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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 본초강목
    《본초강목(本草綱目){ 본초강목 [本草綱目] : 중국 명(明)나라의 의사 이시진(李時珍)이 지은 본초, 곧 한방의 약재 약학에 관한 책. 〈신농본초경 神農本草經〉 등의 중국 역대 약학서에서 내용을 취하여 편집했으며, 만력(萬曆) 6년(1578)에 완성했다. 모든 약에 대해 "정명(正名)으로 강(綱)을 나타내고 석명으로 목(目)을 붙였다"고 하여 '본초강목'이라 이름지었다.《본초강목》의 초판은 <금릉본(金陵本)>이라 하는 것인데, 1592년에 출판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중국에는 전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본초강목》의 제 2 판인 <광서본(廣西本)>을 바탕으로 삼은 상세한 교정본(簡體子版)이 간행되었는데, 이 책에는 <금릉본>과 거의 같은 약도가 실려 있다. 한국에 《본초강목》이 전해진 것은 조선 선조 이후일 것으로 짐작되나, 큰 영향은 끼치지 못했던 것 같으며, 《동의보감》에서도 참조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계속 《증류본초(證類本草)》를 이용해 온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본초강목》으로 약물 및 본초학에 관한 지식이 보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책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비난도 있으나, 그 당시 본초서(本草書)의 대부분을 국가에서 편집하고 있을 때, 저자 한 사람의 힘으로 이러한 책을 완성시킨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최대의 의약 전문 저작본초{ 본초 [本草] : 동물 광물을 포함하는 약품을 말하는 것으로, 특히 한방약물을 대표하는 말이다. 본초라는 문자가 처음으로 문헌에 기재된 것은 반고(班固:32 92)의 저서인 《한서(漢書)》에서 본초석지한온(本草石之寒溫) 이라 한 것이 곧 본초 명칭의 기원이다. 그 후 방약본초 방술본초 라 하여 본초가 의술만이 아니고, 방사(方士)들에 의해 신선도(神仙道)와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 본초의 개념은 전한(前漢) 무제(武帝) 이후 성제(成帝)에 이르는 100여 년 사이에 성립되었다. 의술과 함께 취급되어 오던 본초가 후세에 와서는 약품에 관한 서적을 대신하여 부르게 되었다. 즉, 천연약물히 초근목피를 근본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본초라고 한 것이다.는 곧 우리나라의 한방약과 민간약의 고유명칭으로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 신농본초경 [神農本草經] :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본초서. 저자 저작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전한 말기로 짐작된다. 500년 무렵 양(梁)나라의 학자 도홍경(陶弘景)이 교정(校訂), 주석을 달아 저술한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註)》 《증류본초(證類本草)》의 인용문에서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1년 365일에 맞춰 365종의 약물을 상 중 하의 3품(品)으로 나누어 각각 기미(氣味)와 약효(藥效)와 이명(異名)을 서술한 간단한 약물서이다. 또 서문에는 약의 성질과 용법이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어 한방이 한(漢)나라 때 이미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약물에 대한 기재는 간소하고 경향 주요효능 별명 생육지 등이 기술되어 있으나, 약물의 형상이나 구체적인 산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현재의 《신농본초경》은 명(明)나라의 노복(盧復), 청(淸)나라의 손성연(孫星衍) 등에 의하여 각각 재편집된 것이다.》에서 《본초강목》에 이르는 거의 역대 모두 가지고 있는 본초의 전문 저작이다. 그 중에서 또한 이시진(李時珍){ 이시진 [李時珍, 1518 ~ 1593] : 중국 명(明)나라 본초학자(本草學者). 자는 동벽(東璧), 호는 빈호산인(瀕湖山人). 약초의 생산지로 유명한 치저우 출생.이 편찬한 《본초강목》은 우리나라 한방약과 민간약에 관한 저서를 통틀어 가장 유명하다. 그것은 우리나라 16세기 이전의 노동자의 풍부한 약물경험을 총괄하는 우리나라의 의약보고 중 절정에 이르는 한 부분이 된 진귀한 유산이 되었다.이시진은 명대(明代) 의학자이고 기주( 州)사람으로(지금의 호북성(湖北省) 기춘현( 春縣)) 한 세대의 의사 노릇을 하던 가정의 출신이다. 조부는 일명, 각처로 돌아다니며 환자를 찾아 치료해 주던 의사이고, 부친 이언문은 그 지방에서 비교적 명망있는 의사였다. 그리고 비교적 많은 약학지식을 갖추었다. 이시진은 어릴 때부터 가정의 의학, 약학 분야에 강한 흥미를 보였다. 게다가 이시진은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부친으로부터 정성어린 치료를 받았으며 또한 그는 의학 분야에 깊이 빠져들었다. 봉건사회의 과거(科擧)는 벼슬에 오르는 길이었고, 14살 때의 이시진은 비록 수재였지만 23세 때까지 연이어 3번이나 향시(鄕試){ 향시 [鄕試] : 과거(科擧)의 제1차 시험. 중국의 송(宋)나라 태조가 975년(開寶 8) 친히 궁중의 강무전(講武殿)에서 치르는 전시(殿試)를 시행함으로서 3단계의 시험제도가 완성되었는데, 이 향시는 송나라의 해시(解試)에 해당하였으며, 원(元) 명(明) 청(淸) 대에 와서 향시로 바뀌었다.에서 떨어졌다. 여기서부터 의학에 뜻을 세워 24세에는 의사 간판을 내걸었고 치료가 곤란한 질병도 적지 않아 매우 빨리 실력이 출중한 의사로 유명해졌다. 무창(武昌)의 초왕(楚王) 주영험(朱英險)을 알게 되어 그에게 봉사정(奉祠正)(8품 소관)의 임무를 맡겼으며, 북경태의원으로부터 추천받았다. 의관은 비록 작지만 이시진은 초왕부와 태의원의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대량의 의서를 참조하여 폭넓은 자료를 수집하였다. 1년 동안 태의원의 직을 지냈고 병을 핑계 삼아 고향으로 돌아와 그때부터 이 거작을 쓰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대량의 군서(群書)를 열람하였고 본초(本草)· 자(子)· 사(史)· 경(經)· 전(傳)· 성운(聲韻)· 농포(農圃)· 의복(醫卜)· 성상(星相)· 악부(樂府) 등 각 종류의 지식을 포괄하여 30년 안에 800종이 넘는 책을 읽고 몇 백 만자를 기록하였다. 말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기록은 이미 몇 개의 궤짝에 담았다고 한다. 의원 일을 보는 중에 그는 또한 각지를 두루 방문하여 순행하였다. 강서(江西), 강소(江蘇), 안휘(安徽), 호남(湖南), 광동(廣東) 각지를 순행하였고, 만 리를 여행하였다. 농사짓고, 물고기를 잡고, 사냥하고, 장작을 패는 등 여러 부류의 인물들에게 가르침을 청하였고 또한 무당(武當), 우수(牛首){ 우수(牛首) : 남경(南京)남쪽 남산(牛首山). 중국 중부의 절강성에는 이런 말이 있다. "봄에는 우수(牛首)요, 가을에는 서하라(봄에는 우수산, 가을에는 서하산이 좋다)", 황산(黃山), 모산(茅山){ 모산(茅山) : 강소성(江蘇省) 구용현(句容縣) 동남쪽에 있으며 원래의 이름은 구곡산(句曲山)이었으나 한(漢)나라 때 모영(茅盈), 모고(茅固), 모충(茅衷) 삼형제가 이 산에서 득도하여 삼모진군(三茅眞君)이라 불리는 신선이 되었기 때문에 모산이라 불린다.의 모든 봉우리를 올라 약재를 수집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위에서 말한 것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적잖이 유익하였다. 예를 들면 그는 선화(旋花, 메꽃)가 근골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는 것과 흰독말풀의 씨를 술에 담그어 마취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약초 경작을 하는 농민으로부터 그는 또한 나무가 우거진 것과 둥글레는 조금도 같지 않은 약용식물이라는 것을 배웠다. 고대 의학서를 바로잡음으로써 그것들이 동일시되어졌다는 잘못을 알았다. 그리고 남성(南星)과 호장(虎掌)이 알고 본 즉 같은 종류의 식물이나 두 가지의 다른 이름이었고, 또한 고대 의학서 중에서 두 종류의 다른 식물을 틀렸다고 간주하는 실수를 바로잡았다. 이 외에도 그는 적지 않은 실험을 하였고, 천산갑(穿山甲)을 해부하여 그것이 개미를 통째로 삼킨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태화산(太和山, 무당산)에 올라 황제가 식용하는 선과(仙果)를 전문적으로 조공하는 것을 연구하였다. 랑매( 梅)는 먹어서 장생불로(長生不老)할 수 있는지 아닌지 실험을 거쳐 그것은 결코 선과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다만 침이나 체액의 분비를 촉진하여 해갈할 뿐이다. 약간의 민간 속담에 대하여 책에 쓰인 것에 따라 그는 또한 천산갑, 왕불류(王不留, 장구채)는 부인들이 먹어 젖이 잘 나오게 한다 , 복어를 먹으면 죽는다 , 빈랑(檳 )나무는 근심을 잊을 수 있다 등등 성실하게 수집하여 정리하였고, 각종 자료를 모아 《본초강목》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였다. 이시진은 《본초강목》을 제외하고湖 學)》, 《기경팔맥고(奇經八 考)》, 《맥결고증( 訣考 )》, 《오장도론(五臟圖論)》, 《삼초객난(三焦客難)》, 《명문고(命門考)》 등 진단 · 침구(침질과 뜸질) 등의 한방의(漢方醫) 서적을 저술하였고 《당률(唐律)》, 《매소관시(邁所館詩)》, 《시화(詩話)》등의 문학작품도 썼다. 지금은 《본초강목(本草綱目)》, 《빈호맥학(瀕湖 學)》, 《기경팔맥고(奇經八 考)》, 《맥결고증( 訣考 )》의 4개만이 남아있고 남은 작품도 모두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본초강목》은 명(明) 세종(世宗) 가정(嘉靖) 31년(공원 公元 1552년)부터 써서 27년 동안이나 계속하여 써온 것으로 만력(万歷, 명 신종의 연호) 6년(공원 1578년)에야 탈고하였다. 그리고 이 책이 이시진 사후 삼년에, 만력 24년(공원 1596년)에 등사하여 금릉판(金陵版)이라 일컬어져 곧 명 신종(神宗)이 전국 각지에 명하여 바쳐 올리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 이건원이 이 책을 조정에 헌납하자 황제가 책은 남겨서 보고, 예부(禮部){ 예부(禮部) : 옛날 중국의 육부(六部)의 하나. 의례(儀禮)·제전(祭典)·학사(學事)·고시(考試) 등의 일을 맡아봄.는 이해하라 고 하여 이 글은 만력 31년(공원 1603년)까지 방치하여 두었고 《본초강목》은 강서성에서 간행되어 사람들에게 중요시되었다.전 52권, 190여만 자로, 그 중 1·2권은 총론 · 서언의 성격을 띠고, 칠방(七方){ 칠방 [七方] : 한의학상의 처방법으로 대방(大方) 소방(小方) 완방(緩方) 급방(急方) 기방(奇方) 우방(偶方) 복방(複方)의 7가지를 말한다.· 십제(十劑){ 십제 [十劑] : 약을 효능에 따라 선제(宣劑), 통제(通劑), 보제(補劑), 설제(洩劑), 경제(輕劑), 중제(重劑), 활제(滑劑), 삽제(澁劑), 조제(燥劑), 습제(濕劑)의 10가지로 분류한 학설. 중국의 진장기(陳藏器)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환자의 증상에 따라서 편리하게 약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기미{ 기미(氣味) : 한방에서, 약의 성질과 효기준.
    인문/어학| 2004.10.06| 5페이지| 2,500원| 조회(1,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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