목적 이동을 허락하지 않으며, 부락민은 국가의 직접지배를 받고, 종래의 군장대인(君長大人)은 부락통솔권이 박탈되었다. 다만, 돌궐 종족인 고차족(高車族)만은 민도(民度)가 낮고 국가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특별히 부락제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허락되었다.는데 노력하여 이른바 문벌귀족층의 흡수를 꾀했는데 북위도 다른 왕조처럼 항복한 사람들을 수용하여 등용하였다. 도무제는 치안의 공작과 병행하여 중국의 문벌가문을 회유하는 대책으로서 중정제를 채택하였는데 이는 중국에서 후세에 관리를 학술시험으로 채용하는 과거(科擧)제도와 대조적인 명망(名望)추천제도였다.당시 포상 ? 봉작(封爵) 등은 모두 상서성의 이부(吏部)가 장악했으나 일반관리의 임용에서는 모든 주(州) ? 군(郡)의 중정이 알리는 그 주 ? 군 내의 인물가계를 품질(品秩)한 장부에 근거하여 이부가 이를 결정하였다. 중정은 관리가 아니고 일종의 명예직으로서 인망과 재능이 있고 공평무사하다는 평판을 받고 있는 인물을 정부가 선임했다. 대개 주의 대중정(大中正)으로 공경대신(公卿大臣)이 천거한 사람과, 군의 중정으로 군수와 대중정이 추천한 사람을 사도(司徒)에서 사정한 후 이부에 회부하여 이를 결정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주 ? 군의 중정이 올리는 장부에 근거하여 백성으로부터 관리를 등용하는 중정제도의 일반적 이해는 첫째로, 관직을 바라는 사람들의 행동을 삼가 국내의 풍교(風敎)가 크게 진보했다. 또한 관리임용에 관한 정부의 사무가 간소하게 되는 등의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중정에 합당한 인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고, 인물과 재능을 문자로 기록하여 나타내는 것이 어려웠으며 중정 그 자체가 대부분 문벌귀족 출신이므로 사사로운 관계에 좌우되는 등의 폐해가 있었다.또한 관제와 관련하여 살펴야할 것은 형살(刑殺)이 엄격한 것이다. 이는 북위의 중국통치에서 보이는 최대의 특징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위에서 보았듯이 중정제도에 의해 중국의 문벌을 회유하는데 노력했으나 북위정권의 성립을 방해하는 행동을 벌이는 사람에 대해서는 최고의 명족 또는 문벌이라 해도 3족 또는 5족을 연대로 주살하는 등 형살을 엄격하게 했다. 북위의 엄형(嚴刑)주의는 뇌물의 수수를 금지한 데서 분명하게 보이고 있다. 즉 태무제(太武帝)는 말 3필을 뇌물로 받은 자를 모두 처형하고 문성제(文成帝)는 더알 수 없지만, 후대의 몽골족이나 청조 초기의 만주족과 같은 씨족제도가 행해져 다수의 씨족장이 그의 부족민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북위왕실이었기 때문에, 천자라 하여도 전국의 인민에 대해서는 족장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북위의 영토가 확대되고, 특히 다수의 중국인을 지배하기에 이르자 북위정부는 점점 중국화하여 중앙집권적인 정부로 바뀌어갔다.북위는 이미 도무제시기에 그때까지의 씨족을 해산하고 부족민을 중앙정부의 통치하에 귀속시키는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곧 실제정치가 원칙대로 운영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것은 종래의 족장이 봉건영주나 관료의 형태로 되어, 여전히 특권계급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한편 씨족제에서 당연히 해방되어야 할 부족민도 결코 곧바로 개인으로 환원되어 북위정부하의 한 시민으로 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오히려 씨족제도 하부는 이전대로의 단결을 보존하여 수십 가족이 1호(戶)로서 생활단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 정부로서 가장 곤란한 것은 조세와 요역을 부과하려 할 때, 1호의 부담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연히 개혁이 행해지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문명태후의 섭정중)에 행해진 삼장제는 이 같은 씨족적 단결을 파괴하고, 인민을 소가족으로 환원할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삼장제의 내용으로는 인민의 5가(家)를 1린(隣)으로 하여 인장(隣長)을 두고, 5린을 1리(里)로 하여 이장(里長)을 두고, 5리를 1당(黨)으로 하여 당장(黨長)을 둔다. 인장 ? 이장 ? 당장을 3장(長)또는 3정(正)이라 칭하고, 요역면제 등 특권을 부여함과 동시에 각자 그의 담당구역의 호구조사와 세역(稅役)의 징수책임을 부과시켰다. 삼장제의 오진법(五進法)이 유목민족의 병제에 공통된 십진법과 다른 것은 특히 전통적인 구분법과 다른 체제를 의식적으로 창조하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4) 균전법(均田法)북위왕실의 씨족적 공동체 해체의 노력인간을 통하여 생산을 지배하였다. 때문에 정부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호적이었다. 그것이 후대가 되면, 호적보다도 필요한 것은 지적(地籍)으로 어린도책(魚鱗圖冊)같은 것이 관공서의 제일 중요한 대장(臺帳)이 되었다.3. 효문제(孝文帝)의 한화(漢化)정책1) 낙양천도(洛陽遷都)북위의 수도 평성(平城)은 산서성의 북단에 위치하여 문화와 무관한 황야 가운데에 있었다. 따라서 인구와 물자, 그리고 문화가 황하하류의 평야지대에 집중되는 상황에서 평성은 수도로서 적합하지 못했다.효문제 스스로도 평성은 용무(用武)의 땅이기는 해도 문치(文治)에 걸맞는 장소는 아니기 때문에 ‘풍속을 바꾸기’ 위해서는 매우 불리하다고 말한다. 효문제의 입장에서 낙양천도는 남조와의 대결이라는 정치적 ? 군사적 과제를 전제로 하였을 뿐 아니라 ‘풍속의 개변’, 곧 호족국가에서 중국적 보편국가로의 전환을 의미하고 있다.)북위왕조가 한화하여 순수한 중국귀족으로서 중국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국문화의 본거지인 낙양으로 진입하여 본고장의 문화를 몸에 익힐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효문제는 낙양으로의 천도를 단행했다.남조를 토?ㄹ한다는 명목하에 대군을 이끌고 출동한 효문제는 낙양에 이르러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낙양을 도읍으로 정한다고 발표했다.(493) 이 성명은 전국에 충격을 주어 보수세력 사이에 반항운동이 야기될 정도였으나 효문제는 대단한 열의로 반대론을 누르고 낙양천도를 실현했다. 중국문화의 중심지로 천도하면서 효문제의 한화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2) 한화정책의 목적서진 이래 5호의 민족이 뒤섞여 중원에서 패권을 다투었는데, 그 정권이 언제나 오래 존속하지 못했던 것은 결국 그 인구가 소수였기 때문이다. 일시의 기세를 몰아 패권을 잡는 것은 가능햇을지라도 곧 약점을 드러냈고, 최후에는 홀연히 붕괴해 버렸다. 북위정권이 비교적 안정됐던 것은 역시 선비족이 타민족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했으며 우월한 무력 때문이었다. 이 무력은 그들이 한족과 다른 북족적인 민족성을 유지하는 동안에만 유했다.
동양근대사『강희제』를 읽고서론강희제는 1661년부터 1722년까지 61년 동안 중국을 지배한 청조의 황제였다. 그는 삼번의 난을 평전하고 중국 정복을 완성시키고 황제의 절대적인 군주독재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 인물이었다. 이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저자인 조너선 스펜스는 독특한 방식으로 들려준다. 『강희제』는 마치 이 황제의 회고록처럼 그가 직접 들려주는 형식을 취했다. 저자는 강희제의 내면에 대해 주로 다루고자 했는데, 『.강희제』의 1장부터 5장까지의 이야기가 고별 상유(6장)를 쓰기 전 1시간을 집약적으로 다룬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회고록의 형식을 취했으며 문학적인 표현으로 읽기에 재미도 있었다. 강희제의 내면과 그를 구심점으로 하여 청조의 전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본론1. 사냥과 원정강희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위했던 황제이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여행을 다닌 황제이기도 하다. 그는 천성적으로 사냥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의 통치기간이 워낙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이 많던 시기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친히 활을 들고 광대한 중국 대륙의 영토를 돌아다녀야 했다. 그는 늘 숲으로 뒤덮인 만리장성 바깥의 고지에서 사냥하던 만주인들의 강건한 유풍을 강조하였다.강희제는 사냥을 나갈 때는 자신의 아들들과 시위(侍衛)들, 그리고 많은 숫자의 군대를 동원하여 마치 군사훈련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일년에 두 번 대대적인 사냥에 나섰는데, 병사들에게 봄에는 강을 따라 사냥하면서 배를 다루는 법을 익히도록 하고, 가을에는 야영을 하면서 기마궁술을 익히도록 하였다. 또한 넓은 초지로 나가서 군대사열 훈련을 하며 동물들을 몰아갈 때도 병사들이 행렬에서 이탈하지 않았는가를 유심히 살피도록 하였다.강희제 자신도 궁술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 준다. 그는 사냥을 나갈 때면 반드시 자신이 손수 잡은 동물이 무엇이며, 몇 마리인지 정확히 기록하도록 하였다. 날아가는 기러기를 쏘아 맞추고, 하나의 화살로 두 마리의 산양을제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그는 직접 말을 몰아 군사들을 지휘하였고, 밤이면 야영지를 선택하였으며, 어린 병사들을 상대로 병법을 가르치기도 하고, 담소를 나누기도 하였다. 또한 광활한 대륙을 가로지르는 지루한 원정이다 보니, 무료하고 따분한 병사들을 위해 밤에 직접 술을 따라주기도 하고, 활을 잘 쏘는 병사들을 모아 궁술 경연 대회도 여는 등 치밀한 모습을 보였다.2년에 걸친 원정 끝에, 결국 갈단을 사냥감을 몰아가듯이 하여 막다른 궁지에 몰아넣은 강희제는 마침내 사냥에 성공하게 된다. 강희제는 자신이 계획하고 앞장 선 사냥에서 성공한 것을 크게 기뻐하며 자랑스러워한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자신이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자신의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치밀한 계획이었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한다.2. 다스림강희제에게 있어 ‘다스림[統治]’이란 중국 전체의 경제적?교육적 구조에 대해서 최종적인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또 모든 신하들의 품성을 평가하고 만들어 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사에 관해서도 궁극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하였다.그의 통치이론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삼번(三藩)의 난으로 알려진 8년간에 걸친 큰 내란이었다. 1673년에 일어난 이 난은 만주족이 처음 명나라를 패망시킬 때 도움을 주었던 세 명의 군주들이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그 대가로 청조로부터 중국의 남부와 서부에 이르는 거대한 봉토를 수여받았다. 강희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고관 대신들과 오랜 시간에 걸쳐 숙의한 끝에 삼번을 철폐하고 세 명의 왕들을 만주로 옮겨가도록 하였다. 그러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그 결정이 내려지면 삼번의 왕들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하였고, 그 것은 여지없이 맞아떨어져 청나라 전체를 8년 동안의 전화(戰火) 속으로 치닫게 하였다. 결국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강희제는 심한 자책감에 빠졌다. 자신의 판단 착오로 인해 자신이 마땅히 보호해야할 수 천 명의 백성들이 죽었고, 국가가 심각한 전쟁의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았을 때 누구나 같은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게다가 판례들도 비슷한 것끼리 모아서 편찬하는 작업도 진행하였다. 그리고 강희제는, 2장의 첫 부분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황제는 마음먹으면 누구나 처형할 수 있지만 되살릴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처형에 앞서 죄인의 죄질을 꼼꼼히 살폈으며, 혹시나 누명을 쓰지 않았나 하는 것을 확실하게 규명하였다. 그 이후 죽어 마땅하다고 판단되면 여지없이 참수하거나 혹은 능지처사도 서슴지 않았다.‘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강희제는 통치에 있어 이 말을 강조하고 있다. 자신이 황제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해놓고 그 결과는 천리에 맡긴다는 것이다. 강희제의 통치관념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 주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자오선차오라는 관리가 지나치게 책임감에 빠져있으며, 항상 소송사건을 명쾌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불필요한 자신감에 가득 차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비난이 어쩌면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일까?3. 사고(思考)강희제의 관점에서 볼 때, 성공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개방성과 유연성이 필요했다. 이는 학자적인 엄격함이나 한가로운 사색과는 달랐고, 지배이념인 주자학 연구자에게 요구된 도덕적 고결함에 대한 집착과도 달랐다. 그러나 강희제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 변함없는 경의를 표하였고, 종종 유교경전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강희제는 사물이 무엇으로 만들어 졌으며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탐구하는데 끝없는 즐거움을 느꼈다. 그는 세계 역사상 위대한 왕들이 그래왔듯이 천문학, 지리학, 광학, 의학, 음악, 대수학 등에 관심을 가졌다. 무언가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귀찮더라도 남에게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끝까지 쫓아가서 손수 물어보고 대화를 나누어 궁금증을 풀었다. 강희제가 공자의 묘에 제사를 지내러 갔을 때와, 투르논이 이끄는 교황사절단과 대면했을 때가 그 증거이다.강희제가 제위에 있던 17세기 초부터 18세기 말에는 이미 서양의 선교사들이 대부분의 중국 지방마다 많제의 대답은 확고한 것이었다. 그는 교황의 의도가 중국 내에서 황제라는 전통적 의미의 가치 하락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빗장을 걸어 잠갔다. 자신에게 충성을 서약하지 않는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당할 것이며, 베이징 내에 주재하는 사절 역시 허가되지 않았다. 스스로 개방적이고 유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타 문화가 자신의 입지에 해롭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과감하지 못했던 강희제의 단면을 우리는 볼 수 있다.그는 과거(過去)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 하였다. 그래서 구전된 역사에 더욱 흥미를 느꼈는데, 바로 전 왕조인 명나라의 역사를 쓰는 데에는 가능한 가장 광범위한 자료가 참고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업을 위해 강희제는 명의 황제를 기리며 충성심을 보였고, 만주인을 침략자로 생각했던 이전의 반체제 학자들을 대거 기용하였다.박학홍유(博學泓儒)라는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특별 시험을 실시하여 강희제는 자신이 학문 영역에 있어서 유연할 뿐만 아니라, 임기응변에도 뛰어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유연한 황제에게도 문자옥(文字獄)은 어쩔 수 없는 범죄였던가. 당시의 다이밍스라는 저명한 학자는 명사(明史)를 기록하는데 있어 자유로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반체제적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글을 발표하였다. 강희제는 그 글을 보고는 다이밍스를 처형해버리고 말았다. 그의 사고도 황제라는 틀 안에서는 결국 정략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5. 장수(長壽)강희제의 정치적 책략도 인간의 생사를 초월할 수는 없다. 강희제는 인간의 육신이 언젠가는 쇠약해짐을 인정하고 그것을 대비에 식이요법이나 약 등에 신경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육체적?정신적 연약함에 대해 매우 소탈하게 말하였다. 확실히 그런 태도는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얼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건강이 위협받던 시기에 사람들이 자신을 돕도록 불러 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런 솔직함이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강희제 자신에게도 매우 중을 보였으나 혹시라도 자신이 국정을 돌보는데 게을러지지 않을까 하여 배우지 않았다.‘속을 비우면 통증이 멎는다.’고 하여 황제로서는 드물게 소식하려고 노력한 사람이 바로 강희제이다. 그는 순행 길에서도 각지의 백성들이 갖다 바친 채소와 과일들을 맛보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덜 익은 과일을 가져왔을 경우에는 입대는 시늉만 하고 먹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가장 좋은 맛을 낼 때 먹어야 한다는 것이 강희제의 철칙이었다. 또한 그의 수하 양제장군이 습기와 바닷바람에 고생할 때 하루에 밥 한공기와 고기 1/4근만 먹도록 처방하였는데 효과가 있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강희제는 다이어트의 중요성을 우리보다 훨씬 오래 전에 알았던 것이다.강희제는 또한 병든 자와 노약자를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들은 좀 느리게 움직여야 하고, 한낮의 더위는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희제는 자신을 옆에서 보좌해야할 신하가 노쇠하여 거동이 불편할 경우 자기가 편한 날짜에만 조회에 참석하도록 하였고, 남보다 조금 늦게 조회에 오도록 하여 아침에 미음이라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여기서 강희제의 남다른 이해심을 엿볼 수 있다.그러나 중국대륙을 종횡무진하며 강건했던 강희제도 말년이 다가옴에 따라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다음 장에 서술할 일련의 황태자 사건들을 겪은 후에는 훨씬 더 심해져서 건망증과 현기증, 복통과 발목의 관절염 때문에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이는 너무 긴 시간동안 황제라는 업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생긴 일종의 직업병인 것이다. 그는 일생의 대부분을 제의를 주관하는데 보냈기 때문에 극도의 체력저하가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6. 황자들강희제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 대책으로 강구한 것은 바로 역사 속에 자신의 이름을 빛내는 것과, 자손을 많이 남기는 것이었다. 강희제가 13세가 되던 해부터 64세의 노인이 될 때까지 그는 쉴 새 없이 자신의 씨앗을 뿌려댔는데, 그 결과 30명의 여인으로부터 56명의 자녀를 탄생.
·『주원장전(朱元璋傳)』 서평오함(吳?)은 1965년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 비판의 대상으로 혁명의 불씨를 당겼던 『해서파관』의 저자이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1968년 투옥되어 1969년 옥중에서 죽고 말았는데, 1978년에 명예는 회복이 되었다. 오함의 대표적 저서인 『주원장전』은 1944년 『바리때에서 황권까지』라는 서명으로 출간된 초판본의 네 번째 개정판으로 1964년에 나왔다.『주원장전』은 명(明)을 건국한 인물인 주원장에 대한 전기이다. 한(漢) 고조(高祖) 유방과 같이 주원장은 농민출신으로 일어나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인물이다. 이야기는 주원장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시작한다.주원장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는데 일찍 가족들을 잃고 의탁할 곳이 없는 몸이 되었다. 그는 굶지 않기 위해 황각사에 들어가 행자(行者)가 되어 유랑하다가 홍군(紅軍)의 봉기에 맞추어 이에 가담하게 된다. 홍군은 미륵불과 명왕에 대한 믿음이 종교적 배경이었는데, 미륵교 또는 명교라고 불렸다. 이들 종교는 모두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명왕’ 내지 ‘미륵불’이 출현을 하면 가장 좋은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믿으며 봉기를 했다.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두르고 있었기에 홍건군(紅巾軍), 홍군 또는 향군(香軍)이라 불렀다.주원장은 홍군을 이끌고 활약하면서 조직 내에서 신임을 얻으며 지위를 높여갔다. 그리고 한 지역을 담당하게 되는 계기가 생기고 세력이 넓어져 오왕(吳王)을 칭한다. 그리고 길고 고된 전쟁 끝에 장사성과 진우량의 세력을 규합하고 양자강 일대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강남일대의 경제 중심지를 기반으로 한 주원장은 북으로 올라가 원(元)을 제압하고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물론 적대 세력을 완전하게 뿌리 뽑은 것은 아니었다). 주원장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국호를 대명(大明)이라고 칭하고 연호를 홍무(洪武)로 하였다. 제위에 오른 뒤 주원장은 국가의 방비를 튼튼히 하고 수도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제도를 정비하여 중앙집권제를 강화했으며 호유용과 남옥의 안(案)을 통해 공신세력들을 제거하면서 확실한 황제 중심의 체제를 완성시킨다.『주원장전』은 밑에서부터 시작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른 주원장의 생애를 중점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전기(傳記)의 형식이지만 그가 처했던 원말 명초의 전반적인 시대 상황을 소상히 보여준다. 특히 당시 민중들의 입장을 강조하여 그들을 역사에서 상당부분 부각시켰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이로 인해 당시의 사회상을 일반 민들의 삶으로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점은 저자 오함이 가진 사회주의적 관점 때문이다.그러나 이것은 부정적인 면을 더욱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가진 이념의 잣대로 역사와 인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영사사학(影射史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원장을 현실의 인물이었던 장개석과 모택동에 투영시켰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오함은 명백히 한쪽으로 치우친 역사관을 갖은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주원장전』의 역사서술은 당연하게도 충분히 그러한 편향적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여 진다.오함은 원말 민중의 봉기를 몽한지주계급의 착취에 대항해서 일어난 계급투쟁이자 민족투쟁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들을 칭했던 용어, 즉 홍건군이라는 잘 알려진 이름을 홍군으로 부른다. 이렇게 저자는 원말 무장봉기한 민중을 중국의 공산혁명을 성취했던 모택동의 홍군과 비슷한 성격으로 보이도록 하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주원장은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민중의 편에 서서 그의 정치활동의 첫발을 디디게 된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주원장의 행동의 동기는 나타나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결단코 민중에 대한 애정과 혁명에의 염원이 아니다. 이것은 주원장이 안전한 기반과 세력을 구축하고 나서 지주계급의 이익에 부합하는 변절자가 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사사학의 영향으로 저자 당시의 인물인 장개석을 겨냥한 것이라 생각한다.그러나 주원장의 첫 마음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분명히 냉정한 승부의 세계로 뛰어든 것이고 그의 분명한 목적은 만승의 위에 서는 황제였다. 그러한 길을 걷는데 있어 주원장은 자신의 조상들의 역사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즉 역대 왕조 개창자, 특히 고조 유방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민중을 위한다는 슬로건을 내밀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그가 중국 사회의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통치이념인유교사상을 채택하는 것 역시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원장은 자신이 첫발을 디딘 홍군의 미륵교를 부정하고 유교적 대의 명분의 옷을 입는 것이다. 이것은 승리를 위한 당연하고도 유일한 방법이다. 저자는 이것을 주원장이 계급투쟁적 성격을 잃고 옛 봉건지주 계급질서를 옹호하려 하는 것이라 비판했다. 물론 이러한 사회주의적 시각의 비판이 아니더라도, 오늘날 유교적 지배이념이 가지는 한계는 충분히 인식된다.그러나 당시에 민중은 그런 방법에 길들여져 있었으며 주원장이 취한 방법이 분명히 그들에게 통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유교적 지배를 대체할만한 다른 통치이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저자가 이루어졌어야 했다고 믿는 사회주의 이념 역시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측면들을 생각해보면 적절치 않은 비판이라고 생각된다.화이론(華夷論)과 천명론(天命論) 역시 이 같은 측면에서 보아야한다. 물론 저자 역시 주원장이 택한 ‘변절’의 의미 내지 효과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가진 봉건적이고 계급적인 성격을 부정적으로 보고, 그렇게 되돌린 주원장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태여 그것으로 인해 농민 혁명투쟁의 위대한 힘이 말살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한 비판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저자의 생각에 따르면, 주원장이 대도를 함락하는 것으로 몽한지주계급의 통치가 무너지고 압박 받고 착취당하던 인민의 해방이 이루어져야했다. 그렇지만 그 통치를 대체한 것은 신구(新舊) 한족지주계급의 통치였다. 주원장의 변절로 인해 그 시기에 인민의 세계가 만들어 지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나 계급투쟁은 봉건정권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 한 영원히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사회 역사발전의 필연적인 규율이며, 누구도 멈추게 하거나 항거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 필연적인 규율로 인해 완수된 저자 당시의 상황은 당위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중세사앙리 피렌느의 『중세 유럽의 도시』를 읽고여러 책들 중 제목만으로 추측하기에 『중세 유럽의 도시』가 딱딱한 느낌이 들지 않아 생각해 두었다가 책을 찾아보았다. 다행히도 책이 두껍지 않으며 내용도 흥미롭고 어렵지 않아 선택을 해서 읽게 되었다. 그리고 수업을 들으면서 1기 봉건중세기와 2기 봉건중세기를 나누는 중요한 기점이 바로 도시의 발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내 선택에 더욱 만족을 하게 되었다.『중세 유럽의 도시』는 중세의 도시들을 경제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그 형성과정과 특성을 서술하고 있다. 처음으로 9세기 전까지 이루어지는 지중해상업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시작한다. 다음으로 번영하던 지중해 상업이 9세기에 쇠퇴하고 11세기의 부활하는 과정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성장한 상인 계층과 그들이 거주한 도시의 형성을 말해주며 그 도시의 필요에 의해 등장하게 되는 새로운 도시제도의 발달에 대해서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도시가 유럽문명에 끼친 영향에 대해 서술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본론에서 각 장 별로 나누어 주요한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다.제 1 장 8세기 말까지의 지중해상업로마제국의 두드러지는 한 가지 특징은 로마가 지중해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제국은 지중해라는 거대한 호수를 둘러싸고 있었으며 이것은 로마제국의 정치적 ? 경제적 통일을 유지시키는 보루였다. 로마제국의 존속은 지중해장악에 달려있었으며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로마제국의 통치나 경제유지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지중해적 성격이 더욱 강화되는 명백한 증거는 내륙의 도시였던 로마 대신에 동서를 잇는 무역항인 비잔티움이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는 것이다.말기에 이르러 전반적인 쇠퇴를 겪고 있던 로마제국이었지만 이 쇠퇴가 지중해를 통한 교류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아니다. 내륙의 상업활동의 위축과는 달리, 지중해의 해상무역은 활발하게 유지되었다.이러한 상황속에서 제국의 동부가 서부 보다 경제적으로 번영하였고 점진적으로 로마 사회의 동방화가 이루어졌다. 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슬람 세력의 침입이 끼친 영향으로 인해 기존의 세계가 이렇게 파괴되었는가 하는 점은 조심스럽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다.제 2 장 9세기 상업의 쇠퇴이슬람 세력의 침입은 서유럽에 새로운 상황을 초래하였다. 지중해를 통해 계속해서 동방의 문명을 받아들이던 서유럽이 이제는 자력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지중해연안에 놓여있던 유럽의 무게중심이 북쪽으로 옮겨졌으며, 그 결과 이제까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별로 한 적이 없었던 프랑크왕국이 서유럽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슬람에 의한 지중해의 폐쇄와 동시에 칼롤링거조 국왕들이 역사 무대에 등장한 것은 분명히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다. 즉 프랑크왕국이 마련한 중세유럽의 기반이 만들어지려면 전통의 질서가 무너져야 했으며, 그 역할을 해준 것이 바로 이슬람 세력이다. 저자는 “이슬람이 없었다면 프랑크왕국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마호메트가 없었다면 샤를마뉴라는 존재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이러한 사실은 지중해가 이전의 역사적 중요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메로빙거시대와 지중해의 영향력이 사라졌던 카롤링거시대가 서로 뚜렷한 대조를 보여준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두 시대의 대조는 특히 경제사적 측면에서 두드러진다. 메로빙거시대에 갈리아는 여전히 해양국가였고, 지중해 덕택에 이 곳에서 상업과 교류가 유지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샤를마뉴의 제국은 본질적으로 내륙국가였다. 더 이상 외부와의 교류가 없었다. 즉 그의 제국은 외국시장과의 교류가 없이 거의 고립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폐쇄된 국가였다. 이슬람 세력은 지중해에 대한 그들의 제해권을 강화하여 지중해세계를 차단하였다. 결국 마르세유는 쇠퇴하였고 이로 인해 번창했던 내륙지역의 경제도 위축되었다. 더욱이 노르만족들의 침입까지 더해졌다. 이들에 의한 파괴는 너무나 엄청나서 실제로 주민 자체가 사라져버린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이러한 상황으로 카롤링거시대의 상업은 매우 위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규적 ? 정상적인 상업활동, 기증을 받았으며 카롤링거 지배자들과 더불어 국가를 통치하였다. 주교들의 이러한 우위로 인해서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옛 로마시대의 도시인 키비타스도 상당히 중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키비타스들이 살아남았지만 9세기의 경제상황에서 키비타스들이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키비타스는 더 이상 상업중심지가 아니었다. 주민들이 감소하고 상인들이 사라졌다. 키비타스 주변에 있는 대영지에서는 자급자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키비타스는 그 경제력과 시민행정에서는 그 기능을 상실했을지라도 여전히 종교행정의 중심지였다. 즉 키비타스는 전적으로 주교의 지배하에 놓인 것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로마를 예로 들어보면 이해할 수 있다. 로마가 쇠퇴하자 로마황제들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떠나면서, 로마를 교황에게 맡겼다. 로마는 국가의 통치 아래에 속해 있지 않고 교회의 통치에 속하게 되었다. 황제의 도시 로마가 교황의 도시가 된 것이며 외부세계와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황의 권력은 아주 강해졌다. 로마에서 일어난 이러한 상황이 모든 키비타스에서 발생한 것이다.이러한 키비타스들은 주교의 거주지인 동시에 요새지였다. 로마제국 말기에 주민들은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키비타스를 성벽으로 둘러싸야만 했다. 9세기에 이슬람교도와 노르만족의 침략에 대한 방어를 위해서도 성벽을 보존하거나 복구하는데 힘써야했다. 이렇게 키비타스들은 9세기에 만연했던 사회적 불안과 혼란으로부터 인근지역 주민을 보호하는 피신처 역할을 한 것이다.당시 사회는 키비타스 외에도 이러한 역할을 하는 요새지들을 필요로 하였다. 당시 지방 영주들은 그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자신들의 영지를 방어해야했다. 이것은 이슬람교도나 노르만족 뿐만아니라 인접 영주들에 대한 방어를 포함한다. 이러한 필요가 더해지면서 도처에 요새지들이 축조되기 시작했으며 이를 부르구스(burgus)라고 한다.부르구스는 그리 넓지 않은 영역을 성벽 또는 목재로 된 울타리로 둘렀나 것으로서, 형태는 대체로 원형이었고,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중심부에는적 위치 때문에 북유럽 연안들에서 행해지는 상업의 서부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행해진 모직물 제조업 또한 플랑드르가 상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원인이었다.이처럼 해외에서 비롯된 상업과 현지에서 유지되었던 제조업 덕택에 10세기에 플랑드르에서 경제활동이 이루어졌고, 이런 경제활동은 11세기에 이르러 놀라울 정도가 되었다.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서유럽은 인간과 토지의 관계에만 의존하고 있던 전통적인 경직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농산물은 더 이상 토지소유자들과 경작자들의 소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교환의 대상으로서 혹은 원료로서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경제활동을 억제하던 장원제의 틀이 깨졌으며, 모든 사회가 보다 유연하고 활동적이고 다양해졌다. 키비타스들이 활기를 되찾고 부르구스 밑에 상인들의 집락이 형성되었다. 천연적 교류의 중심지에는 시장이 형성되었다.시장과 농촌 사이에 서비스의 상호교환이 이루어졌다. 농촌은 도시에 식량을 공급하고 그 대신 도시는 상업적 물품과 제조품을 농촌에 공급함으로써 도시와 농촌간의 유대가 점점 더 긴밀해졌다. 12세기에 만개한 경제부활은 자본의 위력을 보여주었고 그 어느 시대보다도 사회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독일과 심지어 비스툴라강까지 널리 퍼진 것으로 로마시대의 경제발전보다 더 먼 지역까지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다.이처럼 베니스와 플랑드르 두 지점에서 상업이 시작되었고, 이 두 지점 덕택에 유럽은 동방세계와 접촉할 수 있었다. 북쪽으로 부터의 상업의 흐름과 남쪽으로 부터의 상업의 흐름이 내륙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상업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두 흐름이 만나는 지역에는 정기시장이 설립되었고, 이는 13세기 말까지 중세유럽에서 자본이 집중되고 화폐가 교환되는 장소의 역할을 했다.이 장은 11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상업이 부활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외부와 계속해서 교류가 이루어진 두 지역, 베니스와 플랑드르를 중심으로 상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슬람세력을 지중해에서 후퇴시 이런 조건들을 가장 잘 충족시키는 장소인 키비타스나 부르구스로 간 것이다. 왜냐하면 키비타스와 부르구스는 접근하기 쉬운 곳에 건설되었으며, 침략자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성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요새화된 키비타스와 부르구스가 존재하고 지리적으로 유리한 곳이 상인 정주지가 형성되기 위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키비타스나 부르구스가 상업활동을 야기한 것은 아니다. 상업활동은 그 곳의 유리한 조건으로 인해 밖에서부터 결집되어 들어온 것이다.10세기 이후 유럽에서 상업부활이 진척됨에 따라 키비타스 안이나 부르구스 곁에 설립된 상인 정주지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경제가 활기를 띠자 그 주민의 숫자도 증가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거주지가 협소해 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10세기부터 상인들의 다수는 성벽 바깥에 거주해야했다. 부르구스는 처음부터 정착할 만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상인들은 그 성벽 바깥에 거주해야했다. 이러한 ‘외곽지구’를 ‘新부르구스(novus burgus)’라고 한다. 저지대지방과 잉글랜드에서는 이런 ‘외곽지구’를 지칭하는 데 포르투스(portus)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12세기 초가 되면 이러한 상인 정주지의 건물들이 원래의 요새지인 키비타스나 부르구스를 사방으로 둘러싸버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의 안전을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 외곽지구 역시 방어벽으로 둘러싸게 되었다. 즉 이러한 상인들의 필요성으로 인해중세의 도시들 역시 요새지라는 기본특성을 갖게 되었다. 도시는 요새지 즉 ‘新부르구스’였으며 11세기 초부터 이곳의 주민을 ‘부르구스의 주민’ 즉 부르주아(bourgeois)라고 불렀다.이렇게 형성된 도시는 이제 편력상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상업활동에 필요한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농촌으로부터 막 탄생한 도시로 모여들게 되었다. 11세기 초에 도시로의 인구집중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인구집중이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주변지역에 끼친 영향은 확대되어 갔다. 도시민들은 일상생활의 유지를 다.
서양고대사페르시아 전쟁페르시아의 패배 원인서론헤로도토스의 《역사》 6권에서 9권까지를 읽고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군이 승리한 이유, 다시 말해 페르시아군의 패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6권에서 치루어진 마라톤전투 역시 이 전쟁의 일부이며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10년이라는 시간의 격차가 있고 또 페르시아의 왕이 다레이오스에서 크세륵세스로 바뀌었다는 점 등의 이유 때문에 여러 전투의 승패요인을 한 번에 분석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크세륵세스의 원정부터 시작하여 마르도니오스의 패배까지 살펴보고 페르시아의 패배 원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쓰고자 한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왜 그리스의 승리의 원인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패배의 원인에 초점을 맞추었는가에 대한 점인데, 이는 헤로도토스가 그 역시 그리스인으로서 그리스의 종교적인 사상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전쟁을 보는 점이 많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의 승리에 대해 신탁의 내용에 의존하기 보다는 페르시아의 패배에 대한 분석이 용이하며 더욱 객관적일 것이라 생각된다.본론페르시아군의 병력 규모와 그 진상페르시아군의 병력 규모에 대해 살펴보면, 헤로도토스는 아무도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아 정확한 수를 알 수 없지만 170만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여기에 기병 8만과 낙타부대, 전차부대 2만을 합하면 180만이 페르시아 육상 부대 보병의 숫자이다. 또 헤로도토스는 해상 부대에 대하여 아시아에서 원정 온 함선 1207척의 함선에서 27만 7610명, 오십노선 등 기타 함선 3000척에서 24만 명을 헤아려 해상 부대 총 병력 수가 51만 7610명에 이른다고 산출 했다. 그리고 트라키아 및 트라키아 인근 여러 섬의 그리스인에게서 징발한 함선 120척의 2만 4천과 그리스에 이르러 행군하면서 현지인들을 징발한 숫자가 30만으로 추정한다. 이에 따라 페르시아 전투 부대의 총 병력은 264만 1610명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종군한 종복이나 식량 수송용 소형선박 및 원정군을 수행한 그 밖의 승선 인원 등의 비전투원들이 전투 부대와 비교하여 과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크세륵세스에 의해 동원됐던 총병력 수는 528만 3220명에 달했다고 주장하였다.헤로도토스가 무슨 자료를 근거로 하고 어떤 생각으로 저런 숫자를 산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하지 못한 것이라는 데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다. 이에 대해 후대의 사가들은 80만 명이라고 하였고 현대의 연구자들은 9만~30만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있다. 자신들이 패배시킨 적의 수를 의도적으로 많게 부풀리면서 승리를 더욱 빛내고자 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확실히 그리스의 군 보다는 그 수가 많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또 페르시아 군에 대해 생각해 볼 점은 그 구성이 페르시아 민족에 의한 단일 구성이 아니라 메디아인, 킷시아인, 앗시리아인 등 여러 지역의 수많은 민족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들이 힘을 합쳐 이런 대규모의 원정을 한 이유는 이들이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기 민족이나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강제에 의해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자신들을 지배하는 전제군주 크세륵세스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참여한 민족의 군사들의 사기가 형편없었을 것이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또한 이것은 여러 전투에서 페르시아민족 이외의 다른 민족들이 보여주는 적극적이지 못한 태도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이에 관해선 페르시아 민족 자체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과연 페르시아인들은 그들의 전쟁을 긍정하였을까? 현대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하의 우리나라에서도 의무에 의한 군복무를 꺼리고 군 생활 역시 나라를 위해 희생한다는 정신보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의 그들이 그리스인들처럼 자유에 대한 탁월한 의식을 갖고 있지는 않았으며 전제군주제에 익숙해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자신에게 백해무익한 전쟁에 참여하여 군주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긍정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크세륵세스가 정신교육을 통해 페르시아 병사들의 정신을 통일했고 참전한 병사들 모두 전쟁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거나 나아가 스스로 열의를 갖고 참여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과연 그랬다고 할지라도 전쟁을 지속해 나아가면서 많은 고통 - 밑에서 더 이야기할 긴 행군과 식량 ㆍ 식수 문제 등 - 을 겪고도 그 상태를 유지했을까는 의문시된다.병력이 많다는 것은 그 수가 한 번의 전투에 동원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군이 넓은 평지에서 그 대군을 한번에 맞아 싸울 리가 없으며 만약 싸운다고 하더라도 그런 많은 수가 효과적으로 싸울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인다. 지형의 상황에 따라 전투에 적합한 수가 있을 것이고 그리스군은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스스로 뭉쳐서 싸우는 그리스군과 반대로 여러 면에서 페르시아군은 머릿수만 많은 오합지졸이었다.테르모필라이까지의 진군크세륵세스는 반대를 무릅쓰고 직접 그리스로의 원정을 감행할 것을 결단한다. 크세륵세스의 페르시아군과 여러민족의 군사들은 사르디스에서 모여 아비도스로 나아간다. 페르시아군은 선교를 통해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아비도스를 떠나는데 이 선교를 건너는데 7일낮 7일 밤이 걸렸다고 한다. 이후 도리스코스를 걸쳐 텟살리아에 이른뒤 그리스군이 기다리고 있는 테르모필라이로 향한다.간단하게 줄여놨지만 이 원정로는 지도를 통해 보면 매우 긴 거리이다. 헤로도토스 역시 행군하는 동안의 일들에 대해 자세한 언급을 해놓지 않고 있다. 과연 당시의 모든 상황이 수많은 사람들이 저토록 긴 거리를 행군 하는데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을까? 이 점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우선 교통이 열악하여 병사들의 행군과 식량의 수송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현대와 같이 좋은 도로와 좋은 장비를 갖추어도 어려운 긴 행군을 하는 동안 페르시아군의 상황에 조금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긴 행군 간 낙오자와 탈주자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사망자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이 살던 곳과 맞지 않은 풍토에 의한 여러 질병과 전염병의 경우도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당시 갖추어지지 않은 의료 기술이나 후송여건으로 보면 상당히 많은 피해가 있었을 것이다. 또 수송의 어려움은 사자에 의한 낙타의 습격이 있었다는 기사도 있거니와 도로사정 뿐만 아니라 많은 난관에 부딪쳐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현지조달을 한다고 해도 군량은 대규모였던 페르시아군에게 언제나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긴 행렬과 통신수단의 미흡함에 의한 지휘계통의 신속성이 매우 떨어졌을 것이다. 이는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진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부대였다는 점에 의해 더욱 심했을 것이며 이로 인한 수많은 문제들이 일어났을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바다에서 오는 해상 부대 역시 폭풍으로 인하여 많은 수가 피해를 입었듯이 육상 부대 역시 그러한 재난을 피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페르시아의 대군은 그리스로 행군해 나아가는 동안에도 많은 피해를 입어 그 수가 크게 줄어들었고 사기 또한 현저히 낮았을 것이라 보여진다.크세륵세스의 오만함헤로도토스가 침략자이자 패배자인 크세륵세스에 대한 평가를 좋게 했을리는 만무하지만 어찌됐든 이 책에서 보이는 크세륵세스의 오만함 역시 페르시아군의 패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사료된다. 그는 몇몇 신하들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군대를 움직이다가 결정적으로 패하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겠다.페르시아군의 원정군이 아비도스에 일러 아르타바노스(페르시아의 원정을 반대했던 인물.)가 크세륵세스에게 바다와 육지의 적대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페르시아군이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게 될 경우 그들의 대 함대를 수용하여 안전하게 지켜 줄 항구가 없다는 점과 육지에서의 진군이 길어질수록 늘어나는 거리 때문에 식량난에 봉착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점은 모두 원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시해야 할 점임에도 불구하고 크세륵세스는 오만함으로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옳은 말을 해주는 조언자 아르타바노스를 수사로 돌려보낸다. 결과적으로 앞서 말한 대로 육지와 해상에서 전투 이외의 요인으로 인한 큰 피해를 받게 되며, 이는 전쟁의 패배와 직결되는 점이라 생각한다.데마라토스가 스파르타인의 자질과 특성에 대해 크세륵세스에게 설명해 주었지만 역시 이를 무시해 버린다. 그 뒤 힘들게 테르모필라이 전투를 치르고 나서 스파르타인에 대해 알게된 크세륵세스는 다시 데마라토스에게 의견을 구한다. 데마라토스는 함선 3백 척을 라코니아로 파견하여 키테라라는 섬을 기지로 삼고 스파르타를 고립시키도록 하는 작전을 올리지만 크세륵세스는 이에 따르지 않는다. 또 아르테미시아는 아테네 해군의 위력을 설명하면서 그리스군과 해전을 벌이지 말고 역시 펠로폰네소스로 나아가 포위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받아들여지지않았다. 그 결과 페르시아군은 살라미스해전에서 패배하게 되고 이로 인해 고립을 면한 스파르타는 자유롭게 군사를 움직여 뒤의 플라타이아의 전투에서 다시 한번 활약하여 마르도니오스의 페르시아군을 패퇴시키는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해설(史記解說) 》Ⅰ. 서론Ⅱ. 사기의 장점&매력Ⅲ. 사기의 저술 동기&목적Ⅳ. 사마천의 사료 취사&비판Ⅴ. 사기의 구성&서술 특색Ⅵ. 맺음말Ⅶ. 사기 해설을 읽고...Ⅰ. 서론는 전한(前漢) 사마천(司馬遷)의 저술로서, 중국 최초의 문명 단계로 믿어지는 황제시대(黃帝時代)에서 전한 무제기(武帝期: B.C.1세기 초)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총 130권의 방대한 사서이며,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사의 편찬에 채용된 체제, 즉 기전체(紀傳體)가 처음으로 시도된 것으로도 유명하다.Ⅱ. 사기의 장점&매력의 장점이자 매력으로는 ① 특정한 시기, 또는 사건에 대한 단편적인 서술이 아니라 한 편의 웅대한 통사이자 세계사인 동시에 종합사이기 때문에, 시대의 계기적인 변화와 여러 지역 간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진행된 인간의 삶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제시함으로써 역사의 인과적인 이해 뿐 아니라 사건과 현상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보편적인 원리 문제까지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기술(記述)된 역사의 존재의미와 이를 담당하는 사가(史家)의 사명이 무엇인가도 제시했다는 점과 ② 역사 자체를 개인의 능동적인 활동의 집적으로 보고, 개인의 화복과 역사의 흥망성쇠를 개인의 도덕과 능력, 이것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능동적인 노력 여하의 결과로 설명한다는 점과 ③ 저자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직접 투영된 사서로, 개인의 비극이 보다 절실하고 냉철한 역사적 진실의 추구로 승화된 것이었기에 저자의 사상과 주관, 그리고 개인의 감정이 작용하면서도 오히려 객관적인 역사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것, ④ 독자에게 중국 고대사의 발전 과정과 성격에 대한 평이하고 직절(直切)한 이해를 제공하였으며 ⑤ 저자 자신의 역사관과 통찰력이 가장 자연스럽게 표출된 결과로서의 문학성과 문장력 등을 들 수 있다.Ⅲ. 사기의 저술 동기&목적사마천의 사기 편찬한 목적은 “천(天)과 인간의 관계를 구명하고 고금의 변화를 관통하는 (원리를 밝혀) 스스로 독자적인 입론(立論) 체계를 이루려는 것[成一家之言]”이었다고 한다. 사마천은 를 계승하였는데, 이는 천운 대변에 따른 역사적 과제의 자각과 그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그 구체적인 표현이 로 결정(結晶)된 것으로, 의 저술이 단순한 역사의 편찬이나 서술을 넘어선 역사적 행위로서 의미를 갖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태사령(太史令)의 직분을 중시 여긴 사마천 부자가 태사령의 역법관장을 역법 본래의 의미와 결부시켜 그 당위적인 사명을 ‘시(時)’의 기록으로 설정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기록자로서의 사명을 의식한 직접적인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은 ‘이릉(李陵)의 화’로 인해 궁형(宮刑)을 받으면서 자신을 생의 벼락 끝까지 몰고 간 절망과 울분을 생의 진실을 추구하는 차원으로 승화시켰고 이것을 다시 역사의 진실로 보편화시켰으며, 동시에 이 보편적인 진실을 다시 개인의 진실 문제로 환원하였다.Ⅳ. 사마천의 사료 취사&비판저술의 동기와 목적이 일단 확정되면 그 다음에는 관련된 자료를 최대한 수집하는 일이다. 태사령으로서 천하 유문(遺文)과 각종 공문서를 쉽게 접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많은 여행을 통해 유적도 답사하고 현지의 장로(長老)들로부터 직접 전문을 수집할 수 있었던 사마천은 자신이 의도하는 저술에 필요한 자료를 충분히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자료는 그 사실(史實) 여부의 확인이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 비록 사실(史實)일지라도 서술의 목적과 관련하여 적절히 취사되는 것도 불가피하다.사마천은 사료를 비판할 때, ‘아순(雅馴)’ 또는 ‘아(雅)’를 사료비찬의 대전제로 설정하고 자료의 시간적?공간적 인접성을 중시하는 원칙에 따라 구체적으로는 6경(經)과 ‘고문’, 현장의 증언 및 그 전언을 신뢰하며, 자료를 신중히 검증하였다. 그러나 이상의 어떤 기준으로도 사실(史實) 여부를 단정하기 어려운 자료도 많았고, 특히 병존하는 이설 중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취하기 곤란한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사마천은 “의심나는 것은 그대로 둔다.”[의자궐언(疑字闕焉)]는 원칙을 정하고 ① 확인되지 않는 사실은 가급적 언급하지 않고 그 부분을 공백으로 처리하는 방법 ② 대체로 신용할 만하지만 단정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개(蓋)’[대체로, 아마도]라는 의사(疑辭)를 덧붙여 다소나마 의문의 여지가 있음을 표현하는 방법 ③ 시비를 판단하기 어려운 이설은 병기하는 방법이라는 세 가지의 상이한 방법으로 실천하였다. 또한, 사마천은 ‘역사적 진실’은 오직 사실(史實) 그 자체만을 의미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진상이 배제된 표면적인 현상이나 결과가 곧 진실도 아니지만, 진상 그 자체보다는 그에 대한 당시인의 이해와 평가가 오히려 이후 역사의 전개와 보다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갖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즉, 비록 입증할 수 없는 소문이나 허구일지라도 제법 논리적인 가능성도 높을 뿐 아니라 커다란 정치변화에 대한 당시인의 이해와 감정이 생생하게 반영된 이 이야기가 오히려 역사적 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였다. 사료 비판이 일단 끝나면 사가는 확정된 사실(史實) 중 무엇을 어떤 비중으로 서술하느냐는 문제로 부심하게 마련인데, 사마천은 대체로 ① 가까운 시대일수록 상세하게, 시대가 멀수록 간략하게 서술하는 ‘상근략원(詳近略遠)’의 원칙 ② 천하의 존망과 무관한 사실은 가급적 생략하는 원칙 ③ 비록 천하의 대사와는 일견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 시대의 성격 또는 개인의 성격이나 일생의 성채와 관련된 일화는 가능한 한 수록한다는 원칙 ④ 관부(官府)에 보존된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의법(儀法)과 제도는 기록하지 않는다는 원칙 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저작이나 타인의 문장은 가급적 소개 또는 전재하지 않는다는 다섯 가지 원칙에 따라 이 문제를 처리하였다.Ⅴ. 사기의 구성&서술 특색사마천은 그 어느 것도 자신이 알고 있는 풍부한 지식과 역사에 대한 이해를 종합적으로 표현하기에 부적당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후 역대 중국 정사(正史)의 모범이 된 독특한 기전체(紀傳體)를 창안하였고, 아울러 이 체재(體裁)에 적합한 문장과 서술 형식을 개발한 것이다. 즉, 의 체재와 서술 방법은 단순한 개인적인 취향이나 기교적인 요령의 차원이 아니라 저자가 이해한 역사상과 사관이 응집된 결과였다는 것이다.는 제왕의 정치와 행적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한 ‘본기(本紀)’, 개인의 전기에 해당하는 ‘열전(列傳)’, 여러 사건의 시간적?공간적 연관성을 도표화한 ‘표(表)’, 제왕의 권력을 지역적으로 나누어 맡으며, 그 지위를 세습하는 제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사건을 시대 순으로 서술한 ‘세가(世家)’, 문물제도의 연혁과 그 원리를 추구한 ‘서(書)’ 등 모두 5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을 기전체(紀傳體)라고 칭하는 것은 이 구성의 가장 대표적인 요소를 본기와 열전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전체의 체재는 물론 각 구성요소의 권수, 서술의 위치와 배열 순서까지 사마천의 역사관?세계관?인간관이 짙게 투영되어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조직될 수 있었다.사마천은 가능한 한 모든 서술을 자신이 적절하다고 생각한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 같으며, 참고자료를 그대로 인용한 것도 그것이 오히려 내용을 보다 생동감 있게 전달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문자 하나로써 특정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다른 문장과 관련시켜 더욱 정채를 발하는 기법을 구사하였기 때문에 각 문장 간에도 서로 복선이 깔려 있고, 때로는 각 편도 이러한 복선 속에서 하나하나가 생동하는 경우가 허다하다.의 포폄 기능은 개인뿐 아니라 사건, 또는 한 시대 전체에 대한 평가도 포함되었고, 그것이 전체적인 구성과 문장을 통하여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표현된 것이 특색이다. 물론 지나치게 현실비판을 의식한 역사 서술은 오히려 지나친 단순화를 초래하거나 객관성을 잃고 특정한 정치 목적의 도구로 전락할 우려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 전반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일관된 사관(史觀)에 기초한 그의 비판은 엄숙하고 통렬하면서도 그 원리적인 대안까지 제시할 수 있었고, 바로 차원 높은 비판의식 때문에 그는 오히려 일반 역사가들이 간과하기 쉬운 문제에까지도 관심을 확대하여 역사를 보다 다양하게 서술하였을 뿐 아니라, 역사적 전형성과 그 의미를 극명하게 제시하면서 전체를 보다 동태적으로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Ⅵ. 맺음말사마천은 자기 시대의 역사적 과제를 자신이 수행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을 자신의 삶에서 발견한 끝에 그 사명의 실천으로 를 저술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때문에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최대의 치욕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과업을 포기할 수도 없었고 오히려 더욱 절실하게 역사적 진실을 추구한 것이다.물론, 에도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史實)의 부적합성, 연대의 혼동 및 사마천의 논단에 대한 이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하나의 주제가 여러 곳에 분산되어 서술된 것은 독자들에게 큰 불편이며, 또 하나의 단어, 문장, 편이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고 항상 다른 부분과 연결되어 그 의미가 완전해진다는 것도 오히려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데 지장을 주는 것도 사실이며, 개개의 서술이나 구성이 너무나 상징적이고 전체의 유기적인 연결성도 항상 암시적으로 시사되어 있기 때문에, 사마천의 의도를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것도 문제이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활동 분야를 종합적으로 저술하였다는 것과 사마천이 다룬 시대의 성격, 그리고 가능한 서술의 중복을 피해야 한다는 사정 등을 감안한다면 기전체는 단점보다는 오히려 장점이 많은 형식이 분명하며, 실제 기사본말체나 편년체로는 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 지나칠 정도로 상징성과 암시성이 많은 것은 경우에 따라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읽을 때 문제에 관한 연구 성과를 참고하지 않으면 곤란을 겪는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이나, 이 문제 역시 사마천의 역사 인식을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