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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 인도의 분단
    인도의 분단1947년 8월 15일은 인도가 독립되었다. 그날 자정, 3세기에 걸친 투쟁이 영국으로부터의 인도 독립이라는 결말을 가져왔던 것이다. 자유인도의 깃발이 히말라야 산맥에서 코모린곶에 이르는 방방곡곡에서 자랑스럽게 휘날렸고 불꽃이 밤하늘을 밝혔으며 행진과 군중집회가 수많은 대소도시 광장을 메웠고, 어디에서나 애국심에 불타는 연설을 들을 수 있었다. 수도 뉴델리에서는 인도의 초대 수상 자와할랄 네루와 영국의 마지막 인도총독 루이스 마운트배튼경이 함께 승용차를 타고 환호하는 군중 속을 지나갔다.그러나 77세의 모란다스 K. 간디는 보다 음울한 사명을 수행하고자 뉴델리를 떠나 있었다. 그는 힌두교도들과 회교도들이 상호 도륙하는 사태를 중지시키려고 캘커타에 가 있었던 것이다. 자유통일인도라는 그의 평생의 꿈은 소름끼치는 악몽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가공한 살육이 자행되는 가운데 그의 사랑하는 조국 인도가 두 개의 적대국(회교국 파키스탄과 비종교적인 인도)으로 분열되었던 것이다. 일부 서방인들에게는, 이 두 집단의 주요한 차이점은 대충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즉 힌두교도들은 소를 경배하고, 회교도들은 소를 먹는다고, 그러나 인도인들에게는 그 차이점들은 많고 복잡하며, 흔히 화해 불가능한 것들이다.회교도들이 이슬람 신앙은 정복들에 의해 인도로 들어왔다. 8세기에 시작하여 페르시아, 터키,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열광적 회교도 침략자들이 잇달아 히말라야의 험준한 고개를 넘어 쏟아져 들어야 힌두왕국들과 신전들을 황폐케 했다. 그 폐허 위해 그들은 강대한 모굴제국을 건설했는데 이 제국은 17세기까지 인도를 지배하여, 종교적 반목의 씨앗을 뿌리게 되었던 것이다.회교와 힌두교는 지금도 열렬하게 신봉되고 있으며 이들에게는 상호 양립할 수 없는 현상들이 많다. 회교도들은 유일신 알라를 믿고, 힌두교도들은 많은 신을 인정하고 있다. 회교도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지만 소고기는 먹는다. 힌두교도들은 소를 숭배한다. 회교도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바로 그와 같은 시간에 힌두교도들이 회교종교 의식에는 금지되어 있는 풍악을 울리며 이따금 회교사원 옆을 지나간다.언어, 역사, 인종(인도의 대다수 회교도들은 모굴제국시대에 강제로 개종한 힌두족의 후손들이다)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힌두교도와 회교도들이 섞여 지내는 경우란 드물다. 17세기에 영국이 인도 대륙의 지배세력으로 모굴왕조를 대체하기 시작했을 때, 적대 관계는 한층 더 복잡해졌다. 두 집단들은 다같이 서양인들을 혐오했으나, 자신들을 찬란한 모굴왕조의 축출된 후계자들로 생각하는 회교도들은 새로운 사태에 적응하기가 더욱 어려웠다.더욱이 산업시대가 시작되면서, 그들의 전통은 그들을 한층 더 뒤지게 했다. 그들의 성서인 코란은 현세적 교육보다는 종교적인 교육을 강조했으며, 그 교리들은 새로운 상업관행들과 갈등을 빚었다. 그 결과로 서양에서 훈련받은 수많은 힌두교도들이 권력과 부의 자리에 올라, 가난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회교도들의 울분을 더욱 부채질하게 되었다.19세기말에 인도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전 인구의 4분의 1에 불과하던 회교도들에게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들은 영국 통치를 증오했으나, 대부분의 힌두교도들로 구성된 인도국민회의가 지배하는 자유인도에서는 그들의 운명이 한층 불리해지지 않을까 두려워했다.1906년에 설립된 전인도 회교연맹에서 단기적인 해결책을 찾아냈다. 국민회의와 대립한 이 정치조직은 회교도의 권리를 보전할 분리된 선거구를 쟁취하자고 선동했으며, 인도 국민회의와 영국정부는 비교적 온건한 일부 요구를 받아들였다. 독립의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자, 회교연맹 내부의 어떤 환상가들은 회교 자치국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 자치국의 명칭은 파키스탄이 마법이 소리처럼 울리기 시작했다.이 환상가 중의 하나인 모하메드 알리 지나의 초지일관된 열의가 아니었다면 파키스탄은 단지 하나의 황금빛 꿈으로만 남아 있었을 것이다. 런던에서 교육을 받은 이 변호사는 멋쟁이 실용주의자에서 출발하여 정치적인 온건파로 변신했고, 다시 행동주의자가 되었으며 마지막에는 혁명적인 지도자로 변신했다. 거의 혼자 힘으로 그는 파키스탄을 실현시켰다.지나는 국민의회당 소속 민족주의자로 정계에 투신하여 힌두-회교도의 단결의 강조하였고, 회교연맹이 인도의 자치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기로 국민회의와 합의했던 1913년까지는 회교연맹을 배격했었다. 그러나 간디가 1920년에 국민회의의 지도자가 된 뒤에 지나는 계속 힌두-회교도의 단결을 옹호하면서도 국민회의에서 탈퇴했다.지나는 간디를 싫어했고, 그의 경건한 힌두교 신앙을 불신했다. 또한 그는 간디가 제의한 도매금식 민주화가 회교도들의 권리를 희생시키고 힌두지배를 초래하리라는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1930년에 간디의 비폭력 저항 전술과 회교연맹 내부의 반목에 환멸을 느낀 그는 스스로 망명의 길에 올라 런던으로 갔다. 5년 뒤 지나는 귀국하여 회교연맹의 지도권을 다시 장악했고, 그의 강렬할 목적의식이 돌연 인도의 회교도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었다. 이슬람은 위기에 처했다! 는 것이 회교도들의 결속을 다지는 구호였다. 연맹은 갑자기 활기를 띠고 수천개의 마을단위 세포들을 조직했으며, 현실과 상상을 뒤섞은 힌두교도들의 잔학성을 무시무시하게 기록하여 유포시켰고, 국민회의 정부가 설립된 뒤에 회교도에 대한 일대탄압이 있으리라는 풍문을 퍼뜨렸다.1937년 국민회의는 회교연맹과 연립조직을 구성하라는 영국의 제의를 거부함으로써 지나의 비난을 확인해 준 격이 되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이 결정은 힌두-회교도의 대립을 격화시켰다. 그때 국민회의 의장이었던 네루가 인도의 약 9000만으로 추정되는 회교도들의 정치적 의의를 부정하는 듯한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그와 같은 효과를 가중시켰다. 오늘날 인도에는 오직 두 세력이 있을 따름이다. 영국 제국주의와 국민회의가 대표하는 인도 민족주의다 하고 네루는 말했던 것이다. 회교도들의 주장을 의도적으로 묵살한 것으로 해석된 이 성명은 힌두-회교도 단합의 전망에 파멸적인 영향을 미쳤다. 지나는 이것이 국민회의의 집권과 함께 닥칠 힌두교도들의 배반과 종교의 공민권 박탈의 확고한 증거라고 재빨리 반박했다. 이 문제는 지나의 분리 독립국 운동을 가속화하는 핵심적 요소로 등장했다.여기에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한 사건이 지나의 위치를 더욱 강화시켰다. 1942년에 국민회의는 영국이 즉각 인도에서 철수하라는 결의문의 통과시켰고, 런던당국이 거부하자 전국적인 시민저항운동을 개시했다. 영국은 전시난동죄를 적용하여 그 저항을 억압하고 국민회의의 모든 지도자들을 투옥했다. 그 뒤 3년 동안 지나에게는 적수가 없었다. 그는 그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 회교도가 거주하는 각주의 권력을 장악하고 회교국 창건 주장을 한층 강화했다.1940년대 중반에 이르자 클라이맥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수십년에 걸친 인도인들의 완강한 저항에 지치고 제 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쇠약해진 영국은 힌두교도와 회교도의 동수 대표로 이루어지는 연립정부 구성을 제의했지만, 국민회의가 지나에게 연맹의 회교지도자 지명전권을 줄 수 없다고 거절하자, 지나는 연립정부 제의를 거부했다. 1946년 새로운 제헌의회 선거결과는 지나가 이미 예측했던 사실(국민회의가 2억 9600만 힌두교의 대수를 실질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반면, 9300만 회교도들의 대부분은 연맹을 따르고 있다)을 만천하에 밝혀 주었다.1946년 8월 16일 마침내 사태는 발화점에 도달했다. 5월에 영국 내각 사절단은 원칙적으로 파키스탄의 분리 조항이 없는 자유통일 인도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제출한 바 있었다. 회교연맹은 국민회의가 그 계획의 일부를 거부하기 전까지는 그 계획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영국과 국민회의가 배신했다고 공격을 가하면서 지나는 찬성을 철회하고 8월 16일을 직접행동일, 다시 말하면 회교도의 진노를 과시할 날로 지정했다. 그는 비폭력을 단호하게 부정했다.거의 모든 곳에서 그날은 오직 검은 깃발과 항의 행진만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많고 폭발성이 높은 벵골의 심장부 캘커타에서는 5000여 명의 사망자를 내게 되는 4일간의 유혈참극이 시작되었다. 캘커타 대학살은 벵골과 비하르 전역에 보복의 불길을 일으켰다. 노령의 간디가 급히 소요지역으로 달려와 도보로 연기를 뿜고 있는 이 마을 저 마을을 찾아 다녔다. 그러나 사태를 가라앉히는 힘이 간디로서도 불의 폭풍을 오랫동안 억누르지는 못했다. 피에는 피 라는 구호가 쌍방에서 들려왔고, 지나와 그의 추종자들은 파키스탄이 아니면 파멸이라는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다.
    사회과학| 2005.08.09| 4페이지| 1,000원| 조회(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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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디] 자유를 위한 간디의 투쟁
    자유를 위한 간디의 투쟁혁명으로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시작이었다. 영국의 인도총독 쳄스포드경 앞으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가 보낸 작은 소포 하나가 도착했다. 소포 안에는 간디의 제 1차 세계대전 중의 대영 협력과 그의 인도적인 사업을 기리어 영국 정부가 그에게 수여한 3개의 훈장이 들어 있었다. 훈장과 함께 간디는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 나는 자신들의 부도덕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잘못을 거듭해 온 정부에 대한 경의나 애정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그 결의에 찬 점잖은 편지는 영국지배에 대한 간디의 정식 선전포고였다. 간디는 이 무기 없는 전쟁을 통해 마침내 세계 최강의 제국을 무릎 꿇게 했다. 허약해 보이는 작은 체구의 사나이는 영국의 가장 귀중한 식민지인 인도를 자유의 길로 이끌어 나가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1920년 8월, 간디가 그 편지를 보냈을 무렵만 해도 민족주의는 아직 강력한 사회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도 국민회의에 활동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영국은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정중한 호소를 묵살해 버렸다. 항의가 폭력화되면 사정없이 진압했다. 게다가 인도 농민의 대다수는 이런 문제에 무관심했다. 겨우 생명을 부지할 정도의 토지에 매여 노예처럼 살아가는 그들은 민족독립과 같은 어마어마한 야심을 품을 여유가 없었다.그러나 일련의 사태가 인도 국민의 기분을 바꿔 놓았다 1919년 영국 정부가 인도 정부법이라는 새로운 헌법을 공포하자 인도인들은 자치권 확대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부풀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3월 18일 공민권을 크게 제한하는 탄압적인 로울래트법이 통과됨으로써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그 후 4월 13일 엄리처학살 이라는 영국의 무력 탄압의 절정이라 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군이 엄리처에 모여 평화적 시위는 하는 1만 내지 2만의 인도 군중에게 발포, 15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던 것이다.인도 국민회의는 1920년 연차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분위기는 분도 일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국민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간디가 하나의 안을 내놓았다. 대대적인 비폭력 저항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스와데시 라고 하는 자급자족 운동을 전개 함으로써 악마적인 정부 의 모든 것을 거부하자는 호소였다. 인도인은 영국인이 준 지위와 명예를 버리고 영국인이 운영하는 학교를 그만두고 정부가 주는 관직, 선거, 상품 일체를 보이콧 하자는 것이었다. 국민회의는 간디의 이 제안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최종 목표는 스와라지 즉 영국인을 내쫓고 인도인 스스로 인도를 통치하는 것이었다.인도에는 돌연 동요가 일어났다. 하얀 간디모자 를 쓴 수천 명의 학생들이 진흙담을 둘러 친 농촌과 생활고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 빈민가로 퍼져 나갔다. 그들은 비폭력, 문맹퇴치, 위생의 개선, 농촌 산업체 설립, 카스트 제도의 천민차별폐지를 제창하는 간디의 복음을 설교했다. 동맹 파업은 식민지 경제에 타격을 주었고 인도 역사상 처음으로 힌두교도와 회교도가 함께 항의시위를 벌였다.간디 자신도 지칠 줄 모르고 지방을 순회하며 비폭력 운동지지자를 하나씩 하나씩 늘려갔다. 이 캠페인이 끝난 1922년 2월 현재 겉에 드러난 성과는 보잘것 없었다. 식민지 국민의 자유는 여전히 심한 억압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민족주의운동도 인도도 결코 과거와 같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간디가 국민에게 큰 힘을 불어 넣었고 국민회의를 잠재적 정권대체 세력으로 바꿔놓았으며 필승의 전략을 짜 놓았던 것이다. 영국의 지배가 끝장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았다.영국의 인도재배는 약 300년 전부터 시작되었지만 인도가 착취당해 온 역사로 보면 뒤늦게 시작된 것이었다. 1608년 런던의 동인도회사가 파견한 윌리엄 호킨스 선장이 수라트 해역에 처음 닻을 내렸을 때 이미 포르투갈 상인들은 100여년 전부터 인도에 들어와 장사를 하고 있었고, 네덜란드인들이 해안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일확천금을 노리고 있었다. 값이 싼 유럽의 상품과 금속을 갖다 팔고 신기한 인도산 향료, 약재, 비단, 칼리코를 사가면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타국의 경쟁자들을 누르고 내륙으로 진출, 인도의 지배권을 장악했다.동인도 회사의 애당초 목적은 통치가 아니라 교역이었다. 그러나 교역이 번창하고 점점 더 많은 영국인들이 이주해 오다 보니 영국군대를 파견, 그들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의회는 인도의 국내문제에 점점 더 깊숙이 빠져들게 되었고 그들의 개입동기를 미화하기 시작했다. 즉 영국은 결코 인도를 착취하러 온 것이 아니라 개화시키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그로 말미암아 인도 사회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영국이 힌두족의 관습(여아 살해, 의식적인 교수형, 죽은 남편의 화장터에서 그 아내를 순장하는 의식)을 야만적인 풍습이라 하여 금지시켰던 것이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이념에 기초를 둔 영국의 사법제도가 계급에 따라 형벌이 다른 오래 된 힌두율법을 대신하게 되었다. 영국은 인도 전역에 도로, 철도, 운하를 건설했다. 1837년에는 영어가 인도의 공용어가 되었다.그러나 19세기 중엽에 다시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산업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인도의 직물을 수입하던 영국은 자국산 직물을 수출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으며 그와 함께 그 밖의 인도산 상품을 팔도 중요한 시장도 없어졌다. 인도의 수공예업과 도시의 수공업이 도산하자 실직한 직공들은 이미 인구과잉으로 허덕이는 농촌으로 되돌아갔다. 기근이 다반사가 되어버렸고 1900년까지 수백만의 인도인이 굶어 죽었다.그러자 1857년 영국군에 복무하던 인도인 군인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지체 없이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폭동에 크게 놀란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통한 인도 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일년 후 인도는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어 영국 상품 전용 시장 및 전략적으로 중요한 군사기지 구실을 하게 되었다. 직할 통치로 바뀌면서 식민정부의 정직성과 능률이 다소 향상되었으며 행정, 보건, 통신시설이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또 다른 반란을 몹시 두려워한 나머지 더 이상의 자유를 주지 않았고 빈곤과 인종차별이 인도인들의 대영감정을 한층 더 악화시켰다.영국이 인도에서 이룩한 최대의 업적은 가장 아이러니컬한 것이었다. 지역, 종교, 카스트, 언어, 전통이 잡다하게 얽힌 인도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영국은 나라 하나를 만들어서 인도에 돌려준 셈이었다. 영어가 공통의 언어가 되고 행정기구가 정비되어 제 기능을 발휘하면서 남녀 시민들은 비로소 벵골인, 펀잡인이라는 의식보다는 인도 국민이라는 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국민적인 주체의식이 성장함에 따라서 외국의 지배에 대한 인도인의 저항감도 커졌다.더 아이러니컬한 것은 새로 대두한 인도의 민족주의 운동 지도자 중에는 런던에서 교육받은 인도인 변호사가 많았다는 것이다. 1830년 이후 영국은 피와 피부색은 인도인이지만 취미, 견해, 도덕심, 지성은 영국인 인 새로운 인종을 만들어 영국과 인도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영국의 자유주의적인 저술과 공정한 법을 마음 놓고 공부한 그들은 영국의 국내 법이론과 식민지 실태 사이의 갭을 보고 급진주의자가 되었다. 영국에서 교육받은 변호사들은 인도로 돌아와 자유운동의 선봉을 맡았다.민족주의 운동은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1885년에 결성되었고 주로 힌두교도로 구성된 인도국민회의였고 또 하나는 1906년에 결성된 전인도 회교연명이었다. 힌두교와 회교간의 해묵은 대립과 독립된 후에 소수파로 전락할 것을 두려워한 회교도의 두려움이 분열을 촉진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국에 대한 반감이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두 집단이 다를 바 없었다. 이에 대해 영국은 사소한 권한을 양보하고 그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미봉책으로 선전했다. 1907년까지 정선된 소수의 인도인이 11개 지방위원회에 진출하게 되었지만 그들의 신분은 고작 영국인의 자문역에 지나지 않았다. 실권은 여전히 영국왕이 임명한 총독이 장악하고 있었다.제 1차 세계대전은 인도의 자치권 문제를 클로즈업 시켰다. 인도인은 영국 국왕에게 충성을 하면 후일 더 많은 자유를 얻게 되리라는 희망에서 대다수가 영국편에 섰다. 영국정부는 처음엔 이를 고마워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로울래트법을 제정, 공포했고 그 결과 간디의 저항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간디는 1869년 포번더에서 상인계급 집안에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디완 즉 독립주의 수상 이었다.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 간디는 런던에 가서 법률을 공부하고 1891년 변호사가 되어 귀국했다. 2년 후 그는 한 회사의 법률고문이 되어 남아프리카의 더반으로 갔다.더반에 도착한 지 1주일도 못되어 간디는 인종차별 사건을 겪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는 겁 많은 젊은 변호사에서 두려움을 모르는 혁명가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그는 1등차표를 가지고서도 열차의 1등객실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간디는 3등실로 가지 않고 그날 밤을 온기 없는 대합실에서 떨며 새웠다. 나의 적극적인 비폭력운동은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라고 그는 나중에 기술했다.
    사회과학| 2005.08.09| 4페이지| 1,000원| 조회(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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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경] 환경보존과 스톡홀름 회의
    환경보전과 스톡홀름 회의스톡홀름에서 세계환경회의가 개최되고 있던 1972년 6월의 어느 날 저녁, 1000명의 젊은이들이 지구 최대의 동물 고래의 생존을 축하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자들은 고래를 닮은 검은 플라스틱을 덮어씌운 트럭을 앞세우고 거리를 행진하면서, 상업적인 고래포획의 일시정지를 요구했다.시위군중들이 제 1차 UN 인간환경회의에 참석한 1200명의 대표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표들은 10년간의 고래포획금지를 요구하는 제안을 통과시켰다. 그 후 한 달이 채 못 되어 국제 포경위원회는 UN의 제안을 거부하고 그 대신 포획량을 4만 마리에서 1973년에는 3만 4000마리로 줄이는 데에만 동의하였다. 이러한 거부는 환경과 멸종 위기에 놓인 생명들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상업적 이해관계에 맞서 싸우기에는 얼마나 미흡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 목적이 아무리 숭고하다 하더라도, UN은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구속력 있는 행동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도 보여주었다.그러나 그해 6월 114개국 대표들이 하나의 공통된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모였다. 환경에 관한 인간의 인식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고원 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 회의는 저하되어 가는 환경의 질을 개선시키기 위해 지금껏 취해진 노력 중 가장 큰 규모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대표들은 인류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태도를 단 한 번의 회의만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톡홀름에서 채택된 가장 현실성 있는 제의들 가운데 하나는 UN의 행정 실무적 한계에 대한 인식과 전 세계적 차원에서 정보자료를 수집하고 전파할 수 있는 UN의 능력에 대한 인식을 결합시킨 것이었다.1962년까지 세계는 환경문제에 대해서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1962년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 이 출간되었는데, 이 책은 살충제 DDT의 위험에 대해 경종을 울린 베스트셀러로서 대부분의 정부 관서들과 일반 시민들에게 모든 생물은 생존을 위해 서로 의존하고 있으며, 또 건강한 환경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최초로 인식시켰다.카슨은 증거로서 미시간주의 이스트랜싱시가 느릅나무를 갉아먹는 딱정벌레를 박멸시키고자 기울인 노력을 제시했다. 시당국은 나무에 DDT를 살포했다. 가을에 나뭇잎이 땅에 떨어지자 벌레들이 그 나뭇잎을 먹었다. 봄에 다시 돌아온 울새들이 이 벌레들을 잡아먹었다. 1주일도 못되어 이스트랜싱의 거의 모든 울새들이 죽었다.살충제에 의한 위험을 요약하여 설명하면서 카슨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의 세계는 해충을 잡기 위해 사용하는 물질들로 광범위하게 오염되어 있다. 이 화학약품들은 모든 생물들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절대 필요한 물 속에 이미 침투해 있으며, 토양 속에도 들어가서 식물 속에 얇은 독성 피막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에 끼치는 영향은 이미 알려진 것만 해도 파괴적이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것은 여러 해가 지나야 탐지될 수 있는 훨씬 더 끔찍한 피해, 몇 세대가 지나야 비로소 알 수 있을 유전적 피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다.농학자들은 맹렬하게 카슨을 공격하면서, 살충제를 쓰지 않으면 수확량이 90%나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카슨은 농작물을 갉아 먹는 해충들을 퇴치하기 위해서 균류, 박테리아 및 그 외의 곤충들과 같은 생물학적 수단을 사용할 것을 촉구했다. 결국 침묵의 봄 은 미국 상원으로 하여금 DDT문제를 검토하도록 자극하였으며 상원은 미국 내에서의 DDT사용을 거의 전면적으로 금지시키기에 이르렀다.수년 후 과학자들은 살충제가 살포된 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남극 지방의 펭귄과 백곰의 체내에 이 화학 살충제가 축적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과학자들은 또한 가장 가까운 농경지에서도 수백km나 떨어진 그린란드의 해안 부근에서 자란 고래의 체내에서도 DDT를 발견했다. 레이첼 카슨의 책이 하나의 경종이 되어 1960년대의 세계 각국은 그들의 토지와 하천 그리고 해양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환경의 손상은 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너무나도 뚜렷한 현상이었다. 독일의 루르 공업지대에서 날아온 매연이 노르웨이의 눈을 엷은 회색으로 물들인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항해중인 유조선에서 유출된 원유가 아이보리코스트의 해수욕객들의 발을 덮었다.1960년대 말쯤 전망은 매우 어두웠다. 일련의 시스템 분석가들이 수학적 방법과 컴퓨터를 이용하여 세계의 생태학적 미래를 측정한 결과 나온 해답은 파멸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조사결과를 성장의 한계 라는 책으로 간행하면서 현재의 추세가 그대로 지속된다면 130년 후에는 파멸적 기근과 심각한 오염이 초래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나치게 겁을 준다고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이 책은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그리고 그 후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예를 들면, 캘리포니아 대학의 과학자들은 스프레이에서 쓰는, 언뜻 보기에는 무해한 가스가 궁극적으로는 피부암의 발생률을 증가시킬지도 모른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또 탄화불소 프로팰런트가 결국에는 대기권 상층부까지 상승하여 지구를 태양의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방패인 오존층을 잠식해 들어간다고 말했다. 대기권 상층부의 오존층이 5%만 감소되어도 미국 내에서 연간 약 8000건의 피부암발생 증가를 가져올 것이라고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의 연구원들이 말했다.석유와 석탄의 연소까지도 대기권 상층부를 위협하고 있다고 보고 되었다. 연소로 인해 발생된 이산화탄소는 성층권의 온도를 점차적으로 상승시키고 있으며 온실효과를 유발시켜 지구의 기상패턴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까지 사하라 바로 남쪽에 위치한 사헬지역에 장기적인 가뭄이 닥치고 미국 중서부 곡창지대에 홍수가 닥쳐 수십만 명의 아사자를 내는 기근을 빚었고 세네갈에서 이디오피아에 이르는 광대한 건조지대에서도 수백만 명의 목숨을 위협하는 반발이 있었다.1972년 의견을 달리하는 나라일지라도 상황의 절박성에 굴복하여 협력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대표들이 스톡홀름으로 모인 것은 그러한 긴박한 상황 하에서였다. 사실, 정치가들은 회의개막 전부터 이미 상투적이니 정치놀음을 하고 있었다. 소련은 동독이 UN의 회원국이 아니라고 하여 표결권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이류로 불참을 선언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깊은 불화가 회의를 완전히 망쳐버릴 위험도 있었다.개발도상국들은 만일 공해가 간절히 요구되고 있는 공업화의 부산물이라면 그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한 부유한 국가들이 대외원조를 위한 예산에서 공해방지를 위한 예산을 공제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으며, 선진 공업국들의 성장이 둔화되기라도 하면 수출수요가 감소되어 개발도상국들이 타격을 입게 될 것을 걱정했다.UN환경회의 사무총장인 캐나다의 모리스 스트롱은, 스웨덴 대표단이 UN총회를 설득하여 환경에 관한 국제회의 계획을 승인하도록 한 이래 4년 동안 이 문제를 놓고 작업을 했다. 스트롱은 가난한 나라들에 대해 그들에게도 역시 깨끗한 환경이 중요하며, 국제적인 도움을 얻어 그들 도시의 오염된 물, 하수처리 등과 같은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한 전 세계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스트롱은 또한 그들에게 국제환경회의는 토양침식과 사막의 확대와 같은 주요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루게 된다는 것도 확신시키려고 노력했다.그의 노력은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인도 수상 인디라 간디는 제 3세계 국가들을 대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대다수 국민의 암울한 빈곤을 단 한순간이라도 잊을 수 없다. 촌락과 빈민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삶 자체가 근원부터 오염되어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들에게 해양과 하천 및 대기를 깨끗하게 유지하는 일에 관해 말할 수 있겠는가? 스트롱은 빈국들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했다. 그리고 그는 회의에서, 그 생산이 공해를 유발시키는 합성원료보다는 천연상품의 교역을 장려하는 결의안 채택을 위해서 힘썼다. 개발도상국들이 공장굴뚝을 발전과 동일시하는 것을 보고 선진국들이 놀라움을 표시하는 것이야말로 뻔뻔함의 극치이다. 우리도 지금까지 줄곧 그렇게 해오지 않았는가? 하고 스트롱은 말했다.공식 대표들이 하나뿐인 지구 라는 깃발 아래 회의장에 모여들었을 때, 다른 수천 명이 스톡홀름 시내의 다른 곳에 모여 그들 나름대로의 주장을 폈다. UN은 거의 500개의 환경단체들에게 비정부 옵서버로서의 준공식적인 지위를 부여한 바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선언문 속에서 이 회의의 중요성을 4세기 전 우주 안에서의 지구의 위치에 관한 인간의 인식체계를 완전히 바꾸어 버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비교했다.다른 그룹들은 정치적으로 보다 더 직선적이었다. 한 그룹은 선진국들이 저개발국들의 자원을 무자비하게 착취함으로써 저개발 국가들의 경제를 절망상태에 빠뜨렸다고 선진국들을 호되게 비난했다. 공식회의조차도 처음부터 매우 정치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스웨덴 수상 올로프 팔메는 중국과 합세하여, 베트남에서 생태계 파괴 전쟁 을 자행하고 있는 미국을 비난하였으며, 미국의 행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무도한 환경파괴라고 매도했다.
    사회과학| 2005.08.09| 4페이지| 1,000원| 조회(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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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전공학] DNA와 RNA의 역할비교
    DNA와 RNA의 역할비교생명의 위대한 신비 가운데 하나인 유전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는 1953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두 과학자에 의해 발견되었다. 널리 흩어진 자료들에서 찾아낸 단서들에 의해 그들은 유전의 기본적인 물질인 DNA(디옥시리보핵산)의 독특한 분자구조를 찾아냈다. 이제는 유명해진 그들의 2중 나선형 모형은 DNA가 단백질 합성과정을 지배하고 지시하는 정교한 화학적 언어의 유전암호 탐구에의 길을 열었다.1962년에 이 두 사람의 과학자 즉 미국 출신 생화학자인 제임스 왓슨과 영국의 생물학자인 프랜시스 크릭은 DNA결정에 관한 상세한 연구로 이 두 사람의 연구에 토대를 제공했던 영국의 생물 물리학자 모리스 윌킨스와 함께 생리·의학부문에서 노벨상을 수상했다. 왓슨과 크릭의 연구는 유전의 본질에 관한 오랜 세월 동안의 과학적 탐구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2중 나선 구종의 발견에 의해 완료된 이 탐구의 길은 거의 1세기 전에 오스트리아의 외딴 수도원에서 시작되었다.이곳에서 유전학의 아버지 로 불리는 오스트리아의 과학자이며 수도승이었던 그레고르 멘델은 특정한 형질이 부모로부터 자손으로 유전되는 이유를 구명하기 위해 최초로 수학을 응용하면서 통제된 실험을 해왔다. 이 수도원의 정원에서 멘델은 20종 이상의 완두콩을 사용하여 단 한가지의 현질만이 다른, 두 종류의 콩을 교배하는 실험을 행하여 그 결과를 기록했다.멘델은 키가 큰 완두콩을 키가 작은 것과 교배시키고 보랏빛 꽃이 피는 완두콩을 흰 꽃이 피는 것과 교배시켰다. 그는 그 결과를 토대로, 모든 자손세대의 완두콩이 부모세대의 완두콩으로부터 모든 형질을 완전히 물려받지만, 특정한 형질은 다른 형질보다 자손세대에 나타날 가능성이 더 크며 자손세대에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형질도 다음 세대로 유전될 수 있다고 추론했다. 멘델이 증명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유전이 명확하게 정의된 수학적 확률의 법칙에 따른다는 것이었다.멘델은 1866년에 그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들을 발표했지만 오랜 훗날까지 아무도 그 중요성을 깨자 오스카 헤르트비히는 성게의 정자세포가 난세포에 들어가 그 핵과 결합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그가 지켜보고 있는 동아 수정된 난 세포는 2개의 새로운 세포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헤르트비히는 인류 최초로 새 생명의 탄생을 목격했던 것이다. 4년 후 또 다른 독일인 과학자 발터 플레밍은 수정된 난세포가 분열되기 직전에 그 핵 가운데 있는 긴 실 모양의 섬유가 복제되는 모습을 보았다. 복제된 섬유는 각각 새로 생긴 세포들로 들어갔다. 생물학자들은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이 섬유들을 염색했는데 그래서 이 섬유에 염색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당시 멘델의 연구결과가 알려져 있었다면, 플레밍과 그의 후계자들은 틀림없이 염색체를 유전과 연관지어 생각했을 것이다. 멘델의 이론이 재발견된 지 2년 후인 1902년에 가서야, 미국의 생물학자인 윌터 서튼이 염색체와 유전이 관련이 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그러다가 1915년경에 과학자들은 염색체가 유전자라는 더 작은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유전에 관한 연구도 유전학이라는 과학으로 정립되었다.염색체가 포함되어 있는 세포핵에 관한 초기의 화학적 연구들에 의해 염색체가 단백질과 2종의 핵산, 즉 RNA(리보핵산)와 DNA(디옥시리보핵산)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RNA와 DNA의 기능이나 구조에 관해서는 거의 무지의 상태였으므로 과학자들은 이 2종의 핵산이 세포의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모든 생명체에서 단백질이 중요하다는 점은 이론적으로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생물학자들은 여러 해 동안 염색체가 복잡한 단백질 분자로 구성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그러나 1940년대 초에 이르자 사실은 DNA가 유전과정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성분이라는 증거가 쌓이기 시작했다. 당시 뉴욕시 소재 록펠러대학의 과학자들은 일련의 실험을 통해 독성이 있는 폐렴균에서 채취한 DNA가 무독의 폐렴균을 유독한 균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러한 발견이 결정적인 것은 못 된다고 하면여지없이 증명했다.카네기 연구팀은 그것을 증명하는 데 박테리아의 세포를 공격하는 바이러스인 살균소를 사용했다.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 단순한 구조를 갖고 있는 살균소는 중심이 되는 DNA와 그 주위를 둘러싼 단백질이 껍질로 구성되어 있다. 살균소는 독자적으로 그 주위를 둘러싼 단백질의 껍질로 구성되어 있다. 살균소는 독자적으로 번식할 수 없기 때문에 박테리아의 세포에 침입하여 그 유전적 복제 기구를 탈취, 세포 대신에 살균소를 생산하도록 만든다.살균소내의 어떤 물질이 이러한 과정을 생성시키는가 분명히 알아내기 위해 카네기 연구팀은 단백질과 DNA에 상이한 방사성 추적자를 부가해 살균소가 세포를 공격하기 전과 후로 나누어 세포의 성분을 분석했다. 그 결과 살균소가 세포벽에 들어가기 전에 단백질의 껍질을 벗어 버리며, DNA만이 세포의 핵 안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단백질이 아니라 DNA가 살균소의 유전 장치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리하여 과학자들은 DNA야 말로 오랫동안 찾아왔던 유전물질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DNA의 역할이 일단 확인되자 그 화학적 구조에 관한 탐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DNA 분자가 뉴클레오티드라고 불리는 유기물의 긴 고리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각 뉴클레오티드는 당분, 인산과 4개의 질소염기(아데닌, 티민, 구아닌, 시토신) 가운데 하나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물질들이 어떻게 결합되어 DNA 분자를 이루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여서 유럽과 북미의 몇 연구소에서 이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런던대학에서 DNA를 연구하고 있던 모리스 윌킨스는 X선 결정해석이라고 하는 끈기가 필요한 기법으로 DNA의 분자구조를 알아내려고 시도했다. 정제된 DNA결정에 X선을 통과시키면 X선은 산란되어 사진건판 위에 점과 원으로 된 구름 모양의 패턴을 그렸다. X선 사진의 윤곽은 흐릿했으므로 여러 가지 다른 해석들이 가능했지만 윌킨스는 몇 가지 형의 나선형 구조가 가장 유력하에 관한 화학적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윌킨스가 소지했던 사진 한 장을 보고 매우 흥분했는데 이 사진은 DNA 결정을 비교적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그해 가을, 당시 22세였던 왓슨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카벤디시 연구소로 옮겨 갔고 그곳에서 프랜시스 크릭을 만나게 되었다. 멀지 않아 왓슨과 크릭은 상대방도 DNA의 연구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공동연구를 시작했다. 윌킨스로부터 얻은 사진들을 검토하고 다른 화학적 자료들도 수집하면서 그들은 신비로운 DNA분자의 모형을 구성하기 시작했다.한편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라이너스 폴링(1954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하고 1962년에는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는)은 그 나름대로 DNA 분자모형을 구성하고 있었다. 1951년 여름 그는 중요한 단백질 구조의 하나인 알파 셀릭스 모형을 발표했고, 1952년 초에는 그 나름대로의 DNA 분자모형을 완성했다. 그러나 3개의 나선으로 구성되는 폴링의 모형은 멀지 않아 잘못된 것임이 밝혀져 왓슨과 크릭은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다.그후 18개월 동안 왓슨과 크릭은 DNA구조와 그 복제양식을 밝혀내려는 시도를 계속, 수많은 모형을 구성했다가는 부수어 버렸다. 처음에 그들은 금속선을 꼬아 모형을 만들었으나, 뒤에는 윌킨스와 그의 동료 로잘란드 프랭클린의 연구로부터 필요한 정확한 측정치를 얻을 수 있었으므로 카벤디시 연구소에서 제작한 부품을 사용했다.그들은 연구가 막바지에 들어서 열기에 들떠 있던 어느 날, 한 가지 정보가 특히 귀중한 기여를 했다. 뉴욕시 소재 콜롬비아 대학의 생화학자인 어윈 샤르가프는 자신이 분석한 모든 DNA 표본이 같은 양의 아데닌(A)와 티민(T) 및 같은 양의 구아닌(G)과 시토신(C)을 함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또한 A+T와 G+C의 비율은 유기물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동일한 종의 유기물에서는 같다는 것도 알아났다. 카벤디시 연구팀은 좌절과 재기를 거듭하면서 연구를 진전시켰다. 왓슨은 그의 저서 2중 나선 에서 크릭과의 공동연구다. 그들도 처음에는 폴링처럼 분자의 내측 또는 외측에 등뼈가 있는 3중 나선 모형들을 구성해 보았다. 1952년 초 그들은 외측에 2개의 등뼈가 있는 2중 나선을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다. 이 모형에서 각 염기의 한쪽 끝은 한쪽 등뼈에 연결되고 다른 쪽 끝은 다른 염기에 연결된다. 즉 2개의 염기가 서로 이어져 당분과 인산으로 된 두 개의 나선형 등뼈를 서로 연결하는 것이다.이 2중나선 모형은 그때까지 알려진 모든 자료와 정확히 일치 되었지만 염기들의 배열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가 큰 문제로 남아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A와 A, T와 T 식으로 동종의 염기들을 서로 연결시켜 보았으나 염기 분자들은 크기가 서로 달라 위측 등뼈야 파문이 생기는 등 형태가 이상하게 되었다.그러다가 왓슨에게 영감이 떠올라 해결책이 발견되었다. 만일 어떤 식으로든 A와 T가 결합하면, 이렇게 되어 만들어진 분자는 G와 C가 결합하여 생긴 분자와 크기가 같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식의 결합은 등뼈의 파문을 없애줄 뿐 아니라 샤르가프가 발견했던 A와 T, G와 C가 같은 양이라는 사실도 설명해 줄 수 있었다. 드디어 DNA 분자의 3차원적 형태가 밝혀진 것이다. 모리스 윌킨스가 찍었던 사진들은 그들의 DNA의 신비를 진실로 해결했음을 확인해 주었다.왓슨과 크릭은 영국의 과학잡지 네이처 가 그들의 발견을 게재하고 싶다는 요청을 하자 그 답신에서 그것은 기묘한 모형입니다 라고 썼다. 그러나 DNA는 유별난 물질이므로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대담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의한 염기의 특정한 배열이 유전물질의 복제장치일 가능성이 있다는 데 우리는 주목했습니다. 왓슨과 크릭이 생각해 낸 DNA분자는 나선형의 사닥다리를 닮은 것이었다. 사닥다리의 옆막대가 되는 2개의 당분과 인산의 굽은 줄은 2개의 염기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사닥다리의 단 들에 의해 연결된다. A만이 T와 결합되고 C만이 G와 결합되지만 이렇게 결합된 염기분자들의 배열순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간의 세포 한 개에 있는 DN다.
    공학/기술| 2005.08.09| 5페이지| 1,500원| 조회(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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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폴로] 아폴로 계획
    아폴로 계획그들은 생명이 없는 세계를 찾아간 첫 방문객이었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텍사스주 휴스턴에는 유인 우주선센터로부터 전파통신이 날아왔다. 잘 듣게, 이 방안은 물론 전세계에서 웃음꽃이 피고 있네. 달로부터 즉각 답신이 날아왔다. 여기에도 웃는 사람이 둘이나 있네. 그 바로 직전, 즉 1969년 7월 20일 오후 4시 17분(미국동부 서머타임) 아폴로 11호의 우주인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앨드린 2세를 태운 달착륙선은 평온의 바다 라고 불리는 달의 평원에 착륙했다.6시간 뒤 암스트롱은 우주복 차림의 둔한 몸을 움직여 달착륙선 이글 호의 승강구를 빠져나와 짤막한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지구 위에서는 이 역사적인 순간을 수억에 달하는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단일한 사건을 이처럼 많은 사람이 지켜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이제 달착륙선에서 내려서려고 합니다 라고 암스트롱은 보고했다. 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한 걸음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큰 도약입니다.인간을 달에 보내겠다는 미국의 집중적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이 계획은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해 미국의 자존심과 자신감을 뒤흔드는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었다. 즉 4월 12일 소련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은 108분 동안 지구를 일주하는 우주비행에 성공, 우주공간을 비행한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1주일 뒤 미국이 후원한 쿠바의 피그만에 대한 침공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케네디는 미국의 우주계획을 재편하여 미국의 위신을 회복시켜야 겠다는 결의를 굳혔다. 5월 25일 그는 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나는 미국이 이 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고 다시 무사히 지구로 돌아오게 하는 목표에 헌신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업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케네디는 1958년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창설된 민간 우주개발 기구인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사용할 추가예산을 요청했으며 의회는 이 요청에 신속하게 응균 3%에 달했다. 대부분의 자금은 새턴 5호 로켓과 아폴로 우주선의 주요부분을 설계, 생산한 16개 우주항공업체에게 돌아갔다. 또한 이 매머드계획에는 1만 2천명의 하청업자가 관련되었고, 100개 이상의 미국대학들이 참여했다. 모두 4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계획에 참여한 셈이다.달 위에 최초의 인간을 착륙시키겠다는 미국의 국가적 노력은 처음부터 소련과의 경주, 즉 소련에 대한 미국의 기술적 우위를 명백하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서 인식되었다. 아폴로계획의 목표는 지난날의 탐험과는 달리 영토나 천연자원의 획득은 아니었다. 또한 과학적 지식도 가장 큰 목표는 아니었다. 아폴로계획에 의해 수집된 자료들의 대부분은 무인 우주선을 이용하여 훨씬 싼 비용으로 얻을 수도 있었다.케네디의 과학문제 자문관들은 미국이 6~9년 이내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킬 능력이 있다고 케네디에게 장담했지만 그러자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는 큰 문제는 무게 45톤의 아폴로 우주선이 지구의 중력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강력한 로켓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적당한 착륙지점을 선정하기 위해 달 자체에 관해 충분한 사전지식을 모으고 달의 환경에 적합한 장비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이 밖에도 우주선이 지구의 대기권으로 재돌입시 발생하는 엄청난 열로부터 우주인들을 보호하는 문제, 우주선을 달로 보내고 귀환시키는 데 필요한 정교한 유도·추적시스템의 개발, 필요한 기술적 조작을 테스트하고 완성하는 문제, 인간적인 또는 기계적인 오류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해야 헹다.1961년 5월 5일 앨런 셰퍼드는 미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우주비행을 했다. 그는 머큐리 우주캡슐을 타고 15분 동안의 준궤도비행을 하여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다. 9개월 뒤 존 글렌은 무게 1660kg의 우주캡슐 프렌드쉽 7호를 타고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궤도비행을 했다. 1963년 5월 고든 쿠퍼가 지구궤도를 22회 선회하는 비행으로 끝난 이 머큐리계획은 우주인들이 가속도의 통신의 전문지식과 경험을 축적, 장래의보다 야심적인 계획에 대비했다.한편 소련은 우주비행에서의 최초의 기록들을 계속 수립했다. 즉 1964년 10월 보스호드 1호에 3인의 우주인이 탑승한 것을 시초로 하는 2인 또는 3인의 우주비행과 1965년 3월 18일 보스호드 2호에 탔던 알렉세이 레오노프의 우주유영이 그것이었다. 미국의 달 탐사계획이 널리 선전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소련의 계획은 비밀에 싸여 있었다. 소련이 인간을 달에 보내려는 경주에 참가하고 있는지조차도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이 우주항공기술에서 계속 선두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소련이 그럴 계획이 있다는 시사가 되었고 이것은 달에 먼저 가겠다는 미국의 결의를 더욱 굳혀 주었다.1965년 3월 23일, 버질 거스 그리솜과 존 영은 2인승 제미니계획에 따른 첫 비행을 했다. 모두 10차례에 걸쳤던 이 제미니계획에서 미국 우주인들은 궤도를 마음대로 수정하고, 다른 캡슐과의 랑데부 또는 도킹을 위해 궤도 위의 적당한 위치로 우주선을 조종하고, 제미니 5호에서의 연료전지 고장이나 제미니 8호의 연료점화 실패 같은 긴급사태에 대처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이 제미니계획이 1966년 11월에 완료되었을 때에는 제미니가 보스호드보다 우수한 우주선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침내 미국이 소련보다 우위에 서기 시작한 것이다.소련의 우주개발계획이 지연되기 시작했다는 다른 증거들도 있었다. 1964년에 니키타 S. 흐루시초프 수상을 밀어내고 집권한 새 지도자들은 흐루시초프만큼 우주에서의 선두경쟁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소련 로켓건조의 지도자였던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1966년에 사망한 것도 우주계획의 전반적 지연을 초래한 원인의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1966년과 1967년에 걸쳐 소련의 정부대변인들은 무인 우주탐사계획의 장점들을 더욱 강조했고, 소련은 성급한 달 방문 보다는 항구적인 우주스테이션의 건설이 더 중요하다고 간주하고 있음을 시사했다.한편 그동안에도 미국과 소련의 무인우주선들은 달에 관한 자료진들을 보내왔다. 1966년 초 소련의 루나 9호는 달표면에 연착했고, 루나 10호는 최초로 달의 이면을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1966년과 1968년에 걸쳐 미국의 세베이어 우주선들은 7회에 걸쳐 달 표면에 연착, 토양의 성분을 검사하고 달 표면에서 본 달의 풍경을 찍었다. 1966년 8월부터 1967년 8월까지 5차례에 걸쳐 루나 오비터 우주선들은 달의 표면에 관한 지도를 작성하여 아폴로의 계획자들이 가장 적합한 착륙지점을 선정할 수 있게 해주었다.아폴로 계획은 1961년, 우주인이 탑승하지 않은 새턴 1호 로켓의 발사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새턴 5호 달로켓이 최초로 시험발사된 것은 1967년에 이르러서였다. 새턴 5호는 지상에서 발사된 가장 무겁고, 가장 복잡하고, 가장 돈이 많이 든 물체였다. 이 3단계 로켓의 높이는 87m 이상이었다. 1단계에는 가솔린과 액체산소를 연료로 하는 F-1 엔진이 5기, 2단계에는 수소와 산소를 연료로 하는 J-2 엔진 5기, 3단계 J-2 엔진 1기가 있었다. 발사 후 2분 30초 동안 1단계 로켓은 190만 리터 이상의 연료를 태워 340만kg 이상의 추진력을 내어 속도를 음속의 10배까지 가속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이 로켓은 비행 중에 무게가 2300kg이나 되는 조종장치와 컴퓨터에 의해 속도와 진로가 자동적으로 조종되었다.아폴로 우주선 자체는 3개의 부분, 즉 기계선, 사령선과 착륙선으로 구성되었다. 가장 큰 것은 기계선으로 우주를 향해 나아가는 아폴로를 돌려 달 궤도로 진입시키고, 후에 지구 귀환 길로 출발시키는 데 필요한 엔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기계선은 또한 가장 강력한 장거리 안테나, 예비산소, 연료전지 및 자세 제어용 분사장치 등을 갖추고 있었는데 선내의 모든 것은 가능한 한 단순하고 성능이 믿을 만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두 가지 성분으로 된 연료는 펌프가 아니라 가스의 압력에 의해 혼합되었고 이 두 성분이 접촉하면 바로 발화되었다. 추진실과 노즐에는 서서히 타 없어지게끔 되어 있는 코팅이 되어 있어서 냉각장인들이 탑승한 사령선이 있었는데, 비행 중 몇 시간을 제외하고는 사령선에 탄 우주인들은 기계선의 설비를 계속 이용할 수 있었다.사령선은 설계의 걸작품이었다. 외형은 뭉툭한 원추형으로 앨런 셰퍼드가 탑승했던 머큐리 캡슐을 연상시켰지만 내부 공간은 4배나 넓었다. 사령선에 비치한 소형 컴퓨터는 머큐리 계획 당시 지상관제소에 있던 제어컴퓨터보다 기억용량이 더 컸다. 사령선의 상관제소에 있던 제어컴퓨터보다 기억용량이 더 컸다. 사령선의 외부는 지구 대기권에 다시 돌입할 때 생기는 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벌집 모양의 금속수지 섬유로 된 방열막으로 완전히 보호되어 있었다.달착륙선은 벌레 (bug)라는 별명으로 흔히 불려지긴 했지만 그 모습은 그때까지 인간이 보았던 무엇과도 닮지 않은 것이었다. 외보는 금속박으로 덮여 있었고 달에 착륙한 후에 서 있을 수 있도록 곤충의 다리 비슷한 4개의 다리가 달려 있었다. 달표면으로부터 쉽게 이륙할 수 있도록 착륙선의 모든 부분은 무게가 최소화 되게끔 정성을 쏟아 설계되었다. 거기에는 침대나 의자는 없었다. 우주인들은 이착륙시에 몸을 지탱하기 위해 가벼운 벨트로 몸을 묶었다. 착륙선이 달 표면으로 하강하기 시작할 때의 무게는 1만 8000kg으로 되어 있었다. 그 대부분의 연료로서 이착륙에 사용될 것이었고, 착륙대로서 사용되는 착륙선의 하부는 이륙시에 달에 남겨 놓도록 되어 있었다. 이륙할 때 달착륙선의 무게는 대형 자동차 무게 정도가 될 것이었다.아폴로 사령선의 첫 유인 궤도비행은 1967년 2월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1월 27일 오후 비행을 앞둔 모의 훈련중에 순수한 산소가 꽉찬 밀폐된 캡슐에서 불이 일어났다. 안에 타고 있던 거스 그리솜, 에드워드 화이트, 로저 채피 등 세 우주인은 비명을 질렀으나 1분도 안돼 질식하고 불에 타서 모두 사망했다. 이 비극을 조사한 결과 전선의 결함으로 불이 일어나 합성수지에 인화, 100% 산소로 된 우주선의 내부에서 번개처럼 불이 번졌음이 밝혀졌다. 캡슐의 승강구에는 신속이 문을 열수 있는
    공학/기술| 2005.08.08| 5페이지| 1,500원| 조회(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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