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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 발해사 인식의 변천
    韓國史에서 渤海史 認識의 變遷-新羅時代에서 解放 後까지-역사이론학습반 오동석-목 차-Ⅰ. 머리말Ⅱ. 新羅時代에서 朝鮮時代까지의 발해 인식1. 新羅時代의 발해 인식2. 高麗時代의 발해 인식3. 朝鮮時代의 발해 인식Ⅲ. 韓末에서 해방 후까지의 발해 인식1. 韓末의 발해 인식2. 日帝時期의 발해 인식3. 解放 後의 발해 인식Ⅳ. 맺음말Ⅰ. 머리말발해는 서기 698년에 건설되어 926년 거란에 멸망되기까지 현재 중국의 동북지방과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존재했다. 발해는 668년 당?신라에 의해 멸망된 고구려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고 발해의 지배층 자신도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고 있던 증거가 있다.이러한 고구려와의 관련에 주목하여 남북한에서 연구가 활기를 띄어 왔다. 그리고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로서 서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더욱이 시대구분에서 신라?발해가 병립하는 남북국시대라는 구분을 설정하고 있다.이와 같이 현재로서 발해사를 한국사로 다루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사에서의 발해에 대한 관점을 보면 반드시 韓國史上에 위치시킨다고 하는 인식이 확고했던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 점이 있다.위의 사실을 염두 해 보면서 먼저 발해사 인식이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가를 살펴보겠다.) 크게 보면 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는 발해를 양면적으로 인식해 왔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한국사에서 제외하였다가 후기에 와서 발해의 역사를 재발견하는 커다란 전환이 있었다. 이 때 발해에 대한 인식과 연구가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지만 미완성인 채로 중단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었으나 구체적 연구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실증적 연구는 1960년대부터 시작되어 80년대부터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러한 흐름을 보면 비록 시대적 배경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한국에서 북방 영토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던 시기에 발해에 대한 인식과 연구도 고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이 글에서는 ‘발해사를 어떻게 파악해야 정당하게 자리 잡아야 할 것임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의 변화는 단시일 내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전기, 중기까지 이어지던 종래의 관념을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조선의 전시대에 걸쳐 영향을 주었던『東國通鑑』의 발해사에 대한 인식을 번복한다는 것은 여간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1) 인접국로의 인식 단계이 단계에서는 발해사를 우리 역사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발해사를 전혀 다루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 부분적으로 발해사를 서술하고 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그러므로 이 단계에서는 발해를 통일신라와 시간적으로 동일하고 공간적으로 이웃하였던 나라로 인식하였으며, 그 결과 역사 서술 체제 면에서도 발해사를 통일신라사 속에서 부수적으로 다루는 특징이 나타난다. 그리고 발해의 종족 구성이나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는 종래의 애매한 문헌 기록을 비판 없이 거의 그대로 답습하거나, 오히려 말갈족에 가깝게 이해하였다.이러한 인식을 대표하는 역사서가『동국통감』이다. 이 책에서는 발해사를 우리 역사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고려 태조가 거란에 대해 행한 정책을 비판한 史論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여기에서 고려 태조가 거란 사신을 거부하였던 사건을 들어거란이 발해에게 신의를 잃은 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발해를 위한 보복으로…)라고 하면서 그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발해와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으로, 이를 통하여 발해사를 우리 역사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그렇다고 하여 이 책에서 발해사를 전혀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新羅史나 高麗史 속에서 발해와 관련된 사실들이 간략히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그 까닭은 안정복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발해를 우리 역사에 넣을 수는 없으나, 본래 고구려 옛 땅으로 우리나라와 이웃하여 서로 의지하는 관계를 가졌었기 때문에『동국통감』에서 이를 갖추어 서술하였으며, 자신도 이를 따른다고 하였던 것이다.)결국『동국통감』에서는 발해었다고 하면서 이것은 신라인의 과오라고 한탄)하였다. 이것은 신경준의 발해사 인식이 기존 인식을 크게 바꾸는 것이었으면서도 아직은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면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이상의 인식은 그가『東國文獻備考』의「與地考」집필을 담당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여기서는 발해국과 정안국)을 부여국, 동옥저국, 보덕국등과 함께 고구려 속국으로 다루었다.신경준의 발해사 인식은 이만운에게로 그대로 이어져『紀年兒覽』의 모태가 되었다.『기년아람』의 역사체계는『東國文獻備考』의「與地考」와 비슷한데, 특히 정안국과 발해국을 고구려 속국으로 규정한 것은 신경준의 영향이 틀림없다.) 그리고『기년아람』의 발해사 인식은『練藜室記述』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정안국과 발해국을 고구려 속국에 넣은 것과, 걸걸중상을 고구려 옛 장수로 잘못 서술한 것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大東掌攷』로도 이어졌다. 이 책에서도 역시 정안국과 발해국을「高句麗所統諸國」에서 다루었다. 그리고 걸걸중상을 고구려 옛 장수라고 하면서, 대조영을 고구려 속말인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면 대조영을 속말말갈 출신으로 고구려화 된 사람으로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앞서 신경준이 고구려인이라고 규정한 것과 다르기는 하지만 고구려적인 요소를 강조한 데에서는 동일하다.3) 독립국으로의 인식 단계이상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발해사를 신라와 대등한 독립국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두 부류가 있으니, 첫째는 삼국이나 통일신라와 대등하게 世家, 世紀로 다루는 경우이고, 둘째는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이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부르는 경우이다.① 世家, 世紀로 다루는 경우그 시초는『東史』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비록 완성된 형태는 아니지만 기전체의 형식을 완전히 갖춘 최초의 역사서에 해당된다.) 그 편목을 보면 삼국 이전의 역사는 本紀로 처리했지만, 삼국은 본기에서 서술되지 않았다. 그리고 부여, 발해, 가야의 역사가 世家로 서술되어 있다. 만일 삼국을 본기로 취급하려 하였다가 미처 서술하지 못한 것이라면) 아서술은 두 가지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 하나는 신라사의 특정시기에 발해사를 개략적으로 기술하는 경우이다.『朝鮮歷代史略』이 조선전기의 관찬사서인『東國通鑑』의 서술형식을 기본적으로 계승하여 성덕왕 11년조에 발해건국과 경애왕 2년조에 발해 멸망에 관한 사실을 언급한 것 이외에 모두 성덕왕 31년조에 약술하였다. 그러한 서술의 대표적인 역사서가 학부에서 김택영이 중등용으로 편찬한『東國歷代史略』이다. 또 한 발해의 종족계통을 ‘本粟末靺鞨而高句麗別種’으로 파악한 점이 주목된다.『동국역대사략』의 종족계통에 대한 인식은 두 계통의 사료를 결합시킨『동국통감』의 파악방법을 답습한『조선역대사략』과 같은 셈이다. 이와 같은 인식내용은 동일한 형식의 다른 역사서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만『新訂東國歷史』는 발해국을 ‘本高句麗屬邦’으로 이해함으로써 고구려의 계승을 암시하려고 했지만, 이것은 사실의 착오일 뿐이다. 성덕왕대에 약술하는 서술형식과 더불어 종족계통을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의 별종으로 파악하면, 발해사는 한국사의 일부로 인식되기 어렵다. 이것은 발해를 우리나라 역사로 보지 않고, 단지 신라와 관계있는 인접국가로 취급한『동국통감』의 인식수준을 넘지 못한데 기인한 결과이다.다른 하나는 발해사를 신라사의 편년체계 내에 종속시켜 병렬적으로 기술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서술형식의 전형은 한말의 대표적인 역사서인 동시에 합리주의적 역사인식의 집대성으로 평가되는)『歷史輯略』이다. 저자인 김택영은 학부 명의의 이 책을 편찬하기 이전에 자신의 명의로『東史輯略』도 저술하였는데, 발해사의 서술방법은 거의 같았다. 다만『동사집략』은 발해의 紀年을 기재하지 않았으나,『역사집략』은 신라의 기년에 부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발해왕의 죽음도 薨애서 ?로 높여서 표기하는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신라왕의 죽음을 昇遐로 달리 표현한 사실과 비교해 보면, 역시 발해왕을 정통상의 왕으로 보지 않았다.) 이러한 한계는 편년체라는 서술체계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서가 삼국시대를 無正統으로 서술. 이러한 역사학의 논리에 의해 발해에 대한 인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효과적인 滿韓경영을 위해 1906년에 南滿洲鐵道株式會社를 설립하였다. 滿鐵은 만주와 한국에 대하여 제국주의적 침략을 수행하기 위한 중추기관이었다. 한편 동양사학자 白鳥庫吉의 주재 하에 만주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광범위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기초 작업 위에서 松井等, 稻葉岩吉, 池內宏, 津田右吉 등이 1910년대 전반 발해에 관한 연구결과를 계속 발표함으로써 식민사학의 주요 논리인 滿鮮史觀이 형성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만선사관은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들이 日鮮同祖論을 주장한 데 대해 동양사 연구자들이 주장한 만선불가분의 타율성론이 핵심이 되었으며, 한국고대사가 주된 연구대상이었다. 稻葉岩吉은 1919년의 삼일운동 이후 한국사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부인하기 위해 민족, 영토, 경제의 세 방면에서 한국은 만주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만선사관을 정립하였다. 1932년에는 滿洲國의 성립을 계기로 더욱 발전시켰다. 결국 만선사관은 한국의 역사를 만주의 세력 파급의 역사로 해소하려는 것이었다.일제는 식민사학론에 입각한 한국사의 정리를 목표로 1922년에 조선총독부의 산하기관으로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여기에서 발해사는 만선사관에 따라 제3편 新羅時代에 포함되었다. 또한 李能和가 발해의 귀속문제를 물은 데에서 稻葉岩吉은 신라를 서술하는 곳에서 발해 및 이와 관련된 鐵利 등의 기사를 수록할 계획을 밝힘으로써 발해사를 한국사에서 배제할 방침이었다.발해 배제의 공식적 입장은 1925년 조선사편찬위원회가 관제 개편에 의해서 조선사편수회로 바뀐 다음에도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여기에서는 발해에 해당하는 시기를 제2편 통일신라시대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발해사에 대해서는 1930년 제 4회 위원회에서 있은 다음의 토론이 주목된다.최남선 위원: 구쳊척으로 말하면 여진은 아직 불명한 채로 남아 있는 민족이지만, 나는 조선사의 기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문/어학| 2005.02.15| 17페이지| 1,000원| 조회(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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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해의 건국과정
    1. 머리말지난 시간에는 러시아, 중국, 북한, 한국, 일본의 발해연구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았다. 이 번 시간에 우리는 발해의 건국과정과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어떻게 맞물려서 진행되었는 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또한, 발해가 국제적 대외관계를 어떠한 방향으로 설정하고 나아가 는 지에 대해서 확인하고자 한다.2. 발해의 건국1) 발해의 건국과정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였다. 그리고 많은 고구려인들이 당으로 압송되었다. 당의 강제 사민정책에 따른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영주지역으로 압송되었는데 대조영의 집단도 그 가운데 속해 있었다.696년 5월 거란족의 수령 이진충이 돌궐의 후원을 받으며 봉기하였다. 이진충은 조문홰를 죽이고 영주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무가상한(無上可汗)이라 칭하며 당을 공격하였다. 영주지역은 큰 혼란에 빠졌고, 일부 이 종족 집단들은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 이탈해 나갔다. 이런 와중에서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의 동향은 일정하지 못하였다. 일부는 이 지역에 남아있거나 당군과 함께 행동하였다. 그래서 영주가 다시 당의 지배 아래 들어간 이후 이 지역에 거주하며 당의 군병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고구려 유민으로 이정기(李正己) 집안은 대표적인 예이다. 다른 일부는 이탈하였으나 대조영집단과 말갈족의 걸사비우(乞四比羽) 집단은 동쪽으로 이동하였다.이진충이 이끄는 거란군은 신속히 북중국의 하북지역으로 남진하였다. 그 해 9월 이진충이 사망하자, 손만영이 무리를 이끌고 당군을 격파하며 크게 세력을 떨쳤다. 수세에 몰린 당은 돌궐에 물자를 제공하며 서로 밀약을 맺어 거란을 양면에서 협공하는 방책을 도모하였고, 돌궐이 이에 응하여 거란의 배후를 기습하였다. 이에 정세가 크게 역전되었다. 거란은 본거지를 돌궐에게 유린당하였고, 거란의 동맹군이던 해족(奚族)이 돌궐에 투항하였다. 당군의 방어망이 강화되자 거란군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697년 6월 거란족은 당에 의해 진압되었다.이 무렵 거란 장수였던 이해고와 낙무정 등이 당에 투항하게 된다. 거란을 진압한 당은 의 난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신은 신당서, 구는 구당서, 자는 자치통감을 의미함696년 5월 임자(壬子)(12)거란인 이진충과 손만영이 난을 일으켜 영주도독 조문홰를 죽이고 영주를 점거함(신, 구)696년 5월 을축(乙丑)(25)당 조정이 조인사, 장현우, 등 28명의 장수들에게 이들을 토벌하도록 함(신, 구)696년 7월 신해(辛亥)(11)당 조정이 무삼상, 요숙에게 거란을 방비하게 함(자)제(制)를 내려 이진충을 이진멸(李盡滅)로, 손만영을 손만참(孫萬斬)으로 바꿈(구, 자)이윽고 이진충이 무상가한(無上可汗)이라 자칭함(구, 자)이진충이 손만영을 대장으로 삼아 사방을 공략하여 이르는 곳마다 함락시키니, 열흘만에 군사가 수만 명으로 불어남(구, 자)696년 8월 정유(丁酉)(28)장현우, 조인사, 마인절이 서협석 황장곡에서 거란과 싸워 대패하고 장현우, 마인절이 사로잡힘(구, 신, 자)나아가 거란이 평주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함(신)696년 9월 경신(庚申)(21)이진충이 죽어 손만영이 무리를 이끎(구)696년 10월 신묘(辛卯)(22)돌궐이 송막을 습격하여 이진충과 손만영의 처자(妻子)를 사로잡아 감(자)697년 3월 무신(戊申)(12)왕효걸 소굉휘 등이 17만 병사를 이끌고 손만영과 동협석곡에서 싸움(자)697년 3월 경술(庚戌)(14)당군이 대패하여 왕효걸이 죽고 소굉휘는 도망함(자)무유의가 어양에 주둔하였으나 왕효걸이 패한 소식을 듣고 감히 진격하지 못함(자)거란이 승세를 몰아 유주를 공격하여 무유의가 반격을 했으나 이기지 못함(자)697년 6월 갑신(甲申)(20)손만영이 피살된(자)이에 앞서 손만영이 왕효걸을 격파하고 유주를 공격할 때에 돌궐이 배후를 칠 것을 염려하여 사신 5인을 보내 유주를 함께 치자고 하였으나 묵철은 오히려 거란이 쌓은 신성(新城)을 함락시키고 포로를 잡아 돌아감(자)이즈음 해족의 군대와 돌궐의 군대가 당의 군대와 협공하여 이해고와 낙무정을 항복시킴(신, 자)손만영의 군대가 궤멸되자 경기(輕騎) 수천 명을 이끌고 동쪽으향의 부류들이 있었다.한편 난을 일으켰던 일부 세력이 요동지방을 공격해 왔고, 난이 평정된 뒤에도 잔당들이 요동에 잔존하고 있었으며, 70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히 평정되었다. 이에 따라 張說이 이 때에 이르러 안동(安東)이 거의 평정되어 조운(漕運)이 비로소 열리게 되었다. 고 지적하였다. 그렇지만 안동도독부가 유주로 옮겨간 것으로 보아서 당나라의 통제력은 오히려 퇴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당나라가 북방의 돌궐을 방비하는 데에 힘을 기울이면서 요동은 점차 고구려 유민의 자치에 맡긴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이 틈을 타서 돌궐 세력이 요동에 다시 침투하였다. 돌궐은 691년에 크게 세력을 확장하여 하북지방을 공략하면서 세력을 키워 나아갔다. 그러나 돌궐은 장성(長城)일대에서 당과 치열한 대립을 하고 있었으며 그 주력역시 장성 일대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동북부 만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은 그리 크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돌궐이 흑수말갈에 그 지방관인 토둔(吐屯)을 둔 것이 8세기 초였다. 따라서 그 이전에는 돌궐의 세력이 동부 만주지역까지는 미칠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을 보여준다. 이렇듯 이진충의 난을 기점으로 하여 동만주 일대는 당과 돌궐 그 어느 쪽도 세력을 뻗치지 못하는 국제관계에서 일종의 힘의 공백지대였다. 이런 것을 보건데 발해의 건국을 전후하여 요동지방에는 당나라 통치력이 확고하게 미치지 못하고 여러 세력이 복잡하게 난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렇게 여러 세력이 나타나는 가운데에 있어서 그리고 당나라가 혼란하여 요동지방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된 이러한 흐름을 이용하여 발해의 건국이 가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만일 당나라가 확고하게 안정적인 통치력을 발휘했다면, 아마 발해의 건국은 절대로 불가능 하다는 말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3) 발해의 건국 년도에 관한 설들우리는 흔히들 발해의 건국연도는 698년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현재 발해의 건국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다.다.700년 설황유한은 《발해국기》하 년표 상 경자(700)조에서 이라고 하였다.황유한은 700년 설을 주장한 문헌적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신당서》 발해전에서 발해 건국 년대를 성력년간으로 잡은 그 성력의 마지막 해를 발해 건국 년대로 잡은 것으로 보인다.그러므로 그의 견해는 사실상 새로운 것이 없다. 이 역시 《신당서》 발해전의 성력년간의 어느 한 해를 발해 건국 년대로 잡은 견해 이며 다른 견해들과 본질 상 다른 점이 없기 때문이다.3. 발해와 당나라의 대외관계1) 발해와 당의 무력 대립719년 발해국의 왕위는 대조영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대무예가 이어받았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대조영의 외교방향을 이어받아 인안(仁安)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는 등 독립국의 면모를 내외에 과시하였다.대무예의 대내외 정책은 고구려 고토회복을 의식하였음인지 매우 강력하였다. 이에 반해 당은 그들의 회유를 물리치고 건국한 발해에 대해 더욱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현실적 원인은 8세기 초에 이르러 강력하게 저항하여 오던 돌궐과 해·거란 등이 당나라의 끈질긴 변방 토벌정책에 그 위세가 잠시 꺾여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발해·당 사이의 역사적 배경 즉, 당과 고구려의 관계에서도 그러했듯이, 당의 입장에서 발해는 당의 제국질서에 편입되어야 할 대상이었다.발해와 당이 충돌하게 되었던 계기는 당이 흑수말갈을 통해 발해를 견제하려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오랫동안 돌궐의 간섭을 받아오던 흑수말갈이 돌궐의 세력약화를 기회로 당 접근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당이 흑수말갈에 흑수주를 설치하고 장사(長史)라 하는 감독관리를 파견하였던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당과 흑수말갈의 접근에 발해는 흑수말갈을 정복하려 하였고, 당에서 숙위였던 대무예의 동생 대문예는 발해의 흑수말갈 공격이 자칫 당의 공격을 불러들여 발해가 멸망 할 수 있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대문예의 이러한 반대가 형 무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대문예는 당으로 망명했고, 발해의 에 신라에 첫 사신을 파견하였다. 발해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한 일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반영하고 있다.700년경 발해는 당의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건국을 성공하였다. 그러나 건국 초의 발해는 심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때문에 발해는 신라와의 교섭을 통해 자국의 대외안정을 보장받으려고 하였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발해가 외교적 수모를 감수 할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예로 신라는 발해 사신의 '내빙인원'(來憑隣援) 요청에 대해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면서 발해왕 대조영에게 신라의 제 5품 대아찬을 사여 한다. 이는 발해가 당의 위협을 목전에 두고 있었기에 신라의 제5품 관직을 받는 수모를 감수하고 저자세의 입장에서 신라와 외교를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2 新羅의 교섭배경700년경의 신라는 당(唐)과의 관계에서 불편한 상황을 이어오고 있었다. 신라는 당의 안동도독부를 요동으로 축출하기 위해 백제 및 고구려유민과 함께 큰 고통을 겪어야 했고 그 이후 양국은 대립적 상황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발해사신이 신라에 도움을 요청해 왔기 때문에 신라와 발해는 당(唐)을 견제하려는 양국의 이해관계가 합치하여 교섭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2) 발해국인 항쟁기의 교섭1 文王 말기발해 3대 문왕은 즉위에서 중반 경까지 정치제도를 완비하고 영역도 크게 확대하였다. 또한 안사의 난으로 인해 당으로부터 발해국(渤海國)으로 인정받아 당과의 관계를 개선하였고, 일본의 신라 정벌계획에도 가담하여 신라를 군사적으로 협공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자주성을 다졌다. 그러나 문왕 말기에 이르러 발해 내부의 정치세력으로 국인(國人) 층이 크게 성장하였고 이들의 성장과 배경에 따라 왕위교체나 천도가 이루어졌다. 이들은 경제적 목적 하에 대일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신라견제를 목적으로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였다.2 신라 원성왕의 사신파견원성왕은 왕위를 찬탈하여 불법적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무열계에게 왕권도전을 .
    인문/어학| 2004.07.28| 9페이지| 1,000원| 조회(4,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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