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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학]나의 교육적 신념
    나의 교육적신념나의 교육적신념을 여러 가지 영역에서 서술하고자 한다.먼저, 지식의 전달 차원에서 나의 신념을 밝혀보자면, 수업은 재미있어야 한다 는 것이다. 나는 예비수학교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비교사로서의 신념을 생각할때에도 수학에 한정하여 생각하게 된다. 물론 다른 과목의 수업들도 재미있어야 한다는데에는 누구나 동감하겠지만, 학생들의 학년이 올라갈수록 과도한 분량과 난해한 내용들로 가득 채워진 수학과목에 대해서는 수업은 재미있어야 한다 는 것은 중고등학교에서 재미없고 흥미없는 수학교과에 한번씩 질려보고 고통받아 본 사람이라면 동의할 내용이다. 단순히 교사가 웃기는 행동이나 유머러스한 이야기들로 학생들을 유인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실제로 나는 교직과목에 있어서 유머러스 화술 수업연습 이런 과목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긴했고, 수업중간중간에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하여 지루함을 풀어주는 능력도 교사의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여 지식의 전달만으로도 학생 스스로가 재미를 느끼는 그런 수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일단 충실하고 알찬 교육과정과 교과서가 뒷받침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교사는 스스로가 수업의 내용에 맞는 여러 역사적 사실들이나, 생활과 연계되는 자료들을 찾아서 흥미유발에 도움을 주어야 하고, 흥미유발과 함께 선행되어야 할 것은 학습동기의 유발일 것이다. 학생의 입장에서는 재미는 재미고, 이것을 왜 배우는지를 모른다면 근원적인 지식에 대한 흥미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다음으로, 학생의 인성개발이라는 차원에서의 나의 신념은 교사는 운전기사가 되지말고 표지판이 되어야 한다 는 것이다. 교사는 학생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인성들을 길러주는 역할도 수행하여야 한다. 학생들은 주변사람들의 한마디 말에도 쉽게 영향 받을 수 있으며, 특히 학생들에게 아주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교사의 한마디는 다른 어른들의 말보다 훨씬 영향력이 크다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는 실제로, 중·고등학교때, 어떤 정치적·사회적 이슈에 관하여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면서 은글슬쩍 학생들을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도록 만드는 교사를 한번씩 만나볼 수 있었다. 아직까지 자신의 사회성을 키워가고 있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는 것은 아주 불합리하며, 이것은 버스 운전기사가 손님들을 마구 태우고 자신이 세워주는 정류장에서 내려라고 하는것이나 다를바 없다. 그렇다면 표지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의미그대로이다. 표지판은 운전자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며, 곳곳에 주의해야 될 곳들을 알기쉽게 표시해주며, 여러방향의 길들이 있다는 사실들을 알려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사가 학생의 인성(사회성)에 영향끼칠 수 있는 정도는 표지판과 같은 역할에 그쳐야 한다고 본다. 즉, 교사는 학생의 사회성을 키우는데 있어서 끌고가는 역할이 아니라, 학생이 직접 생각하는 주체가 되게 하여, 이런 저런 길이 있다고 가르쳐 주며, 학생자신이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학| 2005.11.12| 2페이지| 1,000원| 조회(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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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 사관/역사/고려시대까지의역사 평가A좋아요
    1. 사관 (史觀).역사가의 정의를 통해 본 역사의 의미1 랑케(L.v. Lanke 19c 독일)역사가는 자신을 죽이고 과거가 본래 어떠했는가를 밝히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그리고 오직 역사적 사실로만 이야기하게 해야 한다객관적 사실로서의 역사 강조(근대 역사학의 성립에 이바지){ ★한국사 중간고사정리 REPORT★2 크로체(Benedetto Croce 20C)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역사는 과거의 일이지만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를 이해한다는 의미이며 나아가 역사가 의 주임무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고 가치를 해석, 재평가하는데 있 다는 것3 카아(E. H. Carr)사실을 갖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를 박지 못한 무능한 존재이며,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생명이 없는 무의미한 존재이다. 따라서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 작용의 부단 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역사란 객관적 사실과 사실에 대한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이 결합하여 성립.사관(史觀)-역사사건을 관찰하는 역사가에게서 하나의 관점과 같이 작용하는 사고의 틀1 순환론적 역사 인식그리스와 로마의 역사 인식이 여기에 속한다. 역사는 수레바퀴이다. 계절이 봄-여름-가을-겨울로 순환하는 것처럼, 삶이 출생-성장-노쇠-사망으로 순환하는 것처럼 역사도 순환한다. 중국은 왕조와 문명에 제한되는 순환론적 역사관을 보이고 있다. 왕조와 문명은 출생-성장-노쇠-사망-출생으로 순환한다. 세상만물과 우주에 주기가 있다. 한 주기가 끝난다는 것은 모든 것의 종말이고, 새로운 주기가 시작되는 전주곡이다.2 직선적 역사 인식원시주의(primitivism) 혹은 상고주의(classicism), 유태 기독교 역사관(Judeo-Christian historical view), 진화주의 역사관(evolutionary hHistorical view), 역사주의(historicism), 유물론적 역사관(materialistic historical view) 등이 직선적 역사 인식에 속한다.유태기독교 역사 신이 아니라 생산양식이라고 한다. 생산양식이란 생산관계와 생산력을 합친 것으로서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가리킨다. 생산관계란 생산과 그에 따르는 분배와 소비가 조직되는 사회적 관계를 말하고, 생산력이란 생산수단으로서 생산 과정에서 사용되는 자원들을 말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생산양식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 모순을 내포하고, 생산양식이 발전할수록 모순 또한 커져서 (생산수단에서 배제된 계층은 소외되기 마련이므로 소외는 모순을 내포하여) 부정이 출현하고, 다시 부정의 부정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흔히 마르크스는 헤겔이 거꾸로 선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2. 시대구분시대를 구분함에 있어 절대적인 기준이 마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시대구분이 있을 수 있고, 혹은 같은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한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사실에 대한 이해의 차이 때문에 각 시대의 기점과 종점은 서로 다르게 설정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한국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지금까지 매우 다양한 시대구분의 유형들이 제시되었다.시대 구분에 있어서는 사회경제적 요소뿐 아니라 지배 세력의 성격을 비롯한 정치·사회 구조, 사상·문화 등 다양한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도 한국사의 시대구분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다. 이 경우에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 변동과 고려 말 조선 초의 사회 변동이 한국사의 발전 과정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특히 강조되었다. 이는 왕조의 교체를 중시하는 전근대적인 왕조 사관으로의 복귀가 아니다. 그와 같은 정치적인 변동이야말로 사회경제적 변동을 포함한 사회의 변화를 종합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또한, 고대·중세·근대의 3구분법이 서양사회의 발전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 주의하고, 또 한편으로는 중국과 일본 등 동양사에서 근대에 선행하는 근세의 개념이 채용되고 있는 추세에 따라 한국사에도 근세를 설정할 것이 검토되었다. 이에 따라 국가의 성립 이후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까지를 고대, 고려 시대를 중세, 조선 시대를 근세, 개하였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없는 씨족공동체(氏族共同體) 위에 형성된 이러한 부족사회의 사회원리는 역시 평등사회였다.서기전 10세기 북방으로부터 청동기가 새로이 수용되면서 청동기시대가 도래하였다. 우리 나라의 청동기유적에서 출토되는 대표적인 유물은 무문토기와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등이다. 특히 비파형동검은 중국에서는 출토되지 않고 요령지방과 한반도에서만 독특하게 출토되어, 이 지역이 중국과는 구별되는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남부시베리아지방과 연결된 북방식청동기문화로, 알타이계통의 예맥족(濊貊族)에 의해 전래되었다.앞서 신석기시대 후기에 시작되었던 농경이 청동기시대에 더욱 발달해 주산업으로 정착되었다. 이를 나타내주는 유물로서 반달돌칼〔半月形石刀〕과 홈자귀〔有溝石斧〕가 출토되고 있다. 그리고 농경에 따른 생산력의 발달로 빈부의 차가 나타나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생겨 정치적 지배자로서 군장이 출현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정치사회인 군장사회(君長社會)이다. 종래의 평등했던 부족사회는 붕괴되고 지도자로서의 부족장이 지배자로서의 군장으로 변질했던 것이다.이를 표시하는 유물이 바로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군장의 가족묘로 보이는데, 이처럼 거대한 고인돌을 축조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강력한 권력의 소유자가 출현했음을 나타내 준다. 이 군장사회는 뒤에 철기의 사용과 더불어 국왕이 출현하면서 초기국가로 발전해갔다. 뒷날 초기국가로 발전한 고조선·부여·고구려·옥저·동예·삼한 등이 처음에는 모두 이 군장사회 단계를 경유했던 것이다.4. 고대사회(연맹왕국/삼국/남북국시대)청동기 시대에 출현한 군장 사회 중에는 청동기 시대 말기에 이미 국가 형태를 이루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철기를 사용하게 된 뒤에 초기 국가의 단계로 발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서기전 4세기경으로, 중국의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출현했던 철기문화가 이 때 전래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생산력이 더욱 증가되어 지배자의 부(富)의 축적이 확대되고 철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밀려 웅진(熊津: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으로 천도하면서 국력이 위축되었다.그리고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국가 체제를 갖추고 그나마 고구려의 군사적·외교적 도움을 받고 있었지만, 5세기 초부터는 자주적인 발전을 도모하였다. 이로써, 5세기에는 고구려가 대단히 강성한 가운데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대항하는 형세가 유지되었다.이러한 삼국간의 세력관계는 6세기에 들어 변화하였다. 우선, 신라가 지증왕·법흥왕·진흥왕을 거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백제도 무령왕·성왕 때에 중흥을 이루었다. 이를 바탕으로 두 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다.그러나 곧 신라가 백제를 몰아내고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 유역의 풍부한 자원을 획득했을 뿐 아니라, 황해를 통해 중국과 직접 외교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 통일을 위한 중요한 발판이 마련되었다.6세기 후반에는 중국에서 남북조 (南北朝)의 분열이 수습되고 수(隋)·당(唐) 등 통일 왕조가 들어서면서 고구려와 충돌을 일으켰다. 이 때 고구려가 수·당의 거듭된 침략을 막아낸 것은 당사자인 고구려뿐 아니라 백제와 신라의 존립까지도 구원한 것으로 민족 보위의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신라와 당의 연합이 더욱 강화되어 결국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멸망하였다.신라는 계속해서 당의 세력을 축출하여 삼국 통일을 완수하였다(676). 이 삼국 통일은 우리 역사상 매우 큰 의미를 가지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이제까지 혈통·언어·문화를 같이하면서도 서로 다른 국가체제 속에 들어가 있던 우리 민족이 하나의 국가 안에 통합됨으로써 민족국가의 출발점이 되었다. 또한 삼국의 문화를 수렴해 보다 차원 높은 민족 문화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그 영토가 대동강과 원산 이남에 그쳐 고구려의 영토였던 만주지역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었다.그러나 만주 지방에는 곧 고구려의 유민들이 진나 당시의 농민들은 아직도 촌(村)에 할당된 공유지를 공동체적인 노동으로 경작하는 전통적 유제에 의한 역역을 부담하고 있었다.통일 이후 100여년 동안 전성기를 누리던 신라는 8세기 후반에 들어 진골 귀족 내부의 분열과 그에 따른 왕위 계승전의 격화로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진골 귀족들은 혈연적인 유대 관계를 가지고 이해 관계를 같이하는 운명 공동체였다. 그러나 통일 이후의 사회 발전은 이들의 유대를 이완시켜 여러 족당(族黨)으로 분열되었다.점차 이들 족당 간의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지방에서는 호족(豪族)들이 새로이 성장해 독립적인 세력을 이루었다. 이들 호족은 촌주(村主) 등 지방의 토착 세력이나 지방에 내려간 중앙 귀족들이 성장한 세력이었다. 호족은 성주(城主)·장군 등을 자칭하면서 군사력을 가지고 그 지방의 행정을 장악했으며 조세와 역을 징수하였다.진골과 함께 신라 사회의 지배 세력을 이루고 있었으나 역시 폐쇄적인 진골 중심의 사회에서 적지 않은 제약을 받았던 6두품들이 기존 체제에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고, 지방의 호족에 협조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9세기 말부터는 초적(草賊)이라 불리는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호족들은 이를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였다.이들 호족 가운데 견훤(甄萱)이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에서 후백제를 세우고(892), 궁예(弓裔)가 송악(松岳: 지금의 개성)에서 후고구려를 세움으로써(901) 신라와 더불어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 후고구려는 마진(摩震)·태봉(泰封)으로 이름을 바꾸다가 역시 송악지방의 호족인 왕건(王建)에 의해서 고려로 교체되었다. 결국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고(935) 곧이어 후백제가 정복되어 고려에 의한 후삼국의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936).이와 같은 신라 말 고려 초의 변동은 단순한 왕조 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성장한 호족 세력에 의해서 진골 귀족 중심의 고대적 체제가 극복되는 과정이라는 점에.
    인문/어학| 2005.01.22| 11페이지| 1,500원| 조회(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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