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론1950년 우리는 한국 전쟁이라는 씻을 수 없는 민족 상잔(相殘)의 비극을 경험하기에 이른다. 문단에서는 전쟁을 겪으면서 경험했던 인간성 상실의 아픔과 이런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탐색을 문학적으로 보여주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에 자연스럽게 서구의 실존주의{) ※ 실존주의 문학(existentialism)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현상을 부조리로 보고, 본질보다 구체적 실존을 중시하려는 사상이 실존주의이다. 기독교적 실존주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행동적 실존주의가 있다. 이는 사르트르(J. P. Sartre), 카뮈(A. Camus)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사조는 1950년대 전후의 한국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사르트르 철학은 무신론적, 행동주의적 실존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행동이야말로 인간을 살리는 유일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실존주의를 하나의 휴머니즘으로 보는 것이 그의 실존철학이다.까뮈의 철학은 부조리의 철학, 반항의 철학이라고 한다. /부조리라는 말의 원래의 의미는 조리에 맞지 않다는 말이다. 즉 이성이나 양식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은 비논리적이요, 모순적인 것을 말한다.문학을 수용하면서 인간의 본질 문제, 실존의 탐구 등을 다룬 작품들이 발표되었다. 인간의 한계 상황에서의 고뇌와 갈등, 그리고 삶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경향은 서구 실존주의 영향의 결과이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의 실존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것 같다. 이에 각 장르별로 나타난 한국의 실존주의 문학의 전개양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2.본론(1)소설전후에 펼쳐진 다양한 삶의 모습과 전형적인 인간상, 그로부터 생기는 애환을 본격적으로 탐구한 소설들이 많이 나왔고 이때 나온 작품들은 장용학의 , 김성한 ,선우휘의 , 송병수의 , 등이 있다.1) 장용학의 이상(李箱)이 일제의 억압으로 인한 정신적 상처를 주로 다루었다면, 장용학은 광복 후, 6·25전쟁으로 인한 의식의 상처를 주로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요한시집》은 종래의 소설양식과는 판이하게 토끼의 우화는 자유를 요한과 같이 보았다고 한다. 즉 예수가 올 길을 닦고 요한이 죽은 것처럼 그 무엇이 오려면 자유가 죽어야 한다고 하고 있다. 토끼의 우화, 동호의 눈을 통해 본 누혜의 비극적 삶 및 누혜의 유서, 동호의 세계인식이라는 세 부분을 통하여 1950년대의 본질적 모순중의 하나인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탐구하고 그것의 기만성을 폭로한다.2)김성한 이 작품은 영국의 헨리 5세 때 재봉직공인 바비도가 영어로 된 성서를 읽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단으로 몰려 불에 타죽게 되는 과정을 통해 교회의 횡포에 저항하는 진정한 신앙, 인간의 존엄성 등을 그렸다.간략한 줄거리15세기 초엽 헨리 4세 치하의 영국. 재봉 직공 바비도는 영역(英譯) 성경 비밀 독회에서 돌아와 깊은 생각에 잠긴다. 교회의 사제들은 성경의 해석을 독점하고 평범한 빵과 포도주를 성찬(聖餐)이라고 하면서 온갖 구실을 붙여 제 뱃속만 차리기에 급급한 현실이 환하게 보인다.자신의 권위가 훼손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교회 세력은 민중들을 의식화하는 영역(英譯) 복음서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순회 종교 재판소를 열어 저항 세력을 처단하고 있었다. 바비도는 성경 모임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조차 재판정에서는 죽음이 두려워 자신들의 과오를 회개하며 목숨만 부지하려 하였다. 바비도는 이들의 이러한 비겁한 모습에 분개한다. 바비도는 진리를 독점하려는 교회 세력들에게서 거대한 위선을 보았고, 급기야 교회 조직과 자신의 차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힘의 있고 없음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그는 분을 참지 못해 어느 귀족이 주문한 옷에 오줌을 갈긴다.재판정에서, 사교는 바비도에게 겉으로는 온유한 체하며 죄과를 인정하고 뉘우칠 것을 요구하나, 바비도는 이 더러운 세상에서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며 스스로 '인간 폐업'을 선언한다.형장에는 바비도의 화형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산을 이룬다. 약하고 몽매한 민중들은 세상에 대한 그들의 원망과 증오를 바비도에게 모조리 퍼붓는다. 그들은 바비도에게 발길질을 하고 침을 뱉으며 욕설을 한다.분인데, 그것은 최소한의 인격마저 내팽개치고 혼란과 무질서, 부도덕만 자행하는 무리들에 대한 작가의 비하적 시선을 드러내 보이는 데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서는,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 정의와 양심의 수호를 작품의 주제로 내세움으로써 우회적인 방식이 아니라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데에 이르고 있다.3)선우휘 작품을 통해 휴머니즘적인 행동주의를 바탕으로 현실악에의 대결, 지식인의 고민과 책임 등을 묘사했으나, 이와 같은 작가로서의 행동적 참여의식은 1965년을 전후로 하여, 점차 기성체제에 대한 보수주의적 입장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이 작품은 분량상 중편에 속하지만, 구성상으로는 3·1 운동부터 한국 전쟁에 이르는 30여 년간의 세월을 배경으로 주인공 고현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소설적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제1부와 제2부로 나뉘어 있는데, 서사적 내용으로 보면 제1부에서 거의 끝나고, 제2부는 의식의 흐름으로 고현과 연호의 마지막 대결이 클라이맥스를 이룬다.이 작품은 발표 당시 문단에 적지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대부분의 단편 소설이 내면적 심리 묘사에 기운 데 비하여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작품 속에 과감히 수용하여 서사성을 회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 두 가지 인간형(할아버지, 아버지)을 제시하고 그 갈등 속에서 방황하는 과도기적 인간형(고현)을 그림으로써 전쟁 직후 한국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만세 운동에 앞장섰던 고현의 아버지는 일제에 의해 희생당한다. 할아버지는 전형적인 전근대인으로 모든 화근을 선친의 묏자리가 나쁜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아버지의 저항 정신과 할아버지의 숙명론적 태도 사이에서 방황하던 고현은 일제 말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후 좌우익의 대립과 인민 재판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발견한다. 이때부터 그는 할아버지의 생활 방식이던 수동적 자세를 버리고 아버지의 적극적 태도를 자신의 삶의 지표로 선택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공산주의자 '연호'에게 방아쇠를 당겼을 때 그는 자신의 어야 될 사람'으로 고현의 아버지와 여교사 조선생이 설정되었고 '있어서는 안될 사람과 있어야 될 사람' 사이에 고현이 서게 되었다. '있어서는 안될 사람'은 현실 도피적이고 수동적이며 비역사적인 인물인데 반하여, '있어야 될 사람'은 현실 참여적이고 능동적이며 역사적 인물이다. 고현은 할아버지형의 인간에서 아버지나 조선생형의 인간으로 변화된다.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 있던 현실과의 대결의식을 탈환했을 때, 거기에는 찬란한 불꽃이 있었다. 그 불꽃은 불타는 삶에의 의욕이었다.그런데, 주인공 고현의 현실에 대한 도피의식에서 철저한 저항정신으로서의 변화는 동굴에서 이루어진다. 동굴은 현의 아버지가 죽은 곳이기도 하므로 죽음의 이미지와 현이 다시 태어나게 되는 재생, 부활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동굴의 이미지가 죽음과 재생, 부활의 이미지를 지니는 것은 단군신화로부터 이어지는 우리 문학의 보편적 이미지라 할 것이다.4)송병수 미군 부대 주변에 사는 전쟁 고아들의 생활을 통해, 환경으로 인한 심성의 파괴와 함께 한 줄기 인간애를 보여 주고 있다. 제목은 '키 작은(shorty) 김'의 영어 발음이다. 이 소설은 미군 부대 주변에서 부랑하는 소년들과 양공주의 삶을 그림으로써 이방(異邦)의 외국 군대가 얽혀 든 한국 전쟁의 성격은 물론, 전시(戰時)의 생존 방법이나 외국인들에 대한 감정까지도 반사되어 있는 작품이다.전쟁의 재난은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는다. '쑈리 킴', '딱부리', '찔뚝이' 등 이름도 없이 등장하는 소년들은 이미 전쟁 이전의 순수성을 상실한 아이들이다. 인생과 사회의 치부(恥部)를 너무도 일찍 알아 버린, 동심이 훼손된 존재들이다. 그중 '쑈리 킴'은 부모의 죽음으로 거리의 부랑아로 떠돌다가 현재는 양공주인 '따링 누나'와 함께 살면서 미군 캠프를 드나들며 미군을 끌어 들이는 펨푸 노릇을 하고, 금단(禁斷)의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외국 군대의 이상한 성(性) 문화와 전시에 있어서 성의 상품화 또는 생활 수단화를 너무 일찍 깨우를 특징으로 하는 전후 시대의 분위기를 주로 노래하였다. 특히 전쟁 직후의 불안한 사회 분위기와 허무주의적인 풍조가 서구로부터 유입된 실존주의의 영향과 결합하면서 모더니즘 시의 이러한 특징은 더욱 강화되었다.1)박인환1950년대적인 한계 상황을 인식하고 절망과 좌절의 불안과 고독 등 실존적 포즈를 취함으로써 1950년대 전후문학의 당대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하고 있다.한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정원의 초목옆에서 자라고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세월은 가고 오는 것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등대에---불이 보이지 않아도그저 간지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한탄한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목마는 하늘에 있고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가을바람소리는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전쟁의 와중에서 박인환의 시는 전쟁과 살육을 용인할 수도, 용인할 수도 없는 고뇌 속에서 비극적인 선택을 강요받는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다는 양심적 가책은 결국 전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우익 쪽으로 선회하게 한다. 이러한 입장은 박인환 뿐 아니라 당시를 살았던 대부분의 남쪽 사람들의 경우에도 해당될 것이다.전후 박인환의 시는 극심한 삶에 대한 회의와 허무주의적 양상을 보여준다.
15살 때 일본의 방적공장으로 팔려나간 건성이가 7년 만에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일본에 가서 돈이라도 좀 모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에 사위로 삼을 생각도 하고 건성이네 형편이 나아질 것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건성이는 여비를 하고 남은 돈 몇 십 원을 어머니에게 드렸을 뿐이다. 사람이란 풍요로운 삶을 누릴 때 주변사람들도 생각하고 돕기도 하는 것 같다. 이 시대처럼 매 끼니를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면 모두들 관심거리가 돈이 되고 마는 것 같다. 청년실업이니 경제 침체 등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도 사뭇 홍수에 나오는 시대와 흡사한 분위기 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건성이가 나타나기 전 T촌마을 사람들을 제각기 돈벌이를 하려고 노력하지만 왠일인지 점점 더 가난해지기만 하고 서로간의 다툼만 심해지는 상태였다. 그러던 T 촌 마을사람들은 건성이와 대화를 통해 자기들이 점점 더 가난하게만 되는 이유와 "노동자와 농민의 대다수가 가난의 지옥에서 면하려면 오직 XX(투쟁)해야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작품중에 간간이 XX해야 한다, XX하다가 잡혀갔다등 XX로 표현한 부분이 많은데 당시의 검열이 심했던 탓에 삭제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작가가 직접 말하기를 피해 일부러 이런 방식으로 전달할려고 했는지 알수 없지만 XX가 책을 읽고 난 후에도 한참동안 잊혀지지 않았다.또한 건성이는 노름만을 일삼고 자포자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원식이와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완득, 부자 사위를 얻어 덕을 보려던 치삼이를 각성시켜 치삼이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제일 천대받는 사람이 제일 옳게 사는 사람이란" 생각 속에서 음전이를 머슴인 완득이와 결혼시키는 것을 허락하게 만든다. 그리고 금반지 보석 등을 일부러 빚내어 하지 않고 자신들과 가장 가까운 낫과 호미를 예물로 음전과 완득의 결혼식을 올리게 한다. 건성이는 완득이의 결혼식과 백중놀이를 통해 농민으로서의 하나의 공동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내가 치삼이라면 머슴을 하는 완득이를 딸을 내어주고 싶지는 않겠지만 나역시 건성이 말이라면 왠지 모든 일이 잘될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건성이의 말을 신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음전과 완득이의 결혼식과 백중놀이 가 있은 후 며칠 뒤 T촌 마을 사람들은 '홍수'로 인해 집이 쓸려가는 등 큰 수해를 입게된다. 하지만 홍수 수해 복구 과정은 식민지 농촌의 모순과 맞서 싸우게 하는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T촌 마을 사람들은 건성이의 지도 하에서 아이들은 밥짓는데 필요한 나무를 해오고 여자들은 돌아가며 밥이며 반찬을 만들고 남자들은 오로지 집을 보수하고 짓는 일에만 힘 쏟도록 한다. 이렇게 모두의 힘을 모아 수해 복구 작업을 하게 된다.이전까지 제각기 잘살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더욱더 힘들게 되었던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은 이 한 달간의 공동 생활을 통해 식민지 시대의 농민으로서의 집단 의식을 갖게 되고 힘을 모아 해결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집단의식은 수확철이 다가오자 마침내 농민 조합을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조합을 통해 소작료 문제로 지주 정 고량과 맞서게 된다. 공장 노동자 출신의 건성이가 이 모든 변화의 핵심에서 서서 마치 슈퍼맨처럼 완벽하게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약간은 현실적으로 안 맞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패강랭은 '패강랭'은 '패강, 즉 대동강이 얼었다'는 뜻으로, 배경을 통해 화자의 쓸쓸한 마음을 감정이입한 것이다. 이 작품은 문장의 형식미를 통해 내용보다는 예술성을 강조한 전작들과는 사뭇 다르게 30년대 지식인으로서 고뇌가 드러나고 주인공의 증오와 분노를 통하여 어두운 시대를 암시하고 있다.문학가인 주인공 현은 고등보통학교에서 조선어와 한문을 가리키는 박을 만나러 10여년 만에 평양을 찾아온다. 한번 내려오라는 부탁은 많이 받았지만 내려오지 않았던 현이 조선어 시간을 계속할 수 없으리라는 박의 편지에 내려온 것이다.정거장에 나온 박은 수염도 깎은 지 오래되어 터부룩한데다 버릇처럼 자주 찡그려지는 비웃는 웃음은 전에 못보던 표정이었다. 그 다니는 학교에서만 끼웃끼웃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전체에서 긴치않게 여기는, 끼웃끼웃 붙어 있는 존재 같았다. 현은 박의 그런 끼웃끼웃함에서 선뜻 자기를 느끼고 또 자기의 작품들을 느끼고 그만 더 울고 싶게 괴로워졌다.문학가로서 현이 받는 여러 제한과 조선어 시간 폐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박의 모습은 이 시대 이 민족의 모습인 것이다, 조선어 폐강은 곧 민족의 위기를 의미하지만 완전한 탈피도 불가능한 현시점이 그들을 우울하게 만든다.현은 평양 여자들의 머릿수건이 보기 좋았었다. 단순하면서도 흰 호접과 같이 살아 보였고, 장미처럼 자연스런 무게로 한송이 얹힌 댕기는, 그들의 악센트, 명랑한 사투리와 함께 피양 내인 들만이 가질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런 아름다움을 그 고장에 와서도 구경하지 못하는 것은, 평양은 또 한가지 의미에서 폐허(廢墟)라는 서글픔을 주는 것이었다.또 새로운 벽돌건물의 건축과 평양에서만 볼 수 있는 머리 수건의 없어짐은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없어진 민족성의 상실을 보고 느낀 현의 안타까움이다. 현은 이러한 안타까움과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박과 부회의원을 하고 있는 김과 함께 술을 마신다.망할 자식 가긍허구나! 허긴 너이 따위들이 밤낮 글 써야 무슨 덕분에 술 차례가 가겠니! 오늘 내신세지…….아닌게 아니라 하고 김이 또 현에게 잔을 내밀더니 현군도 이젠 방향 전환을 허게. 한다.방향전환이라니 ?거 누구? 뭐래던가 동경 가 글 쓰는 사람 있지? 있지그 사람 선견이 있는 사람이야! 하고 김은 감탄한다이자식아 잔이나 받아라, 듣기 싫다. 하고 현은 김의 잔을 부리나케 마시고 돌려보낸다.친일적 성향이 강한 김은 현에게 현실에 안주하고 방향전환을 권하나, 현은 반대로 김을 현실에 안주한 속물로 규정하고 비판한다. 이는 친일적인 인물과 예술가의 사명에 대한 심한 내부적 갈등을 겪고 있는 지식인들과의 정면충돌을 의미한다. 김이 현에게 말한 방향전환은 결국 일제에 부합하는 작품을 일어로 쓰라는 것을 말한다. 이태준에게 있어서 방향전환은 친일이며 작가가 최후의 자존심으로 여겼던 언어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태준에게 있어서 사상성이라는 것이 이름된다면 그것은 반일감정의 민족주의적인 것 이라고 본 것은 타당한 견해로 보인다.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주역(周易)에 있는 말이 생각났다. 서리를 밟거든 그 뒤에 얼음이 올 것을 각오하란 말이다. 현은 술이 홱 깬다. 저고리 섶을 여미나 찬 기운은 품속에 사무친다. 담배를 피우려 하나 성냥이 없다.이상견빙지……이상견빙지…….밤 강물은 시체와 같이 차고 고요하다.김과 현의 대립은 박이 현을 밖으로 끌고 나오면서 진정된다. 밖으로 나온 현은 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서리 뒤에 올 얼음을 각오하라는 말은 바로 작가 자신에게 다짐하는 말일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극한 적 상황을 각오해야 된다는 현의 말은 곧 작가의 말로서 자신을 포함한 민족의 새로운 각오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이명희, 상허 이태준의 문학세계.국학자료원, 1994, 71-74)
{이 작품의 중심 인물인 나는 스물한 살로 보통 학교 4년을 마친 뒤,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충실하게 생활하고 있다. 그의 꿈은 일본인 여자와 결혼하여 모든 생활방식을 일본인을 따르고, 일본어를 사용하는 완전한 일본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저씨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비판 없이 일제의 지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나의 삶이 용납될 수 없다.아저씨는 착한 아주머니를 친가로 쫓아 보내고 대학인가를 다니다가 신교육을 받았다는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무슨 사회주의 운동인지를 하다가 감옥살이 5년 만에 풀려났다. 아저씨는 감옥을 나오는 순간도 전에 첩으로 살던 여자가 왔는 지 둘러본다. 감옥을 나왔을 때 아저씨는 이미 피를 토하는 폐병 환자가 된다. 정말 나의 입장에서 보면 아저씨는 폐병에 걸린 것도 불쌍하지 않고 그대로 죽어야 마땅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식모 살이로 돈 100원을 모아 이제 좀 편히 살아보려던 참이었던 아주머니는 그 아무짝에도 쓸모 없게 된 아저씨를 데려가 할 짓 못할 짓 다 해서 정성껏 구완하여 이제 병도 어지간히 나아가지만, 정작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나면 또 사회주의 운동을 하겠다고 말한다.사회주의를 주인을 통해서 세상에는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고 하니 그건 도무지 공평한 일이 아니다. 사람이란 건 이목구비하며 사지육신을 꼭 같이 타고났는데, 누구는 부자로 잘살고 누구는 가난하다니 그게 될 말이냐. 그러니 부자가 가진 것을 우리 가난한 사람들하고 다 같이 고르게 나눠 먹어야 경우가 옳다. 라고 이해한 나로서는 사회주의는 남의 것을 뺏는 부랑당 같은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아저씨라는 사람은 정말 아주머니에게 도움이 안되는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나는 경제학을 공부한 아저씨가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돈을 벌어서 아주머니에게 은혜를 갚은 생각은 않고, 남의 재산 뺏어다 나누어 먹자는 불한당 질을 하겠다는 것을 보면 공부를 헛것 했다고 생각한다.나로서는 대학까지 마쳤는데도 실업자로 무위도식하면서 가족까지 고생시키는 아저씨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아저씨에게 아주머니를 고생시킨 일을 미안하게 생각하는지 또 사회주의 운동에 관한 일, 세상사는 방식에 대하여 캐묻지만, 아저씨는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아무래도 아저씨가 구제 불능의 사람으로 보인다.나가 친정살이하던 아주머니 손에 자랐다. 그 은혜 때문에 딱하게 여겨 아저씨 보고 정신 좀 차리라고 당부를 해도 아저씨는 말을 듣지 않는다. 아저씨는 오히려 일본인 주인의 눈에 들어 일본 여자에게 장가들어 잘 살겠다는 나를 딱하다고 한다. 그러니 나가 보기에 아저씨는 도통 세상 물정도 모르는, 참 한심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결혼하자마자 동경으로 대학을 마치고 돌아와 아내는 남편과 같이 있을 시간이 거의 없었다. 힘든 일이 있어도 남편이 돌아오면 공부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도깨비 부자 방망이 같은 것이어서 무엇이든지 다 얻고 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비단 옷을 입고 금지환을 낀 친척들도 부러워하지 않았다.하지만 남편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으나 아내가 생각하는 도깨비 부자 방망이 같은 것은 들고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남편은 집안 돈을 가져다 쓰며 분주히 돌아다니기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책을 읽던지 밤새 글을 썼다. 지금 시대로 생각하면 정말 무능한 남편이고 이혼 당하기 딱 좋은 남편이라고 생각된다. 요즘의 사회도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 놓여있어서인지 아내의 답답한 심정이 공감이 가는 것 같다.남편의 몸은 나날이 축이나 가고 어느 날인가는 밤에 눈을 떳을 때 흐느껴 우는 남편을 볼 수 있었고 두어 달 후에는 출입이 잦아졌으나 술 냄새를 풍기며 밤늦게 돌아오기 일쑤였다. 정말 아직도 이렇게 너그러이 남편을 받아들일 부인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시대의 여인들은 인내심이 강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처럼 각자 일이 있고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당시의 여인들에게 남편의 귀가는 무료한 생활에 작은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남편이 정말 원망스러웠을까?아내는 새벽에 잠시 잠이 들었다가 할멈이 부르는 소리에 깨어보니 남편이 마루에 누워 있었다. 가까스로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옷을 벗기다 벗기지 못하고 남편에게 누가 술을 권 했나며 조금 화를 내본다. 남편은 부조리한 사회가 나에게 술을 권한다라고 말을 하지만 배우지 못한 아내는 사회라는 어느 요리집이나 단체가 술을 그렇게 마시게 하나 하며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투정을 부리게 되자 남편은 대화상대가 되지 않는 아내를 뿌리치며 나가 버린다.아내는 모든 것을 잃었다는 듯이 "가버렸구먼, 가버렸어."하며 밤 안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하며 절망적인 어조로 작품의 결말을 짓는다.이야기를 할 수 없는 상대, 당시의 대부분의 여성들은 교육을 받지 못해 이 작품의 아내와 같은 처지 였을 것이다. 남편처럼은 이처럼 대화가 되지 않는 아내를 외면하며 더욱더 술에 의존하여 절망스러운 사회를 탓할 뿐이다.남편은 이러한 상황에서 아내를 남겨두고 뛰쳐나가 버리지만 이 소설에서 남편의 이러한 행동은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저 어쩔수 없는 상황에 놓인 지식인, 힘없는 지식인으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