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Log In....학기 초에 처음 희곡 한편과 영화 한편을 비교하라는 과제를 받았을 때는 비슷한 주제를 가진 영화와 희곡은 정말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막연하게 재미있는 과제가 될 것 같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비교?분석할 작품 두 개를 선정한다는 것부터가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저 가끔 시간이 날 때 심심풀이처럼 영화를 본 것 뿐 주의 깊게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희곡작품, 연극공연 등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제야 새삼 깨달았다. 문화적 목마름 속에서 시작된 작품선정은 말 그대로 고충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래도 평소 그냥 지나치던 연극들에 더 눈을 돌리고, 희곡작품도 읽어보고, 영화도 더 관심 있게 볼 수 있었던 시간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 결과 몇 개의 희곡들 중 를 읽다가 예전에 ‘심심풀이’처럼 봤던 영화 가 떠올랐다. 사람의 본능에 가까운 욕망으로 스스로의 삶을 파멸로 몰고 가는 점에서 두 작품이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주제의 유사성을 토대로 이 주제들이 서로 다른 장르인 와 에서 각각 어떠한 방식으로 드러나는지 비교?분석하고 더 나아가 연극(희곡)과 영화에서 어떤 일반적인 차이점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인지 알아보기로 한다.Ⅱ. 와 의 주제비교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와 안소니 밍겔라 감독, 맷 데이먼 주연의 영화 . 이 두 작품은 과거와 현대를 막론하고 한 인간이 가지는 본능적인 욕망이 어떻게 인간을 파멸로 몰아가는가 하는 과정을 그리고 또한 그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 것인가를 한 인간, ‘멕베드’와 ‘톰 리플리’를 통해서 드러낸다. 그러나 두 작품이 진행되어 나감에 따라 점점 더 강하게 드러나는 두 주인공들의 욕망은 이미 어떠한 목적을 가지는 욕망, 즉, 출세에 대한 욕망, 부에 대한 욕망, 소유에 대한 욕망 따위의 욕망이 아니다.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본능적이기 까지한 그 욕망은 결국 자신의 입에서 나온 줄로 자기 자신을 으로 인해 스토리의 전개나 인물의 심리의 변화, 그러한 심리를 표현하는 방식 등에 있어서 비슷한 점들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구체적 사건의 진행이나 등장인물의 성격, 결말에 있어서는 차이점도 적지 않게 나타난다. 우선 멕베드라는 인물은 장군으로써 용맹스럽고 적극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 결과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데 있어서도 더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그 운명을 만들어나가나 항상 부자들의 세상을 소극적으로 동경해온 가난뱅이에 성격적까지 답답하게 그려지는 주인공 리플리는 조금은 더 수동적으로 상황을 이용해 가며 자신의 욕망을 성취해 나간다. 또한 결말에 있어서도 멕베드의 경우에는 결국 맥다프에 의해 살해를 당하여 패망해 버리고 마는 모습을 통해 파멸의 끝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으나 리플리의 경우에는 파멸을 보류하고 오히려 피터의 목을 졸라 결국 또다시 진실을 은폐하고 욕망을 이어가려는 리플리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빠져나오기 힘든 욕망의 구렁텅이에 점점 더 깊숙이 빠져듦을 암시하고 있다. 멕베드의 경우 전형적으로 권선징악적인 결말을 취하나 리플리의 경우에는 오히려 리플리의 진짜 모습은 또다시 감춰지고 겉으로는 파멸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미 내면적으로 진실을 잃어버리고 병들어가는 한 인간을 보여줌으로써 결말 제시하지는 않지만 더욱 강력한 결말을 관객에게 일임하는 것이다.Ⅲ.와 의 기호 분석1. 에 나타난 기호 분석① 음악?음향마녀들이 부르는 노래가 음악이 되고 날씨에 대한 묘사 뒤에 음향효과가 나타나겠지만 간접적일 뿐 직접적으로 음악이나 음향에 대한 사항이 지문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② 배경?날씨멕베드가 처음 마녀들을 만나는 날 침침하면서도 아름다운 날씨는 무엇인가 영광스러우면서도 멕베드를 파멸로 몰고 갈 예언을 듣게 됨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날씨이다. 왕이 죽음을 당하기 직전 뱅코우의 대사에서 묘사되고 있는 별 빛 하나 볼 수 없는 밤하늘은 비극적인 날의 배경을 설정함과 동시에 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징조로써의 역할도 한다. 또한 왕이 멕베드에게 죽음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전형적인 희곡상 기술인 방백이 희곡 멕베드에서도 자주 드러난다.⑤ 상징ⅰ) 주인공의 상징적 행동주인공의 행동은 희곡에서는 괄호 안의 지문으로 나타난다. 우선 멕베드가 처음 세 마녀로부터 코오더 영주가 되고 더 나아가서는 왕이 된다는 예언을 들은 후 혼자 그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큰 소리로’ “수고들 하셨오” 하고 되풀이 하여 외치는 행동은 자신이 속으로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를 감추려는 행동으로 보여진다. 앞으로 무엇인가 계략을 짤 수도 있음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또한 왕을 죽이고 ‘휘청거리며 걸어오는’ 멕베드의 행동은 두려움, 불안함, 내지는 망연자실한 모습을 행동으로 드러내주는 부분이다. 뱅코우의 환영이 나타나는 부분에서 ‘이리 저리로 걸어 다니며’ 헛소리를 해대는 멕베드의 행동 역시 두렵고 불암함을 나타내는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극의 후반부 쯤 멕베드의 부인이 몽유병에 걸려 하는 행동들은 시녀와 전의의 대사로 나타나지만 그러한 행동들 역시 부인의 두려움, 죄의식에서 나타나는 행동이며 스스로 점점 더 피폐해져 가고 있음을 나타낸다.ⅱ) 상징적 대사 (비유, 은유, 직유, 상징, 역설 등)-언어적 기교를 많이 사용상징적 대사는 극의 전반에 걸쳐 수도 없이 드러난다. 비유, 은유, 직유, 상징, 역설 등 온갖 수사법이 다 동원되는 언어적 기교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고전문학으로써 드러나는 특징 중에 하나임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 이외에도 연극의 한계, 즉, 비언어적인 요소들을 많이 사용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극복하기 위해 언어적 요소인 대사에 더 많이 의존하는 방법으로 더 함축적이고 강렬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⑥ 기타ⅰ) 상징적 노래: 마녀들이 부르는 노래는 상징적이고 함축적으로 그 상황을 강조하고 분위기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며 앞으로의 일이 좋지 않게 진행 될 것임을 결국은 비극으로 종결될 것임을 암시한다.ⅱ) 마녀 설정: 천사들의 예언이 아닌 마녀들을 예언자로 설정한 것은 그것이 내용적으로은 낮고 조용하게 깔리는 음악으로 영화 전반에 걸쳐 우울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그 결말을 예고한다. 또한 톰이 이 노래를 부르는 scene에서는 “이대로의 그대가 좋아요, 나를 사랑한다면 가지마오 나의 발렌타인...”이라는 가사가 강조되며 톰의 상황, 즉 향락과 부를 즐기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음, 상류층의 생활에 동화되고 싶어 하는 톰의 욕망을 표현하는 부분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 영화에서 흐르는 Jazz는 느리고 조용한 선율의 째즈가 주를 이루긴 하지만 간간히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경쾌하고 빠른 리듬의 Jazz가 연주되기도 한다. 특히 Jazz를 좋아하는 디키가 향락적인 삶을 즐기는 장면에서 주로 등장하는데 이는 향락적인 상류층의 생활을 더욱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며 상대적으로 톰의 욕망을 더욱 채찍질 하는 매개체로 나타난다. 그 밖에도 톰이 살인하는 장면, 아슬아슬한 거짓말을 하는 장면 등에서 흐르는 빠른 템포에 일을 꾸미는 듯한 음향이나 유서를 위조하는 장면에서의 천둥소리는 초조하고 다급한 톰의 심리상태를 대변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파멸에 이르는 부정적 image를 형성하도록 유도한다.③ 장소?배경?조명?분위기기본적으로 가장 큰 영화의 배경은 이태리이다. 로마, 베니스, 몬지 등 향락적인 휴양 도시들을 배경으로 사건이 진행되며 이러한 배경의 설정은 앞의 음악적 효과에서 본 것과 같이 톰으로 하여금 더욱 상류층의 삶을 동경하도록 하고 그 결과 톰의 욕망이 더욱 쉽게 발현될 수 있도록 재촉하는 수단이 된다. 또한 영화 중간쯤 톰이 로마의 석양을 바라보는 장면은 과거의 영화를 안은 채 패망해버린 로마의 모습과 톰의 모습을 대비 시키면서 톰에게 비정상적으로 주어진 현재의 향락적인 생활과 부유층의 삶 역시 로마의 모습처럼 패망할 것임을 우울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톰이 디키를 살해하고 타는 기차나, 호텔, 처음으로 갖게 되는 집, 피터의 도움을 받아 마련하는 낡고 습기 찬 집 등 처음과는 다르게 어느 순간부터 어두워지는 조명이나 뿌연 분위기, 닫힌 공 ‘너는 나를 사랑한다...’며 울부짖는 장면들은 동성애를 표현 했다기 보다는 톰의 디키를 향한 동경, 디키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극대화 된 것을 사랑이란 감정을 통해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또한 디키를 살해 한 후에 톰이 거울시장에서 디키의 환영을 보게 되고 항상 악몽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는 톰의 내면에 내재한 불안감, 죄책감등을 주인공의 상징적 행동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며 후에 마지가 톰에 대해 의심을 하며 이야기 좀 하자고 하자 물건들을 떨어뜨리며 불안정한 행동을 보이는 것과 경찰들이 왔을 때 문사이로 동정을 살피는 듯한 그의 행동은 초조함과 피하고 싶은 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마지가 찾아왔을 때에도 문 앞에서 서서 결국 그 문을 열지 못하는 톰의 행동은 자신이 말했던 지저분하고 어두운 창고(=욕망의 공간)속에 갇혀버리는 톰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 밖에도 기타등장인물들의 상징적 행동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영화는 조명?공간 설정 등의 분위기 조성이나 close-up shot을 통해 그러한 상징적 행위를 관객이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강조한다.ⅱ) 대사 자체가 지니는 상징성영화 중간 쯤 메리디스가 오페라를 보러 가자며 톰(디키)에게 “끌고 가면 안 갈래요?”라고 묻는 장면에서 톰은 끌고 가달라고 대답한다. 이는 적극적으로 상황을 만들어 가지는 않지만 자신을 유혹하는 상황에 이끌려 가며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톰의 상황과 그의 마음을 드러내는 대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피터에게 자신의 창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 마지막 scene에서 “오늘은 이 선실(=욕망의 창고를 상징)에만 쳐 박혀 있자.”라고 말하는장면, 피터를 죽이기 전에 “난 길을 잃었어. 난 영영 이 무섭고 어둡고 외로운 창고에 갇힐 꺼야. 내가 누군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날 찾지 못할꺼야.”라고 하는 대사는 그 자체로써 욕망으로 인해 점점 더 깊이 점점 더 굳게 닫혀가는 톰의 내면과 그 안에서 벗어 날 수 없게 되어버린 톰, 그의 욕망이 끝나지 않을 것임, 그리고
# 두 번의 실패, 그리고 방황나는 (식상하긴 하지만^^;;)부족할 것 없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공무원이신 아버지와 교사이신 어머니. 돈이 많은 집은 아니었더라도 꼭 필요한 돈을 쓰는 데에는 부족함 없이, 한번도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건 모르고 자라왔던 것 같다. 더군다나 조금 늦게 결혼하신 부모님께서 3년 만에 얻은 첫 번째 딸이 나였기에 부모님은 내게 정말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으셨다. 한살 어린 남자동생이 하나 있지만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고 집에서 항상 더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나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아빠를 더 닮아서 그랬는지(생긴 것, 분위기, 체질, 성격까지 난 유난히 아빠를 쏙 빼닮았다.) 특히 아버지께서는 나를 특별히 아끼셨고 그만큼 많은 기대를 하셨던 것 같다.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알기에 난 한번도 빗나가 본적이 없다. 다소 소심한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항상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것이 가장 못할 짓이었다. 그래서 부모님께 제대로 혼나 본 적 한번 없지만 별 탈 없이 잘 컸던 것 같다. 나름대로 공부에 대한 욕심도 있었고, 공부는 하는 만큼 항상 나와 주었기 때문에 딱히 공부 때문에 좌절해 본적도 없다. 4학년 때 미국에 갔을 때도 역시 앉혀놓고 가르쳐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만 알아서 영어를 배웠고, 1년 후에는 우등상도 곧잘 타오곤 했었다. 6학년 때 한국에 왔을 때가 좀 힘들었었다. 사회라는 과목을 배운 적이 없는지라 사회시간에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한번은 칠판을 째려보면서 운적도 있다. 뭐든지 내가 하는 건 제대로 알아야 직성이 풀렸고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으면 너무 답답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지금만큼 공부를 하게 됐는지도 모르지만, 이래저래 쓸데없는 스트레스도 많이 받으며 살아온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운 다음날 방과 후에 나는 바로 책을 싸들고 동네 독서실을 알아보고 다녔다. “하루만은 안돼요??”하고 물으면서 독서실을 찾아 돌아다녔고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집에 오면 집에 와서 스탠드를 켜고 새벽3시까지도 공부를 했다. 그때 어떻게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고 기특하기도 하지만 그때는 이상하게 그게 전혀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알아간다는 것이 속 시원하고 재미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한국에 와서 처음 치룬 중간고사에서 1등을 했고, 다시 예전에 나의 위치를 찾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중학교 때도 항상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고등학교도 대원외고에 입학하게 되었다. 공부 잘 하는 애들만 모아 놓은 곳이니만큼 각오는 했지만 49명 중에 44등은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대원외고라는 집단에 대한 나름대로의 프라이드가 그러한 좌절감을 무마시켜 주었고, 한 1년 후에는 다시 중상위권에 진입 할 수 있었으므로 그다지 큰 좌절은 아니었다.그렇게 해서 수능을 봤고 비교적 수월하게 특차로 연대법대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고대법대에 정시로 갈 수 있는데 안 보내 준다며 학교에 불만족해하긴 했지만 잠깐이었고 곧 사람들과 친해지며 나름대로 학교에 만족하게 되었던 것 같다. 대학진학 역시 나에게 있어서는 큰 좌절은 아니었다. 이만하면 사교성도 좋고, 성격도 좋고, 얼굴도 이만하면 나쁜 건 아니고, 능력도 있고, 대학에 들어 올 때까지만 해도 내가 좀 부족한 면들을 보충만 해 나간다면 나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자신에 대해 자신이 있었고 나의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힘이 넘쳐 났다. 그렇게 처음 입학하고 2년간은 사람들도 사귀고 학회생활도 하고, 연애도 하면서 정말 실컷 놀았다. 나에게 주어진 무궁무진한 자유가 주체가 안 되던 시절이었다.그렇게 2년을 보내고 3학년에 올라가면서 서서히 사법고시에 대한 부담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3학년 1학기 동안은 책도 펼쳐보고 학점관리도 열심히 하고 도서관에 앉아 있으려고 노력했지만 2년동안 거의 손을 놓았던 공부가 잘 될 리가 없었다. 이미 12년에 걸쳐 쌓아온 감각이 희미해져 있었다. 그래도 노력했고 2학기 때는 좀 더 본격적으로 고시 공부를 하기 위해 휴학을 하고 신림동으로 장소를 옮겼다. 학원도 다니고 독서실도 끊고 스터디도 하고... 그때 내가 보낸 약8개월은 내 인생에서 가장 짧은 기간이었다. 반년도 넘는 세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지나갔다. 2월달 시험이 가까워 왔을 때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그래도 하는데 까지 해보자는 생각으로 덤볐다. 이러다가 될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결과는 기대에 못 미쳤고 시험에 떨어졌다. 하지만 첫 시험에 떨어지고 난 오히려 더 의욕에 불탔다. 이제 어떻게 하는지 알 것 같았고 8개월로 그만큼 했는데 1년 동안 하면 안 되겠냐 하는 생각에 자신감이 생겼다. 1년이 너무 길다고 생각해서 1학기는 학교를 다니면서 2차 과목을 공부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리고 1학기를 마치고는 그래도 조금 불안한 마음에 다시 휴학을 하고 신림동을 들어갔다. 다시 시작했다. 처음 할 때보다 약간 긴장감이 떨어지는 면은 있었으나 그래도 이제까지 쌓아온 만큼 모의고사 성적도 더 잘 나왔고 마지막까지 잘만 따라가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는 데까지 해보자.’라고 생각했던 작년과는 달리 이번에는 돼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커져갔다. 이런 정신적인 압박은 내가 마지막 피치를 올려야 하는 시기에 나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이런저런 일들로 계획한대로 공부가 되어가지 않자 스트레스는 극도에 달했다. 결국 그 스트레스는 건강에 이상으로 나타났고 공부하기는 더 힘들어졌다. 그렇게 두 번째 시험을 보고 그 결과는 역시 또 불합격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건 그래도 나름대로는 많은 걸 버리면서 또 참으면서 열심히 살아왔는데 너무 허무했다. 특히나 나보다 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합격하는 것을 보면서 나의 허무함은 점점 더 커져갔다. 첫 번째 시험을 끝냈을 때와는 달리 의욕을 상실했다. ‘지금까지 해온 것들이 맞는 걸까? 또다시 공부한다고 된다는 보장이 있을까? 난 능력이 없는 것일까?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고 그럴수록 모든 것이 회의적이기만 할 뿐 어떠한 해결책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내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이 원망스럽고, 운 좋은 놈들이(물론 내 생각이지만)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나 스스로 조차 감당하기 힘들었던 이때, 날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오히려 나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아빠였다. 기대가 크셨던 만큼 실망도 크셨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나와 함께 모든 의욕과 희망을 상실하신 듯한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이제까지 난 부모님의 그 맹목적인 믿음과 기대로 이만큼 성장 할 수 있었는데, 그 믿음과 기대가 이렇게 큰 부담으로 다가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예전엔 미쳐 몰랐다. 처음에는 부모님께 너무 죄송했지만 나중에는 미워하는 마음도 생겼다. 화가 났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나는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만큼 했는데 결과가 이런 걸 내가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써 내 잘못은 아니라고 내가 죄스러워 할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게라도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아예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항상 말로는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하라고 하셨지만 알게 모르게 내가 어릴 때부터 ‘법관’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셨다. 어쩌면 내가 법대에 가게 된 건 필연적이었을 지도 모른다. 지금에 와서 말이지만 아버지는 당신을 꼭 닮은 딸에게 자신이 못 다 이룬 꿈을 투영시키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절망감도 어느 정도는 이해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그렇게 시험이 끝나고 다시 복학을 했다. 처음 복학을 했을 때도 그랬지만 나는 내가 영위하던 대학생활에서 한걸음 더 멀리 물러선 기분이었다. 학교는 파릇파릇한 신입생들로 넘쳐났고, 나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내가 설 자리가 없었다. 외로웠다. 이제까지는 언제나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좋은 결과를 냈었는데 두 번의 어처구니없는 실패가 스스로 주눅 들게 만들었고 자신감을 상실시켰다. 자신감을 상실하자 ‘나’라는 사람이 하나하나 무너져 내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어떻게 보면 이제까지 내가 가장 자신 있게 내세우던 것이 공부였는데, 그에 대한 자신감이 무너지자 나는 순식간에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외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인간관계가 엄청나게 넓은 것도 아니고, 성격이 그다지 좋은 편도 아닌’ 그런 사람이 되어 버렸다. 거기에 고학번이 느끼는 소외감, 외로움까지 겹치면서 나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인생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나란 사람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이 맞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허허 벌판에 홀로 방향을 잃고 서있는 기분이었다.
# 20대의 은밀한 고민, sex대학에 들어와서 많은 고민들을 했지만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sex에 관한 문제이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저 막연하게 혼전순결은 꼭 지켜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어릴 적부터 기독교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러한 믿음은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학에 오고 연애다운 연애를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난관에 부딪혔다. 관계가 조금씩 깊어지면서 남자친구는 sex를 원했고 나는 완강하게 버텼지만 남자친구 역시 쉽게 물러나진 않았다. 남자친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나를 설득하려 했고 내 가치관을 바꾸려 했다. 종교적인 이유였기 때문에 나는 비교적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지만 그런 실랑이가 계속 될수록 나는 ‘sex라는게 뭐 별건가? 그게 굳이 나쁘게 생각 될 이유는 없는데... 정말 기독교에서 말하는 혼전순결이 하나님의 뜻인 걸까?’ 하는 생각들에 휘말렸다. 이제까지 한점 의심 없이 가져왔던 가치관이 흔들렸고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친구들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걔 중에는 어렵게나마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친구들도 다 겪고 있는 혼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관계를 갖고 있는 친구들 중에는 전혀 아무런 죄책감 없이 sex를 즐기는 친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관계를 가지면서도 썩 내키지 않아 하거나 뭔가 찝찝한 느낌 때문에 즐거운 성생활을 하지는 못했다. 또 아직 관계를 갖지 않는 친구들 중에는 당연히 혼전순결을 지킨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처럼 뭔가 이제까지 가져왔던 신념에 혼란을 느끼고 흔들리고 있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0대의 은밀한 고민, 다른 사람과 쉽게 이야기 할 수 없었던 sex에 관한 문제에 있어 새로이 이러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지침을 제공하고 내 나름대로 찾아낸 해답들을 통해 새로운 담론을 이끌어 내는 자리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바램으로 이 글을 써본다.# Sex는 정말 나쁜 것일까?우선, 이러한 문제를 고민하면서 나는 sex에 관한한 단순히 한 개인의 신념이나 종교적 이유를 넘어서는 어떠한 사회적 금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 어떤 이유에서 생겨난 것인지는 몰라도 그러한 금기가 우리의 자유로운 행동을 억압하고 있었으며, 그것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유독 sex에 관해서는 모든 것을 숨기고 금기시하게 되었을까?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도 아니고 오히려 사랑하는 두 사람의 욕구에 의한 자연스러운 행위인데 왜 ‘먹는 것’과는 달리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야 했을까?Sex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 역사는 아주 오래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 시대 때부터 시작된 ‘이원론’은 정신과 물질, 고급과 저급, 영혼과 육체를 이분했고 그리스의 많은 철학자들은 성욕을 가장 저급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재생산은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부부만이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 경우에도 쾌락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아이를 낳는 것만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그대로 기독교적 교리를 통해 투영되어 신학적 개념으로 발전되었고 기독교는 비로소 가장 금욕적인 종교가 되었다. (흔히 알고 있듯이 기독교가 금욕적인 문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세상이 기독교를 만든 것이다.) 대부분은 성서의 가르침 이라기보다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기독교인이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기독교의 교회법은 곧 시민법 또는 관습법이 되었고 영국, 미국을 거쳐 전 세계로 뻗어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역사를 통해 오늘날까지도 sex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뿌리 깊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대에 다른 관점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고대 중국인들은 그리스인들처럼 세계를 이원적으로 파악하긴 하였지만 정신과 물질의 대립을 강조하기 보다는 ‘합일’을 강조했고 그 결과 성적결합은 ‘어울림’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인도나 이슬람에서 역시 sex는 긍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관점들 보다는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sex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지배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근본적인 사상의 흐름 외에도 중세 지배계층 뿐만 아니라 근대 신흥 브루주아 계층이 자신들은 피지배계층과는 다름을 강조하고 그들의 고귀함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 ‘금욕’을 내 세웠으므로 이러한 역사 속에서 sex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더욱 더 공고해 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을 형성하는 데에는 르네상스 시대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지금까지 발달해온 포르노의 영향도 없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오늘날은 그리고 적어도 내 경우에 있어서는 그랬다. 여성에 대한 배려는 없고 순전히 남성 중심적으로 발달한 포르노 문화와 ‘포르노’를 통하지 않고는 구체적인 체위라든가 성행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없는 현 실태가 맞물리면서 자연스럽게 sex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되었고 sex는 곧 변태적이고 동물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잘못 발달된 포르의 잘못이지 sex 자체가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되지 않는다.이러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막연한 거부감과,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순결을 지키면서 자신을 특권화 하는 행태는 뿌리 깊은 역사적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 그 밖에는 아무런 타당성도 합리적인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sex라는 행위에 대한 막연한 금기의 실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자기 나름의 ‘이유 있는’ 잣대를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잣대에 따라 행동한다면 막연한 죄책감도 없앨 수 있을 것이고, 더 즐거운 성생활을 통해 상대와의 더 깊은 관계를 맛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순결은 지켜야 한다던데...두 번째로, 이 문제에 고민하며 느낀 점은 분명 sex는 남녀 모두에게 금기된 것이었고 음지에서 활동하는 것이었지만 유독 여성에게 더 큰 금기사항이었으며 대부분의 경우 여성만이 순결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순결에 대한 강박관념은 자연히 sex라는 것을 더욱 부도덕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여성의 성적 자유를 억압하는 강력한 기재로 작용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여성들은 이렇듯 실재적인 행위에 더 큰 제약을 받았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대부분 sex나 또는 다른 성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려하고 그런 것들을 공론화하여 이야기 하는 것조차 천박한 것으로 생각한다. 술자리에서 흔히 야한 농담을 하거나 자기 성적인 부분을 드러내는 것이 남자인 경우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것이 여자라면 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도 이러한 생각에서 연유한다. 또한 인터넷상에서는 어느 정도 익명성이 보장됨에도 불구하고 왜 성에 관한한 여성들의 담론이 잘 형성되지 않느냐 하는 문제 역시, 오프라인 상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여러 방면의 금기들이 온라인 상에서도 발현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생리는 전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생리대, 생리통 등에 관한 이야기는 왜 항상 ‘조용히’ 이야기 되어져야 하며 생리대는 ‘숨겨서’ 들고 가야 하는 것인지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몸의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라면 남성들 앞에서도 당당히 거론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이러한 문제들 역시 뿌리 깊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 들이었다. 원시 모계사회에서 생산량의 증가로 인한 잉여의 발생으로 전쟁이 생겨나고 권력이 생겨나면서 전쟁을 수행하는데 적합한 남성이 우위로 떠오르고 드디어 사회는 부계중심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 때가 내가 아직까지 내가 피부로 느끼는 남녀불평등의 시작이었다니 ‘여성의 세계사적 폐배’라는 말이 너무도 비장하게 다가온다.) 부계중심사회로 들어서면서 남근숭배사상이 생겨났고 반면에 여성의 성기는 폄하되고 여성의 성은 부도덕한 것으로 전락되었다. ‘뒤집힌 음낭 이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성은 성적으로도 열등한 존재였고 여성이 성적인 욕구를 드러내는 것은 ‘돌아다니는 자궁’에 의한 히스테리의 일종인 밝힘증으로 취급받았으며 심지어는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서도 여성은 ‘음탕함’ ‘사악함’으로 표현되었으며 성적인 금기와 관련하여 그 부정적인 부분은 모두 여성에게 그 원죄가 있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경우, 출산을 위한 경우에는 성행위도 허용되어야 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여성은 출산의 보조도구로 생각되었다. 여성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출산뿐이며 그 신성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여성의 순결이 강요 되었다. 순결 이데올로기를 통해 자기의 여자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잉태할 수도 있다는 근본적인 불안감에서 벗어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처럼 오랜 세월 여성을 부도덕한 존재로 간주하고 여성의 성을 유독 엄격히 금기시 하는데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원죄’ 개념이나 여성의 열등함을 뒷받침했던 종래 이론들은 과학의 발달로 인해 결국 설득력을 잃게 된다. 또한 클리토리스가 발명되어 여성에게도 성욕이 있으며 그 성욕은 남자의 그것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남성들은 자신의 위치가 여성들에 의해 위협받을 것을 두려워하게 되며 객체로만 생각해왔던 여성으로부터 자신이 평가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과학의 이름을 빌려 증명하려 하고, ‘성욕’ 담론에서 여성을 아예 배제시키기 위해 새로운 morality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바로 점잖음과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는 빅토리아 morality이며 그 밖에도 여성을 ‘모성’과 연관지어 설명하려 하고 공적영역에서는 부적합한 사람을 만들기 위한 담론을 형성하는 등의 행위를 통해 여성의 성장을 막으려고 애써왔다.
. 이 책은 제목을 익히 들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책이다. 유명한 만큼(사실 ‘성공’하는 습관이라는데 관심을 갖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 싶다)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으나 역시 번번히 읽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기회에 읽어보겠다는 생각으로 빌리긴 했으나 생각보다 두껍고 내용도 쉽지 않은 책이었다. 성공하는 법에 대한 이와 유사한 제목을 가진 다른 흔한 책들처럼 당장에 실행에 옮길 수 있고 재미있게 기술된 책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러한 임시방편에 불과한 성격윤리만 가르치는(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얄팍한 책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저자가 말하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은 ‘일’이라는 한정된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한 습관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전반을 성공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습관들에 관한 지침서였다. 여기에는 물론 일도 포함된다. 우리가 자신과 주위를 살펴보면, 응급처치 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가 이처럼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좀더 깊고 새로운 차원의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이러한 새로운 차원의 사고방식이 바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다. 새로운 차원의 사고방식은 개인적 효과성과 대인간의 효과성을 달성하기 위하여 원칙 중심으로, 성품에 근본을 두고, 내면에서부터 변화하여 외부로 향하는 접근법을 말한다. 여기서 습관 1,2,3은 우리를 의존적 단계에서 독립적 단계로 발전시켜 준다. 이 같은 습관들은 성품 성숙의 본질이 되는 ‘개인적 승리’이다. 개인적 승리인 자신에 대한 리더십은 ‘대인관계의 승리’를 선행한다. 즉, 이것은 ‘내면에서 시작하여 외부로 향하는’ 것이다.우선, 습관1은 ‘주도적이 되라’ 는 것이다. 주도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솔선해서 사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이 말의 의미는 스스로의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하는 의사 결정에 의한 것이지, 결코 우리를 둘러싼 여건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코비는 주도적일 뿐만 아니라 항상 적극적이 되라고 한다. 많은 사람은 좋은 일이 저절로 일어나 주거나 누군가 자신을 돌봐주기를 기다리지만 결국 좋은 직장을 갖거나 원하는 것을 얻는 사람은 바라는 것을 기다린 사람이 아니라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 불필요한 행동을 자제하고, 목적을 향해 스스로 계획하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습관2는 ‘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이다. 습관 2는 다양한 상황과 삶의 여러 단계에 적용될 수 있다. ‘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는 말의 가장 근본적인 적용은 오늘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최후 순간에 갖고 싶은 이미지, 모습, 그리고 패러다임을 매사를 검토하는 기준들과 표준으로 삼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에 대한 자아의식을 발전시키다 보면 상당수는 자신이 얼마나 가치 없는 습관, 즉 비효과적인 각본에 따라 살고 있는지, 또 삶에서 진정으로 가치를 두는 것과는 얼마나 무관하게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과 좀더 일치하고 우리의 가치를 더욱 의미 있게 해 주는 올바른 원칙에 좀 더 가깝게 해 줄 것이다. 또한 목표가 확실하다면 당연히 그 목표를 위해 주도적인 자세가 필요할 것이므로 습관2는 습관1과도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한다. 습관3은 ‘소중한 것부터 먼저 하라’이다. 소중한 것이라 우리가 개인적으로 가장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이다. 그것들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먼저 해야 될지를 제시해 주고 자기 사명서에 기술된 목적들을 달성하도록 도와준다. 소중한 것부터 하라는 말은 습관2에서 설정한 우선순위에 따라 시간과 업무를 계획하고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습관2는 첫 번째 창조 즉 마음속에서 하는 설계이고, 습관3은 두 번째 창조로써 실제로 실행하는 것이다. 습관4는 ‘상호 이익을 모색하라’이다. 인간관계와 사업에서는 두 사람 이상의 협력을 통하여 효과성이 증진된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남과의 비교와 경쟁을 통하여 자신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배워왔다. 우리는 승리를 생각할 때 누군가의 패배를 전제로 한다. 즉 우리가 이기면 상대는 지는 것이고, 반대로 상대가 이기면 우리는 지는 소위 인생은 ‘제로섬 게임’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파이 크기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가 커다란 조각을 떼어 가면 나의 몫은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족의 심리’를 지닌 사람들은 표창이나 권한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갖기 어렵고, 또한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성공까지도 축하해 주지를 못한다. 우리가 용기가 배려 간에 균형을 이루고 진정한 상호이익을 모색할 때 이는 성숙성의 본질이 되고 승/승에 바탕이 될 수 있다. 습관 5. ‘경청한 다음에 이해 시켜라’ 이다. 대화는 우리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사람들은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대화하면서 보낸다. 그러나 사람들은 읽고 쓰는 법을 배우는데 몇 년을 보내고, 말하는 법을 배우는데도 몇 년을 보내는 반면, 듣기에 대해서만큼은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한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 않는다. 분별력을 가진 공감적 경청자는 상대방의 내면 깊숙히 일어나는 현상을 재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실제 문제가 있는 내면 중심부에 도달할 때까지 한겹한겹 껍질을 벗겨내는 것을 안전하게 느끼도록 수용과 이해를 보여줄 수 있다. 사람들은 이해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기 위해 투자되는 시간은 그것이 얼마든지 우리가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해해 줌으로써 예입되는 감정은행 계좌를 가지게 하기 때문에 훨씬 큰 보답으로 나타날 것이다. 습관 6은 ‘시너지를 활용하라’이다. 시너지란 간단히 정의한다면 전체가 각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각각 부분들 상호간에 갖는 관계는 전체의 일부분으로 동시에 최대의 촉매 작용을 하고, 최고의 역량이 있으며, 가장 큰 통합을 이룩하게 하는 가장 멋진 부분이라는 것이다. 시너지의 가장 고차원적인 형태는 인간만이 가진 4가지 천부의 재능, 승/승의 동기, 그리고 공감적 경청기술을 가지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직면하게 되는 가장 어려운 문제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너지가 가져오는 결과는 거의 기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대안들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습관7은 ‘심신을 단련하라’이다. 습관7은 다른 습관들의 실천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에 다른 6가지 습관을 둘러싸고 있다. 이 습관은 우리 인생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투자이며, 삶을 살아가고 공헌 할 수 있는 ‘도구’에 대한 투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4가지 차원-안정감, 지침, 지혜, 역량-에 대해 규칙적으로 톱날을 가는, 즉 심신을 단련하는 시간이 가지고 중요성을 인식해야만 비로소 효과적으로 될 수 있다. 끝으로 참된 변화는 내면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나뭇잎을 쳐내는 것과 같은 응급처치식의 성격 윤리적 기법을 가지고는 태도와 행동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뿌리, 즉 사고의 바탕이 되는 기본인 패러다임을 바꿈으로써만 가능하며, 이 패러다임이 우리의 성품을 결정하고, 이것이 바로 우리를 성공으로 이끄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甲과 乙은 상호간 의사의 연락 없이 甲은 殺人의 古意로써, 乙은 傷害의 고의로써 각각 丙에게 돌을 던져 丙을 死亡케 하였다. 그러나 그 원인된 행위는 판명되지 아니하였다. 甲과 乙의 형사책임은?Ⅰ.問題의 所在설문의 경우 甲과 乙은 서로 의사의 연락 없이 丙에게 가해행위를 하여 사망케 한 것으로 공동정범의 주관적 요건 중 ‘상호간 의사의 연락’을 결한다. 그러므로 2인 이상이 죄를 범하였다 하더라도 공동정범은 인정할 수 없고 동시범이 될 수 있을 뿐이며, 이러한 동시범의 경우 인과관계의 유무를 어떻게 판단하여 어떠한 죄책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즉 설문의 경우와 같이 상호간 의사의 연락도 존재하지 않은 독립된 행위가 경합한 경우에 발생한 결과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을 지울 수 있느냐가 문제된다.Ⅱ.同時犯1.意義동시범이란 2인 이상이 상호간 공동의 범행결의 없이 동일객체에 대해 동시 또는 이시 에 각자 범행을 실행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동시범은 공범이 아니고 단독정범이 결합 된 형태이며 고의범과 과실범 모두에 성립할 수 있다. 동시범은 두 사람 이상의 행위자 사이에 범죄 실행을 위한 의사 연락이 없다는 점에서 공동정범과 구별되며 다수인의 실행 행위를 요한다는 점에서 단독정범과도 구별된다.2.責任동시범에 있어서 결과발생의 원인행위가 판명된 경우에는 인과관계와 개인책임의 원칙 에 따라 각자의 형사책임을 정하면 될 것이다. 동시범은 단순히 단독정범이 결합된 것에 불과한 것으로 각자는 자기가 실행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데 그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발생의 원인행위가 판명되지 아니한 경우에는 발생한 결과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된다. 공동정범의 경우라면 일부실행 전부책임의 원칙 에 따라 원인행위가 판명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발생한 결과 전부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지만 동시범은 상호간 의사의 연락도 없는 개별적 행위를 한 것에 불과하므로 ‘공동의사’를 전제로 한 공동정범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를 우리 형법은 ‘독립행위의 경합’이라고 하며 형법 제19조에서 “동시 또 는 이시의 독립행위가 경합한 경우에 그 결과의 발생의 원인이 된 행위가 판명되지 아니 한 때에는 각 행위를 미수범으로 처벌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3.弟19條의 適用要件(1)다수인의 실행행위2인 이상의 다수인의 실행착수 이후의 실행행위가 있어야 한다. 실행의 착수에 이르 지 못한 예비행위는 제19조의 적용대상이 아니다.(2)의사연락의 부존재법문은 이것을 “독립행위가 경합한 경우”라고 표현하고 있다. 동시범의 행위자 상 호간에는 범죄를 공동으로 실현하려는 의사의 연락이 없다는 점에서 공동정범과 구별된 다. 그러므로 의사연락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동시범의 성립범위가 달라 진다. 공동정범에 있어 의사의 연락은 ‘상호간’에 존재하여야 하므로 공동으로 실행 하려는 의사가 어느 일방에게만 존재하는 소위 편면적 공동정범의 경우는 실질적으로 동시범에 속한다고 볼 것이다.(3)행위객체의 동일성행위객체가 동일하면 족하고 각각의 행위가 구성요건적으로 동일한 행위일 것을 요하 지는 않는다.(4)시간과 장소다수인은 행위는 반드시 동시에 행해질 필요는 없고 이시라도 상관없으며, 반드시 동 일한 장소에서 행해짐도 요하지 않는다.(5)인과관계증명의 불가능결과발생의 원인된 행위가 판명되지 않아야 한다. 동시범은 개별적 행위가 결합한 관 계이므로 각자의 행위가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되었는지도 ‘개별적’으로 검토하여야 하 고 이 점에서 다수인의 행위를 합일하여 인과관계를 판단하는 공동정범의 경우와 다르 다. 이 경우 원인된 행위의 거증책임은 검사에게 있다.Ⅲ.弟263條의 同時犯 特例1.意義형법 제263조는 제19조에 대한 예외규정으로 2인 이상이 의사연락 없이 상해의 결과를 발생시켰으나 누구의 행위에 의해 그러한 결과가 발생하였는지 알 수 없는 경우에 각자를 미수범이 아닌 상해기수의 공동정범으로 처벌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그 인과관계가 판 명되지 아니한 경우에도 공동정범의 예에 의하여 인관관계가 있다고 보는 특별규정인 것 이다. 이 규정은 공동정범의 성립요건인 공동의 의사를 결여하고 있는 동시범을 공동정범 으로 처벌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고 그러므로 이 규정의 성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학설의 대립이 있다.2.法的性質(입법취지)(1)법률상 추정설입증의 곤란을 구제하기 위하여 법률상 공동정범의 책임을 추정한 것이라는 견해이 다.(2)법률상 의제설입증의 곤란을 구제하기 위하여 공동정범이 아닌 것을 공동정범으로 의제한 것이라는 견해이다.(3)거증책임전환설피고인에게 자기의 행위로 상해의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음을 입증할 거증책임을 전환 한 규정이라고 보는 견해이다.(4)이원설소송법상으로는 거증책임의 전환규정인 동시에 실체법상으로는 공동정범의 범위를 확 장시키는 일종의 의제라는 견해이다.(5)결론이 규정은 집단폭행과 같이 여러 사람에 의한 상해나 폭행치상의 경우 누구에 의하여 상해의 결과가 발행하였는지 현실적으로 밝히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 집단폭행에 가담 하는 경우 일반적으로 신체상의 중대한 위험발생을 예견할 수 있으므로 통상적인 경우 보다 형사처벌의 필요성이 크다는 점 등을 함께 고려해 입증을 곤란을 해소하기 위한 일종의 편의 규정이다. 그러나 증명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실을 인정하는 간주나 추정 은 형사소송법상 기본 원칙인 자유심증주의나 실체진실주의에 반하는 것이므로 다수설 과 같이 단순히 검사의 거증책임을 피고에게 전환하는 규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으로 보인다.3.適用要件(1)독립행위의 경합2인 이상의 행위가 서로 의사연락 없이 같은 객체에 대하여 행해져야 한다. 따라서 가해행위를 한 것 자체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에는 본조는 적용될 여지가 없다(대판 1948.5.15. 84도 488). 또한 독립행위는 반드시 같은 시간에 행하여 질 것을 요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동일 시간 내지 근접한 시간에 행하여질 것을 요한다는 견해도 있으나 형법 19조가 이시의 독립행위가 경합한 때에도 동시범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 이시의 독립행위인 경우를 제외할 이유는 없으므로, 이시의 독립행위가 경합하는 경 우에도 본조가 적용된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대법원도 같은 취지로 판시하고 있다 (대판 1981.3.10. 80도3321).(2)상해의 결과발생상해의 결과가 발생하면 족하므로 상해의 결과는 상해행위에 의한 것이건 폭행행위에 위한 것이건(폭행치상) 묻지 않는다.(3)원인행위의 불분명원인된 행위가 판명된 경우에는 각자가 자기 행위로부터 발생한 결과에 대해서만 책 임을 질 것이므로 본조는 적용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원인행위가 판명되지 않아야 하며 이 경우 자기의 행위가 원인이 아니라는 거증책임은 피고인에게 있다.4.적용범위(1)상해죄 ? 폭행치상죄 ? 과실치상죄상해의 결과만 발생하면 족한 것이므로 폭행으로 발생한 상해의 경우에 본조가 적용 됨은 이론이 없다. 또한 본조의 상해의 결과는 고의에 의한 것일 필요는 없으므로 과실 치상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2)상해치사죄 ? 폭행치사죄①학설ⅰ)긍정설상해의 결과를 발생케 한 이상 상해의 범위를 넘어 치사의 결과에까지도 미친다는 견해ⅱ)부정설본조는 동시범에 대한 중대한 예외규정으로 ‘상해의 결과가 발생한 경우’라고 규 정하고 있음에도 사망의 결과가 발생한 경우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유추해석금지의 원칙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라는 견해ⅲ)예견가능성설결과적 가중범의 공동정범 문제이므로 사망의 결과에 대하여 인과관계가 있고 예견 가능성이 있을 때에만 상해치사죄의 공동정범이 된다는 견해②판례우리 판례는 “...상해의 독립행위가 경합하여 사망의 결과가 일어난 경우에도 그 원인된 행위가 판명되지 아니한 때에는 공동정범의 예에 의하여야 한다...”고 하 여 이 경우에도 본조의 적용을 긍정하고 있다(대판 1981.3.10. 80도3321).③결론제263조는 중대한 예외규정이므로 그 적용범위를 제한하여야 하고 명문에 규정이 없는 사망의 결과가 발생한 경우에 대해서까지 본조를 적용하는 것은 유추해석금지 원칙에 반할 것이다. 그러므로 부정설 입장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3)강간치상죄 ? 강도치상죄상해 또는 폭행치상의 요소를 포함한다 하더라도 이는 보호법익과 행위의 태양을 달 리하는 것이므로 본조의 적용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이며 판례도 강간치상죄의 경우 에는 동시범 특례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시하고 있다(대판 1984.4.24. 84도372).Ⅳ.사안에의 적용1.논점설문에서 甲과 乙의 경우 동시범에 해당하고 제19조의 적용요건을 모두 충족시키므로 19조가 적용될 수 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제263조의 동시범의 특례를 적용할 수 있는가 여부에 있어서는 甲은 애초에 살인의 고의를 가지고 살인의 결과를 발생하게 한 자로써 263조가 적용될 수 없으나, 이와 달리 乙은 은 상해의 고의를 가지고 사망의 결과를 발생 시킨 자로써 제263조가 적용되어야 할 것인가 여부가 문제된다.2.학설(1)제1설乙에대해 제263조의 적용을 부정하고, 甲과 乙 모두에게 제19조를 적용하여 발생한 결과에 대한 미수책임, 즉 甲에게는 살인미수의 책임과 乙에게는 상해치사의 미수의 책 임을 인정하는 견해이다.(2)제2설乙에대해 제263조의 적용을 부정하는 것은 제1설과 같으나, 형법상 결과적 가중범인 상해치사의 미수를 처벌하는 규정이 없으므로 상해기수인가 상해미수인가의 문제로 되 고, 이 때 각각의 행위와 그 행위에 결부될 결과 사이의 미수책임을 지우는 것이 제19 조의 취지인 것으로 보아 乙에게 상해미수의 책임을 지우는 견해이다. 甲에대해 살인미 수의 책임을 지우는 것은 제1설과 같다.(3)제3설상해치사죄의 경우에도 제263조의 적용을 긍정하는 판례의 입장에 따른다면 乙은 제 263조의 적용요건을 모두 구비하므로 乙에 대해서는 제263조를 적용하여 상해치사죄의 책임을 지우고, 이와 달리 제263조 적용대상에 해당하지 않는 甲의 경우에는 제19조를 적용하여 살인미수의 책임을 인정하려는 견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