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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독도영유 역사적 의의
    독도영유 역사적 의의독도는 역사적 관점에서 명백한 우리 땅이고 우리 국토의 최동단 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실은 일본이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1996년 초 일본 외상이 역사적 의미에서 독도는 일본의 고유한 영토이며, 뿐만 아니라 국제적 조약상으로도 일본의 영토라고 말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를 볼 때,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고 할 수 없는데도 현실적으로 일본이 국제법을 들먹이면서 시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명기 교수의 「국제법으로 본 독도영유권」이라는 글은 이러한 일본의 국제법 운운에 대한 분명한 반론이 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앞으로의 연구는 이러한 보다 심화된 많은 연구를 계속 수행하면서, 근본적으로 우리의 땅인 독도를 어떻게 일본을 설득시키고 또 우리 것으로 소화하면서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가가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1996년도에 들어 독도에 관한 심포지움이 세 차례나 열렸다. 독도학회에 의해 독도문제가 심도있게 다루어지게 된 것과, 한일관계연구회에서 독도와 대마도문제를 주제로 열린 것, 그리고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여린 것 등이다. 다같이 역사적 관점에서 우리 고유의 영토이고 국제법으로 보나 그밖에 어떻 관점에서 보아도 우리의 영토라는 결론에는 명백했다는 사실이다.필자가 지난 1977년 학술조사차 독도를 답사했을 당시 독도문제에 대한 연구성과와 오늘의 연구성과와 증거자료들을 모두 합하면, 오늘날 독도문제에 관해서는 많은 자료와 연구가 축적되어 있다고 하겠다. 특히 최근에는 아주 결정적이고 중요한 자료와 연구업적들이 나오고 있다. 실례를 들면, 국사편찬위원회가 후원하고 독도연구협회가 중심이 되어 나온 「독도연구」라는 논문집은 자료면에서나 연구면에서 상당히 수준 높은 연구논문집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신용하 교수가 삼국시대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독도가 우리 땅임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심도있게 연구한 글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실제 학계에 많은 공헌을 하리라 생각한다.한편 송병기 교수는 1905년 일본의도로 대서 몰려와서 자기네 땅으로 편입된 사실을 알리는 우리 측의 보고서와 당시 참정대신 박제순이 그들의 고시가 사실무근이니 재조사하라는 지령의 자료이다. 이를 볼 때 일본관리가 일방적으로 자기네 땅이라고 고시한 것이 문헌에 의해 밝혀지게 되었다. 일본인 호리(屈和生) 교수는 도근현 고시는 사리에 맞지 않게 위장한 것이고, 실지는 일본이 러일전쟁시 일본의 전략목적을 위해 즉 한국을 병탄하기위해, 1차적으로 독도와 울릉도에 군비시설을 갖추고 무단으로 침략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자료를 통해 제시하였다. 이외도 개항전후의 시기에 독도는 결코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일본 고위층인 태정관의 한 관리가 밝힌 문서가 신용하? 호리 교수의 논문에 실려 있다.이러한 일련의 업적인 비록 학술적으로 정밀한 사료비판과 체계화가 계속 이루어지고 미발굴 자료의 발굴이 계속되어야 하지만, 현재까지 명백하게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사실에는 틀림없는 것으로 밝혀졌다.이제 결론은 이미 나와있으니 일본의 시비에 끌려다니지 말고, 보다 적극적이고, 보다 세련되고 납득시킬 수 있는 학문적인 자료와 논리를 일본 측에 제시하여 한일관계에서 당당히 독도가 한국 땅임을 주장하는 외교를 펼쳐야 하겠으며, 아울러 우리의 영토인 독도개발에도 이제는 관심을 쏟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이처럼 독도문제에 대한 결론은 이미 나와 있으나 그동안 미진한 부분을 정리하여 종합적인 의견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첫째, 독도는 최동단(最東端)에 위치한 한국의 도서이다. 경위도상으로는 동경 131˚ 52′ 22″, 북위 37˚ 14′ 18″에 위치하고 있다. 본토로부터의 거리는 가장 가까운 강원도 죽(竹)으로부터 120해리. 울릉도로부터는 50해리이다. 한편 일본 도근반도(島根半島)로부터는 108해리이며 일본령 은기도(隱岐島)로부터 85해리의 거리에 있다. 따라서 독도의 위치는 한일간의 본토로부터의 거리는 일본에 약 12해리 정도 더 가깝지만 인간이 상주하는 도서로부터는 35해리나 한국에 더 가깝다. 필자는 지난 1977년 잡는 것이라고 생때 쓸 수 있다는 것이 그들 일본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해가 우리 영해라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많은 우리의 고지도나 문헌을 비롯하여, 외국의 문헌이나 지도에 동해를 동해 또는 조선해로 표기하고 있고, 특히 대한제국시기에는 대한해로 표기되어다. 그 무렵까지 일본은 일본열도의 태평양 연안의 바다를 ‘일본해’라고하여 그들 지도에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는 슬그머니 처음엔 일본 본주의 한국측 연해를 일본 서해라 했다가 점차 동해 전체를 일본해해로 바꾸어놓는 간교를 부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제는 더욱 오만하여져 현재에는 일본해라고 말하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얼마전 외무부에서 동해를 일본해라 표시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일본의 속성을 비추어 볼 때, 동해를 일본해로 인정한다면 독도문제와 더불어 우리나라 동해의 관할문제에 큰 문제가 발생될 것으로 생각한다.셋째, 독도의 법적 주소는 경상북도 울릉군 나면 도동이다. 또한 독도는 하나의 섬이 아니고 동도와 서도 및 그밖에 42개의 작은 섬과 암초로 구성된 군도(群島)이다. 그런데 세칭 독도라 함은 그중 우뚝 솟은 동도와 서도를 가리킨다. 양도(兩島)의 높이와 크기는 서도가 약간 더 높아 해상 157m이며, 면적은 동도가 19,560평, 서도가 28740평이고 독도 전체로는 18,121정보 즉 54,015평에 달하는 넓이를 가졌다. 둘레는 각각 1.9km, 2.1km가 된다. 동도와 서도의 거리는 100m~200m 정도이어서 집안시설의 설치가 가능하다.화산도(火山島)로 이루어진 독도는 얼른 보면 화성암산(火成岩山) 같은 느낌을 주지만 동도 중턱에 오라서면 바위와 돌은 없고 꽤 넓은 명적이 흙으로만 덮여있는 부분이 있어 여기에 적지 않은 동식물(動植物)이 서식하고 있다. 따라서 독도는 암석으로만 구성된 불완전 도서가 아니고 흙과 혼합된 토양을 가진 e서인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암산(岩山)의 인상을 그대로 지녔고 동도에는 화산과 분적 통념상의 식수라 할 수는 없을 것 같으나 그런대로 먹을 수 있는 정도였다. 독도의 주민이나 울릉도의 출어 어부들은 이 샘물을 식수로서 사용하고 있다한다. 여하간 여기서 흘러넘치는 물을 잘 관리하면 독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식수문제가 해결될 것도 같다.독도에는 풀은 있으나 나무가 없다고 알려지기도 하였으나 실제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만 하여도 5종의 나무와 유인도(有人島)에서만 볼 수 있는 36종의 풀(草木)이 있다. 초목으로는 곰솔? 댕댕이덩쿨? 줄사철나무? 보리장나무? 개눈쟁이? 보리장나무? 개새입개머루 등이고, 초목으로는 도깨비쇠고비? 개인귀? 마디풀참소라쟁이? 갯눈쟁이? 청명아주? 쇠무릅? 섬강때? 땀채송화? 섬기린초? 선괭이밥? 객사상가? 갯까치수영? 박주가리마중? 초종용? 비속? 왕해주? 개밀? 강피? 들피? 즘바랭이 ?띠? 쇠보리? 강아지풀? 억새? 성모아풀? 잔디? 천문둥참나리 등의 36종이다. 조사단이 상륙하였을 당시에는 마침 암벽 사이에까지 섬 전체에 울릉도에서 볼 수 있었던 해도(海島)의 파란 들국화가 만개하여 동도 중턱의 잔디밭 갈대와 조화를 이루는 한 폭의 명화를 보여 주었다.또한 독도 연안 일대에는 풍부한 해산물이 존재하고 여러 동굴 속에는 유명한 물개(海-)가 서식하며 주변에는 갈매기를 비롯하여 이름 모를 여러 가지 해도들이 생기 넘치게 선회하고 있었다. 새들의 낙원이란 말이 걸맞는 표현이다. 특히, 해산물 중 독도의 오징어, 미역, 소라, 전복 등은 명산물이며 근해에는 유수한 어장을 이루어 울릉도와 포항 등지의 어민들이 출어가 연중 그치지 않는 곳이다.넷째, 현재 독도는 무인도가 아니며 그곳에는 해양경비를 맡은 우리의 전투경찰이 주둔하고 있으며, 또한 민간인으로써 최종덕(崔鍾德)씨 일가가 일찍부터 살고 있었다. 그들은 쌀과 일용품을 울릉도와 포항 등지에서 갖고 오기는 하였으나 엄연한 독도의 주민인 것이다. 민간인 최씨 일가는 10여년전부터 독도 주변에서 미역? 소라 등을 채취하여 생업을 이어왔고 2, 3년 전부터는 여름철 한두 중요성이다. 말할 것도 없이 동해 한복판에 위치한 독도가 있음으로 동해가 우리의 바다가 될 수 있는 것이며 일본의 바다인 일본해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와는 달리 바다도 육지와 다름없는 영토로 인식되고 활용되어 가는 현 시점에서 볼 때 우리는 동해 속에 이런 훌륭한 섬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우선 앞으로 우리가 독도를 개발하여 어업 전초기지로 삼는다면 동해의 무진장한 해물이 영구히 우리 것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국, 일본, 시베리아를 잇는 해상 중요 교착점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한 위치에 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독도를 중심한 경제수역, 영해수역 문제를 신중히 계획하여 추진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이러한 독도를 일본은 구한말의 일제침략시기와 한국병탄을 물론, 2차 대전의 항복 후에도 끈질기게 자기네 땅이라고 시비를 걸고 있고, 국제법상에서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독도가 우리나라 고유 영토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삼국시대 이래의 여러 역사. 지리 문헌으로 명백히 입증 할 수 있는 것을 예증해도 다음과 같다. 독도의 역사적인 명칭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산도(于山島)? 가지도(可支島)? 석도(石島) 등의 명칭이 자주 보인다.우리 나라의 가장 오래된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독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于山? 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즉, “동해에는 우산도와 무릉도(武陵島)(지금의 울릉도) 두 섬이 잇는데 두 섬 사이의 거리는 멀지않으며 바람과 날씨가 청명하면 바라볼 수 있다.”고 기록되었다. 또한 1451년에 편찬된 『고려사』 지리지에도 “于山? 武陵二島 相巨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이라고 같은 내용이 기술되었고, 일설에는 한 섬이라 하는 얘기가 있다 하였다. 1530년에 완간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역시 앞에 독도와 울릉도의 두 섬으로 명기했으나, 뒤에 가서 한 섬이라는 설도 있다하고 부기하고 있다. 이러한 독도 관계 기록은 그밖에도 역대 『조선왕조실록』과 그 밖의 사서
    사회과학| 2006.03.07| 6페이지| 1,000원| 조회(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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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바울복음의 기원
    이번 신약개요Ⅱ를 들으며 바울에 대해 더욱 알아가던 중 접하게된 ‘바울복음의 기원’은 제목부터가 심오한 뜻을 담고 있었다. 바울의 복음은 어떠한 시작을 가지고 있으며 바탕은 과연 무엇일까. 오늘날의 바울 해석가들이 칼바르트가 비판한 사람들과 같이 바울신학을 분석하였다고 밝히고 있는 이 연구는 바울 복음의 기원은 바울은 스스로 대답한다고 말한다. 즉, 바울의 복음은 ‘사람의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김세윤씨로 서울 대학교 사회 사업학과를 졸업한 뒤 그는 복음 때문에 떠오르기 시작한 선교적 기대와 함께 싱가폴에 있는 제자 훈련 센터에서 공부하게 된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도에 대한 훈련을 받는 동안 그는 신학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품게 되었고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대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신학에 돌입한다. 그 후 독일 튀빙겐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영국으로 돌아와 멘체스터대학에서 브루스교수의 지도아래 박사학위를 마쳤다. 그 뒤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연구하였고, 독일 홈볼트 대학, 싱가폴과 미국 칼빈 신학교, 풀러 신학교, 고든 콘웰 신학교 등에서 교수 사역을 하였다. 이 기간 중에 만나게 된 브루스 박사를 비롯한 오토 베츠, 마르틴 헹겔, 페터 스톨마허, E. E. 얼리스 등과 같은 세계적인 신학자들과의 교제는 그에게 말할 수 없이 소중한 것들이었다고 한다.
    독후감/창작| 2005.08.16| 5페이지| 1,000원| 조회(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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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바울
    《바울》존 드레인, 이중수역, 초판발행: 1989. 8. 30, 도서출판 두란노레포트를 써야 되기에 「바울」을 읽게 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이런 단순한 이유 말고도 나에게는 특별한 동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바울 이라는 주제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으며 한번쯤 연구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적부터 신앙의 선구자들에대해 관심이 많던 나는 이번 학기 신약개요Ⅱ을 수강하면서 1,2,3차 선교여행.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 등으로 잘 알려진 바울이라는 인물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되었고 그에대한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려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고 전파하게된 사람으로 그가 쓴 서신서들은 시간은 초월하여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에 대해 전반적으로 고찰한 「바울」의 저자는 존 드레인(Dr. John drane)으로 그는 맨체스터 대학에서 바울을 연구하였고 일반학교들에서 종교교육학을 가르쳤다. 현재 영국 스털링 대학교의 종교학 교수로 재직중이며 그의 저서로는 Jesus and the four Gospels, The old Testament Story, The Life of the Early Church, Paul, The Old Testament Faith을 볼 수 있다.제 1장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우선 바울의 외모를 살펴보면 보잘 것 없었는데 휜다리와 메부리코에 대머리로 눈썹은 서로 맞닿았고 단신의 다부진 체구를 가진 호감에 찬 사나이라고 한다. 그는 대학도시이며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인 다소의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동네 회당에서 정기적인 교육을 받으며 유대인들의 전통들을 익혔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옮겨 가말리엘의 제자가 되었고 바울을 가르친 가말리엘은 힐렐학파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 속에는 이방인들의 자리가 전무하다는 샴마이학파와는 달리 이방인들을 환영하고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전도를 하였다. 바울이 처음으로 로마제국의 비유대인들을 위하여 얼마나 큰 일이 기다리고 있는 지를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알았다. 그는 충실한 바리새인이었기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인간들을 위해 성취해 주신 귀한 사역의 중요성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바리새주의는 실상 바울이 자신의 결점을 비춰보는 거울이 된 것이다.당시에 만연했던 철학파들 중 스토아 학파는 인간의 의무와 인류의 연합을 강조하는 윤리적 교훈으로 바울이 가장 맘에 들어했을 것이다. 독일의 신약 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바울의 논리 전개가 스토아 학파의 스타일과 흡사한 경우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바울은 실제로 스토아 철학의 사상들에 익숙하였고 그 사상에 동감했을 것은 틀림없다. 그렇지만 바울의 기독교와 스토아 철학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두드러지게 다른 점이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신은 추상적인 인간의 이성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신은 너무 추상적이고 불투명하다. 또한 스토아 철학은 구원을 자족에서 찾았다. 그것은 미래의 소망이 없는 절망의 종교였다.1세기 로마 제국전역에는 신비종교로 알려진 이상한 사이비종파들이 많았다. 이러한 신비종교들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피상적인 유사점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것은 둘 다 로마로 왔고 추종자들에게 구원 을 제공하였다. 또 양편 다 입교의식과 성식을 행하였고 그들의 구주신을 주 라고 불렀다. 한때 초대교회에 신비종교로부터 개종한 자들이 그들의 신앙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와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사성으로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예수의 단순한 도덕교훈을 일종의 신비종교 속으로 이끌어 넣어 변화시키려 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신비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타종교와의 타협을 항상 배격하였으며 이방인들이 기독교에 감명을 받은 이유는 그것이 타종교와는 달랐기 때문이다.바울의 배경에는 세계 3대 사상계 즉, 유대, 헬라, 신비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바울을 단순히 자신의 문화적 환경이 배출한 자연적인 산물로 간주한다면 어리석은 판단이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으로 보고 주님이 다른 어떤 출처의 능력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는 것을 인정했고 다자신의 생애를 뒤바꾸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는 예수님의 빛과 음성을 듣고 크리스천의 믿음을 증오하는 사람에서 기독교 최대의 주창자가 되었다.바울은 세례를 받고 다메섹에 있는 크리스천들과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크리스천 교제에서는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남녀들과의 연합이 가능하다는 것을 체험하였으며 그 후에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된다. 바나바가 나서서 바울의 개종 사실과 다메섹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이야기를 대변해 줄 때까지 그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예루살렘의 크리스천들은 바울을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으나 바나바는 그를 잊지 않고 바울과 함께 안디옥교회에서 1년 간 동역을 한다. 이때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예루살렘의 대흉년을 예언하고 이에 안디옥 교회는 동료 교우들을 돕기 위하여 구호금을 바나바와 바울에게 전달케 하였다. 그리하여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바울의 특수 사명은 이방인 선교였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나누던 자리를 강경파 유대인들의 도착으로 떠나자 바울은 이를 신랄하게 책망하였다. 이 사건은 바울의 전 사역을 통해 항상 논쟁을 야기시켰던 이방인교인들에 대한 유대 크리스천들의 부당한 요구와 편견을 노골적으로 면박한 최초의 실례이다. 바울은 초기부터 개인주의자였다. 그의 사명은 그의 회심처럼 독특하였다. 안디옥에서 처음 들렸던 유대 크리스천들과의 불협화음은 바울이 자신의 선교 소명을 달성키 위해 이방선교를 확대해 감에 따라 조만간 천둥소리로 변하게 되었다.제 3장 바울과 율법주의자들과의 대결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돌아온 바울과 바나바는 따로 정식 선교의 길을 떠났는데 바울은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에서 처음으로 로마의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바울과 바나바 이 두 사람은 지나는 도시마다 먼저유대 회당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였다. 또한 돌아가는 길에 크리스챤 회중으로 형성된 새 신자들을 재방문하여 새로 받은 그들의 믿음을 다져주고 장로들을 임명하였다.바울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자기 삶의 주인으로 기꺼이 수락할 의사가 있으면 첫째는 사도권을 밝힘으로서 자신의 전한 복음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갈라디아 교회에서 활동하는 거짓 교사들의 허구적인 주장을 반박하기 위함이고, 마지막으로 할례를 비롯한 율법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름을 강조하기 위함이였다.제 4장 선교사 바울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과 중대한 모임을 가진 후에 새로운 열심히 이방세계로 다시 나아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로마제국에 대 변혁을 일으키려는 굳은 결의를 갖고 있었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이 남부 갈라디아에서 개척한 회중들을 훼방한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 그들을 만나고 싶어했다. 분명 크리스천은 유대의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으나 그래도 예루살렘의 결의 내용을 수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하였다. 그래야만 유대 크리스천과 이방크리스천의 교제가 유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바울은 빌립보에 방문하게 된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크리스천이 된 루디아라는 여인의 집을 통해서 선교활동의 본부로 삼을 수 있었고 예수그리스도의 신앙이 인종과 사회적 장벽을 헐고 남녀간의 일치된 교제를 가져온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귀신들린 여종을 자유케 해주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바울과 실라는 감옥으로 던지워졌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환경을 탓하지 않고 밤새 찬양을 하였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케 된다. 에덴에서는 바울은 유대교와 성경의 기초지식이 전혀 없는 에덴 사람들에게 이전과 는 다른 방법으로 전도한다. 바울은 우상숭배를 Xenophanes의 논법을 인용하여 일종의 무지라고 단정짓고 회개와 참된 유일신을 경배하라고 촉구하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의 부활시킴으로서 확실한 증거를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를 내고 역겨워하였으나 소수의 결신자들이 나왔다. 고린도에서 바울은 차후 18개월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을 위해 고린도를 본부로 삼았다. 또한 고린도 주민다수가 크리스천이 되고 영향력있는 교회가 세워진다. 또한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서신을 통해서 교회안의정보가 담겨 있다. 내용을 나누어보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세상에서의 삶, 교회에서의 삶이다.첫째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고린도 도시의 특징은 다원적인 사회라는 것이다. 다양한 영적, 지적 배경을 가진 사람이 모인 곳이였기에 기독교 신앙에 대한 상이한 해석을 하고 있었다. 도덕폐기론자, 율법주의자, 철학자, 신비주의자로 나누어져서 서로 다른 주장을 나타내고 교회 안에서의 많은 분열을 일으켰다. 바울은 이 문제를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여기고, 기본적인 말씀을 반복적으로 들려주었다.둘째, 세상에서의 삶에서 크리스찬의 자세와 크리스천과 민법, 매일의 삶을 다루었다.셋째는, 교회에서의 삶, 예배의 자유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리스도안에서 인종이나 계급 및 성별의 차등이 없다는 것과, 그리스도가 크리스천들에게 새 자유를 수여했다는 것이다.로마는 제국의 전도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전략지였고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피력하는 종합적인 진술을 실은 편지를 제국의 수도인 로마의 교회에 보냄으로써 방문준비를 진행시켰다. 로마서에서는 신자들의 삶을 지배하고 싶어하시는 살아 계신 주님에 대한 혁신적인 메시지와 크리스천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순복하며 신자들의 삶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에 마음을 열 것을 요구하였다.제 6장 바울의 로마 기착바울은 로마제국 전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높은목적을 가지게 되지만 유대인들은 바울을 경멸하였다.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로 인해 구약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서 예수가 곧 율법의 완성자였음을 믿은 반면 유대인들은 구약의 참뜻을 오해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바울은 동족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의 표현으로 예루살렘의 유대인교회를 위해 이방인 교인들로부터 헌금을 모아 보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이 성전을 오염시키었다고 고발하고 현장에서 죽이려고 하였다. 바울은 가이사랴에 가서 벨릭스에게 심문을 받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로마에서 판결을 받게 된다. 도중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바울은 드디어 남부 이태리에 있는 보디올에 기항하여 지역 다.
    독후감/창작| 2005.08.16| 5페이지| 1,000원| 조회(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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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처음 과제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 나에겐 너무나 큰 기대로 다가왔다. 그것은 현재 내가 가지고 있던 궁금점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과제를 받을 시점에 나는 루터와 칼빈에 대해서 연구를 하던 중이었다. 종교개혁자인 루터는 오직 믿음과 성경이라는 구원의 해결점을 시사해주었고 칼빈은 예정설로서 구원받은 자의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종교개혁기가 지난 오늘날 우리는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 루터와 칼빈의 가르침을 본받아 살아가고자 하고 있으나 급변하는 시대와 유럽과 한국이라는 토양, 그리고 한국교회의 현실을 비추어 봤을 때 성도들의 삶의 방향성이 모호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고민을 안고 있을 때 나에게 주어진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은 박하사탕을 문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과연 세상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너무도 기대가 되었다.●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성경은 그리스도인이란 세상 속에 있는 것이며 그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동떨어져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기에 그리스도인은 폐쇄된 집단을 만들어 그들끼리만 모여살면서 다른 사람들과 섞이기를 거절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있어야 하지만, 예속되거나 세상을 의지해서는 안되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인간 활동에 전력을 다해 일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특수한 역할을 수행하며 이것으로 인류역사가 달라진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다름 아닌 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함이다.빛은 어두움을 몰아낸다. 그것은 생명과 죽음을 분리시킨다. 그리고 빛은 세상 역사의 의미와 방향을 제시해주고 설명해준다. 역사의 과정 속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대부분 논리로 설명 할 수 없거나 확실성이 없는데 이러한 논리를 제공해주는 것이 바로 교회이며 빛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생명을 이루는 한 요소가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나아가 세상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드러내며 자신이 도구로 쓰임 받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특히 평신도들이 세상에서 동떨어져 살기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세상은 침투력과 파괴력, 그리고 강제성을 더해가고 있으며 그가 세상에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명력을 발휘하기란 어렵다. 세상의 영향으로 우리의 삶을 반성해보거나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수행하기가 힘이 든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류 전체의 일부분이므로 다른 사람들과 연계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보다 순수하다고 할 수 없으며 세상의 죄와 무관하다고 선언할 수도 없다. 현대인이 직면하는 것은 개인의 죄가 아니라 인류의 죄이므로 죄에 관한 한 모든 사람이 연계되어 있으며 이 연대성은 공간적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평신도의 삶 속에서 더욱 절박한데 그가 최선을 다하여 이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면 두가지 방면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오직 ‘영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은 온전한 영적 삶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육적 삶으로 나누어 불신자들과 똑같이 행동할 때에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게 된다. 두 번째 해결책은 세상의 활동들을 ‘도덕화’ 혹은 ‘기독교화’하려는 시도이다. 세상 모든 것을 기독교적 색채를 입히고자 한다면 세상의 상황을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크게 거리낌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 수밖에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타협하여서도 안되고 기독교적 화상으로 세상을 도색하려 해서도 안된다. 세상 속에 산다는 것은 세상의 임금 곧 사탄의 영역 안에 산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경건하려고 노력하여도 세상의 죄에 동참할 수 밖에 없는 죄인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다양한 종류의 삶을 통하여 인류의 죄에 동참한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여 살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연유되는 죄도 기억해야 하며 우리가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거나, 인간을 행복하게는 못해주어도 최소한 좀 더 좋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버려야 하지만 자포자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는 죄와 은혜란 긴장 속에 처해 있다. 우리는 이 긴장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역할이란 무엇일까? 무엇보다 그는 불신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파악해서는 안 될 것이며 모든 정치, 경제적 상황이 안고 있는 진정한 영적 문제들을 발견하는 것이 그의 할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복음과 경제적 현실의 접촉점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을 말하며 우리가 처한 경제적 현실은 이 복음이 없으면 변화가 불가능한 것이다.세상 속에 처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 빛’과 같은 개념에 합치되는 행동을 하도록 노력해야하며 매일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요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기독교윤리로서 그 핵심은 믿음의 전투 즉, 종말론적 투쟁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전투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윤리란 심판과 은혜의 두 요소가 우리 마음속에 항상 실재함을 의미한다. 기독교윤리는 우리가 처해 있는 변화되는 상황과 관계되며 우리의 관심사는 주어진 환경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이다. 또한 기독교윤리는 교회의 삶을 위하여 필요하다. 기독교윤리는 하나의 선언으로 모든 문제에 영구적 답변을 주는 거시 아니라 본질적으로 임시적이어야 하며, 개정하고, 재검토하고, 새롭게 만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윤리는 말씀의 선포로부터 분리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바로 사탄의 공작을 파괴시키고 세상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돕기 때문이다. 세상은 기독교윤리가 실천됨으로 보존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보존에 참여해야 하며 효율적으로 봉사해야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보존에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길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특수한 역할을 수행하며 세상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에 따라 보존하는 것이다.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의무는 영적 차원에서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즉, 세상의 진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이해하고 선포하는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다. 세상은 자신을 보존할 수도, 영적 상황을 치료하여 다른 분야를 통제할 능력도 없다.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치명적 경향의 깊이와 영적 실체를 이해하여야만 한다. 이책의 다음 장들에서는, 현시대에 있어서 ‘죽음을 향한 의지’의 몇 가지 표현들과 이에 대처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다루게 된다.●기독교의 혁명성그리스도인의 삶이 혁명적인 이유는 그들이 혁명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 의지하는 예수가 혁명적인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혁명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너무 많은 일이 진행되고 많은 해결책들이 제안되기에 ‘혁명적’이라 부르길 좋아한다. 세상에 혁명이 요청되고 있다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서구문명이 기계적이고 이성적인 관점에서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으나 그로인하여 세계는 치명적인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인간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안정감과 희망을 거의 상실하였고 더 이상 행복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시대가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그에 대한 대안이 없으며, 그래서 혁명이 불가피함을 고려할 때에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종말, 즉 말세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시대의 사람이든 자신들의 시대가 예외적이고 극적이며 최종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말세라는 주장에 대한 답변은 이러하다. 이 시대의 인간들이 느끼는 고통과 희만, 그리고 염려이며 오늘날 사람들이 거의 희망을 갖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며 더욱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매순간은 역사적이 아니라 종말론적이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히 사망을 피할 수 없음과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현재가 종말인 것, 즉 심판과 은총에 직면한 최후인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은 종말론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매순간을 살아야 할 것이다.흔히 혁명이라는 단어는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로 해석되고 만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혁명이란 국가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고, 인간을 경제적 기능에 더욱 종속시키며, ‘인격’을 대중문명 속으로 완전히 함몰시키고 만다. 이러한 혁명은 우리의 상황의 비극적 결과를 변경시킬 아무런 희망도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이 시대가 그토록 혁명을 필요로 하는데도 불구하고 현세대의 근본적인 특징을 이루는 심각한 부동성과 혁명 불능으로 일종의 형체없는 사회가 만들어지며 따라서 현시대의 투쟁은 진정한 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개인들과 집단들의 투쟁이다. 또한 사람들은 ‘사실’에 대한 존경심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하여 무지하게 되고 사실과 진실을 동일시하고 있다. 사물과 세상을 다스려야 할 인간이 사실들의 노예가 된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5.08.16| 4페이지| 1,000원| 조회(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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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동서교회의 분열과 과정 평가C아쉬워요
    동서교회의 분열과 과정동방교회는 서뱡교회처럼 독립적이 될 수 있었던 적이 한번도 없다. 그 이유는 동방교회는 황제의 감시 하에 있었기 때문이고 서방교회가 암흑시대의 문명의 혼란 속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대하여 그에 상당하는 기간 동안 동방교회는 존속해 있는 희랍로마의 문명 전통과 항쟁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의 몰락 후 서방교회는 제위 측으로부터 정치상의 강대한 경쟁상대를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제국의 몰락을 둘러싼 혼돈한 문명 상태로부터 오는 문제들에 당면할 때마다 점점 세력을 증대하여 갔다.1. 분리의 원인콘스탄틴대제가 330년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것은 교회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드디어는 종교적으로 동과 서로 분리하는 길을 여는 것이 되었다. 데오도시우스는 제국의 동부와 서부의 관할을 395년 별도의 장관 하에 두었다. 5C말경 서방의 로마 제국의 몰락함과 동시에 동서교회의 완전한 분리가 실현되었다. 동방의 교회는 황제의 관할하에 있었으나 로마의 감독을 그 통제 하에 두기에는 너무 멀었다. 서방에 있어서 강력한 통제자가 없는 동안에 교황은 위급한 경우를 당하여서 영적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현세적 지도자도 되었다. 이리하여 양 교회는 현세의 권력에 관한한 전혀 다를 모양을 나타내게 되었다.지적인 모양에 있어서도 성방은 동방과 달랐다. 라틴계의 서방 교회는 어느 편이냐 하면 실제적인 제도를 생각하는 편으로 기울고 정통적인 교의를 세우는 일에는 크게 머리를 쓰지 않았다. 동방의 희랍정신은 어느 편인가 하면 신학상의 문제를 철학에 따라 해결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325년부터 451년까지의 신학논쟁은 거의가 동방에서 일어났으나 같은 문제가 서방에서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아니하였다.2세기 중엽 부활제를 언제 축하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겨 교회의 양쪽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켜 버렸다. 이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가 언제나 양 교단 사이의 관계를 비우호적이게 하였다.양 교회 사이에 있는 또 하나의 차이는 독신제에 관한 것이었다. 동방에서는 감독계급보다 낮은 교구성직자는 모두 결혼이 허락되어 있었으나 서방에서는 결혼이 허락되어 있지 않았다. 서방에서는 사제는 얼굴을 면도질해도 좋았으나 동방에서는 성직자는 수염을 기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현재에는 너무나 자세한 일 같이 보이나 당시에 있어서는 양쪽 교회로서 중대 문제였던 것이다.양 교회는 또 신학상의 사항에도 차이가 있었다. 867년 동방의 총 주교 코티우스는 니콜라우스 1세와 서방교회를 이단이라 비난하였다. 그것은 서방교회에는 니케아 신조안에 ‘그리고 아들러부터’의 조항을 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방에서는 신학자들은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양쪽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동방 교회는 이 사상을 승인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2세기의 부활제 논쟁에서 시작된 일련의 논쟁이 동방과 서방의 관계를 격화시켰다. 논쟁 때마다 적의는 증대하였다. 8세기와 9세기에 있어서 동방 교회의 성상예배 논쟁은 많은 악감정을 일으켰다. 726년 레오 3세는 동방의 황제로서 회화와 조상 앞에 무릎꿇는 것을 잉체 금지하였다. 그리고 730년에 황제는 십자가 외에 일체의 것을 교회에서 제거할 것을 명하고 그것을 파괴해 버리고 이리하여 회교도로부터 우상 예배라 불리워질 근거를 제해버렸다. 동방 교회에 있어서 세속인의 신앙부흥의 이 시도는 성직자의 반대를 초래하였다. 서방에서는 교황도, 샤를마뉴 대제조차도,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표를 사용하는 일에 찬성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동방교회의 일에 이처럼 서방 교회가 간섭하므로 양쪽 사이의 긴장이 증가하였다. 서방교회는 예배 때에 화화와 조상을 계속 사용하였다. 그러나 동방 교회는 조상을 드디어 말살하였다. 그러나 성화만은 그냥 두었다. 그것은 보통 그리스도의 초상화이고 경례를 해도 좋으나 예배해서는 않되었다. 예배는 하나님에게만 속하기 때문이다.9세기 중엽 교황 리콜라스 1세가 동방교회의 총주교의 임명에 간섭하였을 때는 그것이 도덕적 근거로부터는 옳은 것이었다고 하여 동방의 사람들은 특히 분개하였다.2. 1054년 분리1053년에 이들의 차이와 악감정의 전부가 한 점에 입증되었으나 그것은 분명히 사소한 일에 불과하였다. 1043년부터 1058년까지 콘스탄티노플의 총 주교였던 미카엘 케르라리우스는 서방 교회가 성찬식에 누룩이 들지 않는 떡을 쓴 것을 비난하였다. 이와 같은 사용은서방에서는 9세기 이래 점차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황 레오 9세는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추기경 훈베르트와 다른 두 사람의 대표를 동방에 파견하였다. 의론이 진행됨에 따라 의견의 상이점은 커져갔다. 1054년 7월 16일 로마 대표는 드디어 성 소피아의 한 성당의 교단에서 총주교들을 제명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최초의 대분리에 의해 교회의 일치는 찢어졌다. 이때 이후 로마 카톨릭교회와 희랍정교회는 각자 자기 길을 갔다.3. 분리의 과정정치적으로 395년에 동서로마제국이 분리되어 힘을 잃다가 드디어 476년에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동서간의 관련성이 점차 희박하게 되었다. A.D.800년에 교황이 프랑크의 샤를마뉴대제에게 서로마제국의 왕관을 수여함으로 교황청과 동로마제국과는 정치적으로 무관함을 선언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국간의 전쟁으로 인종들의 이동이 심해 인간성의 차이들에서 오는 정치적, 문화적 차이가 한 요인이 되었다. 즉,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는 철학적이어서 계속하여 많은 논쟁이 쉴 사이 없이 벌어졌다. 그에 반해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교회는 실제적이러서 실제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니케아신조 중에 ‘성령이 아들로부터 나왔다’는 로고스조항 때문에 동서교회가 계속 불만을 갖고 있었다.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와의 교권 쟁탈전 때문이었다.
    인문/어학| 2005.08.16| 3페이지| 1,000원| 조회(1,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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