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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의 대남정책에 대하여 : 통일전선사업부 엘리트 분석을 중심으로
    북한학 개론 기말 보고서북한의 대남정책에 대하여 : 통일전선사업부 엘리트 분석을 중심으로1. 들어가며한 민족이면서도 멀게만 느껴졌던 북한을 한 학기동안 공부하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북한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까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한 궁금증은 북한의 대남정책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호기심으로 바뀌었고, 대남정책을 실제로 다루었던 북한의 대남부문 엘리트들은 어떤 성향일 것인가에 대해서도 조사하게 되었다.북한의 여러 정책 부문 중에서도 대남부문은 90년대 이후, 김용순 대남비서 이후부터 공개적인 활동이 알려졌으며 이러한 변화는 90년대 북한의 어려웠던 고난의 시기와 김정일 집권 이후 정치성향의 변화를 반영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대남부문 담당 부서인 통일전선사업부를 알아보고, 북한의 대남정책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살펴본 후, 역대 통일전선사업부 부장을 맡았던 김용순, 림동옥, 그리고 현재의 김양건의 행동에 대해 분석함으로써 북한의 대남부문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2. 북한의 대남정책1) 대남정책의 기조(1)기본노선북한의 대남정책은 한반도내 유일합법정부는 오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논리에서부터 출발한다. 북한의 대남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바로 ‘해방’과 ‘혁명’을 통한 남한의 공산화인데, 이러한 정책목표는 노동당 규약 전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조선로동당의 당면 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여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과업을 완수하는 데 있으며 최종 목적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는데 있다.이러한 북한의 ‘남조선혁명을 통한 공산화 통일’이라는 대남정책 노선은 1970년대에 들어와 주체사상과 접목됨으로써 더욱 구체화되었고, ‘민족해방론’과 ‘인민민주주의혁명론’에 기초한 대남정책 기조를 변함없이 추구하여 왔다. 그러나 전략 목표상의 우선순위나 정책 전개 방법은 대외적 환경과 상황에 따라 전략 및 전술의 측면에서 변화를 거듭해 왔다.)(2) 대남정책 담당기구 : 통일전선사업부’분단이 미소 양국군의 일시적인 ‘분할점령’으로 간주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북한의 대남전략은 당의 정치노선에 포함된 ‘북조선민주기지노선’에 머물러 있었다. ‘북조선민주기지노선’은 1946년 1월 도, 시, 군 인민위원회 선거에서 법적으로 공식화되었으며, 이후 1947년 2월 수립된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 채택된 11개조 정강에서 한반도 전체의 사회주의적 통일을 위한 민주기지로서의 북한의 역할과 의무가 강조되기도 하였다.②적화통일 시도 (47.3~53.7) : ‘선 통일, 후 사회주의혁명’의 무력적화통일 전략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수립 이후 1년도 못되는 짧은 기간에 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하게 된 북한은, 북한에만 사회주의국가를 세우는 경우 분단이 장기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가지면서, 먼저 통일을 이룬 다음 한반도 전역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하자는 식의 ‘선 통일, 후 사회주의 혁명’ 국가전략을 내세운다. 한국전쟁도 이와 같은 전략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무력적화통일의 시도였다.③전후 복구건설 및 사회주의혁명 (53.8~61.9) : 소극적 대남정책무력적화통일 전략의 시도였던 한국전쟁은 결국 북한에 마련한 ‘민주기지’마저 폐허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50년대 북한의 대남정책의 변화를 가져오기에 이른다. 한국전쟁의 경험을 통해 미군이 남한에 남아있는 한 무력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김일성은 대남정책에 있어 북한은 휴전 직후부터 평화통일론을 앞세우면서, 주한미군의 철수를 반복하여 주장함과 동시에 한국에 대한 평화 공세를 가속화하였다. 이와 같은 대남정책은 1960년의 연방제 제안으로 이어졌으나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이 기존의 ‘민주기지론’을 포기한 것을 결코 아니며, 다만 혁명과 통일을 강조하는 혁명 지향에서 건설과 체제유지에 치중하는 방어지향으로, 대남정책의 성격에 다소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④사회주의 건설과 자주노선(61.10~70.11) : 공세적 대남정책체제를 성공적으로 재정비한 북한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시 적극적, 공세적인 대남정책을 추진한폭파사건 등의 대남테러행위를 지속하였다.②1980년대 말~90년대의 ‘수세적 평화공존전략’동구권의 붕괴와 사회주의국가들과 3세계 국가들의 연이은 대한 수교 등 급변하는 정세는 흡수통일에 대한 북한의 피해의식을 강화시켰다. 이는 북한의 대남전략에도 반영되어 90년대 들어서면서 기존의 공세적 적화통일전략의 성격이 약화된 반면, 체제생존을 위한 수세적 평화공존 전략의 성격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1991년 9월의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12월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의 체결 등은 결국 남북공존을 수용함으로써 체제의 생존을 도모하려는 북한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남북 평화공존을 수용하였다고 하여 대남적화통일 전략을 포기했다는 것은 아니었으며, 여전히 다른 한편으로 적화통일 전략을 지속적으로 추구하였다. 합의서 채택으로 개선의 기미를 보이던 남북관계는, 이후 핵문제 발생과 북한의 비핵화합의 위반, 94년 7월 김일성 사망에 따른 조문파동으로 김영삼 정부 집권 전 기간 동안 고착상황에 빠지게 된다.(3)김정일 정권의 대남정책 : ‘통미봉남정책’에서 ‘민족공조 ? 실리주의정책’으로)김일성의 ‘조문파동’을 계기로 김영삼 정부 집권기간 동안 북한은 남한 당국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김일성이 생전에 제시했던 통일방안들은 ‘유훈관철’의 차원에서 계승해 나간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대남관계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 김일성과 달리, 김정일은 대남 적대관계를 유지하며 남한을 배제시킨 채 미국과의 관계개선에만 치중하는 통미봉남 정책을 추구하였다.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의 대북 햇볕정책에 대하여 북한은 흡수통일을 목적한 와해모략 책동이라는 거부감을 표출하면서도, 북한의 경제적 실리확보와 체제보위에 긍정적 방향으로 적극 활용하려는 의지도 동시에 나타냈다. 한국정부의 일관성 있는 대규모 북한지원 프로그램은 북한이 외면하기 어려운 제안이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남북 간의 비공개 특사접촉을 거쳐 2000년 조국통일을 위한 목적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굳이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아량을 가지고 대할 것”이라는 발언을 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대화의 의지를 보였다.)김용순은 98년 10월, 소떼를 몰고 방북한 정주영 현대명예회장과 면담을 가졌으며), 2000년 6월의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을 보좌하는 핵심 브레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용순은 남북 정상회담 중 내내 김정일 국방위원장 가까이에 배석하였으며, 김정일 위원장은 기념촬영 때에 "용순 비서는 어디 있어"라고 불러 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임동원 통일부장관과 함께 ‘6.15 선언문의 산파’라고 불릴 정도로의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또 김용순은 2000년 9월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의 길을 닦기 위하여 판문점을 통한 육로로 서울을 방문하기도 하였다.)김용순은 2002년 4월 평양을 방문한 임동원 대통령 특사에게 남측이 대북 정책에서 미국과 협력하는 태도를 문제 삼으면서 민족공조와 한미공조 사이에서 분명한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로부터 민족공조와 ‘우리민족끼리 이념’은 북한이 남북관계에서 단골메뉴처럼 들고 나오는 대남 전략의 핵심내용으로 정착하게 된다.)이와 같은 ‘민족공조론’은 2003년 6월 13일자 노동신문에 6.15 남북공동선언 3돌을 기념하기 위해 그가 기고한 글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통일의 문을 열어나가자”라는 글에서 더 잘 드러난다. 그는 글을 통해 “북과 남은 6.15 공동선언의 기본정신에 맞게 우리 민족끼리 공조해야 한다.”면서 “대화를 해도 조국통일을 위한 자주적인 대화를 하고 협력과 교류, 내왕을 해도 민족 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위한 협력과 교류, 내왕을 추진시켜야 한다. 외세와의 공조는 우리 민족의 화해와 단합, 자주통일을 방해하는 반 통일 반 민족의 길이다.”라는 주장을 하였다.)2)림동옥 전(前)통일전선부장본격적으로 대남 활동에 중추적 역할을 한 것은 2000년 정상회담 직전 임동원 전 국정원장을 비밀리에 북한에서 만난 의미를 덧붙여 설명)하기도 하였다.또한 북한인사 최초로 대한민국국회를 방문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70년대 초부터 서울에 여러 번 다녀갔고, 청와대도 여러 번 다녀갔다"면서 "국회 의사당도 여러 차례 지나갔지만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또한 "저는 북측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서 우리 인민들에게 부끄러운 면 있다"며 "지금 북과 남이 당국은 물론이고 인민들 간에도 교류협력이 활발하지만 남ㆍ북 국회만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언급하며, "2000년 6.15정상회담 뒤 북측 최고인민회의는 지지결의를 했지만 남측은 아직 지지 결의를 하지 않았다"며 "국회 차원의 슬기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그의 방문에서 가장 특기할만한 점은 2005년 축전 당시 정동영 통일부장관과의 만찬에서 즉흥시를 읊은 일이다. 당시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그를 ‘북에서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인물로 소개하였다.`남과 북은 하나`)우리는 서울을 보았다. 이국의 도시가 아니었다. 평양과 똑같은 민족의 도시였다. 우리는 한강을 보았다. 이국의 강이 아니었다. 대동강과 똑같은 강이었다. 우리는 또한 남산을 보았다. 보고 보아도 모란봉과 똑같은 산이었다. 우리 민족의 정서가 짙게 살아있었다. 아, 북과 남은 하나구나 서울과 평양은 평양과 서울은 똑같은 우리 것 우리민족의 것이로구나. 쭈욱해도 단번에 너무도 쉽게 통하는 우리는 정말 통일로 살아야할 하나로구나.또한 림동옥은 이 방문 당시 정동영, 임동원과 평양에서 3동회를 만들었다)고 밝혔을 뿐 아니라, 남자 대표팀 간 통일축구 당시 북한이 3:0으로 진 후 정동영 장관의 시장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세끼나 먹었는데 배가 고플 리가 있겠소.”라고 퉁명스레 답)하는 등, 남한을 찾은 북한인사 중 가장 돌출적이면서 화려한 발언을 남겼다.이후 2005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제16차 남북장관급회담에 참석한 정동영 회담과 금강산 관광 갈등 문제와 관련하여 조기 수습할 것을 토론하는 등 대남활동 전반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지속하다가 2
    사회과학| 2010.05.31| 9페이지| 1,500원| 조회(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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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자동차를 통한 독일문화의 이해
    독일자동차를 통한 독일문화의 이해1. 들어가며 : 독일 문화에 대한 접근방법으로서의 독일 자동차인간 문명의 산물인 자동차는 오늘날 대표적인 운송수단으로서 삶의 편리함을 가져다주고 있다. 그러나 자동차를 단순히 운송수단에 불과한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자동차를 통해 문화와 국민성을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접근방법으로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눈이 많이 내리는 스웨덴은 그 기후적 특성 때문에 튼튼한 자동차에 대한 수요가 많게 되는데, 이러한 수요에 대응한 자동차가 바로 볼보인 것처럼 말이다.나는 이렇게 자동차를 문화, 국민성, 기술력의 집약체로 간주하고, 독일의 자동차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독일에 다가가고자 한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명품인 독일의 유명한 4대 자동차)의 세계적 지위와 역사, 그들의 자동차 브랜드 네이밍의 의미, 독일 자동차의 디자인과 문화, 그리고 광고에서 나타난 특징들을 살펴보는 순서로 독일의 자동차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2. 독일 자동차는 어떻게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했을까?1) 2차 세계 대전과 독일 자동차많은 사람들은 독일 자동차 산업 발전의 이면에 제 2차 세계대전이 숨어있다고들 이야기 한다. 실제로 오늘날 세계의 3대 자동차 강국인 미국, 독일, 일본의 자동차 산업은 모두 제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성장하였다. 전쟁 준비를 위한 철강 산업의 발전은 자연스럽게 세계 최대의 철강 산업중 하나인 자동차 산업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독일의 전차 산업의 발전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발전했던 기술력은 전후 자동차 산업발전에 큰 바탕이 되었다. 그 밖에도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미국의 압력으로 군수공장을 중공업 혹은 자동차 공장으로 전환시켜야만 했는데, 이러한 국제적 배경들이 독일의 자동차산업 발전에 모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예를 들면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의 압력으로, 전투기 엔진회사였던 BMW는 비행기 생산을 포기하고 오토바이와 자동차 생산업체로 탈바꿈하게 된다.위와 같은 점은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을 겪은 후 독일, 미국과세 꼭지별을 내접 시킨 벤츠의 새로운 엠블럼이 사용되기 시작했고, 1989년 테두리가 조금 더 두꺼운 형태의 엠블럼이 나오기 전까지 56년간 사용되었다.3) 폭스바겐 그룹동그란 원안에 위에서 V자, 밑에는 W자가 새겨져 있는 엠블럼은 폭스바겐(Volks 국민+Wagen 자동차)의 약자로 만들어졌다. 즉, 폭스바겐은 독일어로 '국민의 차'라는 의미를 가지며, 대중을 위한 자동차 생산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표방한다.한편 폭스바겐그룹에 속하는 아우디의 경우 네 개의 고리를 1열로 연결한 모양의 엠블럼을 가지고 있는데, 자동차 수레 바퀴수를 나타낸다고 하는 해석도 있지만, 동그라미 4개는 각각의 자동차 회사를 의미한다고 한다. 아우디는 원래 독일 삭소니 지방에 있던 4개의 군소 메이커가 연합해 만든 회사로 아우디(Audi), 반더러(Wanderer), 호르히(Horch), 데카베(DKW)가 합병되어 아우토 우니온(Auto Union)이란 단일 회사로 1932년 설립되었다. 즉 네 개의 고리는 4개 메이커의 결속을 상징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폭스바겐에 흡수되어 브랜드 이름을 부르기 쉬운 아우디로 바꾸었지만 엠블럼만은 아우토 우니온 시절의 것을 그대로 쓰고 있다.4) Porsche방패 문양의 정 가운데에 페라리 엠블럼과 비슷한 말 그림이 그려진 다소 복잡해 보이는 디자인으로, 말 사육으로 유명하면서도 포르쉐 본사가 있는 지방인 슈트트가르트시의 문장에서 빌려온 것이다. 엠블럼이 담고 있는 노랑, 빨강, 검정의 색깔은 독일(혹은 게르만)을 의미한다. 아울러 방패 문양 내부의 무늬는 밭이랑을 표현하고 검은 말이 중앙에 위치해 있다. 즉, 엠블럼의 전체적인 의미는 슈트트가르트시의 검은 말이 밭이랑을 질주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독일 전 지역을 포르쉐가 질주하는 모습을 담고 있음은 물론 더 나아가 포르쉐의 검은 말이 전 세계의 모든 도로를 달린다는 의미로 해석된다.4. 자동차 모델명에서 나타나는 독일 자동차의 정신1)독일의 자동차 모델명① BMWBMW 모델 알 수 있다. 유럽의 대부분 자동차 모델의 경우도 그런 표기를 많이 따른다. 이러한 영문 이니셜과 숫자를 조합해 모델명을 표기하는 방식은 다른 후속 모델이 나오더라도 이름을 다시 지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어주고 그 이름을 통해 그 차의 성능이나 특성을 쉽게 알게 해준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Mercedes Benz의 모델 중 S-400이라는 모델명을 가진 차가 생산되었다고 했을 때, 우리는 4000cc엔진을 얹은 대형 세단 모델이 나왔을 거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모델명을 질서 있게 배열하는 방식은 바로 그들의 Ordnung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폭스바겐의 경우에는 숫자의 배열 대신 바람이름을 딴 모델이 많은 데 이 경우에도 바람이름이라는 대체적으로 일관된 모델명을 짓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의 질서의식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② Meister독일의 자동차 정비소 또는 시계수리점등에서 수리를 받고 기술자에게 “meister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그 말을 들은 기술자는 대단히 좋아한다고 한다. 자신을 meister라 불러준데 대한 자긍심이다. meister는 지금은 어떤 분야의 대가를 뜻하는 일반적인 단어가 되었지만 초기에는 기능장을 뜻하는 단어였다. 우리나라말로 옮기면 장인이라는 단어가 가장 유사하다.meister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도제제도를 알아야 한다. 도제제도는 기술과 인간교육의 병행을 통하여 기술전수의 물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장인정신이라는 정신적 측면의 계승까지 함께 이루어졌다. 장인 기간을 마치면 도장인 시작품을 동업조합에 제출하여 기능심사에 합격해야 했고, 그 이후라야 한 사람의 장인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을 거친 장인은 전문 기술자로서의 자기 직업에 대한 자존심과 애착이 매우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제품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판매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인이 제작한 제품은 좋은 품질을 보증하는 것이었고, 사회 일반에도 그들을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해주는데 인색하지 않은 풍토가 조성되었다.어있어, 전체적 질감보다는 기교적이고 화려한 라인과 이미지가 더 자동차를 돋보이게 한다는 것과 관련성이 있을 것이다.이와는 다르게, Porsche사의 911 Carrera는 세밀한 부분의 화려한 이미지를 과감히 생략하고, 전체적인 스타일의 명확한 선과 면의 구분을 강조하여 유선형의 날렵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이는 멀리서 보아도 금방 그 자동차를 알아볼 수 있도록 개성 있는 전체적 질감을 강조한 것으로 앞서 말했던 독일 자동차의 기후와 환경적 요인을 고려한 디자인인 것이다.자동차의 색도 마찬가지이다. 독일 자동차들은 전통적으로 무채색을 선호한 반면, 이태리나 프랑스의 자동차들은 원색을 선호하였고 같은 무채색)이라 하여도 독일 차들은 더 농도 짙고 깊은 색을 사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일조량에 따른 빛에 대한 국가별 사람들의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독일자동차의 외부 디자인은 독일의 기후와 지형적 환경 요소를 반영하고 있다.6. 자동차 내부디자인과 독일 문화 : 기능주의자동차 내부는 운전자에게는 차를 움직이는 명령을 내리는 조종석이며, 탑승자들과 교감할 수 있는 공간임과 동시에 음악을 듣는 감상실이기도 하며, 한적한 교외를 느긋하게 달리며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는 휴게실이기도 한 점에서 중요하다.자동차의 내부 디자인은 장시간 운전 시에 가장 피로를 적게 주면서도 마냥 안락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차의 현재 상태를 가감 없이 정확히 운전자에게 전달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집에서 소파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안락함과 동시에, 시속100km로 달리는 긴박한 현장감을 전달하여야 하는 딜레마적 상황에 빠지게 된다. 또 달리는 차 안에서 안전을 위하여 전방에서 시야를 뺏기지 않고 손을 뻗어 여러 기능을 작동시키려면 조작되는 레버나 버튼은 단순 명료해야 한다. 그러나 자동차 산업의 발달과 함께 소비자들의 욕구가 많아짐에 따라 다양한 기능과 미적 감각을 고려한 디자인에 대한 요구도 충족하여야 한다. 즉, 자동차의 내부는 기능성과 디자인을 람은 수개의 게이지 중에 무엇을 보아야 할지 몰라 시선에 혼란을 겪어야 할 것이다. 대쉬보드는 밋밋하며 가장 기본적인 버튼들도 어떻게 보면 무심하게 이 버튼이 무엇에 쓰이는 것인지 나타내주는 기호도 없이 덩그러니 배치되었다. 그 기호가 있다고 해도 너무 작아 처음 타는 사람이라면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불편하다.한편 의 페라리의 내부를 보면 이태리 특유의 유려한 선을 강조하는 디자인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쉬보드(Dashboard))에 층을 내어 멋을 부렸으며, 계기판도 오로지 시인성만 강조하여 큼직큼직하게 가운데에 배치한 포르쉐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오밀조밀 여기저기에 배치하였다. 또한 중요 게이지는 크게 부수적인 게이지는 작게, 그리고 점검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 게이지는 중앙에 배치하여 시선의 편안함을 꾀한다. 사진에서 보듯이 한 땀 한 땀 손으로 정성들여 바느질한 가죽 시트는 오너에게 ‘당신의 페라리는 이 세상에 한 대밖에 없는 예술품입니다.’라고 강조하는 듯하다. 전체적인 균형의 측면에서도 좌ㆍ우 대칭이 잘 살아있는 페라리가 더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사람의 편안함을 주는 것이 예술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페라리측이 더 심미적 측면을 고려한 듯이 보인다.실제로 포르쉐를 타는 사람은 포르쉐가 불편하다고 말한다. 안락하지 않다는 뜻의 불편함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 때문에 빠르게 달릴 수 있다고 한다. 빠르게 달리다 보면 시야를 아래로 떨어뜨리지 않아도 큼직한 게이지 속 빨간 바늘이 춤추는 것이 보이고 손을 뻗으면 잡히는 것은 기어 레버밖에 없으므로 빠르게 운전할 때는 평상시 불편했던 점들이 모두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보면 포르쉐의 내부는 독일의 기능주의적 측면에서 디자인 그 자체보다는 기능 효율의 극대화란 점에서 운전자에게 새로운 감상을 주는 심미적인 기능을 가졌고 이는 앞서 살펴본 BMW도 마찬가지이다. 요컨대 독일 자동차는 기능과 디자인의 모순을 기능적 측면에 중점을 둔 정ㆍ반ㆍ합 의 구조로 해결한 것이것이다.
    사회과학| 2010.05.07| 15페이지| 2,000원| 조회(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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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버전쟁의 시대가 오고 있다!1. 들어가며최근 독도 영토권에 대한 한·일 간의 분쟁이 거세지고 있다. 이러한 분쟁양상은 사이버 공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를 다룬 뉴스를 보면서 사이버전쟁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보도록 하자.)이 뉴스에서는 한·일 양국의 정부 사이트를 다운 시키거나, 교란 시키는 것 등을 사이버전쟁으로 개념화하고 있다. 이 뉴스 이외에 다른 기사들도 사이버전쟁을 개념화하여 사용하고 있으나, 그것들은 대부분 사이버테러를 사이버전쟁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사이버전쟁의 정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2. 사이버전쟁의 정의사이버전쟁(cyber war)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개척 분야’로 여겨질 정도로 아직까지 그에 대한 개념적 정의가 명확하게 확립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정보화가 날이 갈수록 고속도로 발전하게 되는 현실에서 미래에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전쟁의 양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어서, 그에 대한 정의가 학자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이론적 정의가 가진 공통점을 통해 사이버 전쟁에 대한 정의를 하자면, “사이버 전쟁이란, 상대 적국의 국가 기간 전산 시스템을 사이버 공간에서 공격을 통해 파괴함으로써 그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게 하거나 그 가치를 떨어뜨리는 방식의 전쟁”)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보다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으로는 정보전쟁(Information Warfare)이 있다. 정보전쟁은, 미사일이나 전투기 등의 가시적인 무기와 병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효율적이면서 완전하게 상대방을 제압해버린다는 점에서 미래의 이상적인 전투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전쟁에서 주요 공격목표가 되는 것은 컴퓨터에 의존하고 있는 방대한 군 조직이나 첨단 정밀무기들이다. 이러한 정보전쟁 중에서 전통적 군사전쟁의 개념이 강한 고강도 분쟁(high intensity conflict)을 ‘사이버전쟁’으로, 사회적 성격이 짙은 저강도 분쟁(low intensity conflict)을 ‘네트 전쟁’으로 나누어 유형화할 수 있다.) 즉능력이 쉽게 조작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앞서 보았던 뉴스에서처럼 국정홍보처의 설문조사가 일본 해커들에 의해 조작되었던 사실에 ‘국제적 망신’이라고까지 할 정도로, 정부는 국가안보와 관련된 국민의 정치적 지지를 쉽게 상실할 가능성이 보다 커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조작과 기만 형태의 대두에 따라 이를 사전에 감지하고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넷째, 사이버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방식을 넘어서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정보수집 및 분석 시스템이 요구된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사이버전쟁에서는 논리폭탄, 트로이목마와 같은 사이버무기가 사용되는데 이러한 무기들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쟁 대상국의 보안정보와 그 허점을 찾기 위한 분석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다섯째, 사이버공간에서는 정보활동이나 사고 등을 사이버전쟁과 구분할 수 있는 적절한 조기경고 시스템이나 평가방법이 없다. 따라서 현재 사이버전쟁 공격이 진행되고 있는지, 누가 공격을 하고 있는지, 공격이 어떻게 수행되고 있는지를 알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즉, 사이버전쟁은 사이버공간의 ‘익명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수면 아래에서 조용히 진행’되기 때문에 공격받게 되면 그에 대해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여섯째, 사이버전쟁에서는 별도의 전선(戰線)이 없다. 정보기술은 시·공간의 차이를 무의미하게 하므로 사이버전쟁에서는 기존 전쟁과는 달리, 전·후방이 동일하게 공격 대상이 된다. 국가 전체가 하나의 단일 시스템으로 구축되어 있다면 각각의 업무 영역인 통신, 전력, 유류저장과 전송, 금융 등 까지도 사이버전쟁의 공격대상이 될 수 있고, 그 파급효과도 강력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세계화의 진전으로 특정 국가의 정보망이 손실될 경우 그 파급효과는 주변 관련국가로 확산될 수 있다는 문제점도 있다.사이버전쟁의 특징결 과 분 석① 전쟁 수행비용이 저렴잠재적인 적의 범위 확대② 전쟁과 범죄의 경계가 불분명공격자, 피공격자, 책임자의 식별 곤란③ 사이버 공간에서 지각 능력을 조작하기가쉬워짐실제와 조작된 실체 시키는 방법이다.6) AMCW(automatic mobile cyber weapon)크루즈 미사일처럼 정보망을 자동항해하며 목표물을 찾아 파괴하는 프로그램이다.7) 악성 해킹 프로그램)가. 논리폭탄 (Logic Bomb)특정 날짜나 시간 등 일정 조건이 충족되면 특수 프로그램이 저절로 작동 돼 컴퓨터의 모든 정보를 삭제하거나 인터넷 등 온라인 사용을 방해한다. 최근의 논리 폭탄 중에는 원격지에서 보낸 전자 신호에 의해 작동되는 것도 발견되었다.나. 트로이 목마 (Trojan Horse)겉으로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바이러스와 같은 위험인자를 지니고 있는 프로그램으로 시스템프로그램을 불법 수정하여 해커가 원하는 기능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으며, 관리자 권한을 획득한 해커가 뒷문(Backdoor)프로그램과 함께 설치하게 된다.다. 인터넷 웜 (Internet Worm)인터넷에서 기생하는 프로그램으로, 일반 바이러스와 같은 성질이지만 특이하게도 스스로 감염대상 컴퓨터를 찾아다니며 자신을 복제시킨다. 시스템을 파괴하지는 않으나 통신망과 같은 자원을 소모해서 인터넷을 무력화시킨다.라. 바이러스 (Virus)컴퓨터 바이러스는 소프트웨어의 일종으로 사용자 몰래 실행되는 복사 프로그램이다. 단순 장난성 바이러스로부터 하드 디스크의 내용을 모두 지워버리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 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바이러스는 지난 1990년 2백종에 불과하였으나 지금은 3만 6천 여종이 넘으며 하루에 10종 이상이 탄생하고 있다.5. 사이버전쟁의 사례현재까지 국가 간 사이버전쟁이 발발한 일은 없어 사이버 전면전의 피해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사이버 해킹 범죄의 결과와 최근의 전쟁에서 사이버 공격이 활용되어 성과를 거둔 사례를 보면 어느 정도 사이버 전쟁의 피해규모를 예측할 수 있다.먼저 세계 각 국이 사이버전쟁의 가치를 인식하게 된 계기는 지난 99년 5월 코소보 전쟁이다. 당시 유고는 북대서양조약기구 전산망 및 미국과 영국군 전산망에 대한 대책을 내놓고 있으나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국은 인터넷 정보강국이면서도 인터넷 보안에는 최약국이라는 오명도 함께 갖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실제로 한국정보보호진흥원의 ‘해킹 바이러스 통계분석’이라는 2004년 통계에 따르면, 국내기관과 기업, 연구소, 대학 등에 나타난 해킹 피해가 무려 2만 6179건이었으며, 그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이에 대응하여 사이버 테러방지 관계 장관회의에서는 국내 주요정보통신 기반시설 보호를 위한 정보통신기반보호법을 2000년부터 시행하고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국장급을 위원으로 하는 정보통신 기반보호 실무협의회와 국가 사이버테러 대응협의회가 구성되어 운영 중이다. 한편, 국방부는 전산망과 군 지휘통제를 위한 C4I망을 인터넷과 분리하여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테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으며 군 정보관계기관의 임무/기능을 포함한 국방컴퓨터 긴급대응팀을 구성, 정보보호기술병과를 신설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체계가 매우 폐쇄적이고 비효율적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은 실정이어서, 이를 보완하는 새로운 대응체계로 전환하여야 할 필요성이 지적되고 있다.3) 사이버전쟁에 대한 능동적 대응방향)가. 범정부적 대응체계 구축사이버공격과 사이버전쟁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범정부적 대응체계의 구축이 우선되어야 한다. 현재의 대응체계는 정보공유가 매끄럽지 못하고 위계적이라는 한계가 지적되고 있는 것과 같이, 능동적인 대응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각 정부기관의 시스템 간에 정보공유가 완벽하게 이루어져야 하며, 어느 쪽에서 사이버공격이 시작되더라도 이를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의 수평적인 네트워크가 구축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전산망을 24시간 감시하고, 주요 대응 정부기관인 정보통신부, 국방부, 외교부, 국정원 간에 상시적인 협의체가 운영되어야 한다. 또한 유사시에는 민간기관과 함께 ‘위기관리체제’로 운영될 수 있는 유동성을 가져야 하며, 사이버전쟁 발생 가정 하에 다양한 위기 상황을 상정다. 이는 인권 측면에서 볼 때도 국가의 안녕과 평화라는 미명아래 어떻게 보면 허무하게 죽음을 맞는 군인의 인권을 크게 보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이버 전쟁의 유용성을 뒷받침해준다. 우리나라도 현재 C4I체계에 대해 국방사령부를 중심으로 집중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는 중인데, 이는 사이버전쟁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와 그 유용성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나. 사이버전쟁의 폐해사이버전쟁시대는 오히려 득(得)보다 실(失)이 클 수도 있다. 사이버전쟁의 특징으로 지적되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사이버전쟁의 강력한 파급효과이다. 즉, 인터넷 사용자가 많아질수록, 한 나라의 각종 기간산업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일수록 사이버 전쟁으로 야기될 수 있는 피해는 막대할 수밖에 없다. 점점 지능화되는 사이버 무기들은 오랜 세월 피와 땀으로 쌓은 지식과 정보를 눈 깜짝할 사이에 파괴할 것이며, 그동안 축적해 왔던 중요한 자산을 한 순간에 날려버림으로써 기존의 자원뿐 아니라 앞으로의 기술개발이나 노력에 대한 동기부여를 상실시킬 것이다.또 재래의 전쟁(전면전)을 하는 것보다 물적, 인적 자원의 피해가 덜 할 것이라는 것이 사이버 전쟁의 유용성에 대한 근거라면 이는 어디까지나 사이버 전쟁까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그 이상 전쟁이 확대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이다. 그러나 실제 전쟁이 발발했을 때, 사이버 상의 전쟁은 상대 국가에 먼저 타격을 주는 선제공격의 용도로 이용되고, 이후에 무력한 상대를 미사일 등의 각종 무기로 무참하게 공격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면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는 선제공격을 가하는 국가 입장에서 보면 몰라도 공격을 당하는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그 물적, 인적 자원의 피해와 손실은 이전과 마찬가지이거나 오히려 사이버 전쟁으로 인해 더욱 커질 수 있다. 과연 어떤 나라가 국가의 컴퓨터만 망가뜨리고 항복을 강요할 것인가? 기존의 군수산업을 위해서라도 사이버 공격만으로 끝내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교통, 통신, 전기 등 모든 시설이 오작동 한다면 제대로 된 .
    사회과학| 2010.05.07| 12페이지| 1,500원| 조회(1,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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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감상문] 마리포사
    영화 감상문그레고리오와 몬쵸, 그리고 새로운 스페인을 희망하다2004년에 개봉하여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성공한 영화 는 불과 반세기 전, 처참했던 동족상잔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어루만져 주며 한국인들을 위로했다.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 간의 이데올로기의 싸움, 미 ? 소 간의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적 상황이 낳은 것이었지만, 영화가 다루듯 당시 일반 민간인들에게 그런 고차원적인 이데올로기의 선택은 단지 살아남기 위한 ‘구분 짓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주인공이었던 두 형제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움직인 것이 아니라, 형제간의 우애에서 비롯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한국전쟁이 발발했던 6월의 마지막 주에 보았던 영화 도 이와 유사한 스페인 내전의 아픈 기억을 담고 있다. 이 영화도 고차원적인 이데올로기, 정치적 인 면을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는다. 조그만 마을을 배경으로 평화롭고 아름답게 흘러가던 영화가 마치 반전처럼 슬픈 결말로 이어지는 영화의 전개는, 당시 스페인 사람들에게 ‘반전’처럼 다가왔을 1936년의 내전을 보는 이로 하여금 느끼게 한다. 특히 영화는 순진한 꼬마 몬쵸와 백발의 노인 그레고리오, 사제(師弟) 간의 아름다운 유대관계를 주요하게 다루는데, 이들의 관계와 그 변화를 중심적으로 살펴보면서 영화를 개괄적으로나마 감상해보고자 한다.꼬마 몬쵸가 영화의 주인공이자 주요 시점으로 설정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 몬쵸는 천식을 앓아 학교에 늦게 진학하게 되고, 등교 첫 날 오줌을 쌀 정도로 학교와 선생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다. 하지만 몬쵸는 가정, 교회, 학교, 자연을 넘나들며 정신적으로 빠른 성장을 보이는 똘똘한 꼬마이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꼬마 몬쵸가 ‘새로운 스페인’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해보았다. 1930년대 스페인에는 제 2공화정이 선포되고 새로운 변혁의 희망을 가져보았지만,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던 스페인의 역사적 유산으로 인해 공화정은 얼마 가지 않아 보수 계층의 거부로 위험해지게 된다. 즉, 몬쵸가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인 천식은 스페인에 뿌리 깊게 남아있는 역사적인 유산인 것이고, 몬쵸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새로운 변화에 대한 기대와 거부가 공존하고 있는 당시 스페인의 두려움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몬쵸가 호기심을 가진 똘똘한 꼬마라는 설정은, ‘새로운 스페인’은 결국 변화할 것이라는 희망을 담고 있다.그에 비해, 그레고리오 선생은 ‘새로운 스페인’ 몬쵸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노년의 스페인’이다.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마을에서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퇴임식에서는 ‘자유를 잃으면 존재의 이유를 잃은 것’이라며 자유를 강조하는 연설은 한 그레고리오는 1930년대, 비로소 진보적인 변혁을 단행할 것을 결심한 스페인의 정신을 대변한다. 그러나 그가 ‘노년의 스페인’인 것은 이러한 진보적인 변혁을 성공적으로 마치지 못하고, 결국 1936년 내전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슬픈 역사를 동시에 대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레고리오와 몬쵸 간의 유대관계를 스크린에 담아내면서, 그레고리오의 정신은 몬쵸에게 이어져 ‘새로운 스페인’으로 성장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영화 줄거리의 대부분이 몬쵸와 그레고리오 간의 유대관계를 담아내고 있는 것도, ‘노년의 스페인 정신을 계승한 새로운 스페인으로의 성장’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레고리오의 교육방법과 그의 가르침은 매우 상징적이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레고리오는 매를 사용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아이들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스스로 배우게 한다. 그리고 그레고리오가 자연을 찬미하며 이야기한 ‘나비의 혀’도 ‘인간의 이성’을 은연중에 의미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인간의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기관, 그래서 도무지 있을 것처럼 여겨지지 않는 ‘나비의 혀’의 존재는, 역시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이성’과 유사하다. 꼬마 몬쵸가 이러한 ‘나비의 혀’에 대한 이야기를 놀랜 눈을 하며 듣는 장면은 그렇기 때문에 상징적이다.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강조한 그레고리오의 정신은 ‘나비의 혀’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몬쵸에게, ‘기독교에 예속되었던 스페인’에게 이성에 대한 깨달음으로 새롭게 이어지는 것이다.장례식에서 있었던 그레고리오와 몬쵸의 대화는 영화의 결말인 스페인 내전의 발발을 암시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스페인’인 몬쵸에게 가장 큰 의미를 전달한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천국과 지옥은 존재하는 건가요?”라고 묻는 천진난만한 몬쵸에게 그레고리오는 비밀 아닌 비밀을 알려준다. “지옥은 우리 마음속에 있어. 증오와 잔인함이 곧 지옥이지.”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고 존경의 마음으로 ‘양복’까지 선물했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며 ‘살기 위한 구분 짓기’를 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은, 그레고리오의 말처럼 ‘증오와 잔인함의 지옥’이었다. 이러한 슬픈 결말은 우리 한국전쟁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하여,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을 더 느끼게 했는지도 모른다.
    독후감/창작| 2007.07.21| 2페이지| 1,000원| 조회(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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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보수주의의 영향력 변화를 통해서 본 미국의 정치분석
    2000년 이후, 신보수주의의 영향력 변화를 통해서 본 미국의 정치 분석Ⅰ.서‘2000년 이후부터 최근까지의 미국 정치 분야의 변화’라는 광범위한 주제에서 어떤 세부주제를 찾아낼 것인가를 고심하던 중, “미국의 정치영역에서 가장 뚜렷한 변화를 보인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2001년의 9.11테러 이후 이어져온 부시정부의 일방주의적 외교정책과 그 배후세력으로 지목되고 있는 신보수주의, 소위 네오콘(Neocon: Neoconservatism)이었다.이들은 부시 집권 이전부터 존재해왔지만 현실정책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9.11테러 이후 부시의 입장이 강경해지게 되면서부터였고, 2004년 부시의 재집권 이후 2기 정부에서도 그 영향력은 계속 커져갔다. 그러나 2006년 10월의 중간선거의 공화당 참패, 대표적인 신보수주의자로 분류되었던 폴 울포위츠 세계은행 총재가 최근 사퇴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등, 신보수주의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쇠퇴하면서 미국 정치 분야의 또 다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이처럼 미국의 신보수주의는 최근의 미국 정치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세부주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판단 하에 본 보고서에서는 미국의 신보수주의의 형성과정 및 이념적 성격을 논의의 전제로써 살펴본 후, 부시정권에서의 영향력을 분석 ? 평가하면서 최근의 미국 정치 변화를 거시적으로나마 훑어보고자 한다.Ⅱ. 신보수주의의 형성과정 및 이념적 성격 분석1. 신보수주의의 형성과정2000년대 이후 부시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신보수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념이 형성되어온 과정을 간략하게나마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신보수주의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초반이다. 당시 신보수주의자로 지목되었던 자들)의 대부분은 1930-40년대에는 사회주의를 포용하는 진보적 이념을 가지고 민주당 내에서 출발했다가 1960년대 이후 공화당으로 옮겨가는 반진보(antiliberalism)의 사상전환)을 에서 네트워크를 형성해 가면서 공고해져갔다. 1970년대 후반 카터 행정부 시기는 신보수주의자들이 민주당을 떠나 공화당으로 옮겨가고 보수주의와 결합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카터 행정부는 미국 경제를 스태그플레이션에서 구해내지 못하면서 뉴딜정책의 실패를 각인시켰고, 특히 소련과의 데탕트를 추구하면서 ‘미국과 자유민주주의의 안전’을 위태롭게 했다고 신보수주의자들은 진단했던 것이다.신보수주의자들은 1980년 선거를 통해 레이거노믹스와 대소 강경정책을 옹호하면서, 동시에 레이건 행정부에 입각하게 되어 현실정책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한 때, 소련의 해체 및 사회주의의 붕괴로 인해 신보수주의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을 것처럼 예상되었으나, 신보수주의자들은 문제의식을 보다 확대시킴으로써 여전히 유지되어 갔다. 즉,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도 소규모 후진국가들의 국제적 안보 위험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일방적이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그리고 2000년 선거 결과 다시 공화당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신보수주주의자들 상당수가 부시의 외교팀에 참여하게 되었다. 부시 행정부 초기 미국의 외교정책에 신보수주의의 영향력이 컸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초기의 정책은 현실주의적 색채가 보다 강했으며, 클린턴 유산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9.11테러와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안보 위협을 증강시켰고, 신보수주의자들의 영향력 또한 부시행정부 내에서도 급증하게 되었다.2. 신보수주의의 이념적 성격신보수주의의 형성과정이 매우 복잡하게 이루어졌듯이, 신보수주의의 이념적 성격을 명료하게 규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이 학계에서는 신보수주의가 체계적인 정치 이념인지, 또는 하나의 현실 정치적 입장인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본 보고서에서는 이에 대한 평가는 유보하고, 신보수주의로 일컬어지는 것들의 이념적 성격을 간략하게 짚어보고자 한다.우선 신보수주의는 당시의 현실 정치적 문제들에주의의 위기와 이를 극복하는 그들의 논리, 그리고 9.11테러를 기점으로 역전되는 상황은 이를 설명해주는 사례라 하겠다. 같은 맥락에서 신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은 상대에 대한 비판을 근간으로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사라지면 그 타당성의 근거도, 존재 이유도 없어진다는 부정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신보수주의자들이 점진적인 사회경제적 개혁과 적극적인 대외적 개입이라는 다소 모순되어 보이는 주장을 일관된 논리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신보수주의는 임시변통적이고 전략적인 대응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이다.신보수주의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이는 지적 전통은 다양하다. 우선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것은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의 영향이다.) 스트라우스는 탈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이상주의에 경도된 지식인들이 부당하게 유토피아적 메시지를 확대 재생산하는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지적하고, 이 때문에 기성질서와 사회의 기본원리가 무너지고, 이는 곧 사회의 붕괴로 귀결된다고 주장한다. 신보수주의자들은 민주당의 진보세력들을 스트라우스가 지적하는 ‘이상주의에 경도된 지식인’으로 규정하고 대응했던 것이다. 또 신보수주의자들의 적극적 개입주의에서는 ‘민주주의와 평화의 세계적 확산’을 주장하는 윌슨주의의 영향과 함께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적 신조의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을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의 존재로 보고, 이외의 존재는 열등하거나 타락한 존재로 보는 관념, 적과의 타협을 일체 부인하고 적과의 투쟁을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예외주의적 경향은 부시정권의 ‘악의 축’과의 전쟁 선포를 연상케 한다.이처럼 신보수주의는 진보주의에 대한 공격적 대응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다양한 이론들과 접목시킴으로써 체계적인 틀로 묶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이론들과 세계관들이 일관되게 수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이러한 이념적 일관성에 관한 한계는 현재 미국에서 신보수주의의 퇴조현상을 설명해주는 하나의 변수라는 생행정부의 외교정책팀은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폴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등 강경보수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서 딕 체니와 럼즈펠드는 전통적 보수주의자였음에 반해, 폴 울포위츠는 신보수주의자라는 차이점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은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안전과 관련된 국제 문제에만 개입할 것을 주장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여 소위 ‘극단적 민족주의자(assertive nationalist)’로 불리기도 한다. 반면 울포위츠와 같은 신보수주의자들은 앞서 보았듯, 미국이 보다 적극적인 대외 개입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도덕적 선’으로서의 미국의 패권을 강조한다.)그동안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결정지은 것은 극단적 민족주의자들과 신보수주의자들 간에 형성된 ‘보수연합’이다. 대외정책에 대한 기본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양자는 세계무대에서 미국의 행보를 제약하는 다자주의와 국제협약을 거부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권 초기에는 체니 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자들의 힘이 신보수주의자들을 압도했다. 그러나 이 같은 역학관계는 9.11 테러를 거치면서 역전되었다. 신보수주의자들은 테러 직후 미국인들의 고조된 공격적인 애국주의에 힘입어 행정부 내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보다 분명해지면서 신보수주의자들의 영향력의 확대로 이어지게 되었다.2. 부시의 재집권과 신보수주의2004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유권자들의 대통령 후보 선택 동기가 이라크 전쟁 사안의 이슈에서만 비롯됐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여느 대통령선거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게 선거 때마다 다루어져 왔던 이슈들, 즉 고용사정, 동성애, 감세, 총기규제, 소수자 보호조치 등의 이슈들이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거 의제에 관한 유권자들의 태도 변화는 그다지 크게 일어나지 않았고, 따라서 공화당의 부시와 민주당의 케리 후보 사이의 치열한 경쟁에서 일방적 우세를 견지할만 케리 후보는 부시 대통령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의 부당성을 계속 공격하였고, 부시 대통령은 이에 대응하였다.이때 신보수주의자들은 이라크에서 대량 살상무기를 발견하지 못한 사실만으로 이라크 전쟁의 정당성을 훼손해서는 안 되며, 후세인이 중동지역은 물론 미국 국익에 반하는 조치들을 수없이 많게 실행해온 연속선상에서 대량 살상무기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논지를 폈고, 부시 대통령도 이러한 논조로 대응하였다. 부시 대통령은 오히려 이라크 전쟁 수행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선거 공세 수단으로 이용하기까지 한 것이다.대통령 선거에서 이라크 전쟁과 이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대처에 관해 미국인들은 양극화된 의견을 보여, 심각한 여론분열을 야기하였다. 그러나 적어도 부시 대통령과 이라크 전쟁을 주도해 온 신보수주의 선거 전략이라는 측면에서는 부시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을 확실하게 응집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이는 부시의 재집권에 결정적인 영향으로 이어졌다. 즉, 이라크 전쟁을 통해 다져놓은 강력한 지도력에 대한 미국인들의 회고적 투표의 결과에 힘입어 부시 대통령과 신보수주의자들은 재집권에 승리하게 된 것이다.)3. 부시 2기 행정부에서의 신보수주의의 퇴보이렇게 부시의 재집권에까지 큰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되는 신보수주의자들은 2006년에 들어서면서 쇠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조짐을 보여주는 최초의 기사)는 2006년 2월에 쓰여진 것으로,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이 ‘네오콘(신보수주의)’에서 ‘네오리얼리스트(신현실주의자)’ 노선으로 바뀌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동의 없이 이라크 공격을 단행했던 부시 행정부가, 이란 핵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를 설득해 동의를 받아내는 등 무력 사용보다 외교적 해결을 하고자 하는 태도로 변화했으며, 이는 미국 외교정책이 네오리얼리스트 주도로 바뀌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하고 있다.2006년 10월 7일에 실시된 중간선거는 신보수주의자들의 퇴보를 보다 분명히 하는 결과를
    사회과학| 2007.06.16| 6페이지| 1,500원| 조회(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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