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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버넌스,정치 그리고 국가]서평
    2005‘ 1학기 서평거버넌스, 정치 그리고 국가경제학부 2003-10696 이주은1. 서론거버넌스라는 개념은 1990년대 이후 널리 쓰이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흔히 행정의 주체로 인식해오던 ‘정부’보다 넓은 개념으로 국정운영에 관련되는 정부를 비롯한 시장과 연결망, 각종 제도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거버넌스라는 용어 자체가 학자마다 다른 의미로 쓰이고 포괄범위가 달라지는 등 개념에 혼란이 있는데 이 책에서는 거버넌스에 대해 국가 중심적 접근방법을 적용하여 거버넌스를 여전히 “주로 국가가 목표를 규정하고 주요 사항에 대해 우선순위를 정하는 선도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 국가의 재정적 위기, 시장 지향으로의 이데올로기 변동, 전지구화 국가실패 등의 환경 변화에 따라 국가의 역할이 재조정되고 있으며 외면적으로 국가의 역할과 규모가 축소된 것으로 보이지만 저자는 이를 국가의 쇠퇴로 보지 않는다. 공공문제 해결에 있어 국가는 여전히 중요하며 국가를 대체할 만한 민주적 정당성과 역량을 가진 라이벌이 없다는 것이다. 국가가 권한을 위임시키고 역할을 조정하는 것을 국가의 쇠퇴로 취급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이는 국정운영을 환경변화에 맞추어 강화해가는 새로운 전략이라는 주장이다.저자는 거버넌스 개념에 대한 설명과 90년대 무렵부터 주목되기 시작한 ‘신거버넌스’의 등장배경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책을 시작하고 있다. 1편에서는 거버넌스에 대한 다양한 사고방식과 다양한 거버넌스 이론들을 살펴보고 우리가 지금 거버넌스에 관심을 기울이는 배경에 대해 말하고 있다. 2편에서는 국가 권력의 상향적?하향적?외부적 이동에 대해 살펴보고 이러한 권력의 이동이 국가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에 대한 3가지 시나리오를 살펴본다. 그리고 3편에서는 환경이 크게 변화하는 전환기 국가에 있어서 국가강도와 적응성과 관련하여 국가의 강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유형별로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국가와 거버넌스의 관계를 재고찰하고 있다.이러한 책의 편제에 맞추어 저자의 주장을 간단히 살펴보고, 책에 나타난 국내?국제환경의 변화에 따른 국가의 국정운영 전략의 변화-신거버넌스-가 현재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 발전방향은 어떠해야 할 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2.본론거버넌스를 바라보는 시각은 구조, 과정, 이론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며 이들은 계층제, 시장, 연결망, 공동체라는 국가?사회의 주체들과 전통적 권위, 자율성, 자동조절장치, 정책 도구, 합리적 선택 등 거버넌스의 운영 원리에 대하여 다른 시각을 나타낸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더라도 공통적인 것은, 거버넌스는 정부와 시장과 시민사회를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며 서로의 참여와 협력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국가와 사회가 유대하여 거버넌스를 창조하는 것의 목적과 의미는, 국가의 한계를 이해하고 변화하는 조건 속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정부를 창조하려는 것이다. 변화하는 조건이라는 것은 국가의 재정적 위기, 시장 지향 이데올로기로의 이동, 전지구화, 국가실패, 신공공관리의 출현, 복잡성의 증가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로 국가는 더 이상 예전처럼 사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강한 통제력을 가진 큰 국가로 역할할 수 없게 되었다. 즉 “우리가 신거버넌스라 부르는 방향잡기, 조정, 목표설정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만 지배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사회가 천천히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는 그 환경에 적응하여 거버넌스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2편에선 1편을 바탕으로 도출된 거버넌스의 개념을 바탕으로 정치 권력의 이동과 거버넌스의 세 가지 시나리오를 논의하고 있다. 권력 이동은 정치 체계 안에서 지역으로의 하향 이동, 국제 레짐으로의 상향 이동, 주변 제도?민간 영역에로의 외부 이동 세 가지 형태로 크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 권력의 이동에 따라 국가 권위가 재조정되지만 국가의 능력은 축소되지 않는다는 것이 거버넌스 이론의 핵심이다. 국가 권위의 재조정은 통제의 재강조, 하위정부?국제정부 등 다른 대안들의 허용, 공동체주의?심의민주주의?직접민주주의 등 시민의 참여 확대라는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통제의 재강조가 아니라 다른 대안들을 허용하는 시나리오일지라도 이는 국가의 쇠퇴가 아니라 국가에 의한 허용에 불과하며, 국가는 여전히 시장이나 지방 기구가 할 수 없는 제도적 기반 마련과 조정 등의 역할을 수행하는 거버넌스의 중심축인 것이다.그리고 3편에서는 이렇게 발전시킨 거버넌스 논의를 바탕으로 현실 국가들에 적용해보고 국가 강도의 결정 요소가 무엇이며, 또 거버넌스를 위한 강한 국가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거버넌스의 등장과 관련한 국가의 강도 변화를 ‘강한 국가가 여전히 강한 경우’, ‘강한 국가가 약해진 경우’, ‘약한 국가가 강해진 경우’, ‘약한 국가가 여전히 약한 경우’의 네 가지 모델로 나누어 분석한다.이상이 대략적인 이 책의 내용이며,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국제적인 환경의 변화에 따라 국가사회를 보다 보다 잘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에 변화가 있어왔기에 신거버넌스 논의가 등장하였고 국가 수준이 아닌 지방정부, 국제레짐, 시장, 시민공동체 등 다양한 수준의 주체를 포괄하는 거버넌스 방식의 거버닝이 이뤄지고 있지만 이러한 변화의 흐름 역시 국가가 주도하는 것이고 국가의 능력은 결코 쇠퇴하지 않는다는 점이라 생각한다. 저자가 국가 주도의 거버넌스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만큼, 국가의 국정주도와 능력 유지에 대한 그 논의를 받아들이면서 국가와 거버넌스의 발전방향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정부의 힘이 유지되면서 보다 참여적 형태의 거버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현재 국가 행정의 변화방향이라 할 때, 중요한 것은 국가가 여전히 거버닝을 주도한다는 것보다는 어떤 방향으로 국정 운영을 주도하고 있으며 어떤 주체의 참여와 연결망이 강화되고 있느냐 하는 점이라 생각한다. 국가가 집행보다는 방향잡기, 즉 목표설정의 역할로 이동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그 목표설정의 방향이 크게 보아서는 ‘국가의 적응성, 경쟁력, 발전’으로 이전과 같을 수 있지만 보다 하위의 수준에서는 달라졌으리라는 것이다. 국가의 역할을 전통적인 국방?치안 등의 역할과 생산 역할, 복지?재분배 역할의 크게 세 가지로 볼 때 처음의 것은 어느 국가에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뒤의 두 가지 중 어느 것에 중점을 맞추느냐가 국가별로 차이를 보일 것이다. 전 지구화가 진행되고 시장 지향의 이데올로기로의 이동이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전환기적 시점에서는 대부분의 국가가 생산, 즉 경제 성장에 국가의 역할을 설정하는 시장주의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국가의 전략적 변화를 거버넌스라 볼 때, 지금의 거버넌스 역시 시장지향적이며 시장 중심의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으리라 보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경제 성장을 중시하는 정도를 넘어서 사회 전 영역의 시장화가 추구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정부, 국가, 사회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전 지구화 시대에 경쟁력을 갖추어 국가를 강력하게 유지하는 기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가격원리가 지배하는 시장메커니즘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최선의 방식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교육이 완전히 시장화가 되어버리면 사회에 극심한 차별과 불평등, 그리고 그 세습이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거버넌스에서 국가가 여전히 비대체적이고 차별적인 역할을 한다면, 그 역할은 이러한 불균형한 거버넌스의 균형을 맞추고 조정하면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경쟁력을 키워나가는 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불균형한 거버넌스의 균형을 맞춘다는 것은 단순히 정부가 소수의 입장을 커버한다는 데서 더 나아가 균형적으로 다양한 의견이 반영되는 거버넌스를 형성해나가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책의 2편에 나온 ‘공동체주의, 심의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의 논의를 완전히 수용하진 않더라도 현실적으로 고려해볼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방자치가 시?군?구 이하 단위에서까지 시행되고 정보화를 통해 의견공유의 장이 창출된다는 전제 하에서라면 국민의 직접적 참여 확대는 반드시 이상적이고 규범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거버넌스에는, 대의제에서 간과되기 쉬운 ‘가장 많은 수가 아닌’ 사람들의 이익이 반영될 제도적 장치가 아직 미흡하고 시장 지향적 이데올로기 속에 운영되는 거버넌스에서 국민들의 삶의 질에 대한 관심과 정책이 유지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정부와 기업 등 시장 중심의 참여가 이루어지는 거버넌스에 국민의 직접적인 참여가 일정 수준에서 필요하다고 본다. 거버넌스는 그에 대한 공정한 참여의 제도화, 정치 제도의 뒷받침, 다양한 가치관의 투입 등이 전제될 때 국가의 경쟁력 확보에서 더 나아가 그에 걸맞는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가능케 할 수 있을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7.01.04| 4페이지| 1,000원| 조회(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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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학 원론]루소, 버크, 마르크스의 정치적 공동체
    정치는 공공의 수단에 의해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의 공공 의 범주에 해당하고 정책 에 영향력을 받는 사람들의 무리를 정치적 공동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즉 정치적 공동체는 정치가 이루어지는 단위로서 어떤 사회의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다. 한 사회에서 정치적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구성원들이 어떤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는가 등은 그 사회의 정치제도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 공동체는 공동체로서의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특수성, 귀속성, 확장성이 그것이다. 모두에게 개방된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가 요구하는 특성(취향, 국적, 민족 등)을 가진 사람들만이 속한 집단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라기보다는 특수하다. 또한 공동체는 그 구성원이 무엇을 하는지보다 누구인지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성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귀속적인 것이다. 그리고 한 두 가지 사안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성원들이 언제나 어떤 문제에든 서로 협력하고 의지하려는 점에서 확장성을 가진다. 이러한 세 가지 특징은 공동체의 보편적인 특징이며 정치적 공동체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하지만 그 이상의 특성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자신의 정치이념에 따라 서로 다른 견해와 분석을 내놓게 된다.우리가 정치적 공동체와 관련해 의견을 살펴보고자 하는 학자는 루소, 버크, 그리고 마르크스이다. 이들은 각기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의 대표적이고 원류적인 학자들이다. 각자의 정치 이념에 따라 이들은 각기 다른 관점으로 사회와 인간을 바라보았고, 자연히 그들이 그린 바람직한 정치적 공동체의 모습도 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어느 학자의 이론도 있는 그대로 현실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현실에 영향을 끼치지 않은 이론도 없다. 그들이 살아가던 시대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현재 우리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생각들과는 전혀 다른 견해도 있고, 현실성이 없다고 느껴지는 면도 분명 있다. 하지만 그 이론들을 살펴보고 현실에 비추어보는 모습 그리고 그로부터 그들이 이끌어낸 이상적인 공동체의 상을 살펴보도록 하자.루소는 개인과 그 감성, 자유를 중요하게 바라봤다. 그래서 교육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도 이성을 중시하고 사회에서 형성된 개념들을 주입해야 한다는 당시의 보편적인 입장에 반대해, 개인을 존중하고 타고난 성질을 발현시킬 수 있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에 관한 그의 견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개인에 대해 매우 급진적인 자유주의자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공동체에 대해 철저한 신봉자였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개인의 자유와 개성, 감성을 존중하고 그것들을 추구하려 할수록 공동체의 필요성은 명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강력한 공동체 속에 개인의 자유가 침해될 것이라는 당연한 반론들에 대해 일반의지 라는 개념으로 공동체 속의 개인의 완전한 자유를 설명한다. 루소에 의하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개인들은 일반의지 를 자신들의 특수이익보다 항상 상위에 놓는다. 이는 자발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일반의지 는 모두의 의지 {) 모두의 의지 는 일반의지 와 달리 사익을 추구하는 개별적 이익의 총화이다.와 달리 공익만을 목적으로 하므로 그것에 동의할 때 진정한 자유가 보장되며,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개인은 공동체 속에 생명과 재산의 위협을 받지 않고 자연상태에서 보다 더 자유로울 수 있고 또한 설사 공동체에 의해 자유가 제한되더라도 그것은 자발적으로 동의한 일반의지 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이렇게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반의지 에 대한 자발적 복종이라는 방법으로 성립된 사회가 그 본래의 목적을 수행하도록 하는 이상적인 정치적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 이것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일반의지 에 대한 이해이다. 루소는, 어느 사회에서나 공통된 이해가 있기 마련인데 이것이 많을수록 그 사회에선 일반의지 가 형성되기 쉽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루소는 의지 는 바람직한 공동체의 형성과 유지의 필수조건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제도는 직접민주주의의 형태를 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루소는 사람들이 사회를 자발적으로 형성했기에 사회를 다스리고 변화시킬 수 있는 권리-주권-이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했고, 주권은 양도될 수 없다고 했다.{) 전체의사만이 국가의 힘을 공동 이익이라는 국가 설립의 목적에 따라 지도할 수 있으며 사회 는 오직 이 공동 이익을 기반으로 통치되어야 한다. 따라서 주권은 오직 전체 의사의 행사이 므로 결코 양도될 수 없고, 또 주권자는 오직 집합적 존재이므로 그 자신에 의해서만 대표될 수 있다고 루소는 생각했다. 권력은 이양될 수 있지만 의사는 그렇지 않다고 보았다.또한 그는 정당정치에 반대했는데, 정당정치 하에서는 다수의 의견도 결코 일반의지가 아니라 특수당의 이익에 불과하게 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즉, 그는 특수이익이 일반의지를 침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특수한 이해와 목적을 가지는 정당의 존재를 경계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일반시민의 다수결에 기반하는 직접민주주의의 한계도 인식하고 있었다. 다수가 원하는 것이 반드시 다수에게 이로운 것은 아니라는 점이 그것이다. 진정으로 자신에게 이로운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만한 지식과 판단력이, 특히 그 시대에 일반 민중들에게 갖춰져 있지 못함은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현명한 소수에 의해 일반의지가 대표될 수도 있고-그 소수자는 다수의 구성원들보다 그들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더 잘 보장해줄 수 있으므로- 그것이 정당하다고 말했다. 즉, 그는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동시에 비상시의 독재에 대한 가능성을 열고 전체주의의 사도 역할을 하기도 한 것이다.버크는 인류는 현명하지만 개인은 그렇지 못하다고 했다. 진실이나 진리, 법칙 등은 자명한 것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 불완전하게 확인되고 축적되는 것이라는 경험주의적 입장이 버크가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기본적 관점이다. 그렇기에 그는 시간과 그로 인한 다양한 경험을 보유한 인류 의해 타당하다고 입증된 종류의자유만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관점으로 사회와 제도를 바라본 버크는 루소와 달리 사회가 인민prople을 만든다고 하였다. 인간의 수 그 자체는 집단적인 능력을 갖지 못하며 인민people의 관념은 바로 단체의 관념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인위적인 관념이며 다른 모든 법적인 허구와 마찬가지로 공동의 동의에 의해 만들어지기에 사람들이 국가에게 그 단체적 형태와 능력을 가져다준 원초적 게약을 파기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인민이 아니게 된다. 특정한 사회에서 전해 내려온 관습에 동의하고 그 안에 존재함으로써 느슨한 개인의 집합이 인민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관습은 시간의 시험을 이겨내고 경험적으로 입증된 것이기에 개인이 그에 따르는 것이 옳다. 그렇기에 버크는 여태까지 축적되어온 가치나 관습을 완전히 혁파하는 프랑스 혁명과 같은 혁명은 사람들에게 해가 된다고 여겼다.{) 버크는 그의 저서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에서 가장 바람직스러울 만큼 좋은 것에 매우 근접했던 헌법의 요소들 을 전복시켰다는 이유로 프랑스인들을 비난했다.버크는 경험을 중시하였고, 경험이 축적되며 이어져 온 사회가 그 구성원들을 만드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개인의 판단력과 지식에 대한 한계를 분명히 긋고, 사회의 축적된 지식과 관습 등을 중요하게 여긴 버크에게 바람직한 정치적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 경험주의에 입각하여 과거로부터 내려온 것을 송두리째 뒤엎는 것-혁명-을 경계하고, 그 구성원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정도의 느린 변화를 적절하다고 여긴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치적 공동체는 루소의 것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버크는 정치도 경험이 있는, 자격있는 전문집단에 의해 행해져야 제대로 운영될 수 있다고 봤다. 그렇기에 그는 간접민주주의를 옹호했다. 그는 정치인들이 그를 뽑은 국민의 기대와 다르게 행동할 수 있으며, 그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버크의 가장 자주 인용되는 원리 중 하나는 그가 브리스톨의 선거민에게 행한 연설에서 주장했 던 원리인데, 어나가는 것은 지방의 목적이나 편 견이 아니며 전체의 일반적 이성으로부터 얻어지는 일반적 선이라고 했다. 선출된 의원은 브 리스톨의 구성원이 아니라 의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이것은 의회를 단일한 국민의 숙의 기관으로서 전체의 이익이라는 단 하나의 이익만을 갖는 것으로 볼 때, 그리고 의회의 의원들이 정당의 명백한 강령에 의거하여 선출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에 비춰볼 때 합당한 것이었다. 버크가 살던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그의 정치적 견해들은 상당히 현실적이고도 합당하다. 다만 버크가 간과한 것은, 소수의 전문가-엘리트가 언제나 사회 현실을 제대로 알고 적합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점과 엘리트는 변화가 요구되는 시점에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변화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즉, 보다 국익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려면 소수 엘리트가 정치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질적으로 그러한 정치 제도가 오히려 다수의 이익을 침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마르크스는 과학적 방법으로 사회 움직임의 법칙을 발견하고자 했다.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계급적이고 역사적이다. 유물론과 변증법을 토대로 마르크스는 역사발전의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생산력의 발전은 생산관계{) relations of production: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소유관계(하부구조)를 변화시키고 이것이 사회(상부구조)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사회는 다시 인간에게 영향을 끼친다. 인간의 행위는 사회적 산물이며,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태까지의 역사에서 언제나 직접 생산자는 노동의 재생산이 가능할 정도 의 몫만을 받고 노동으로 인한 잉여가치{) 노동자들이 노동 외에 달리 택할 길은 굶주림이기에 그들은 자기들이 생산하는 것의 가치 전 부를 요구하지 않고 그저 참을 만한 생활 수준을 가능케 할 만큼만 요구한다. 그런데 노동자 들이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부의 양은 그들이 노동해서 생산할 수 있는 부의 양보다 훨씬 적다. 즉, 노동자들의 노동력 가치불렀다.
    사회과학| 2005.10.31| 7페이지| 1,000원| 조회(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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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상,윤리]탈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생각
    소크라테스는 과연 옳은가교과목:사상과 윤리소크라테스는 어째서 탈옥하지 않았나. 그것은 한마디로, 그가 사람은 언제나 옳은 행동만을 해야 한다고 설파하고 다녔으며 탈옥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탈옥을 권하러 온 크리톤은 일단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하게 가만 둔다면 많은 사람들이 크리톤을 비롯한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을 비난할 것이라고 말문을 연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대중의 의견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오로지 전문가의 의견만을 생각해야 한다고 대꾸한다. 우리는 어떤 의견에는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어떤 의견에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그리고 대중의 의견은 후자이다. 단 한사람일지라도 전문가의 의견에 따라야 하며 전문가가 아닌 대중의 의견은 존중하는 것은 결국 화를 불러온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탈옥 문제가 대중의 의견에 휘둘릴 경우 영혼(정의에 의해 향상하고 부정에 의해 파멸하는 것)에 화가 미칠 것으로 판단한다. 그렇기에 오직 정의와 부정에 관한 전문가의 의견만을 참고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탈옥의 문제는 옳음과 옳지 않음의 문제로 수렴된다. 탈옥은 옳은가, 옳지 않은가? 우선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에게 누구나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부정을 행해서는 안된다. 라는 (그에게 있어서의) 진리에 대한 동의를 얻는다.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그것은, 부정을 부정으로 갚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포함한다. 이것이 옳음과 옳지 못함의 논쟁, 탈옥의 정당성 여부를 따지는 논쟁의 출발점이다. 이러한 전제 위에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옳다고 동의한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옳은가 옳지 못한가? 이 질문이 크리톤 편의, 말하자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옳지 못하다 라고 크리톤이 대답한 순간 소크라테스는 감옥에 남으려는 자신의 생각이 변치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국민이며, 떠날 수 있음에도 아테네에 계속 머물러왔다는 것은 그가 아테네라는 국가와 그 국법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되며 그의 사형을 결정한 것은 국가와 그 국법이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옳다고 인정해온 국가와 국법을, 그들이 내린 결정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 자신이 잠정적으로 옳다고 동의해 온 법을 어기는 것은 옳지 못하기에. 설사 국가나 국법이 소크라테스에게 옳지 못한 판단을 내렸다해도 그것은 상관없다. 무엇보다도, 부정을 부정으로 갚는 것이 옳지 못하므로. 옳음 에 대한 그의 철학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어떻게도 탈옥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비쳐진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정말 그의 논리는 확실한가? 그는 정말로 옳은 이야기를 하고 옳은 판단을 한 것일까.다수의 의견에 대한 배제에서부터 우리는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다수의 의견에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을 진리라고 고집하는 태도에도. 어떤 의견을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거기에는 다수의 잠정적 동의가 전혀 필요 없는 것인가-와 같은 문제들. 그러나 여기서부터 딴지를 걸기 시작하면 소크라테스에게 반대할 순 있어도 그를 설득할 순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의 전제를 인정하고 거기에서부터 그의 생각에 대해 논하는 것이 보다 논의하기 용이하고 의미있으리라 생각한다. 누구나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부정을 행해서는 안된다. 는 것을 일단 논의의 바탕으로 두자. 이제 우리 역시 탈옥의 옳음과 옳지 못함의 여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대화의 준비가 된 우리에게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옳다고 동의한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옳은가 옳지 못한가? 여기서 옳다고 동의한다, 라는 행위에 몇 가지 조건을 달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정말 나의 신념에 맞는 판단을 할 수 있을만한 충분한 정보가 주어졌어야 하고 동의의 과정에 권력관계에 의한 어떤 압력도 있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조건들이 만족된-관련된 대부분의 정보가 주어지고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한- 상황에서 옳다고 동의한 것이라면 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와 국가(국법)의 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조건들이 만족된 상태에서 동의가 이루어졌나? 그렇지 않다. 소크라테스와 국가(국법)는 명백한 권력관계에 놓여있다. 소크라테스는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나라와 조국이 명하는 것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되네. 너는 조국을 설득하거나, 그 명하는 바를 무엇이나 행해야 해. 라는 말들, 거기 녹아있는 가치관 자체가 이미 소크라테스와 국법 간에 평등한 관계, 자유로운 선택이 불가능함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국법이(거기에 따르는 것이) 그 국민들에겐 항상 옳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 우리는 많은 문제를 제기해볼 수 있다. 아테네가 소크라테스에게 아름다운 법을 지닌 나라로 비쳐지기까지 법이나 제도에 한 번도 수정이 가해진 적이 없었는가? 소크라테스 당시의 아테네는, 그 이전의 아테네가 명하는 대로 따랐다면 결코 존재할 수 없었다. 즉, 나라와 조국의 명에 무조건 따른다면 인류 사회에 발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설득보다는 이전의 법이나 제도에 대한 거부, 개혁, 혁명을 통해 이루어진다. 게다가 조국을 설득한다 라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 조국을 설득하는 과정에 범법이 전혀 없는 것이 가능한가. 국가의 어떤 면이 마음에 안들고 바뀌어야 할 필요성을 느낄 때 그것이 법과 관련없는 것일 가능성이 대체 얼마나 되는가. 그렇다면 조국의 결정에 문제를 느끼는 순간, 그리고 거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그는 나라와 조국의 명을 어기는 꼴이 된다. 국가가 따르라고 만든 법을 옳지 못하다 라고 말하는-조국을 설득하는-자체가 이미 조국의 명을 어기는 행위인 것이다. 즉, 국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조국의 명(법)을 어기거나 자신이 옳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을 지키거나- 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볼 때 둘 다 옳지 못한 행동이다. 그렇다면 결국 국법에 아무런 문제의식도 가지지 않고 따르는 외에는 선택항이 없다는 말인가. 국가라는 것도 하나의 집단일 뿐이고 그 집단의 제도가 절대적으로 옳을리 없다. 그러니 국법이라는 것을 어떤 이유로든 (질서든 평화든 의무든)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부정을 행해서는 안된다. 라는 소크라테스 자신의 진술에 어긋나는 것이다.
    인문/어학| 2005.10.31| 3페이지| 1,000원| 조회(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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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과학]20년후의 한국 사회 예측-낙태금지령
    20년 후, 2023년 11월 어느 대학생의 보고서.[서론]2023년 11월 4일, 주요일간지 사회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지난 2023년 6월 4일, 불법적으로 수차례의 낙태시술을 혐의로 기소된 산부인과 원장 조연걸(45세) 씨에게 어제인 11월 3일 징역20년형이 최종 선고되었다. 이는 지난해 10월 낙태금지령이 대대적으로 강력히 개편된 이래 네 번째 사건이며, 세 번째 사건 이후 5개월여만에 발각된 사례인 점등으로 보아 새로운 낙태금지령은 그 법적효력을 상당히 발휘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유명무실하던 낙태금지법을 보다 강력하게 개정한 낙태금지령은 늘어나는 10대 임신과 1가구당 1명이 못되는 출산율, 그리고 남녀성비의 심각한 불균형 등의 현실적인 문재들의 해결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낙태금지령 개정을 앞장서 주장해온 교회 등 종교단체 측과 전경련을 통해 지지를 표명해온 기업 일단은 조 씨에 대한 징역 20년형 선고에 대해 반가움을 표했다. 조씨의 최종 20년형 선고는 낙태금지령이 소기의 목적을 다하고 법적 효력을 가진다는 것을 재확인해주었다. 한편 의사협회 일부 회원과 페미니즘 진영 등에서는 이번 판결과 낙태금지령 자체에 대해 강한 반대의사를 표하고 있다.우리사회에서 낙태는 지난해 낙태금지령으로 개정되기 전부터 불법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낙태시술은 대부분의 산부인과에서 공공연히 이루어져 왔고, 20여년 전부터 이미 비공식적 집계에서 우리나라의 낙태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확인되었다. 2000년대에 국내 낙태수술건수는 연간 150만건~200만건으로 추산되어, 인구비례로 볼 때 미국의 6배로 세계 1위였다. 이렇게 낙태가 한국에서 만연한 이유는 모자 보건법에 따르면 낙태는 사실상 더 이상 처벌되지 않는 범죄이기 때문이었다. 원칙적으로는 제한되어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마구 행해져 왔으며 국가가 가족계획을 이유로 무분별한 낙태를 방조해왔고, 낙태를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는 행위로 인식하는 경향도 있었다. 낙태가 합법화된 나라의 대표적인 예로 미국을 성적으로 보수적인 의식이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한 것이 오늘날의 10대 임신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60% 이상의 청소년이 성관계를 경험한 현실에 비추어볼 때 여전히 순결사탕을 나눠주고 추상적이고 의례적인 차원에서만 성교육을 실시하는 대부분의 공립학교의 방식은 성교육의 기능을 제대로 행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다수의 청소년들이 성관계를 경험하는 가운데 여전히 성관계는 이른바 어른들의 것으로 미뤄두는 것은 청소년들에게 실제로 닥칠 수 있는 성적인 문제, 예를 들면 피임이나 성병 예방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청소년들의 성적인 문제에 대해 금욕적인 해결방식을 고수하고 이를 억누르려 하는 것이 우리사회에서 보다 용납되고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방식이긴 하지만 100명 중 12명이 20세 이전에 임신을 경험하는 현실을 생각해볼 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현실적으로 효용성있는 십대 성교육과 피임 대책이다. 우리나라보다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유럽 사회에서는 20여년 전부터 10대들이 이왕이면 ‘안전한’ 성행위를 하도록 노력해왔다. 그들은 성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동시에 청소년기는 아기를 낳기에 부적절한 시기라는 것을 확고하게 주지시켜, 10대들이 손쉽게 피임약을 구할 수 있게 하였다. 미국의 경우는 성적으로 매우 관대한 입장에서 전환하여 20여년 전부터는 안전한 성보다는 절제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미국 역시 우리나라보다 10대들이 피임 도구나 성적 지식을 얻기에 훨씬 용이하다. 또한 미국에서도 유럽에 비해 높은 수치의 10대 임신 문제로 유럽식 모델의 수용이 계속 논의되며 조금씩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우리사회에서도 유럽식 모델을 긍정적으로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몇몇 국가들의 경우 무료 피임약과 콘돔 자판기가 모든 고등학교에 비치되어 있으며 양호 교사들이 비상시에 먹는 피임약인 ‘the morning after'를 나누어주고 있다. 유럽전역에서 있다. 특히 현재에도 과거에 비해 급증하였고, 낙태금지령의 시행으로 더욱 늘어나게 될 미혼모의 문제에 있어서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부계 중심의 호적제를 전면 폐지하고 미혼모들에게 일정기간동안 생계와 육아비를 제공할 것의 두 가지 사항이 강렬히 논의되고 있다. 수십여년간 페미니즘 측과 유림 측의 논쟁 속에서도 계속 존립해왔고 2006년 호주제가 실질적으로 폐지된 뒤에도 부계 중심의 가족제도를 기본적으로 반영하고 있던 호적제가 이번 낙태금지령을 계기로 폐지될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미혼모의 생계보호 역시 진정한 의미의 모자보호법은 마땅히 미혼모와 그 자식의 생계를 보장해주어야한다는 주장으로 지지를 얻고 있다. 이번 낙태금지령은 청소년 임신과 피임 및 성교육, 미혼모의 법적 지위 보장 및 생계보장 등 다양한 범위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한국의 출산율은 이미 20여년 전부터 세계 최저 수준이었다. 60년대의 베이비붐과 그 뒤의 효과적인 산아제한정책은 현재의 심각한 부양노동인구 부족을 낳았다. 부양계층인 청장년층 인구와 피부양계층인 유아 및 노년층의 비율이 이전의 어느 시기보다도 불균형한 상태에 놓여있다. 젊은 노동력은 부족하고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먹여살릴 인구는 많은 이 상태는 수십여년전, 출산율이 줄어들면서 이미 예상된 것이었다. 2003년 가구당 1.13명 수준이었던 출산율은 현재 0.9명 수준으로 획기적인 출산장려책없이는 계속 내려갈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부양층-피부양층의 불균형도 문제지만 출산율이 이대로 유지, 혹은 하락한다면 수명은 점점 늘어가므로 이 불균형이 계속될 것이고 노동력의 양적 저하로 국가산업경쟁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10여년 전부터 노동력 부족이 가시화되었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노인 노동력이나 여성 노동력의 활용방안이 검토되고 또 실행되었다. 여성 노동력을 육아와 가사로부터 직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탁아 및 보육시설을 대폭 확대 운영하면서 탁아나 보육시설의 노동력은 노인노동력을 활용하는 것이 사 산업경쟁력 저하에 민감한 기업들, 특히 첨단전자/정보/지식 계열의 유수의 기업들은 새로운 낙태금지령을 통과시키기 위해 정치적 로비활동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낙태금지령은 여성노동력의 활용에 어느 정도 방해가 되겠지만 기업 입장으로서는 출산으로 1-2년 노동이 불가능하다 해도 그로 인해 새로이 창출되는 보다 젊은 노동력을 기대하는 것이 거시적으로 보다 현명한 판단이 될 것이다. 낙태금지를 통해 출산이 늘면 얼마나 늘겠느냐고 부정적인 관망을 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의 경우 출산(60~80만)의 약 2.5배 정도의 아기가 낙태되고 있는 실정이므로 낙태금지령이 소기의 목표처럼 효과적으로 시행된다면 출산율 증가의 효과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기혼여성의 53%가 1회 이상의 낙태경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미혼여성의 약 30%가 낙태를 경험했으며 미산부(출산경력이 없는 사람)의 46.6%가 낙태를 한 것으로 보고된 것으로 보아 첫 아기의 낙태가 대단히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무심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낙태가 시행되어 왔다. 게다가 연간 150만 건의 낙태건수에 평균 시술비를 곱해보면 낙태를 위해 소모되는 비용이 연간 최소 750억원 이상 된다. 이상의 사항으로 보아 낙태금지령은 경제적으로 합리적 결정을 내리려는 정치적 방책이라 할 수 있겠다.성비는 여아 100명당 남아의 수를 나타나는데, 대부분의 나라에서 출생시의 여아 100명당 남아 수를 의미하는 출생성비는 전체인구의 성비보다 높게 나타나며, 우리나라의 경우는 세계적인 평균 수준보다 높은 축에 든다. 일반적으로 출생성비는 102-107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남아선호관이 강한 우리나라는 출생성비가 비교적 높아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108에 근접하는 수준을 유지하여 왔다. 출생성비는 1975년에 비교적 높은 수준인 109.5로 집계된 바 있다. 그러나 출산력이 낮은 수준의 안정상태로 진입한 1980년대 후반기부터는 여아에 비해 남아의 2023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112~113 사이를 오가며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97년 IMF이후 지속적인 경기불안의 위협과 2000년대 초반의 취업난, 그리고 2010년 경부터 첨단지식정보산업으로 산업구조가 구조조정되면서 실질적인 퇴직연령이 하향화되고 젊은층의 취업난이 만성적으로 고정된 데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잇단 만성적인 경기불황은 소자녀관을 더욱 확산시켰으며 구조조정, 취업난, 퇴직연령 하향화 등은 그 과정에서 여성에게 보다 불리하게 작용해왔기에 부모들은 이전보다 더 남아를 선호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출생성비를 높은 수준으로 고착화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남녀학생의 균형이 깨지고 동성이나 이성에 대해 비정상적인 생각과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는 학생이 늘어나고 있다. 성비가 안맞을 경우 세대의 사회와와 성격형성과정에 있어서 좋지 않은 영향력이 자연스럽게 발생함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보다 큰 문제는 이들이 결혼적령기에 이르렀을 때에 있다. 과거에 지속되어온 높은 출생성비는 현재의 결혼적령기 성비로 전환되어 우리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결혼적령기를 남자는 26~30세, 여자는 23~27세라 볼 때 2000년 결혼적령기의 성비는 115.0의 높은 수준이었으며 2010년에는 결혼적령기의 남자인구가 여자인구를 23.4%나 초과하였다. 그리고 2023년 현재 결혼적령기의 남자인구는 여자인구보다 28.3%를 초과하였다. 이러한 결혼적령기 남녀인구규모의 불균형은 혼인시장에 혼란을 초래하고 있으며 이는 초혼연령을 상승시키고 미혼율을 높히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수십년 전부터 젊은 여자들이 대거 도시로 빠져나간 농촌지역에서 결혼적령인구의 성비불균형으로 노총각이 많이 발생하여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해온 데 비쳐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현재에는 농촌과 도시를 막론하고 초혼연령이 상승하고 미혼율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결혼하는 데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남자들은 일반적인 결혼정보업체에 등록조차 하기 어려워 결혼은 다.
    사회과학| 2005.10.31| 7페이지| 1,500원| 조회(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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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우상의 눈물 서평
    세상에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 존재할까? 내가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내가 대답할 수 있을까. ‘우상의 눈물’을 보고 드는 생각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나’의 존재가능성에 대한 의문이랄까. 기표가 무섭고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에서 수줍음을 타고 부끄러워하는 캐릭터로 변해버리기까지, 그 자신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그의 가정환경 등 객관적인 조건들 역시 그대로였다. 다만 변한 것은 기표를 향한 반 아이들의 시선과 평가였고 기표는 자신에 대한 평가가 변하는 것에 따라 변해갔다. 기표가 변했기에 그에 대한 평가가 변한 게 아니라 평가가 달라졌기에 기표가 변한 것이다. 외부의 시선이 변했기에 ‘나’가 변한다는 것은 주체로서 개인의 독립적 존립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반추해봐도 기표의 사례는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그저 독립된 ‘나’가 아니라 관계 속의 ‘나’인 것이다. 좀더 쉬운 경우로 살피자면, 직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듯이. 내가 맡은 역할, 나에게 기대되는 행위, 그리고 나에 대한 평가, 선입견 등등. 이런 것에 그 행위나 사고방식이 영향받지 않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연히 ‘세상에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 존재할까?’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독립된 존재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우상의 눈물’은 그저 특이한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진실의 한 극적인 사례일 뿐이라는 생각. 누구라도 기표의 입장에 처하게 되면 변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변하기 전의 기표는 ‘진짜’인가? 어쩌면 기표는 원래 내성적이고 수줍어하는 성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복학생이고 싸움을 잘한다는 그의 특성 때문에 ‘과묵하고 무서운’ 것으로 비쳐지고, 그런 시선과 평가에 따라 정말로 ‘과묵하고 무서운’ 애가 된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진짜’라는 것에 대해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외부의 평가자들이, 나를 바라보는 자들이 나를 만든다. 물론 그들 역시 나를 포함한 평가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그렇게 사회 속에서,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무의식중에 조형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상의 눈물’의 사례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긴 하다. 보통 우리는 그렇게까지 ‘조형되는 나’를 느끼진 못한다. 그리고 사람마다 타고난 성향같은 게 없는 것도 아니다. 외부의 역할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래도 성향이라는 건 있다. 하지만 ‘우상의 눈물’의 경우에는 그것조차 알 수가 없다. 반 아이들의 달라진 시선이 기표의 타고난 성향을 묻어버렸는가, 아니면 이전의 기표를 무서워하던 태도가 기표의 타고난 성향을 가려버린 거였나. 아니, 기표에게는 과묵하고 카리스마적인 면과 내성적이고 수줍은 면이 동시에 있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다면적이니. 그 다면 중 하나가 그 사람의 일반적 경향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은 타고난 성향과 외부의 평가 모두가 아닐까. 외부의 평가에 의해 드러나는 성격이 변하는 예를 들자면, 사람은 누구나 어떨 땐 대담하고 어떨 땐 소심한 면이 있다. 거기에 대해 계속해서 ‘넌 참 대담해.’라는 말을 계속 듣는다면 대담한 측면이 부각되고 대담한 대응을 하는 빈도가 높아지고 스스로도 자신을 대담하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된 후 ‘알고보면 소심한 애’라는 평가를 계속해서 듣는다면 처음엔 거기에 저항하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정말 소심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대담한가, 소심한가? 대담하기도 하고 소심하기도 하다.-이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향이란 면에서 생각하자면, 사람마다 두 경향 중 어느 것을 더 자주 혹은 더 기꺼이 발휘하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느냐의 차이 아닐까. 성격에 대한 규정은 그렇게 작고 얄팍한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 작은 차이가 표면적인 행동이나 사고방식에 큰 차이를 불러오긴 하지만. 그리고 그 작은 차이는 타고나는 면도 있겠지만 외부의 평가, 관계맺음의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된 자는 아무도 없다. 서로가 서로의 평가에, 시선에 기대어 있다. 외부의 평가와 스스로에 대한 자신의 평가가 밀착되어 사는 사람도 있겠고 기표의 경우처럼 갑작스런 평가의 변화에 괴리를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 나를 구성하는 거대한 축이 갑작스레 완전히 바뀌어 버렸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실험 이야기가 생각난다. 흰색과 검은색을 놓고 둘 중 하나를 가리키며 이것이 무슨색이냐고 묻는데 딱 한 사람만 빼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반대로 대답하게 미리 시켜놓는다면, 그리고 피실험자 모두가 보는 가운데 한 명씩 대답하는 식으로 실험을 진행한다면 그 한 사람은 과연 어떻게 대응할까. 흰색과 검은색을 구별한다는 것은 쉽고 명확한 일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경우에 과연 그것이 쉬울까. 그 한 사람은 과연 어떻게 대답할까. ... 대부분 뒤집어 대답한다고 한다. 그의 앞에 대답한 수십명의 사람들이 모두 검은색을 흰색이라고 했다면 그 역시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남들이 모두 그렇다고 하면 그것이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색깔이라는 아주 객관적인 사안에 대해서도. 그러니, 그것이 지극히 주관적이고 유동적인(고정되지 않은) 성격의 경우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나’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믿고 있던 나의 성격이나 모습을 부정하게 해버린다. 그 괴리가 확연하고 급격할 경우에는 누구나 기표처럼 무서워하며 떠나버리고 싶지 않을까... 내가 누군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니까. 일상의 아주 기본적 요소인 성격이나 가치관, 사고방식에서부터.
    독후감/창작| 2005.10.31| 2페이지| 1,000원| 조회(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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