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Ⅰ.들어가며1930년대 우리 문학계의 작품 창작에 있어서 몇 가지 특징적인 면들 중 강경애를 비롯한 여류작가들의 대거등장을 꼽을 수 있다.) 1920년대까지의 우리 문단은 사실 남성문학위주로서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은 강경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1936년 《조선일보》에 발표하였다. 1930년에서 1945년 해방되기까지의 한국문단은 여러 가지 색채와 음영이 뒤섞인 양상을 보인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문학적 주소를 명확히 규정할 수 없다. 일제는 우리 문화 전반에 걸친 탄압을 강화하였다. 그래서 작가들은 다양한 색채의 소재들을 양산하여 이에 대응하였는데 강경애는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을, 상류사회보다는 서민의 생활을 리얼한 수법으로 강렬하게 묘사하였다.여기서는 을 통해 그것이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 지 살펴본 다음 작가와 시대상황을 통해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겠다.Ⅱ. 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먼저 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서사단락을 나누어 내용을 살펴보겠다.①칠성은 어머니를 도와 두 동생을 먹여 살려야 하지만 불구자에다 거지이다.②그는 생존을 해결하기 위해 온갖 수모를 견디면서 매일 동냥을 다닌다.③그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에게 비참한 환멸을 느끼지만 앞집에 살고있는 큰년이를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살아간다.④그는 과자나 사탕 등을 동냥해서 큰년에게 갖다 주기도 하고 눈먼 그녀에게 여러 가지 정성을 다 쏟는다.⑤큰년이가 돈 많은 집에 첩살이로 간다는 것을 알고 큰년을 찾아가 시집을 가지 말라고 사정한다.⑥그는 큰년과 큰년의 부모의 마음을 사기 위해 한푼 두푼 모아왔던 돈으로 옷감을 사기 위해 송화읍으로 가게 된다.⑦고생 끝에 인조견을 구해왔으나 억수같은 비로 조밭은 망가지고 큰년이는 시집을 가버린 뒤였다.⑧비가 새는 방에서는 동생 영애가 죽어가고 있고 칠성은 어머니의 비명을 들으며 밖으로 나와 묵묵히 하늘을 노려본다.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인 칠성이, 칠성이 어머니, 동생들, 큰년이, 큰년이 어머니 등은 모두 생존을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물이며 사회로부터 멸시받고 소외당한 인물들이다. 주인공 칠성이는 어릴 때의 병으로 약 한 첩 써보지도 못하고 불구자가 되어 육체적으로 이미 궁핍을 해결할 능력을 상실한 인물이 된다. 큰년이도 이와 같은 불구자이며 칠성의 동생과 어머니는 병마에 시달리는 비참한 인물로 작품에 등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이 겪고 있는 극심한 궁핍에서 해방될 능력을 처음부터 상실한 인물들이다. 선대는 자신의 생존을 해결하지 못하고 후대는 선대의 궁핍을 그대로 이어받는 악순환만이 전개되는 공간에서 그들은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식민지 치하에서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 민족의 생존의 위협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그러한 민족의 궁핍이 해결 불가능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밥이란 도토리뿐으로 밥알은 어쩌다가 씹히곤 했다. 씹히는 그 밥알이야말로 극히 부드럽고 풀기가 있으며, 그 맛이 달콤해서 기침을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맛은 잠깐이고 또 도토리가 미끈하게 씹혀 밥맛이 쓰디쓴 맛으로 변한다. 그래서 도토리만은 잘 씹지 않고 우물우물해서 얼른 삼키려면 그만큼 더 넘어가지 않고 쓴 물을 뿌리며 혀끝에 넘나들었다.여기서 그들이 먹는 “밥”이란 것이 얼마나 조잡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러한 밥이나마 충분히 먹을 수 없어서 전전긍긍하는 것이 이들의 실정이다.“에그, 큰년네 어머니는 오늘 밭에서 아기를 낳았다누나. 내남없이 가난한 것들에서 새끼가 무어겠니”아까 버드나무 아래서 본 큰년의 어머니가 떠오르고 으아으아 울던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또 영애의 그 꼴이 선히 나타난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만삭이 되어서도 생존을 위해서 밭일을 나가야 하는 여인네의 가련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즉,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의 인물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은 윤리나 인간다움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직 생존만을 위해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 자식을 파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Ⅲ. 은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은 주인공 칠성의 참담한 생활현실을 밀도있게 그려내면서 당시의 어두운 사회현실을 치밀한 세부묘사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배안의 병신이유?”사내는 문득 이렇게 물었다. 칠성이는 머리를 숙이고 머뭇머뭇하다가,“아,아니유”“그럼 앓다가 그리 되었구려......약 써봤수?”칠성이는 또다시 말하기가 힘든 듯이 우물쭈물하고 다리만 보았다. 한참 후에“아 아니유, 못 썼어유”“흥! 생다리도 꺾어우는 지경인데, 약 못 쓰는 것 쯤이야. 허허......”아파도 약 한첩 써보지 못하고 병신이 되거나 ‘생다리도 꺾이우는’수난을 겪는다. 칠성이가 아팠을 때 그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의사에게 갔으나 의사는 보지도 못하고 돌아온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인정과 애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칠성이 어머니는 늘 칠성이를 걱정하고 있으며 칠성이는 큰년이에게 애정을 느끼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온갖 정성을 다 쏟는다. 그리고 그는 비오는 날 밤 우연히 만난 거지 어른에게서 따뜻한 인정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칠성이와 그 사나이 사이의 따뜻한 인정은 서정적인 분위기와 결부되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에 올 사건의 반전 효과를 높이는 데 기여하는 부수적인 사건일 뿐이다. 칠성이가 비를 피해 그 사나이와 하룻밤을 지내고 돌아오는 동안, 그가 애정을 느끼고 있는 유일한 인물, 큰년이가 시집을 가버린다. 그녀는 읍내의 부잣집 씨받이로 팔려간 것이다. 지하촌의 비인간화는 인신매매라는 극단적인 사태까지 몰고 온 것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비인간적인 인신매매가 지하촌이라는 비윤리적이라는 지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참, 큰년이는 복 좋아 글쎄 이런 꼴 안보렴인지 어제 시집갔단다.” 여기에서 인신매매는 우연한 하나의 행운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복 좋은 일’로 언급되는 비극적 상황을 맺게 되는 것이다.)그리고 남은 자들에겐 여전히 절망과 위협만이 있을 뿐이다. 칠성이도 결국 모든 희망과 인간의 자격을 잃어버리고 다시 절망과 암담한 생존 문제 앞에 홀로 서게 된다.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도울 수도 없는 이 지하촌의 극한 상황ㅇ이 바로 1930년대 식민지 치하를 살아가는 하층민의 실상이었다. 작가는 일제의 수탈로 완전히 몰락해 버린 하층민들의 생활상을 이 지하촌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강경애는 “전 조선의 빈한한 군중은 아니 전 세계의 무산 대중은 방금 기아 선상에서 헤매이고 있음”을 직시하고 그러한 극심한 빈곤으로 인하여 조선은 “개목숨보다는 사람의 목숨이 헐한”비인간화의 현장이 되어가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강경애는 이러한 당대의 현실을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치밀한 객관적 묘사를 통하여 지하촌의 공간으로 형상화했다. 그러므로 지하촌의 공간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생존 위기와 비인간화의 극단적인 일면이 인신매매라는 사건으로 표출되고 있다.)파리가 우구구 끓는 곳을 바라보니 밥그릇이 눈에 띄였다......그는 슬그머니 보를 들치었다. 국에는 파리가 빠져 둥둥 떠다니고 밥바리에 붙었던 수없는 강구떼는 기겁을 해서 달아난다. 그는 파리를 건져내고 밥을 푹 떠서 입에 넣었다. 밥이란 도토리뿐으로 밥알은 어쩌다가 씹히곤 했다.파리떼가 橫逸하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더욱이 생계가 막연한 상황을 그리고 있는 지하촌은 바로 식민지 땅에서 나무 뿌리를 캐먹고 살던 과거 우리 민족 생활상을 그대로 대변한다. 이렇게 계속되는 궁핍은 소경인 큰년에게 향한 칠성이의 애틋한 사랑마저 앗아간다. 즉 첩이 열도 넘는 읍내 부자의 또 한 명의 첩으로 갈지언정 구걸로 연연히 살아가는 칠성이의 처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어머니, 영애, 큰년이, 칠성이 등 어디 하나 성한데라곤 없는 환자의 불구자로 이루어진 무리들은 극빈 중의 극빈자로 가히 근대문학사의 최고의 빈궁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특히 작가의 고향인 송화를 배경으로 하여 조선땅에서의 최대 궁핍상을 현실감있게 문제삼아 일제치하의 식민지 경제수탈을 드러내려는 데 그 의도가 있다.궁핍의 극치를 나타내는 지하촌은 한결같이 굶주림과 무지로 하여 죽음을 아무런 대응책도 없이 그대로 방치하여 둔다.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제목에서부터 죽음과 맞닿아 있는 지하촌은 죽음의 문제가 끊임없이 이어져 결국 극도의 가난은 죽는 것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는 상황을 표현, 생명의 존귀함을 망각하고 있다. 눈과 귀에 흙이 잔뜩 들어가 있는 채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기라든가, 종기가 난 머리에 쥐 가죽을 붙여 부패되다 못해 벌레가 머리를 파먹는 고통으로 죽어가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그것이다. 강경애는 어느 남성작가의 작품속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섬뜩한 서술묘사를 하고 있다. 생물적인 비린내와 썩은 악취로 인해 질식할 것 같은 지하촌의 분위기를 설정하면서도 아무런 해결책도 희망도 보여주지 않으므로써 식민지치하에서 체험했던 굶주림과 부질없이 되어버리는 항거로 인한 죽음의 연속을, 삶에 대한 절망적 상황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다시 말하면 지하촌은 아무런 대응없이 받아들이는 죽음을 표현하며, 빛이라고는 조금도 스며들 수 없는 불모지대로서의 일제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대한 본질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농민문학론Ⅰ.서 언일제하의 농민문학에 관한 논의는 1920년대 중반부터 시작하여 1940년대까지 지속된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농촌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큰 것이었고, 그것을 반영하는 문단의 태도 역시 진지한 것이었다. 더구나 당대 한반도 전 인구의 80%이상을 차지하는 농촌인구가 당면한 삶의 현실이 곧 한국인 모두가 당면하고 있는 삶의 현실과 일치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농민문학에 관한 논의는 곧 문학대중화에 관한 논의와도 깊은 관계를 지니게 된다.농민문학에 관해 본격적으로 논쟁이 일어난 것은 1930년대 초반 프로문학계열의 논자들을 통해서이다. 그 가운데서도 안함광과 백철의 프로문학과 농민문학의 관계 및 논쟁이 이 부분의 핵을 이룬다. 여기에서는 농민문학론 대두의 배경을 알아보고 초기 농민문학론과 1930년대 프로문학 계열의 농민문학 전개양상을 통해 농민문학론의 흐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Ⅱ.본 언1. 농민문학론 대두의 시대적 배경일제하 농민문학 이론의 전개는 당시 현실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의 표출과정과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1931년을 기점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계급의식과 연관된 농민문학론의 경우도, 경제적 공황과 쌀값 폭락으로 이어지는 농촌현실에 대한 인식과 그 결과 초래되는 농민들의 계급의식의 확산 과정과 연관될 때 더욱 분명히 이해될 수 있다.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 산업구조의 재편을 목적으로 행한 일 가운데, 토지조사사업은 조선의 근대적 농업구조의 성격을 전화시키는 사건이었다. 토지 조사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1910년 9월 조선총독부 내에 임시 토지 조사국이 설치된 이후부터이다. 이른바 새로운 근대적 토지소유제도의 확립이라는 이름 아래 농업에서 수탈체제의 재편을 의도한 토지조사사업은 1918년 12월에 종료되었다. 이러한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상품 화폐경제의 농촌 침투, 조세제도 전매제도 등의 압력이 생겨나고 이로 인해 자작농 및 자작겸 소작농의 완전한 소작농으로의 전락 또는 어촌, 소작농주층에 대한 토지 집중을 가져왔다.)이로 인해 대다수 농민의 궁핍은 시작되었고 절대다수인 농민이 궁핍하게 되었다는 것은 한민족 전체가 궁핍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20년대 이후 농민의 궁핍화로 인해 사회적 문제가 무수히 발생하였고 더불어 농민문제는 민족현실에서 가장 큰 해결과제로 부각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시기에 이루어지는 농민층의 분해 및 분화의 심화는 식민지 통치권력의 비호를 받는 일본 이민의 증가에 의해 더욱 격화되었고 자작농민층의 몰락에 의한 계급대립현상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농민문학론은 이런 사회적 배경하에서 20년대 중반부터 대두되기 시작하여 30년대 초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20년대 농민문학론은 “제창(提唱)”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지만 30년대 농민문학론은 농민문학의 성격규정, 작가의 이념적 입장, 창작방법 등의 제문제에 대해 본격적인 검토를 시도하게 되었다. 30년대 농민문학론은 한마디로 말하면 전원문학적 성격의 문학을 배격하고 농민생활 실상에 대한 심층적 해부와 농민 궁핍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작품의 창작을 요구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것은 민족 현실에 대한 고민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하나의 문학운동이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농민문학의 과제가 문단의 관심을 모으게 된 것은 1920년대 초반부터 점차 확대되기 시작한 농민운동의 전개과정과 직결되고 있다. 1920년대의 농민운동은 일제의 침략정책으로 인한 농촌의 궁핍화와 봉건유습에 따른 농민에 대한 천대에 대응하기 위해 농민 스스로가 그 존재의미를 자각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 민족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해 오고 있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식민지 지배의 모순에 대응하기 위한 농민운동의 성격이 민족운동적인 색채를 강하게 드러낼 수 밖에 없었음을 짐작할 만 하다.)2.농민문학론의 전개1)초기 농민문학론의 전개 양상농민문학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관심과 논의는, 프로문학 논의의 일부로 나타났다.1924년 말에 발표된 효봉산인(曉峯山人)의 「신흥문단과 농촌문예」는 농민문학에 관한 최로 농촌문학을 제시한다. 그러한 맥락속에서 이 글은 조선 사람 생활의 십중팔구가 프로의 생활이니 조선의 문예는 프로의 생활을 그리는 문예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농촌의 생활이니 따라서 농촌문예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이 글은 프로문학론과 연관된 최초의 농민문학론이라는 점에서 적지않은 의의를 지닌다. 곧이어 발표된 이성환의 「신년문단을 향하여 농민문학을 일으키라」는 효봉산인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농민문학이란, 농민들에게 자각과 위안을 주는 문학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성환은 를 중심으로 하는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잡지 을 통해서도 농민문학의 실천을 계속 주장하였다.)1926년 『동아일보』의 「문예시평-농민문학」을 통해 나오는 주장 역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결국 이 시기까지의 농민문학론은 상당수가, 농민들의 파한이나 휴양, 혹은 그들에 대한 계몽의 강조, 이농의 원인을 무시한 귀농에 대한 권유 등으로 이어진다. 이런 가운데 1929년 3월 『조선농민』지를 통해 농민문예 특집 형식으로 발표된 글들은 몇 가지 점에서 의의와한계를 갖는데 이 특집 가운데 그래도 관심을 끄는 글은 김기진의 「농민문예에 대한 초안」이다. 김기진은 이 글이 자신이 전부터 관심을 갖던 대중화론의 연장선상에서 씌어지고 있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 글은, 농민문학의 필요성이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의 논의들과는 달리 한걸음 진전된 시각으로 그것을 파악한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2)농민문학론의 확립과 전개양상「농민문예에 대한 초안」에서 김기진은 통속적 대중화론의 관점에서 문식한 농민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해하기 쉬운 글을 쓸 것, 구성의 단순화, 농민의 대중심리에 영합등을 창작상 지침으로 내걸고 있다. 그러다 공식적으로 볼셰비키화와 동조해서 농민문학론이 제창되기 시작하는데 그 단초는 1930년 11월 하리코프 혁명작가회의에서의 결의 중 농민문학 제창부분에 대한 소개와 1931년 5월 권. 그리하여 이후 본격적인 논의들이 이루어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안함광과 백철의 논쟁이다.)하리코프 대회의 성과를 인정하면서 가장 먼저 농민문학의 필요성을 들고 나온 이론가가 안함광이다. 그는 「농민문학에 대한 일 고찰」을 통해 과거 우리의 문학운동에서 한번도 농민문학문제가 제기된 적이 없음을 지적한다. 아울러 그는 조선이라는 특수한 입장의 현 정세를 관찰할 때 이제 농민문학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간과할 수 없음을 말하며 농민문학의 필요성에 고나해 역설한다. 그가 주장한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프롤레타리아 운동 및 문학의 발전 도정과의 연관성 하에서 농민문학의 발전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농민문학을 논할 때 꼭 필요한 것이 노동자와 농민의 제휴를 전제로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주장하는 농민문학이 일반적인 모든 농민이 아닌 빈농계급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적극적 주입을 염두에 둔 것이다.)그런데 안함광의 이러한 논의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의 기계적 적용이라고 반박하면서 나온 이가 백철이다. 그는 「농민문학 문제」를 통해 농민문학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입장을 정리하면서 안함광의 앞의 글 가운데 일부를 비판한다.농민문학은 안함광군의 말과 같이 결코 빈농계급에게 기계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를 주입시켜가는 문학이 아니다. 만일 그 말대로 농민문학이 곧 그런 이데올로기의 문학이라면 그 농민문학 작품의 내용은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로 충만되며 관철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내용의 작품은 완전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미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농민문학은 프롤레타리아 문학과는 구별되어야 하며 또한 구별되어지고 있다. 농민문학은 프롤레타리아의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농민 자신의 문학이어야 하기 때문이다.(백철,「농민문학의 문제」))안함광에 대한 백철의 가장 핵심적인 공격 요지는 안함광이 농민문학과 프롤레타리아문학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백철은 자본주의 시대의 농민계급의 특징은 근 기초 위에서 생각할 때에는 농민계급에는 역사적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특수한 조건들이 유재한다고 본다. 이러한 농민계급이 갖는 특수한 사회적 조건들은 농민운동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방해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즉 백철은 농민의 이중성을 현실로 인정하여 혁명적 농민문학은 프로문학 또는 프로문학의 일부가 아니고 혁명적 농민의 이데올로기를 내용으로 하는 혁명적 농민의 문학이라고 주장했다.그는 농촌에 대한 역사적, 지리적 제재에도 농민문학의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제재문제와 관련한 백철의 지적은 30년대 초에 있어 맑스주의 문학론의 한 발전적 양상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제재에서의 융통성과 생활상의 묘사를 통한 이념의 표출, 농민현실의 역사적 검토 등을 주장한 점은 맑스주의 농민문학 작품의 새로운 전개를 가능하게 한 하나의 계기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카프 맹원으로서 30년대 초에 농민문학론을 전개한 사람은 안함광과 백철 외에 유해송, 김우철, 송완순, 박승극 정도였는데 백철의 위와 같은 주장은 다른 논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제재상의 유연성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백철은 표현 형식의 문제에 있어서도 직접 농민의 요구, 감정, 의식을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볼 때 백철이 훨씬 유연한 모습으로 농민문학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 두 사람의 논쟁이 갖는 중요한 의의는, 프로문학 진영에서 농민문학론의 방향이 일단 일정한 줄기를 잡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그 줄기의 주요 부분들은 농민문학과 프롤레타리아 문학 사이의 위상정립, 농민문학에서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의 중요성 인식 등으로 집약된다. 이것은 다시 농민대중을 향한 문학이 아닌 빈농층이라는 일정한 농민계층을 향한 문학 등의 구체적인 문제와도 연관이 있다. 1931년도 후반에 이루어진 안함광과 백철의 이 논쟁은 당시 카프 주변의 여러 논객들의 상당한 주목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의 인물 견훤에 대하여“난세는 영웅을 낳는다”라는 말이 있다. 영웅은 난세를 개척하는 인물로서 우리들은 영웅을 따르고 또 그들이 남긴 업적을 높이 치하하고 그가 세상을 떠나도 오래도록 그들을 기억하고 또 기린다. 그들의 육체는 이미 죽었을지언정 그들의 정신만은 만세상의 사람들의 기억속에 오래도록 남아 죽지 않는 것이다.그러나 나는 과연 그들이 평화롭고 아무런 걱정 근심없는 세상에 태어났더라도 영웅이 되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들이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개혁하고자하는 대상이나 제도가 없다면야 과연 그들이 영웅이 될 수 있었을까?를 읽으면서 나는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그를 영웅이라 할 수 있을까..건국의 당위성을 온 천하에 알리기 위해 설화나 신화가 다소 과장되게 그려지기도 한다. 그것은 범상한 인물임을 알려주는데 신화나 설화가 아니더라도 남겨진 기록에는 쉽게 좋은 얘기들만, 말도 안되지만 그렇게 그 인물이 뛰어나다는 걸 알려주고 있다.그런데 내가 삼국유사를 읽으면서 백제를 다시 부흥시킨 견훤의 대목에서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것은 그의 탄생설이 매우 이채롭다는데 그 이유가 있다.후백제 견훤의 출생에 관한 설화를 살펴보면,옛날 광주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에게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다. 딸이 아버지에게 아뢰기를 밤마다 자색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자고 간다고 하자 아버지가 그 남자의 옷에 실을 꿴 바늘을 꽂아 두라고 일러서 그 딸이 말대로 했는데, 이튿날 따라가 보니 북쪽 담 밑에서 실 끄트머리가 발견되었는데, 바늘은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얼마 후부터 그녀에게 태기가 있고 후에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견훤의 아버지가 지렁이라는 말이 아닌가..지렁이....정말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영웅이라면, 적어도 영웅의 탄생설화라면 적어도 용은 못될 지라도 이무기 정도는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그렇다.명색이 나라를 세운 왕의 아버지가 지렁이라니..추측하건대 견훤은 그 당시에 그다지 좋은 평판을 받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렁이라니...나는 다른 영웅들의 설화와 차이를 보이는 견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삼국유사를 접하기 시작했다..솔직히 삼국유사라 하면 따분하고 비슷비슷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들도 적지 않다고 생각해왔던 터 견훤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로 했다.견훤(甄萱)은 언제 출생했는 지는 알 수 없다. 936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에 전할 뿐이다. 상주 가은현(문경군)에서 신라의 장군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견훤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밭가의 나무 밑에 아이를 눕혀 두고 일을 하였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이더라는 전설이 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우람하고 의지가 강했던 그는 큰 뜻을 품고 자랐다. 892년 진성 여왕 때, 나라의 정치가 문란해진 데다가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그때, 견훤은 서남 지방을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워 비장으로 승진하였으며 나라가 점점 혼란해지자 그는 신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무진주(광주)를 점령하여 자기의 세력을 넓혀 갔다. 900년에는 완산주(전주)에 쳐들어가 스스로 왕이 되어, 나라 이름을 후백제라 하였다. 그리고 관청의 조직을 새로이 하고 사신을 중국에 보내서 국교를 맺는 등 나라로서의 기틀을 가꾸어 갔다. 궁예의 후고구려와 자주 충돌하여 세력 확장에 힘썼다. 또한 920년, 견훤은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신라의 대양성(합천)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경명왕은 훗날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 도움을 청하여 견훤을 물리쳤다. 926년에는 다시 신라의 수도인 금성(경주)을 공격하여, 때마침 포석정에서 놀이를 즐기던 경애왕을 붙잡아 강제로 자살하도록하고 노략질을 하였다. 그리고 김부를 왕(경순왕)으로 앉혀 놓아 신라 사람들의 원한을 샀다. 그 후로는 왕건과 여러 차례 싸웠는데, 번번히 패하였다. 929년, 고창(안동)에서 왕건의 군사에게 크게 패한 후부터 나라의 형세가 차차 기울기 시작하고, 유능한 신하들이 계속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934년에는 웅진(공주)이북의 30여 성이 고려로 넘어가, 한때 후삼국 중에서 가장 위세를 떨치던 후백제의 기세는 점점 꺾이기 시작했다. 견훤은 아들을 열이나 두었는데, 그중에서 넷째 아들 금강을 가장 아끼어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맏아들 신검이 불만을 품고는 다른 형제들과 힘을 합쳐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둔 다음, 금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견훤은 어느 날, 자기를 지키는 파수병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도망쳐서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한 뒤, 936년 왕건에게 신검을 무찌를 것을 요청하여 후백제를 멸망케 하였다. 그러나 왕건이 신검을 후히 대접하는 것을 보고 분을 못 이겨 앓다가 얼마 뒤 황산(충남 논산)에서 세상을 떠났다.견훤의 생애를 짧게 나마 살펴본다면 대강 이러하다. 그는 영웅일까..아니면 설화에서 그같이 그려지게끔 만들었던 악인이었을까?< 삼국사기>는 견훤에 대해?신라의 국운이 쇠퇴하고 정치가 어지러워 하늘이 돕지 아니하고 백성들이 갈 곳 없었다. 이에 도적들이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중 가장 악독한 자가 견훤이었다. 신라의 신하였던 그가 불측한 마음을 품고 나라의 위태한 틈을 기화로 임금과 백성을 잔혹하게 살육하였으니 실로 천하의 으뜸가는 악인이며 백성의 큰 원수였다. 그러니 천벌을 받아 제 자식에게 화를 당했다?고 기술하고 있다.이와같이 견훤을 사상 최대의 악인으로 그리고 있다. 최근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역사적으로 견훤에 대한 평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 켄사스 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허스트 3세, 국립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 등은 삼국사기 등 사료들 속에서 견훤이 심하게 왜곡돼 있다는 것. 역사의 승자인 태조 왕건 입장에서 본다면 견훤은 악인이 돼야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입장이다. 즉 견훤도 왕건 못지 않은 상당한 지도력과 군사적 자질을 소유하고 있던 희대의 영웅이라는 주장이다. 또 도덕성과 정통성을 가지고 백제 부활주의에 굳게 의지했던 인물이라고 추측하고 있다.견훤이 사람들로부터 가장 비판받는 부분은 지역 정서를 이용해 나라를 세웠고 정치적 역량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은 신라지역 출신임에도 백제 옛 땅에서 세력 규합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뛰어난 정치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피력했다. 그가 막강한 군사력, 뛰어난 참모진 등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포용력과 함께 카리스마를 지닌 영웅이라는 얘기다. 또 지역 정서에만 의존해 건국한 것이 아니라 웅대했던 백제를 부활시켜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다는 것이다.실제로 견훤은 독자적인 연호(신라는 중국 연호 사용)를 사용했다. 학자들은 ?견훤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후 당나라 연호를 사용한 것과는 확연히 구분된다?며 ?이는 견훤이 후백제가 자주국임을 선포한 것으로 이 사실로도 견훤은 악인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정치가로서의 특징외에도 견훤은 외교면에 눈을 돌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당나라 멸망 후 혼란한 중국대륙의 여러나라와 교류를 통해 이득을 챙겼다. 또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외교를 통해 고려를 압박하는 고차원적 외교술을 썼다. 일본과도 사신을 두 차례 파견하는 등 국제적 관계의 변동에 능동적으로 대처했다. 이처럼 뛰어난 외교술과 정치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던 견훤이 삼국을 통일 할 수 없었던 이유는 확실한 근거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견훤은 외교면에서 특히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라 관리라는 태생적 한계와 함께 왕권을 잡고 난 뒤 권력을 잡고 난 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신라와 비슷한 권력구조를 채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설명이다. 신라의 국가체제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호족을 장악하지 못한 것이 견훤의 단점이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자식들의 왕권다툼에서 교통 정리를 하지 못한 것도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공학적 교수방법 : 시청각 매체현대 후기 산업사회, 정보화 사회의 특징은 과학기술의 변화라 할 수 있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대량생산체제의 수립, 과학기술 교육수준의 급진적인 향상은 산업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전자기술산업의 발전, 특히 사이버네틱스와 커뮤니케이션 이론, 그리고 그의 응용체제의 발전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의 과학기술의 발전은 새로운 시대적 전환을 가져왔다고 할만하다. 과학 기술변화가 지금과 같이 방대하거나 심화되지 않았을 때에는 그 변화가 일부 제한된 사회계층의 사람들이나 또는 일부 제한된 분야의 일의 세계에서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과학기술변화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들, 모든 일의 세계에서 큰 관심이 대상이 되고 있다. 과학 기술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그 하나는 어떠한 종류의 과학기술이냐며, 다른 하나는 그 변화가 결과적으로 인간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초래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관심의 증대는 교육, 특히 교수?학습의 과정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다음에서는 바로 이러한 관심의 대답이 되는 교육에 있어서의 기술공학적인 산물과 활용을 검토하고자 한다.1. 시청각 교육운동과 교수공학의 발전1)시청각 교육운동의 발전*교육공학이란?광의에서 기술공학적인 지식 또는 방법을 교육을 개선 발전시키는 데 적용하려는 일체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협의에서 볼 때, 교육공학은 교수공학을 주로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즉, 실제로 가르치는 교실현장에서의 공학적 접근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데체로 협의의 교육공학, 즉 교수?공학적인 측면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대 선사시대에서의 교수방법은 주로 시범과 모방을 통한 방법이 그 전부였다. 언어가 발달되면서부터 구두전달방법이, 문자가 발전되고 인쇄술이 발전되면서부터는 강의방법과 교과서를 활용하는 교수방법이 활발해졌다. 교수공학의 역사적 발전의 기원은 인쇄술의 발전으로부터 통해서만 얻어진다이탈리아의 Campanella-감각적 인상을 통한 가르치는 일의 주장17세기의 J.A.Comenius(시청각 교육운동의 출발점)☞그는 지식의 시초는 감각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교실의 사면 벽에서는 그림을 걸 것을, 교과서에도 그림을 채워 넣을 것을 주장, 그는 시청각 교육에 의한 3가지 교수원리를 강조-1)교육내용을 쉬운 데서 어려운 데로 단계적으로 동급을 붙여 배열한 교과서의 직관적 회 화 자료를 준비하여 가르쳐야 한다.2)교육내용을 제시할 때에는 구두로 제시하기에 앞서, 회화자료와 같은 구체적인 시각적 자료를 제시하여야 한다.3)가르칠 때는 먼저 실물을 다루고 난 다음에 그것에 관련된 구두설명이 따라야 한다.시청각 교육운동에 있어서 이론적 기초를 보다 공고히 세우는데는 20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세 사람의 학문적 연구가 크게 기여하였다.☞1.C.F.Hoban의 교육과정의 시각화-교육과정 경험을 구체적→추상적인 과정으로 일반화2.E.G.Olsen-학습을 지각경험으로 보고 그것을 3층의 피라미드로 분류3.E.Dale-이러한 경험의 위계를 좀더 세분하여 모두 11개 요소로 구성된 경험의 원추로 제시언어적 상징시각적 상징라디오?정화영 화텔레비젼전 시견 학연 시극화된 경험모의적 경험직접적인 의도된 경험2)교수공학의 발전시청각 교육은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교육공학 또는 교수공학의 성격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것은 텔레비전과 컴퓨터의 출현, 그리고 각종 통신정보 기술공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현대 사회 전체가 새로운 기술혁명의 시대로 돌입하면서 비롯한 것이다. 특히, 새로운 정보공학은 정보를 창출하고 저장하고 선별하고, 처리하고, 전달하고, 그리고 제시하는데 있어서 빠른 속도의 여러 가지 기술 개혁과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교수공학이 산업공학기술의 진보에 힘입어 교육현장에서 더욱 널리 수용되고 발전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근본적인 필요성에 기인한다.1. 학교마다, 교실마다 학습자 수가 놀랍게 증가2. 지식의 폭발적인 증가와 함께, 교더 이상 예술일 수 없고 과학이라는 것이다.2. 이들은 교육은 외현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행동에 기초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3. 교수공학 옹호자들은 기계는 인간인 교수자의 한계를 초월한 효율적인 교수자로서 얼 마든지 프로그램화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교수공학이 교육의 과정에 있어서 추구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무엇인가?☞1. 교수공학은 학습자들에게 학습을 조장하고 학습자들의 동기를 유발시켜 전통적인 수용 적 학습자세에서 벗어나 학습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2. 교수공학은 학습자들에게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되, 그때의 경험은 보다 풍부하고, 보다 깊고, 보다 현실적이며, 보다 유쾌하고, 그리고 보다 복잡한 경험이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 라, 그 경험은 학습자마다의 독특한 유일한 경험일 수도 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개개 학습자가 최고의 경지의 정상경험을 겪도록 도와준다는 데 목적이 있다.3. 교수공학은 학습자들에게 새로운 통찰과 이해의 능력을 증진시켜 복잡한 학습과제에 학 습자들이 효율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한다는데 그 유용한 가치를 찾을 수 있다.교수공학의 여러 가지 방법이나 시청각 교육매체는 방법 또는 매체 그 자체일 뿐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교수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며, 그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발휘할 것인가 하는 인간적 측면을 더 중요시하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교수공학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다고 본다. 교수공학에 대한 접근 기회의 부족, 즉 시청각 교육매체가 부족하거나 많은 교과내용을 정해진 짧은 시간에 모두 다루도록 지나치게 밀집하여 편성하고 있어서 시청각 교육매체를 활용할 수 있는 여유가 전혀 없었다거나 또는 시청각 교육매체나 교수공학에 대한 원리적인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 교수공학에 대한 막연한 부정적 시각이 형성될 수도 있었으리라고 미루어 생각해 볼 수 있다.2. 교수매체의 기본 특성과 분류 및 선정광의로 볼 때, 교수매체는 학습자에게 지식?기능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매체의 선정기준1. 교수매체는 적합성을 지녀야 한다.2. 경제성을 지닌 교수매체를 선정하여야 한다.3. 교수매체를 선택할 때는 활용 가능성을 고려하여야 한다.4. 양호성3. 각 시청각 매체의 특성과 장?단점1)시각 교수매체시각 교수매체-평면매체-정지 투사매체정지 비투사매체입체매체(1)정지 투사매체*칠판 : 전통적으로 교실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매체는 칠판이다. 정보를 제시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그림도 그리는 등 모든 종류의 가르치는 활동이 칠판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문제가 많았음도 일찍부터 느껴졌다. 교수자의 판서나 판화기능에 따라 칠판 위에 제시되는 내용은 영향을 받게 되며 미리 세심하게 판서, 판화의 내용을 준비하기 어렵고 복잡한 그림이나 구조를 실감나게 제시하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점을 단적으로 극복해 줄수 있는 교수매체가 바로 정지 투사매체이다.*정지 투사매체란,어떠한 정지된 상에 빛을 보내어서 그것을 투사시켜 제시하는 시각매체이다. 여기에는 투명자료를 투사하는 경우도 있고, 불투명자료를 투사하는 경우도 있다.①슬라이드비용이 적게든다사용이 편리하다보관하기가 쉽고 교수자들도 쉽게 제작할 수 있다.한가지 장면을 오래도록 투사시킬 수 있다.교수자가 사전에 선택적으로 추려서 교과내용을 맞추어 쉽게 구조화할 수 있다.투명자료를②줄사진여러 개의 그림들이 하나의 순차적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제작이 용이하다.적절한 음악이나 음향효과를 동반시킬 수 있다.개별화 수업체제에서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고정된 계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때마다 쇄신하는데 어려움이 있다.③투시화투명한 아세테이트용지에 그린 그림을 흔히 OHP라고 불리우는 투사기를 통해 비추어 제시하는 자료이다.수업 도중 교수자가 아세테이트 용지에다 특수한 펜을 사용하여 직접 가면그려 서 내용을 제시할 수 있다.학습자들을 직접 바라보면서 제시할 수 있다.투사하는 경우이러한 정지 투사매체는 특히 시각능력이 관련되는 교과내용이나 정보의 어떠한 구조적 특성, 절차, 과정 방향, 색깔의 선택, 빛의 사용, 그리고 균형이 어느 정도나 잘된것이냐, 전달하는 메시지나 아이디어가 초점있게 분명히 드러나 있느냐,대조가 잘 이루어져 있느냐)②그래프?의미있는 정보나 아이디어를 선, 단어, 기호등을 통하여 요약 제시하는 매체이다.?선형, 원형, 막대, 그림의 4종류-이해하기 쉬운 것 : 1.원형 그래프 2.막대 그래프정밀성이 높은 것 : 선형 그래프③도해?주로 선과 기호만을 사용하여 응축시켜 제시하는 매우 상징성이 높은 시각매체이다.?그 의미가 학습자에게 분명히 이해되지 않으면 오히려 학습을 저해시킬 우려가 있다.④차트?그림, 그래프 등을 복합적으로 활용하여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들이나 과정 및 관계 등을 제시해 준다.?구체적인 내용의 제시보다는 요약의 형태를 취한다.-내용의 개요를 제시하거나 어떠한 계통조직이나 기구조직, 차이의 비교, 과정이나 절차의 개요 등을 나타내서 제시하는데 효과적이다.(3)입체매체①모형?실물의 두드러진 주요한 특징, 또는 강조하고 싶은 필요한 특징만을 선택하여서 나타낸 입체매체이다.?크기는 실물보다 클수도, 작을 수도 있다.?실물의 복잡성을 단순화시켜 교수,학습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필요하면 분해하고 재조립할 수 있다.②표본?유사실물이다.-실물의 일부분,전부를 관찰할 수 있도록 모아놓은 것이다.?경우에 따라서 실물 그 자체일 수 있으나 대체로 생물체의 경우 그것은 생명이 없는 경우가 많고 광물체의 경우 전체에서 유리된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대체로 시공간적인 이유로 쉽게 접근하여 직접관찰하기 어려운 대상들의 경우가 많이 활용된다.입체매체는 3차원적 매체들이다. 깊이가 있고 높이가 있으며 폭이 있는 매체들이다.③활동식물?움직이는 모형이다.?특성은 모형과 같되, 학습자가 그것을 직접 가동시켜 움직이게 할 수 있다.?특별한 직접체험 또는 훈련경험이나 분석경험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 활용된다.④입체자연모형?여러 가지 모형물이나 표본 등을 그 자체가 모형으로 만들어진 자연배경 속에 집어 넣어서이 높다
4. 시정신과 일상성의 회복(1)민중시와 민중적 상상력Ⅰ.내용요약1960년대 중반부터 문단의 쟁점이 된 시의 현실참여 문제는 1970년대 이후 산업화시대에 들어선 뒤에도 여전히 시단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 논쟁은 시적 대상과 시적 인식의 범주를 정립하기 위한 노력으로 확대되어 시의 세계와 현실세계의 간격이 상당히 좁혀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시인 자신이 경험적 진실성에 대한 추구작업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시의 세계가 시적 상상력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기반으로서 일상의 삶과 그 현실은 결코 외면하거나 회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산업화시대의 시단에서 가장 뚜렷한 시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참여파로 지칭되고 있는 시인들의 민중 지향적인 시적 작업이다. 김수영과 신동엽이 중견의 자리에서 타계했지만, 1970년대 초반부터 신경림, 이성부, 조태일, 최하림 등의 활동에 의해 민중시의 시적 가능성을 인정받게 된다.1970년대의 민중시는 사회적 상황이 정치문화의 폐쇄성과 급격한 산업화의 물결에 의해 혼돈을 거듭하고 있는 여러 가지 특징을 드러낸다. 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 소외된 민중의 삶의 모습이 시를 통해 드러나며 때로는 지나치게 이념적인 색채를 드러나기도 한다.민중시의 개념은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민중시에 대한 관심은 젊은 시인들 사이에 널리 확대되었다. 시가 민중적 삶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하고 민중적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경험적 진실성에 대한 추구 자세로 보아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이 대상에 대한 느낌의 문제보다 깨달음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인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시적 태도가 가치 있게 구현될 수 있기 위해서는 삶의 경험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인식을 전제해야만 하는 것이다. 민중시가 현실에 대한 인식과 실천적 의지를 구현하고자 할 경우, 비판의 소리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비판적인 소리에도 창조적인 감성과 지성도의 정서와 그 표현기법이 주제의 고양을 위해 기능적으로 결합되고 있다. 이성부의 이성부 시집 , 백제행 , 최하림의 우리들을 위하여 , 작은 마을에서 등에서는 보다 정제된 언어의 형식이 드러나고 있다.김지하가 발표한 담시 오적 은 전통적인 운문양식인 가사, 타령, 판소리사설 등을 변용함으로써 새로운 장시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담시가 지닌 풍자성과 격렬한 어조는 시대성 또는 상황성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지는 실천적 의지를 보여준다. 시어의 반복과 생략, 의성·의태어의 활용, 비어와 속어의 배치 등의 수사학적 장치는 권위와 비리에 대한 부정, 풍자, 비판의 기능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는 한국사회의 상류층이 보여주고 있는 도덕적 불감증과 부정부패, 현실의 삶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호화사치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정치적인 폭력에 의해 탄압을 받으면서도 이러한 시적 자세를 굽히지 않음으로써,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김지하는 타는 목마름으로 에서 문학성의 의미로 다시 관심을 모으게 된다. 이 시집의 시들은 비판과 저항의 의지가 보다 깊이 내면화되면서 정서의 응축을 통한 시적 긴장을 잘 살려내고 있다. 서정시가 빚어내는 비극적인 감동이 시적 의지를 더욱 강렬하게 구현할 수 있는 정서적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김지하의 시적 감수성은 언어의 절제에서 그 빛을 발휘하고 있으며 이미지의 대립은 시적 자아의 내면적 고통과 갈등을 드러낸다. 비극적 정황에도 불구하고, 비극성을 넘어서는 의지를 잃지 않고,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싸우고 견뎌야 할 현실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대설 남 1·2·3 에서는 서정양식과 서사양식 사이의 긴장을 지탱할 수 있는 새로운 담론의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다.조태일의 국토 는 연작시의 형태를 통해 시적 주제의 폭과 깊이를 어떻게 확대, 심화할 수 있는가를 검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민중의 역사적인 삶의 양상과 분단된 국토에 대한 인식을 다양하게 전개하기 위해서, 시적 형식의 이완과 대상의 확대를의 간격을 무너뜨려 주객의 통합을 거친 뒤에 얻어진 것이기에 무게를 지닐 수 있게 된다. 신경림이 그의 시적 작업에서 가장 힘들인 것은 현대시와 민요정신의 결합이다. 민요 속에 살아 있는 집단적인 민중의 삶과 그 의지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생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되고 있는 실감의 정서를 더욱 귀하게 여기고 있다. 민중적 서정주의를 민요의 정신 속에서 찾고 있는 그가 자신의 체험과 현장감각을 바탕으로 민중의 삶을 총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 장시 남한강 이다. 이 시는 민요 속에 담긴 민중의 정서가 현대시에서도 얼마든지 다시 살아날 수 있으며, 시적 긴장을 유지할 수 있음을 말해 주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고은의 초기 시들은 허무의 정서에 바탕을 두고 있었는데 문의마을에 가서 가 발간된 1970년대 중반부터 커다란 변화를 드러내고 있다. 고은이 1970년대의 암울한 정치현실에 정면으로 대립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시에서 볼 수 있었던 삶에 대한 회의의 태도가 생의 무상함에 대한 인식으로 변모하는 과정과 연결된다. 그는 지독한 자기 혐오나 허무감을 떨쳐버리고 역사와 현실 앞에 자기를 세우기 시작한다. 자기 인식에 기초하여 현실을 보고 역사와 대면하기 시작하면서 발표한 시들은 불의의 현실에 대한 격렬한 투쟁의지를 노래한 것들이다. 그는 폭력의 정치에 온몸으로 저항하면서도 참담한 현실을 절망하지 않는다. 그의 시에는 신념과 의지가 살아 움직인다. 투쟁이 필요하던 시대에 고은의 시는 그 자체를 이루고 있는 언어 하나 하나가 모두 그의 한 제목처럼 이 되어 피를 뿜고 있다. 절망의 시대를 겪고 난 고은의 시 세계는 보다 폭 넓고 깊은 역사의식을 포괄할 수 있는 상상력의 힘을 지니게 된다. 그의 연작시 만인보 와 장시 백두산 이 바로 그러한 실천적 성과에 해당된다.최하림과 이성부는 서로 유사한 시적 정서와 기법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최하림의 시에는 시적 정황의 설정 자체가 언제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시는 매섭고 추운 의 이미지들이 늘 바탕을 이루 의지를 잘 구현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두 시인은 역사의 진보에 대해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신념을 더욱 강하게 키워내지는 못하고 있다. 최하림은 자기 체험의 내면에 깊숙이 침잠해 있으며, 이성부의 경우는 언어의 진실성에 대한 회의의 빛을 드러내고 있다.1970년대 이후의 산업화과정에서 김지하, 신경림, 고은, 최하림, 이성부, 조태일 등의 시작활동은 젊은 시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김준태의 참깨를 털면서 , 국밥과 희망 , 이시영의 만월 , 바람속으로 ,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김명수의 월식 , 하급반 교과서 등이 주목된다.이들 중 정희성은 첫 시집 답청 에서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에 이르기까지 시적 형식의 절제와 이완을 거듭 시도하고 있다. 답청 에서 정희성은 전통적인 것, 신화적인 것에 대한 현대적 인식의 가능성을 시를 통해 점검하기도 하고, 언어의 압축을 꾀하면서 서정성의 진폭을 시험하기도 한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에서는 시적 진실성에 대한 관심과 민중적인 삶에 대한 애착이 나타난다. 이 두 가지의 지향은 정희성의 시가 일상적인 삶의 문제와 현실의 국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 원동력이 된다. 특히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에서는 민중의 일상적인 삶에 내재해 있는 건강성과 생명력을 포괄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 시에서 정서의 균형과 내면적인 의지의 충일 상태를 시적 긴장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민중시가 추구해야 할 미적 질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민중시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가 현실 지향적인 태도와 그 시적 구현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의 한가운데에서 이념적 과격성과 기법적 과격성을 함께 내세우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또 다른 움직임을 1980년대 시단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종오의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 사월에서 오월로 , 김정환의 지울 수 없는 노래 , 황색 예수전 , 김진경의 갈문리의 아이들 , 광화문을 지나며 ,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 곽재구의 사평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그 새로운 창조의 정신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것은 민중의 시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시 그 자체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민중시 운동의 전개 과정 속에서 문제시되었던 것은 이념 지향적인 태도가 자칫 시 자체를 이념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중시 운동은 자유로운 시적 상상력과 그 포괄적인 의지가 확산될 수 있도록 시에 대한 민중의 관심과 참여를 촉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Ⅱ.비판점과 다른 견해1.김지하김지하는 당대의 모순된 구조를 총체적으로 비판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황토』의 「타작」은 돌아가는 탈곡기를 보며 세상도 돌기를 바라고 있는 작품이다. 그 동안의 경제개발 정책이 도시 중심으로 또 제2차산업 위주로 진행되어 농촌이 몰락하였는데 시인은 그에 대항하여 극단적인 비유로 세상이 “미친 사람 미친 듯이 돌”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타는 목마름으로』의 「지옥1」역시 노동자의 한이 배인 작품이다. 갓 스물된 노동자가 작업중에 손가락이 잘리는 재해를 당해 절망하면서 자신의 여러 가지 과거를 떠올리고 있다. 김지하는 또한 노동자에게 아픔을 준 대상을 찾아내어 비판하였다. 「오적」에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을 인간의 부류에 들지 못하는 동물로 취급하고 풍자한 것이나, 「앵적가」(櫻賊歌)에서 기회주의 정치가를 신랄하게 비꼰 것, 그리고 「비어」(蜚語)에서 정의와 인간성이 결여된 정치권력을 공격한 것 등이 그러하다.김지하의 시 세계는 민중을 주체적인 대상으로 보지 않고, 수동적인 존재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민중들이 스스로 사회적 위치를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식인이 이끌어야 한다는 입장은 지식인 시인으로서의 책무라고 볼 수도 있지만 , 지나치게 민중을 수동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1) 맹문재, 한국 민중시 문학사, 박이정, 2001, pp.102∼103.「오적」이나 「비어」의 민중은 여전히 무지하며 절망 속에 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