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유착, 과거와 현재Ⅰ. 과거의 정경유착1. 정경유착을 이해하는 기본 지식1-1. 재벌의 정치적 위상재벌이란 어떤 사회적 조직인가? 그리고 정치조직이라고 보아도 되는 것일까? 재벌의 사회조직으로서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재벌은 본인의 선택에 따라 가입되는 이익집단적인 2차 조직집단이다. 이익에 따라 가입과 이탈이 자유롭게 결정되는 조직이다.둘째, 재벌은 목적적 조직이다. 재화의 생산을 위한 협동조직, 즉 생산 공동체이다. 기업주에게는 부를 창출하기 위한 인간조직체이며 노동자에게는 물질 또는 성취감 등의 보상을 받고 노동을 제공하는 일터이다. 즉, 재벌은 노동과 대가로 이어지는 타산적 조직으로서의 기업집단이다. 여기서 집단은 소유주가 1인 또는 그 가족이라는 혈연으로 연결되었다는 의미이다.셋째, 재벌은 범계급적 복합집단이다. 기업을 구성하고 있는 성원들은 사회의 모든 계층을 대표한다. 기업소유주, 관리직, 사무직 그리고 단순 근로직 종사자 등은 사실상 사회의 전 계층을 망라하는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하나의 기업 내에는 사회 내에서 서로 대립하는 이념들이 거의 그대로 공존한다. 이런 의미에서 재벌은 그 자체로서 어느 한 계층의 이익이나 한 가지 이념을 대표하는 정치집단과는 다르다.넷째, 재벌은 초지역적 집단이다. 기업과 재벌은 기업운영에 필수적인 기능을 담당할 인원을 전문성을 기준으로 선별하여 고용하기 때문에 하나의 복합기능 집단이다.이상과 같은 여러 특징을 종합해 보면, 조직체로서는 재벌은 어떤 정치적 의미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재벌은 그 자체가 정치적 집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인간 조직체로서가 아니라 부의 집단으로서 작용할 때 생겨난다.1-2. 정경유착의 의미민주정치체제에서 재벌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는 “정치자금의 공급자”라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재벌은 정치 자금을 특정 정당 또는 정치 집단에 공급함으로써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런 뜻에서 재벌은 정치를 지배한다고 말할 수도 있정치권에 밉보일 전두환 정권 하에서 당시 재계 7위의 국제그룹이 하루아침에 공중분해 된데 대하여 국제그룹 창업주 양정모가 정부에 밉보였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떠돌기도 하였다.정부와 재벌 간의 관계가 이처럼 정부 일변도의 관계로 고착된 것은 재벌들이 그동안 정부에 의해 육성되어 왔기 때문에 정부 자신이 재벌들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현행법상 기업들이 영수증 등의 증빙서류 없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은 자본금의 3% 혹은 매출액의 0.3%에 불과하다. 이는 기업 활동에 필요한 로비성 자금으로 정당에 대한 지정 기부금, 접대비, 기밀비 등으로 사용되는 비자금이다. 그러나 기업들은 현행법이 정한 자금 이상을 조성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기업들은 이렇게 하여 조성한 비자금으로 기업 소유주와 경영자의 개인적 축재 및 정치권에 대한 로비자금으로 사용한다. 재벌들은 정치자금 등 비자금을 원료 및 자본설비의 고가 매입과 제품의 저가 판매, 인건비 조작 등의 방법으로 조성한다.3. 정경유착의 폐해3-1. 정치 ? 행정적 폐해① 정치낙후와 정당의 기업화정경유착에 의해 정치는 돈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치는 자연히 국민을 위한 순수봉사가 아니라 국민을 상대로 돈을 버는 불법사업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선거 때마다 각 정당은 막대한 정치자금을 살포하여 당선자 수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선거가 끝나면 갖가지 이권에 개입하여 비자금을 벌어들이는 기업체로 본질이 바뀌었다. 여기서 일부 정당은 권력을 쫓는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을 상대로 공천장사를 벌이며 부당이득을 축적하는 악덕정치사업자로까지 변했다. 이 과정에서 여?야 정치인들은 개별적으로 다시 막대한 선거자금을 뿌리고 당선이 되면 다시 돈을 거두어들이는 하청업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여기서 문제는 정당을 私黨化(사당화)하여 재벌총수처럼 계속 정치사업을 벌이는 것인데 이로써 정치부패와 국민희생은 뿌리가 깊어갔다.② 관료부패의 토대 형성정경유착이 정부기능을 지배하는 상태에서 정부는 경제를 통제하하되고 불량률이 높아지게 된다. 총체적으로 개인의 삶의 질이 저하되고 기업의 혁신이 불가능해진다.사회적으로 거래비용의 증가는 생산 잠재력의 발전을 저해한다. 그것은 제도의 효율을 저하시키고 사회가 보유하고 있는 인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게 된다.3-3. 사회?문화적 폐해① 가치관의 전도와 사회적 소모비용의 발생해마다 새 학기가 되면 심심치 않게 일부 초등학교 반장선거에 값비싼 선물이 제공되고, 분에 넘치는 음식대접이 성행하여 사회적인 문제가 되곤 한다. 이는 정치인들의 잘못된 선거풍토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정부패, 비리, 탈법적인 세금포탈, 음성적인 방법에 의한 특혜들을 보고 자란 어린 학생들은 미래의 주역으로 우리나라를 이끌어 나갈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유명대학까지 나온 능력 있는 일부 젊은이들은 생산적인 일보다는 비생산적인 일, 예컨대 부동산 투기나 음성적인 방법으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일 등에 몰두하게 됨으로써 사회적으로 인력 낭비를 가져오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이 한탕주의로 흐르게 되었다.일반적으로 정치자금과 관련해 널리 알려진 비리 사례들은 공익 즉 공공선을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 정치자금의 기부가 음성적으로 이루어져서,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될 때, 그 정치가는 국민들로부터의 신뢰를 크게 상실한다. 혹은 유력한 정치인으로 인하여 세금포탈이 행해질 때 납세윤리가 약화되거나 정치적 냉소주의가 증대하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② 소득격차와 계층간의 위화감 조성정경유착에 의한 권력과 부의 집중은 사회를 분열시켜 공동운명체의 해체현상을 가져오고 있다. 정치논리에 의해 추진된 고도성장의 그늘에서 우리 사회는 아물기 어려운 구조적 균열을 가져왔다. 먼저 경제가 기득권층 중심으로 발전함에 따라 소득격차가 심화되었다. 실제로 권력층과 재벌기업들이 공생 체제를 형성하며 경제성장에서 오는 부를 집중 소유하고 일반대중은 이렇다 할만한 보상 없이 물가상승과 투기 피해를 떠맡은 피해계층이 되었다. 이로써 더라도 삼성을 대하는 검찰 또는 정부의 태도와 현대차를 대하는 그들의 모습은 큰 차이를 느끼게 한다.2004년 삼성그룹 수출 500억달러 돌파,한국전체수출의 21%차지,삼성그룹 매출 135조5천억......이와같은 엄청난 경제성과를 기반으로 “소인국의 걸리버”란 이야기까지 듣고 있는 삼성.우리는 삼성을 중심으로 “삼성공화국”론이 나올 수밖에 없던 이유와 현재의 모습을 살펴보며 과거의 정경유착의 모습과 비교해 얼마나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살펴보고 이에 대한 각계의 대응방안을 찾아보고자 한다.2. 삼성의 인적 네트워크 분석2-1. 개괄인적 네트워크란 쉽게 말해서 ‘사람들의 관계망’을 뜻한다.민주주의 사회는 ‘평등한 관계’ 속에서 ‘투명한 절차’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 그럼으로써 이 결과의 불평등이 용인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의사결정자 그룹 내에 ‘이너 써클’이 만들어져서 특정 집단에게 유리하게 제도를 만들거나 운영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의 민주주의가 부딪히는 가장 큰 위험이다.대표적인 사례로 ‘삼성그룹’을 꼽을 수 있는데, ‘삼성그룹’은 우리 사회의 의사결정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차원을 넘어서 그것을 아예 장악하려 하고 있으며, 삼성그룹의 힘은 그 인적네트워크를 통해 발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2-2. 관계, 법조계, 학계, 언론계 곳곳에 삼성의 인적 네트워크가 존재하는 것이 확인되었다.삼성그룹은 정치, 행정, 사법, 학계, 문화예술, 사회운동 곳곳에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해놓고 있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우리 사회의 ‘파워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전직 고위 관료나 법조인, 명망있는 학계 인사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관료나 법조인의 경우 임직원으로의 취업, 학계나 언론인의 경우 재단이사 선임이 주된 영입 형태인 것으로 드러났다.또한 ‘삼성의 인력으로 국무회의도 운영할 수 있다’는 세간의 이야기가 과장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삼성의 법조인력 네트워크 중 전직 고위 법조인정경유착, 과거와 현재전직이름삼성그룹과의 관련대법원 판사한환진전 삼성물산 사외감사대중))이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를 거꾸로 읽어보면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즉, 신문이 재정적으로 불안정해질수록 광고주의 압력에 굴복할 위험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언론이 재벌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광고수입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데 그 일차적인 원인이 있지만, 다른 한편, 외환위기 이후의 언론사들의 경영실적 악화가 광고주의 압력에 자발적인 수용적 태도를 갖게 된 측면이 크다.4-3. 삼성의 광고비 점유 비중2004년도 기준으로 4대 매체(TV, 라디오, 신문, 잡지) 광고비 총액 4조 6,695억원 중 삼성그룹이 지출하는 광고비는 6.4%(약 3,007억원)을 차지하고 있다.첫째, 삼성그룹은 2004년 기준으로 가장 많은 광고비를 지출하는 기업이다.2004년도 삼성그룹의 광고비 점유 비중은 현대그룹보다는 2.3%(금액으로는 약 1100억원), SK그룹보다는 1.8%(약 857억원), LG그룹보다는 0.3%(2003년 기준, 약 155억원) 더 높다.2004년도 기준으로 삼성그룹이 지출하는 방송(TV와 라디오) 광고비는 약 1,763억원으로, 이는 주요 방송3사(KBS, MBC, SBS)의 총 광고수익 2조 1,733억원의 8.1%에 해당하는 금액이다.둘째, 삼성그룹은 우리나라 재벌들 중 가장 많은 방송광고비를 지출하는 방송 광고주이다.현대그룹보다는 3.5%(금액으로는 약 571억원), SK그룹보다는 2.1%(약 465억원), LG그룹보다는 0.3%(2003년 기준, 약 6.5억원) 더 높다.2004년도 기준으로 삼성그룹이 지출하는 신문광고비는 약 1,190억원으로, 이는 13개 주요 신문사의 총 신문수익 1조 6,277억원의 7.3%에 이른다.셋째, 삼성그룹은 방송뿐만 아니라 신문에서도 가장 많은 광고비를 지출하는 광고주이다.현대그룹보다는 1.9%(금액으로는 약 229억원), SK그룹보다는 2.3%(약 384억원), LG그룹보다는 1.0%(2003년 기준, 약 161억원) 더 높다.삼성그룹이 지출한 광고비다.
단재 신채호신채호는 누구인가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음력 11월 7일) 충청남도 대덕군(현재 대전직할시 대덕구) 산내면 어남리 도림 마을에서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령 신씨로서 조선조 세종 세조 때 문신으로 활약한 신숙주의 18대손에 해당된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의 집안은 점차 몰락하여 그의 할아버지 신성우가 고종 초기(1867)에 문과에 급제하여 잠시 벼슬에 올랐을 뿐 양반가문으로서는 크게 행세하지 못하였다.신채호는 8세에 아버지를 여의게 되자 할아버지를 따라 그의 고향인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옮겨와 거기서 할아버지가 차린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다. 가난한 살림에 어린 시절을 거의 콩죽으로 연명하였지만, 신채호는 할아버지의 엄격한 교육 밑에서 9세에 을, 13세 때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재주가 뛰어났던 신채호는 이 때 '신동'이라는 별명을 들었으며, 이 무렵 와 를 애독하며 한시를 읊을 정도로 한문실력이 높아졌다.두뇌가 맑고 독서열이 높다는 것을 안 할아버지는 신채호를 그의 친우였던 신기선에게 소개하여 충청남도 목천에 있는 신기선 본가의 장서를 읽도록 하였다. 신기선은 뒷날 학부(현재의 교육부)의 대신 벼슬을 지낸 구한말의 관료였다. 그런 인연으로 신채호는 신기선의 추천을 받아 19세 때에 당시 국립대학격인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었다. 성균관에서 그는 변영만 같은 벗들을 사귀면서 동료들 사이에서 학문으로 곧 두각을 나타내었고, 성균관장이던 이종원으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았다.신채호가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는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만민공동회가 열리고 있었다. 청년 신채호는 한학을 공부하였지만, 이 때 여러 개신유학자들과 함께 이 만민공동회 운동에 참여하였다. 만민공동회가 보수세력에 의해 해산 당하자 신채호도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잠시 체포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신채호가 만민공동회운동에 참여한 것은 그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갖다 주었다. 유학을 신봉하던 그를 개화 자강론자로 민족적 각성을 고양하는 한편 일제의 침략을 경계하고 물리치기 위한 언론구국 활동을 펴고 있다는 점이다.신채호는 신문의 글을 통해 식민치하의 절망 속에서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長物)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다. 그는, 바로 이 희망을 가지고, 절망 좌절할 수밖에 없는 한말의 저 비극적인 상황을 타개해보려고 자신이 선두에 서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필봉으로써 백성들을 계몽 격려하고 있었다. 신채호는 한말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백성들 자신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처음에 그는 백성들이 영웅을 본받아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영웅이 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영웅을 기대하기 보다는 차차 새 시대에 필요한 '신국민'이 되어 나라의 독립을 지킬 것을 강조했다. 그는 '신국민'을 설명하기 위해, "태고시대의 민족으로서는 중고시대에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중고시대의 민족으로서는 20세기에 제대로 버티지 못한다"고 하면서, 20세기의 신국민은 평등 자유 정의 의용 공공의 덕목을 갖추어야 하고 국민개병제와 국민경제의 실시, 입헌국가의 건설, 의무교육의 실시 등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민적 국가'(국민국가)가 아닌 나라는 바로 입헌국이 아니고 한두 사람이 전제하는 나라라고 지목하면서, 그런 나라와 세계대세를 거스른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한말 우리나라가 입헌국가로서의 국민국가가 변화되어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한말 나라가 망한 것은 백성이 새국민으로 되지 못했고 제도를 국민(입헌)국가로 변혁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말 그가 언론인으로서 얼마나 예리한 예언자적 통찰력을 갖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게 된다.둘째는 신채호가 이 기간에 우리나라 역사연구를 통해 민족혼과 대외투쟁의식을 고취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는 이때 많은 역사관계 논설과 논문, 단행본들을 써서 신문 잡지에 발표하였다. 와 같은 논설과 과 같은 논문 그리고 을지문덕전 최도통(영)전 이어 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교민들의 권익을 옹호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광복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1913년에 이르러 권업신문이 재정난으로 간행이 어려워지자, 신채호는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신규식의 초청으로 그곳에 갔다.1914년 신채호는 대종교의 3대교주 윤세복의 초청으로 서간도 환인현 흥도천으로 가서 1년간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이자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인 만주를 실제로 답사하게 되었다. 그는 이 답사를 통해 "집안현의 유적을 한번 보는 것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할 정도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가 역사연구에서 사적답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도 이때의 체험에서 느낀 점을 그대로 말한 것이다. 그는, 발로 걸어다니면서 역사적인 유적 하나하나를 확인해 가는 답사야말로 문헌상의 부족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때 신채호는 윤세복의 부탁으로 동창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면서 이 학교의 국사교재로 '조선사'를 집필하였는데, 학자들은 이 때 집필된 것이 뒷날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로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상고문화사'는 그가 쓴 '조선상고사'와 함께 그의 대표적인 저술의 하나이다.신채호는 1915년, 일찍 서울에서부터 개화운동가로 어울린 바 있던 이회영의 권고를 받아 북경으로 옮겨 3 1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4년간 체류하였다. 북경에서 그는 주로 우리나라 역사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만주에서 우리 고대사의 유적지를 널리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 경험을 살려 아마 이 곳에서도 그는 때때로 북경 교외로 나가 조선고대사의 유적을 두루 답사한 듯하다. 1921년경 국어학자이기도 한 이윤재가 북경에서 신채호를 찾았을 때, 그는 북경 근처에도 '훌륭한 조선고적'이 있지마는 누가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중국은 우리 조선의 사료를 탐색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이것이 다 우리가 할 일"이라고 강조하였다. 종래 우리나라 사대주의 역사가들은 안목이 좁아 사료를 그는 이 방략에 따라 '군사통일촉성회' 발기하는 한편 '군사통일준비회' 개최를 적극 지지하였다. 이는 분산된 독립군 부대들의 지휘계통을 통일하여 효과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것으로, 그에 의하면 독립군이 1920년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시 참변 이후에 무장투쟁이 부진하게 된 것은 독립군단들이 분산되어 작전과 지휘에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921년부터 독립운동가들 사이에는 임시정부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의견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 요구는 마침내 관철되어 1922년 4월 22일 의정원에서도 인민청원안의 심의 형식으로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가결하였다. 이때 신채호는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적극 지지하였다. 이 무렵 가족을 한국으로 보내고 의열단 선언을 작성하기 위해 상해로 왔던 그는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1923년 1월 3일부터 상해에서 70여 독립단체의 대표 123명이 모여 역사적인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지금까지 존속했던 임시정부를 완전 부정하고 노령 간도 등지에 새로운 임시정부를 '창조'할 것인가, 임시정부를 원칙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개조'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안창호 등 초기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인사들과 여운형 등 신한청년당과 상해교민회의 인사들, 고려공산당의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일부(김동삼 등)가 개조파로서 활동하였다. 여기에 비해 창조파에는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일부와 북경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신채호 박용만 등 북경 군사통일회와 김규식 등 상해 임시정부의 일부 인사들이 가담하였다. 신채호는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하였다. 1923년 6월 7일 새 헌법을 제정한 창조파는 이해 8월 노령의 블라디보스톡으로 창조파의 임시정부를 옮겼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자국 영토 내에서의 한국인의 임시정부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창조파의 임시정부는 활동이 중지될 수밖에 없었고, 독진문헌을 포함하여 우리나라 역사 관계 중국서적을 수많이 섭렵하였다. 신채호의 국사연구에서 보이는 100여종이 넘는 수천권의 참고문헌들은 대부분 중국의 대학도서관 등에서 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문헌들을 독파한 시기는 이에 앞서 4년간 북경생활을 하면서 국사연구를 했을 때와 이 시기에 국사연구를 본격화했을 때로 보인다.신채호는 이 무렵 중국의 역사가요 사상가인 양계초의 을 읽고, 그의 역사연구에 새로운 방법을 적용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연구방법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인 의 첫부분인 '총론'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 연구방법을 적용하여 썼을 것으로 보이는 논문들 중에는 뒷날 라는 책에 실린 것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무렵 신채호는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총론의 맨 첫구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흔히 신채호의 역사관을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으로 이해하는 근거가 되는 구절이다."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여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인류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면 조선민족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니라"신채호는 북경시절에 안질을 버릴 정도로 국사연구를 열심히 하였고, 논문과 저서도 남겼 다. 이때도 그에게는 많은 원고뭉치들이 있었다. 그는 1922년 말에 한국으로 돌려보낸 그의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면서 이미 써둔 논문들을 국내의 신문들에 발표하여 그 원고료를 가족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924년 1월에는 동아일보에 을 게재하였고, 그 뒤 1924년 10월부터 1925년 3월까지 계속 등의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들은 1930년대에 라는 한권의 책으로 묶여졌다. 또 1926년 2월 2일부터 시대일보에 을, 5월 20일, 22일, 25일에는 가 발표되었던 것이다.민족독립을 위해서는 무정부주의적인 운동방법도 수용하다.국민대표회의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창조'하자는 신채호의 노선이 실패한 후, 1.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그는 애국자인가, 매국노인가.200201813 경영학과 김은경근대 지식인 중에 최남선만큼 평가에 있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지식인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평가를 극단화시키는 원인은 최남선이 변절했기 때문이다. 호의적인 입장에서는 변절 전과 변절 후를 구분하여 공은 공대로 인정하자고 한다. 반대의 입장에서는 변절의 논리는 이미 변절 전에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옹호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최남선은 역사학? 국문학 ? 민속학 ? 인류학 ?언어학 등 다양한 학문에 영향을 남겼다. 학문에서뿐만 아니라 언론 ? 출판에서도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다. 근대가 열리던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그의 활동은 각 분야에서 초석을 쌓았다. 때문에 각 학문에서의 최남선에 대한 연구와 평가는 활발했고, 특히 국문학계와 민속학계의 연구가 두드러졌다.1. 생애육당 최남선, 그는 1890년(고종 27) 서울 수하동 부근에서 최헌규의 육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최헌규는 최영 장군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대대로 서울에서 살아온 중인 가문 출신으로 관상감의 참사관으로 근무하는 한편, 한약방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세간에서는 그의 집이 조선 왕실보다 더 많은 현금을 굴릴 수 있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이러한 경제적 여유 외에도 육당의 어릴 때 놀이터가 선교사 애비슨이 경영하는 제중원(후일의 세브란스 병원) 옆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서양책을 쉽게 접할 수 있었으며 한성순보나 독립신문 등도 늘 접할 수 있었다. 개화사상의 한복판에서 성장하였던 그는 12살 때 관례에 따라 결혼을 하였으며, 이 무렵 이미 문장가로서 신문에 논설을 투고하기 시작하였다. 1902년 열세살 되던 해에는 서당 공부를 중단하고 일본인이 서울에 세운 일어학교 경성학당에 입학하였다. 약 3개월쯤 일어와 산술을 배운 후 당시 서울에 지국을 내고 있던 오사카 아사히 신문을 정기구독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열세살 때 이미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에 논설을 투고하여 활자화할 만큼 조숙한 소년이었다. 19헌의 보존을 목적으로 한 『조선광문회』를 창설하여 고전을 간행하고 20여 종의 육전소설을 발간했다. 1913년 『아이들 보이』를 창간했으나 이듬해 폐간되자 다시 『청춘』을 발간하여 초창기 문학발전에 크게 기여했다.1919년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면서 유명한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공약3장의 글귀를 지어 일약 독립운동가로서 이름이 날리게 되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투옥되었다가 가출옥하게 되었다.1922년 『신문관』을 폐지하고 『동명사』를 설립, 주간지 『동명』을 발행하면서 동지 1호~11호에 「조선시민론」을, 25년에는 「불함문화론」을 발표하였다. 1924년 『시대일보』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곧 사임하고, 이듬해 『동아일보』의 객원이 되어 사설을 썼다.1927년 총독부의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편수위원이 되고, 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1936년 경성제대에서 심전 개발에 관한 강연을 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었다. 1938년 『만몽일보』고문으로 있다가, 39년 일본 관동군이 만주 괴뢰국에 세운 건국대학 교수가 되었고, 귀국 후 43년,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급할 쯤 재일한국인 유학생의 학병 지원을 권유하기 위하여 이광수 등과 함께 동경으로 건너간다. 이런 여러 가지 친일행위로 인하여 광복 후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1949년 기소 소감되었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나왔다. 북한 남침으로 인한 한국전쟁 때 「해군전사편찬위원회」에 촉탁되고 이어서 「서울시사편모의원회」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그 후 국사관계의 저서 간행 활동과 시조 창작을 계속하다가 뇌일혈로 작고하여 경기도 용인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2. 업적창작?문화활동1907년 18세의 나이로 출판기관인 신문관(新文館)을 창설하고 민중을 계몽, 교도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다.1908년 근대화의 역군인 소년을 개화, 계몽하여 민족사에 새 국면을 타개하려는 의도로 종합잡지 《소년 少年》을 창간하고·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 등의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조선광문회 단계에서는 우리 고전소설인 〈춘향전〉·〈옥루몽〉·〈사씨남정기〉·〈흥부놀부전〉·〈심청전〉·〈장화홍련전〉·〈조웅전〉 등을 정리, 발간하였고, 동시에 《동국통감 東國通鑑》·《열하일기 熱河日記》 등 한문 고전들도 복각, 보급하였다. 동명사 때에는 《조선어사전》편찬을 기도하였으며, 이는 계명구락부 때로 이어졌다.이때 한글연구가의 한 사람인 박승빈과 제휴하여 사전편찬사업을 구체화시켜나갔다. 또한, 《삼국유사》의 주석정리 해제를 하고 《금오신화》의 보급판도 간행하였다.③ 국토 산하 순례예찬과 그 현양 노력은 《심춘순례 尋春巡禮》·《백두산근참기 白頭山覲參記》·《송막연운록 松漠燕雲錄》 등으로 대표된다. 이 글들을 통하여 한반도 전역뿐만 아니라 만주와 몽고에 이르기까지 여러 명소·고적들을 더듬고 거기서 우리 민족의 옛날을 되새겼다.④ 시조부흥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족문학운동은 시조의 창작활동과 그 이론을 다진 일들로 대표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민족적 시가양식으로서 시조가 재정리, 창작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카프의 계급지상주의에 맞서 다수 작품을 제작, 발표하였다.이의 집대성이 창작시조집 《백팔번뇌 百八煩惱》이다. 또한,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시조 태반으로서의 조선민성(朝鮮民性)과 민속〉등을 발표하여 시조부흥운동의 논리적 근거를 세웠다.⑤ 민속학에 대한 연구는 《동국세시기》 등 당시까지 사본으로 전해오던 것을 수집, 간행한 것을 비롯하여, 〈단군론 檀君論〉·〈신라 경문왕과 희랍의 미다스왕 등의 발표로 나타났으며 등은 민속학적으로 주목되는 논문이다.그는 단군을 건국의 시조인 개인이 아니라 원시사회의 신앙에 근거를 둔 종교적 제사장으로 이해하였으며, 그가 불함문화권으로 주장한 동북아시아계의 여러 민족의 공통된 신앙, 즉 샤머니즘을 배경으로 단군신화를 이해하려고 한 것은 우리 신화와 문화에 대한 최초의 민속학적 연구 시도로 인정되고 있다.이와 같이 다양한 활동으로 인하여 우리 민족문화운동사에 높은 봉위원으로 위원회 활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실무자로서 직접 편찬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1928∼1936년). 이밖에도 그는 총독부가 위촉하는 여러 가지 위원직을 수락, 일제당국에 협조하였는데 이 공로로 그는 중추원참의(주임관대우·1936년 6월∼1938년 3월)를 지냈다.육당의 대표적인 친일행적 중의 하나는 만주에서 있었다. 중추원참의를 물러난 직후인 1938년 4월 그는 만주행에 올랐다. 처음 맡은 직책은 만주의 친일지 『만몽일보(滿蒙日報)』의 고문 자리. 원래 이 자리는 진학문(秦學文)이 있던 자리였는데 진씨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그 자리를 물려받은 것이다.§. 건국대학 교수로 부임1년 뒤 그는 다시 만주국의 엘리트 양성기관인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로 부임하였다. 대우는 칙임(勅任)교수에 월급은 4∼5백 원으로 최상급이었다(『삼천리』 1938년 5월호).사학자로 육당과는 절친한 친구였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이 그의 집 대문 앞에 술을 부어놓고 “이제 우리 육당이 죽고야 말았다”며 대성통곡을 한 것은 그가 건국대학 교수로 부임한 것을 두고 한 것이었다. 육당은 이 대학 예과에서 만몽(滿蒙)문화사를 강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한편 건국대학 교수 재직 중 그는 1940년 10월에 조직된 동남지구 특별공작후원회본부의 고문직을 맡기도 했다. 이 단체는 일본 관동군의 반공·선무공작을 지원한 친일단체로 독립군과 항일빨치산을 상대로 한 귀순공작이 주 임무였다. 이 단체의 총무 박석윤은 육당과는 처남-매부 간으로 그는 나중에 만주국 외교부 조사처장,『매일신보』부사장 등을 지냈다.§. 학병권유- 일제말기의 친일행적그의 친일은 일제 말기까지 계속됐다. 4년 7개월간의 만주생활을 청산하고 1942년 11월 귀국한 그는 칩거하면서 집필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이듬해 말 그는 총독부 당국의 부탁으로 이광수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유학생들을 상대로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훗날 그는 자신의 학병권유가 마치 조국의 광복을 대비하여 ‘민족 기간"고 말하면서 "조선사편수위원, 중추원 참의, 만주 괴뢰국 건국대학 교수, 이것 저것 구중중한 옷을 연방 갈아입었으나 나는 언제나 시종일관하게 민족정신의 검토, 조국역사의 건설, 그것 밖으로 벗어난 일이 없다"고 단언했던 것이다.그러나 최남선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의 모든 행적이 애국애족의 본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는 단지 자신의 유약한 성격 때문에 지난날 일제의 강권에 못 이겨 친일행위를 했던 것처럼 또 한번 조국과 민족에 대해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범행을 숨기려 하였던 것일까.1919년에 3·1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유명한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공약3장(公約三章)의 글귀를 지어 일약 독립운동가로서 이름이 났다. 최남선의 나이 30세 때의 일이었고 이 사건으로 1921년 10월까지 2년 6개월 간이나 옥고를 치루었다.그러므로 이때까지의 최남선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감옥에서 풀려난 것이 가출옥(假出獄)이라는 약간 의심스러운 절차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그가 변절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출옥 후 그는 동명사(東明社)라는 출판사를 창립하고 『동명』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였다.그리고는 『동명』지(1호∼11호)에 「조선민시론(1923)」을 발표했으며, 1925년 불후의 논문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인 1928년 그는 돌연 조선총독부의 역사왜곡기관인 조선사편수회 편수위원직을 수락함으로써 변절자라는 지탄을 받기 시작하였다. 최남선을 민족의 양심으로 알고 있던 당시의 지식인들은 한결같이 개탄했다. 그러나 자열서에서 최남선 자신은 이것을 변절이라 하지 않고 방향전환에 지나지 않았다고 변명하면서 단지 그것은 '돈'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무슨 까닭에 이러한 방향전환을 하였는가. 이에 대해서는 일생의 목적으로 정한 학연(學硏)사업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그 봉록(奉祿)과 그로서 얻는 학구상의 편익을 필요로 하였다는 이외에 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다.그러면서 그는 것이다.
윤봉길에 대하여....1. 서 론개항 후의 근세는 일제에게 36년간의 간악한 통치를 강요당했고 일제의 통치는 위기 앞에서의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윤봉길 의사의 업적 역시 이 점에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바이고, 「조선인은 짓눌려야 정신을 차린다」라고 무책임하게 주장한 일제의 행동에 아무 설득력을 가질 수 없게 하였다.윤봉길 의사의 1932년 4월 29일 상해 공원의 폭탄 투척 의거에 대해서는 이것을 단순히 일본군의 대장을 폭사 시킨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윤봉길 의사의 독립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한국 민족 독립운동의 국제적인 상황을 먼저 고찰할 필요가 있다.첫째는 일제는 1931년에 이른바 만보산(萬寶山)사건을 조작한다. 이 사건은 만주 길림성 만보산에서 한국인들이 토지를 빌리어 논으로 개간하는 과정에서 수로 시설하려 한 것이 중국인들에게 피해를 주게되자 중국인들이 수로공장에 난입하여 공사를 중단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일제는 한? 중 양민족을 이간질하는데 악용하려고 획책하여 일본경찰을 동원하여 중국인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수로공사를 강행시키고, 한국내에는 한국인들이 중국인들이 습격을 받아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다는 허위 보도를 퍼뜨렸다. 국내 한국인들은 이 허위 보도에 격앙되어 인천, 평양 등지에서 약 100여명의 중국인들을 살해하였다. 이에 만주에서는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을 습격, 살해하기 시작 했다. 이 사건으로 한? 중 양민족의 유대관계는 무너지고 중국인들 사이에서 한국인들에 대한 증오와 적대행동이 만연되었다. 이러한 상태는 당시 한국민족의 국외 독립운동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만주지역에서 큰 타격을 받았다. 이제 중국에서의 한국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양국 민족의 연대감회복이 매우 긴급한 과제로 나타났다.둘째는 만주사변이다. 일제는 양 민족간의 분열에 성공하자 무력 침략을 자행하여 전 만주를 점령하고 그들의 지배하에 넣었다. 이는 만주에서의 한국독립운동에 불리한 여건을 조성침략의 교두보를 만들려고 억지구실을 만들어 상해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중국측에서는 제5군을 상해 방어에 투입하여 19로군에 협동케 했으나 일본군이 병력 10만에 비행기 100여 대를 투입해서 집중공격을 자행하여 1개월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해 버리고 만다.이를 계기로 임시정부는 일본군의 포위 안에 든 것이나 다름없이 고립되고 임시정부의 재정궁핍과 독립운동가들의 탈락으로 극단적인 상황에 다다른다. 1930년대의 한반도의 정세는 내외로 다사다난한 시기였다. 일제의 침략적인 정책은 중국의 심장부까지 노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며 상해의 임시정부 역시 자의반?타의반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때였다. 게다가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여 주던 중국 정부조차 임시정부를 소의시 하기에 이르렀으니 한국은 세계의 판도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러한 고립무원(孤立無援)의 극한점에서 방황할 무렵에 일어난 윤봉길의 쾌거는 여러 가지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어려운 사회상황을 타개하고 일대 반전을 기대2하면서 독립운동에 활력을 넣기 위해 윤봉길의사가 피의 의거를 일으킨 것이다.2. 본 론1) 조국에서의 윤봉길의 생애윤봉길은 1908년 5월 23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윤황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이고 본래의 이름은 우의(禹儀)라 불렀으며 봉길은 그의 별명이며 아호를 매헌(梅軒)이라 하였다. 그의 가문을 살펴보면 7대조가 사화를 피하여 당진으로 이주한 것이 인연이 되어 예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가 태어나서 3살 되던 해에 1910년 경술국치를 겪게 되고 1918년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윤봉길은 일제에 의해 동족의 수난을 목격하게 되고 자연스레 당시 세태를 파악하게 된다. 보통학교에 입학하고 다음해 1919년에 세상은 크게 달라지려 하였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독립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3?1운동이 일어났고 당시의 그가 보았던 충격은 훗날의 그의 역사적인 행적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는 하였고 당시의 높이 평가받았다. 21년에 그를 가르치던 선생은 성주록이었고 예문과 전고에 밝았고 이 사람은 윤봉길에게 사서삼경 등 중국의 고전을 가르쳤다. 19세 되던 해에 성주록 선생의 "오치숙"을 수료하였다. 그 후에도 그는 스스로 독학을 하며 국사와 신학문을 아울러 섭렵(涉獵)하였으며 「농민독본」이라는 교과서를 편찬하여 농민 교육과 계몽을 하는데 노력하였다. 이러한 농촌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29년 부흥원을 설립하여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하였고 월진회를 조직하여 야학을 열었으며 적극적으로 농민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그러던 중 일제의 감시는 월진회까지 뻗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윤봉길에게는 가장 큰 고민의 시기였다. 결국 그는 더 이상의 지체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고 월진회 사업을 동지들에게 맡기고서 1930년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굳은 신념의 편지를 남기고 3월 6일 망명길에 오른다.2) 만주와 상해에서의 항일 운동만주로 망명 도중 그는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45일 간의 옥고를 치르고 만주로 탈출하여 그곳의 김태식?한일전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같은 해 12월에 중국의 청도로 건너가 정착하여 31년 여름까지 한인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한편 독립운동 의 근거지를 모색하고 세탁소에서 일하며 모은 돈을 고향에 보내기도 한다. 그리하여 망명 이듬해 31년 8월에 이르러 그는 굳은 각오로 해외 독립운동의 총본기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무대를 옮긴다. 곧 동포 박진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일자리를 구하였지만 얼마 후에 홍구 채소장에서 채소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곳에서도 상해 영어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한편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무렵 31년 겨울 윤봉길은 임시정부의 김구를 찾아가게 되고 독립운동에 자신의 신념을 바칠 것을 호소한다. 이로써 노 혁명가와 20대의 열혈청년의 운명적인 만남 이루어진다. 곧 그들은 조국의 독립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하게 되고 윤봉길은 「나선언문과 함께 1932년 4월 26일에 한인애국단에 입단하게 되고 이 선서문에 의해 윤봉길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 원래의한인애국단은 특수한 조직을 가진 애국운동 단체는 아니었다. 우리 민족이 일제에 대하여 무력으로 의거를 할 때 그 행동을 임시정부가 직접 했다면 외국에 대한 일국의 대표하는 국가로서 위신이 서지 않기 때문에 이를 위해 조직된 일종의 별동대(別動隊)로서 이름만 가진 것이 바로 한인애국단이다. 의거에 참여하는 이는 반드시 이 한인애국단에 입단하고 사진까지 찍어 두어 일제로 하여금 이 애국단이 거사했다는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는 것은 행동을 앞둔 의사들이 조국에 대하여 마치 고별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갖는다.3) 역사적인 사건마침내 기다리던 그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그때 당시의 상해의 정세를 보자 1931년에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이듬해 1월에는 다시 일본군의 침공으로 상해 사변이 일어나는등 군국주의 일본의 대륙 침공으로 인한 일련의 사태와 함께 중국 사회의 대일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뿐만 아니라 만주는 우리 독립군의 전투 기지며 상해는 우리 임시정부 소재지였던 만큼 일제의 대륙 침략은 우리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 한인애국단 이봉창이 일본 동경에서 독살하려다 실패하자 상해 일대의 독립운동 단체는 더욱 복잡한 정세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때에 일본은 상해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고 일황의 생일인 천장절을 축하하기 위해 4월 29일에 홍구공원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한다. 당시 일본인이 발행하던 상해 일일신문의 「천장절 축하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점심(벤또)과 물통한개, 그리고 일장기를 휴대하라」라는 기사는 윤봉길의 작전을 더욱 구체화시켜 준다. 그는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거사할 지역을 면밀히 사전 답사한 뒤 폭탄의 폭발 시험을 거치고 다음날의 거사를 기다린다. 4월 29일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이날 아침 김구와 그는 최후의 조찬이 될 식탁에 마주앉았다. 이때 "윤봉길의리 근세사의 통쾌한 한 페이지를 장식한 거사일의 홍구공원 하늘에는 궂은 비가 촉촉히 내리고 있었다. 곧 식이 시작되고 식장 전면 중앙에는 일본의 상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를 위시한 고급 지휘관과 외교 관계 요인들이 거만스럽게 자리잡고 있었다. 식장에 참여한 윤봉길은 왕웅이 만들어 준 폭탄(벤또)을 소지하고 일본인들 사이에 끼어 유유히 공원안의 경축대 근처까지 접근하였다. 그때에 일본 군악대의 연주로 일본의 국가를 불렀고, 이것이 끝나면 총사령관의 선창으로 저들이 신이나서 부를 「천황폐하 만세, 대일본제국 만세」를 외칠 참이었다. 이 순간 앞으로 나간 윤봉길의 손에 높이 들린 폭탄이 경축대 위고 날아 떨어졌다. 폭음과 함께 경축대 위에 모여 섰던 적 수뇌자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윤봉길은 그들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하고「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회심의 미소를 띤채 일본군에게 즉각 연행되어졌다. 그는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해 11월 18일 일본으로 호송되어 오사카 형무소에서 수감된 뒤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이로써 윤봉길은 25세의 짧은 생애를 민족의 제단 위에 바쳤다. 8?15해방이 있은 다음해인 1946년 6월 30일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서울로 봉환되어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그후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4) 윤봉길 의사 체포사진 조작설최근 윤봉길 의사의 체포사진이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중국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강효백 경희대(국제법무대학원) 교수는 17일 "1932년 4월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 당시 해외 신문의 관련 기사를 살펴본 결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체포 모습과는 전혀 달랐던 것을 알게 됐다"며 "일본군에 의해 심하게 구타를 당해 망신창이가 됐음에도 의연했던 윤봉길 의사의 모습이 조선인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해 다른 사람을 체포하는 사진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에 밝혔다.조작설을 제시한 강효백 교수는 이런 의 사진과는 전혀 다른 정황을 기록하고 있는 당시 해외 신문의 관련 기있다.
제천 의병장 유인석진실로 위급존망의 때입니다. 각자 거적자리를 깔고 방패를 베게 삼아 물불을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위태한 곳이라도 뛰어들어 기어코 망해가는나라와 천하의 도의 을 다시 일으켜 하늘의 태양이 다시 밝도록 하여야 합니다.이렇게 하면 한나라만이 아니라 천하 만세에 전할 수 있는 공이요, 업적이 될 것 입니다.- 선생의 의병 격문[격고팔도열읍] 중에서..한말 민족수난기에 항일 구국항쟁의 대열에 섰던 선열로서 그 항쟁이 장하지 않은 이가 없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유인석 선생은 한민족의 사표가 될 만큼 철저한 항일의식을 가지고 이를 실행한 인물로 말할 수 있다.유인석 선생은 1842년 1월 27일 강원도 춘성군 남면 가정리에서 아버지 유중곤과 어머니 고령 신씨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14살이 되던 해 족숙 유중선의 양자로 들어간 선생은 이후 양가의 문벌을 배경으로 성장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위정척사사상의 원류인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유인석 선생의 항일 항쟁을 고찰하기 전에 위정척사사상의 대두와 이항로에 대하여 잠깐 언급해보고자 한다. 위정척사사상이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행동화된 것은 1860년 서양선박의 통상요구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척사세력들은 상소를 통해 ‘양물금단론’ ‘양화배척론’을 주장하며 통상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자 이항로, 기정진 등은 양적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주전척화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이념적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시기 척사이론을 대표하는 화서 이항로는 기호학파이며 주리론적 성향을 보였다. 그는 또한 서양 및 기독교세력을 이적의 하나에서 더 나아가 금수로 규정하여 화이의 차별보다 강화된 인수지별의 논리로 국제관계를 인식하였다.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복고적이며 군사력과 경제력 발전 등 부국강병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1891년과 1893년에 김평묵과 유중교가 죽자, 유인석은 이항로-김평묵-유중교로 이어지는 화서학파의 정통도맥을 승계하게 됨으로써 학파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이제, 유인석 선생의 의병항쟁의 자취를 알아보고 이후 서간도에서 작고 할 때까지의 일대기를 살펴보겠다.청일 전쟁을 통하여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한 일제는 을미사변을 일으켜 중전 민씨를 살해하였다. 그들은 여론의 반발을 의식하여 사건의 진상을 얼버무려 넘어가고자 이른바 ‘내장개혁’을 친일 내각에 강요하였다. 그 주요한 내용은 관제를 개혁하고, 군현제도를 개편하며, 양력을 사용하도록 명하였다. 이 당시 오랜 전통 속에서의 조선민들에게 이와 같은 조치는 기존의 생활과 역사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머리카락 한 올 까지 부모가 주신 것으로 여겨 소중히 하였는데, 을미년(1895년) 음력 11월에 강행된 단발령은 지배계급뿐 아니라 피지배계층까지 전 조선인의 분노를 자아내고 의병항쟁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이때 제천에서는 유인석을 중심으로 척사의 정신을 천명하고 있었는데, 단발이 강행되자 상소에 그치지 않고 현실적인 방법 대처방안을 모색하여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는 것, 국외에 망명하여 도맥을 계승하는 것, 조용히 자결하는 것 등의 방안을 제시하였다.선생의 의병항쟁은 제 2차 의제개혁 직후 ‘변고’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1895년 윤 5월 2?3일 양간에 원근의 문인사우 수백 명을 모아놓고 장담에서 대규모의 강습례와 향음례를 거행하면서 시작되었다. 선생의 호좌의병진은 먼저 문인들의 거의에서 유래한다. 처음 호좌의병진은 이순신 장군의 후예인 이필희를 의병대장으로 삼고, 서상렬을 군사로 임명하여 전열을 가다듬어 단양에서 공주 병참 소속의 관군과 일본군 혼성부대와 첫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으나 계속되는 혼성부대의 집요한 공격으로 퇴각하게 된다. 이에 유인석 선생은 의병대장에 취임하여 격고팔도열읍이라는 격문을 발표하였다.의병대장에 취임한 선생은 제천으로 회국해 곧바로 충주성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 당시 충주는 관찰부가 있는 곳으로, 관군이 400명, 일본군이 수백 명 지방군이 수백 명이 집결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때문에 이곳을 점령하게 된다면 호서를 장악함은 물론 뒤로 영남과 호남을 배경으로 서울로 북상할 기틀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선생의 의병진은 1896년 2월 16일 의외로 쉽게 충주성을 장악할 수 있었다. 승지 우기정과 이호승이 각각 3천 명, 5백 명의 병력을 원조해와 군사 수는 일본군과 관군 측에 비해 우세하였다. 하지만 실제 총을 가진 자는 4백여 명에 불과하여 신식 병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 비해 의병진이 전력 면에서는 절대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각오한 의병들이 일시에 함성을 지르며 기습공격을 감행하자, 그 기세에 눌린 관군과 일본군은 항전을 포기하고 탈주하기에 바빴던 것이다.충주성에 입성한 선생은 먼저 친일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하는 한편, [격고내외백관]을 발표하여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또한 의병진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서상렬, 원용정 홍선표 등을 영남으로, 이범직을 호서로 각각 소모사로 파견하여 각 지의 민병을 모으게 하였다. 그리하여 서상렬은 안동, 예천, 봉화, 순흥, 풍기, 영천 등지의 의병진과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상주 태봉)의 일본군 병참 기지를 공격하였고, 이범직은 삭발을 심하게 강요하여 백성의 원성을 크게 산 천안군수 김병숙을 처단하였다.한편, 충주성을 빼앗긴 관군과 일본군은 성의 외곽을 포위, 의병진의 보급로를 차단시킨 채 공성작전을 펼쳤다. 그 뒤 의병진은 계속되는 접전으로 전력이 소모된 데다가 보급로를 차단당해 물자조달에 어려움이 커 더 이상 충주성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이에 선생의 의병진은 3월 4일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환군하고 말았다.선생이 충주·제천 등지를 전전하면서 의병항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 중앙의 정국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을미사변 이래로 친일내각에 포위되어 불안과 공포 속에서 전전긍긍하던 고종 황제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중앙군이 지방으로 출동한 틈을 타,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김홍집의 친일내각은 무너지고, 이범진, 이완용, 윤치호 등을 중심으로 친러내각이 조직되었다. 새 내각은 그 동안, 어수선해진 민심을 수습하고자, 단발령을 철회하는 한편, 각 지방으로 선유위원을 파견해 의병을 해산시켰다. 중앙에서 파견된 선유사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은 남한산성 의병진을 격파한 뒤, 그 여세를 몰아 선생의 호좌의병진에 압박을 가해 왔다. 단발령이 철회되고, 을미사변의 원흉격인 김홍집 이하 친일파들이 축출된 지금에는 거의 명분이 없어졌으므로,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정부가 망국개화정책을 중단하지 않는 한, 특히 일제 침략세력이 완전히 구축되지 않는 한 의병항전을 계속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장기렴의 관군은 마침내, 5월 26일 선생의 의병진에 대해 대규모 공세를 가했다. 의병들은 용전분투하였으나, 전력 열세로 결국 제천성을 내어주고 말았다. 이 날의 전투에서 중군장 안승우와 그의 제자인 홍사구가 전사해 의병진의 사기는 더욱 저하되었다. 선생의 의병진은 제천전투에서 실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고, 그로 말미암아 공세를 취하던 입장에서 이후로는 줄 곧 수세로 몰리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최후의 거점이던 제천성마저 상실한 선생의 의병진은 일단 단양에 모여 전열을 수습하였다. 그 동안의 항전에서 인력과 전력이 크게 소모되었기 때문에 지속적인 항쟁을 펼쳐 나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선생은 서북행을 결심하였다. 선생은 청의 군사적 원조를 기대하고, 이것이 여의치 못하면 일제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재기 항쟁을 준비할 생각으로 서간도 망명을 떠났다. 그리하여 선생은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을 계속하여 영변, 운산을 거쳐 8월 23일 압록강변의 초산에 도착하였다. 선생은 여기서 재차 친일·개화파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재격백관문]을 발표한 뒤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회인현 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 지방관 서본우는 의병들이 무기를 소지하고 입국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하여 무장해제를 요구 하였다. 이에 선생은 선생을 따라온 219명의 의병을 해산시키고 만다. 서간도에서 선생은 단기적인 의병활동을 하기 보다는 장기적으로 의병전쟁의 성격을 띠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무렵 선생의 문인사우들도 대거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원한을 품고 고통을 참으며 때가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라며 항일 투쟁의 의지를 함께 다져갔다.이곳에서 ‘효제’와 ‘충순’을 덕목으로 하는 향약을 실시하여 한인들의 교화에 힘쓰는 한편 공자, 주자, 우암, 화서, 중암, 성재 등의 성묘를 세워 이역에서의 정신적 귀의처로 삼았다.1900년 7월 의화단의 난을 계기로 서간도 지역이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하게 되자 선생은 더 이상 그곳에서 머무를 수 없어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많은 제자를 기르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또 향음례와 강습례를 수시로 열어 존화양이에 입각한 항일 투쟁의식을 고취시켰다. 그 후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뒤이은 [정미7조약]을 계기로, 선생은 연해주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세 번째 국외 망명이자 그이후로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