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자서전》리 콴유는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중국인인 그는 어린 시절 중국어 학교 대신 자신에게 익숙한 영어 학교를 다닐 것을 고집하여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영어 학교를 졸업한다. 이는 후에 싱가포르의 다수민족인 중국인들에게 다가가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영국유학을 쉽게 하고 정치를 하면서도 외교관계에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영리한 그에게 공부는 그리 멀지도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고 당연히 최고의 성적을 유지했다. 어린 시절 그것은 조상에게 받은 것이기도 한 그의 자신감과 추진력의 원천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 후 래플스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된 그는 처음으로 ‘말레이 민족주의’를 접하게 되는데 그것은 싱가포르의 대학에서 싱가포르인들 보다 말레이 연방주와 비 연방주민들이 특혜를 받는 모순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때 싱가포르를 이끌어 가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일본의 침략그의 대학시절 1941년이 다 저물어가던 때에 싱가포르는 일본의 침략을 받고 영국이 아닌 또 다른 지배자를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그전까지 영국의 식민지배 아래여도 불만을 갖지 않고 오히려 영국이라는 국가와 영국인이라는 민족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경외감을 갖은 채로 순응하며 살았던 반면, 일본인들은 잔혹한 사냥꾼의 이빨을 드러내며 사람들을 위협했고 모두 두려움에 숨죽여 살아야만 했다. 리 콴유는 이런 시기에도 빨리 상황을 파악할 줄 알았고 일본어를 배워 직장을 다니고 여의치 않으면 사업을 벌여 생계를 꾸렸다. 그리고 이런 혼란스러움 안에서 반려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대학시절 그보다 좋은 성적을 받았던 유일한 학생이기도 했고 자신과 동등한 지적 동반자를 원했던 그에게 꼭 맞는 사람이었다.똑같이 일본의 식민통치를 경험했으나 그들과 우리는 달랐다. 수십 년의 긴 세월동안 끊임없이 저항하고 싸웠던 우리와는 달리 싱가포르의 국민들은 몇 년 동안 일본인들에게 적응해갔다. 이에 대해 리 콴유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없었더라친츠에 등을 만나 말레이의 독립을 추구하는 단체로 활동하기도 한다.싱가포르에 돌아와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고 그는 우연한 기회에 노조 선임 변호사로서 경력을 쌓았고 후에 노동조합은 그가 정치를 하는 데 큰 밑바탕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스스로 중국인이면서 무지했던 중국어파 중국인들의 사회에 대해 알게 되었고 중국의 공산혁명에 큰 영향을 받고 공산주의에 빠져든 청년 이상주의자들과 마주 대하면서 좌익의 내부 사정에 눈뜨게 된다.그 후 공산주의자인 림 친시옹과 퐁 쉬수완을 만나 중국인 지지기반을 만들고 ‘인민행동당’이라는 정당을 창당한다. 그들은 당시 신념에 차 있었고 헌신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첫 선거에서 경제적으로나 인지도 면에서 모두 부족할 수밖에 없는 선거였음에도 그는 승리한다. 리 콴유가 도왔던 여러 노조와 단체들이 단지 그의 당선만을 바라며 돕기 위해 나섰고 그것이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선의의 도움과 조건 없는 믿음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대목이었다.예상치 못한 선거결과로 무능한 마셜정부가 들어서게 되고 공산세력은 더욱 커져만 갔다. 정권이 교체될 때까지 림 친시옹과 퐁 쉬수완은 마셜정부의 무능함을 한껏 이용했고 이것은 뚜렷한 정치적 신념과 추진력이 결여된 한 명의 집권자로 인해 한 나라가 얼마나 나쁜 길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싱가포르는 순식간에 파업의 천국으로 변해갔고 공산주의자들은 그 배후와 중심에 넓게 포진해 있었다. 그리고 그 한편에서 온건주의적 투쟁을 벌인 리 콴유는 상대적으로 정치적 신임을 더 얻을 수 있었다.이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노조파업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이며 당시의 싱가포르와는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대규모 파업사태와 폭력시위?진압은 무능한 위정자들로 인해 투쟁을 위한 투쟁이 벌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저자가 서술하고 있는 그 당시 싱가포르의 모습이 언뜻 떠올려지기까지 한다. 사람들은 무언의 폭력도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 자신은 중국인으로서의 자의식이 확고한 다민족주의자였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인지 의구심이 일었다. 말레이인이 중국인보다 우매하다는 툰쿠 등의 말을 인용하면서 정작 그의 생각은 뚜렷이 나타나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공산주의자들의 힘이후로도 정치에 무능했던 마셜은 실정을 거듭했고 림 친시옹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이용당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신념이라고는 대중에게 내보일 수 있는 업적을 이루는 것뿐이었다. 그 사실은 런던 개헌회담에서 절정을 이루며 드러났고 회담이 실패함으로써 그는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림 유혹이 총리가 된다.그것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위협적인 현실이 되어 나가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세력은 더욱 결의를 다졌고 인민행동당 안에서도 가장 막강한 세력이 된다. 림 유혹 정부는 무모할 정도로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붙였고 공권력을 이용하여 소탕작전에 나섰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정치 경력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은 일이었다. 오히려 공산주의자들이 림 유혹 자신을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매도하고 중국인들이 그를 외면하도록 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힘은 지지자들에게서 나왔다. 자신들의 정열을 내뿜을 곳을 찾지 못한 많은 젊은 청년들이 림과 퐁같은 지도자들의 자기희생적인 생활에 영향을 받았고 그것은 그들에게 경쟁적인 희생정신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지지자들로 인해 공산주의자들은 적은 돈으로 선거를 치를 수 있었고 무조건적인 헌신의 정신으로 봉사하는 지원자들로 넘쳐 났다.그러나 저자는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를 포기하게 되었을 때 겪는 극도의 상실감으로 인해 누구보다도 먼저 부패에 빠져들고 재산축적에 열을 올린다고 이야기한다. 지난 세월을 보상받기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원하게 된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어느 나라보다도 오랫동안 공산주의 체제에서 살아온 북한의 사람들이 통일이 고 일부일처제만을 합법화하는 등의 여성신장을 위한 ‘여성헌장’을 법제화하였으며, ‘황색 문화 추방 운동’ 등의 문화운동을 벌이는 등의 여러 가지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또한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그가 추진력을 갖춘 인물인 동시에 융통성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종교적?문화적 예외를 인정할 줄 아는 정치가였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였다고 생각되어진다.국민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한 그의 노력 또한 대단했다. 당내의 말썽이었던 옹 엥관과의 대결에 맞서 호키엔어 구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후 그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에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피나는 연습과 시행착오 끝에 수개월 후 호키엔 어라는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연사가 되어있었다.리 콴유의 목적은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하여 말레이시아의 시민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임박해있는 공산세력과의 대결을 피하고 나아가 경제발전까지도 생각한 그와 인민행동당의 정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연방의 통치자인 툰쿠는 친공적 성향이 강한 중국인들과 같은 연방을 이루어 민족 구성비가 달라질 것을 탐탁지 않아 했고 싱가포르 내에서 일어난 단일독립국가 수립을 외치는 세력들의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아 쉽지 않은 일이었다.결국 공산주의 세력과의 대결은 눈앞에 다가왔고 리 콴유는 당으로서도 공산주의 세력과 결별하기 위해 재신임투표를 상정하고 재신임 받기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하였다. 그리고 탈당한 그들은 바리산 사회주의 전선이라는 당을 만들어 본격적인 대결구도를 만들어 나갔다. 이들의 세력을 저지하고 합병의 당위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리 콴유는 대국민 연설을 기획하게 된다. 그리고 그 연설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 사회처럼 불신이 팽배해 있는 곳에서는 정치인에게서 기대하기 힘든, 진실로 이루어진 이야기들과 그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연설자로서의 능력이 힘을 발휘한 것이다.◎ 말레이시아 연방으로 합병과 다가올 고난툰쿠는 자신이 말레이인이면서도 말레이인이 중국적이 생긴 것이다. 더 이상 공산주의자들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갔고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돌입하게 된다.툰쿠는 이후 거만해져 싱가포르까지 자신의 권력의 손아귀에 잡아넣기를 원하기 시작했다. 그는 싱가포르에 대한 국방과 치안의 전권을 갖고 싶어 했고, 탄 쉬신은 싱가포르의 재정에 손을 대고 싶어 했다. 그들은 그렇게 싱가포르를 죄어오면서 어느 한쪽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고 이는 계속되어 곪아터질 지경이 되도록 해결이 나지 않았다. 그들은 말 그대로 ‘연방’일 뿐 ‘한 나라’는 되지 못했고 이는 남북이 갈라져있는 우리에게 더 많은 걱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통일계획 중의 하나로서 이야기되어지던 남북연방제는 다민족인 말레이시아 연방과는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너무 긴 시간동안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극과 극의 사상을 가지고 살았던 우리는 서로 다른 민족 간의 대립이었던 말레이시아 연방보다 오히려 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민족끼리 대립하고 싸우는 것 자체가 어느 쪽에게도 승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의 독립과 총선그는 합병 이전의 총선을 계획했다. 툰쿠는 동맹당을 앞세워 싱가포르에서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으나 리 콴유는 전 선거구에 순회 방문식 선거운동을 벌여 그의 인기를 확인시키며 동맹당 뿐만 아니라 바리산의 마지막 희망조차 부서뜨렸다. 그것은 세상이 변하고 있으며 국민들 또한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공산주의로 점철된 나라가 아님을 드러내게 되었음을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이 보여주었던 힘은 순간이었으며 환상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시민이 있는 나라에서 공산주의가 그 이론과 환상을 그대로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고 결국 편협하고 그릇된 사상을 안은 채 사라져 갈 운명이었다.리 콴유는 탈 식민지화의 바람을 타고 탄생한 신생국들이 많은 아프리카를 순방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능력 있는 정부 없이 기존 권력집단과 결탁하거나 섣부른 사회주의 정책으로는 신있었다.
【목차】Ⅰ.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인물들의 의복1. 옷의 재료1) 가죽2) 모직물3) 마직물4) 사직물2. 남자의 옷과 꾸밈새3. 여자의 옷과 꾸밈새4. 집안과 평양지역 복식의 차이5. 염색기법6. 신발Ⅱ. 머리모양1. 남자의 머리모양과 모자(머리쓰개)2. 여자의 머리모양Ⅲ. 계층별 인물 분석1. 지배계층2. 중간계층3. 피지배계층Ⅳ. 맺음말Ⅰ.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인물들의 의복1. 옷의 재료고구려 복식의 기본이 되는 의복의 재료로는 가죽과 모직물, 마직물, 사직물 등이 있다. 한국과 중국의 문헌자료와 고고학자료 등을 근거로 하여 고구려 의복 재료의 종류와 그 수준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 가죽문헌자료에 의하면 특수 가죽으로는 붉은 표범, 누런 말곰, 표범, 반어, 흰 사슴, 흰 노루, 자색노루, 삼각사슴, 꼬리가 긴 토끼, 낙타, 자줏빛 여우, 흰매, 흰말 등의 가죽이 생산되었다. 이 같은 동물들의 가죽은 당시 중국에 수출했거나 예물로 보내졌던 희귀한 것들이었고, 일반 가죽으로는 멧돼지, 사슴, 여우, 너구리, 말, 담비, 호랑이, 곰, 노루, 꿩, 족제비, 수달, 돼지, 개, 소, 사향노루, 복작 노루, 승냥이, 토끼, 산양, 양, 낙타, 오소리, 물소, 물개, 고래 등의 여러 동물 가죽들이 재료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는 당시의 사냥 활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수렵도가 많은데, 개별적 사냥을 묘사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규모가 매우 큰 집단적 사냥을 묘사한 것이다. 이 같은 벽화의 내용으로부터 당시 일반적인 복식의 재료로 쓰인 동물의 다양한 종류와 그 양적인 풍부함을 살펴볼 수 있다.2) 모직물고조선의 모직은 서기 전 23세기 경부터 중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품질의 우수성으로 춘추시대에 와서는 중국 수입 품목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는데 이 같은 고조선의 기술을 계승한 고구려 사람들도 돼지털로 짠 모직물인 장일(障日)을 생산했다.3) 마직물고구려는 포(布), 백(帛), 피(皮)를 복식의 재료로 함께 사용서 운포금(雲布錦), 오색금(五色錦), 자지(紫地), 문금(文錦) 등 다양한 무늬로 짠 옷감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러한 까닭에 금수는 중국에서도 고구려의 고유한 상징으로 보았다.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고구려의 금과 수가 중국과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나라와 중국의 금과 수를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진간(秦簡)의 설명대로 중국의 금은 여러 색실로 문양을 짠 것을 말한다. 그러나 고구려의 금과 수는 웃옷, 치마, 바지 등 여러 옷을 하나하나 다른 색실로 짜고 옷 전체를 아름다운 색의 조합으로 만들고, 아름다운 문양을 곳곳에 수놓아 조합의 예술적 성취를 끌어올렸다. 다시 말해, 고구려는 옷 전체를 금과 수로 만들었던 것이다.2. 남자의 옷과 꾸밈새저고리(?)는 기본적으로 저고리 깃을 왼편으로 여미는 좌임을 하였는데 이는 활을 즐겨 쓰는 내륙아시아 기마계 민족의 관습이다. 하지만 후대에 이르면 우임을 한 인물들도 눈에 띈다.그리고 옷에는 선(?)이라는 것을 대는데 이는 깃과 도련, 소매 끝에 의복 바탕천과는 다른 천을 대는 것으로 실용과 장식 효과 모두 누릴 수 있도록 해준다.바지에는 통 넓은 바지인 대구고(大口袴)와 통 좁은 바지 궁고(窮袴)가 있었는데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대구고를 입었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궁고를 입었다. 그리고 예외적으로 경제력이 좋은 사람들이나 공연을 하는 기예꾼들도 대구고를 입을 수 있었다. 여기에 활동에 편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넓은 헝겊이나 누비 헝겊으로 만들어 정강이 부분에 해당하는 바지통에 묶는 행전을 사용했다. 저고리 위에 입는 두루마기는 저고리와 같은 기본 형태와 구조이나 길이가 발목에 이르는 긴 옷이다.허리띠(帶)는 겉옷을 단단히 여미거나 몸의 균형미를 위해 사용되었다. 고구려에서는 옷을 여며야 할 복식에서 가는 대를 매듭을 길게 하여 맸다. 그렇지 않은 복식에서는 대를 매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긴 대는 복식을 여미기 위한 것이지 검 등을 매기 위한 것은 아니었음이 확실을 말한다. 대개 시녀들이 입고 있으며 둥근 깃 모양을 하고, 통옷 위로 앞치마를 두르고 있다.4. 집안과 평양지역 복식의 차이집안지역 벽화에 나타난 복식의 특징은 비교적 밝고 단순한 색상의 바탕천에 점무늬, 마름모무늬, 꽃무늬 가운데 한 가지를 간결하게 반복하여 장식한 옷이 선호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평양지역은 다양하고 화려한 색상의 바탕천에 구름무늬, 물결무늬, 넝쿨무늬, 각종 기하무늬 등을 두세 가지씩 복잡하고 화려하게 장식한 옷이 유행하였다. 5세기 후반에는 고유의 점무늬 옷에 세련미를 더한 복식이 등장하여 평양천도 이후 두 지역의 문화를 통합하려는 노력이 진행된 것으로 보여 진다.5. 염색기법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염료는 보다 다양하게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고구려 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려에 와서 쪽물의 염색은 비록 상류계층에 국한됐지만 널리 쓰였던 것으로 사료된다.고구려 의복을 살펴보면 주부의 복색은 음양오행설에 의한 복색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또한 갈의로 표현된 서민의 복색은 갈색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풍부한 색의 염색술이 발달하였으며, 여러 방법으로 문양도 나타내는 염색이어서 침염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복색으로 사용된 색은 적(赤), 황(黃), 청(靑), 백(白), 흑(黑), 자(紫), 선(線), 분홍색(粉紅色) 등으로 직물염료인 쪽, 홍화 그 밖의 나무를 태워 우려낸 즙을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6. 신발문헌에 의하면 고대 한국의 신은 크게 이(履)와 화(靴)로 나눌 수 있고, 화는 다시 목이 긴 화와 목이 짧은 혜(鞋), 둘로 나눌 수 있으며 고구려의 귀족과 대신들 및 일반 남자들은 모두 누런 '혁이(革履)'를 신었다. 4세기에서 6세기까지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보면 고구려 사람들은 신분이나 관직에 관계없이 이(履)를 신었고, 안악 3호분 묘주부인의 신만이 붉었을 뿐 다른 신들은 검은색이거나 흰색이었다. 이는 고구려에서 신분이나 관직에 따라 신의 색을 구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만일 고구려가 북신분차를 나타내었던 책(?)은 앞부분이 모자 테보다 한 단 높고, 앞부분보다 더 높은 뒷부분이 두 가닥으로 갈라지면서 앞으로 구부러진 형태의 책과 뒤 운두가 뾰족하게 솟은 책이 있다.절풍에 새 깃을 꽂아 장식한 조우관(鳥羽冠)은 절풍 좌우에 한 개씩 꽂거나 정수리 부분에 여러 개를 한꺼번에 꽂은 경우가 일반적이다. 삼국에 모두 존재했으나 고구려가 형태와 사용이 더욱 돋보인다. 라관(羅冠)은 신분과 지위가 높은 인물만이 쓰던 모자로 뒤 운두가 솟은 책 모양의 내관과 발이 성긴 ‘라(羅)’라는 비단으로 짠 외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왕은 백색, 대가는 청색, 소가는 붉은색 비단으로 짠 라관을 썼다고 한다. 또한 패랭이라는 차양이 넓은 모양의 모자를 쓰기도 했는데 벗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 끝으로 묶어 고정하였다. 모양은 오늘날 농촌에서 볼 수 있는 밀짚모자와 유사하다.2. 여자의 머리모양고구려 여인의 고유한 머리 모양은 집안지역에서 볼 수 있다. 집안지역에서는 자신의 머리카락만을 얹은머리와 묶은 머리가 많았다. 뒤에서 하나로 묶고 끝을 약간 올린 모양, 양옆의 머리를 내린 애교머리 등 고구려의 고유한 머리 양식이 나타나고 있다. 유목생활에 편리한 머리모양이 선호된 것이다. 평양지역에서는 고유한 형태보다 외래양식의 영향을 받아 가발을 덧붙여서 크고 화려하게 만든 머리모양이 많았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머리모양이 선호된 것은 당시에 고구려가 경제적으로 풍요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었음을 말해준다.고구려 고분벽화의 여자의 머리모양은 매우 다양하다. 크게 나누면 얹은머리와 묶은 머리, 쪽머리로 나눌 수 있는데 얹은머리에는 가발을 덧붙인 얹은머리와 본인의 머리카락만을 얹은 두 종류가 있다. 뒷머리에서 앞머리로 감아 돌려 끝을 앞머리 가운데 감아 꽂은 모양이다. 가발을 덧붙여 올린 얹은머리는 2∼3개의 환(環)으로 빗은 것으로 안악 1호분, 안악 3호분, 약수리 벽화고분 등 평양지역 벽화의 여주인공과 시녀들의 머리모양에서 볼 수 있다. 자신의 머리카락만을 얹은머리는 안악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들 지배계층에 대한 옷차림에 대해서는 이미 알려진 바이다. 이들 고분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다양한 색깔이나 무늬가 있는 재료로 옷을 만들었으며, 통이 넓은 소매의 옷과 긴 옷을 주로 입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들은 대체로 생산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옷차림이 가능하였을 것이다.고구려의 지배계층을 ‘좌식자(坐食者)’라고 표현한다면 그들이 가진 사회경제적인 여건이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벽화에서도 주로 수레에 타거나, 교예를 관람하는 모습, 또는 조회를 받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피장자들은 주로 활동하기에는 불편하지만 신분적으로 지배계층으로 보이는 옷차림을 하고 있다.벽화고분의 피장자는 모두 일정한 정치적인 지위를 가진 지배계층이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자신의 주변에 家臣들로 생각되는 인물들을 두고 있었다. 또한 벽화에서는 사냥을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수렵이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이들 피장자들이 생전에 활동하던 것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사냥이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요소도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삼국지』에 의하면 고구려는 ‘큰 산이 많아 농사를 지어서는 살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중요한 영양 공급원으로서 사냥을 했을 것이고, 사냥에서 나오는 모피는 중요한 무역물품이 되기도 하였다.안악 3호분의 주방을 보면 사냥해 온 짐승들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사냥의 직접적인 결과물이기도 하다. 안악 3호분 피장자의 집에 여러 마리의 짐승을 잡아 보관할 정도였다면 이들 지배계층이 지닌 경제적인 독점력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소유한 것은 탈 것인 말과 수레를 끄는 소 등 여러 마리였다. 또한 방아시설도 갖추고 있어서 벽화에서는 자주 디딜방아를 찧는 여인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이 누렸던 정치적인 특권을 행렬도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행렬도는 지극히 공식적인 것이고 빈번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다.
Ⅰ.성곽의 정의성곽이란 군사적·행정적인 집단의 공동목적을 갖고 거주주체의 일정한 공동 활동공간을 확보하도록 하고 그 구조물이 연결성을 갖는 전통건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군사적이란 뜻은 성곽이 지역 방어, 국가 방어 등 각종 군사방어 목적을 갖는 것이 으뜸이고 한 가정의 울타리나 목장과는 다르다. 또한 성곽은 군사적인 목적만이 아니라 일부는 행정적인 성격을 갖는 경우도 있다. 그 예로 국가통치를 위해 왕이 거주하고 있는 주변과 읍지를 위해 성을 구축하는 것은 반드시 군사적인 목적으로만 축조하였다고 할 수 없는 추가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다. 이는 통치를 위한 권위적인 요소와 행정적 편의를 함께 하는 합목적적인 것으로 보인다. 집단의 공동목적이란 개인이 아닌 집단의 공동이익을 위하여 축조하였기 때문에 개인의 사사로운 울타리 구획과는 구별된다.자연지형이 아무리 천연요새와 같다하더라고 이를 성곽이라 부르지 않듯이 반드시 사람, 즉 인공 거주주체에 의해 최소한 일부 축조되어야 한다. 성곽이란 일정한 공동 활동공간을 확보하고 성벽으로 거주주체인 요원의 활동을 보장하는 즉 수용공간을 보유하여 방어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면적, 즉 공간이 있어야 된다는 의미다. 성벽으로 완전히 둘리지 않아도 적에 대치할 수 있는 일정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구조물이 연결성을 갖는다는 것은 돌무더기, 흙무덤, 개인분묘 등이 성곽이 아니듯 부분적으로는 자연지세를 그대로 이용하더라도 일정공간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조성하던지 인공구조물을 쌓아 상호 연결시켜 방어력을 제공하는 구조물이어야 한다. 전통 건조물이란 종전까지는 성곽이 당시에 필요한 군사방어시설물이었으나 현재는 그 기능이 끝나고 단순히 문화유적으로서의 기능만 간주되는 입장에서 이제까지 성곽정의에서는 시간의 한계성을 부여하지 않았었다. 오늘날 휴전선과 군사방어시설물을 성곽이라고 부르지 않듯이 조선말까지 그 기능이 살아있었던 과거의 당시까지 축조된 성곽을 말하게 되므로 전통건조물이라고 불려져야 될 것으로 보인다.{) 반따라 나누어 보면 토성문(土城門)과 석성문(石城門)을 들 수 있는데, 토성문의 형식은 아직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지금까지 조사된 결과에 의해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는 토성 벽의 일부를 이용해서 양편에 토단을 만들어 성문을 만든 방식(1)과 두 번째는 토성 벽을 성문 부분의 개구부가 노출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문을 중첩시켜 토루가 축성의 역을 하게 하여 성문을 보호하는 방식(2), 세 번째는 가장 일반적으로 이용되었던 방식(3)으로 석성문의 형식과 같이 축조하는 형태이다.{{{<그림 1, 2, 3> 토성문의 형식(2) 성문의 형식(석성문){{{석성문은 현존하는 성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성문의 축조 재료는 석재를 비롯하여 철재, 목재, 기와 등 매우 다양하다. 삼국시대의 성문은 남아 있는 것이 없으나 고분 벽화에서 보이는 성곽도에서 살펴보면 당시 중층(重層)의 누각과 그 좌우에 단층 누각을 보여주고 있어 상당히 발달된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성문의 규모가 큰 도성들은 성문을 설치할 때 4방향 외에도 중간에 작은 문을 내었고 읍성의 경우 기본적으로 4방향에 성문을 두었다. 산성의 경우는 지형의 여건에 따라 성문을 두었는데 기본은 동서남북의 각 방향에 1개소씩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방어에 취약할 수가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곳에는 내지 않았다.{) 송석상/이강승, 1996 《그림으로 배우는 우리의 문화유산》학연문화사 : 서울개거식, 평거식, 홍예식1)개거식 (開据式)성문 개구부의 형식중 개구부 상부가 개방된 형태로, 성문의 개구부 폭, 높이 등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토성 문은 개거식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석성의 경우는 단순한 개거식에다 누문을 둔 경우도 있다.2) 평거식(平据式)성문의 양쪽에 벽석을 쌓고 그 위에 긴 장대석이나 판석을 걸쳐 네모진 모양의 개거부를 낸 형태로, 암문, 수문 등 성문 중에서 개구부의 크기가 작은 곳에 많이 이용된 형식이다.3) 홍예식(紅霓式)개구부의 윗부분을 둥글게 곡선으로 보다는 산성의 경우 암문의 설치가 많은데 이는 산성의 경우 암문설치에 더욱 적합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손영식, 1996 《전통과학건축》대원사 : 서울{ 화성 북동암문{ 남한산성 용암문7) 수문(水門)성곽의 배수를 위한 시설이다. 규모가 크고 문의 형식을 갖춘 경우 수문이라 하고 규모가 적은 경우 수구(水口)라 한다. 성곽이 위치하고 있는 일정공간은 성벽으로 둘러 처져 있기 때문에 성내에서 발생하는 우수를 비롯 제반 물 처리를 성벽 일부를 통하여 배수하고 있다. 성벽의 일부를 개구시켜 설치함에 따라 적절히 배수가 되지 못할 경우 성벽보전에 가장 큰 취약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암문처럼 작고 눈에 띄지 않도록 설치하였다.{ 수원성 화홍문성곽에서는 배수가 필요한 곳에는 반드시 수문 또는 수구가 있는데 그 크기는 집수면적에 따른 통수단면을 따랐다. 집수면적이 적은 경우는 성돌 한 개를 뺀 형식에서 규모가 큰 곳은 교량과 같이 연속적으로 홍예를 틀어 만들기도 하였다. 수문의 경우 성벽일부가 노출 개방됨에 따라 방어력에 상당한 취약점이 되기도 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성벽위로 폭포처럼 배수하거나 또는 성벽가운데에 구멍을 내어 배수하기도 하며 수원성의 경우처럼 넓은 배수구를 갖지만, 적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배수지점을 낮게 하여 배수구를 통해 들어와 공격하기는 어렵지만 위에서 공격하기는 쉬운 형태로 수구를 만들기도 한다.{) {http://koreacastle.wo.to{ 남한산성 수구(3) 성문 보호시설1) 옹성(甕城){ 수원화성 장안문 옹성{ 수원화성 팔달문 옹성옹성이란 모양이 반으로 쪼갠 독과 같아서 옹성이라 하는데 성문을 밖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외부 또는 내부에 설치한 이중성벽을 말한다. 이러한 옹성은 적이 성문 바로 아래에 숨어 공격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또는 적의 화기로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옹성은 적이 성문에 접근하여 성문을 뚫으려 할 때 문루와 상성에서 사방으로 협공 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고 송성은 평면이 사각형과 반 더욱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성벽의 어느 일부가 뚫리게 되면 뒤통수를 얻어맞게 되는 격이 되어 무용지물이 될 뿐 아니라 오히려 장애물 역할을 하는 수도 있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성곽에 둘러친 성벽을 높고 튼튼히 축조함을 목표로 하였다. 성벽자체가 가장 중요한 방어력을 제공하는 수단이 되었는데 성벽을 보호하기 위하여 체성위에 또는 주변에 각종 부대시설을 설치하여 성벽의 방어력을 높이기도 하였다. 성벽에 따른 각종 시설들에는 여장, 총안, 현안, 치, 각루, 공심돈, 용도, 해자 등이 있다.(2) 여장(女墻)체성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을 여장이라 한다. 여장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위나암성, 요동성총의 여장형태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초기부터 여장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여장의 형태는 여러 형식이 보인다. 이는 여장에 총안 까지 갖춘 시설을 하여 방어력을 높인 듯한데 석성의 대부분은 여장을 설치하였다고 보나 토성의 경우는 여장의 형태를 유지하기 어려운 재료이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다. 여장은 체성위에 설치하였기 때문에 체성보다도 그 유구가 적다. {) 송석상/이강승, 1996 《그림으로 배우는 우리의 문화유산》학연문화사 : 서울{ 전주읍성 풍남문 여장1) 여장의 구조 - 여장은 바깥쪽에서 보면 성벽의 연장으로 성벽을 높게 쌓은 역할을 하고 안쪽에서는 적으로부터 은폐된 활동 공간을 제공한다. 여장은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 기능을 제공하는 동시에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근(近)·원(遠)총안, 타구 등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2) 여장의 형식 - 일반적인 여장에는 타(화살을 막기 위한 성체 위의 구조물)와 타구(성벽 위의 여장 구간마다 잘리는 부분 구간의 움푹한 구간)가 있고 타에는 총안(여장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총이나 활을 소개 되어있는 구멍)을 둔 경우로, 평여장 볼록 여장, 반원형 여장 등이 있다.1 평여장(平女墻) : 대표적인 여장의 형태로, 타와 타 사이에 타구를 가깝게 꿇어 성벽 가까이 온 적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을 말한다. 적이 성벽에 완전히 밀착하면 성위에서 발견하여 퇴치가 어려워 14세기 말경에 창안된 것으로 보며, 우리나라 성벽에서는 의주성에서부터 사용되었다.{) 김왕직, 2000 《그림으로 보는 한국건축용어》발언 : 서울(6) 치(雉)성벽에서 적의 접근을 조기에 관측하고 전투시 성벽에 접근한 적을 정면 또는 측면에서 격퇴시킬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돌출 시켜 장방형으로 내쌓은 구조물을 말한다. 치는 여러 명칭으로 불렸는데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치성(雉城), 곡성(曲城), 성두(城頭)등이 있고, 치 위에 누각의 유무에 따라서도 다르게 불렸다. 누각이 있는 경우 포루(鋪樓), 적루(敵樓), 포사(鋪舍)라 하며, 치에 포를 설치하는 경우에 포루(砲樓), 석루(石樓)라 한다.치의 형태는 장방형이 많고 반원형의 형태도 있다. 산성의 경우 성벽과 능선이 교차되는 높은 지점에 치를 만들고 평지성의 경우에는 산성보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치를 설치하였다.치의 높이는 성체의 높이와 같이 하고 규모는 일정치 않으나 일반적으로 가로는 5∼8m, 세로로 4∼6m의 크기가 많다.{ 화성 동삼치{ 화성 동일치(7) 각루(角樓)각루는 성곽에서 성벽에 부착된 치의 일종으로 모서리 부분에 설치한 것을 각루라 한다. 방형 성에서는 모퉁이에 설치하였고 산성 등 자연지세를 이용한 경우에는 지형상 돌출되어 관측과 지휘에 용이한 곳에 설치하였다. 각루는 건물이 서있는데 대부분 지붕은 기와로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각루를 지어 놓음으로써 외관을 돋구는 역할도 했을 것이나 유사시 전투지휘 보조처로도 이용되었다.(8) 공심돈(空心墩){ 수원화성 동북공심돈성벽에 설치한 돈대(墩臺:성안 높직한 평지에 높게 축조한 포대)의 하나로 각루 또는 포루(鋪樓 : 누각이 있는 치)나, 포루(砲樓 : 포를 설치한 치)가 위치한 곳과 같은 치의 자리에 높다랗게 설치한 시설물인데 내부가 비어있어 공심돈이라 한다. 공심돈은 수원성에서만 볼 수 있는 것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