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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시아 소농사회의 형성
    동아시아 소농사회의 형성-머리말지금까지 역사학계는 조선후기 정체론에 입각하여 한국 사회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하는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데 역점을 두고 연구해 왔다. 그 결과 조선후기사회는 중세봉건사회가 해체되고 자본주의맹아가 발생하여 근대를 준비하는 등 역동적 사회였다고 한다. 이런 발전의 성과로 인해 개항 이후 외래 자본주의의 영향이 없었다고 해도 자주적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는 사회로 평가됐으며, 일제의 한국침략과 지배는 이러한 발전 모멘트를 왜곡하거나 압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반면 경제사학계 일각에서는 역사학계의 이런 조선후기상을 비판하고 나왔다. 이에 따르면 조선후기사회에서 자생적 자본주의화의 가능성을 찾을 수 없으며,한국근대는 서구 근대의 모방, 수용, 이식을 통하여 비로소 발전계기를 맞이했다고 한다. 단지, 조선후기사회는 자본주의를 수용, 발전시킬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을 정도의 발전을 이룬 데 불과했다고 한다. 이런 역사상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조선후기 소농사회론이다. 소농사회론에 따르면 소농사회는 10세기 송대 이후 중국,14세기 이후 프랑스,17세기 이후 근세 일본 사회에 등장한 사회로, 한국에서는 17세기 후반 이래 농노제가 해체되는 반면 자립적 생산 단위로서의 소농이 성장하고, 소농의 촌락공동체, 관제, 사적 토지소유와 지주제, 그리고 일정수준의 시장경제의 성장 등을 토대로 성립했다.여기서는 소농사회의 형성 과정과 소농사회의 성립 이전과 이후의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I.동아시아 사회의 공통점1.유교 특히 주자학을 둘러싼 논의동아시아의 유교 사회를 파악하려고 할 때의 유교란 주자학 이후의 유교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다. 중국 송대에 형성되어 온 송학(宋學)의 담당자는 사대부라는 계층이다. 이 사대부층은, 송대 이전의 중국의 지배층과 비교하거나 또 다른 세계 지역의 전근대 지배층과 비교해도, 특이한 성격의 존재이다. 그 특이성에 관해서 시마다 켄지가 「사대부란 유교적 교양 때문에, 완벽한 존재 형태로서는 과거를 통과하고 위정자(관료)가 때. 다른 농업 사회와 비교되는 특징으로서 두 가지가 중요하다. 하나는 정치 지배층의 대토지 소유에 기초를 둔 직영지 경영이 존재하지 않는다.중국의 사대부층이나 조선의 양반층과 같이. 동아시아에서도 대체적인 경우 정치 지배층은 대토지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토지를 직영하지 않고 소차지농(小借地農)에게 병작(竝作)시켰던 것이 일반적이며, 경영의 주체가 소차지농이었다는 점이 다른 지역의 대규모 직영지와 구별된다.또 다른 주요한 특징의 하나는 스스로는 독립적인 경영 주체라고 할 수 없는 농업 종사자층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자신이 토지를 소유하지 않더라도 차지농으로서 경영 주체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러한 점에서 동남아시아나 인도의 농촌 구조와는 결정적으로 다르다.정리하자면, 중국에서는 송 대에서 명대에 걸친 오랜 기간 동안에 서서히 소농사회가 형성되었다고 생각되고, 한국에서는 조선조 후기에,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 전기(前期)〔1603년부터 18세기 초까지 약 100년간〕에 소농사회가 성립되었다. 그것은 주자학이 만들어지고 한국과 일본에 수용되는 것과 거의 병행해서 나타난 현상이다.Ⅱ. 동아시아 소농사회의 형성과정1.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동아시아의 위치동아시아는 현재 세계에서도 인구가 가장 조밀한 지역의 하나이다. 동아시아의 높은 인구 밀도는 어느 특정한 시기 이후에 생겨난 현상이었다. 세계 각 지역의 추정 인구수의 변동표를 보면 각 지역 인구수의 추이가 결코 일률적이지 않고, 각 지역 모두 어느 특정한 시기에 다른 지역보다 높은 인구 증가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00년과 1750년에 세계 인구의 증가율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동아시아의 중국과 일본이 여기에 해당되며, 한국도 여기에 속한다. 동아시아의 특징은, 이른바 중간기(中間期) 인구(人口) 증가형(增加型)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서기 1,000년부터 세계적인 공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750년까지의 시기에 다른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 급속한 인구증가를 실현대신하여 이식법(移植法)이 일반화되었으며 논갈이에 쓰인 농기구는 여(犁; 쟁기), 초(?; 써래)가 사용되었다. 모내기에는 일인당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앙마(秧馬)가 사용되었으며 김매기의 편리를 위하여 인조 손톱이라고 할 수 있는 운조(耘爪)가 사용되는 등 농기구의 보급ㆍ발명이 성행하였다.수전의 확대를 위해서는 관개(灌漑)가 가장 중요하였는바 용골차(龍骨車), 통차(筒車) 등 양수(揚水)기구도 널리 보급되었으며 이모작ㆍ이기작의 성행과 더불어 송대에는 시비가 비상히 발달하였다.송대 이후 농업생산력의 비약적인 발달은 종래의 농촌사회구조에 커다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미곡을 비롯한 다수의 농산물이 상품화됨으로써 토지는 이윤이 남는 투자대상이 되어, 이로써 지주제의 발달이 더욱 촉진되었다. 국가측에서 볼 때도 지주제는 세수(稅收)의 안정된 확보면에서의 이점 때문에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다. 전체적 부의 증가는 대량의 소비인구를 창출하였다. 강남 선진지역의 경우 초시(草市)등 중소도시가 다수 발달하여 농촌사회 깊숙이 상업망이 확대되고 화폐경제가 보급되어 종래의 자급자족적인 폐쇄성에서 벗어나 전국적 교역권이 형성된 것이다. 농업생산력의 비약적 발달은 송대 이후 전반적인 사회와 경제의 변화에 주된 흐름의 하나를 형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2) 화북에서 강남으로 이동배경농업의 선진 지대가 밭농사 중심의 화북지방에서 도작 중심의 강남지방으로 이동에 대해서 살펴보면 당 중기 이전의 경우 관중(關中)과 황하(黃河)하류의 화북(華北)지역이 농업생산의 주축이 되어 왔으나 당 중기 안사의 난 이후부터 상황은 크게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안사의 난으로 화북이 황폐화 하자 화북 인구가 주로 사천과 강남으로 남하하였고 그 당시 화북의 선진적인 기술과 문화를 이식한 것도 있고 당 왕조도 황화 중ㆍ하류지역의 평야지대를 번진(藩鎭) 세력에 빼앗겨 재정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하여 강남지역의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리고 강남의 개발은 당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으며 송대에 강남의 농업생산력 발달의 근간이 최대의 대개간 시대였다. 이 대개간의 주무대는 큰 하천의 중류와 하류 부근의 충적평야 지대와 해안 부근의 간척지였고, 도작의 중심지가 산간지 평탄면에서 이와 같은 평야지역으로 이동했다. 평야지역 개발의 첨병은 인디카 계통의 적미품종이었는데, 개발 초기 수리 조건의 열악함에 견딜 수 있는 품종으로서 널리 재배되었다. 전국시기(1477~1573)부터 근세(1603~1871) 초기에 걸친 대규모의 치수 관개 공사로 평야 부근의 경지가 안정도를 더해 가자, 평야 지역에서 집약적인 도작이 점차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도작 발전의 경로는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중국 강남 도작의 그것과 같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농업 변혁은 어떠한 경로를 취하였던 것일까?농지의 개발 면에서 본다면, 조선 전기의 15세기와 16세기에 한국에서도 활발한 개발이 이루어졌다. 개발의 방향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산간지 평탄면의 미개발 지역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한국 촌락의 과반수는 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성립하였다고 추정되는데, 이 시기에 성립한 촌락의 대다수는 산간지 평탄면에 입각하고 있고 재지 양반의 이주에 의해서 산간지 평탄면의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또 하나의 방향은 서해안 지역을 간척하는 것이었다. 서해안 지역의 커다란 간만의 차를 이용한 간척이 조선 전기에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간척의 추진자 또한 권세있는 양반층 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한국사 연구에서 조선 전기의 농지 개발에 관해서는 때때로 언급해 왔지만 이 시기에 전체 경지의 면적이 확대된 것에 관해서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료에 표시된 경지면적의 통계에 의하는 한, 조선 전기 경지의 확대를 실증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실록》등의 사료에 실려 있는 각 도의 경지면적 추이를 살펴보아도 그 숫자들은 상당히 신중한 검토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그 숫자가 절대 면적의 표시가 아니라 국가의 과세 단위였던 결수의 표시라는 것, 둘째로 이 숫자에는 경작, 기본적으로는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방향의 발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4. 소농사회의 성립동아시아의 소농사회는 인구의 급속한 증가와 농업 기술의 변혁이란 두 가지 조건을 전제로 하여 성립한다. 그 성립과정은 어느 지역에 있어서나 오랜 기간을 요하였지만 중국에서는 명대 전기에 한국에서는 17세기경에 기본적으로 소농사회로의 전환을 완료하였다고 생각된다. 소농사회 성립의 전제가 되었던 경지의 대 개발을 추진한 주 계층은 중국의 사대부층, 한국의 양반층, 일본의 무사층이며 이들은 모두 지배계층에 속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계층은 그 개발 초기에는 단순히 개발을 추진할 뿐만 아니라 종속 노동력을 이용하여 대규모의 직영지 경영을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세 일본의 무사층은 그 자신이 농업 경영의 주체였으며, 조선 전기의 재지 양반층도 많은 노비를 가지고 직접 농업 경영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농업의 발전이 집약화란 방향으로 나아감에 따라. 이들 계층은 집약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종속 노동력을 이용하여 대규모의 직영지를 경영하는 것보다는 소차지농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그들에게 경영을 맡겨서 지대를 받아내는 것이 훨씬 더 생산성의 향상이란 면에서 나았다고 생각하여 농업경영으로부터 점차 멀어져갔다. 또 노비를 이용한 농업 경영은 노비들이 게으름을 부리는 등 비능률적이었다. 한국에서도 17세기에 들어서 노비를 이용한 양반의 직영지가 급속히 감소해가는데 그것은 집약화의 진전에 따른 현상이었다. 정치 지배층에 의한 직영지 경영이 쇠퇴하는 가운데, 이제까지 직영지 경영을 위한 노동력으로서 사용되었던 비독립적인 농민계층도 점차로 소멸해 갔다. 이 문제는 중세 일본과 중국에서도 나타났다. 중국고대의 화북 농업은 집약적인 농업이었는데. 축력을 많이 사용하였고 최적 경영 면적의 넓이 등으로 말미암아 가족 노동력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었으며 종속 노동력의 존재를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화북 농업의 형태는 송대 이후에도 기본적으로는 변하지 않았으며, 근대가 되어도 화북 농업에서는 많은 고용 노동력을 었다.
    인문/어학| 2007.01.16| 10페이지| 1,500원| 조회(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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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중기 입양과 상속의 변화 평가D별로예요
    『유교사회의 창출: 조선중기 입양과 상속의 변화』■ 부계친족- 한국사회는 전형적인 부계사회로 규정되어 왔다. 말하자면 정치적인 권위가 남성의 손에 잇고, 재산 또한 남성을 통해 상속되며 결혼 후의 거주지도 남성의 집으로 정해졌다. 여성의 지위를 잘 드러내 주는 일상적인 경구에서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예로 男尊女卑 와 딸은 한번 결혼하면 남의 집 사람이 된다고 出嫁外人 이라 한다. 이처럼 한국에서는 여성은 단지 부수적인 존재였을 뿐이다. 이런 여성은 족보에 어떻게 기록되었느냐 하면 남편과 함께 나란히 묻히는 것으로 보아서는 남편 쪽의 종족에 포함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남편의 성을 따르지는 않았으며 남편의 종족원이라기 보다는 항상 자신이 출생한 친가의 종족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딸은 다른 가문으로 출가했다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고, 며느리는 다른 가문에서 시집왔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족보에서 여성들의 조산에 관한 내용을 찾아보면 대개는 자신과 그 아버지에 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듯 여성의 지위란 단순히 가문의 대를 이이어 주는 데 필요한 존재였음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모든 남성들은 자신과 조상들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반드시 대를 이어야 할 의무가 잇다. 자신이 죽은 뒤에도 제사를 계속 지내도록, 향불이 계속해서 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책임이 있고 이 유일한 방법은 오직 아들은 낳는 것뿐이다.■ 17세기 이전의 가족- 17세기만 하더라도 한국의 친족체계는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 조선전기의 친족 성원권이 모두 부계의 원리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다. 재산도 장자만이 물려받지 않고 딸도 아들과 같이 부보의 재산을 균등하게 물려받을 수 있었다. 아들이 없고 딸만 있다하더라도 입양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자식이 없을 때에는 처가의 친고, 또는 친족이 아닌 사람도 입양하였으며 딸을 입양하기도 하였다. 여성은 가족 조직에서 배제되지 않고 제사와 같은 집안행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아들과 마찬가지로 제사의 윤행에 참징짓는 영조 즉위년인 1724년까지로 잡고 있다.■ 신유학의 영향- 당시 종족과 가족에 대한 많은 논란은 신유학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했던가를 잘 보여준다. 어떤 분쟁은 서로가 유교 원리에 맞는다고 주장함으로써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고유의 전통 문화와 수입된 유교 문화 사이에 논쟁으로 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유교의 영향이 바로 중국의 영향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 점에서 상속제가 매우 적절한 예가 된다. 조선(1392~1910) 초기 200년 동안과 고려시대(918~1392)의 사람들은 균분상속제를 유지해 왔다. 이 점에 있어서는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였으나 한국인들이 딸을 상속에 포함시킨 반면 중국인들은 단지 아들에게만 상속을 하였다. 조선후기 즉 유교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 후 한국인들은 딸에게 재산을 상속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들에게도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어 주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유교 고전에 규정된 대로 장자는 중요한 상속자가 된 셈이다.■ 인류학 이론과 한국 종족제도의 비교연구- 일부다처제는 건국 초기에 인정되지 않았다. 첩을 두는 것은 사회 지위에 하자가 있는 아들을 낳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방법이다. 이혼과 재혼 역시 허락은 되었지만 거의 실행되지 않았다. 유교의 원리는 아들이 없을 경우에만 이혼을 허용하는데, 이혼은 두 가족의 결합에 기초한 친족관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처를 더 두는 방법도 시도되었지만 해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들을 더 두는 것은 더할나위없이 한국인의 기호에 적합한 것이었다. 첫 번째 방법인 데릴사위제는 조선전기에 선호된 반면 조선 후기에는 두 번째 방법인 입양이 가장 좋은 대안이었다.여성이 상속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사회에서는 입양이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이 이론은 한국의 경우와 완전히 들어맞는다. 상속권을 가진 후보의 수를 줄이기 위하여 경쟁자를 제거하는 방법을 쓴다는 표현을 쓰초기는 딸들에게도 제한된 양의 재산이 분배되고 혼인을 중요시 한 시기로 거론된다. 무덤이 집단에게 보다는 개인에게 더 중요했고 종족보다는 가족이 더 중요시 되었다. 유교화가 진행될 때 부계 계열을 강조하고 인친(사돈)과의 관계가 잠재적으로 허물어진다는 견해가 있다. 또 매우 유사한 측면으로는 유교의 정통적인 부계성을 지나치리만큼 강조한다는 것이다.이중출계체계는 매우 드문 형태로서 자식은 아버지 쪽의 단지 한 계통만의 성원이면서 어머니 쪽의 한계통의 성원이 된다. 예를 들면 자식은 아버지의 부계집단이나 어머니의 부계 집에도 속할 것이다. 이중성에서는 우선 관계로서 한 부모의 계통이나 친속을 선택한다. 이중출계는 개인의 필요성과 다른 사회요인으로 구성원의 자격을 바꾸는 윤통성이 있는 단위 체계의 한 특징으로 구성원이 종종 결혼 후 거주지역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고 그 것의 예로 한 남자가 그의 처가로 거주지를 옮겨 온다면 그는 처가의 친속이 되는 것이다. 조선전기의 한국인들은 아버지친족이나 어머니친족의 구성원 자격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배우자의 친족 구성원이 될 수도 있었다.1. 중국-일본-조선에서의 입양과 상속의 차이점조선의 입양과 상속을 알아보기 위해 주자학의 영향을 받아 서로 유사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중국과 일본의 입양과 상속을 알아보고 그 차이점을 인식한다.1) 중국에서의 상속과 입양입양관행은 당대를 기점으로 법전은 남계 조카를 입양하는 전통적인 형태를 지향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입양은 아버지나 아들의 성이 같아야 할 뿐만 아니라 같은 종족이어야 하며 소목의 순서도 알맞은 것이다.) 중국사회에는 비남계 입양을 금지하는 규범이 존재하였지만 족보에는 비남계 입양을 한 사실들이 일부 기록되어 있다. (반면 한국의 족보에는 비남계 입양을 기록한 사례를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족보 서문에 비남계 입양을 반대하는 규정도 없다. 이것은 한국의 입양 관행이 비남계 입양과는 기본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반영하며, 따라서 그러한 금지 규정조차 며, 장자가 제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기록되어 있었다. 전국시대가 끝나고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균분상속이 중국 상속제도로서 통용되었다. 다만, 중국의 균분상속은 아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일뿐 딸은 배제된다.상속과 입양에 있어서 두드러진 변화를 찾아볼 수 없는 반면, 친족체계는 크게 변하였다. 패트리셔에브리는 가족체계에서 종족체계로 전환한 송대를 중국 친족제도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시대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종족체계의 인척고리는 사회관계를 결속시켜주는 유용한 것이라고 한다.2) 일본에서의 상속과 입양중세 일본의 고문서를 통하여 볼 때 일본의 분할상속제는 단일상속제로 변화하기 이전의 한할상속과 매우 유사하다. 후기 카마쿠라 막부시대에 일어난 광범위한 사회, 경제적인 변화의 주된 원인은 몽고족의 침입과 그들의 침입에 대해 무사계급이 대응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소수의 권력있는 무사들은 자신들의 수중에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하여 재산을 통합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래서 분할 상속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단일 t아속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처음 배제 대상에 오른 것은 딸이며, 장자를 제외한 다른 아들들도 점차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구질서인 분할상속제는 쉽게 없어지지 않고 상속에서 제외된 딸은 소송을 제기하였고 이는 때때로 성공하여 변화기간을 연장시키기도했다.일본의 입양관행은 전형적인 남계입양은 물론 비남계 입양을 비롯한 입양 방법의 광범위한 다양성이 존재한다. 딸을 입양하는 방법과 데릴사위를 양자로 들이는 방법은 아마도 중국보다 일본에서 더 많이 행해졌을 것이다. 소목의 순서에 알맞은 입양이란 이상적인 남계 입양이 갖추어야 할 조건 중의 하나인데 이를 어긋나는 입양이 일반적이었다. 종종 남자동생이 아들로 입양되기도 하였따. 17세기 18세기에는 신유학이 흥성함에 따라 일본에서도 비남계입양이 비판 대상에 올랐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부분적으로만 성공한 채 비남계입양의 전통은 지속되었다.중국의 모델을 따르는 문제에 있어서도 논쟁을 거쳐 중가 변화한 것이다. 조선후기에 광범위한 입양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중 하나는 족보이며 조선전기에는 입양이 이루어졌다는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초기에는 미약했던 종족의 가치가 점점 강화된 것이다. 분재기를 조사해 보면 조선 초기의 양반 가문들이 입양하지 않은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즉, 딸들은 상속을 받을 수 있었고, 조상에게 제사도 모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王朝實錄』은 가족의 변화와 종족의 발전에 관한 논의들이 조정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국왕은 그와 그의 신하들이 찬반양론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신중한 역할을 하였으며, 제사와 부계종족구조의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한 법률을 제안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 결과 주자학의 원칙을 모방한 전형적인 부계출계! 체계로 나타났다.2. 변화를 초래한 원인들1) 다양한 요인들의 상호작용과 그 중요성(1) 이데올로기적 요인유교가 한국에 제일 처음 전래된 때는 삼국시대이지만 고려말(14세기)에 송의 철학으로 다시 태어난 신유학이 들어왔다 신유학 자체만으로는 왜 친족체계가 균분상속을 지지하는 공계친족체계에서 장자상속제를 지지하는 부계친족체계로 변화하였는지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중국에서의 유교는 주지학의 대변혁이 일어난 이후 한국에서는 예서를 사용하면서 제례를 주관하는 장자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그러나 재산은 아들(딸을 제외한)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였다. 유교는 수세기 이전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속과 입양의 근거로 활용하기에는 의문점이 많다.(2) 경제성장과 종족제도의 발달인구 압력의 영향으로 경제상태도 변화하였다. 첫째 농업경제적인 면에서 볼 때 17세기에는 이앙법이 발달하였다. 이 혁신적인 방법인 이모작은 생산에도 엄청난 증가를 가져왔다. 둘째, 신유학으로 기초가 세워진 종족관념은 동족부락과 17세기 후반에 일어난 사학의 거대한 팽창에 의해 규정되었다. 전쟁은 촉매 역할을 하였으며 상속제와 입양방식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결혼제도로 딸의 상속분을 하였다.
    인문/어학| 2007.01.16| 6페이지| 1,000원| 조회(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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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학]신라말 선종승려들의 부도 평가B괜찮아요
    신라말 선종승려들의 부도1. 머리말오늘날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역사적인 유적 유물 가운데 그 수효가 제일 많은 것은 석조미술품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질 좋은 석재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역사적으로 나라 안팎의 환란이 많아서 목제와 같은 조형물들이 모두 불에 타거나 파괴되어 흔적조차 없어지고 남은 것은 견고한 석조물뿐이라는 점에서도 그 원인을 생각할 수 있다.현재 남아 있는 여러 석조 미술품을 살펴보면 불교미술품이 다수를 차지하는데 그중에서석탑이나 석불 등과 같이 승려와 신도들에게 직접적으로 예배의 대상이 되는 봉안물이 있고 석등 석연대 당간지주 석조들처럼 각 사찰에서 필요에 따라 건조된 석물도 있다. 이 밖에 불교 신앙의 예배물이나 전법(傳法)에 이용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유품은 아니나 사찰에서만 건조하였던 석조 부도가 있다.이 가운데 석탑과 석불은 가람배치와 예배의 중심 및 대상물이므로 어느 사찰을 막론하고 초창 혹은 중창기의 조성품으로 대개는 한번 안치하면 처음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여 후대에 이르며 혹시 세월이 흘러 파손되어 보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흔적을 남기면서 원형만은 후세까지 전해주고 있다. 특히 석탑인 경우에는 예부터 창건된 사찰의 수효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많이 남아 있다.다음으로 사찰의 필요에서 만들어진 석등, 석연대, 당간지주 등은 사찰에 따라 건조하지 않은 경우도 있고 또 필요에 의하여 마련하였더라도 석탑이나 불상과 같이 건립 당초의 상황에서 변동이 별로 없는 유품들이므로 그 수효나 다양성에 있어서 석탑이나 불상만 못할 것이다.그러나 석조부도에 있어서는 석탑이나 불상, 석등, 당간지주 등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석조부도는 승려의 묘탑이기 때문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을 두고 건조되어 왔고 승려 개개인에 대하여 각기 부도가 세워졌으므로 그 수도 매우 많다. 그리고 부도의 건립은 법등이 끊어지지 않는 한 반드시 존재하였던 조형물이었다. 비록 배불숭유가 국시였던 조선시대에도 명맥을 이어 왔던 사원의 주변나 여기서는 신라말 선종승려들의 부도에 대해서만 알아 볼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석조부도의 초기적인 작품으로서 그 발생과 발달, 양식의 변천과정을 연구함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된다.여기서는 우선 우리나라 석조부도의 의의와 그 발생을 알아보고 다음으로 전형양식의 정착과 신라말 선문 조사들의 부도를 살펴보도록 하자.2. 부도(浮屠)란 무엇인가?부도(浮屠)는 부도(浮圖), 부두(浮頭) 또는 포도(蒲圖) ·불도(佛圖)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는 불타(佛陀) 또는 솔도파(警堵婆), 즉 탑파(塔婆)의 전음(轉音)이다. 어원으로 본다면 불타가 곧 부도이므로 외형적으로 나타낸 불상이나 불탑이 즉 부도인데, 더 나아가 승려의 것들까지도 부도(浮圖)라 일컬은 예가 있으니 부도란 실로 넓은 뜻을 가지고 있다.그러나 일반적으로 부도라 하면 일련의 묘탑(墓塔)을 지적하므로 실제는 매우 국한된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묘탑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리를 봉안한 탑이므로 종래에는 모든 묘탑을 탑으로만 통칭하여 왔을 뿐 내용이나 외양을 엄밀히 구별하여 지칭한 용어는 없었다.한국에서는 묘탑, 즉 부도라는 용어로 승려의 사리묘탑을 가리키는 실례가 신라 하대부터 보인다. 즉 대안사(大安寺)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 비문 중에 “기석부도지지(起石浮屠之地)”라 하였으므로 이 묘탑이 곧 ‘석부도(石浮屠)’임을 알 수 있다. 이 ‘석부도’는 그 형태가 불탑으로 통칭되는 방형중층(方形重層)의 일반형 석탑과는 달리, 기단부 위에 단층의 탑신을 놓고 옥개(屋蓋)와 상륜부(相輪部)를 차례로 쌓았으며 평면도 8각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불탑 개념으로서의 부도와 승려의 묘탑으로서의 부도는 우선 외양이 다르다. 따라서 부도라 함은 이와 같이 외양적인 면에서 구별되는 승려들의 묘탑만을 일컫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즉, 불탑이라는 일반 석탑은 대개 사찰을 이룩하는 데 중심이 되어 후세에 이르는 양식의 발전과 계통이 있으며, 혹시 특수탑파라 하여도 일반형에서 변형되어 그 원류는 불탑도를 건조했던 것도 아니다.불교가 유입된 이후 신라 중대까지 수많은 고승이 있었지만 이들의 부도는 찾아볼 수 없다. 예컨대 원효대사는 입적한 뒤 그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였고 자장율사는 입적한 뒤 유골을 석혈(石穴) 안에 안치했다. 백제의 혜현(惠現)은 입적 뒤 그의 유해를 석실 안에 갖다 놓아 호랑이의 밥이 되게 하여 일종의 풍장으로 처리하였으며 당시의 고승인 의상대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없다. 혜공왕대의 고승인 진표율사는 입적 뒤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시체를 옮기지 않고 공양하다가 해골이 들어나자 흙으로 덮어 묻고 유궁(幽宮)을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서 유궁이란 분묘를 말하는 것이며 이는 토장의 예를 보이고 있다.이처럼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수된 후에도 승려들의 장례법은 전통적인 방식인 토장이나 풍장을 했으며 비록 화장을 했다하더라도 묘탑을 건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부도가 세워지기 시작한 때는 언제부터 일까? 문헌상으로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부도로는 정관 연간(貞觀 年間:627~649)에 세워진 원광법사 혜숙(惠宿)의 부도탑으로 『삼국유사』에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내용은 기록뿐으로 지금 남아 있는 유구가 없다. 당시 중국에 있어서도 이미 이러한 묘탑을 건조하였는데 그 실례로 당나라의 초당사 구마라습 사리탑을 들 수 있다.당시 당나라와의 관계로 보아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묘탑 건립의 추정은 당연한 일이지만 오늘에 이르러 실물을 대하지 못하여 증명할 수 없으니 결국은 우리나라 부도의 기원을 정관대로 추정함도 문헌상의 일일 뿐이다.이후 신라 헌덕왕 5년(813)에 건립하였다는 단속사 신행선사비에 부도의 존재를 알리고 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고 이후 실물로 볼 수 있는 부도 중에서 건립연대가 확실한 것 중 가장 오래된 부도는 문성왕 6년(844)에 건립된 염거화상탑이다.이 문성왕 6년의 연대는 문헌상의 기원으로 추정하고 있는 정관 연간에서 약 200년이나 뒤진 때인데 이렇듯 2세기 동안의 공백기가 있었음은 무으로써 선풍을 크게 일으켰으며 각 선문에는 그 법문의 개산조(開山祖)와 개산인(開山人)의 순서로 뚜렷한 일종파의 계보가 확립되었다. 각 선문의 제자들은 그들의 조사를 숭상하여 입적 뒤에는 후세에 길이 보존될 조형적인 장골처를 남기려고 했는데 그 뜻에서 나타난 것이 석조부도이다.즉 선종불교의 유입으로 선종불교의 선통(禪通)이나 법맥(法脈)을 계승한 스님이나 불법을 크게 중흥시킨 스님을 기념할 상징물의 필요성 때문에 석조부도의 조성이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4. 부도의 양식우리나라에서 건립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 된 부도는 염거화상탑으로 우리나라 석조 부도 양식의 계통을 세운 것이다. 이 부도는 8각형을 기본으로 하여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 등의 기단부는 물론이고 이 위에 놓이는 탑신 괴임대, 탑신부, 옥개석, 상륜부까지 모두 8각으로 조성되어 층층이 쌓인 것으로 전체적인 평면이 8각인데 이러한 형식의 부도를 이른바 8각 원당형이라 일컫는다. 이후 신라시대에 건립된 석조부도는 모두 이러한 형태를 기본으로 삼고 있으니 우리나라 석조 부도의 전형은 곧 8각 원당형이라 하겠고 그 정립은 역시 9세기 후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8각 원당형의 어원을 살펴보면 『불교대사전』에 8각당을 설명하되 “8각 8릉(八角八楞)이란 본래 아미타의 삼매야형(三昧耶形)으로 미타와 관음의 전당(殿堂)은 대개 8각이며 8각당을 원당이라 함은 8각이 거의 원형인 까닭이다. 관음의 정토 보타락산(補陀落山)이 8각이란 것도 이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건축사전』에는 “건축학적으로 보아 평면이 8각인 건물은 8각 원당형 건물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외형으로는 8각이 원형에 가깝기 때문에 8각의 건축물을 8각 원당형의 건물이라 하고 불교적인 내용에서 볼 때는 아미타와 관음의 전당이 대개 8각 원당이었다는 것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일본에서는 이러한 8각당의 유례를 보이고 있는데 법륭사 동원의 몽전(夢殿)과 영산사의 8각당이 그 대표라 하겠다. 특히 법륭사의 몽전은 선사들의 대표적인 부도탑1) 진전사지 부도(보물 439호)이 부도는 건립연대가 9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이곳 진전사에 40년 동안이나 은거한 도의선사(道義禪師)의 부도일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이러한 추측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으니 당시 우리나라에 선풍을 전하고 일으킨 사람이 바로 도의선사이며 진전사는 도의선사가 머물면서 염거화상(廉巨和尙)에게 법을 전해준 곳이다. 또한 도의와 염거는 우리나라 최초의 산문인 가지산문의 개산조와 제2조로써 추앙받고 있다.이 부도의 특징은 기단부와 탑신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신라시대 석탑의 일반적인 형태인 방형 2층 기단 위에 8각 탑신석과 8각의 옥개석을 쌓은 특수한 양식이어서 8각 원당형 석조 부도의 전형 양식이 정립되기까지의 시원적인 양식을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2) 염거화상탑(국보104호)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정립한 탑으로 이 부도는 8각형을 기본으로 하여 기단부는 물론이고 탑신부와 상륜부까지 모두 8각으로 조성되었다. 이후 신라시대에 건립된 석조부도는 모두 이러한 형태를 기본으로 삼고 있으니 한국 석조 부도의 전형은 8각 원당형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정립은 염거화상탑이라 할 수 있다.염거는 가지산문의 2대 조사로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서 주로 머물렀으며 체징(體澄)에게 법을 전했다.3) 대안사 적인선사조륜청정탑(보물273호)전남 곡성군 죽곡면 대안사에 있는 이 탑은 신라 구산선문 중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개산조 적인선사(寂忍禪師) 혜철(惠哲)의 부도탑으로, 혜철 스님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이 탑은 전체적인 형태가 모두 8각형으로 이루어져 통일신라시대 부도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탑 옆의 비문을 보면, 적인선사는 신라 원성왕 1년(785)에 태어나 경문왕 1년(861)에 입적하였다. 따라서 이 부도탑도 적인선사가 돌아가신 86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4) 쌍봉사 철감선사탑(국보57호)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중리 쌍봉사(雙峰寺)에 세워져 있는 철감선사(澈監禪師) 도윤(道允)의 부도이다. 철감선사는 통일신라
    인문/어학| 2007.01.16| 7페이지| 1,000원| 조회(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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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학]한국의 석탑 평가A좋아요
    1. 한국석탑의 시원양식우리 나라에서 석탑이 발생한 시기는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경으로 추정된다.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후반까지 약 200년간은 木塔의 건립시기로, 오랜 목탑의 조성에서 쌓인 기술과 전통의 연마가 드디어는 석탑을 발생하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의 목탑은 삼국이 모두 중국의 高樓形 木塔樣式의 조형을 모방하여 누각형식의 다층으로 건립하였을 것이며, 방형 혹은 다각의 평면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생각은 현재 남아 있는 평양 청암리사지에서 8각전의 8각탑파와 대동 상오리사지에서 8각당의 기단부가 조사되어 고구려 목탑지로 추정된 바 있다. 백제의 유구로는 부여 군수리사지와 익산 제석사지에서 방형의 목탑 기단부가 확인되었다. 신라의 유지로는 경주 황룡사지에 거대한 방형 9층목탑지,사천왕사지의 목탑지,망덕사지의 목탑지,보문사지의 목탑지,기림사의 목탑지가 남아 있다.목탑의 유행에 이어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러 백제에서 석탑이 건조되었는데, 그 양식은 당시에 유행하던 목탑을 본뜬 것이었다. 석탑이 백제에서 비롯된 데 대해서는 몇 가지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백제는 삼국 중에서 가장 건축이 발달하였던 나라로 이미 '寺塔甚多'의 나라로서 널리 알려졌으며, 또 신라의 황룡사구층목탑을 건립할 때 백제의 아비지가 초빙되어 공사를 담당하였으며, 일본의 초기사원 창립에 백제의 瓦博士 등이 건너가 공사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런 발전 하에서 백제에서는 7세기 초반에 이르러 석재로 목탑을 모방하여 탑을 건립함으로써 석탑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백제시대의 석탑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뿐이지만 이2기의 초기석탑에서 석탑의 발생과정을 살펴 볼 수 있다. 우선 미륵사지석탑은 현재까지 원위치에 남아 있는데 이 탑을 한국석탑의 시원으로 보는 이유는 그 양식이 목탑과 가장 흡사하다는 점에 있다. 이 탑은 당시 유행되던 목탑의 각 부 양식을 목재 대신 석재로 바꾸어 충실하게 구현한 것으로, 특히 기단부모방한 것으로 광대한 석단 위에 5층의 탑신부를 구성하고 있는데, 탑신을 받기 위한 1매의 판석과 옥개의 상하받침이 5단인 점, 기단이 광대한 점등은 곧 분황사석탑과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석탑은 분황사석탑과는 달리 새로운 착상과 古手法의 간략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컨대 기단이 잘 정비된 건축기단의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탑신부의 옥신에는 우주 외에 탱주1개를 만들었고, 사방에 설치하였던 감실을 한 면에만 두고 있는 점이다. 따라서 이 석탑은 백제의 두 탑과 같이 기단부의 우주,탱주나 옥신의 우주, 柱部에 엔타시스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이 석탑도 백제의 두 석탑과 같이 양식발생의 초기 유구에 속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의 탑들에서 살펴보았듯이 백제계의 석탑은 화강암을 전용하여 목탑계 양식을 따른 반면, 신라는 화강암을 혼합하였으되 안산암을 주재료로 삼아 전탑계양식을 모범으로 삼았다. 또 양국의 초기석탑은 그 기본평면을 정방형으로 하여 다층을 이루었다는 사실과 석재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2. 신라석탑의 전형양식백제와 신라의 초기 석탑들은 서로 그 양식을 달리해서 출발했지만, 얼마 뒤 하나의 양식으로 통일을 보게 된다. 여기에서 비로소 한국 석탑의 전형이 성립되었는데, 이러한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바로 신라의 삼국통일이다. 신라의 석탑은 삼국통일과 함께 백제와 고신라의 각기 다른 두 양식을 종합하여 새로운 양식을 갖추게 되었다. 새로운 계기를 맞아 집약, 정돈된 형식으로 건조된 석탑 중 가장 시원적인 양식의 표본을 보이고 있는 것은 감은사지동서삼층석탑과 고선사지삼층석탑이며, 그 뒤 월성 나원사지오층석탑과 장항사지동서오층석탑을 거치고, 황복사지삼층석탑의 과도기적인 양식을 거쳐, 8세기 중엽에 이르러 불국사삼층석탑(석가탑)에서 전형적인 양식의 정형을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이 8세기 중엽에 완성된 신라식 일반형 석탑의 정형은 그 뒤 전시대를 통하여 오랫동안 지켜진 형식으로, 이러한 방형평면의 기본 양식과 괴체성의 중층 형식은한 변형은 조형미술품 자체의 양식적인 여러 가지 여건에 기인되었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다. 9세기 이후 신라왕실의 골육상쟁과 지방군웅의 할거로 사회가 혼란해져서 예술성이 위축되고, 특히 조형미술은 힘찬 기상에서 섬약으로 변했으며, 따라서 자연히 각기 조형물의 규모가 작아지고 각 부의 양식도 약화, 생략된 변모를 보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하층기단의 탱주도 2주에서 1주로 줄어들고 옥개받침도 5단에서 4단으로 약화된 형식의 석탑이 신라하대의 말기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남원 실상사동서삼층석탑을 비롯하여 합천 월광사지동서삼층석탑, 경주효현동삼층석탑 등이 모두 이러한 예에 속한다.신라 하대에 이르면 또 하나의 변형된 작풍이 생겨난다. 즉 일반형 석탑에서 기단부의 구조가 2층기단이라는 기본형을 벗어난 단층기단으로 변화하여 그 위에 탑신부를 받고 있는 형식이다. 이 형태는 양식적으로는 낮은 하층기단이 생략되어 지대석 위에 바로 하층기단이 놓이게 된다. 이러한 양식이 나오게 된 동기는 목조건축의 기단이 단층이고 목조건축을 모방한 백제계의 석탑들이 모두 단층기단인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단층기단을 갖춘 작품에서는 여러 개의 장대석을 결구하여 지대석을 마련한 위에 기단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따금 통례와는 달리 지대석 대신에 자연암반 위에 기단면석을 조립한 석탑도 볼 수 있다. 경주 남산 용장사지삼층석탑 같은 것은 자연암반의 상면을 평평하게 다듬고 높직한 굄대를 마련하여 기단을 받았는데, 단층으로서 2층기단부의 상층만을 놓은 것 같은 형식으로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그리고 옥개받침은 각 층 4단씩으로 역시 1단이 줄어들고 있다. 한편, 이러한 형식들의 석탑은 곧 고려시대의 석탑 건조양식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신라시대 전형적인 기단양식은 2층기단의 석탑이 유행하는 한편, 이와 같은 단층기단의 석탑도 많이 건립되어서 그 유례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신라석탑의 양식과 그 변천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형양식의 정되었으며, 동시에 전형적인 석탑 그 자체에도 여러 가지 변화를 보게 되었다. 이형석탑이란 석탑의 건조양식이나 각 부재의 결구방법이 전형적인 양식의 정형에서 벗어나 외관상으로 특이한 형태를 보이는 탑을 말한다. 즉, 방형 중층의 일반형 석탑의 기본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의 정형에서 탈피하여 외관상으로 특수한 가구를 보이는 것인데, 이형석탑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형태로 분류하여 볼 수 있다. 첫째, 이형적인 석탑으로서 석탑의 건조방법이나 각 부재의 결구방식이 전형적인 양식의 정형에서 완전히 벗어나 외관상으로 특이한 형태를 보이는 석탑이다. 이러한 유형에 속하는 석탑은 대체로 8세기 중엽부터 그 뒤에 나타난 것으로서 불국사다보탑,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 화엄사원통전전사자석탑, 정혜사지십삼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장식적인 석탑으로 외형은 신라의 전형양식인 방형중층의 기본형을 갖추고 있으나 기단부 및 탑신부의 각 면에 天人像, 四天王像, 八部神衆像, 十二支神像, 四方佛, 菩薩像, 仁王像, 眼像 등 여러 상을 조각하여 표면장식이 화려하며 장중한 석탑이다. 여기에 속하는 석탑으로는, 원원사지동서삼층석탑, 화엄사서오층석탑, 경주남산동서삼층석탑, 실상사백장암삼층석탑, 진전사지삼층석탑, 선림원지삼층석탑, 산청범학리삼층석탑, 중흥산성삼층석탑, 경주남산승소곡삼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셋째, 탑신부는 방형중층의 전형을 보이고 있으나 기단부는 전혀 다른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철원 도피안사삼층석탑의 경우 탑신부는 방형평면이나 기단부에서 8각형의 평면을 이루어 하층기단 면석에 안상이 조각되고,상층기단 상하갑석에 앙련과 복련을 조각하여 마치 불상대좌와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석굴암삼층석탑은 탑신부는 방형중층으로 전형적인 일반형 석탑의 탑신을 이루고 있으나 기단부에서는 전혀 이형적인 구성을 보이고 있다. 즉, 상하 2층의 기단이나 평면은 면석과 갑석이 같지 않고 면석은 8각형으로서 각 모서리에 우주가 각출되었고 갑석은 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이다. 예천 개심사지오층석탑의 명문, 칠곡 정도사지오층석탑내에서 발견된 造成形止記등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 시대에는 대부분 그 지방민의 발원에 의하여 석탑이 건립된 것으로 믿어진다. 이것은 고려시대 석탑을 전국적으로 분포시키는데 보다 큰 영향력을 끼쳤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려 석탑의 양식상에 다양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즉, 전대의 왕도 중심의 일률적인 탑파건립에서 벗어나 각 지방의 토착 세력이 건탑에 관여하였을 때 일률적인 규범보다는 각기 제 나름대로의 특징이 반영되어, 곧 다양성 있는 건탑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시대의 석탑은 그 조형양식상에 다양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신라의 고도인 경주를 중심으로 볼 때 어느 정도 신라석탑계를 충실히 계승하면서 세부에 있어 변형을 보이고 있다. 개심사지오층석탑은 연화문이 조식된 판석 1매를 끼워 탑신굄대를 삼고 있으며, 정도사지오층석탑은 하층기단면석 각 면에 3구씩의 안상이 있고 그 내면에 지선으로부터의 귀꽃무늬가 조식되어 있어 주목을 끈다. 또 개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남계원칠층석탑, 현화사칠층석탑, 흥국사칠층석탑 등과 같이 일반형 방형중층석탑이 고려석탑으로서의 특징을 지니면서 유행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도 광주 춘궁리오층석탑, 안성 죽산리오층석탑, 천안 천흥사지오층석탑, 김제 금산사오층석탑, 청양 정산서정리구층석탑 등 상당수의 일반형 석탑이 건립되었는데, 모든 면을 계승하고는 있으나 옥개석의 낙수면이 급경사를 이루고 추녀가 직선에서 곡선으로 변하였다든가 단층기단이 많아지고 상층기단갑석의 부연이 형식화되거나 생략되는 등 부분적으로 약화되고 둔중해진 고려석탑 특유의 작풍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회의 새로운 성격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10세기 후반부터는 양식상 전대에 비하여 현저한 변화를 보인다. 그러한 고려석탑의 새로운 양상으로서 첫째, 지방적인 특색이 현저해진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신라시대에 있어서는 석탑에서 지방적 특색을 별로 찾아하다.
    인문/어학| 2007.01.16| 7페이지| 1,000원| 조회(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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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경제의 발전성과와 과제
    한국경제의 발전성과와 과제1. 경제발전과 사회발전(1) 경제발전의 개념선진국의 경제성장에서는 생산요소 부존량의 증가와 기술진보에 따른 생산능력의 제고에만 관심을 집중할 수 있다. 그러나 후진국의 경제성장에서는 생산능력의 제고뿐만 아니라 전통적 사회구조의 근대화, 공업화, 인적자원개발 등 구조적인 측면의 질적 향상에도 주력해야 한다. 후진국의 구조적인 측면의 향상을 강조하는 뜻으로 경제성장과 구별하여 경제발전(economic development)이라는 말이 쓰여져 왔다. 경제성장이 주로 양적인 증가를 나타내는데 반하여, 경제발전은 질적인 향상을 강조하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한국경제는 1960년대에 들어 본격적인 자본주의 경제발전기에 들어서게 된다..이러한 발전은 해방이후 나타난 제반 문제점을 배경으로 성립된 한국특유의 경제발전이다.즉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자본축적을 자생적으로 이룩하지 못한 상태에서이뤄낸 한국특유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경제성장)분석기간 중 1인당 실질GNP 또는 GDP의 증가로서 양적 변화를 그 내용으로 함.(경제발전)GNP or GDP증가와 더불어 발생하는 경제구조의 지속적인 개선과정을 말함.지속적인 기술진보와 경제제도의 개선에 근거하는 국가생산능력의 장기적 증가와 이에 부응하는 국민들의 이데올로기 및 의식구조를 총칭하는 질적 변화내용을 강조(2) 경제발전과 사회발전의 관계경제가 발전하게 되면 많은 새로운 기업이 생겨나고 분업이 일어나며 기능을 달리하는 많은 경제, 사회단체가 생겨난다. 그러면 이들의 이익은 서로 충돌되기 쉽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을 원만하게 조정하기 위한 법률이나 규칙이 제정되고 운영되어야 한다. 이렇게 경제가 발전함으로써 여러 경제주체의 이해관계가 엇갈려서 이에 대한 합리적이고 공정한 조정이 필요한데도, 이에 대한 법률이나 규칙이 불합리하고 무리한 것이라면 결국 경제발전 자체가 저해될 것이다. 경제발전에 따른 사회발전과의 관계를 살펴보면,1 법률이나 관습 및 사회구성원의 가치관이 경제발전과 순조롭게 조화를위한 인구층의 교육수준이 높았음을 지적할 수 있다.그러므로 우리는 소득분배에 관한 시계열통계기준으로는 우리나라 소득분배의 실상과 그 변화 동향을 파악하기 곤란하며 통계를 기준으로 선성장 후분배의 원칙의 성장전략을 평가하기 어렵다고 하겠다. 따라서 기존의 소득분배에 관한 지표보다는 경제개발과정에서의 사회개발부문에 대한 투자배분 비중이나 정부예산 중에서의 상호개발비 지출비중이 더 중요할 것이다. 또한 각종 사회보장적인 제도의 도입과정도 평가에 도움이 될 것이다.중앙정부세출의 기능별 분류자료에 입각해서 총세출에 대한 사회개발비지출비율을 계산해보면 동 비율은 1960∼70년대에는 대체로 7∼8%수준에서 큰 변화가 없었으나 198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상승하여 1990년대 초반에는 약20%수준으로 증대되고 있다. 이것은 정부가 사회개발분야에 관심을 갖고 보다 높은 비중의 재정자금을 배분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라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보겠다. 또한 의식주의 3대기본생활 요건 중 하나인 주택문제에 대한 정부정책의 강도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 주택보급률도 1960년대 중반의 81%에서 1988년에는 69%수준으로 계속 낮아지는 추세를 보였던 것이다. 그 밖에도 상수도 보급률, 전화보급률 등의 사회개발지표도 1980년대 들어와서부터 급격히 개선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분배면의 개선을 위해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 것을 보더라도 정부가 1997년에 직장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하기 시작했지만 농어촌지역과 전도시지역까지 의료보험제도를 확대 실시한 것은 만 10년후인 1988∼89년부터였다. 우리나라 최저임금제도가 도입된 것도 1987년부터이며 또한 국민연금제도가 실시된 것도 88년부터이다. 실업보험제도는 1995년 7월부터 부분 도입되도록 되어 있다. 이런 분석결과에 의하면 우리 나라는 고속공업화에 의한 성장우선정책을 대체로 1980년대 중반까지 지속하고 그후부터 비로소 분배측면에 대한 정책적 배려를 하기 시작했음을 나타낸다고 보겠다.2) 수출이 경제 발전전략의 중심을 이후기발전(late development)'이 항상 고도의 국가개입과 관련 되어 왔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그는 19세기의 독일과 러시아와 같은 후발산업 국가들이 영국과 같은 선발국가를 따라 잡기(catch up)' 위해서 강력한 국가개입이 필요했 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의 경제개입은 얼마나 경제가 후진적인가와 관련이 있으며, 후진국 일수록 더욱 국가의 개입이 컸다는 사실을 밝혔다대외지향적인 공업화 추진과 무역확대를 통하여 후발성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3 성장의 초기단계에 세계경제여건이 양호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1960년대 중엽에 한국이 경공업제품의 수출촉진을 통한 대외지향적인 공업화전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을 때 세계경제는 자유무역주의 사조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외여건이 수출의 급속한 신장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대외요인- 2차대전후 자유무역주의 확산으로 교역량 증가와 세계경제의 성장세 지속{60년대70년대80년대90~94·세계성장(%)·세계교역량(%)·한국수출증가율(%)--42.83.95.737.43.14.414.63.25.09.1주 : IMF, World Economic Outlook 각년호4 성공적인 경제발전 전략이다. 효과적인 경제개발계획과 추진체계의 확립으로, 62년부터 7차에 걸친 5개년계획 수립, 추진에 있다. 수출주도의 대외지향적 공업화 전략과 한정된 자원의효율적 동원과 배분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저축증대와 외자도입으로, 우선순위에 따라 SOC와 기간산업확충에 배분하였다.(총저축율: 62년 11%, 95년 36%) 또한 대내외 경제상황과 발전단계 변화에 맞는 적절한 정책대응으로, 60년대초∼70년대 중반 : 경공업중심의 수출주도 정책, 70년대중반∼80년대초 : 중화학공업중심의 산업구조개편, 80년대초∼87년 : 안정화, 자율화, 개방화를 추구, 88년이후 : 국민의 참여와 창의를 통한 경제발전을 볼 수 있다.2) 경제외적 측면1 사회적인 안정이 경제성장의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60al)한국경제의 물적자본 축적과정을 GDP에 대한 국내투자(I)비율을 보면 60년도에는 아주 낮은 수준이었으나 물적자본축적이 아주 급속하게 이뤄졌다. D. Rodrik에 따르면 한국의 경제발전의 근본원인이 수출보다 투자에 있다고 주장한다. 60년대에는 한국의 수출이 부진하였으나 이 당시의 투자는 높은 수준이었으며 이 것이 70년대 이후 높은 수출에 기여하게 된다. 한국이 수출증대정책을 펴게된 동기는 자본재수입을 위한 외환수요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보았다. 아울러 양질의 교육을 받은 한국의 노동력이 물적투자의 수익률을 높이는 요인이었으며 정부의 투자조정과 지원이 민간의 적극적인 투자를 유도하였다고 보았다.3)노동조건양적 측면: 단순노동량의 증가→저렴한 노동비용→노동집약적 산업의 발전 촉진질적 측면: 근로환경조건(=노동력/인구 or 유아사망률 or 기대수명과 같은 노동자의 건강상태변수)(노동조건의 특징)ⅰ)60-90년까지 총인구증가율은 점차 낮아졌으나ⅱ)총인구 중에서 차지하는 경제활동인구의 비중은 상당히 높은 수준임. ⅲ)유아사망률도 상대적으로 낮았으며 기대수명 증가폭도 높아 근로자들의근로환경(영양상태와 생활여건)이 급속히 개선되었음을 보여줌.4)인적자본인적자본은 자본주의의 외연적 경제성장과정에서 내포적 성장을 발생시키는 기본이 됨.인적자본은 학교교육 측면에서 볼 수 있음.(특징) ⅰ)전체인구중 중ㆍ고등학생이 차지하는 비중의 증가추이가 빠름.ⅱ)중ㆍ고등교육에서 남성보다 여성의 인적자본증가율이 높게 나타남.ⅲ)무교육 감소율이 아주 높음.5)기술발전자본주의 발전의 핵심적 동인은 거대한 자본의 축적과 우수한 인적자본에 근거한 기술혁신이다. 기술진보의 대용변수로는 GDP에 교육연수를 곱한 값으로 사용할 수 있음.(특징) ⅰ)한국의 기술발전 증가율이 상대적으로 놓으며ⅱ)여성의 기술발전 증가율이 남성의 그 것보다 높다(여성의 높은 교육참여 증가율 반영)6)자본정책개도국에 있어 정부정책은 자본축적 및 자원활용의 효율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침.Romer모형에서도 정부의 재정정책이 를 소홀히 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농업부문에 대한 정책의 미비는 이제 UR협상이 타결되면서 우리 농업전체가 위협을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대응책이 없다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다섯째, 한국경제발전전략의 또 다른 특징은 공업화가 외자에 크게 의존하여 추진되었다는 점이다. 산업화의 초기에 외자도입은 고용확대를 위하여 필요하였고, 외연적 성장을 달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외자도입은 부족한 자본을 충당하는 데에는 효율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외자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국내자본형성을 게을리하게 하였으며, 외자의 도입을 정부가 보증하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기업들로 하여금 자체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보다는 정부에 의존하게 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기업들의 이러한 태도는 기술개발에도 연장되어 자체적인 기술개발을 소홀하게 하였다.7. 한국경제의 발전과제와 대응전략(1) 한국경제의 발전과제우리나라는 그동안 이룩한 경제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많은 문제점도 안고 있다. 여기서 한국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농림어업의 상대적인 낙후현상을 들 수 있다.즉 농림어업이 GNP와 총취업인구에서 차지한느 비중은 계속해서 크게 감소 하고 있고, 농가소득은 도시근로자 가계소득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고, 농가부채는 증가하고 있으며, 농업노동력(농업취업자인구)은 고령화·여성화되고 있고, 식량자급률은 급격히 저하되고 있다.둘째, 제조업의 조로현상(早老現象)과 서비스 산업의 이상 비대화(異狀肥大化)를 들수 있다.즉 제조업이 GDP와 총취업자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88년을 고비로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 제조업은 한 나라 산업의 핵심이라고 할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러한 역할을 지속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제조업이 전반적으로 구인난을 겪고 있는 가운데 제조업의 상대적 축소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서비스 산업, 그중에서도 특히 소비형 서비스 산업이 GDP와 총취업자인구에서 차지하다.
    경영/경제| 2006.11.04| 15페이지| 1,500원| 조회(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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