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유홍준 선생이 우리나라의 방방곡곡 유명한 산, 사찰, 문화재와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나름대로의 견해를 붙여가며 소개한 책이다. 책 표지 뒷면을 보면 이 책에 대한 평론이 나온다. 시인 고은 선생은 '유홍준이 성큼성큼 가는 곳마다, 눈빛이 닿자마자 사물은 문화의 총체로 활짝 꽃피운다.'라고 했다. 사실이 그렇다. 어느 한 가지를 보아도 예사로이 지나가지 않고 전설과 유래를 캐내어 가며 답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책은‘전 국토가 박물관이다’라는 주제 아래 ‘국토박물관의 길눈이’임을 자신 있게 말하면서 사회나 역사책에서 배우지 못했던 많은 곳 - 우리 국토의 참모습과 참된 가치를 속속들이 느끼도록 안내한다. 아는 만큼 느낀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이만큼, 아니 이 사람의 반만큼이라도 알고서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 불국사나 여러 사찰 등의 여행을 갔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좋았을 걸이라는 아쉬움이 들었다.나는 이제까지 문화유산하면 곧 불국사나 석굴암, 남대문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월출산, 도갑사, 월남사지, 무위사, 다산초당, 백련사, 칠량면의 옹기마을, 사당리의 고려청자 가마터,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 고산 윤선도의 녹우당 그리고 달마 산 마황사와 땅 끝에 이르는 답사 길은 문화유산의 답사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비로소 알게 만들었다. 답사란 내력 있는 곳을 찾아가는 일이라고 한다. 찾아가서 인간이 살았던 삶의 흔적을 더듬으며 그 옛날의 영광과 상처를 되새기고 나아가서 오늘의 나를 되물으면서 이웃을 생각하고 그 땅에 대한 사랑과 미움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답사를 올바로 가치 있게 하려면 그 땅의 성격 즉 자연지리를 알아야 하고, 그 땅의 역사 즉 역사지리를 알아야 하고,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내용 즉 인문지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이 책에서 소개한 여러 지역 중에서 그래도 가장 친숙하게 다가 선 곳이 바로 경주이다. 경주는 그야말로 그 누구나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다녀왔기에 비록 나만의 경우는 아닐 것이다. 경주를 제대로 보려면 한 달은 걸린다는데 우리가 수학여행 가게 되는 경주의 여행은 고작 1박 2일 동안 버스타고 그냥 지나가게 되는 것이 다였던 것 같다. 또한 이에 따라서 찾아오게 되는 것이 실망감인 것 같다. 왜 저리 초라할까? 특히 첨성대에 대한 실망감은 컸었다. 이 책도 그것을 지적하고 있다, 크기로만 보면 실망이지만 땅을 상징하는 첨성대의 기단, 하늘을 뜻하는 원형의 몸체, 한 달·24절기·일 년 365일을 나타내는 기단과 돌들은 범상한 것이 아닌 과학적이며 미적으로도 최상의 것임을 말하고 있다. 알고 나니까 비로소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나의 무지함에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 집이 불교 집안이고 그 때문에 어려서부터 절에 다녀서인지 절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를 끌었다. 대웅전에 들어가서 보이는 탱화와 향냄새, 구석에 있는 종정도가 내가 알던 절이었는데 그것들이 나름대로 다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특히 탱화 속의 부처님과 나한님들의 배열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단으로 배열되어 부처님의 권위를 세워주고 있는 탱화는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 때 지어진 절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그런 탱화들이 더 색깔도 화려하고 금빛도 많이 났던 것 같다. 반면에 부처님과 다른 나한님들이 둥글게 서있는 탱화는 불교의 권위가 많이 약해진 조선 시대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자랑스러운 3대 절을 꼽으라면 영주 부석사, 청도 운문사, 서산 개심사라고 한다. 태백산 전체를 끌어안았다는 부석사, 소백산맥의 정기를 그대로 이어받은 운문사는 이 책에서는 안 나온다. 개심사의 향기 짙은 모습이 잘 묘사돼 있다. 벚꽃이 볼 만 하다는데 이 봄에 가 봤으면 한다. 그러나 절주지 스님 말이 걸린다. ‘어디 가서 좋다고 떠들지 말아요. 사람들이 몰려들면 개심사도 끝이에요. 사람 때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요?”이러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관광이나 답사 시에 얼마나 사람들이 문화유산을 회손 시키는지 느낄 수 있었고, 무엇을 보더라도 비판 정신을 가지고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신라문화의 품격을 알려면 진평왕릉, 장항리 절터, 에밀레 종소리라고 한다.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라고만 알던 나에게는 너무 뜻밖이었다. 오늘날 전해지는 대부분의 신라 문화유산이 진평왕과 그 딸인 선덕여왕 때의 것이라고 한다. 이 때의 유물들은 화려하다기보다는 수수하고 아담하며 조용하다. 경주 남산을 거쳐 문무대왕의 수중왕릉, 감은사탑으로 답사가 이어지는데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수중왕릉은 가 본 기억이 있다. 이 책 표지 사진인 감은사탑 또한 수학여행 때 보았는데 그때는 아무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이 탑이 문무왕의 효심에서 만들어진 것 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다시금 감탄하게 되었다.
‘공자의 식탁’을 읽고.......중국인들은 언제부터 상어지느러미를 먹기 시작했을까? 진 시황제는 국수를 먹어본 적이 있을까? 피단은 어느 시대에 식탁에 올랐을까? 공자는 무엇을 먹었을까? 라는 생각을 이책을 읽기 전까지는 해본적도 해볼 생각도 안해봤다. ‘공자의 식탁’이라고 해서 그져 공자를 중심으로 그시대의 식생활을 소개한 책으로만 알았는데, 차츰 책을 읽어가면서 들은 생각은 한시대의 식생활과 음식들이 그 시대의 문화를 얼마나 많이 변모시키는 가라는 생각이었다.도대체 ‘전통요리’란 무엇인가. 이것은 커다란 문제다. 전통은 역사의 길이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전통이란 말의 사용은 삼가야 할지도 모든다. 중화요리하면 ‘4,000년의 역사’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 다닌다. 그런데 과연 4,000년 전의 중국인은 지금의 ‘중화요리’를 먹었을까? 중국의 고전을 읽어보아도 고대 중국인은 지금의 중화요리를 먹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중화요리의 정식 역시 전혀 서술되어 있지 않다. 송대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요리에 대한 기록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되게 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 음식문화의 역사는 길다. 그러나 문화란 늘 변화무쌍하게 모습을 바꾼다. 요리도 마찮가지다. 많은 민족이 공생하면서 서로 다른 문화가 격력하게 교차, 충돌해온 중국에서는 변화가 더욱 심했다. 잦은 왕조의 교체와 함께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했다. 왕조가 바뀌는 변화가 생길 때마다 이민족과 한족 사이에 서로다른 문화의 흡수와 확산이 반복되었다. 그속에서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바뀌고, 당연히 요리와 식습관도 달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중국 음식문화의 변화를 이책에서는 각 시대별로 사건을 하나씩 전개하면서 소개하고있다.공자의식탁 - 춘추전국시대공자가 살았던 이시대의 주식은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콩이었고, 비교적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조, 직과 기장이었다. 공자가 살고있던 노나라의 지리와 기후조건, 농경기술로는 쌀의 대량재배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벼를 재배할 수 없는 곳에서 쌀이 주식이 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이시기에는 현대적인 의미의 주식은 아직 없었다고 할 수 있다.이당시 요리를 보면 육류는 대부분 돼지고기를 자주 먹었고, 어류는 6종을, 채소류는 적어도 20종을 먹은 것으로 나와있다. 돼지고기는 대부분 삶거나 국을 끓여서 먹었고, 생선은 굽기를 이용, 채소는 국이 아니면 데치거나 절여서 먹은 것으로 나와있다. 그리고 식습관은 제사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음식물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일일이 각부분을 잘라서 조리하는 일본과는 다르게 중국에서는 통째로 찌고 통째로 굽는 조리법을 사용하다보니 자연히 음식물의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고, 음식물을 다 먹음으로써 동물의 장기까지 먹는 문화가 발생되게 되었다. 또한, 이당시에는 밥은 손으로 먹고 젓가락은 요리나 국 건더기를 먹을 때만 사용한 것으로 나와 있다.국수의 연륜 - 한대한대에 들어오면서 춘추전국시대와 확 달라진 음식문화의 하나로 북방지역에서는 조가 주식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조는 생육시기가 짧아 이른 것은 석 달이면 거둘 수 있고 반 년이나 걸리는 벼에 비해 재배주기가 훨씬 짧다. 게다가 기후에 대한 적응성도 뛰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이유로 주식으로 선택되었다. 이와 다르게 남방의 양쯔강 유역에서는 벼가 재배 됨으로써 쌀이 주식으로 사용되었다.또다른 음식문화 변화의 하나로 분식의 등장을 들 수 있다. 중국어로 밀가루를 뜻하는 ‘몐’이란 글자와 밀가루를 반죽해 만든 음식물을 가리키는 ‘빙’이라는 글자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한나라 시대의 문헌에 이르러서다. 지금 중국에서 빙이란 밀가루를 반죽해 구워서 만든 납작한 빵을 뜻한다. 그런데 한나라 때는 그렇지 않았다. 밀가루로 만든 음식물을 모두 빙이라 했다. 그러므로 난과 같은 빵 종류뿐 아니라 국수나 수제비 같은 것도 빙으로 표현했다. 이와같은 밀음식의 시작은 장건이 서역을 통하여 밀을 들여옴으로써 가능해 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건이 밀을 들여온 직후부터 이러한 분식이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밀을 들여온지 50년 후에서야 분식이 활성화 되었다. 후한 중기이후가 되면, 밀가루로 만든 음식이 한층 급속히 퍼져나가 민간에서도 일상적으로 먹을 수 있게 되었다.마지막으로 음식문화의 큰변화로 뽑을 수 있는 것이 외식업이 시작된 것이다. 진, 한 나라시대에 중국 문명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특히 한대에는 수리, 관개 기술이 향상하고, 제철업이 한층 발전했다. 그결과 농업생산과 일상생활에 철기가 많이 사용되게 되었다. 상업과 수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고용인원이 늘어나는 한편으로, 도시가 커지면서 집과 일터사이가 멀어졌다. 직업의 세분화는 외식업의 탄생과 발달을 자극했다. 본래 외식업은 여행객을 손님으로 하는 장사였지만, 점차 정주자들이 향락과 사교를 위해 이용하게 되었다. 어쨌든, 일하는 사람들이 외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거대한 사건으로 이것은 곧 새로운 음식문화로서의 외식업의 보급과 거대화를 뜻하는 것이다.식탁의 빅뱅 - 위진, 육조시대이시대에는 사람들이 효모를 만듬으로써 3세기에 발효기술이 발생하게 된다. 발효를 이용하여 음식을 만듬으로써 차츰 분식이 주식으로 변모하게 된다. 발효기술이 발전하면서 자연히 여러종류의 빙류가 발생되고 결국에는 분식이 주식화 됨으로써 제사에 까지 빙류가 오르게 된다. 하지만 이시대에 더 주목해야 할일은 여러 가지 유목민적의 음식들이 중국으로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다른 문화의 음식들이 하나씩 하나씩 중국으로 흡수되기 시작한다. 유목민족의 양고기 찜구이인 ‘후파오러우’, 오랑캐의 국 ‘후겅’, 사치의 상징이었던 사슴머리 오랑캐국 ‘창주’, 오랑캐의 밥 ‘후판’, 맥족에게서 전해진 소나 양의 통구이 ‘모즈’등이 그 예이다.개고기 먹어야 하나, 먹지 말아야 하나 - 수, 당시대이시대의 음식문화의 이변으로 신석기 시대부터 가축으로 키우고 먹어왔던, 춘추전국 시대때는 종묘에까지 바쳤던 개고기가 이상하게도 음식문화에서 거의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다. 유목민들이 중국대륙을 통치하던 이시대에 개고기 문화가 사라졌다는 사실. 어떻게보면 이상하지만, 이들 민족이 유목민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유목민들에게 개는 생산의 도구이자 친구였다. 이에따라 개를 잡아 먹는 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야만적인 해위였을 것이다. 그점은 제사에 올리는 고양물에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돌궐족 사람들은 하늘에 제를 올릴 때 양과 말을 희생으로 바친적은 있지만 개를 공양물로 쓰지는 않았다. 돌궐에 옛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늑대의 자손이고, 실제로 그들은 늑대를 토템으로 삼고 있었다. 그들이 늑대와 친척관계에 있는 개를 먹었을 리 없다. 이렇게 음식문화에서 점점 사라져가던 개고기 문화는 어느 요리책에서도 찾아 보기 힘들만큼 쇠퇴해가고 심지어는 거지들이나 먹는 비천한 음식으로 낙인 찍히기까지 한다.육조시대에는 이러한 개들을 점차 사람들이 귀여워하고 아끼게 되었고, 이에따라 좋은 개들을 구하는 풍조가 발생되고, 결국 개 한 마리가 비단 몇 천 필에 호가하는 상화이 발생하게 된다. 심지어는 후한이 붕괴된 뒤에 중원의 북방을 통일한 선비족에서는 ‘페르시아 개’에게 최고의 작위를 내리는 일까지 발생할 정도로 개를 아끼는 풍조가 발생하게 된다.이시대 또하나의 음식문화의 변화로써 지금까지 중구에서 사용하고 있는 여러 가지 서역의 음식물과 향신료들을 들 수 있다. 서역에서 들여온 ‘후추’, 페르시아 특산물로 기록된 ‘필발’, 호국의 10쪽이 하나인 ‘마늘’, 페르시아에서 들여온 ‘호두’등이 그예이다.양고기 대 돼지고기 - 송대현대 중국에서는 가장 값비싼 고기가 소고기와 닭고기고, 그 다음이 돼지고기, 양고기의 순서로 되어있다. 그런데 그옛날에는 어땠을까? 송나라 시대의 요릿집에는 돼지고기가 없었다. 현대에는 가격이 저렴하고 영양이 풍부하다고 해서 많이 먹고있는 돼지고기가 이때의 음식점에는 없었던 것이다. 소는 농경에 없어서는 안 되는 생산도구로 일찍부터 식용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식탁에 오르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돼지고기는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혹시 가격이 비싸서? 다음의 사료를 보면 송나라 시대의 돼지고기는 값이 아주 쌌고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황주의 좋은 돼지고기 값이 똥값이네부자들은 먹으려 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은 삶을 줄을 모르네물을 조금 넣고 약한 불에 오래 두면 저절로 맛이 나거늘매일 아침 일어나 한 그릇 먹으면 나는 배부르니 그대는 상관 말게나.돼지고기를 예찬하는 소동파의 시중에서..위의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돼지고기는 가격이 비싸다든지 아니면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송나라 시대의 음식점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단지 고양이 먹이로 돼지고기 순대를 팔았고, 이러한 이유로 비천한 음식물로 낙인찍히게 됨으로써 소비가 안되고, 반대로 양고기는 가장 고급스러운 음식으로 인식되면서 많은 소비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양고기의 인식이 고급스러운 음식으로 인식되게 된 이유는 따로있다. 916년 중구의 북부에서 거란국이 수립되어 약 30년 후인 947년에는 국호를 요로 개칭했다. 그래헤 요나라 군대가 카이펑에 입성했다. 요는 카이펑을 오랬동안 점령하지는 않았지만,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원은 그후로 늘 거란족의 위협아래 놓여 있었다. 거란족 사람들은 승자로서 끊임없이 남쪽으로 진출하면서 자신들의 풍속과 습관을 중원으로 들여왔다. 이 거란족이 즐겨먹던 음식이 바로 양고기 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자연히 중원주변의 양고기와 돼지고기의 지위를 결정하는데 거란족의 식습관이 주된 이유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