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사교과서 분석 - 선사시대》※ 목차 ※◈ 여는 마당◈ 본 마당1. 한국인의 기원(1) 연구동향(2) 교과서 분석(3) 수업 속에서의 역사2. 단군, 역사와 신화 - 단군릉 사건을 중심으로(1) 연구동향(2) 교과서 분석(3) 수업 속에서의 역사3. 고조선의 영역(1) 연구동향(2) 교과서 분석(3) 수업 속에서의 역사◈ 맺음 마당◈ 여는 마당선사시대라는 것은 문자로 기록된 역사가 없던 시대를 말한다. 때문에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남겨 놓은 여러 가지 흔적들로만 알 수 있다. 돌을 깨뜨려 도구로 사용했던 구석기시대와 깨뜨린 돌은 날카롭게 갈아서 사용했던 신석기, 그리고 청동을 사용했던 청동기시대가 선사시대에 속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는 우리 인류역사의 99%를 차지하고 있는 시대로 인간이 어떻게 만물의 영장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 국가의 역사, 고장의 역사를 배우기에 앞서 반드시 알고 넘어 가야 하는 시대라 할 수 있다.선사시대에서 3가지를 골라보았다. 첫 번째는 한국인의 기원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할지이고, 다음은 북한의 단군릉 사건을 중심으로 단군을 신화로 이해할 것인지 역사로 이해할 것인지의 문제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조선의 영역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본 마당Ⅰ. 한국인의 기원(1) 연구동향한국인의 기원과 형성문제는 우리 민족사의 원류와 시점설정을 위해 해결해야 될 기본적인 과제이다. 우리 민족사가 원시사회로부터 발전해왔음을 밝히는 데에는 먼저 그 출발로서 한국인의 기원과 형성문제가 분명히 해명되어야 그 이후 민족사의 발전과정이 합법칙적으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우리 민족의 기원은 어디일까 하는 점은 사실 한국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뜻있는 학자들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고, 그 결과 현재는 대체로 세 가지 기원설로 집약할 수 있다.① 북방기원설 : 이 설은 세계 역사 연구의 큰 흐름을 타는러한 자연환경의 변화는 인간 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 우리 민족은 황색피부, 검은 색 머리 등의 신체적인 특징을 지녔으며, 인종적으로는 몽고 인종에 속하고, 어족으로는 터키어, 퉁구스어, 몽고어와 함께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남방계보다는 북방계와 관련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 『국사』우리 조상들은 대체로 중국 요령(랴오닝)성, 길림(지린)성을 포함하는 만주 지역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에 넓게 분포하여 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부터이며,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의 기틀이 이루어졌다 … 우리 민족은 인종상으로 황인종에 속하고, 언어학상으로는 알타이 어족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하나의 민족 단위를 형성하고, 농경 생활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였다.☞ 초등학교 교과서는 한국인의 기원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중학교 교과서는 한국인의 기원에 대해 통설인 북방기원설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고, 고등학교 교과서는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옆에 제시된 그림과 함께 보았을 때, 본토기원설 쪽을 따르는 것 같다.(3) 수업 속에서의 역사21세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민족 문화의 기원을 찾는 일이 과연 중요한가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촌이니 세계화니 하며 떠드는 이 시점에 과연 민족을 찾는 일이 그리 중요한 일인가 하고 말이다.최근에 독립한, 인도양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 동티모르는 원래 자주 독립 민족이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굳세게 지키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외세의 침략으로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고, 포르투갈의 지배를 벗어나면서부터는 인도네시아에 합병당해 스스로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구긴 채 박해당하며 살아왔으나 그들은 엄청난 피의 대가를 치르면서 최근 인도네시아라는 거대한 나라로부터 독립했다.또한 20세기 세계사의 최대 사건인 1917년 볼셰비키혁명은에도 이 무덤이 ‘단군릉’이라고 알려져 있고 그렇게 믿어왔으므로 이것은 틀림없는 단군의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이 밖에 1926년에 편찬된 「강동지(江東誌)」에도 이와 꼭 같은 기록이 있고, 강동에 단군릉에 있다는 데 대해서는 「리조 실록」(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군데 기록되어 있다.「숙종실록」에는 1697년 7월 14일조에 서쪽 방면의 일들에 대한 임금의 물음에 대답한 리인엽의 말과 관련하여 『강동의 단군묘와 평야의 동명왕 묘를 매해 수리할 것을 청하였는데 모두 승인하였다.』라고 쓰여 있고,「영조실록」의 1739년 5월 23일조에는 왕이 『단군과…여러 왕의 무덤을 수리하라고 지시하였다.』라고 쓰여 있으며, 「정조실록」1786년 8월 9일조에는 승지 서형수의 제의에 의하여 『단군묘를 수리하고 묘를 지키는 호(묘지기)를 두었다.』라고 쓰여 있다는 근거를 들고 있다. 또한, 「고려사」지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평양부 소속현인 강동현의 박달곶촌은 대박산, 아달산 등 주변의 산 이름들과도 결부되면서 단군과 관련된 마을 이름이라고 볼 수 있으며, 강동현 고적란에도 올라 있으므로 단군과 관련된 고적지가 틀림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주장한다.둘째,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 무덤 내에서는 남녀 각 한 사람분의 뼈가 발견되었고, 그중 남자 뼈를 최신의 과학적 방법으로 연대를 측정하니 5011년 전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이 무덤은 단군의 무덤이 틀림없다는 것이다.믿기는 어렵지만, 북한 학자들은 “현대 물리학의 첨단기술의 하나인 전자상자성공명법을 적용하여 두 개의 기관에서 각각 24회, 30회씩 측정한 결과, 총 54회의 측정 결과가 단일하게 나왔다”고 말한다. 결국, ESR로 얻은 무덤 주인공의 나이가 이러하므로 구전과 문헌이 전하는 대로 그것은 단군의 무덤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셋째, ‘단군릉’ 주장의 신빙성을 훼손할 수도 있는 중요한 사실인 무덤의 구조가 고구려 양식인 점에 대해서는, 이 무덤이 고조선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단군을 섬기던 고구려 사람들에 의해 개축되었기 때문에 고릉 복원 및 단군 민족주의 강조는 주체적 민족주의라는 측면으로 이해 가능하다. 경제적 위기 속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회복하고 세계 속의 우리 민족 공동체의 동질성을 찾고 러시아?중국의 사회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그런데 여기서 북한의 단군릉 복원과 주체적 민족주의운동이 남한 재야사학자들의 상고사 찾기 운동과 연결되는 점이 주목된다. 남한의 재야사학자들은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단군신화로 표현된 시기를 사실로 인정하며 상고사의 복원을 시도한다. 그들의 주장은 단군릉 발견 이후 북한학계의 주장과 동일하다.이러한 남한 재야그룹의 주장은 경제적 위기 속에서 세계 속의 한민족 공동체의 동질성을 찾고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그동안 고조선 연구가 너무 문헌 자료가 없고 일제 식민지 시대의 연구 성과를 참조하는 가운데 한사군이 강조되거나 대동강유역 중심의 후기 고조선만이 부각된 데 대한 반성과 비판의 의미가 있었다. 특히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이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의 종교운동이나 사상운동 차원이 아닌 학문적 영역에까지 들어와 단군의 역사적 실재를 주장하고 역사서술의 개정을 주장하는 것 등은 역사 및 역사학의 발전에 역행하는 것이다.근대역사학은 그 기본적인 학문적 토대를 객관적인 합리성의 추구에 두고 있으며, 엄정한 사료 비판과 실증은 그것을 구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이것이 바탕이 되지 않는 그 어떠한 주장도 공허한 메아리이며, 과거에 대한 환상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단군릉은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초등학교 『국사』… 우리 조상들은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세웠다. 윗글은 고조선의 건국을 알려주는 단군 이야기이다. 유미네 반에서는 단군 이야기를 읽고, 고조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2) 교과서 분석중학교 『국사』청동기 문화가 형성되면서 만주 요령 지방과 한반도 서북 지방에는 족장이 다스리는 많은 부족들이 나타났다. 단군은 이러한 부족들을 통합하문제에 대해 교과서보다 한층 더 심도있게 이해하고 생각해 보게 한다.다시찾는 우리역사 (개설서)13세기에 편찬된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단군조선을 한국 최초의 국가로 기록한 이루 조선왕조에서는 이를 정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단군조선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만한 고고학 자료가 없고, 문한자료 또한 신화를 토대로 기록한 것이어서 오늘날 이에 의문을 표시하는 학자도 적지 않다. 그래서 단군조선 대신 고조선이라는 호칭을 널리 쓰고 있다. 하지만 신화나 문헌기록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으므로 7백년 간 정설로 되어온 단군조선의 호칭을 부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 이상과 같은 단군신화에는 현대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이를 잘 음미하면 몇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다 …단군시황에 담신 주체성, 도덕성, 낙천성은 비단 고대인의 세계관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 후 수천 년을 두고 한국인의 문화적 유전인자가 되어 우리의 핏줄에 흐르고 잇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단군에 대해서 개설서의 입장은 색다르다. 단군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신화나 문헌기록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으므로 단군조선이라는 호칭을 부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단군은 신화 속 인물임을 전제로 하고, 신화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실들을 지적해주고 있다.(3) 수업 속에서의 역사북한학계의 단군릉에 대한 주장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으며, 정치적 논리가 짙게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남한의 단군 인식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 단군을 국수주의나 배타주의에 이용하거나 심지어 신앙대상으로 받드는 것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남한 사회에는 여전히 단군을 신화 속의 인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따라서 단군은 오히려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여기서 우리는 단군 및 단군릉의 문제와 관련하여 ‘사실로서의 단군’ 문제와 ‘인식으로서의 단군’ 문제를 분리해야 함을 절실히 느낀.
≪ 국사 교과서 분석 - 근대≫※ 목차 ※◈ 머리말Ⅰ. 일제 경제 침탈에 대한 논의(1) 연구동향(2) 교과서와 개설서 비교분석(3) 교수방법에 대한 생각Ⅱ. 애국계몽운동(1) 연구동향(2) 교과서와 개설서 비교분석(3) 교수방법에 대한 생각Ⅲ. 3?1운동(1) 연구동향(2) 교과서와 개설서 비교분석(3) 교수방법에 대한 생각Ⅳ. 동학 농민 운동(1) 연구동향(2) 교과서와 개설서 비교분석(3) 교수방법에 대한 생각◈ 맺음말머리말근대화란 정치적으로는 개인의 권리가 신장되고 국민 각자가 공동체 구성원의 하나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제 사회가 형성되어 누구나 자유로이 생산 활동에 참여하여 풍부한 자본력과 합리적인 경영 방식에 의한 생산력의 증대를 특징으로 한다. 사회적으로는 사회 각 계층이 봉건적 사회 체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 되며, 사상적으로는 절대적 가치 체계에 의한 불합리한 구질서에서 합리적인 사고가 구현되는 사회를 말한다. 한국사에서 근대는 안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한 근대적인 요소를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한 채 19세기 후반에 문호를 개방하고 근대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아 내지 못하고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일제 가혹한 수탈을 감행하였고 나아가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즉 한국사 근대 이해에 있어서 일제의 영향은 필수불가결한 것이고 이를 왜곡하지 않고 바르게 이해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이에 아래의 쟁점들을 위주로 근대 사회의 면모를 살펴보도록 하자.Ⅰ. 일제 경제 침탈에 대한 논의1. 연구 동향개항기에 대한 연구는 일제하 일본 관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들은 한국경제의 정체성을 내세우면서 한국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며 이러한 주장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일본의 사방박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일본의 주장에 대해 1960년대 이후 한국학계에서는 식민사관의 극복차원에서 자본주의 맹아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조선사회정체론을 부정하면서강점기의 경제에 관해 자본주의 맹아론, 내재적 발전론의 관점으로 서술. 근?현대사교과서들은 조선의 경제가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적 침탈로 인해 자주적으로 근대자본주의로 나아가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준거안과 교육과정에서 제시하고 있는 내재적 발전론-식민지수탈론에 입각한 근대로의 전환 인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개항기-한말의 역사를 내재적 발전론-식민지수탈론, 침략과 저항의 틀 속에서만 서술하게 되면 민족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계층?계급간의 대립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고 책임을 모두 일제에 떠넘김으로써 동아시아 3국 가운데 왜 조선만이 식민지가 되었는가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을 어렵게 한다.) 실제로 근?현대사교과서에는 식민지화 원인에 대한 다각적이고 종합적인 접근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개설서에서 역시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경제침탈의 피해에 대서 서술하고 있다.일본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하면서 이와 병행하여 식민지체제로 바꾸어갔다. 식민지적 경제 구조는 일본의 자본주의 발달을 위한 원료 및 식량공급지와 우리의 민족자본 성장과 농촌사회의 안정을 급속도로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다시찾는 우리역사 p502)여기에 덧붙여 토지약탈정책과, 금융 지배, 고리대에 의한 수탈 등을 언급하고 있다.결국 우리나라는 국권상실과 더불어 일본 자본주의의 원료 공급지와 상품시장 그리고 조세수탈의 일방적 피해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시찾는 우리역사 p524)굶주림을 면키 어려울 중도의 가난은 일제의 강점 이후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일제는 1911년부터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확립한다고 떠들어 대면서 이른바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였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p89)해마다 막대한 양의 쌀이 일본으로 팔려 갔는데, 그 쌀은 대부분 지주가 소작인들로부터 받은 소작료였다. 쌀값은 당연히 치솟았고, 지주들의 재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천석꾼이니 만석꾼이니 하는 큰 부자들이 곳곳에서 생겨났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p90)대안교 논리와 성과에 대해서도 긍정론과 부정론이 있다. 애국계몽운동이 국가멸망의 위기에서 총을 들지 않은 소극적인 운동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부정론이다. 박찬승은 애국계몽가들의 실력양성론은 ‘선실력양성 후독립’을 기조로 하여, 실력양성 이전까지는 일제의 한국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논리가 되며, 결과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지배를 용인할 수밖에 없는 논리인 ‘선실력양성 후독립론’은 국권회복운동론으로서 성립될 수 없다고 보았다. 주진오는 애국계몽운동이 민중의 계몽을 통해 애국심을 배양하기 위하여 교육?언론활동에 주력했지만, 그것은 현실의 급박함을 몰인식한 패배주의적, 나아가 투항주의적 발상이라고 지적했다.한편 일제의 보호국체제하에서 실력양성에 의한 국권회복을 추구한 애국계몽운동이 당시로서는 최선의 구국운동이었다는 긍정론이 있다. 신용하는 애국계몽운동은 실력을 양성하여 궁극적으로 자기 민족의 배양된 실력에 의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으로, 단기간 내에 민족 역량을 증강시키는 큰 성과를 거두어, 국권을 잃은 최후의 4년이 ‘대각성의 시대’가 되고 ‘민족역량 증강의 시대’가 되게 했다고 평가했다. 유영렬은 애국계몽운동이 국권회복과 동시에 국민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여 민족운동의 올바른 이념을 제시한 점, 실력양성론과 독립전쟁론을 결합하여 민족운동의 올바른 방략을 제시한 점, 근대교육과 독립군기지 건설 등을 통하여 민족독립운동의 장기적 기반을 조성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애국 계몽 운동이라는 용어는 정치단체의 운동, 식산흥업운동, 신교육운동, 언론기관의 계몽운동, 국학운동, 신문학운동, 민족종교운동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넓게 쓰이고 있다. 그런데 애국 계몽 운동이라는 용어는 당시대인들이 사용한 것도 아니며, 운동 자체의 성격을 전시기 일관되게 ‘애국적’인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한 점이 많기 때문에 문제점이 자주 지적되어 왔다.애국 계몽 운동에 속하는 대부분의 운동은 제국주의자들의 지배논리인 사회진화론을 그대로 수용하여 ‘선실력양인 사회관습을 타파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 것 등은 성과로 들 수 있지만, 일제의 지배 하에서 민족자본의 육성이나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 등은 원천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음을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애국 계몽 운동에 있어 단체의 활동과 역할에 대해서 연구가 많이 일어났다. ‘다시찾는 우리역사’를 제외한 나머지에서는 그 서술이 미비한데 하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시 단체의 임원들의 활동에 대한 서술 또한 약하여, 애국 계몽 운동의 전반적인 취지는 알 수 있으나 개별적인 활동 내역을 알 수 없었다.3. 교수 방법에 대한 생각애국심의 고취를 위해 평가가 확대?축소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바로 애국 계몽 운동의 평가다. 사실 애국 계몽 운동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다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의의를 지나치게 부각시켰다. 사실 계몽운동 단체에서 있어서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등에서 일본인 임원들이 활약한 사실이 있어 엄연히 계몽 운동에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학생들에게 객관적인 역사의식을 심어주는데 대단히 방해물이 된다.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교육에 반영된다고 하는 논리에 부합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진실로 객관적인 역사를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특히나 교과서로 수업하는 학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럴 때 교사의 역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Ⅲ. 3?1운동1.연구동향 - 3?1운동 연구에 있어서의 쟁점3?1운동은 우리 독립운동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연원이 깊으며, 영향이 넓은 독립운동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는 많은 세부 부문과 주변 분야를 포함한다. 그 중에서도 학계에서 쟁점이 되어 온 주제는 ① 3?1운동의 動因으로서 外因과 內因의 문제 ② 33인의 역할에 대한 평가 문제 ③ 민중의 역할과 주도층의 문제 ④ 3?1운동의 방법으로서의 폭력과 비폭력의 문제 ⑤ 3?1운동의 성공과 실패의 평가 문제 ⑥ 3?1운동이 타 약소민족에 미친 영향과 세계사적 의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쟁점이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2. 교과서와 개설서 비교 분석민족의 독립의지가 하나로 결집되어 폭발한 것이 3?1운동이었다.…국권을 강탈당하고 거족적인 독립 운동을 준비하던 민족 지도자들은 민족 자결주의와 2?8독립선언에 고무되어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국내외에 독립을 선포했다.…비폭력 독립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점차 무력적인 저항 운동으로까지 바뀌어갔다.(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p 343~344)본격적인 분비에 들어간 것은 천교도와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 대표들과 학생들 대표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만들고 독립선언식과 시위운동을 위한 체계적인 준비를 서둘렀다. 마침내 3월 1일이 왔다. 서울과 평양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는 아침부터 술렁거렸다. 정오가 지나자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예정된 장소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두시, 누군가 단상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역사적인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나지막한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만세!만세!만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기도 하면서 손을 잡은 시위행렬은 이날 이어졌다.(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2)…분노와 각성은 계층적으로나 지역적으로 한층 확장되면서 민족의 역량이 하나로 결집되어 갔다.…발생한 직접적인 원인은 국내외의 특수한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민족대표들은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대원칙에 따라 운동을 진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운동은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출발하였지만 시위가 확산될수록 폭력적 형태로 발전해 갔다.(다시찾는 우리역사 p 528~530)3?1운동의 쟁점 중 운동의 動因에 대해서는 교과서나 대안 교과서에서는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량으로 인해서 일어났다고 보고 있는 반면, 개설서에서는 대외적 요인과 대내적 요인을 모두 설명하고 있다.3?1운동의 33인의 민족 대표에 대해서는, 교과서나 개설서 모두 이들의 한계점과 이후의 변절 등에 대한 언급이 없어 그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방해하고 있다. 이들이 오직 민족주의적이었다고만 보거나,
< 현대사 다시보기 >※ 목차 ※1. 한국 전쟁(1) 연구동향(2) 교과서 분석(3) 수업 속에서의 역사2. 4.19 혁명(1) 연구 동향(2) 교과서 분석(3) 수업 속에서의 역사3. 박정희 신드롬(1) 연구 동향(2) 교과서 분석(3) 수업속에서의 역사* 참고 문헌Ⅰ. 한국 전쟁(1) 연구동향한국전쟁은 한국 현대사가 경험한 최대의 민족적 비극이었다. 1948년 남북에 분단정권이 수립된 이후 고조되었던 국내 냉전이 열전으로 확산된 한국 전쟁은 미국ㆍ유엔ㆍ중국 등이 개입하면서 국제전으로 성격이 변화되었고,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일단락되었다. 그 여파는 민족 내부적으로는 분단체제의 공고화와 상대편에 대한 증오심ㆍ적대의식을 가져왔으며, 남북대결구도와 대립의식은 이후 한국현대사의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① 한국 전쟁의 원인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대개 그 이전 국내외적 갈등의 최종적 귀결인 동시에 그 이후 남북한 분단사회의 새로운 출발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럼 먼저 한국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에 대해 알아보면 크게 국내적 요인과 국제적 요인을 모두 들 수 있다.먼저 국내적 요인을 살펴보면 우리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현재의 영토로 유지하며 단일민족국가를 지켜왔고 일제강점기에서조차도 나누어지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우리에게 분단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분단은 해방 이후의 특수한 역사적ㆍ국제적 상황이 강요한 결과였으므로 남한이나 북한 모두 분단이 대단히 비정상적이라 생각했고 하루빨리 통일을 이룩하겠다는 것을 각자 자기 국민들에게 공언하기도 했다. 남한에서는 이승만이 1949년경부터 북진통일을 주장했고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민주기지론이 바로 그것인데 이것이 한국전쟁에 연결되느냐 안 되느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자가 있지만 민주기지론의 변형된 적용이 한국전쟁이었다고 보고 있다.국제적 요인으로는 무엇보다도 중국공산당이 중국천하를 제패하고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것을 들 수 있겠다. 이에 대해 서방세계, 특히 미국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비로소 공산세계게 한국전쟁의 개전에 관한 논의들이 분분한 가운데 최근 나오고 있는 주장이 '제한전쟁설'이다. 이 주장은 전쟁이 처음부터 전면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1949년과 1950년을 통해 계속 발행하고 있었던 38선에서의 국경분쟁의 연장선상에서 전쟁의 발발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근거가 제시되고 있다.첫째, 1950년 남한에서 실시된 5.30 총선과 에서 볼 수 있는 북한의 평화통일 제의이다. 둘째, 전쟁 발발 직후의 정황이다. 그러나 제한전쟁설은 몇 가지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1949년 미군철수 이후 남한에는 미군사고문단(KMAG)이 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미군의 개입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고, 제한전쟁으로 시작되었다고 가정할 때, 서울에서 3일을 머문 이후 한강을 건너 전면전으로 확대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그런데 우리가 이상과 같이 전쟁의 개전에 관해 논의하면서 반드시 짚어보아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남침이냐, 북침이냐 하는 증거여부가 아니라 전쟁의 개전에 관한 논의가 한국전쟁의 원인, 과정, 성격을 규정지을 정도로 중요한 문제인가 하는 점이다. 한국전쟁이 우리 민족 내부의 싸움이고, 그 싸움이 결과한 피해가 엄청나게 컸기 때문에 전쟁을 먼저 일으켰던 사람은 분명히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세계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더라도 ‘전쟁을 누가 먼저 시작했는가’가 전쟁의 모든 성격을 규정할 만큼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 예는 전혀 없다. 전쟁에 관해 이야기 할 때 그 전쟁의 원인이 무엇이고, 전쟁이 발발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은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밝혀내는 것이 보다 중요한 부분이다.(2) 교과서 분석초등학교 『사회』남한의 대한민국 정부는 민주주의 국가로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남한과는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갈등과 반목이 깊어갔다. 그러던 중에 북한은 남한을 무력으로 공산화하기 위해 6.25 전쟁을 일으켰다 … 전쟁이 끝난 지 50여 년이 지났지있을까?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라는 격언이 있다면 전쟁사를 연구하고 이를 실천하는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한국전쟁을 연구하고 이를 실천함으로써 전쟁을 예방하고 발전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한국전쟁은 한국현대사의 하나의 끝이자, 또 다른 시작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한국전쟁은 해방 이후 제반 모순이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된 사건이다. 다시 말하면 좌와 우의 이데올로기적인 대립, 단독정부 수립과 그에 반대하는 민족운동의 대립, 냉전적 세계질서와 미국 소련의 대한정책과 그에 대한 국내 정치세력의 입장의 대립 등이 폭발한 결과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폭발이 제반 갈등의 해결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분단체제의 확정이라는 새로운 한국현대사의 모습을 만들어 냈으며, 국제적으로도 냉전체제에 큰 영향을 주었다.또한 한국전쟁은 정치적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가진다. 한국전쟁에 참여한 당사국들이 모두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북한과 중국은 ‘미국과 남한의 침략에서 조국을 방위했다’고 하는 반면 남한과 미국은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자유 대한을 치켜냈다’고 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이를 잘 보여준다. 또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북한 정권이 자신들의 집권 기반을 안정화한 현상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그러나 역시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우리 국민이었으며, 국토 위에 그은 휴전선보다 국민들의 가슴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한국사회에서는 빨갱이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어떤 상황이라도 전쟁은 많은 살상과 아픔을 낳을 것이며, 전쟁만은 피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도록 하고 싶다.Ⅱ. 4?19 혁명(1) 연구동향① 용어의 문제4?19에 대해서는 이를 어떠한 용어로 규정할 것인가부터 논쟁이 있었다. 4?19 당시에는 주로 ‘4월 혁명’이라는 표현을 썼고, 모든 공식문서에도 그렇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5?16 직 찾고 있다. 즉 해방 직후 우리나라는 민족 자립경제의 실현을 위해 반제 반봉건 개혁을 달성해야 했지만 이것이 좌절되고, 한국경제는 대외 의존성, 특히 대미 의존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50년대 후반 미국의 재정적자와 국제수지 감소, 달러위기로 말미암아 원조가 감소되자 걷잡을 수 없는 경제 침체와 경제적 모순이 심화되었고, 이것이 4?19의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이다.한편 이대근은 4?19의 원인을 농업희생을 강요하는 원조경제의 모순 속에서 규명한다. 농지개혁의 실패로 농업생산력이 정체 내지 저하된 상태에서,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로 말미암아 농촌사회는 극심한 피폐를 가져왔다. 미국의 원조가 대부분 한국의 군사비를 충당할 목적에서 도입되었던 만큼 이는 군사비 부담을 농민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농촌사회가 몰락하면서 이농이 증가하고, 이들이 모두 도시로 이주함에 따라 경제발전의 정도와 걸맞지 않는 과잉 도시화가 진척되었다는 것이다.반면 손호철은 50년대의 경제위기를 단순히 원조 등 외부로부터 기인한 문제라기보다는 내적인 모순과 연계된 보다 총체적인 위기로 본다. 1950년대 후반은 원조의 감소도 문제가 되었지만, 원조배정을 놓고 무분별하게 늘어난 시설확장과 독점적 축적의 진행에 따라 생산과 소비의 모순이 격화되고 일부 산업에서는 과잉공급 상태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때문에 1958년에 표본으로 추출된 2,757개의 공장 중 35.4%만이 완전가동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에 1960년 방한한 미의회시찰단은 많은 공장들이 “흰 코끼리 같이 놀고 있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내적인 경제위기와 원조감소에 따른 군비 부담속에서 이승만정권은 조세부담을 확대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사회적 모순과 갈등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국제적 배경 : 물론 4?19 당시의 대중시위는 어떤 외부 세력의 사주에 의해 전개되거나 외부적 변동에 직접 촉발된 것이라 보기 어렵다. 그러나 4?19 시기 광범위한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이것이 이승게 되었어요??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고치고 부정선거를 했단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전국에서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집회에 참여하고, 교수님들까지 시위를 벌여,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났단다.중학교 『국사』이승만 정부 하에서 정치는 혼란을 되풀이할 뿐, 민주주의가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하였다 … 1960년 3월 정ㆍ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이 이끄는 자유당은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정권을 연장하려 하였다. 이에 학생과 시민들은 부정선거와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여 궐기하였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시위를 진압하고 사대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승만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 4ㆍ19혁명은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학생과 시민들이 일으킨 것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면 진주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등학교 『국사』6ㆍ25전쟁 때부터 이승만 정부는 반공을 강화하고 국민의 자유를 제약하면서,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장기 집권을 획책하였다. 이에 따라 독재정치가 강화되고 사회적으로 부정부패가 심화되었다. 1960년 정ㆍ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장기 집권을 위하야 노골적인 부정 선거를 자행하였으며, 이에 항의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확산되어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4ㆍ19혁명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동시에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교과서 모두 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초등학교교과서는 4.19혁명의 참가자인 할아버지와의 대화로 구성해서 심오한 내용을 알기엔 부족하지만 초등학생의 수준에 맞게 쉽게 이해하도록 되어 있어서 맘에 들었다. 초등학교는 ‘민주시민이 승리하던 날들’이라는 큰 제목아래, 중학교는 ‘민주주의 시련과 경제개발’이라는 큰 제목 아래, 고등학교는 ‘민주주의 시련과 발전’이라는 큰 제목 아래 4.19 혁명을 다루고 있어서 근대화론적 입장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대안교과서)1. 4.19 혁명, 했다.
< 춘향전 >춘향전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여는 마당◈ 본 마당1. 원문과 교과서 수록부분2. 원문과 교과서 수록부분 비교하기3. 지금까지 이루어진 연구1) 시기를 기준으로 연구 살펴보기2) 주제를 중심으로 춘향전 연구 살펴보기㉮ 일원론적 주제론㉯ 다원론적 주제론4. 춘향전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1) 자기계발의 의지2) 자신의 의지를 견지하려는 노력◈ 맺음 마당이름 :학번 :학과 :과목 :교수님 :< 춘향전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 여는 마당은 36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인기를 누리고 있는 고전작품이다. 이라하면 한국인들 가운데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으로서 현재 판소리, 영화, 연극, 창극, 소설 등에 이르는 많은 영역의 소재가 되고 있다. 또한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 학생들로 하여금 춘향전에 대해 자세히 알고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게 한다. 그렇다면 춘향전이 현재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먼저, 교과서의 춘향전 부분과 그 원문을 찾아보고 각 내용을 비교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동안 춘향전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으며 그 주제에 대한 논의는 어떠한지를 살펴보자. 마지막으로 이렇게 다양한 연구가 진행된 춘향전이 갖는 교육적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본 마당1. 원문과 교과서 수록부분춘향전은 제 7차 교육과정『고등학교 국어 (하)』의 7단원 ‘전통과 창조’에 실려 있다. 교과서에 실린 춘향전은 의 일부이다. 그래서 나는 교과서와 교과서 수록부분을 찾아보았다.※ 춘향전의 변모 과정 속에서 현전 최고의 춘향전은 ‘유진한의 한시 춘향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아래에 소개해 보고자 한다.2. 원문과 교과서 수록부분 비교하기교과서의 수록 부분은 의 일부로 차이점이라면 교과서에서 당시의 언어를 현대어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뿐이다. 춘향가는 판소리계 소설로 이본이 많은데 이러한 이본은 크게 분위기에 따라 별춘향전 계통과 남원고사 계통으로 구분된다. 는 별춘향전 가운데 가장 후기의 이본으로 추정수 있다. 이 시기에는 춘향전을 소개하는 논문들이 많았고, 조윤제의 춘향전 이본고가 가장 큰 업적으로 기록될 만한 것이었다.② 제 2기 (1945 ~ 1950)1945년 해방으로부터 2950년 6.25까지는 연구사적으로 공백기로 춘향전에 대한 연구도 전무한 상태다.③ 제 3기 (1950 ~ 1960)제 3기에 들면 김동욱의 경판본 춘향전 문체고를 시발으로 춘향전의 연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춘향전 연구의 종합적 성격을 띤 논문으로는 조섭제의 ‘춘향전 소고’를 비롯하여 김사엽의 ‘춘향전고 및 춘향 연구’와 문선규의 ‘춘향전 신고’, 배동자의 ‘춘향전 연구’, 김병기의 ‘춘향전에 대한 소고’를 들 수 있다. 한편 이본고가 계속되면서 고대본의 경판본이 소개되어 연구가 시작되기 시작했고 작품론이 활발히 거론되기 시작, 형식이나 인물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며, 판소리 발생고과 함께 판소리적 측면에서도 연구되기 시작했다.④ 제 4기 (1961 ~ 1970)제 4기는 역시 종합적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어 춘향전의 본격적 연구의 시대를 열게 된다. 이가원, 정병욱 등이 춘향전 연구에 가담하게 되었고 이본간의 내용 비교가 나오게 됨은 물론 백회본들이 소개되면서 각 판본간의 비교 문제와 주석, 어법문제 등이 새롭게 거론되기 시작했다. 또 김동욱은 ‘춘랑 설화’와의 관계를 새롭게 들고 나왔고, 조동일은 갈등에서 본 춘향전의 주제를 거론했으며, 이상택은 춘향의 성격분석에서 인물론을 성립시켰다. 한편, 진단학회 주최 동양학 심포지엄에서 춘향전의 종합적인 검토로 획기적인 연구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중국문학 『서상기』, 명곡 등과의 관련여부가 논의되었고 서양문학 햄릿이나 주홍글씨와의 비교연구가 시작되었다.⑤ 제 5기 (1971 ~ 1980)이 시기는 일반적이며 종합적인 연구는 줄어들고, 이본의 연구는 새로운 자료를 소개하는 정도로 그 폭을 넓혀갔다. 개작본이나 판 중심의 춘향가 등이 논의되었다. 이 시기에 설성경의 ‘춘향전 계통연구’는 이본연구의 총정리로 훌륭한 업적이었다. 또한 형성배 주제를 논하거나 주제와 관련된 문제를 다룬 논문은 수십 편이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긍정적 시각에서 주제를 파악하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입장에서 주제를 파악하려는 입장이다.① 주제에 대한 부정적 생각들대다수의 사람들은 춘향전의 주제를 긍정적인 시각에서 보고 있으나, 부정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그 대표적인 논자로는 윤오영, 김우종, 한승헌을 들 수 있다.ㄱ. 김우종김우종은 춘향전의 주제를 “춘향의 서민적 항거”라 본 것에 대해 의의를 제기한다. 그는 춘향이 이도령에게 순종한 것은 자율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며 상전에게는 무조건 복종해야한다는 굴종의식에 사로 잡혀있어서 순종한 것이므로 춘향에게서 항거이니 절개이니 하는 것은 논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춘향이 변학도에게 항거한 것은 그녀가 이도령과의 관계에서 맺은 주종관계를 지키기 위한 것이지 자주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따른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은 주제를 제대로 갖춘 작품이 아니며, 더더욱 절개나 항거를 주제로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ㄴ. 윤오영윤오영은 은 일관된 줄거리나 주제를 가지지 못한 저급한 이야기일 뿐이며, 따라서 춘향전은 문학으로서 논할 가치가 없으므로 고전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이야기한다.ㄷ. 한승헌한승헌의 생각의 위의 두 논자와는 다르다. 그는 먼저 춘향전이 항거와 적응의 양면성을 가진 작품임을 지적해 김우종의 견해와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그런데 그 양면성중 춘향전은 저항이라기보다는 적응의 측면이 더 강하게 나타난 작품으로 보았다. 춘향의 일부종사의지는 이도령과의 혼인을 바라고 그런 것이 아니라, ‘첩살이라도 좋으니 버리지만 말아 달라’는 호소였다. 그러므로 춘향이라는 한사람의 해피엔딩을 가지고 계급타파나 사회개혁의 가능성을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며, 따라서 춘향전의 주제를 ‘저항’이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대체로 고전문학을대한 춘향의 정절이 견해는 춘향전의 전승과 생성과정에서 일관되게 강조되어 온 전통적 생각으로, 개화기 이전의 춘향전에서는 모두 “정절”을 핵심 덕목으로 내세우고 있다. 춘향전의 제목을 ‘열녀춘향수절가’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당대의 사회여건상 유교적 덕목을 제목으로 내세운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으며, 이것이 춘향전이 갖는 근대성과 서민문학적 성격을 충분히 드러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춘향전의 문학적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ㄴ. 이도령과 춘향사이의 애정춘향전의 주제를 신분이 다른 남녀간의 애정으로 보는 견해는 기종의 연구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어 왔으며,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았었다. 이것은 이도령과 춘향의 사랑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은 앞의 견해와 일치하지만, 그 주체에 대해서는 차이를 보인다. 이도령에 대한 춘향의 정절을 강조할 때 춘향의 행위는 수동적이고 굴종적인 성격을 띠게 되며, 그 주체는 이도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도령과 춘향사이의 애정을 강조할 때 춘향의 행위는 전혀 수동적이지 않다. 또한, 그 주체는 이도령과 춘향 두 사람 모두이다.이처럼 춘향전의 주제를 단순히 춘향의 절개나 정절이 아니라 두 사람의 사랑으로 다루는 것은 작품의 내면 구조에 비중을 두고 작품을 해석하여 얻어진 결론이다. 이 견해에서는 ‘신분상승욕구’라든지 ‘서민적 항거’는 부수적인 문제이다. 이 견해는 춘향적의 서민 문학적 성격을 소홀히 보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춘향전의 문학적 성격을 그대로 파악한 것이라 볼 수 있다.ㄷ. 불의한 사관에 대한 서민의 항거춘향전의 주제를 서민적 항거라고 보는 견해는 국문학 연구의 초창기 연구자들에 의해 제시된 이래, 아직까지도 호응을 받아오고 있다. 춘향이 변학도의 명을 거부하고,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데 이 작품의 중심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춘향전의 주제는 신분제가 붕괴되기 시작하는 조선후기 사회상을 잘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한편 이 견해는 이도충하는 입장이다. 앞의 어느 한가지만으로는 의 의미를 충분히 드러낼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몇 가지의 견해를 서로 결합하거나 서로 절충하고자 한 것이다.ㄱ. 표면적 주제와 이면적 주제조동일은 춘향전의 주제를 표면적 주제와 이면적 주제로 구분하고, 춘향의 이동적 신분을 분석함으로써 주제파악의 근거를 마련하려고 했다. 춘향전에서 내세우는 유교적 정절은 춘향의 행의에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며, 그것은 표면적 주제이다. 이와 반면, 신분상승을 통해 인간해방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는 춘향의 내면적 주제를 이루는 것이다.ㄴ. 보편적 주제와 개별적 주제설성경은 주제를 보편적 주제와 개별적 주제로 구분하여, 춘향전의 모든 이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랑과 신분상승의 욕구를 보편적 주제로 보고, 그와 반면에 각각의 이본들이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주제를 개별적 주제로 보았다. 따라서 보편적 주제는 모든 이본에 공통되며, 의 전승과정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이지만, 개별적 주제는 이본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ㄷ. 표층적 주제와 심층적 주제황패강은 춘향전의 주제를 사람으로 보면서도, 민중의식이나 현실비판과 같은 여러 가지 요소들을 주제와 관련지어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그는 춘향전의 주제를 표층적 주제와 심층적 주제로 구분하고 이는 다 중요하지만 작품의 핵심 의미는 심층적 의미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 밖에도 천두현, 나병철, 김복희 등의 연구에서도 구체적 내용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의 주제를 다원적 또는 다층적으로 보려는 입장을 볼 수 있다. 이들의 주장은 이 가진 여러 가지 측면을 수용하면서 조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절충적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고, 이러한 견해는 주장의 근거가 작품의 인물과 구조를 분석하는데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다만, 주제가 여러 가지 의미를 병렬식으로 나열하여 주제에 대한 개념에 혼란을 줄 수 있는 문제가 있다.4. 춘향전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제까지 의 주제에 대한 많은 견해들을 살
두 눈으로도 보기 어려운 세상을한 눈으로 본 인물, 궁예◑ 목차 ◐◈ 여는 마당◈ 본 마당Ⅰ. 천년 전의 인물들Ⅱ. 역사속의 궁예1. 궁예의 출생1) 성과 이름2) 중오일과 이가 돋다3) 확실하지 않은 출생2. 지도자로서의 면모, 그리고 미륵사상1) 탁월한 자질과 지도력2) 궁예, 견훤, 왕건의 비교3) 미륵불을 자처한 궁예3. 궁예의 최후1) 정사 속에서 궁예의 최후2) 민간전승 속에서 궁예의 최후Ⅲ. 궁예 다시보기◈ 맺음 마당이름 :학과 :학번 :교수님 :교과명 :두 눈으로도 보기 어려운 세상을 한 눈으로 본 인물, 궁예◈ 여는 마당한국 중세사 교육의 과제를 두고 고민하던 나는 『10세기 인물 열전』과 『고려의 황도, 개경』이라는 두 책을 찾아보고는 금방 『10세기 인물열전』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새로 나온 책이라는 점은 두 책 모두 맘에 들었지만 둘 중엔 전자가 왠지 간단 간단하게 서술되어 재미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습관처럼 목차부분을 쭉 한번 훑어보았다. 그런데 지금 수업을 하시는 김** 교수님이 쓰신 글도 있었고, 예전부터 내가 좋아했던 이** 교수님이 쓰신 글과 지금은 정년퇴임하셨지만 한번 뵌 적이 있는 정** 교수님의 글도 있어 왠지 모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는 서평이라는 막막한 과제를 책 속의 여러 인물 중 내가 가장 관심이 갔던 궁예를 중심으로 써보기로 했다.그래서 『10세기 인물 열전』을 중심으로 궁예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을 간단히 정리해보고, 그 중 궁예의 삶을 좀 더 자세히 조명해 보고자했다. 궁예에 대해 서술된 사서의 내용을 부분 발췌하면서 궁예의 출생에 대해 알아보고, 그가 가진 지도자로서의 면모와 우리에겐 관심법으로 알려진 미륵사상, 그리고 궁예의 최후에 대해 알아보면서 전체적으로는 궁예를 다시 바라보고자 한다. 이 책을 중심으로 하되, 내가 궁금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다른 책을 더 참고했다.◈ 본 마당Ⅰ. 천년 전의 인물들올해는 2004년. 새로운 밀레니엄이라며 떠들썩하던 때가 이 있다.이 책은 전체적으로 간단하면서 중요 내용을 쉽게 풀이해서 써 두었기 때문에 다른 역사서와는 달리 누구에게나 편안하게 읽힐 수 있는 책이다. 아마 역사전공자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을 위한 목적으로 쓰인 책 같다. 이 책에는 물론 내가 모르는 인물들 - 쇠유리, 구족달, 김정남 등 - 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고, 내가 아는 인물이라 해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인물들 - 궁예, 진성여왕 등 - 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데 역사전공자인 나는 읽으면서 분량의 제한 때문이었는지 약간의 사료가 좀 더 보충되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좀 더 자세하게 서술되었으면 하는 느낌이 들었다.나는 그 중에서 가장 그 삶이 한 편의 소설 같고, 비극 같기도 한 ‘궁예’에 대해 관심이 갔다. 몇 년 전 TV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그의 역할이 부각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의문점이 생겼고, 두 눈으로도 보기 어려운 세상을 한 눈으로 본 인물인 궁예에 점점 더 끌렸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왕실의 후손인 그는 버림받았고 유모에 의해 길러져서 맨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여 결국엔 한 나라의 국왕 자리에 까지 올랐다. 그러나 자신이 가장 믿었던 신하에게 배신당했고, 결국은 자신을 그토록 따랐던 백성들에게 살해된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그의 삶에 대해 이제부터 알아보겠다.Ⅱ. 역사속의 궁예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 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其一目 抱而逃竄 勞養育 궁예는 신라 사람인데 성은 김씨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 의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 성과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혹은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하얀 빛깔이 마치’이라는 고구려어 ‘주몽’과 같은 의미라고 하여 고구려 계 사람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셋째, 궁예는 ‘큰 아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라는 견해가 있다. 궁예의 ‘궁’은 ‘큰’이 변화하여 ‘큰 → 근 → 궁’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백제의 근초고왕, 근구수왕의 근이 크다는 의미를 갖는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실제 이 무렵 사람들 가운데는 반드시 성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궁을 이름 첫머리에 쓰는 경우가 있었는데,《고려사》에서 궁복(장보고), 궁식, 궁제, 궁진처럼 ‘궁’자로 시작된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여럿 찾을 수 있다. 여기서 궁은 크다는 의미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예는 무슨 뜻일까? 예는 애(아이)를 음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궁예의 뜻은 큰(궁) 아이(예)가 되는데, 이는 궁예의 탄생설화와도 어느 정도 부합된다고 할 수 있겠다.2) 중오일(重午日)과 ‘이가 돋다’위의 사료《삼국사기》궁예전에 수록된 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궁예는 5월 5일 중오일에 태어났다. 일관은 궁예가 태어난 5월 5일은 중오일로 불길한 날이라고 했다. 그런데 5월 5일은 단오날로 이미 신라 때부터 명절로 꼽혀왔고, 그 이후로도 중오일은 4대 명절의 하나로 꼽힌 상서로운 날이다. 그런데 왜 궁예의 생일이었던 그해의 단오만 불길한 날이어야 하는가? 여기서 서술자에 의해 조작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탄생에 대한 해석과 평가부분이 그러한데 서술자는 궁예를 출생에서부터 비정상적이고 불길한 인물로 묘사해 부정적으로 서술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또한 ‘태어나면서부터 이가 있었다.’라는 표현은 궁예의 괴이한 모습을 연상시키려는 의도인데, 사실 이면에는 궁예가 일찍부터 다른 사람에 비해 성장이 빨랐다는 사실이 담겨있다. 이는 고구려 태조왕의 탄생에서 ‘태어날 때부터 눈을 떴다.’ 라는 부분과 유사하다. 이와 같이 ‘태어날 때부터 눈을 떴다.’라는 사실 하나를 《삼국사기》에서는 태조왕이 날 때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보았으니 출중하다고 한 반면,《삼국지 위지 강왕)과 황(정강왕) 두 왕자를 두었기 때문에 서자인 궁예가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설득력을 갖기가 어렵다. 실제 헌안왕에서 경문왕으로의 왕위계승은 아주 평화롭게 이루어져 치열한 왕위쟁탈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② 경문왕의 아들일 가능성궁예의 아버지가 경문왕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헌안왕 때와 달리 경문왕 때 진골 사이의 왕위쟁탈전이 치열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이 시기에 많은 인물들이 왕위 계승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문왕 때에도 왕위를 위협할 만한 정변은 보이지 않는다. 굳이 든다면 874년 5월 이찬 근종이 일으킨 모반 사건을 들 수 있으나, 이난은 잘 수습되어 경문왕의 태자인 헌강왕이 순조롭게 즉위했다.③ 신무왕의 아들일 가능성《삼국사기》에만 의존하면 궁예의 아버지를 찾는 작업은 더 이상 진전을 볼 수 없으나, 궁예를 선조로 삼는 성씨의 가운데 하나인 순천 김씨의 족보를 참고하면 또 다른 추측이 가능하다. 파보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순천 김씨 세보에는 궁예가 신무왕의 다섯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첫째 아들은 문성왕, 둘째는 영원, 셋째는 흥광, 넷째는 익광, 막내는 궁예라 하고 그 후손 중 하나는 순천 김씨가 되었고, 하나는 광산 이씨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후손들이 족보를 만들 때에는 대체로 자기 조상을 미화하는 경우가 많은데 순천김씨 족보에는 그다지 영광스럽지 않은 궁예를 선조로 실어 놓았다. 여기서 더욱 흥미를 끄는 것은 《고려사》 편찬을 관장한 김종서가 순천김씨의 중시조라는 사실이다.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出則常騎白馬 以綵飾其尾 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 又命比丘二百餘人 梵唄隨後 又自述經二十餘卷 其言妖妄 皆不經之事 時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善宗聞之怒 以鐵椎打殺之선종이 미륵불을 자칭하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몸에 가사를 입었다. 큰 아들을 청광보살, 막내아들을 신광보살로 삼아 외출할 때에는 항상 흰 말을 탔는데 말갈기와 방법을 통원할 줄 아는 탁월한 자질은 그를 후삼국의 가장 광대한 지역의 통치자로 만든 첫 번째 요인이었다.또한 궁예는 부하들과의 관계에서 마음이 통하는 인간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를 부정적으로 그린 《삼국사기》에서조차 「그는 사졸과 더불어 고생과 즐거움을 함께 하고 심지어 빼앗은 것도 공정하게 하여 사사로움이 없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경외하고 좋아하여 장군으로 추대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궁예의 지도력은 부하들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에 비롯되었다. 공평무사한 동고동락이 그가 추앙받는 장수가 된 근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궁예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만남은 강제적 수단보다는 전장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하겠다.2) 궁예, 견훤, 왕건의 비교궁예의 자질은 당시 그와 쟁패를 겨루었던 견훤, 그리고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된 왕건과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궁예가 공평무사한 지휘관이었다면 그에 비해 견훤은 통솔보다는 지휘를 중시했던 인물이었고, 왕건은 자휘보다는 통솔에 더 관심을 가진 지휘관이었을 것이다.이 세 사람을 일본의 전국시대를 풍미한 일본사의 세 사람과 비교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전국시대의 세 사람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울지 않는 새를 울게 하는 방법에 빗대어 비교한다. 오다는 울지 않는 새는 칼로 목을 치고, 도요토미는 지략으로 울게 하며, 도쿠가와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후삼국시대 3인을 비교하면 견훤은 오다, 궁예는 도요토미, 왕건은 도쿠가와에 대입할 수 있을 것 같다.3) 미륵불을 자처한 궁예궁예는 말년으로 가면서 미륵불을 자처하고 관심법을 운운하는 정신 이상자로 묘사된다. 위의 사료에서도 그 모습이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궁예의 그릇된 불교관과 사치스런 행위를 보여주는 예로 자주 거론된다. 자신을 미륵불이라 하고 자신의 아들들을 보살이라고 칭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 할 만한 일은 아니다.그러나 당시로서는 이러한 처사가 아주 특이한 일만은 아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