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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학,쟁점]대형할인점(대형마트)으로 인한 재래시장 위축
    대형할인점으로 인한 재래시장(영세상인) 위축의 현황과 쟁점- 정부의 직접적 규제를 중심으로 -《 목 차 》1. 서론2. 대형할인점의 현황2.1 대형할인점의 정의2.2 대형할인점의 특징2.3 한국 대형할인점 도입의 역사2.4 국내 유통 환경의 변화요인2.5 현황 점검: 재래시장은 목하 전쟁 중!3. 대형할인점, 양날의 칼3.1 대형할인점이 가져오는 순기능3.2 대형할인점이 가져오는 역기능4. 대형할인점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 규제에 대한 쟁점4.1 정부의 직접 규제에 대한 반대 입장4.2 정부의 직접 규제에 대한 찬성 입장5. 결론▣ 참고자료- 재래시장의 특성 및 순기능 -▣ 참고문헌 및 사이트1. 서론vs거대한 자와 약한 자 사이의 싸움. 혹은 약한 자가 거대한 자에 대항하여 도전하는 것을 일컬어 사람들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말하곤 한다. 우리는 작은 양치기 소년, 다윗이 백전노장 골리앗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목격하게 되는데, 최근자본의 규모와 경영의 노하우의 열세를 딛고 대형할인점의 공세에 힘겨운 저항을 하고 있는 재래시장의 모습이 바로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생각된다.최근, 연일 신문지상을 오르내리고 있는 대형할인점과 재래시장의 문제는 단순한 성격의 것이 아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유통시장의 전면 개방과 소비자의 욕구 변화, 물류 정보화 등의 진전으로 우리나라의 유통산업은 현재 최대의 격변기를 겪고 있다. 소비자의 합리적 구매패턴이 확산됨에 따라 대형할인점 이용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대형할인점과 재래시장의 문제를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지 고심하게 된다. 언론에서 비추고 있는 대로 거대한 대형할인점이 힘없는 재래시장을 잡아먹는다는 식의 시각이 과연 옳은 것인지. 또 반대로 그 어떤 불공정 거래도 없으며 , 유통시장을 교란 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고 투명하게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는 대형할인점의 입장이 과연 진실인지. 또, 정부가 내어놓고 있는 여러 가지 대안들(특히 정소 비구조가 고도화되고 있다. 또한 새로운 소비계층인 고소득층의 증가와 신 소비계층의 등장(young, missy, silver)을 맞이하게 되었다.3) 사회 환경은 도시화의 확산과 교통문화의 변화(자동차, 지하철, 고속철도)와 아파트생활문화의 확산, 인구구조의 노령화 및 핵가족화가 가속화되고 있다.4) 정보화 환경은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과 정보화 및 신용사회로의 진전으로 인하여 기 업 내부 경영시스템이 인적 경영에서 시스템 경영으로 구축되는 추세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환경의 변화는 미래가 고성장, 개방화, 세계화, 고 경쟁, 다원화시대 변해갈 것임을 예견해주고 있으며 소비자는 경제성을 초점에 두는 구매패턴이더욱 확산 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는 대형할인점의 확산을 더욱 가속시키고 있다.2.5 현황 점검: 재래시장은 목하 전쟁 중!대형할인점의 무차별적 진출로 재래시장을 비롯한 중소유통업이 고사 직전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음이 각종 구체적 조사보고서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중소기업 중앙회가 지난 7일 발표한 ‘대형마트의 현황과 중소유통 활성화 방안’에 따르면 이 마트, 홈 플러스, 롯데마트, 홈 에버(구 까르프)등 상위 4개 대형유통업체들이 차지하는 매출액은 13조 천 억 원으로 유통업계 전체 매출액의 57%에 달했다. 반면, 재래시장은 2000년부터 2004년까지 5년간 3만 9천여 개가 줄었고, 종사자수는 무려 5만 8천명이나 감소했다.중소기업 청이 발주해 올 9월 완료된 ‘대형할인점 진출이 지역중소유통업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를 통해서도 이러한 상황을 읽을 수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07년 현재 대형마트는 해마다 12.4%씩 증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중소유통업 매출 감소 액은 연간 2조 20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재래시장 114개의 매출에 달하는 액수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대형할인점이 3개 늘어날 때 중소유통업 매출감소는 1853억 원으로 재래시장 9.4개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전국의 재래시장저곳에 둘러 물건을 산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다. 그리고 대형할인점은 이런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어 각종 편의 시설을 제공하였다.자동차의 보급 등으로 교통이 편해져서 접근성이 용이해진 것도 대형 할인점의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아래에 있는 표)는 유통업체별로 드러난 소비자들의 교통수단의 이용을 나타낸 것이다. 대형할인점에서 승용차의 사용비중이 다른 요소들에 비해 상당히 높음을 볼 수 있다.②각종 편의시설대형할인점과 일반 소매상의 부대 편의시설에 대한 만족도를 살펴보면, 소비자들의 부대편의시설에 대한 만족도는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응답이 44.2%로 부정적인 응답 25.1%보다 높게 나타났지만 업태별로 볼 때 큰 차이가 나타났다. 할인점의 경우 매우만족, 만족스럽다 는 고객의 비중이 9.8%, 51.4%로 재래시장의 2.4%, 17.6% 비하여 3배 가까이 높게 나타났다. 반면 부대편의시설에 대해 부정적인 고객의 비중은 할인점의 경우 재래시장에 비해 1/10수준이다.) 그 만큼 대형 할인 마트에서 각종 편의시설에서의 만족도가 일반 매장에 비해 큰 것을 알 수 있다. 대형 할인점이 소매상에 비해 이점을 갖는 시설들은 다음과 같다.-다양한 물건들을 한 곳에 배치함.대형 할인점에서는 절대로 한 가지 물건만을 팔지 않는다. 한 쪽에는 야채 코너가 있으면, 다른 한 쪽에서는 과일을 팔고 또 다른 쪽에서는 과자나 조미료 등을 판다. 요즘에는 심지어 옷이나 신발, 전자제품까지 다 같은 매장안서 판다. 쇼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한 군데만 들러서 모든 것을 구매할 수 있으니 편리하게 되었다. 또한 계산을 할 때도 한 번에 하므로 지갑을 여러 번 여는 번거로움을 덜게 된다.-쾌적한 쇼핑 환경대형 할인점에 가 보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그리고 매장 안에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따라서 사람들은 정말 쾌적한 환경에서 쇼핑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매장 내의 위생 상태나 직원들의 친절도도 쾌적한 쇼핑을 위한 조건들이다.-주차나 탁아 등의 고객 맞춤형 시설의 확보배경통해 우리는 ‘대형할인점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바람직한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4.1 직접적인 규제에 대한 반대 입장1) 대형할인점으로 인한 효과를 간과할 수 없다.① 소비자의 입장에서 유통시장의 현대화에 따른 소비자들의 혜택 및 만족수준.대형할인점의 진입에 따른 유통시장에서의 현대화로 인한 소비자들의 삶의 질 향상, 역외구매의 감소, 계획적인 도시계획 등의 긍정적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대형할인점의 진입은 재래시장 및 영세 상인들이 고객의 욕구에 맞게 재개편 하여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최종소비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느끼고, 반응하고 행동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② 대형할인점으로 인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데서 오는 유통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입장에서 재래시장의 활성화 및 중소업체들의 보호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대형할인점의 진입으로 인하여 재래시장 및 영세상인들의 잉여는 줄었을지 몰라도, 그것을 상쇄하고 남음이 있을 정도의 소비자 잉여가 증가하였기에 거시적 시각으로 봤을 때, 대형할인점의 진입은 순기능 가져왔다.이는 대형할인점의 소비활성화부분과 규모의 경제에 따른 생산성 향상을 통해 알 수 있다. 대형할인점의 소비활성화 부분은 우선 가격하락으로 인한 소비 활성화 부분과 소비자 친환경 쇼핑환경을 들 수 있다. 대형할인점은 가공식품이나 소비자 일용품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을 제공하고 있어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구매 욕구를 자극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신도시나 개발지의 시장을 선점함으로써 신시장을 점유하는데 보다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백화점의 적정규모 이상의 유통업체보다 유리하고 재래시장과 같은 전통적 시장이 소비자 니즈에 경직적이라는 점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대형할인점은 소비자에게 보다 인근에 위치함으로써 소비에 있어서 거래비용을 감소시크고 있고, 생산자에게는 상대적으로 대규모의 거래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물류비용을 절감시키는 대한 명확한 정의는 내리고 있지 않지만 대형 할인점에 대한 규제는 국내와 외국기업의 차별 없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어서 WTO 규범 위반으로 보기 어렵다. 그리고 WTO의 규범위반이라고 지적한 ‘대형할인점 허가제로의 전환’은 국내 규제의 영역이며 지역의 중대한 경제현안에 대해 이해당사자가 참여하고 의견을 개진하며 이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은 선진국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다.대형마트만 육성하는 정부정책은 결국 재래시장과 중소상인들을 사지로 내몰았고, 지역의 중소상인들의 생존권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우리 정부는 WTO 협정을 핑계 삼아 '대형마트 규제'가 불가하다고 하지만, WTO 가입국 중 대형 점포를 규제하는 나라는 상당히 많다.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는 대형마트 허가제를 도입하고 있고, 휴일 의무화 규정, 영업시간 제한 등의 규제도 병행하고 있다.국회 역시 지역의 중소상인들의 요구가 거셀 때는 'WTO 협정을 위반하지 않는 수준의 대형마트 규제방안이라도 마련하자'고 했다가 여론이 잠잠해지면 원점으로 되돌아 간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말만 무성했지 구체적인 대안을 챙긴 정당은 하나도 없고, 여론에 떠밀려 생색내기용 서비스만 하다가 종국에는 대형유통업체 편에 섰다.3) 문화의 다양성을 보장해야한다.확실히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대형할인점이 쇼핑을 하는데 주로 이용하는 공간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항과 호텔같이 전 세계 어디서나 획일적인 문화로 쇼핑을 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시장’이라는 것은 단순히 재화를 판매하고 사는 곳이 아니라 문화를 공유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장 안에서 새로운 문화가 생성되고 보존되는 기능을 무시 할 수 없다. 그러한 공간을 대형할인점이 모두 장악해 버린다면 시장에서 형성되는 다양한 문화가 파괴될 것이다.4)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일종의 선택권 침해대형할인점만 남는 상황이라면 일종의 과점상태가 될 것이다. 이 때, 소비자는 물건을 저렴하게 구입하고 싶어도 대형할인점에서 제공하는 가격 이하로는 사지 못하는 상황이 오게것이다.
    경영/경제| 2008.09.30| 18페이지| 3,000원| 조회(1,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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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사, 미시사>중세의 결혼, 경건왕 로베르를 통해 본 중세의 결혼
    경건왕 로베르를 통해 본 중세의 결혼《 목차 》1. 인물선택 : 경건왕 로베르2. 경건왕 로베르의 결혼3. 11세기 결혼 분석4. 기독교적 결혼5. 맺음말1. 인물선택 : 경건왕 로베르프랑스의 왕 로베르는 매우 공개적으로 근친혼과 간통을 저질렀다. 그는 세 명의 합법적인 아내를 두었으니, 그가 세 번째로 결혼했을 때에는 첫 번째 아내도 아마 죽지 않았던 것 같고 두 번째 아내는 분명히 살아있었으며 인근에 살면서 왕의 침대로 돌아갈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988~989년 사이에 부왕의 즉위로 왕위 계승자가 된 로베르는 열여섯 살의 나이로 아내를 취하였다. 그녀의 이름은 로잘라였으며 시집을 온 뒤에는 쉬잔이라고 불리었다. 그녀는 3년 뒤 소박을 맞았으나 1003년까지 살았다. 996~997년 사이에 로베르는 베르트와 결혼하였고 1001~1006년 사이에 역시 소박을 놓았다. 그리고 콩스탕스를 세 번째 아내로 취하여 1년 뒤 그녀에게서 첫 번째 적자(嫡子)를 얻었다. 그는 그녀에게도 소박을 놓으려 하였으나 그녀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과격한 성격의 못 말리는 여장부여서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이러한 일련의 취처(娶妻)및 절연(絶緣)은 당시 막 왕이 된 프랑스 공작의 가문에서 어떻게 결혼이 행해지고 있던가를 보여준다. 우선 결혼을 시키는 것은 가문의 우두머리인 아버지였다. 열아홉 살이 된 로베르가 위그 카페가 골라준 아내를 버린 것은 어쩌면 자신의 독립을 표명하려는 행동일 수도 있다. 그는 성인의 연령에 달했고, 그의 동년배들은 아버지의 권위라는 멍에를 벗어버리라고 부추겼을 터이다. 훗날 그가 말 안 듣는 아들들에 대해 불평하자 볼피아노 수도원장 기욤은 그에게 자신이 그들 나이였을 때는 어떠하였는가를 상기시킨 바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새로이 합법적인 아내를 맞이하고 또 직접 상대를 고르기 위해서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는 사실이다. 부왕이 죽었을 때 그는 스물다섯 살이었다.2. 경건왕 로베르의 결혼경건왕 로베르의 결혼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적어도 자. 로베르가 직접 고른 아내 베르트는 한층 더 고귀한 혈통으로 부르고뉴 왕 콩라의 딸이자 프랑스 서부 지방의 카롤링고 왕인 바다 저쪽의 루이4세의 손녀였다. 콩스탕스의 가계는 덜 화려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를르 백작에 불과했고 그녀의 어머니 아델라이드는 앙주 백작의 누이였다. 그렇다면 로베르는 샤를 드 로렌과 마찬가지로 지체 낮은 영주들의 가문에서 아내를 취한 것인가? 아를르 백작 기욤의 선조들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고, 아마도 샤를마뉴의 먼 후손들이었으리라고 추정될 뿐이다. 하지만 콩스탕스의 어머니는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무위왕 루이 5세의 왕비였었다. 루이 5세쯤 되면 아주 고귀한 혈통의 여자가 아니고는 결혼하지 않았을 터이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소박을 맞고 아를르 백작과 결혼하기는 했지만 이를 둘러싼 추문은 없었고 어쨌든 그녀는 주교들에 의해 왕비로 축성된 여자였다. 그러한 예식의 효과는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콩스탕스는 아마도 그 때문에 왕비의 딸로 간주되었던 듯하다.대등한 계급 출신과의 결혼은 근친과의 결혼 기피로 인해 점점 더 어려워졌다. 위그 카페는 바실레우스[비잔틴 제국 황제]에게 그 어려움을 이렇게 토론한 바 있다. “우리는 이웃한 왕들과의 혈연관계 때문에 대등한 반열에서 아내를 찾을 수가 없소.” 그리하여 로베르의 아들인 앙리 1세는 키예프까지 가서 아내를 구해야만 했다. 그러나 근친혼 기피보다는 결혼상대의 출신계급에 대한 고려가 먼저였다. 로베르는 아마도 콩스탕스의 먼 친척이었을 것이다. 그와 로잘라는 분명 6촌[12촌]간이었고 그러므로 주교들이 정한 근친혼의 영역에 속했다. 세 명의 왕비들 중 가장 신분이 높았던 베르트는 가장 근친이기도 했으니 겨우 3촌[6촌]간이었다. 당시의 기준으로 결혼 무효화를 야기할 만한 성격의 친족관계는 베르트와의 관계뿐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누가 보나 명백한 근친혼이었다. 그러나 “찬탈자” 위그 카페의 아들로서 샤를 드 로렌의 조카딸과 결합한다는 것은 금기를 어길 만한 가치가 있 낳음으로써 가계를 보전한다는 것이었다. 로베르의 행동은 이러한 이유만으로 설명될 수 있다. 로잘라는 아이를 많이 낳았지만 젊은 왕에게 시집왔을 때에는 리셰의 말을 빌리자면 “너무 늙어서”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했고, 그래서 소박을 맞았다. 베르트는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았고 이미 아이를 낳은 적이 있었지만 로베르와 결혼한 지 5년이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소박의 이유가 되었다. 콩스탕스의 유리한 점은 나이가 아주 젊다는 것으로 그녀는 곧장 아들을 둘이나 낳았다. 그러고 나자 로베르는 여유만만하여 1008~1010년 사이에는 콩스탕스를 내몰고 베르트를 다시 들여도 좋으리라고 까지 생각하게 되었다.이러한 세 번의 결혼에 각기 다른 세 가지 동기를 알아볼 수 있다. 로잘리는 왕의 딸이었기 때문에, 베르트는 투렌에서 벌어지고 있던 긴박한 게임에서 유리한 패로 작용했기 때문에, 그리고 콩스탕스는 왕위계승자를 얻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에 각기 선택되었을 터이다. 다만 주목할 것은 동기 여하를 떠나 교회의 수칙이 그렇게 무시되었다는 사실이다. 로베르의 결혼들에 대해 교회 지도자들의 입장은 어떠했던가?그들은 첫 번째 절연과 재혼에 대해 그리 강한 반응을 보였던 것 같지 않다. 이 두 번째 결혼은 보름스 주교 부르카르트의 법령집에 실린 모든 캐논들이 명백히 간통으로 규정하는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훗날 연대기들이 필립 1세에 대해서는 수차 사용하게 될 축첩이라는 비난어린 용어도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중혼에 대한 연급은 전혀 없었다. 혼례는 투르 대주교의 집전으로 다른 고위 성직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엄숙히 거행되었다. 이 결혼에 반대한 자들은 단지 너무 가까운 혈족이라는 점을 지적했을 따름이다. 사실상 이 결혼의 해지를 원했던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도 간통이 아니라 근친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부르카르트의 『법령집』에서 보듯이 결혼 해지 불가라는 복음적 수칙의 적용이 제기하는 문제들 가운데 유독 근친혼만을 따로 떼어 강조했던 당시 교회 윤리의 한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남성의 상향 결혼은 단순한 동류결혼보다 덜 빈번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의 값어치는 동류결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것은 부계 혈통에 제왕과 공작과 백작들의 피를 대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피의 주기적인 유입은 그들의 귀족성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뿐만 아니라 지배 계층의 응집성을 보장해주기도 했다. 유리한 결혼은 남편과 가계 구성원들의 지위를 높여주었기 때문에 그런 결혼의 자취는 ‘집안’의 족보들에 소중히 보존되었다. 거꾸로 내어준 딸들에 대한 기억은 쉽사리 잊혀졌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들을 건네준 가계는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집안이 아니던가? 그러나 신부를 선사하는 일이 순전히 호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장-피에르 폴리와 에릭 부르나젤이 봉토를 가리켜 쓴 표현을 빌리면 그녀는 대가를 요구하는 선물들 가운데 하나였다. 여성들이 상층에서 하층으로 이전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아래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봉사의 의무가 뒤따랐다. 흔히 주종관계의 의무들과 결합된 의무의 사슬이 이리하여 귀족 계급의 여러 계층들을 이어주었다. 그러나 여자를 베푸는 쪽의 우월성이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이러한 결혼들은 대부분 두 친족 집단들이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 끝에 맺어졌다. 제각기 상대방의 명망이 어느 정도인지 평가하고 나서 양쪽 가장들이 협상에 나섰다. 젊은 남녀 당사자는 비로소 어른의 지위에 올라 그들 자신의 가정을 꾸리는 데 동의하도록 요구 받을 따름이었다. 다음의 11세기 후반의 예는 혼사를 둘러싼 거래의 중요성과 어려움을 여실히 보여준다.1076년 카페가의 영지 북쪽에 맞닿아 있어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하는 세 개의 백작령을 상속받은 시몬 드 크레피앙발루아는 집안의 대를 잊기 위해 결혼해야 할 처지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우아한 자태와 수려한 용모와 고귀한 혈통을 겸비한 오베르뉴의 한 신붓감을 골라주었다. 그러나 수도사라는 그의 직분이 이 부부의 육체적 결합을 가로막고 있었다. 사실상 그런 결합은 그가 정치적 곤경에했으며 그들의 성향 또한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사회학적 중력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아볼 수 있다.4. 기독교적 결혼프랑스 북부에 결혼에 관한 최초의 전례서가 등장한 것은 1100년 무렵이었다. 이것은 성직자들의 권력이 가족이 생활 속으로 점점 더 깊숙이 침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성직자들은 두 배우자의 동의를 확인하고 이들이 합법적인 결혼에 장애가 될 만큼 촌수가 가까운 혈족관계인지 따져보았다.『성녀 고들리에브전』에 따르면 11세기 중엽의 결혼관습은 뚜렷이 구별되는 두 가지 절차로 되어있다. 청혼이 받아들여지자 베르튈프는 자기보다 나이 어린 여성을 ‘남편의 법 아래’ 맞아들인다. 그녀에 대한 권위, 공적 영역에서 그녀를 보호하는 권리와 의무가 남편에게 이전되는 순간 그녀는 ‘신부’가 된다. 과부산의 설정에 관해 합의를 하자 아버지는 딸의 손을 남자에게 넘겨준다. 이렇게 맺어진 계약은 파기될 수 없다. 베르튈프의 어머니 힐난도 이미 때늦은 것이었다. 혼례와 더불어 고들리에브는 부부의 살림집으로 들어간다(그리고 이때부터 ‘새댁’으로서 그곳에 줄곧 산다). 그런데 놀라운 대목은 벌써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신랑이 이 예식에 불참하고 신랑의 어머니가 자신의 원한을 웃는 낯으로 짐짓 가린 채 예식에서 아들을 대신했다는 것이다. 신랑이 나타난 것은 사흘 뒤였다. 그것도 아내 혼자 부부의 거처를 관리하도록 떠맡긴 채 자신은 곧바로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 이야기는 결국 끝이 썩 좋지 않았다.어쨌든 이 이야기에서 결혼의 두 가지 절차를, 즉 결혼이 시작되는 ‘약혼’과 보기에 결혼을 완성하고 거기에 풀 수 없는 효력을 부여하는 ‘혼례’를 뚜렷이 구별할 수 있다.11, 12세기 사료들을 훑어보면 ‘약혼’과 ‘결혼’ 사이의 시간 간격이 상황에 따라 무척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주 긴 기간을 두는 관행은 귀족 계층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남다른 특성들과 관련이 있었다. 즉 두 친족 집단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 신랑 쪽의 여행이 불가피했고별했다.
    인문/어학| 2008.01.05| 7페이지| 1,500원| 조회(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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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학] 출산율 저하와 저출산의 지속현상
    출산율 저하와 저출산의 지속현상《 목차 》Ⅰ. 서론Ⅱ. 저출산의 문제점과 원인1. 저출산의 문제점2. 출산율 저하에 영향을 주는 요인1) 인구생물학적 요인2) 사회 경제적 요인Ⅲ. 저출산의 지속현상Ⅳ. 선진국을 통해 본 시사점1. 기본적?원칙적 시사점2. 구체적?세부적 시사점Ⅴ. 결론Ⅰ. 서론인구는 한 국가를 구성하는 주체로서 출생과 사망 그리고 이동에 의해서 그 규모와 구조가 결정된다. 인구의 규모나 구조는 사회의 제반 특성들에 의해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나라는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가족계획사업의 일환으로 인구억제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합계출산율)은 1960년에 6.0명으로 높은 수준이었으나 1984년에는 인구대체수준)인 2.1명에 도달함에 따라 정부의 인구정책은 외형상 성공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987년에는 1.6명의 수준까지 낮아졌고, 1999년에는 1.42명, 2003년에는 1.17명까지 떨어져 세계최저수준을 기록하였다.) 이제는 출산율 저하가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우리나라가 현재 당면한 저출산의 문제는 급속한 ‘출산율 감소’와 ‘저출산의 지속’이 비교적 짧은 시기에 연속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서구의 저출산 현상과 비교된다.저출산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하다. 먼저 저출산이 생산 인구 감소와 노령화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저출산 자체를 위기로 인식하는 관점이 있다. 이 관점에 의하면 출산율이 인구대체율 이하 수준으로 감소하면 인구는 지속적으로 감소한다. 특히 생산 가능인구(15-64세)가 감소하여 노동력 부족으로 인한 경제성장의 둔화를 우려할 수 있다. 또한 평균 수명의 연장으로 전체 인구 중 생산인구에 비해 노인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져 연금, 의료보장 등 사회보장체제의 위기를 야기할 수 있다.한편 또 다른 관점은 저출산 현상 자체보다는 저출산 지속 현상을 통해 알 수 있는 가족(여성)의 출산?육아부담에 주목하는 관점이다. 전자의 관점이 저출산 현상 자체와 저출산이 초래할 수및 7년이 소요될 전망이다. 외국의 경우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사회로 가는데 일본은 24년, 프랑스는 115년, 미국은 71년이 소요되었고, 초고령사회에 도달하는데 일본은 12년, 프랑스는 41년, 미국 15년 보다 매우 빠른 속도이다.)저출산에 따른 인구의 고령화는 노동인력의 공급 감소와 노동생산성의 저하로 이어져 경제성장의 둔화요인으로 작용한다. 경제활동인구의 감소는 생산력 저하와 소비 및 투자의 위축, 저축률 하락 등으로 이어져 경제성장 기반을 약화시킨다. 저출산은 장기적으로 볼 때 한 국가의 기본구성요소인 인구의 감소를 초래하여 사회의 안정적 유지와 국가의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노인인구의 증가는 경제활동인구의 피부양 의무가 크게 증가함으로써 생산가능인구의 고령인구 부양비율이 빠른 속도로 증가되고 있다.그리고 저출산으로 인한 경제활동인구의 감소는 조세수입 및 사회보장 기여금을 감소시켜 세입기반의 축소가 불가피할 것이다. 반면 고령인구 증가와 의료비 등 복지비용이 증가는 재정수지의 약화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경제활동참여율의 획기적 상승이 없는 한 생산 가능 인구의 감소가 늘어난 노인인구의 부양 부담이 심화될 것이고 이러한 변화는 개인의 생애주기에 걸친 다양한 복지욕구의 증가로 사회복지비용이 증가하면서 국가 사회적 부담이 가중될 것이다.2. 출산율 저하에 영향을 주는 요인저출산 현상을 설명하는 요인으로 크게 두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저출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구생물학적 요인들로서 혼인상태, 혼인 연령, 생식력, 피임도구 활용 등이고 다른 하나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광범위한 사회 경제적 요인들로서 여성의 교육수준 및 경제활동 참가정도, 보육서비스의 활용가능성, 그리고 경제성장과 같은 거시적 경제적 요인들이다.< 그림 1. 출산율 저하의 과정) >1) 인구생물학적 요인저출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구생물학적 요인의 첫 번째로 초혼연령의 상승, 즉 연령별 출산율과 혼인 연령을 들 수 있다. 혼인 연령이고 있는 가족이 많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와 같은 불투명한 미래로 인하여 자녀 출산을 망설이게 되고 이는 출산율 저하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는 불임률은 저출산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2) 사회 경제적 요인저출산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회 경제적 요인으로는 경기침체 및 직장 불안정으로 비자발적인 미혼상태에 있다. 경제적 기반이 취약해서 결혼을 못하고 있는 경우, 즉 경기침체 및 청년 실업이 결혼의 장애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많은 결혼비용과 고액의 주거비용이 미혼남녀의 주요한 결혼 장애요인이라 하겠다.둘째로 여성의 자아욕구 및 사회참여 증대로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여성의 교육수준 증가와 사회적 지위향상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는 자녀의 출산에 이어 양육에 필요한 노력과 요구들이 개별 가정 특히 여성의 책임 하에 주로 놓여있다. 즉 자녀의 양육을 위한 사회적 조건도 매우 열악한 환경이기 때문에 여성들은 직장이나 출산 및 육아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셋째로 자녀효용가치가 감소되었다는 자녀관의 변화이다. 자녀에 대한 가치가 근대 산업화 사회 이후 자녀수의 증가가 자녀양육 부담을 증가시키고 핵가족 하에서 부부중심의 가족생활이 강조되면서 자녀 가치는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는 추세이다.넷째로 자녀양육의 문제이다. 자녀에 대한 양육부담의 증가는 소자녀관의 정착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경제발전과 교육수준 향상에 따라 자녀의 수보다는 질을 중요시하게 된 것이다. 출산율과 관련해서 가계의 총지출 중에서 자녀의 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할수록 출산율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Ⅲ. 저출산의 지속현상우리나라는 1960년에 합계출산율 6.0에서 1984년 인구대체수준 2.1에 도달하였으며 2006년에는 1.08까지 감소하였다. 출산율 감소는 급격하게 이루어졌고 저출산의 지속으로 인해 심각한 노동력 부족과 노령화를 우려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별 가족의 부담은 사회적으로는 출산율의 감소, 저출산의 지속현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저출산의 지속은 가족의 출산?양육의 부담이 개별 가족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을 반영하는 사회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2002년까지 우리나라의 복지정책은 다른 OECD국가 평균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산전산후휴가기간도 OECD국가 평균수준에 못 미치며 휴가기간 소득대체율도 매우 낮다. 육아휴직기간도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짧은 편이다. 육아휴직급여 역시 정액 급여로서 충분한 급여액을 제공하지 못하고 부성휴가는 아예 도입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보육시설의 공급도 2세 미만의 아동의 경우 10%, 3~6세 아동의 경우 28% 밖에는 충족되지 못하는 실정이었고 공적 연금 제도에서도 출산?양육에 대한 크레딧은 도입되지 않았다.)이후 저출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아동이 있는 가족에 대한 재정 지원, 일과 가족 양립을 위한 휴가, 보육시설 사회보장제도의 개별 수급이라는 정책적 요소가 충족되지 못해 저출산의 지속현상을 유발하고 있다. 따라서 저출산 연구를 통해 저출산의 보다 구조적인 원인에 관심을 갖고 해결책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다음은 선진국의 사례를 통해 저출산에 대한 해결책을 알아보고자 한다.Ⅳ. 선진국을 통해 본 시사점OECD 주요 선진국의 출산율은 1970년대에 인구대체수준 이하로 떨어졌으며 그 이후에도 완만하게 출산율이 감소했으나 1990년대에는 출산율이 낮아지는 국가들과 높아지는 국가들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출산율 변화의 차이는 1970년대 이후 각국이 채택?추진한 가족복지정책)과 상당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암시해준다.1. 기본적?원칙적 시사점첫째, 출산율 및 인구관련 문제를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종합적인 대안을 마련하는데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줄 수 있는 범정부차원의 인구관련기관 또는 인구문제연구소 등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 출산율 감소는 노동생산력 감소, 인구노령화, 사회보장부담 증가 등 국가 기반 및 기본체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사항이므출산율 감소가 완화된다는 분석 결과는 이러한 주장을 잘 뒷받침해주고 있다. 한편 여성의 학력 상승과 자아실현 욕구 증대에 따른 여성의 노동시간 진출 증대와 지식?정보산업 확대로 인한 여성 고용기회 증대는 노동지원정책의 필요성을 더욱 지지해주고 있다.2. 구체적?세부적 시사점첫째, 선진국에서 4대 보험과 함께 5대 사회보장제도로 채택하고 있는 가족수당제도)를 신설할 필요가 있다. 가족수당 지급액 수준은 출산율 증가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OECD 국가들의 평균수준인 제조업 남성노동자 평균임금의 5% 수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둘째, 출산휴가 및 육아휴직의 경우 그 기간이 연장되었지만 아직도 선진국에 비해 그 기간이 짦음을 고려해 볼 때 기간이 더 연장되어야 하며, 육아휴직의 경우 소득대체율을 선진국 수준인 30~80% 수준으로 높여야 할 것이다. 한편 사용자의 부담을 덜어주고 노동시장에서 여성 기피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출산휴가 및 육아휴직 급여를 사회보험에서 지급하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하며 선진국에서와 같이 출산휴가 및 육아휴직 시 부모가 모두 활용할 수 있는 기간도 확대될 필요가 있다. 즉 현실적으로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활용할 수 있는 대안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셋째, 2세 이하 공보육시설 및 3-5세 공보육시설을 확대하고 보육시설의 질적 수준을 높여야 한다. 한국의 경우 선진국에 비해 공보육시설이 매우 미흡한 실정이며 이러한 상황은 출산 후 여성의 노동복직과 출산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직장보육시설에 대한 정부의 지원도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마지막으로 사회구성원, 특히 청년층에게 자녀를 기르는 것이 어렵지 않으며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희망을 갖도록 하는 사회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Ⅴ. 결론한 사회가 일정시점의 인구구조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합계출산율이 2.1인 인구대체수준을 유지하여야 한다. 현재 한국의 합계출산율 수준은 이탈리아, 스페인, 일본, 독일과 더불어 세계 최저 수준이다. 이러한 국가들은 공통적 있다.
    사회과학| 2008.01.06| 6페이지| 1,500원| 조회(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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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역문화,문화인류학, 제주도, 제주 역사, 제주 문화, 무속신앙> 제주지역의 민간신앙
    제주지역의 민간신앙《목차》1. 머리말2. 제주의 역사 개관3. 제주지역의 민속신앙3.1 제주의 무속신앙-당굿-큰굿-유교식 마을제 : 포제3.2 제주 무속신앙의 특성4. 맺음말1. 머리말제주에서는 그 어느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민간신앙이 행해지고 있다. 제주 각 마을별로 한 명 이상의 심방(혹은 무)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당신앙뿐 아니라 개별 가정에서 각종 무속의례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대변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제주의 지리적, 문화적 특수성이 반영된 것이다. 제주는 섬이기 때문에 한반도 내 다른 지역과의 상호교류가 적어 상대적으로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더욱이 제주는 조선말까지 출륙금지령이 내려진 지역이었으므로 제주민 뿐 아니라 육지의 사람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다. 모든 제주민들은 관천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배를 탈 수 없었으며,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육지나들이가 불가능했다. 이러한 제주의 특수성들은 제주와 외래문화와의 접촉을 적게 해 결과적으로, 제주도의 전통문화를 잘 보존될 수 있게 했다. 마지막으로 제주민들은 바다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생활해 왔다. 즉 그들을 어업활동을 통해서 생활을 유지했다. 바다를 비롯한 자연환경의 상태는 그들의 생업과 성패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제주도의 특수성들은 제주민의 민간신앙에 대한 의존성을 강하게 했으며 제주의 민간신앙을 어느 지역보다도 강하게 전승되게 하였다. 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에 앞서 제주의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제주의 무속신앙을 비롯한 민간신앙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2. 제주의 역사 개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 의하면 제주는 처음에는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 세 사람이 땅을 나누어 살았다. 신라 때 고을나의 후손 고후가 아우 둘과 함께 신라에 조회를 하자 신라는 이들에게 성주(星主), 왕자(王子), 도내(都內)라는 칭호를 붙이고 나라이름을 탐라(耽羅)라고 했다. 고려 숙종 10년(1105) 고려에 편입되어 탐라군이 되었다. 성주, 왕자, 도내 목호, 군인, 죄수 등이 탐라로 이주하였고 일부는 토착화 또는 동화되어 갔다. 원에 동화된 고려인, 혼혈인 등도 등장하여 제주의 주민구성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어찌 보면 제주민에게 고려의 관리나 원의 목호나 모두 외세였다. 원의 세력약화로 고려가 다시 제주(탐라)를 지배하게 되면서 원출신 묵호들의 반란도 빈번하게 일어났지만 고려정부가 파견한 최영 장군 등의 진압에 의하여 제주는 고려로 환속되었다. 이처럼 원나라 지배시기 제주민 상호간에, 제주민과 외부의 지배자 사이에 갈등과 저항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조선시기 군현제의 강화에 따라 제주에는 제주목사, 대정현감, 정의현감이 파견되었다. 태종 때에는 성주, 왕자 등 토착세력의 명칭을 제거함으로써 중앙정부의 제주지배를 강화했다. 나아가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들은 성리학 이념으로 주민들을 교화함으로써 뼛속까지 지배하고자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제주의 풍속이 ‘음사(淫祀)를 숭상한다’고 하여 숲 속이나 못이나 높은 언덕이나 낮은 언덕이나 나무, 돌에 모두 신의 제사를 베푼다고 하였다. 원나라 지배하에 불교가 들어오기는 했으나 워낙 제주의 무속이 강하여 법당의 본존불 앞에서도 무당 굿판을 벌일 정도였다고 한다. 마을 공동체의 신을 모시는 신당인 본향당도 번성하였다. 무형문화재로 설정된 송향리 본향당은 제주신당의 원조이다.1702년 6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병와 이형상은 제주민을 교화하기 위해 매우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제주 전역을 순력할 때 화공 김남길로 하여금 41장의 『탐라순력도』를 그리게 했다. 그 중 ‘건포배은(巾浦拜恩)’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그림은 1702년 11월 20일 제주의 각 마을에 있던 신당을 불태우면서 향품문무(鄕品文武) 300여명이 관덕정과 건입포 앞에서 북쪽 조정을 향해 배례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때 신당 129개소, 사찰 2곳을 불태우고 무당 285명을 귀농시켰다고 한다. 이 장면은 정부 관리인 성리학자가 백성의 교화를 강압적으로 시행한 가장 극단적인 모습이다. 그렇지만 , 화전세 등을 둘러싸고 봉기를 일으켰다. 19세기에서 한말에 이르기까지 제주도민의 저항운동은 조세문제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결국 독립국 건설과 같은 제주민의 오랜 염원을 담은 변혁적 성격을 보여준다.제주 현대사에서는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단연 4?3항쟁일 것이다. 그것은 연면히 이어온 제주민의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한편, 일제하 제주 3?1운동이나 해녀투쟁, 사회주의 활동 등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1947년 제주 3?1운동 기념식에 대한 경찰의 발포를 계기로 민족분단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운동이 제주에서 격렬하게 일어났다. 1948년 4월 3일 사회주의자 및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경찰, 군인, 청년단, 미군을 상대로 한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개시하였다. 문제는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만 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무차별적으로 희생된 것에 있다. 1999년 12월 ‘제주 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의회에서 통과됨으로써 반세기만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길이 열렸다. 4?3항쟁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의 명예회복에도 불구하고 분단의 현실은 4?3의 역사화를 가로막고 있다.제주는 지리적으로 일본과 중국의 교류선상에 놓여 있고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원나라가 제주도를 직할령으로 삼았다든지,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오키나와와 함께 제주를 옥쇄하려 한 것이라든지, 2006년 7월부터 국제화의 자유공간으로 제주특별자치도를 출범시킨 것 등은 모두 제주가 지닌 지정학적 장점을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과 그로 인한 역사 문화적 특성은 제주의 ‘독자성’ 형성의 근거가 될 것이다.3. 제주지역의 민간신앙민간신앙은 일반적인 공인 종교라기보다는 ‘일반민중의 생활 속에 전승(傳承)되고 있는 전종교적(前宗敎的) 또는 주술적(呪術的)인 신앙형태’라고 하는 다소 애매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때문에 민간신앙은 크게는 민족 작게는 지역 단위의 문화, 또는 신앙민속의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종교로 원초적 신앙이라 할무속신앙은 큰굿을 통하여 종합된다. 부분적으로는 굿이나 비념, 아니면 제사 형태로 이루어지고, 의례와 전혀 상관없는 듯 세시풍속 같은 데서도 무속신앙의 흔적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 유교와 제주의 민속신앙 이 양자가 합쳐서 제주도의 민속신앙체계를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다.제주 사람들은 장례가 끝나면 '귀양풀이'를 하여 망자의 한을 풀어 주고, 유교식으로 치르는 제사 때에도 먼저 문신(門神)을 위한 문전제(門前祭)를 하며, 부엌에는 조왕신(帛王神:부엌을 관장해 주는 신)에 제물을 올린다. 그리고 대한 5일 후부터 입춘 3일 전까지의 일주일 동안을 '신구간'이라 하는 풍속이 있는데, 신구간은 신구세관(新舊歲官)이 갈리는 기간이다. 세관(歲官)은 '태세지신(太歲之神)', 즉 한 해의 인간사를 관장하는 신이다. '신구간'에 묵은 해의 신들은 임기를 마쳐 하늘로 올라가고, 새로 부임한 신들이 지상에 내려오는 기간이다. 이때는 집안의 모든 일이 신의 권한에서 벗어나는 기간이기 때문에, 변소를 고치거나 집을 수리하거나, 이사를 하여도 재난이 따르지 않는다.이처럼 제주의 독특한 풍속이 되고 있는 신구간도 집안의 무속신인 가신(家神)들, 이를테면 문전·조왕·칠성신 등이 없는 틈에 새해를 맞이하기 위하여 집안 단속을 하는 제주인의 무속신앙과 관련되고 있는 것이다. 신구간이 끝나면, 입춘을 맞이하여 옛날에는 관민합동의 풍농굿으로 입춘굿놀이가 벌어졌다 한다.그리고 정월이 되면, 마을의 수호신에게 신년의 하례를 하고 오곡풍등·육축번성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제가 마을마다 벌어진다. 여성들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신당을 찾아가 심방을 데리고 당굿을 하였고, 남성들은 제관을 정하여 유교식 제사 형식으로서 포제를 하였다. 이러한 유교적 제의도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무속신앙이 서로 혼합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마을제가 끝나면, 집집마다 집안에서 모시는 조상들을 위한 가제를 한다. 문신(門神)에게 사업의 번창을 가장의 안녕을 비는 문전제, 조왕제, 그리고 고팡(庫房 따라, 규모에 따라 당굿의 종류는 여러 가지로 구분된다.음력 정월 마을의 신년제인 신과세제, 음력 2월의 영등굿, 백중제, 10월에 신만곡대제 등이 있다.영등굿은 영등신이 음력 2월 초하루에 들어와서 2월 15일 나가는 내방신(來訪神)이다. 영등신은 '바람의 신'으로 저 멀리 강남천자국으로부터 북서계절풍을 몰고 오는 신이다. 영등신은 영등하르방, 영등할망, 영등대왕, 영등호장, 영등우장, 영등별감, 영등좌수 모두 일곱 신위(神位)다. 음력 2월 영등달이 들면 이 신들은 강남천자국에서 남방국 제주도로 산 구경 물 구경을 하러 오는데, 맨 먼저 귀덕리 '복덕개' 라는 포구로 들어온다고 한다. 그리하여 한라산에 올라가 오백장군에게 문안드리고 '어승생 단골머리'로 '소렴당'으로 '산천단'으로 '산방굴'을 경유하여 교래리까지 돌면서 봉숭화꽃, 동백꽃 구경을 하고 다니며 세경 너른 땅에는 열두 시만국(新萬穀) 씨를 뿌려주고, 갯가 연변(沿邊)에는 우무·전각·편포·소라·전복·미역 등을 많이 자라게 해초씨를 뿌려주고 돌아간다고 한다. 따라서 각 마을에서는 영등신이 방문하는 기간에 영등굿을 하게 되는데, 2월 초하룻날 영등 환영제를 하고, 12일에서 15일 사이의 어느 날에 영등 송별제를 하는 것이다.- 큰 굿제주도에서 행해지는 큰 굿의 제차를 그 명칭이나 형식으로 보아 4가지로 나눌 수 있다.첫째, 기본 형식의례로서 초감제, 초상계, 젯상계, 도진 등이다.제의(祭儀) 구성으로 보아 제주도 무의에서 어느 것에나 공통되는 형식으로 신령을 일제히 청해드리고 제물을 잡수도록 권하고 기구 사항들을 기원한 후, 제신(諸神)을 송신하여 보내는 것이다.둘째, 영신의례로서 '○○ 맞이'라고 하는 명칭의 의례로서 초신맞이, 일월맞이, 초공맞이, 이공맞이, 삼공맞이, 불도맞이, 요왕맞이 등이다. 영신의례란 신이 오시는 길을 깨끗이 치워 닦아서 신을 맞아들여 기원하는 것이다. 기본 형식 의례가 청신(請神) 방법에 있어서 수직적 강림형의 것이라면 영신의례는 그 청신 형식이 신을 수평적인 길을 통례
    인문/어학| 2008.01.06| 8페이지| 2,000원| 조회(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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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학, 사학> 혁명의 역사 서평- 페터 벤데
    혁명의 역사피터 벤데가 엮은 『혁명의 역사』는 근대 이후 중요한 의미들을 갖는 혁명들을 정리해놓았다.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있긴 하지만 각각의 혁명에 대해 각각 다른 사람이 분석한 책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일관성은 부족한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서문에 설명을 많이 했다. 그것은 혁명의 개념규정과 이론에서부터 용어설명, 혁명의 기준, 그리고 혁명의 진행과정을 간략하게나마 서술함으로써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 책의 의도가 특별한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발견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저자의 의도에 맞게 책을 읽어가도록 하겠다.우선 혁명이라는 말은 특히 요즘 들어 ‘정치적 사건’에서의 혁명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급격한 변화의 조짐이 보이면 이를 혁명이라고 칭한다. 혁명이라는 말의 뜻이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혁명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인데, 이는 혁명의 원래 의미와 과정을 알아보면서 오해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혁명, ‘레볼루치오(revolutio)’라는 말은 ‘치받음’ 혹은 ‘뒤엎음(전복)’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서유럽에서 14세기가 되면 천문학 용어에서 사용하던 말이 정치 영역으로 옮겨져 왔다. 지금 우리가 혁명을 확대 해석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당시 사건 중 혁명이라고 불리는 것은 영국의 명예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통해 혁명의 의미가 구체화된다.우선 청교도혁명이라고 알려진 영국혁명은 혁명의 역사에서 다루는 첫 사건이다. 우선 1640년부터 1660년까지 일어났던 사건으로 이 사건을 현대 유럽 역사에서 나타난 최초의 위대한 정치적 변혁이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저물어 가는 시대를 매듭짓는 유럽 최후의 종교전쟁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 사건들이 16세기와 19세기에 이르는 하나의 연속성을 별 의미 없이 일시적으로 단절시켰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홉스가 영국 혁명을 ‘혁명’이라고 파악한 까닭은 왕정의 부활과 함께 순환운동으로 끝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천문학자들이 사용하던 용어인 ‘혁명’의 의미, 바로 순환 및 규칙적인 회귀와 관련한다. 하지만 동시대인들에 의해 최초로 혁명이라 규정된 것은 명예혁명으로 그 결과가 계몽된 유럽에 하나의 모범이 되는 정치 체제 모델을 제공했다고 함이다. 또한 미국 혁명 이후로 혁명의 개념은 명확하게 인식되면서 이러한 혁명의 의미는 결국 프랑스 혁명을 통해 완전히 구현되었다.혁명의 역사에 있어서 보통 사람들은 다른 혁명은 모르지만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만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프랑스 혁명은 혁명의 개념을 정의하는데 기본이 되고 있다. 피터 벤데가 말하는 혁명의 조건이라 함은 프랑스 혁명의 역사를 두고 그 패턴을 분석했을 것이다. 그 혁명의 조건이랑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로 혁명적 변화의 대상은 정치적으로 조직화되어 있으며 특정한 형태를 갖춘 체제로 이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혁명이다. 혁명은 일반적으로 정부의 인적 구성에 변화를 일으키고, 정부뿐만 아니라 정치적 조직형태에 변화가 일어나게 한다. 그리고 사회 구조들에 영향을 미치면서 총체적 전복으로 규정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로 혁명은 변화를 관철하는 방식에 의해 규정된다. 일반적으로 밑으로부터 일어나는 폭력을 말한다. 그리고 변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져야 혁명으로 규정된다. 마지막으로 혁명이 역사적 변화의 특별한 형태라고 규정됨에 따라 그 결과도 중요한 변수로 고려된다.이렇게 대략적인 혁명의 의미와 조건이 있으나 모든 혁명이 이렇게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프랑스 혁명을 기준으로 패턴을 만드는 학자도 있지만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이 혁명의 기준이다 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혁명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많은 학자들이 바로 혁명사를 분석하면서 비교연구를 통해 혁명 모델을 끌어내려고 한다. 저자 서문에서도 보듯이 부르크하르트라는 학자의 최초 혁명 모델로부터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지만 하나의 도식에 짜 맞추는 것은 무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 『혁명의 역사』에서도 그러한 도식을 제시하지 않고 각각의 혁명 사건을 다루는 것이다.하지만 혁명의 사건을 모아놓고 각각을 분석하는 이 책 또한 한계가 있어 보인다. 바로 일관성이 없다는 것인데, 물론 혁명이라는 각각의 사건이 도식화나 모델링이 어렵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저자 서문 하나로 책에 실린 혁명들을 일관성 있게 이해하라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닐 듯싶다. 왜냐하면 특별한 사건을 통해 보편적인 것을 발견하는 것은 학자들이나 가능하지 보통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보편적인 것을 끌어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혁명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은 동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혁명’이라 하면 영국 혁명, 미국 혁명, 프랑스 혁명 단 세 개정도만 알고 있었고, 수업을 들으면서 파리 코뮌까지 배웠던 나에게는 파리 코뮌 이후의 볼셰비키 혁명, 독일 혁명, 멕시코 혁명, 중국 혁명, 이집트 혁명, 쿠바 혁명, 문화 대혁명, 68 혁명, 이슬람 혁명, 동독의 89 혁명까지 1900년대 들어서의 사건들인 혁명을 배울 수 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었다.우선 파리 코뮌 이후에 1900년대 들어 첫 번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 혁명, 즉 볼셰비키 혁명. 아무래도 가장 유명한 세 혁명 영국 혁명, 미국 혁명, 프랑스 혁명 외에는 내가 잘 몰랐던 이유가 있었다.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도 이 세 혁명 이외엔 러시아 혁명만 서술되어있다. 그 외의 『혁명의 역사』에 실린 사건들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1917~1921년까지의 러시아 혁명은 볼셰비키적 계급투쟁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혁명의 달라진 의미를 내포하는데 1800년대의 유럽의 혁명이 퇴조하면서 혁명 대신 자본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두 개의 운동인 계급 혁명과 민족 혁명이 조건이 갖추어 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 혁명은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이며 그 당시 사회를 이해하여야만 러시아 혁명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러시아의 구체제의 모순과 혁명사상의 전개인데 이를 통해 3월 혁명을 통해 니콜라이 2세가 퇴위되고 11월 혁명을 통해 레닌이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였다. 『혁명의 역사』의 필자는 볼셰비키 공산주의적 세계해석과 전환, 또는 인간 해방의 약속과 대량학살 사이에 이율배반적 성격을 지적한다.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은 곳에서 대량학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통에서 해방된다는 약속 또한 지켜지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이 갖는 중요한 의미, 즉 인간이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 진정으로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려 했기에 러시아 혁명은 ‘혁명’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이후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할 수도 없고 민족 해방 운동이라고 할 수 없는 혁명이 멕시코에서 발생했다. 바로 1910~1940년 동안 일어난 멕시코 혁명이다. 이 멕시코 혁명은 비정상적으로 복합적인 현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멕시코 혁명은 디아스 대통령 및 ‘포르피리오 시대’로 대변되는 1876~1910년의 국면. 이 국면은 1910년에 시작되는 혁명의 과정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서로 다른 지도자들이 지배한 1910~1920년의 혁명의 군사적 국면과 폭력이 없니즌 않았으나 결정적인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변화들이 생겨난 1920~1940년의 권력을 통한 혁명의 국면기로 나눠진다. 이러한 멕시코 혁명은 러시아의 1917년 혁명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점, 러시아와 비견될 정도로 ‘사회적 혁명’으로 해석되는 점, 러시아에서 성공한 공산주의와는 다른 정치를 추구했지만 어쨌든 혁명을 통해 합법화된 정치체제가 생겨난 점, 60년대 이래로 중요성을 획득한 종족의 다양성, 다층문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 이른바 제 3의 길을 모색한 점 등에 의미를 둘 수 있다. 하지만 멕시코 혁명을 ‘혁명’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다.그리고 이후 냉전이 본격화 되면서 계급운동과 민족운동이 어느 정도 뒤섞일 수 있었던 회색지대가 위협받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혁명은 이데올로기와 함께 다른 가치를 추구했는데, 이를 이끌었던 것은 바로 제 3세계였다. 쿠바 혁명을 시작으로 라틴아메리카는 혁명과 반혁명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고 베트남에서 시작된 아시아 혁명이 뒤따라 동남아시아를 휩쓸었다. 중심부 국가에서는 일종의 문화혁명인 68 혁명이 일어났다. 좌파정권이든 우파정권이든 68 혁명은 기성체제에 반대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미국, 서독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은 혁명의 역사를 간직한 프랑스에서도 폭발한다. 1968년의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사건들은 각 지역에 따라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극적 사건들로 인해 서유럽 사회에서는 노동과 여성, 이민노동자와 세계 다른 지역의 약자들에 대해 깊은 각성을 일으킨다. 이는 실제로 20세기 마지막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발전들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68 혁명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권위의 원칙이 흔들린 반면 참여와 협력이라는 새로운 정신이 삶의 많은 영역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가진다.
    독후감/창작| 2008.01.05| 4페이지| 1,000원| 조회(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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