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와 공산주의구 소련 붕괴이후, 공산주의는 실현될 수 없는 이념으로 전락해버린 듯 하다. 소련의 해체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팽팽한 대결 구도를 깨뜨리고 자본주의의 손을 들어준 사건이 되었다. 이로 인해 현재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이며, 향후 얼마간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견고한 자본주의 체제가 세계 경제를 지배할 것으로 보인다. 냉전 종식 후,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의 구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으며 현대 사회는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산업화를 넘어 정보화 및 최첨단 과학의 시대로 향하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자본가 혹은 노동자라는 계급을 뛰어 넘어 다양한 특성을 가진 계층이 공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식 및 정보가 경제적 가치 창출의 원천으로 등장함에 따라 지식 근로자 혹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 집단이 주목받게 되었다. 또한 경제적인 측면에서만큼은 국가간의 경계가 모호해져, 세계화 시대가 구축되었다고 볼 수 있다.이처럼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공산주의 이론은 퇴조한 사상으로, 한 때 20세기의 주축이 되었던 역사의 산물로 사라져 버릴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단지 과거의 사상이나 산물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용하며 특히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있어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는 것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에 관한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공산당 선언 으로 살펴볼 수 있다. 공산당 선언 은 현대사회에서 공산주의가 갖는 의의와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있게 고찰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공산주의를 통해 본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 에서 19세기 산업화의 과정과 자본주의에 관한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는 단순히 현실만을 본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시대가 대두하게 된 역사적 과정과 미래를 자신만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라고 말하면서 봉건사회에 대한 투쟁의 과정을 거쳐 부르주아지가 탄생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부르주아지가 만들어낸 사회에서도 역시 계급 갈등은 존재하며, 다만 봉건 사회보다 훨씬 단순화되고 새로운 계급과 투쟁형태를 만들어냈다고 본다. 즉, 생산 수단을 소유한 부르주아지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나가는 프롤레타리아가 서로 적대적인 계급관계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저자들은 부르주아지는 백년 남짓한 자신의 지배기간 동안 이전의 모든 세대들이 이루어낸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거대하고 엄청난 생산력을 창출했다. 고 하면서 부르주아지가 일구어 낸 결과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입장을 밝힌다. 또 부르주아지는 그 정치적 발전과정에서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고 본다. 그러나 저자들은 부르주아지는 오직 자신의 금전적 이해를 위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사회의 모든 인간 관계를 물질적인 이해 관계로 바꿔 놓았다고 보았다. 여기서부터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투쟁은 시작된다. 부르주아지의 발달은 결국 새로운 계급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발달로 이어져 그들의 끝없는 투쟁으로 혁명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 공산당 선언 의 주축을 이루는 내용이다.마르크스가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그가 산업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모순과 문제점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산업화는 물질적 풍요를 낳았고, 경제적 발전과 사회 전반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제조업의 발달로 인한 획기적인 생산량의 증가로 자본주의는 점차 발전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인구는 점차 도시로 몰린다. 그러나 산업화와 기계화는 노동자 계급에게 있어 불합리한 모순을 낳게 되는데,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 계급은 시장의 변동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내맡겨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까닭에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여 생계를 유지할 따름이다. 특히 공장의 기계화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노동력에 대한 가치를 저하시키고, 그들을 기계의 일부로 전락시킨다.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특성상 주기적인 호황과 불황을 겪게 된다. 불황의 원인은 수요보다 많은 생산의 과잉으로, 경기가 나빠졌을 때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 계급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거나 자신의 생산력을 파괴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저자는 이러한 산업 공황현상을 사회가 갑자기 야만 상태로 후퇴 한 것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이러한 산업의 불황은 노동자 계급의 임금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그들의 지위와 생존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기계화의 발달로 노동자의 노동력은 기계로 대치되어 대량 실업을 양산하기도 한다.현대 사회에서도 세계 경제는 주기적인 호황과 불황을 겪고 있다. 특히 우리 나라는 IMF라는 경제 위기를 맞아 심각한 사회적 공황 상태에 직면한 경험이 있다. 이 당시 많은 서민들이 일자리를 잃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거나 노숙자가 증가하는 등 각종 사회 문제가 발생하였다. 자본주의의 경기 흐름에 따른 노동자 계급의 불안정한 지위는 현대 사회에서 서민들이 겪고 있는 문제와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측면은 자본주의 체제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이기도 하다.또 한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기적인 이윤추구에 따른 문제점이다. 저자는 부르주아지는 모든 인간 관계를 금전 관계로 전환시켰다고 본다.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정치적 환상들로 은폐된 착취를 공공연하고 파렴치하며 직접적이고 무미건조한 착취로 바꿔놓았다. 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이윤추구에 대한 문제점을 계급적 특성으로 설명하였지만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이윤추구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부르주아지로 대변되는 계급의 문제만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사적 소유와 이윤 추구이다. 이러한 특성은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고, 생산성을 증대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지나친 이윤추구는 과도한 생산과 소비를 낳아 환경문제 등이 발생하기도 하며, 부의 재분배를 가로막아 상대적 빈곤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상대적 빈곤의 문제는 현대 사회의 심각한 문제점으로 비단 개인의 문제 뿐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부의 집중에 따른 빈부격차로 이어지고 있다. 상대적 빈곤을 느끼는 사람들은 사회에 대한 소외감으로 점차 자신의 무능력함을 탓하거나 무력감으로 사회 질서에 위배되는 일탈적 행동을 행하기도 한다.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부르주아지에게는 새로운 시장의 개척으로 이어졌다. 저자는 새로운 시장의 발견으로 상업, 해운과 육상 교통은 헤아릴 수 없이 큰 발전을 이룩했다. 이 발전은 다시금 산업 확대에 영향을 미쳤으며, 산업, 상업, 해운과 철도 등이 신장하는 만큼 부르주아지도 발전했다. 고 하였다. 생산량의 증가는 상품을 판매할 수요자를 필요로 한다. 수요보다 많은 과잉 생산은 새로운 시장 개척으로 이어진다. 마르크스는 생산품의 판로를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욕구가 부르주아지를 전 세계로 내몬다. 면서 부르주아지는 세계 시장을 착취함으로써 모든 국가의 생산과 소비를 범세계적으로 조직했다. 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의 세계 시장에 관한 논의는 부르주아지가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것으로 범 세계적인 착취를 낳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마르크스의 세계 시장에 관한 언급은 마치 최근의 자본주의 상황을 예견한 것 같다. 물론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 을 집필하던 19세기말에도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을 통한 세계 시장이 형성된 바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세계 시장의 범위는 확대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지구상의 거의 모든 국가가 하나의 시장 경제라는 울타리에 묶여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세계화는 최근의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견해는 단지 상황을 예견한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경제적 측면에서의 세계화는 부르주아지라는 계급의 착취 대신 강대국들의 이권 다툼이라는 문제점을 낳았다는 점에서 그의 논의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계화로 인해 각 국가는 국가 내부의 상황 뿐 아니라 세계의 경제 상황에 따라 경제 위기를 맞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특히 경제적 약소국들은 강대국의 원료 공급지 혹은 노동력 제공으로 세계 시장에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공산당 선언 의 한계공산당 선언 은 자본주의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왜 현실 사회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바라던 공산주의는 실현되지 못하였을까? 그리고 공산당 선언 이 갖는 한계점은 무엇일까? 우선 공산당 선언 의 핵심 논의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특성을 들 수 있다. 저자는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대립하는 모든 계급 가운데 오직 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이 진정으로 혁명적이다. 나머지 계급들은 대규모 산업과 함께 쇠퇴하고 몰락한다. 라고 하였다.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단체나 조합을 결성하고 응집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 왔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예견한 대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전 세계적 단결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 또한 혁명적 성격을 보이기보다는 점차 시장 경제 체제에 편입되는 양상을 보였다.또, 마르크스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 사회가 완성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더 구체적으로 공산주의 사회의 발전 단계를 최소한의 이기심과 소유욕이 공산주의보다 강한 상태인 조야한 공산주의에서 공산주의의 본질을 파악하는 단계로 발전하여 마침내 인간적 본질의 현실적 획득을 이루는 완성된 공산주의가 완성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예언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과정과 실제 현실화된 공산주의 혁명은 큰 차이가 있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발달로 물적 토대가 마련된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이론을 제시했으나,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던 당시의 러시아는 산업화도 이루지 못한 농업국가였다. 러시아 사회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 사회라는 과정을 생략한 채, 바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로 향했던 것이다.
중세와 근대 그리고 16세기도메니코 스칸델라 흔히 메노키오라고 불렸던 이탈리아의 한 방앗간 주인이 살았던 시대는 16세기였다. 16세기는 기독교적 금욕주의와 봉건제로 대변되는 전형적인 중세의 긴 터널을 지나 15세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쳐 근대로 한 발짝 나아가는 과도기적 시기였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이탈리아의 예술과 문화는 북부로 확산되었고, 유럽의 많은 지역들에서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천문학에서는 피렌체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에 관한 확고한 증거를 제시해 오랜 기간 중세의 우주관으로 군림해온 아리스토텔레스 적 우주관을 붕괴시켰다.{) 「미완의 통일 - 이탈리아사」p.97 , 크리스토퍼 듀건, 개마고원, 2001이렇게 16세기는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다양한 의식이 발현되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라는 일련의 사건들은 중세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지식의 진보와 사회가 변화하던 이 시기 이탈리아의 프리울리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우주관을 갖고 있던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가 살았다.메노키오의 우주관 - 치즈와 구더기저는 이렇게 말했죠. 제가 생각하고 믿는 바에 따르면 흙·공기·물 그리고 불, 이 모든 것은 혼돈 그 자체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하나의 큰 덩어리를 형성하는데 이는 마치 우유에서 치즈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구더기들은 천사입니다.…(중략) - p. 75메노키오의 우주관은 신이 모든 사물을 창조했다는 기독교적 천지창조설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었다. 태초의 세계는 혼돈 그 자체였고, 우유에서 치즈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듯 세계가 탄생하였다는 그의 생각은 당시 어떤 성직자나 지식인도 생각해내지 못한 독창적인 것이었다. 또한 치즈에서 생겨난 구더기는 천사이고, 그 수많은 천사들 중 같은 시간대에 큰 덩어리로 만들어진 것이 신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공기는 하느님이며, 대지는 우리의 어머니 라거나 하느님은 단지 다. 그의 생각은 그가 살고 있던 사회에서 이단으로 간주되기 충분했다. 전통적인 천지창조설에 관한 부정, 신성에 관한 거부, 성경 내용에 관한 의심 등 그는 그가 살던 시대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진취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이었다.그는 자신의 생각을 머리속에만 가두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토론하길 원했다. 농민들이 곡식을 가지고 와 줄을 서서 방아 찧을 순서를 기다리던 방앗간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만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회합의 장소였다. 실제로 방앗간은 농민 회합의 장소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 증거로 12세기 종교 교단의 규약들은 수도승들이 그 곳으로 시주를 받으러 갈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창녀들은 방앗간 근처를 자주 드나들었다. 그래서 경제적 이익보다도 도덕을 항시 앞세웠던 성 베르나르는 수도승들에게 이 악의 소굴을 파괴하라고 권하기도 했다. {) 「서양중세문명」p.375, 자크 르 고프, 문학과 지성사, 1992방앗간의 주인 메노키오는 방앗간을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자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진즈부르그 교수는 자신마저 이단으로 몰릴 수도 있는 종교 재판에서 증인들이 메노키오의 말을 부정하였다는 기록은 정확한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메노키오에 대해 부정적인 반감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메노키오는 공동체에서 소외된 삶을 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몬테레알레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마을과 인근 촌락들의 촌장이었으며 몬테레알레 교구의 행정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의 사회적 지위는 다른 사람들에게 교리와 행실에 관한 선생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게 된다.그는 여러 차례에 걸친 종교재판에서 그가 진술한 모든 내용은 오로지 자신의 생각이라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그의 생각은 종교 개혁을 단행했던 루터파의 교리와도 다른 것이었다. 저자는 그의 논의가 재침례교도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는데, 하한 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메노키오를 재침례교도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의 생각은 재침례교도들이 가진 것보다 급진적이었으며, 자유로웠다.그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물론 그의 지적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지만, 라틴어가 아닌 속어로 쓰인 책들을 읽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읽었던 책들은 그의 생각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종교 재판에서 그는 책을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견해를 펼쳐나갔다. 예컨대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라고 믿게 된 데에는 『성서의 약술기』에 내 아들아 너는 이미 처벌을 하였다. 너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증오하는지 보이지 않느냐? 라는 문구가 큰 영향을 미쳤다. 내 아들아 라는 말에 주목한 메노키오는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성서의 약술기』에는 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라고 쓰여 있다. 여러 서적들에 대한 그리고 지식에 대한 그의 해석은 매우 주관적이고 편파적이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밖에도 그는 책의 내용을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책에 없는 내용을 책에서 읽었다고 믿고 있는 등 모순된 진술을 하기도 한다. 서적들은 그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갖는 데 밑거름이 되긴 했지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만의 세계관을 통해 글의 의미를 파악했으며 그가 펼친 주장의 상당 부분은 어떤 책에도 없는 독창적인 것이었다.그렇다면 메노키오의 우주관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심없이 믿고 진실로 여겼던 신학적 교리에 관해 강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태어났다는 것에 관한 의문을 갖게 된 그는 예수가 마리아와 요셉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는 당대의 지식인도 아니었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 나름의 독자적인 생각과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그 사상적 근거가 불더욱이 계속되는 종교재판에서 자신의 의견을 번복하거나 모순된 답변을 함으로써 그 자신도 견해의 일관성을 견지하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진술은 당시의 피지배층인 농민과 상공업자 등도 나름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중세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은 지배층과 지식인들의 사상적 변화뿐 아니라 사회 밑바탕에서부터 시작된 것임을 증명하는 근거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권위와 지배에 대한 비판자 - 그들은 가난한 사람을 억압합니다...이러한 법 제도에서 교황이나 추기경, 주교는 너무 위대하고 부자여서 교회와 사제들이 모든 것을 독차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가난한 사람들이 경작지 두 필지를 임대한다면 이는 틀림없이 교회나 주교 또는 추기경의 것이게 마련입니다. p.84메노키오는 권력에 관한 강한 반감을 드러낸다. 그는 지배층이 라틴어로 말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탄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의 사용은 피지배층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구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교회의 성사와 의식을 거부하고 최소한의 실천적 교리만을 고집하는 것은 교회의 권위와 지배에 대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세례를 포함한 모든 성사를 사제의 착취와 억압의 수단으로 보았다. 교회의 율법과 계율이 모두 장사 수단이며, 성직자들은 이러한 수단들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라는 그의 발언은 권력에 대항하는 강력한 비판이다. 종교 재판의 과정에서 그는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매우 당당하게 주저 없이 말했다고 한다. 메노키오가 지배층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16세기초 프리울리는 귀족들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여기에 계급 갈등 또한 극심했다. 농민과 지배층간, 그리고 귀족들간의 갈등은 긴장과 완화를 거듭하다 16세기말에 이르러서는 농민들의 빈곤한 상황이 정점에 다다르게 된다. 메노키오는 이렇게 혼란한 상황에서 권력자들 과 가난한 사람들 의 대립관계에 주목하였다. 그는 성직자와 왕, 주체로 생각한 것은 로마 교회의 성직자 계급이었다고 한다. 메노키오가 교회에 강한 반감을 갖게 된 것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당시 프리울리 지역의 상당한 토지를 교회가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저자는 추측한다.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메노키오의 비난을 이해하는 근거가 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가 갖고 있던 권위에 대한 인식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는 그저 자신의 이해관계와 실제 경험으로 인한 반감을 표출한 것이 아니었다. 라틴어로 쓰고 말하는 것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신 이라고 주장한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메노키오는 자신이 가난하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대다수의 농민들이 가난하며 교회의 성직자들은 권위를 통해 가난한 그들을 통치하려 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진즈부르그 교수는 문화를 특권으로 간주하는 관념은 인쇄술의 발명에 의해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고 말한다. 인쇄술의 발명은 역사에서 혁명적이고 위대한 발명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이것은 신앙에 관한 책들 특히 성경이 많이 출판되었기 때문에 글을 읽을 줄 아는 대중들이 모든 원전 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인쇄술은 단순히 글과 지식만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전달한 것이다.{) 「서양중세문명」p 436, 자크 르 고프, 문학과 지성사, 1992메노키오는 또한 자신만의 종교적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에게 영혼을 나누어주었고, 자신은 하느님이 주신 영혼을 갖고 있기에 성직자와 영주들의 행위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신의 존엄성은 기독교인, 이단자들, 투르크인, 유태인 모두에게 성령을 주었다. 신은 그들 모두를 귀중하게 여기며 그들 모두는 같은 방식으로 구원한다 고 말함으로써 모든 사람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메노키오는 당시 일반적인 농민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으며, 중세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 보다 조금 더 진보적인 인.
1. 프로그램 개요▷ 제목: 현지 보고 - 특파원 통신▷ 방영 시간 및 방송 분량- 평일(월요일∼금요일) 저녁에 방영하며, 약 30분 정도의 길이로 제작한다.▷ 프로그램 성격- 국제 뉴스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프로그램이다. 기본적으로 뉴스를 전달하는 프로그램이지만, 단편적 보도가 아닌 기획취재, 심층취재를 중심으로 하여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성격을 띤다.▷ 기획 의도- 기존의 뉴스 프로그램에서는 우리 나라와의 관련성 및 영향력 여부에 따른 뉴스 아이템 선별로 인해 접근하기 어려운 국제 뉴스를 다루어 보다 다양한 뉴스를 원하는 시청자의욕구를 충족시킨다. 또, 특파원 체제를 적극 활용하여 단순히 외신 보도의 인용이 아닌 우리 시각에서의 뉴스를 제공하며, 생동감과 현장감이 넘치는 뉴스를 전달한다. 마지막으로정형화된 뉴스가 아닌 보고 형식을 통해 시청자들이 친근하고 쉽게 다가설 수 있는 뉴스를제공한다.▷ 프로그램 내용 지금 세계는- 당일의 국제 뉴스 중 가장 뉴스 가치가 높은 아이템을 선정하여 보도한다. 현지 상황과 해당국가의 언론 보도 내용을 정리하고, 사건의 이면 등을 심층 취재하여 보도한다. 현지 특파원을 연결하여 직접 보도하며, 사건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전한다. 특파원 리포트-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특파원들이 기획 취재한 내용을 방송한다.예를 들어 ○○○ 뉴욕 특파원의 월스트리트 통신 과 같이 특정 수용자를 고려한 전문적 내용의 보도, 또는 □□□ 통신원의 이슬람 문화 기행 처럼 시청자의 흥미를 유발할수 있는 내용 등 다양한 시각과 목소리를 가진 기획 취재 내용을 담는다. 비유하자면 신문에서의 칼럼과 같은 역할로 국가나 영역(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관계없이 특파원이 임의로 선정한 아이템을 전문적이면서도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다. 현지 보고- 각 국의 현지 특파원이 단신 뉴스를 전달한다.2. 기존 프로그램과 차별화 되는 특성▷차별화 전략1 국제 전문 뉴스: 일반적으로 종합 뉴스에서 다루어지는 국제 뉴스의 양은 매우 적다.특히 우리 나라와의 직접적인 연관성 여부가 보도 기준이 되므로,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되는 사건이나 사고가 없는 한 국제 뉴스가 일관성을 가지고 일정 분량 전문적으로 보도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현지 보고 - 특파원 통신 은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일반적인 뉴스 프로그램에서 제공받기 어려운 국제 뉴스를 심층 취재하고 전문적으로 보도한다.2 특파원 이 제공하는 뉴스: 현지 보고 - 특파원 통신 은 새로운 인력을 투입하지 않고,현재 세계 각 국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는 특파원들이 주체가 되는 프로그램이다. 모든뉴스 보도는 기본적으로 특파원의 직접 취재를 원칙으로 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외신 보도에 의해 뉴스의 균형을 상실할 수 있는 문제점을 보완하고, 시청자들에게 보다 높은 신뢰감을 줄 수 있다.3 다양하고 전문적인 기획코너: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특파원이 기획 취재한 내용을제작, 방영하여 최근의 해외 소식과 국제 뉴스를 다각도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단편적 뉴스 보도가 아닌 특파원의 소견과 시각이 반영된 기획 보도를 통해, 깊이있는정보를 제공한다.4 현장감 있는 보도: 특파원들이 직접 취재한 내용을 방송하므로, 보다 생생하고 사실적인내용을 보도 할 수 있다.5 보도와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융합: 국제 뉴스를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는측면에서 보도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기획 취재 코너에서는 다큐멘터리 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독특한 특성을 나타낸다.▷경쟁할 수 있는 프로그램 현황1 MBC·‘지구촌 리포트’(일요일 오전 7시 30분 ∼ 8시) : 불치병 완치를 위한 새 돌파구가오늘도 터져 나왔습니다. , 평범한 주부의 일확천금 비결은? 과 같이 지구촌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달하는 프로그램이다.·‘TV로 보는 세계’(월∼금 오후 5시 20분 ∼ 5시 35분): 생생한 현지 취재와 함께지구촌 가족생활의 지혜와 글로벌 에티켓 등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MBC에서 현재 방영되고 있는 위의 두 프로그램은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는시사·교양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현지 보고- 특파원 통신 과 유사하다. 그러나 현지보고 -특파원 통신 이 국제 뉴스의 심층 취재 보도를 지향하는 것과는 달리 MBC의 프로그램은 비교적 가볍고 흥미 위주의 이야기 거리의 제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2 KBS·‘지구촌 뉴스’ (2TV, 월∼금 오전 11시 ∼11시 20분) : 국제 뉴스, 월드 포커스, 월드 뉴스, 지구촌 영상 등 여러 코너를 통해 국제 뉴스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뉴스프로그램이다.·‘생방송 세계는 지금’(2TV 월∼목 밤 12시 ∼ 12시 30분) : 프로듀서 저널리즘의선언 이라는 목표 아래, 프로듀서가 직접 취재한 뉴스 내용을 전달하고 KBS 월드넷통신원을 활용하여 다양한 뉴스를 제공한다.→KBS의 지구촌 뉴스 는 국제 뉴스를 매일 전달하고 코너의 구성이 현지 보고 - 특파원 통신 과 유사한 점이 있고 매일 방영한다는 점에서 경쟁 가능성이 높은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지구촌 뉴스 는 아나운서가 뉴스 아이템을 전달하는 기존의 뉴스 프로그램형식 그대로 방송하는 것과는 달리 현지 보고 - 특파원 통신 은 정형화된 뉴스 프로그램의 형식에서 벗어나 특파원이 현지 리포트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생방송 세계는 지금 도 내용상으로는 지구촌의 사건을 전달하고 직접 취재한 내용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기획한 프로그램과 일부 유사한 면이 있으나 뉴스의 보도가 아닌 현지르포 및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3. 제작 방법▷ 출연진- 모든 뉴스는 기본적으로 세계 각지에서 직접 취재한 특파원이 전한다. 그러나 각 코너를 매끄럽게 연결할 진행자가 필요하다. 진행자로는 방송인 백지연 씨가 적합할 것으로보인다. 백지연 씨는 다년간의 뉴스 진행 경험을 갖고 있어 시청자에게 신뢰감을 주고, 진행 능력도 뛰어나다. 또, 지명도가 높으며 일반 아나운서의 뉴스 진행 방식과는 다른 독특한 진행 양식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프로그램 진행과 제작 방법·진행자는 스튜디오에서 프로그램 시작에서부터 각 코너의 연결 프로그램 종결까지를 매끄럽게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진행자 멘트는 기존의 뉴스 프로그램과는 달리 친근한 구어체를 사용하여 구성 작가가 작성하며, 진행자는 이를 토대로 스튜디오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자연스럽게 진행한다.·첫 번째 코너 → 기본적으로는 특파원이 취재한 뉴스 내용을 생방송 전에 미리 편집 제작하여 방송하고 뉴스 아이템에 따라 현지 특파원을 연결한다. 전화 연결 또는 위성중계 연결이 가능하고 특별히 중요한 사안이나, 특파원의 직접 해설이 필요할 경우에는 진행자와 대화 형식으로의 진행도 가능하다.·두 번째 코너 → 이 코너는 기획 취재 한 내용이므로, 사전 제작하여 방송한다. 코너를 제작하는 데 상당시간이 소요되므로 방송 일주일 전에는 코너 기획 및 제작을 마치도록 한다.·세 번째 코너 → 단신 뉴스 형식으로 진행한다. 그러나 진행자가 보도하지 않고, 각 국의 특파원이 직접 보도한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해당 국가와 특파원의 이름을 자막으로 명시한다.▷ 프로그램 길이: 프로그램의 전체 길이는 약 30분 정도로 제작한다. 첫 번째 코너 10분,두 번째 코너 15분, 세 번째 코너 5분 정도의 비중으로 구성한다.▷ 필요 인력·각 국 특파원 및 진행자·현지 촬영 스텝 및 스튜디오 촬영 스텝·스튜디오 제작 인력·현지 연결을 위한 기술 인력·구성 작가 및 연출가▷ 제작비·스튜디오 제작비·진행자의 출연료를 비롯한 필요 인력의 임금·스튜디오와 현지를 연결할 때의 통신사 위성 사용비·그 외 기타 촬영 및 제작 운용비▷ 프로그램 제작시 유의할 점- 생방송으로 진행하며, 현지 연결을 해야 하므로 사전에 기술적인 준비를 철저히 해야한다. 또, 내용상으로는 우리 시각을 잃지 않는 보도를 위해 자체 취재의 진행과 다양한 정보와 기획 코너를 전개할 아이템의 개발, 지루하지 않고 시청자들에게 흥미를 유발할 수있는 소재의 발굴 등이 필요하다.4. 프로그램 수용자▷ 편성: 이 프로그램은 매일 세계의 뉴스를 전달하고자 하므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일정 시간대에 편성하는 줄띠 편성의 방법을 사용한다. 또, 뉴스를 시청하고자 하는 수용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시간대에 편성하도록 한다.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해 보았을 때 가장 적절한 시간대는 주요 뉴스 프로그램인 KBS의 뉴스 7(2TV) 과 뉴스 9 (1TV) ,MBC의 뉴스데스크 , SBS의 8시 뉴스 를 전후한 시간대로 대략·7시 30분 ∼ 8시 또는·8시 30분 ∼ 9시에 편성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 시간대는 다양한 시청자의 확보가 가능하며 각 방송사에서 해당 시간대에 경쟁 프로그램을 배치하지 않고 있고, 주요 뉴스와 이어지면서 뉴스를 선호하는 시청자의 흐름을 이어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시청자·프로그램 목표 시청자: 11월 26일부터 12월 2일까지의 시청률 조사 결과(TNS 미디어코리아), 20세 이상의 성인 여성의 시청률 상위 5개 프로그램은 드라마 4편과 연예정보프로그램 1편이었다. 반면, 20세 이상의 성인 남성의 시청률 순위에서는 KBS 뉴스 9가 4위를 차지했다. 이 결과를 통해 뉴스 프로그램의 주요 시청자는 남성이라는 것을알 수 있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의 목표 시청자는 전문적인 뉴스를 원하는 전문 직업인과 평소 뉴스 시청을 많이 하며, 시사적인 부분에 관심이 높은 중년 남성이다.·고려해야 할 시청자: 이 프로그램을 위와 같이 저녁 시간대에 편성한다면, 특정 연령대나 성별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시청자가 시청을 하게된다. 따라서 보다 폭넓고 다
1. 모스끄바 루시와 러시아 정교끼예프 루시 시대 블라지미르 대공이 정교를 수용한 이후, 러시아 정교는 러시아 문화의 근간이자 핵심적 요소로 자리해왔다. 특히 모스끄바 루시 시대는 모스끄바 라는 도시 자체가 수도원으로 묘사 될 만큼 정교 문화가 꽃피웠던 시기였다. 그렇다면 모스끄바 루시의 러시아 정교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모스끄바 제 3 로마설 과 안드레이 루블료프 , 니꼰의 교회개혁 등을 통해 모스끄바 루시 시대의 러시아 정교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2. 몽고 지배하의 러시아 정교속령 러시아 시대에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몽고의 종교 관용정책의 결과이다. 따따르는 가혹한 수단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경제적 수탈을 결행하였지만, 전통적 관습이나 문화는 인정해 주었다. 이는 칸은 동서 문화를 존중했고 어떤 종파라도 성직자들의 기도는 내세의 명복을 위해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방적인 종교정책은 각 종교가 엉켜있는 중앙아시아에서 큰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지배층이 불교도인 퀴췰릭을 정벌할 때, 그는 민중의 대부분이 지배층과는 달리 이슬람교도인 점을 이용해 이슬람 옹호를 선전했다. 민중들은 몽고군을 해방군으로 여길 정도였다.이와 더불어 정교회 주교들은 칸의 요구대로 기도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몽고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보이기는커녕 공후들을 도와 조공납부에 차질이 없도록 인민들을 설득하였다. 이후 교회는 모스끄바를 중심으로 루시 땅이 재통합되는 데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또 몽고족은 유목민으로서 조직화된 체계나 문화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비잔틴의 영향으로 상당한 문화적 수준을 누리고 있던 루시인들에게 문화적인 면에서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몽고의 지배는 러시아의 발전을 서구에 비해 150여 년∼200여 년 더디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는 등 부정적인 측면이 많지만, 한편으로는 모스끄바가 공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정교 문화를 꽃피우는 데 역사적 발판이 되기도 하였다.3. 성스러운 러시아 오, 알레비지오와 같은 이 탈리아의 유명한 건축가들을 모스끄바로 초빙하여 우스펜스끼 사원, 블라고베센스끼 사 원, 아르항겔스끼 사원과 같은 새로운 석조 교회 건물을 끄레믈리 안에 건축하도록 하는 등 모스끄바의 대내외적 기반을 공고히 했다.모스끄바 공국이 16세기를 전후로 성장해 나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콘 스탄티노플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비잔틴 제국이 1453년 오스만 투르크족에게 멸 망당하자, 비잔티움 정신의 정수인 정교의 중심지는 자연스레 콘스탄티노플에서 러시아 의 모스끄바 공국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1472년 이반 3세는 비잔틴 마지막 황제의 조카 딸 소피아와 결혼을 하고, 비잔틴 황실의 문장인 쌍두 독수리를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모스끄바에 비잔틴의 관습을 도입했고 동방 정교의 기독교 세계에서 비잔틴 황제가 누리 던 지도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이반 3세의 아들 바실리 3세(1505-1533)는 러시아를 통치하면서 모스끄바의 지위를 한 층 강화하는데, 이 때 모스끄바 공국의 이데올로기이자 성스러운 러시아 의 종교적 이상 을 반영하는 모스끄바 제 3 로마설 이 등장한다. 이는 대외적으로 비잔틴 제국을 뒤이은 정 교 제국으로서의 입지를 선포하는 것이고 대내적으로는 모스끄바 공국을 중심으로 한 절대 권력의 강화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2 모스끄바 제 3 로마설경건한 황제여, 그대의 왕국 속으로 모든 기독교 제국이 통합되었습니다.두 개의 로마는 이미 멸망하고, 세 번째 로마가 새로이 서 있으니,네 번째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수도사 필로페이가 바실리 3세에게 보내는 서한 中모스끄바 제 3 로마설 은 수도사 필로페이가 1511년 바실리3세에게 보내는 서한을 통해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오직 러시아만이 신의 은총을 받아 역사상에서 정교 국가의 전통을 이어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 필로페이의 주장이었다. 즉, 역사상에 존재했던 첫 번째 로마는 라틴의 이설 속에서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사라졌으며, 기독교의 중심은 그 뒤에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로 1492년 노브고르드의 대주교 겐나디가 제국의 이전에 대한 주장을 「흰 두건 이야기」라는 작품을 통해 피력하였다.모스끄바 제 3 로마설 은 모스끄바를 중심으로 러시아 전체의 절대적인 권력을 강화하려는 대공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모스끄바는 지상의 제국일 뿐 아니라, 천상의 성스러움을 부여받은 신정국가라는 관점이 생겨났다. 모스끄바 제 3 로마설 은 모스끄바를 중심으로 러시아 전체의 절대적인 권력을 강화하려는 대공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명분을 제공하였으며, 성스러운 러시아 를 유지하는 국가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모스끄바는 국가 적인 차원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며 마침내 1589년 모스끄바와 전 러시아를 총괄해온 수좌 대주교가 동방 교회 가운데 다섯번 째로 총 대주교로 격상되면서 러시아 정교회는 공식적으로 완전한 자치 교회의 위상을 갖게 된다.3 창조와 종말, 부활 - 새로운 시간 개념끼예프 루시 시대의 정교 수용시기는 정교 대 이교 의 대립과 이중 신앙 체계가 특징이었다면, 모스끄바 공국 시대에는 종말과 시작 이라는 시간적 관점이 그 특징적 모델이었다. 농사일의 시작과 계절 변화의 리듬에 연관된 동슬라브족의 농경력이 비잔틴 정교의 근간인 율리우스력과 조화를 이루게 됨으로써, 시간의 상(相)은 순환과 회귀만이 아니라 시작과 끝 이라는 발전과 진보의 개념이 러시아인들에게 제시된다. 시작으로서의 창세기와 끝으로서의 종말론의 개념은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나타나는 독특한 선적 시간관이라 할 수 있는데, 정교의 수용 과정을 통해 러시아인들에게 새로운 시간 개념이 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15세기 말, 노브고르드에서 씌여진 「흰 두건 이야기」{) 콘스탄틴 황제가 꿈속에 나타난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도움으로 질병을 치유하게 되자, 그는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교황에게 영적인 권리가 세속적인 권리보다 우월하다는 상징으로 서 흰 두건을 그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그 흰 두건은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노구현{안드레이 루블료프(1360-1430)는 정교와 이교를 아우르는 러시아 민중들의 이중 신앙적인 심성을 반영하는 이콘화를 보여줌으로써, 모스끄바 이콘 화파의 독특한 면모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러시아 민족의 이상을 담아낸 화가로 평가받는다.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정교의 교리를 바탕으로 한 자신의 기독교적 해석을 빛과 색의 자연스러운 드러냄을 통해 러시아적인 이콘의 형상언어를 창조했다. 그는 모스끄바 끄레믈리의 우스펜스키 사원과 모스끄바 성모승천 성당, 세르게이 빠사드의 성 세르게이 삼위일체 사원 등에서 활동했는데, 대천사 미카엘 , 성 바오로 , 성 세례 요한 등과 같은 수많은 이콘과 이코노스타스, 프레스코 작품을 남겼다.그의 작품 중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콘은 성 세르게이 삼위일체 수도원의 우스펜스끼 사원에 보존되다가 지금은 모스끄바의 뜨레쨔콥스끼 미술관에 보관중인 일 것이다. 이 작품은 세 천사가 아브라함의 천막으로 들어와 아들의 출생을 알리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정교에서는 이 세 천사의 방문이 삼위일체라고 간주하며, 따라서 이콘 화가들도 이 세 천사 사이의 전체적 비율과 색채의 상징적 대칭성, 구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여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블료프는 비잔틴의 규범에서 벗어나 밝은 색채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천사들의 위치를 원형 구도로 잡아 삼위 일체의 의미를 가장 잘 구현하고 있다. 그는 삼위일체의 화합과 일체를 재현하기 위해 중앙의 천사를 중심으로 균등한 인물 비례를 도입하여 작품의 구도 속에 나타나는 모든 선들은 전체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 또 천사들의 의상이 나타내는 색의 대비, 짙은 포도주색과 하늘색, 황토색과 하늘색의 대비는 천상과 지상의 대비를 통해 깊은 침묵과 안정된 삼위 일체의 완전함을 제시한다.루블료프적인 이콘의 특징은 길게 확장된 인물의 신체 비율, 다시금 되살아난 헬레니즘적 형식, 부드럽고 섬세한 선의 실루엣, 구성에 나타난 리듬성, 자연스러운 인물들의 몸 동작 을 들 수 있다. 루블료프는 비잔틴자들과 예언자 그리스도 성모, 천사들의 이콘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묘사하여 2,3미터 길이로 늘려 제작하였다. 여기에 자신의 이콘 양식을 도입해 교회 내부공간의 초월성을 더욱 부각시켰다.루블료프 이후에는 그의 제자 디오니스(1480-1502년 활동)로 모스끄바 이콘 화파의 특징이 전수되었다. 디오니스는 루블료프를 계승하면서 성인들의 얼굴에 나타난 심리적인 표현의 완화, 강한 색조의 약화와 빛이 바랜 것과 같은 톤의 사용, 단순한 선의 사용 같은 새로운 특징을 등장시켰다. 모스끄바 이콘 화파의 양식과 규범은 러시아이콘이 비잔틴의 이콘과 변졀적인 차이를 가질 수 있는 전반적인 특징을 마련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것은 비잔틴 정교의 러시아 화와 병행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모스끄바 제 3 로마설 등 비잔틴 정교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러시아 정교의 노력으로 인해 비잔틴 예술의 엄숙한 분위기와는 다른 생동감 있는 러시아 적인 특성을 이콘은 반영 할 수 있었던 것이다.3) 니꼰의 개혁 - 정통과 이단모스끄바 제 3 로마설 로 인해 전 세계의 유일한 정교국가로서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던 러시아 민중들은 보리스 고두노프의 통치와 동란의 시대 를 거치며, 러시아 민중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신앙의 수호자이고 정교에 대한 경건한 신앙심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새로운 자각을 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던 동란의 시대 가 도래한 것은 정교가 순수성을 지키지 못한 이유 때문이므로 정교를 개혁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점차 형성되기 시작하고 있었다.17세기 중반의 러시아 사회는 극도로 혼탁하고 도박과 음주, 격투와 욕설이 난무하는 무질서한 사회였고 수도승인 흑승들의 도덕적 타락만이 아니라 결혼을 하는 사제 계급들의 생활도 일반농민들과 거의 차이가 없어 사제들은 아무런 존경심도 받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17세기 중반 정교의 열성적인 경건주의자 들은 정교회 전체의 쇄신과 개혁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총대주교에게 보내기도 했으며, 정신적이며
기이(奇異)한 다케시(武)의 사무라이일본의 막부 시대는 사무라이의 시대였다. 그리고 일본 영화에서 사무라이는 자주 등장하는 영화적 소재이다. 일명 시대극(時代劇) 이라 불리 우는 일련의 영화들은 사무라이들이 대거 등장하여 서로 결투를 벌이는 장면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헐리웃에서도 사무라이라는 소재를 차용해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사무라이는 무협 소설에나 등장함직한 검객의 이미지로 다가와 화려한 검술 이라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자토이치』의 사무라이는 다르다. 맹인 검객이라는 자토이치 는 일본에서 드라마 시리즈로 제작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소재이고, 그만큼 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는 독특한 방식으로 고리타분한 소재를 변주해 낸다.사무라이는 일본의 중세, 막부 시대 때부터 발전된 독특한 사회계층이다. 대부분의 동아시아 유교문화권 국가들은 전근대 시대에 사(士),농(農),공(工),상(商) 그리고 천민으로 나뉘는 계급질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나 중국 등지에서 지배 계급인 사(士)가 선비였던 것과는 달리 일본의 근세의 지배 계층(士)은 무사 즉, 사무라이였다. 사무라이라는 사회 계층은 일본의 독특한 정서를 보여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무라이 계층의 특징 중 하나는 주군에 대한 끝없는 충성과 복종, 격식, 규율, 절제, 검약의 미덕 등 이른바 무사도(武士道) 라는 도덕적 덕목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일본의 이해』pp132∼133, 일본학교육협의회 엮음, 2002, 태학사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사무라이 영화는 억제된 감정묘사와 함께 비장미가 흐르게 마련이고, 개인의 사리사욕보다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주군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강인한 이미지의 사무라이가 그려진다. 그렇다면 『자토이치』의 사무라이는 어떠한가?한적한 길 노란 머리, 힘없는 걸음걸이, 무표정한 얼굴의 그가 다가온다. 지팡이를 짚고 타박타박 길을 걷는 그의 모습에서 강인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초라한 행색의 맹인일 뿐이다. 영화를 보기 전 갖고 있던 맹인검객, 혹은 카리스마 넘치는 무사의 이미지는 첫 등장부터 무너진다. 그가 칼을 뽑아 숨겨진 검술을 펼치기 전까지는, 그가 늘 짚고 다니던 것이 지팡이가 아니라 칼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힘들 정도다.자토이치 는 떠돌아다니는 맹인 검객으로 악한 무리들과 싸운다. 하지만 싸움은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다. 어떠한 권력자를 위해 봉사하는 것도, 누군가의 복수를 위한 것도 아닌 싸움에는 오직 악한 자를 해치워야 한다는 목적이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무사 하토리 역시 마을의 세력가 밑에서 칼잡이로 일하긴 하지만, 세력자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 아니라 아내의 병을 치료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칼을 휘두른다. 또한 마을 사람들을 착취하는 악덕 영주인 동시에 게이샤 자매의 원수인 긴조라는 인물 역시 사무라이 정신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자신의 세력을 넓히는 욕구에 충실하다. 이처럼 영화『자토이치』에 등장하는 인물 중 어느 누구도 사무라이다운 충성심이나 복종의 미덕을 보여주지 않는다. 누군가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가족을 위해 싸우는 그들. 『자토이치』는 기존에 갖고 있던 사무라이의 이미지를 무너뜨린 기이한 사무라이 영화다.틀을 벗는 영상의 미학『자토이치』의 특이성은 비단 접근 방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카메라의 구도, 컷의 연결, 촬영 기법 역시 공식처럼 여겨지는 헐리웃의 촬영 문법에서 벗어난다. 그것이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카메라는 어떤 형식도 없이 자유롭다. 예컨대 두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의 경우, 두 인물의 투 샷(two shot)을 보여준 후 각 인물의 클로즈업(close up)으로 연결되는 것이 일반적인 화면 연결법 이다. 그러나『자토이치』에서는 두 명의 대화장면에서도 클로즈업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때로는 두 인물 중 한 사람의 뒷모습이 보이는 구도를 취하기도 하고, 두 인물을 나란히 앉힌 채로 카메라를 바라보게 만들기도 한다. 뒷모습처럼 인물정보가 부족한 피사체는 되도록 보여주지 않으며, 카메라를 절대 정면 응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불문율인 헐리웃의 촬영 기법에 비교해보았을 때 『자토이치』는 이러한 틀을 모두 벗어 던진 것처럼 보인다.롱 테이크(long take)가 주로 쓰인 것도 화려한 헐리웃 액션 영화와 차별화 된다. 대부분의 액션 영화나 무협 영화의 경우, 보다 화려한 액션 씬(scene)과 긴장감 유발을 위해 현란한 카메라 기법, 빠른 컷 편집을 사용한다. 하지만『자토이치』는 오히려 긴 화면 호흡을 유지한다. 카메라는 움직임 없이 고정되어 있다가, 인물들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면 다시 그 인물을 천천히 쫓아가는데 이러한 카메라 움직임은 정(靜)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그래서 자토이치 의 검술은 박진감 넘치는 액션이라기 보다는 우아한 춤사위처럼 보인다. 감독은 제한적인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밖으로 내지르는 것이 아닌 절제의 미학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이것은 정갈하고 깔끔한 맛의 일본 음식을 연상케 한다.한편, 블랙으로 페이드 아웃(fade out) 되었다가 다시 페이드 인(fade in) 되는 연결방식도 눈에 띤다. 페이드 인/아웃은 블랙 화면의 삽입으로 극의 흐름을 방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자주 사용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 자토이치의 행적을 쫓아 극에 몰입할 즈음 완전히 페이드 아웃된 후, 게이샤 자매의 이야기나 하토리의 이야기로 이어져 본래 스토리에서 벗어난 전개가 펼쳐진다. 예를 들어 자토이치가 게이샤 자매의 사연을 듣고 복수를 위해 싸우는 내용이 펼쳐질 것이라고 예상했을 때에는 갑자기 신키치 라는 우스꽝스러운 인물이 등장해 한바탕 폭소를 자아낸다. 이렇게 영화는 등장 인물 중 어느 누구에게 편중되지도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내용에 완전히 몰입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신키치가 아이들과 검술 연습을 한다며 나서다가 목검으로 두들겨 맞는 장면이나, 혼자서 눈을 감고 도박 연습을 하는 장면은 영화의 내용전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에피소드다. 이렇게 기타노 다케시는 카메라 기법과 내용을 전개하는 방식 모두 종횡무진, 자신의 스타일로 일관한다.잔인함과 폭소의 아이러니『자토이치』는 기존 영상문법의 틀을 벗어나 자유분방한 세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검객의 이야기를 다룬 무협 영화 내지 액션 영화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다소 정(靜)적인 카메라 기법과 기본 줄거리와 관계없는 에피소드의 삽입은 재미를 반감시키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오히려 자극적이고 유머러스한 이미지로 다가온다.『자토이치』의 결투 장면은 매우 잔인하다. 칼에 벤 사람의 몸에서 피가 솟구치고, 손가락이 잘려 나뒹군다. 선명한 핏자국은 영화 곳곳에 베어있다. 특히 자토이치가 비를 맞으며 혼자서 적을 무찌르는 장면은 피가 흘러 비와 함께 퍼져나가는 모습이 선명한 이미지로 뇌리에 남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저 피가 낭자한 사무라이 영화가 아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케시의 힘이 느껴진다. 그는 이러한 잔인함 속에서도 관객을 웃게 만든다. 위에서 언급한 신키치의 활약은 물론이고, 도박장에서 긴조의 무리들을 해치우고 도망쳐 나오기 위해 가짜 눈을 그려 넣는 장면은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맹인 검객에게 남아있던 일말의 경외심도 사라지게 만든다.선홍색 핏빛으로 물든 화면이 영상을 파격적으로 만들었다면, 리드미컬한 묘사와 음악은 영화에 동(動)적인 느낌을 불어넣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초반부의 농부들이 밭을 일구는 장면이나 화재가 난 집을 수리하는 목수들의 모습 그리고 게이샤 자매가 춤 연습을 하는 장면은 음악의 리듬에 꼭 맞는 율동으로 그려진다. 이 같은 음악적 효과는 소리로 모든 것을 파악하는 맹인검객 의 이미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든다. 특히 엔딩 장면에서 전통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단체로 추는 탭 댄스는 검객들의 이야기도 신나게 한바탕 춤을 추는 모습을 본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듯 하다.결정적으로 이 영화의 아이러니는 주인공 자토이치 에 있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자토이치의 비밀은 그가 장님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장님이 아닌 맹인검객 이라니, 이것보다 더한 아이러니는 없을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장님인 척 했던 이유는 무엇이냐고 묻자 자토이치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이러니 내가 장님 소리를 듣지. 라고 끝을 맺는다.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는 자토이치의 태도는 이 영화의 묘미다. 감독은 자토이치가 맹인이든 아니든 화려한 검술을 보여주었고 재미있었으면 그 뿐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어차피 영화는 처음부터 자토이치가 어디에서 왔는지 왜 긴조 일당들을 죽이는지, 그리고 적을 해치운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보여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감독의 다른 작품『기쿠지로의 여름』에서 두 주인공의 여행이 마치 현실에서 벗어난 꿈과 같이 그려졌던 것처럼, 비장해 보였던 자토이치의 이야기도 결국 허구에 불과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