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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문학]청대 산문
    청대(淸代)의 산문(散文)청대의 산문은 고문과 변문(騈文)을 포괄하고 있으며, 진?한?당?송의 문풍을 이어받아 그 시대적 독창성을 가지고 발전하였다. 그래서 고대 산문사에 있어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유대걸은 『中國文學發展史』에서 당시 문단의 학술적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청대 학술계의 고염무(顧炎武), 황종희(黃宗羲), 왕부지(王夫之) 등은 강렬한 민족 사상을 가진 선구자로서, 그들은 모두 ‘명경치용(明經致用)’의 문학관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문장이 아니면 모두 공론의 지나지 않은 것이라고 하여 반대하였는데, 그들의 주장은 당시 문단의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구체적인 내용이 없고 진실이 없는 의고적인 공허한 담론에 대해 맹렬히 반대하였다.1. 고문파(古文派)1) 청 초의 고문청 초의 산문 작가로는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 등이 있는데, 이들은 당대의 최고 학자들로 나름대로 문장의 특징이 있다. 황종희는 경세치용(經世致用)사상을 바탕으로 한 정감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질박하고, 고염무는 학문의 논리적인 전개가 탁월할 뿐만 아니라 문장이 간결하고 견실하며, 왕부지는 저작이 풍부하고 문장에 정감이 넘쳐흘러 종횡 무진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 뒤를 이어서 청 초 3대 산문 작가로 일컬어진 후방역(侯方域), 위희(魏禧), 왕완(汪琬)의 창작활동이 뛰어났다. 이들은 명말의 경박한 문풍을 배격하고 한유?구양수의 문장을 모범으로 삼아 평담하고 질박한 문장을 추구함으로써 명말의 소품문(小品文)이 유행하던 풍조를 바꿔놓기는 하였지만, 문학이 제대로 발전할 수 없는 청 초의 풍토 아래 이들의 산문은 그 내용이 대단치 못하다.이 청 초 학자들의 문장관(文章觀)은 경세치용(經世致用)에 관계없는 문장은 모두 쓸데없는 해로운 글이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근거하여 그들은 의고주의(擬古主義)도 반대하고, 성령파(性靈派)의 낭만주의적인 문장도 배격하였으며, 심지어 순문학(純文學)의 존재조차도 인정하지 않아, 이것이 청대 산문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문학관 아래서는 통속적인 소설이나 희곡은 요언야어(妖言野語)가 되고 말며, 성인(聖人)의 사상과 언행을 밝힌 글로서 세상을 바로잡고 인류를 올바로 이끌어갈 수 있는 내용을 담은 것만이 이상적인 문학의 대접을 받은 것이다.2) 청 중엽의 고문① 동성파(桐城派)앞의 후방역, 위희, 왕안 등은 비록 계통적인 문학이론을 세우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산문 창작이 활발하였고, 또 당시 문단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다시 고문 부흥 운동의 길을 열어 놓았다. 청 초에는 대체적으로 당?송 고문의 문풍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으나, 청의 중엽으로 접어들면서 사회적으로 더욱 안정되고, 차츰 화려한 변문의 문풍이 고문의 추세를 압도해갔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 구조는 이학의 현실적인 사상과 고증학의 실증적 사고가 학술 사상의 주류를 형성하였고, 따라서 부박한 문픙은 자연히 경시되고 맑고 질박한 문풍이 유행하게 되었다. 즉, 방포(方苞), 유대괴(劉大?), 요내(姚?)의 동성파 문인들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청대의 산문은 사실 이들의 천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모두 안휘(安徽) 동성(桐城)사람들이었기에 ‘동성파’라고 하였다. 이 동성파의 문장은 그들이 살아있었던 시기뿐만 아니라 계속 위세를 떨쳐 그 영향은 청 말에까지도 미쳤다. “말은 사물이 있어야 한다(言有物).”, “말은 차례가 있어야 한다(言有序).” 라는 등의 ‘의법(義法)’을 주장하였다. 문장의 내용은 ‘통경명도(通經明道)’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또 문장을 창작함에 있어서는 의리(義理), 고거(考據), 사장(詞章)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방포(方苞)의 문장론동성파의 주장은 청 초 고염무를 비롯한 대학자들의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위한 문장관을 문학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성파의 창설자인 방포(方苞)의 문장론을 간추려 동성파 문장이론의 특징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첫째, 문장가는 문인인 동시에 성인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곧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는 문장을 잘 쓰기는 했지만 육경(六經)의 근거가 약하고 도(道)를 충분히 담고 있지 못했으며, 정자(程子)나 주자(朱子)는 내용은 좋지만 문장 자체가 좋은 편이 못되었다 하여, 문장과 도, 또는 문인과 성인의 일체화(一體化)를 이상으로 내세웠다.둘째, 의법(義法)을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의(義)란 유교의 도의(道義)로서 특히 공자(孔子)의 《춘추(春秋)》의 의(義)를 바탕으로 삼고, 법(法)이란, 《춘추》의 포폄(褒貶)을 체득하여 《좌전(左傳)》?《사기(史記)》 및 당송팔대가의 고문의 법을 종지(宗旨)로 삼는 것이다. 곧, 전술한 도(道)와 성인(聖人)은 의(義)에 해당하고 문장과 문인은 법(法)에 해당한다 하겠으며, 의(義)는 내용이고 법(法)은 조리(條理)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두 가지를 겸하는 것이 이른바 동성파 문장에서 바라는 최고의 이상인 것이다.셋째, 고문은 시?사?부와 같은 순문학과는 엄연히 구별되고 소설?희곡과 같은 속문학은 함께 논할 수 없는 것으로 더욱 경시(輕視)했으며, 고문 문장의 최고 규범은 육경?《논어(論語)》?《맹자(孟子)》이고, 다음은 《좌전》?《사기》, 그리고 그 다음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이며, 명대에는 귀유광(歸有光)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결국 문장은 한유?구양수 등 고문가의 글을 표준으로 하되 학문은 정호(程顥)?주희(朱熹) 등의 철학을 기반으로 하여, 도학(道學)의 오지(奧旨)를 천명하고 인륜풍화(人倫風化)에 유관한 문장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넷째, 문장의 표현은 아결(雅潔) 또는 아순(雅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문장을 짓는데 있어 피해야 할 것을 다섯가지로 나누어 제시했다. 그 하나는 선가(禪家)나 송대 성리학자(性理學者)들이 흔히 쓴 어록체(語錄體) 즉, 통속적인 설화체(說話體)에 가까운 백화(白話)이고, 그 둘은 위진(魏晋)?육조(六朝) 때 사람들이 쓴 화려한 문구, 곧 지나치게 수식하고 대구(對句)를 맞추는 변문(騈文)이며, 그 셋은 한대 부(賦)의 길게 늘어놓기만 하는 답답한 표현 방법이고, 그 넷은 시가에서 쓰이는 재치만을 내세우는 표현이며, 그 다섯은 《남사(南史)》?《북사(北史)》 가운데 쓰이는 교묘한 말투, 곧 경박하고 속된 표현을 말한다.이러한 주장 때문에 동성파의 문장은 용어가 빈약하고 웅대한 맛이 없으며 극도로 순정(醇正)하기만 하는 등 이론 자체에 적쟎은 모순을 지니고 있기도 했으나, 방포에 이어 유대괴가 나오고 유대괴 자신은 작품이나 이론에서 더 많은 발전을 기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문하에서 동성파의 대가인 요내가 배출되고 그 밖의 수많은 문장가들을 길러내어 동성파로 하여금 크게 위세를 떨치게 하는 발단을 마련하였다.●유대괴(劉大?)의 문장론그는 방포의 문하생이며 요내의 스승으로, 고문에 뛰어났다. 문집으로 『해봉집(海峰集)』이 있다. 그는 독특한 산문이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승인 방포의 문학이론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켰으며, 방포에 비하여 ‘의법’에 그렇게 구속을 받지 않았으나, 그 의법에 ‘신기(神氣):작자의 정신’ 와 ‘음절(音節):문자의 음조(音調)’을 보충하여 문장의 문학적인 미를 추구함으로서 방포의 너무나 엄격한 문장 용어로부터 벗어나 문장의 예술성을 살려보자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요내(姚?)의 문장론그는 유대괴의 제자로 방포?유대괴의 문학 이론을 계승하였으며, 그가 편찬한, 진?한으로부터 방포?유대괴에 이르기까지 각가의 고문을 엄선, 분류하고 문체에 대한 간략한 해설을 첨부한『고문사류찬(古文辭類纂)』은 동성파 문학 이론을 널리 선전하게 되었음을 물론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산문은 짜임새가 있고 언어가 다듬어졌으며, 자연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 색채가 맑고 고와 생동감이 넘쳤다. 그리고 한대 훈고학과 송대 성리학의 겸비를 이상으로 삼고, ‘의리’, ‘고증’, ‘문장’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추구했다. 또 〈자서(自序)〉에서 둔장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문장의 요건으로는 신(神)?이(理)?기(氣)?미(味)?격(格)?율(律)?성(聲)?색(色) 여덟 가지를 내세웠다. 이 중 전 4자는 문자의 내용과 정신을 말하고, 후 4자는 문장의 수사(修辭)와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요내는 만년에 남경(南京)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서 강석(講席)을 펴, 그 문하에서 방동수(方東樹)?관동(管同)?매증량(梅曾亮) 등의 저명한 제자들이 나와, 이후 고문을 짓는 사람들은 모두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 증국번(曾國藩)의 문장론동성파의 문장은 요내 이후로 청대 문장의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이렇다 할 대가가 나오지 않고 있다가 청 말에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을 평정하여 유명한 증국번이 나와 다시 한번 동성파의 위세를 크게 떨치게 했다. 그는 학술에 있어서는 한학(漢學)과 송학(宋學)을 조화시키려 하였고, 문장은 방포와 요내를 계승하고, 시는 황정견(黃庭堅)을 좋아하여, 청 말 송시(宋詩)의 주창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매증량(梅曾亮)에게서 동성파의 문장을 배웠으나, 자기 스스로 그 내용을 충실히 함으로써 시세(時勢)의 요청에 응하려 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방포의 “화려하고 특수한 표현은 쓰진 않는 것”과 요내의 “웅장한 기운과 진취적인 자세가 적은 것”에 불만을 느끼고 동성파의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한서(漢書)」와 「문선(文選)」을 추천하였지만, 변문은 반대하였다. 그리고 요내의 「고문사류찬(古文辭類纂)」이 글을 짓는 교과서로서의 문장만을 뽑고 있는 데 불만을 느끼고, 경(經)?사(史)?자(子) 부의 문장까지 보충하여 「경사백가잡초(經史百家雜?)」26권을 편찬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의리(義理)와 고증(考證)와 사장(詞章)을 융합시키는 그의 포부를 느끼게 된다.
    인문/어학| 2006.05.31| 5페이지| 1,000원| 조회(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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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문학]건안문학
    건안문학(建安文學)건안(建安/196~220)이란 동한(東漢)의 마지막 황제의 연호(年號)이다. 이 시기는 황건적(黃巾賊)의 난으로 말미암아 동한(東漢) 왕조는 명목상 존재하였지 실제로는 거의 멸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중앙정부가 통제력을 잃게 되자 지방의 군벌들이 각기 군사력을 바탕으로 항거하게 되었으며 수년간의 투쟁을 거쳐 마침내 위촉오(魏蜀吳)의 삼국시대를 열게 된다. 이 시기는 전통적인 유가사상이 힘을 잃게 되면서 사상계는 전에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도가(道家) 사상과 법가(法家) 사상이 유행하게 되는데 이런 현상은 중국의 경우 난세(亂世)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근엄한 유가 사상의 질곡에서 벗어난 당시 사람들은 문학 창작에 있어서도 유가 사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포부와 감정을 표현하게 된다. 아울러 각종 문학 체제도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공전의 발전을 거듭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시가(詩歌)의 발전은 눈부셨다. 일반 민중들의 입장에서 난세(亂世)는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풍부한 문학 소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문학가에게는 오히려 좋은 환경이었다고 하겠다.이 시기에 활약한 작가로는 조조(曹操)를 비롯한 그의 아들 조비(曺丕)와 조식(曺植)이며, 이들을 일컬어 조씨삼부자(曺氏三父子)라 한다. 그 외에 건안칠자(建安七子)라 하여 일곱 명의 뛰어난 작가들이 있었다. 조씨 삼부자와 그들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이룩한 문학 집단의 문학을 건안 문학이라 부른다.건안풍골(建安風骨)동한(東漢) 왕조가 무너지면서 기존의 모든 가치관도 격렬한 해체 과정을 겪게 된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전통사회와의 단절을 경험하게 되면서 정신 세계 역시 공전의 격변을 겪게 되는데, 그 이전까지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가사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좀더 광활하고 좀더 통달된 인생관으로 세계를 관조하게 되었다. 건안(建安) 시기의 문인들은 난세에 태어나 인생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현실을 직시하고 호방한 기개로 세파를 헤쳐 나가려는 활력 넘u qu ri k? du?慨當以慷 憂思難忘, 절로 나오는 감개무량/ 근심 걱정을 잊을 수 없어k i d ng y? k ng y?u s? n n w ng w ng何以解憂 唯有杜康 어떻게 근심을 풀거나/ 오로지 술이로다he y? ji? y?u wei y?u du k ng靑靑子衿 悠悠我心 푸르디 푸른 그대의 옷깃/ 내 마음 끝없이 이어지네q?ng q?ng z? j?n y?u y?u w? x?n但爲君故 沈吟至今 바로 그대 때문에, 나는 아직도 고민한다네d n wei j?n gu shen yin zhi j?n明明如月 何時可? 밝디 밝은 저 달님을, 언제 올라가 따낼까?ming ming ru yue he shi k? duo憂從中來 不可斷絶 근심이 가슴을 적시며, 끊어지지 않는구나y?u cong zh?ng l i bu k? du n jue越陌度阡 枉用相存 멀고 먼 길 달려와, 왕림해 주셨으니yue mo du qi n w ng yong xi ng cun契闊談宴 心念舊恩 오랜만에 회포 풀며, 옛정을 나누노라xie kuo t n y n x?n ni n jiu ?n月明星稀 烏鵲南飛 달은 밝고 별은 드문데,yue ming x?ng x? w? que n n f?i繞樹三? 何枝可依? 나무를 세 바퀴 돌아 어느 가지에 앉을소냐.r o shu s n z he qi k? y?山不厭高 海不厭深 높은 산은 흙을 모아서고 깊은 물은 물줄기를 합친 것.sh n bu y n g o ha? bu y n sh?n周公吐哺 天下歸心 주공(周公)은 식사 중에도 반갑게 손님맞이하여 천하의 마음zh?u g?ng t? b? ti n xi gu? x?n 을 한곳에 모았다지.◆조비(曺丕/187-226)는 조조(曹操)의 둘째 아들로 조조(曹操)에 이어 위(魏)의 두 번째 황제가 되었다. 조비는 7년 동안 왕위에 있었지만 정치적 군사적으로 별다른 업적을 이룩하지 못했다. 그런데 중국 문학의 발전에는 크게 공헌하였다. 아무래도 아버지처럼 직접 전선(戰線)에서 생사(生死)의 위기를 넘나들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비 i s? j?n bu g n w ng不覺淚下沾衣裳 나도 몰래 눈물 흘러 옷 자락을 적신다bu jue lei xi zh n yi ch ng援琴鳴弦發淸商 가야금 뜯어 청상(淸商) 가락 울리며yu n qin ming xu n f q?ng sh ng短歌微吟不能長 단가(短歌) 나직히 불러보나 곡을 잇지 못하네du n g? w?i yin bu neng ch ng明月皎皎照我床 달은 휘엉청 침상을 비추고ming yue ji o ji o zh o w? chu ng星漢西流夜未央 은하수 서쪽으로 기울었으나 날은 아직 어두워x?ng h n x? liu ye wei y ng牽牛織女遙相望 견우와 직녀가 멀리 서로 마주보건만qi n niu zh? n? y o xi ng w ng爾獨何辜限河樑 그대들은 무슨 죄로 서로 떨어져 있는가?r du he g? xi n he li ng조비(曺丕)는 산문(散文)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는데 특히 그의 《전론(典論) 논문(論文)》은 중국문학사에서 최초의 전문적인 문학비평론으로 의의가 있다.● 참고---《전론논문(典論論文)》조비(曺丕)의 《전론(典論)》은 전해지지 않고 단지 《전론(典論)》 안에 있는 만이 소통(蕭統)의 《문선(文選)》이란 책에 실려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전론논문(典論論文)》이라 부른다. 논문(論文)이라 하면 우리는 보통 석사논문, 박사논문 등의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여기서는 문장(文章) 혹은 문학작품(文學作品)을 논(論)했다는 뜻이다. 조비(曺丕)의 은 중국 최초의 문학비평이란 점에서 의의가 있는 이외에도 문학(文學)의 의의와 지위를 긍정하면서 역시 최초로 문학의 풍격론(風格論)을 제시했고 또한 당시의 최고 문학가들의 문학작품을 공정하게 평가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전론논문(典論論文)의 주요 논점을 설명하면,첫째, 문학(文學)을 일컬어 「국가를 경영하는데 필요한 큰 일이며, 영원히 이름을 남기는 위업(偉業)」(經國之大業, 不朽之盛事)이라고 정의했다. 이 말은 간단한 것 같지만 실은 의미하는 바가 자못 크다. 국가를 경영하는데 있어서직업, 특히 문학가(文學家)끼리 서로를 경시(輕視)하는 풍습이 있는데 이는 잘못이라고 지탄했다. 당시로서는 모두 하기 힘든 그런 주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조식(曺植/192-232)은 조비(曺丕)의 동생이다. 조식은 총명하고 또한 재주가 뛰어나 아버지 조조(曹操)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으며 이로 인해 조조는 황제의 자리를 물려줄 생각까지 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조비(曺丕)가 황제가 된 후에 동생 조식(曺植)을 매우 박해했다고 한다.▶칠보시(七步詩)란?일곱 걸음을 걷는 사이에 시(詩) 한수를 짓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형의 말에 조식(曺植)이 바로 지어 바쳤다는 바로 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바로 형제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시기와 질투로 얼룩졌는지 시사하고 있다.煮豆持作羹 갱을 지으려 콩을 삶는 것은鹿시以爲汁("시"자는 ) 메주를 걸러 장을 만들려 함이라其在釜下燃("其"자 위에 초두를 붙여야 함) 콩깍지는 솥 아래에서 타고豆在釜中泣 콩은 솥 안에서 울고 있구나.本是同根生 본래 같은 뿌리에서 나왔거늘相煎何太急 어쩌 이리 급하게 볶아대는고.자신을 콩에 비유하고 핍박하는 형을 콩대에 비유했다. 가마솥에서는 끓는 콩이 마치 우는 소리라 비유한 것은 박해당하는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콩이나 콩대는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같은 부모로부터 태어난 형제임을 비유한 것이다. 서로 형제이면서도 이렇게 못살게 한다는 것을 전체 비유로써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은 비유도 비유거니와 조식(曺植)의 순발력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와 동시에 핍박당했던 당시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하겠다.★조식(曺植)의 작품은 크게 나누어 조조가 죽고 나서 친형 조비(曺丕)가 황제가 된 시점을 전후하여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전반기는 귀공자의 생활을 즐기면서도 과 같이 야심에 불타는 작품을 짓기도 하였느나, 후반기로 접어들면 억압과 핍박을 받으며 실의의 나날을 보냈기 때문에 울분이 가득찬 과 같은 작품을 지었다. 핍박 속에 우울한 나날을 보냈던 후기의 작품인 을 보면 비참한 처지에 탄식가야한다고 하면서 서쪽으로 가게 되었다wei d?ng er f n x?宕宕當何依 정처 없이 굴러다니며 무엇에 의지하랴d ng d ng d ng he y?忽亡而複存 이러다 죽는가 했더니 그래도 숨은 붙어있다h? w ng er fu cun飄床周八澤 이리 저리 날리며 한없이 호수를 맴돌고pi o chu ng zh?u b ze連翩歷五山 훨훨 날리며 이산 저산을 돌았네li n pi n li w? sh n流轉無恒處 떠돌이 생활 정해진 거처도 없으니liu zhu n mo heng ch?誰知吾苦艱 이 고생을 어느 누가 알아줄까shei zh? wu k? ji n願爲中林草 차라리 숲 속의 한 포기 풀이라도 되어버려yu n wei zh?ng lin c o秋隨野火燔 가을 밤 산불에 타게 되면q?u sui y? hu? f n?滅豈不痛 재가되는 게 어찌 아프지 않겠느냐만mi mie k i bu tong願與根?連 그래도 뿌리 근처에 몸을 뭍을 수 있겠지요yu n yu g?n g i li n여기 조식(曺植)도 형(兄)에 이어 형의 아들, 즉 그에게는 조카가 황제가 되었지만 대우는 별로 좋아지지 않았다. 평소에 품었던 웅지(雄志)는 무너지고 비분강개하거나 우울한 심사가 작품 전편을 물들게 한다. 그의 고민과 고통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지만 그의 문학에 깊은 맛을 보태주었다.조씨(曺氏) 삼부자(三父子)가 건안시대 문학의 창시자(創始者)이자 인도자(引導者)였다면, 그중 조식(曺植)은 최고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한 감정에서 우러난 시구(詩句)는 정련된 언어로 이어졌으며 대구(對句) 또한 볼만하여 건안 시기 시가(詩歌)의 예술성을 한 차원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정시(正始) 이후의 문학정시(正始)는 명제 [明帝/조비(曺丕)의 아들]에 이어 왕위에 오른 조방(曺芳)의 연호로 서기 240년-249년 사이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사마씨(司馬氏)가 실권자로 등장하여 황제를 세우거나 내쫓는 등 그 위세가 대단했기 때문에 조씨(曺氏)는 거의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사.
    인문/어학| 2006.05.31| 8페이지| 1,000원| 조회(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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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감상문]나쁜영화
    ‘나쁜 영화’를 보았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과연 이들의 생활을 문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라는 것이다. 술과 담배, 그리고 본드 등과 같은 환각제 속에 빠져서, 밤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미친 사람들처럼 질주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훔치고, 욕을 일삼고, 내일에 대한 기대도 없이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자기들만의 퇴폐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생활을 과연 문화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 이렇게 물어 본다면, 그들은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고, 그들만의 세상이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이 리포트의 주제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한다’ 라는 점에서 생각해 볼 때, 나는 그들의 문화(?)는 문화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국어 사전을 찾아봐도 문화란, ‘①세상이 깨고 발달함. 문명 개화. ②인간이 이상을 실현 해 가는 과정.’ 이라고 나와 있다. 과연 이들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버리고, 스스로 나쁜 길로 빠져드는 그들의 모습에서 어떤 문화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까? 사회를 부정하고, 사회에 대해 반항하며, 사회와 절대로 섞일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다.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이런 모습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생활에 빠져들게 된 과정이 어떻고, 그들이 그런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만약에 그들의 그러한 생활이 타의라면, 그리고 그들이 그러한 생활 속에서 이제 벗어나고 싶다고 느끼고 있다면, 벗어나고 싶은데 벗어날 수 없는 거라면, 그런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영화 중반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잠깐 나온다. 약간의(?) 문제를 일으킨 아이들을 어른들이 마구 구타하고, 말도 안돼는 이유를 대가면서 아이들을 때린다. 맞는 아이들의 눈빛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섭다. 이 장면에서 느낀 건, 그들이 그런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가 그들의 모습을 이해해주지 못했고, 그들의 행동을 더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그들의 대부분의 행동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나지만, 위와 같은 장면에서는, 만약에 저기에 내가 있었으면, 나라도 같은 세대의 입장에서 그들과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6.05.31| 2페이지| 1,000원| 조회(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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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감상]피에르&쥘
    처음에 선생님께서 ‘피에르 & 쥘’의 작품은 동성애를 주제로 한 게이 작품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과연 그러한 주제를 어떻게 표현해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었다. 전시작품들을 감상하며 전시회장을 한바퀴 돌아보고 나왔을 때는 그런 궁금증을 속시원히 풀었다기보다는 이런 어둡고 무거운, 사회에서, 특히 우리나라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할 주제로도 이렇게 멋있는 작품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는 데에 경이로움을 감추지 못했다.먼저 팜플렛에 나와 있는 ‘피에르 & 쥘’의 내용부터 살펴보면 “오늘날 ‘피에르 & 쥘’이라는 고유명사로 알려진 두 사람의 만남은 19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디자이너 겐조의 파티에서 만난이래 두 사람은 예술적으로, 동시에 인생에 있어서 3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공동작업을 해오고 있다. 특유의 화려한 인물사진으로 패션?광고계의 두각을 나타내던 사진작가였던 피에르와 회화를 전공했던 쥘의 전력답게 이들의 상호보완적인 공동작업은 장 폴 고티에, 카트린느 드뉘브, 이기팝과 같은 유명인들에서부터 무명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찍은 피에르의 초상사진에 쥘의 특유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장식적인 붓터치의 페인팅 작업으로 구현함으로써 완결된다.” 라고 명시되어있다.사진작가인 페에르와 회화를 전공했던 쥘의 만남은 정말 멋있는 작품들을 많이 탄생시켰다. 감상하는 동안 한결같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사진과 그림의 절묘한 조화였다. 사진의 주제를 더욱더 부각시켜주는 그림, 반대로 그림 속에서 살아 숨쉬는 듯한 표정의 사진들. 이 둘의 만남은 어쩌면 이미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감히 생각해보았다.기억에 남는 작품들을 몇 가지 살펴보면, 먼저 입구에서 두 번째로 볼 수 있는 작품으로 제목은 ‘엉덩이’이다. 한 남자가 분홍색의 짧은 여자 원피스를 입고 엉덩이를 드러낸 채 뒤를 돌아보고 있고, 주위에는 활짝 핀 해바라기가 둘러져있다. 전혀 매치가 되지 않을 것만 같은 소재들로 이루어져 있는 이 작품을 그들의 동성애적인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이런 것도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날카로운 눈빛과 안정된 복서의 멋진 자세 뒤에 그려져 있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한 웅장한 용(龍) 그림이 그려져 있는 ‘타이 복서’라는 작품은 앞에서 언급한 사진과 그림의 멋진 조화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숲속의 기쁨’이라는 제목의 작품도 있었는데, 작품 설명을 먼저 하자면 깊은 숲속에 큰 나무가 서있고, 나체의 남자가 쇠사슬로 그 나무에 묶인 체로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을 보는 순간 제목이 왜 ‘숲속의 기쁨’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에 나타나 있는 그 어떤 것도 전혀 기쁨과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데 왜 제목을 그렇게 지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반어적인 표현이었을까? 그리고 한가지 더 충격적이었던 건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고 있지 않은 남자의 나체 모습을 작품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충격적이라기 보다는 이런 미술 작품 전시회에서 본 적이 없는 지라,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보편적이 되었는지 잘 몰랐던 것 같다.또 ‘성 피에르보리’, ‘성 에리엔드’ 같은 작품에서는 목에 칼을 맞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사람을 표현한다든지, 머리에 돌이 박힌 채 울면서 서있는 사람을 표현한 것을 보고는 너무나 사실적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해서 이러한 작품들의 표현한계는 어디까지일까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거의 마지막에 가서는 두 남자가 한 명은 흰 드레스를 입고 있고, 한 명은 멋진 정장을 입고 결혼식 축하사진을 찍는 듯한 작품도 있었는데, 이걸 보면서 그들의 동성애적인 사상이 잘 나타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작품을 감상하며 전반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큰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은 ‘지로’, ‘이와이야’, ‘오사무’, ‘도코’, ‘밤부’ 등과 같이 작품의 제목이 사람이름만으로 된 것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물 사진 작가였던 피에르 사진에 쥘의 회화를 더했으니, 이것은 아마도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예체능| 2006.04.26| 2페이지| 1,000원| 조회(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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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문화]문학혁명운동
    1. 문학혁명의 시대배경?원세개(袁世凱) : 신해혁명 이후 정권을 장악. 신해혁명의 주체인 국민당 해체. 독재정치→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1915년 1월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였으며, 황제추대운동을 전개시켜 1916년 1월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1915년 운남(雲南)봉기를 계기로 도처에서 일어난 반원(反袁)운동의 확대로 인하여 영국?러시아?일본 등 주변 강대국도 황제제도 취소를 권고, 1916년 3월 황제제도 취소를 선언하였다. 그 후 계속되는 반원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6월에 사망하였고, 사망이후 각 지방의 군벌들의 정권탈취를 위한 온갖 계략으로 군벌간의 연합과 적대관계가 변화무쌍해 중국은 편할날이 없었고 국민들의 생활은 날로 도탄에 빠졌다.?五?四운동 : 중국의 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며, 또한 근대사?현대사의 새로운 기원을 여는 시기로 평가되기도 한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유럽 열강이 중국침략의 고삐를 늦추고 있을 때, 일본은 21개 조항 요구 등으로 중국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대전이 끝나자 독일에 대한 전승국인 일본?영국?프랑스?이탈리아?미국 등은 파리에서 평화회의를 개최하고, 독일이 중국 산둥성에 가지고 있던 권익을 일본에게 양보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에 분격한 베이징의 학생은 5월 4일 데모를 벌여 반대의 기세를 올렸다. 北京시내 대부분의 대학들이 천안문(天安門) 앞 광장에 모여, ‘강화도조약조인거부’, ‘일본의 21개조항 폐지’, ‘靑島반환’, ‘밖에서는 國權을 찾고, 안에서는 國賊(국적)을 처단하라’ 는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시위를 전개했다. 6월 3일, 군벌정부는 대규모 탄압을 감행하여 학생 약 1,000명을 체포하였다. 6월 3일의 이 사건은 광범한 민중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되어, 6월 5일부터 상하이 기타 도시에서의 노동자의 파업, 상점의 폐쇄 등으로 나타났으며, 전국의 각계 단체의 연합인 통일전선조직이 성립되었다. 이 五?四운동은 애국운동에 그치지 않고, 봉건주의에 반대하고 과학과 민주주의를 제창하는 문화운동의 요소를 띤 광범한 민중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2. 《신청년(新靑年)》과 문학혁명운동? 진독수(陳獨秀 1879~1942)1915년 5월 원세개(袁世凱)가 일본의 ‘대중국 21개조’를 수락한 이후 국내가 크게 소란하던 9월 에, 당시의 혼란한 국내사정으로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청년들을 계몽하기 위해 《청년잡지(靑 年雜誌)》라는 종합계몽잡지를 창간→ 1916년 9월에 출간한 제 2 권 1호부터 잡지명을 《신청년(新靑年)》으로 바꾸고 서양의 많은 문학작품을 소개? 호적(胡適)사회개혁을 하려면 먼저 문학개량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 ;〈문학개량에 대한 보잘것없는 의견〉(文學改良芻議), 1917년 1월 《신청년》제 2 권 5호에 게재→ ‘문학혁명운동’ 의 효시※〈문학개량의 대한 보잘것없는 의견〉에 이어 《신청년》(제 2 권 6호)에 陳獨秀이 〈문학혁명론(文學革命論)〉을 발표함으로서 胡適의 주장을 적극 지지하고 성원함⇒ 胡適은 문체인 형식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陳獨秀는 내용의 개혁을 주장(陳獨秀의 주장이胡適보다 더 구체적이고 강력함)? 유반농(劉半農)〈나의 문학개량관(我之文學改良觀) 신청년 제 3 권 3호(1917. 5)에 발표〉→ 胡適과 陳獨秀의 문화혁명 주장을 옹호〈역사적 문학관념론(歷史的文學觀念論)〉→ 역사적으로 보아 문학혁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성 역설〈시와 소설의 정신상의 혁신(詩與小說精神上之革新) 제 3 권 5호(1917. 7)〉→ 구체적인 詩와 小說의 혁신방향 제시⇒ 胡適과 陳獨秀의 문학개혁 주장은 곧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며, 陳獨秀는 1917년 1월에 北京대학의 文學院長으로 초빙되고, 胡適은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北京대학 교수로 취임했으며,《신청년》은 문학개혁의 산실로 제공되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모순이 있었다. 그들은 白話를 사용할 것을 제창하고 문학개혁을 주장하면서 그들이 출간하는《신청년》은 모두가 文言文으로 기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순을 깨닫고 1918년부터 과감하게 《신청년》을 백화로 전면 개편했다.3. 新文學의 탄생《신청년》제 4 권 1호(1918. 1)에 최초의 현대시 9수 발표 → 고시의 안목으로 보면 이것들은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닌 짧은 그 토막들을 늘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오랜 전통의 틀 속의 갇혀 있던 시의 형식과 내용을 해방시켰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傅期年(부기년) : 당시 北京대학 학생으로 교수들의 문학개혁에 호응하는 〈문학혁신의 뜻을 밝힘(文學革新申義)〉라는 글을 독자란에 발표 → 문학혁명은 본격적으로 학생들의 호응을 얻어 사회로 확산되기 시작? 胡適의 〈건설적 문학혁명론(建設的文學革命論)〉(《신청년》제 4 권 4호(1918. 4)에 발표)→ 모든 국민들이 알아보고 쓸 수 있는 말이 국어라고 하고, 이것으로 만들어진 문학은 ‘ 산 문학(活文學)’이고, 그렇지 않은 문학은 ‘죽은 문학(死文學)’ 이라고 하여 ‘산 문학’을 만들자고 주장? 李大釗(이대쇠)의 〈지금(今)〉(《신청년》제 4 권 4호(1918. 4)에 발표)→ 1920년대 초의 周作人의 산문에 비해도 격이 많이 떨어지는 글이긴 하지만 최초의 현대산문이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魯迅(노신))1) 〈광인일기(狂人日記) 《신청년》제 4 권 5호(1918. 5)에 발표〉→ 8천여 자의 단편소설로 문학혁명은 문체의 형식이나 평이한 내용의 문학작품을 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중국의 낡은 전통을 파괴하고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는데 있다는 것을 제시(문학혁명의 대명사)2) 魯迅은 구문학에서는 정통문학으로 여기지 않던 소설을 현대문학에서는 어떤 문학의 장르보다 앞선 위치로 끌어올렸다. 그는 〈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我??做起小說來)〉이라는 한 작품으로 문학혁명의 대오에 들어가게 되었고, 주역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무명의 교육부 관리에서 北京대학 강사와 《신청년》편집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작품가운데 유일한 중편인 〈아Q정전(阿Q正傳)〉을 창작하여 중국 현대문학에서 대표작가의 위치를굳혔다.? 극본의 소개1918년 6월 《신청년》제 4 권 6호에는 노르웨이의 희극작가 입센 특집으로 엮어져서 3편의 극본이 번역 소개되고, 1919년 3월 제 6 권 3호에 중국 최초의 현대 극본인 胡適의 〈평생의 가장 큰 일(終身大事)〉이 발표되었다.→ 〈평생의 가장 큰일〉은 단막극으로 전문이 6천여 자로 되어 있다. 봉건사회의 혼속을 타파하고 인간의 자유를 쟁취하자는 계몽주의적인 내용?胡適과 周作人 평론의 비교胡 適周 作 人?문학의 형식이나 공용(功用)을 논함?단편소설이랑 무엇인가, 단편소설의 약사(略史)기술, 바쁘고 빠른 시대에 있어서 단편소설의 특징을 논함 → 최초의 문학평론?사회에 진화에 따라 희극도 시대의 추세에 부응하고 개량해야 함.?최초로 문학의 주의(主義)를 논함?〈인간의 문학〉‘인도주의’를 논함, 비인간적인 문학 추방?문학의 형식은 중요한 것이 아니며 그것에담긴 主義思想이 중요하다고 역설?사상개조부터 해야한다고 주장4. 五?四운동과 人道主義신해혁명이 봉건주의의 타파라면 五?四운동은 바로 인간으로서의 각성과 자아의 인식이라고 하겠다. 과거 봉건 사회에서는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에 의해서 인간을 구별했으며, 계급이 낮은 인간들은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 생존하여 왔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인간들 각자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만이 봉건사회에서 탈피하는 길이라고 했다. 당시 많은 지식인들은 ‘五?四운동’을 ‘중국의 문예혁명운동(Renaissance)'이라고 불렀고, 《신청년》의 문학혁명운동도 바로 이것을 기본 정신으로 하였다.→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인 魯迅의 〈광인일기〉가 바로 인도주의를 재창한 가장 뛰어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胡適과 周作人의 人道主義 비교胡 適周 作 人?“사회에서 최대의 죄악은 개인의 천성을 꺾고, 개인이 자유롭게 발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다” 고 하여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내가 말하는 인도주의는 개인으로부터 만들어진다. 人道를 말하고자 하거나 인류를 사랑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가져야 하고 인간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여야 한다.” 고 하여 인간 스스로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는 개인본위의 인도주의를 제창한다.5. 문학혁명을 향한 역풍1) 문학혁명의 한계 : 北京대학 문학원을 중신으로 한 일부 교수들과 《신청년》 산하의 모인 진보적 지식인들이나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난 자기들 나름의 운동일 뿐, 전국의 대학이나 전체문단에서 전개되었던 운동은 아니었으며, 이 운동이 급속히 확산되지도 않았다.2) 문학혁명의 반대 세력? 유반농(劉半農) : 왕경헌(王敬軒)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신청년》의 문학개혁운동을 비난하는 글을 《신청년》편집자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문학혁명의 반향(文學革命之反響)〉이라 하였다. 물론 劉半農이 王敬軒에게 문학개혁의 타당성을 역설하는 답신도 함께 게재했다.? 〈차이허칭태사에게 보내는 글(致蔡鶴卿太史書)〉; 1919년 3월 18일자 《공언보(公言報)》에 林?(임서) 가 北京대학 총장 蔡元培(채원배)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인문/어학| 2006.04.26| 4페이지| 1,000원| 조회(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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