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시집 감상문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시를 쓴 시인 신경림은 기존의 다 똑같던 서정시의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민중시’의 물꼬를 튼 첫 번째 시인이다. 1960 ~ 1970년대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빈곤’일 것이다. 사람들은 가난이란 쳇바퀴에 갇혀 오늘보다 나아질 것 같지 않은 내일을 기다리며 어제와 똑같이 고통스러운 오늘 하루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었다. 민중들의 먹고사는 문제가 너무나도 심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은 이러한 사회 모순을 고발하기 보다는 아름답고 ‘예술다운’ 소재를 노래하는 서정시에 물들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힘든 민중들을 대표하여 그들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같이 아파한 시인이 바로 신경림이다. 그가 당시로서 굉장히 파격적인 소재로 시를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을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신경림은 1935년 충북 충주에서 4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나 노은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어릴 때부터 학구열이 높아 노은국민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신경림은 수재들만 모인다는 충주사범 병설중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이곳 중학교의 정춘용 선생님과의 만남은 신경림의 재능을 발견하고 시인의 길을 걷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세에 동국대에 입학한 신경림은 에 낮달, 갈대, 석상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지만 나아지지 않는 생활고로 인해 이후 약 10년간 낙향하여 각종 일을 하면서 이른바 민중의 삶을 몸소 체험한다. 이 기간 동안 그가 경험했던 고된 농사일, 광산일, 공장일 등은 이후 그가 다시 문단에 돌아와서 민중들의 애환 담긴 시를 쓰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6.25전쟁의 경험과 가난, 직접 부딪히고 뒹굴면서 실감한 가난의 슬픔과 고통, 궁핍한 삶으로 고통 받는 농민들과 황폐한 광산,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노동자들... 이 모든 10년간의 직접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온 그의 작품에서는 가슴이 터질 듯한 안타까움과 탄식, 그리고 슬픔이 는 신경림의 시는 적나라하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하다. 현실에 짓눌려 허덕이던 농민들의 고뇌는 그의 유명한 작품인 ‘농무’에서 매우 잘 나타난다.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철없이 킬킬대는구나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아예 여편네이게나 맡겨두고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고개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1970년대 우리나라의 기술력은 외국에 비해 크게 뒤쳐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외국의 질 좋은 제품들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제품의 가격이었다. 계획대로 우리의 공업은 값싼 제품을 무기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 이면에는 값싼 임금에 유린당한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들의 인권이 있었다. 당시 노동자들이 하루 종일 일한 대가로 받은 돈은 하루 한 끼 식사하기도 빠듯한 수준이었다. 비상식적으로 적은 임금으로 생활을 하기위하여 사람들은 문화생활과 여가생활을 포기하였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먹는 문제였다. 값싼 제품으로 얻은 경쟁력도 유지하고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식사도 해결하기 위하여 박정희대통령은 강제적으로 쌀값을 내리는 정책을 내놓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농민들이 직격타를 입게 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정부에서는 농민을 살린다는 명목으로 이자가 매우 작은 지원금을 빌려주었지만 워낙 수익이 작아서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봤자 빌린 돈을 갚고 비료 값을 빼고 나면 적자를 면치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결국 견대다 못해 고향을 버리고 무작정 이 나질 않는다. 산구석에서 아무리 살려고 발보둥쳐봐도 터무니없이 싼 쌀값 때문에 비료 값을 내고 나라에서 빌린 돈을 갚고 나면 오히려 적자를 면치 못한다. 이렇게 힘들고 분한 상황임에도 농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모여서 학교 앞 소줏집에 모여 술을 마시며 탄식하는 것 밖에 없다. 놀랍게도 신경림 시인은 불과 15줄 밖에 안 되는 짧은 문장에 농민들의 번뇌와 분노를 모두 담아내고 있다. 농민들이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개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면서 점점 신명을 내고 있다고 말하지만 결국 정말로 신이 난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하고 분에 취하고 춤에 취하여 그동안 미쳐 말로 다하지 못 했던 현실에 대한 불만이 강하게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시에서도 보이듯이 미래에 대한 확신도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분함과 슬픔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1960 ~ 1970년대 농촌의 안타까운 현실이었던 것이다.그렇다면 이러한 암울한 상황을 바꿔보고자 서울로 상경한 젊은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은 과연 서울에서 성공하여 금의환향을 할 수 있었을까? 사실 이들이 서울로 가게 된 계기는 서울에 가면 정말로 성공할 수 있을만한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이대로 계속 농촌에서 농사를 지어서는 먹고살기가 너무나도 힘들었기 때문에, 미래가 불투명하고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무작정 상경한 것이다. 하지만 서울에 올라간 젊은이들은 결국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노동력을 착취당했을 뿐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은 ‘산1번지’와 ‘서울로 가는 길’에 정확히 묘사되어 있다.허물어진 외양간에거의 탄식이 스며 있다힘없는 뉘우침이부서진 장독대에그의 아내의 눈물이고여 있다 가난과저주의 넋두리가부러진 고욤나무 썩어문드러진 마루에그의 아이들의목소리가 배어 있다절망과 분노의 맹세가꽃바람이 불면 늙은수유나무가 운다우리의 피가 얼룩진서울로 가는 길을굽어보며이것은 ‘서울로 가는 길’의 원문이다. 보는바와 같이 이들은 마음 편히 자발적으로 가고 싶어 서울로 가는 것이 아니다. 외양간은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그만큼 비참했다. 비단이 깔려있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길이 아니라 우리의 피가 얼룩진 길을 걸어 서울로 쫒겨간 사람들... 이 시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서울로 올라가게 되는 계기도 슬프고 안타깝지만 올라간 이후의 이 사람들의 생활은 더욱 암울하기만 하다. 신경림의 산1번지를 살펴보면 너무나도 비참한 상황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해가 지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바람이 찾아온다.집집마다 지붕으로 덮은 루핑을 날리고문을 바른 신문지를 찢고불행한 사람들의 얼굴에돌모래를 끼어얹는다.해가 지면 산 일번지에는청솔가지 타는 연기가 깔린다.나라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내들은서로 속이고 목을 조르고 마침내는칼을 들고 피를 흘리는데정거장을 향해 비탈길을 굴러가는가난이 싫어진 아낙네의 치맛자락에연기가 붙어 흐늘댄다.어둠이 내리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통곡이 온다. 모두 함께죽어버리자고 복어알을 구해 온어버이는 술이 취해 뉘우치고애비 없는 애를 밴 처녀는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그리하여 산 일번지에 밤이 오면대밋벌을 거쳐 온 강바람은뒷산에 와 부딪쳐모든 사람들의 울음이 되어 쏟아진다.산 1번지는 가난한 사람들이 산 위에 모여 판자로 집을 짓고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소외된 공간이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이 공간에서 행복하지 못하다. 해가 지기 전에는 바람이 찾아와 집집마다 루핑을 날리고 문을 바른 신문지를 찢고 ‘불행한’사람들의 얼굴에 돌모래를 끼어얹는다. 이미 이곳 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지속해온 가난하고 고된 삶에 찌들어 불행한 상태이지만 외부에서 불어온 바람은 이곳 사람들에게 고난을 더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내들은 나라의 은혜를 입지 못했고 결국 가난을 견디다 못해 범죄를 저지른다. 이곳 사람들은 변변한 땔감 하나 구하지 못한다. 채 물기가 마르지 않은 청솔가지로 불을 붙이다보니 불은 잘 붙지 않고 매콤한 연기만 난다.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힘든 상황에서 오직 술만이 이들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모두가 가난과 고통고... 궁극적으로는 가난 그 자체와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신경림은 이처럼 자신의 시에서 민중들의 삶, 밑바닥 인생의 아픔과 고통을 주된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그것만 이야기 하지는 않았다. 6.25전쟁을 경험한 신경림은 전쟁이 남긴 상처와 외곡된 역사를 분노로 고발한다.1. 빗발이 치고 바람이 울고 총구가일제히 불을 토한다. 통곡하라나무여 풀이여 기억하라 살인자의얼굴을, 대지여. 1950년 가을죄없는 무리 2백이 차례로쓰러질 때, 분노하라 하늘이여 이강의 한주기를 피로 바꾸어라.그러나 살인자는 끝내 도주했다.부활하라 죄없는 무리들아, 그리하여증언하라 이 더러운 역사를.어둠이 깔려 시체를 묻고 비가 내려피를 씻었다. 아무도 없는가부활하는 자. 모두 흙 속에서원통한 귀신이 되어 우는가.2. 10년이 훨씬 지난다, 이제 그 자리엔나라를 다스리는 높은 분네의별장이 선다. 거실에서 부정한거래가 이루어지고 추악한 음모가꾀해지는 밤. 폐를 앓는 달은꿈을 꾼다, 맨발로 강을 건너가는소년들의 꿈을. 한밤중에 눈을 뜨면두시수풀에서는 가마귀가 운다.소슬한 바람이 와서 애처롭게 창을넘본다. 아무도 없는가 부활하는 자.그리하여 증언하는 자 아무도 없는가.이 더러운 역사를, 모두 흙 속에서영원히 원통한 귀신이 되어 우는가.이것은 ‘1950년의 銃殺(총살)’원문이다. 1950년 가을 죄없는 무리 2백이 차례로 총살당했다. 죄없는 이들이 살해당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아마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살인자는 도주해버리고 시체가 묻히고 비가 내려 피가 씻기고 어둠이 깔리면서 결국 이 모든 만행과 더러운 역사는 은폐되고 외곡 되어 잊혀져가고 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절대 잊혀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 한국전쟁 전후에 일어난 ‘민간인학살’이 바로 그런 종류의 일일 것이다. 군인과 경찰에 의한, 인민군, 빨치산에 의한 이념에 따른 보복성 무차별 학살은 죄없는 사람들의 생명을 무차별적으로 앗아갔다. 떠올리기도 무서울 정도로 끔찍했던 이 사건은 10년이라는 짧은 시간 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