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을 읽고...벽을 뚫어 새로운 무언가를 이루어 나가기 위해 망치질을 하는 것, 그것은 고뇌와 좌절의 시간의 연속이며, 육체적, 정신적 피폐의 지름길이다. 하지만 우선 그러한 어둠의 시간들을 헤치고 그 두터운 벽에 뚫어진 작은 구멍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는 순간, 그의 정신은 희망과 기대감의 물결에 서서히 젖어들게 된다. 절대 뚫리지 않을 것 같은, 아니, 뚫을 생각조차 못할 그런 벽에 손을 대어보겠다고 할 때, 돌을 던지고 조롱을 하던 사람들도 그 작은 구멍하나에 동요되기 시작한다. 외롭게 싸우던 그의 인생의 결말은 그 새로운 빛을 눈부시게 맞이하고 나머지 벽을 모두 허물어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것.하지만 전태일은 안타깝게도 결말을 다시 쓰고 말았다. 그 작은 구멍을 내기 위해 그 스스로 하나의 망치가 되어버렸고, 불빛을 내었고, 결국 재가 되어버렸다.사람들은 어리석다. 오감으로 느껴지는 자극에만 반응하는 어리석고 꽉 막혀버린 인간들에게 전태일은 결국 자신의 몸을 연료삼아 어리석은 이들에게 자극을 선사했다. 제발 이리로 눈을 돌려달라고, 제발 여기 와서 이 뜨거운 의지를 느껴봐 달라고. 세상의 변화함은 무엇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일까? 지도자들의 검은 손놀림인가, 아랫것들의 핏빛 몸부림인가. 지금 이 순간, 내가 사람들과 커피나 한잔 걸쭉히 들여 마시며 여유로워 하는 이 시간에도 움직임의 결과들은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을 것이다. 그럼 난 세상을 등진 초월자?전태일의 생애는 비참하고 힘겹다. 세끼를 챙겨먹은 하루하루의 역사가 거의 없고, 평범함의 행복이란 그에게 있어 사치다. 신문팔이, 구두닦이, 우산장사...... 안 해본 일이 없고 그렇다고 이렇게 일해서 큰돈을 만져 본적도 없다. 남들의 눈엔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 연명하며 사는 사회의 낙오자였다. 부모 잘못만난 죄,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세상 속에서 그는 그렇게 22년을 죄인으로 살았다. 이러한 전태일의 생애는 눈물겨운 필름들의 파노라마다. 하지만 난 그렇게 눈물이 나지도, 감흥이 일지도, 하다못해 그 싸구려 동정심마저도 생기지 않는다. 내가 이리도 매몰찬 인간이었던가. 새삼 슬퍼진다. 나 스스로 위로하고 나선다. 인정이 없는 게 아니라 사회가 날 이렇게 무지한 인간으로 만든 것이라 책임을 전가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은 편한데 여전히 답답하다. 부끄러움과 자괴감.전태일이 우산장사로 일할 때의 일화다. 비가 마구 쏟아지던 어느 날, 한 여자가 전태일 에게 우산을 사면서 퍼부은 그 말들. “그렇게 사니까 맨날 그 꼴로 사는 거야 쯧쯧.”...... 차마 그 여자를 선뜻 비판할 수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나도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 거지청년에게 그깟 5원에 속으로라도 한 두 마디 하지 않았을까. 지하철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좁은 인파를 해치고 지나가는 불쌍한 시각장애인들을 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연기자로 의심해버린다. 그들이 원하는 동전 100원이 아닌, 욕을 퍼부어주는 것이다. 분명 이런 내가 사지 멀쩡한 거지청년이 5원 비싸게 팔아오는 우산에 침을 뱉었으리라.나는 이 책이 싫었다. 아무리 읽어도 ,여느 때의 독서와는 달리, 나의 머리는 장면을 그려주지 않았다. 난 전태일의 생과 사상을 이해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듯했다. 내 상상력은 능력부족으로 인한 한계에 부딪혔다. 그동안 얼마나 우물 안에서 활개치고, 교언영색의 울타리로 나를 헛되이 과시하며 살아던지.....얼마 전 우연히 텔레비전을 켰다가 ‘도곡동 판자촌’의 실상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우리 동네 얘기라길래 무심코 보았는데 난 우리 집 근처에 그런 소위 ‘빈부의 극과 극’이 어색하게 공존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부의 상징 타워 팰리스와 극빈자의 허름한 보금자리 판잣집....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나 자신의 머릿속에 뭉게뭉게 피고 있는 우월감이었다. 내가 으쓱댈 이유가 없는 일이건만,,,난 이미 이 사회가 만들어놓은 부의 위대한 가치에 썩어버린 상태였다. [전태일 평전]은 이런 나에게 깨달음의 의지를 제공해 주었다. 구걸하는 자, 빈 한자에 어설프고 이기적인 동정과 눈물, 그들을 위함이 아닌 나 자신의 우월감의 성취를 위한 행동...... 이런 나의 삶의 태도는 나의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썩은 사회이념에 편승하는 썩은 영혼이 될 뿐이다. 그들 또한 ‘인간’으로 존중하고 그들의 행동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객관성과 통찰력. 내가 6-70년대에 살면서 전태일처럼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려 몸에 불을 지르는 강인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러한 현명한 지도자를 의심하지 않고 굳건히 따라 나갈 수 있는 ‘보는 눈’, 판단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선거 때마다 갈팡질팡하는 여론과 민심. 요즘 우리사회는 이 ‘보는 눈’이 결여되어있다.
성 역할과 남성 바디 이미지서양 남성의 이상적 美* 고대 우아한 아름다움이 넘쳐나고 역동적, 균형적인 몸매가 선호 남자의 몸이 다른 남자들의 매혹의 대상 적당한 근육과 균형 있는 체형이 미의 기준* 중세 (5C~15C) 신 중심의 시대. 예술작품 속 나체의 모습에서 두툼한 겉옷을 휘감은 모습으로 변화. 감각적 요소가 허용되지 않았고 딱딱하고 핏기 없는 차가운 얼굴과 가냘픈 몸매. 물질이 아닌 눈빛을 통해 영혼이 생명으로 충만함을 보여야 함.*르네상스 (15C~17C초반) -고대 그리스적인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몸이 나타나기 시작 -힘이 넘쳐나는 튼튼한 근육질의 몸매와 우람하고 영웅적인 바디라인 남성성을 더욱 강렬하게 보여줌* 17C~18C(바로크와 로코코시대) -모든 면에서 화려함이 나타났던 시기. 남성의 복식과 외모도 굉장히 화려함 -미술 작품 속 남자들의 몸은 관능화되고 성적인 놀이에서 여성의 상대자로 표현 -꽉 끼는 바지에 몸매의 윤곽선이 확실하게 보이는 모습 유희와 관능*19C -단단한 몸매와 적당한 근육, 기사도 정신 (고대 그리스의 청년) -지금과 같은 남성복 (양복)의 형태가 널리 퍼지고 긴 바지의 출현 일반화된 남성복으로 자리를 굳힘 -산업혁명 이후 여권운동의 전개 남성의 역할이 흔들림. 더불어 현대사회의 성역할과 획일화된 이상적 외모의 개념을 무너뜨리고 다양성의 시대로 가는 원인이 됨.* 20C - 이상적 체형의 보편화 -1900년대: 19세기의 기본적인 의복스타일과 유행이 지속 + 세분화된 기능과 편 안한 스타일로의 변화. 자유롭고 경쾌한 느낌의 양복 출현. 새로운 옷감 출현으로 남성복 시장 발전 -1910년대: 내츄럴 숄더와 허리가 들어간 20세기형 재킷, 스트레이트 형 바지, 짧은 밑단의 바지가 유행. 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군복색 두꺼운 면이나 코듀로이 의복 유행 -1920년대: 패션과 유행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감. 슈트에 스포티한 요소를 적용. 경쾌한 실루엣의 유행. 레인코트 등장 -1930년대: 어깨 폭이 넓고 반대로 허리는 조이는 X자형 라인 유행.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패션시장이 위축. 슬림 룩 유행. 검은색이나 청색의 가라앉은 색이 주류-1950년대: 대량 소비 경향으로 젊은 층의 패션 활성화. 테디보이즈 스타일 창출. 날씬하면서도 건장한 젊은 체형이 선호 일직선의 아이비리그 룩(슬림라인) 유행 -1960년대 : 남자도 늘씬하고 섹시한 체형이 유행 신체윤곽이 잘 드러나는 입체적인 형태의 남성복이 나타남. 허리선의 강조와 개성을 중시. 다채로운 색상과 형태 -1970년대: 신기능주의의 슈트. 진과 캐쥬얼 룩. -1980년대: 세계 각국의 문화의 표출과 새로운 디자이너들의 등장 다원적이고 절충적 특징. 30년대 드레이프의 재유행. 신소재와 기술의 발달. 점차 캐쥬얼과 남성슈트가 혼합되는 양상20세기 후반 한국 남성의 이상적 美*1960년대 – 신성일, 남궁원 사회전반에 형성된 사대주의적 가치관의 영향으로 서구적 외모가 미남의 전형 으로 평가됨. 이상적인 체형은 역삼각형의 균형 잡힌 몸매이지만 특별히 운동을 하여 관리하는 요즘의 몸짱과는 거리가 있는 체형*1970년대 – 남진 60년대의 서구적 취향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억눌린 사회 분위기가 강한 남성미를 강조하게 함. 남진의 외모 역시 신성일이나 남궁원처럼 서구적인 느낌이지만, 그들보다 평민적이고 거친 느낌임.*1980년대 - 강석우, 손창민, 이대근 경제 성장의 시대 젊고 유약한 남성들이 인기(강석우, 손창민). 터프가이도 미의 기준에서 제외되지는 않음. 근육의 균형보다는 크기와 굵기로 남성적인 힘을 상징 (이대근, 김진태).*1990년대 – 차인표, 정우성, 배용준, 장동건 남성미가 완연히 한국형으로 이동. 형태미보다는 표정미가 중요시됨. 한때는 모욕이었을 표현인 '해맑은 이미지' 등이 미남에게 적용됨.*2000년대 - 원빈, 안정환, 비, 권상우 일본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세례를 받은 세대들이 20대에 진입하면서 s일본만화의 주인공들을 빼어 닮은 관념적인 얼굴의 미남형 선호(원빈).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정체성 불명의 외모가 인기 (세븐, 안정환). 몸짱신드롬과 함께 근육질의 꽃미남이 각광 (권상우, 비){nameOfApplication=Show}
생활한복의 실태전통의 의미가 중요시되는 한복에서 그 미적인 부분과 서양문물의 유입 후 팽배해진 기능중의, 실용주의의 부분이 가미되어 진행된 것이 개량 한복의 발전이었다. 현재 우리가 쓰는 개량한복은 일상 속에서 ‘생활한복’의 개념과 별 차이 없이 사용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그 둘은 발생적 맥락 속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1910년대에 신여성,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한복의 불편한 점을 개선하고 활동성과 기능성을 고려한 통치마저고리형의 한복이 개량한복이라 정의되며, 반면, 생활한복은 1984년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통 문화보급을 위해 전개된 ‘우리 옷 입기 운동’의 일환으로 한복의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일상복으로 대중화시킨 실용적인 옷을 말한다. 즉, 엄연히 말해 개량한복은 1910년대 이후 등장한 간이복, 신 생활복 등으로 유사 정의 할 수 있으며, 생활한복은 1984년 이래 서서히 보급되고 대중화된 생활복, 우리 옷, 현대한복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특히 생활한복은 근대화 과정에서 역사적 시련을 겪었던 민중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여 남과 북의 공통된 전통문화를 회복하고자 한 이념적 특징도 내포하고 있다.이러한 생활한복은 조선 후기 개화가 시작되면서부터 점차 발생하여 현재까지의 시간 속에서 끝없이 변천해 왔다. 비교적 짧은 시간 속에서 그 형태와 의미가 발전과 쇠퇴를 거듭하였는데 이는 급격한 변화와 혼란의 사회적 모습과 연관 지어 진행되었다. 이러한 생활한복의 역사적 변천을 간단히 살펴봄으로써 현재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생활한복의 형태와 의미를 알아보고 그 구체적인 실태와 앞으로의 방향에 대하여 생각해보겠다.한복의 시대별 변화를 보면, 크게 5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894년 갑오경장시기부터 1905년 이전까지의 한복 개량의 시작단계, 1905년부터 1936년의 일제 복식 개량 시기, 1937년부터 1953년 6.25 직후까지의 물자 절약을 위한 한복개량과 양장의 보급시기, 그리고 1953년에서 1979년의 개량한복의 쇠퇴와 예복기능 강화시기, 마지막으로 생활한복이 등장하고 세계화가 추진되는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을 들 수 있다.19세기 후반 천주교의 유입과 개항, 이화학당의 창립 등으로 사회의 변화가 급격했는데, 이때 정부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려 의복의 간소화, 관복의 양장화 등을 추진하였다. 이리하여 만성복은 관의 주도하에 다소 급진적으로 복식형태가 변화하였고, 여성복의 경우에는 상하동색의 한복 등으로 서서히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당시 한복은 저고리가 매우 짧고 깃 나비가 3cm안팎으로 고름은 넓고 긴 형태였다.그러다가 일본의 침략과 지배로 통감부가 설치되고 3.1운동, 여성단체의 사회운동 등의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통치마저고리와 백의금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주로 전도부인이나 그 시대의 패션리더인 여학생, 신여성, 또는 통감부에 의해 변화된 당시 한복은 의복의 간소화와 장의 폐지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민족적 색깔인 흰색을 탄압하는 일제의 백의 금지정책 속에서 염색과 여학생 교복의 상백하흑의 구조가 통일되었다. 짧은 저고리와 긴 치마와 짧은 치마의 이중구조, 통치마저고리형의 한복이 나타났다.1937이후 중일전쟁, 2차 세계대전, 8.15 해방, 정부수립과 6.25전쟁 발발에 이르는 많은 역사적 사건을 거치면서 복식은 획일화되고 표준복 제정과 복식규제 등의 물자절약정책이 실시되었다. 특히 전쟁 중 구호물자와 구제품의 유입으로 서양복으로 인한 한복의 서구화가 이루어졌다. 저고리길이가 축소하고 통치마를 착용했으며 옷고름대신 단추나 스넵 등을 사용하여 여밈을 간소화한 특징을 지녔다.1953년 이후 6.25 전쟁이 휴전하고 밀수품, 구제품이 범람하였고 전쟁복구사업, 산업화, 국민생화간소화 운동, 과학기술의 발달 등의 영향으로 개량한복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양장과 함께 한복의 활동성 및 간편함, 실용적인 것에 목적을 둔 개량한복이 선보였지만, 서양복의 구성법을 많이 사용하여 우리 것의 고유의 의미를 상실했다는 비판을 받는 시대였다. 넓은 깃너비와 길어진 저고리, 고름대신 단 단추나 매듭, 브로치가 이 시대 개량한복의 특징이었다.198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인한 물질주의, 서구문물의 비판적 수용으로 인한 자각과 반성으로 ‘우리 옷 입기운동’이나 ‘한복의 날’ 제정 등의 움직임이 대학생과 민간단체,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일어났고 그 결과 전통적인 한복의 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생활한복이 보급되고 대중화되었다. 특히 미적인 요소가 주요시되는 현대인들의 감성에 맞춰 천연염색이나 천연직물을 이용한 발전된 한복의 형태가 생겨났고 디테일한 부분의 현대적 디자인이 활용되었다. 또한, 그 이전 시대의 개량한복의 조선 전통복의 차용의 제한적 범주에서 벗어나 80년대 초기의 생활한복은 삼국시대, 고려, 조선 초기, 중기 등의 다양한 연대의 복식이 활용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변화 속에서 진보한 우리의 생활한복은 현재 세계화와 대중화의 과제 속에서 계속 발전하고 있다. 1997년 IMF외환위기라는 국가적 경제위기 속에서 우리나라 국민들은 민족과 개인에 대한 자부심을 유지함으로서 긍정적 자아정체감을 유지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생활한복의 착용이 증가하고 그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많은 생활한복전문점이 생겨나고 많은 제조업자들이 생활한복제작에 뛰어들어 대량생산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저렴한 가격의 이점과 함께 옷감의 품질이나 옷의 맞춤새가 좋지 못하였고 섬세한 디자인들이 표현되기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전체적 이미지가 하락하게 되었고, 생활한복업계의 위기가 왔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의 개최, 크고 작은 세계적 행사개최(정상회담 등) 등으로 한복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려는 기회가 많아졌고, 특히 ‘우리 옷’의 자부심을 걸고 판로를 개척하기위해 세계각지의 의류박람회와 패션쇼에 우리 디자이너들이 참석해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생활한복의 발전은 결국 세계화에 앞서 대중화가 우선되어야 함을 인식하게 되었고 현재 그러한 대중적 보급에 온 힘을 다하고 있다. 한복의 생활화를 모토로 디자인 개발과 보급에 노력중인 생활한복은 예복의 이미지였던 한복을 일상복차원으로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고 그 노력과 움직임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돌실 나이, 씨실과 날실과 같은 생활한복점이 기성복매장처럼 체인점형식으로 패션시장에 크게 진입하였고 그 디자인이나 제품의 질 면에서도 세련미와 유행을 따르면서 전통적 미와 기본 정신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이제 일상 속에서 생활한복을 입고 지하철을 타고 번잡한 도시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1. 나이키나이키는 스포츠 선수들의 경기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에서 출발한 회사이다. 공동 창업자 중 필 나이트 (Phil Knight)는 대학 중거리 육상 선수였으며, 빌 바우어만 (Bill Bowerman)은 육상 코치였다. 이들이 함께 기록 향상을 위한 스포츠화를 개발하고자 했던 바램이 회사의 시작이었다. 따라서 선수들을 바르게 이해하여 그들이 각 종목에서 필요로 하는 요소를 제공하는 것을 기술 혁신의 기본 방향으로 잡았고, 보다 많은 이들이 스포츠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건전한 스포츠의 발전을 지향하고 있다.한국 나이키 역시 스포츠에 대한 이와 같은 비젼을 공유하며 한국의 스포츠와 소비자들에게 보다 가깝게 다가서기 위하여 1986년 (주) 한국 나이키를 설립하고 NIKE Inc와 기술 도입, 합작 투자 계약을 체결하여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국내 소비자들에게 스포츠 화를 비롯하여 의류와 가방 등 스포츠 관련 용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이후 1989년 삼나 스포츠라는 합작 형태로서 자본금 24억 5천만원으로 기업을 공개하고 주식을 상장하였으며, 꾸준한 성장세를 지속 해왔다. 이에 한국 스포츠 용품시장의 성장과 잠재성을 평가하여 1994년 본사의 주식 공개 매수가 있었고,1994년 6월 (주) 나이키 스포츠로 새롭게 출발하여 직접 리테일 오퍼레이션을 이끌게 된다.이후 (주) 나이키 스포츠는 매년 30 퍼센트에 달하는 매출의 급속한 성장과 적극적인 마케팅 활동으로 최고 스포츠 브랜드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 생산성 본부의 조사에서 스포츠 브랜드 부문 고객만족도 1위를 차지함은 물론 한국 능률협회의 브랜드파워 조사에서도 1위를 차지하는 등, 공신력있는 리서치들에서 최고의 브랜드로서의 위상을 다하고 있다.나이키는 어린이로부터 프로 선수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수준에 맞는 최상의 제품을 공급하는 회사일 뿐 아니라, 선수들을 지원하고 미래 스포츠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Hip Hoop과 배틀그라운드 등 매년 여름 새로운 컨셉과 이벤트로 청과 강렬한 임팩트의 대명사인 '스우쉬'(swoosh) 로고는 올해로 30년 된 나이키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스우쉬는 우리말로는 '쉭'이나 '휙' 정도에 해당하는 의성어. 운동화 옆에 붙어있는 빨간색 스우쉬 마크는 강한 원심력을 먹은 부메랑이 빠르게 회전하는 형태로, 속도와 힘이 조화된 느낌이다. 나이키를 신는 한 승리의 여신은 우리 편이다. 승리의 여신이 우리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기 때문이다. 단순미, 강렬함, 상징성, 모든 브랜드가 이 세 가지를 고려하여 로고를 디자인하지만 나이키의 그것만큼 삼박자를 완벽하게 갖춘 것은 없다.스우쉬와 함께 나이키를 연상시키는 또 하나의 심벌은 "Just Do It"이라는 슬로건. '시작해봐, 한 번 해봐' 정도의 뜻을 가진 단 세 단어의 짧은 캐치프레이즈는 11년 동안이나 나이키 캠페인을 지속시켜 왔다. Just Do It이 내포하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과 끝없는 도전정신은 곧바로 'There is no finish line'(결승선은 없다)이라는 나이키 정신과도 연결된다.나이키를 신고 입는 사람에겐 승패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Just Do It" 정신이 그것. 광고는 물론 품질 보증서에까지 쓰여 있는 "Just Do It"은 마치 교리 같다. 98년부터 나이키는 "Just Do It"을 "I Can"이라는 새로운 구호로 바꾸어 캠페인을 발전시키고 있다. 모델도 슈퍼스타 위주에서 무명 모델까지 포괄하는 전략으로 바꾸었다. 소비자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시도다. 도전정신의 극대화와 성취감을 통한 소비자와의 교감이 커뮤니케이션 목표.소비자들에게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나이키는 활발한 마케팅 활동을 펴왔다. 광고 교과서라면 어디에나 등장하는 나이키의 캠페인은 영상미가 뛰어나고 유머와 반전이 담겨 있으며 감동과 철학이 녹아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세계 유명 광고제에서 언제나 단골손님이다. 마이클 조던의 은퇴를 기념해 제작된 '트리뷰트' 편(사진)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감동을 주었 1억달러를 지불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다.활발한 캠페인과 이미지 메이킹이 지금의 나이키 신화를 만들어냈지만 이 모든 것은 역시 품질에 대한 자신감에서부터 출발한다. 마케팅의 기본인 4P(Product, Price, Place, Promotion)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제품(Product). 매출액의 10%에 달하는 막대한 연구개발비는 나이키를 끊임없이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다.포틀랜드의 본사는 모든 역량을 디자인과 신기술, 마케팅에 집중하고 있다. 생산라인 등 2차적인 부분은 동남아나 유럽 등지에서 담당한다. 세계 최고의 스타들이 제기한 아이디어와 문제점들은 나이키 연구원들과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제시한다.로고, 캠페인, 모델, 기술, 디자인 이 모든 부분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이며 시장 점유율 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는 나이키지만 노동 부문에서는 문제점을 지적 받고 있다. 나이키는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지역 주민들의 저임금과 과다한 노동의 대가로 만들어진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나이키 이외에도 많은 다국적 기업들이 비슷한 이유로 비난을 받고 있고 불매운동까지 벌어지는 경우도 있다.기업이 지나치게 이윤 지향적인 모습을 보일 때 소비자들은 그 기업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성공적인 캠페인도 공염불이 되고 만다. 대중은 최고의 브랜드가 소비자 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이익을 주기를 바란다.2. 리바이스-텐트 천으로 만든 광부 작업복청바지의 대명사 리바이스는 이런 점에서 코카콜라, 맥도날드와 함께 미국주의(Americanism)의 세계화(Globalization)를 대표하는 브랜드다. 리바이스의 역사는 진의 역사이자 곧 미국문화의 대외수출 역사인 셈이다.진은 우연하게 탄생했다. 미국 서부개척 열풍이 몰아치던 19세기 중엽. 독일 바바리아 출신 리바이 스트라우스가 서부에 도착했다.그는 금광 광부들이 바지가 너무 쉽게 헤진다며 불평하는데 착안해 투박하고 질긴 텐트용 천으로 바지를 만들어 팔았다. 1853년이었다. 리바이스란 브랜드는 리바이(Levi)가 만든 장을 포함해 약 500명의 고용을 창출하고 있다. 리바이스 코리아는 청바지 뿐 아니라 자켓, 남방, 양말, 벨트, 지갑, 모자 등 제품의 70%를 국내생산하고 있다.나머지 30%도 반제품 형태로 수입돼 국내에서 마무리 공정을 거친다. 때문에 리바이스 코리아의 박영미 대표이사는 "리바이스 코리아는 미국회사가 아니라 한국회사"라고 자신있게 말한다.-차세대용 브랜드 개발로 21세기 대비리바이스는 올해 차세대형 브랜드 '엔지니어드 진'을 출시해 21세기 진 시장 공략을 본격화했다. 엔지니어드 진은 100년 이상 유지해온 허리뒤의 패치를 떼내고 그 자리에 박음질만 넣어 패치가 있었다는 표시를 했다.동전을 넣도록 고안됐던 앞의 작은 주머니를 신용카드를 넣을 수 있는 크기로 키웠다. 시대상을 반영한 이같은 디자인은 리바이스가 147년간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리바이스의 21세기 공략 표어는 '무한대의 활동성 보장'.소비자는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와 제품에 담긴 메시지를 구매한다는 사회학적 논리는 리바이스에서 분명히 확인된다.-환경·사회적 친화로 현지화에 성공현지화와 문화적 적응에 실패하는 기업은 살아남지 못한다. 현지화의 제1 요건은 우호적인 기업 이미지를 심는데 있다.리바이스의 현지화 전략은 환경친화와 사회적 책임. 리바이스는 전세계적으로 '재활용, 재사용, 절약'을 사내규정으로 하고 있다. 한 예로 리바이스는 섬유를 재가공해 직원들의 명함과 사내에서 사용하는 연필을 만들고 있다. 이를 위해 회사 차원에서 별도의 재활용 생산라인을 두고 있다.생산공장과의 계약조건에도 엄격한 폐수 기준치를 책정해 이를 위반할 경우 제재한다. 특히 청바지를 가공, 세척하는 생산공장에는 독성물질이 없는 화학염료를 쓰도록 규정하고 있다.리바이스는 지역사회 지원을 통한 이미지 제고에도 노력하고 있다. 연간 2,000만달러 이상을 40여개국 지역단체에 기부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 에이즈 대책 지원, 인종차별 철폐, 빈곤층 지원 등도 빠뜨릴 수 없는 항목이다.사내에는 '지역사회참고 「GAP」에 이어지는 「GAP키즈」, 「베이비GAP」의 온라인 쇼핑과 뉴비즈니스를 차례로 시작했다.GAP社의 시작은 69년 리바이스 중심의 상품 진열형 청바지점에서 시작됐다. 또 86년 결산 보고에서 스스로의 업태를 SPA라고 정의하면서 패션 시장에 SPA라는 용어를 탄생시켰다. 70년대 GPA社는 평탄한 길을 걸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상설화된 바겐세일, VMD의 개념이 상실된 디스플레이, 소비자에게 어필되지 않는 단품MD 등이 겹쳐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도날드 G 피셔 회장은 안테이러社를 재건한 밀라드 S 드렉스라를 초빙하게 된다. 이와 함께 곧바로 바이어와 디스트리뷰터를 해고하고, 불량 재고 정리와 바겐세일 폐지, 점포 리뉴얼 단행, 자체 상품 기획, 소자재 조달, 생산 프로세스의 매니지먼트를 실시하면서 SPA조달형으로 전환을 시도했다.이로 인해 84년에는 43%의 매출 감소를 초래했으나 85년부터는 매출의 급상승을 맛보게 되다. GAP社의 성공적인 SPA사업의 핵심 포인트는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심플하고 명확한 컨셉의 확장성 ▶심플한 룩을 제안하는 VMD와 사이즈의 풍부함 ▶상품기획부를 정점으로한 기능분권형 공급 체제 ▶물류 시스템이 주도하는 QR딜리버리 등을 들 수 있다.「GAP」의 컨셉은 '클린, 올 아메리칸, 심플'을 테마로 한 베이직한 아메리칸 스포츠웨어다. 샤프하진 않지만 심플하고 편안한 이미지의 아메리칸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는 소비자를 사로잡는다. 심플하고 강력한 컨셉에 상품 라인도 퍼스널케어 등을 가미, 소비자에게 어필하고 있으며 스토어의 대형화도 계속 추진하고 있다.트렌드성 보다는 심플하고 명확한 룩의 제안, 대중이 공조하는 아메리칸 라이프스타일의 제안이 GAP이 추구하는 가치다.-심플한 룩의 VMD, 풍부한 사이즈 강점또 「GAP」의 특징은 룩, 스타일의 제한과 사이즈의 풍부함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남성 베이직 청바지의 허리 사이즈가 과거 6년 사이에 12사이즈에서 14사이즈로, 길이는 3사있다.
러시아문화의 이해 과제-러시아의 문화의 근원인 자연신에 대한 숭배와 신격화는 단지 그들에게서만 나타는 신화가 아니다. 고대의 많은 나라들은 갖가지 신비함과 위대함의 성격을 가진 신화적 스토리를 통해 생겨났는데 이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대국가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의 경우, 알에서 깨어난 주몽이라는 자가 그의 형에게 쫓겨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고 이름을 고구려라 했다고 전해진다. 삼국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현재의 한국과 비슷한 모양의 통일국가를 건설한 신라 역시 말이 품고 있던 알이 갑자기 깨지면서 근방에 있던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이러한 고대인들의 신화적 스토리는 단지 신비함을 위한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러시아 동슬라브 신화의 기본을 이루는 자연에 대한 의미 부여는 고대의 우리 민족에서도 보여 졌다는 사실을 위의 두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한국의 신화를 보면 ‘알’의 출현이 유독 눈에 띈다. 또한 요즘 고구려신화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한 드라마에서의 등장으로 알려지고 있는 ‘삼족오’의 개념이나, 위엄의 상징으로 왕족의 옷에 주로 새겨졌던 ‘봉황’ 또한 알과 관련된 새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집어보아야 할 부분은 그들이 새라는 사실보다도 그들을 매개로 고대인들이 가지려 했던 상징체계이다. 인류는 청동기시대 이전부터 태양이 하늘에 속한 것이 아닌 지하세계에 속한 것으로 여겼다. 즉, 화산이 터지면 용암이 쏟아져 나오듯이 태양을 달굴만한 불은 지하세계에만 존재한다고 믿었다. 때문에 태양은 밤 동안 지하세계에서 달구어졌다가 낮에 하늘을 가로지르고 다시 밤이 되면 원래의 위치로 돌아간다고 믿었던 것이다. 삼족오의 까마귀는 검은색으로 이는 태양과 불을 의인화하고 숭배한 고대인들이 지신의 성격을 부여하기에 적당한 동물이었다. 봉황 역시 화려한 색을 통해 신비감을 유도하는 동물로 불에 대한 인류의 생각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새였던 것이다. 이러한 태양과 불에 대한 의인화와 상징물을 통한 신격화는 동슬라브인들의 불에 대한 생각과 흡사한 부분이 많다. 하늘의 불인 햇빛과 번개를 지상의 불과 동질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태양을 신격화하고, 그리하여 하늘과 태양의 신 스바로그 의 아들인 스바로 지치를 불의 신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에서 태양과 불을 한 가지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불에 대한 신화는 전설적인 동물 ‘용’의 출현과 많은 이야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불을 먹는 뱀’으로서의 ‘용’으로 러시아 신화나 구전 동화에 자주 등장하는 사실은 비단 러시아 뿐 아니라 우리의 구전설화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용’의 의미가 러시아의 ‘불’이 우리 신화 속에선 ‘물’의 대표자로 달라진다는 사실은 차이점이다. 우리는 용을 하늘의 비를 막는 동물로 생각하거나 비를 내리게 하고 강이나 바다에 사는 상상의 동물 이었다. 또한 앞에서 이야기한 태양과 불에 대한 생각도 우리에게는 흙(지하)에서부터 비롯된 자연인 반면, 동슬라브인들은 하늘의 번개와 천둥이 지상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결과라고 간주한다. 이렇게 두 문화는 자연물을 중심으로 시작하여 그들을 신격화하고 의인화하여 인간과 유사한 형태, 또는 인간과 연결되는 스토리를 가지는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세부적인 의미부여에서 완전히 상반된 점을 드러낸다.러시아 신화와 우리의 문화를 비교 할 수 있는 또 다른 요소는 ‘흙’이다. 동슬라브 신화에서 흙은 대지, 땅과 같은 것으로 여성적인 원초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어머니로써 ‘어머니인 축축한 대’이자 인간의 ‘유모’라고 생각했다. 한국 역시 땅이 인간 개인의 운명과 사회의 미래를 결정하거나 관리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나온 설이 풍수지리설이었다. 러시아의 집의 정령이라는 도모보이라는 개념도 한국의 문화에서의 지신과 연결지을 수 있다. 앞에서 잠시 살핀 ‘물’의 개념에서 동슬라브 신화의 빠라스케바 빠뜨니싸를 빼놓을 수 없다. 물의 신격화인 이것은 어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신인데, 한국에서도 농경사회때 기우제를 지내거나 한해의 풍어를 기원하여 지낸 수신제를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물에 대한 개념은 공무도하가 같은 고대 문학에서도 쉽게 등장하여 당시 이러한 자연물이 사람들의 생활 곳곳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