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무덤의 변천사1) 머리말 / 개요현대에 고고학자들이나 도굴꾼들이 너나할 것 없이 왜 그렇게 고분 발굴에 나설까? 그것은 무덤 속에서 고이 잠들어 있는 부장품들 때문이다. 그것들이 고고 학자들에게는 당시 사회를 알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되고, 도굴꾼들에게는 부를 가져다 주는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무덤이 중요한 것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꺼림칙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무덤은 역사의 중요한 보고다. 무덤을 통해서 우리는 옛 사람의 생활 양식이나 습관 등, 말하자면 우리 조상들의 역사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우리는 고대시대 부터의 우리 나라 무덤들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2) 우리나라의 무덤과 최초의 흔적우리 나라의 산에서는 쉽게 무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계속 이 상태로 나가다가는 전 국토가 무덤으로 변할 것이라는 우려 높은 전망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공원 묘지를 이용하거나 최근들어 화장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돈 있고 권세 있는 사람들의 묘 자리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현재 발굴되어 있는 고분들을 보면 ‘인력도 기술도 장비도 별로 없던 그 시대에 어떻게 이런 무덤을 만들었을까?’라는 감탄을 절로 자아내게 하는 무덤들은 대부분 그 시대 지배 계급의 무덤이었다. 요즘도 마찬가지로 고위 공직자나 대재벌의 묘 자리가 너무나 크고 화려해서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일이 쉽사리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저 먼 과거의 무덤은 후세에 한 가지 큰 공헌을 했다. 당시 시대를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기상변화와 일제시대 때 도굴꾼들에 의한 무자비한 도굴로 없어지고 변형되어 버린 당시 삶의 흔적을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보여 주는 것이 바로 무덤이다. 무덤의 형식과 무덤 속에서 출토되는 )껴묻거리는 문화의 전파방향, 민족의 계통, 권력의 성장 정도 등을 잘 보여 준다. 이 정도면 무덤의 공헌도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 시체를 묻는 시설물을 말한다. 사람은 죽은 지 몇일이 지나면 썩기 시작하므로 어떤 방법으로든 그것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덤은 죽은 사람의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으로 숲 속에 내다 버리는 풍장(風葬), 강이나 호수, 바다에 던지는 수장, 불에 태우는 화장등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것은 역시 땅에 묻는 것이다. 무덤은 또한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기념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인간이 동물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시기에는 단순히 사체(死體) 처리의 한 방법으로 무덤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차츰 인간적 지성과 감성이 열리게 되면서, 시체 처리에 어떤 기념적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언제부터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람이 인위적으로 시체를 묻은 흔적은 약 7, 8만년 전 중기 구석기 시대부터 나타나고 있다. 후기 구석기 시대가 되면 생명의 부활을 바라는 뜻에서 붉은 산화철을 시체위에 뿌리기도 했다. 무덤 중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시체를 땅 위에 놓고 돌로 덮어 버리는 돌무지 무덤과 구덩이를 파고 흙으로 덮는 구덩 무덤이다. 그러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 위에 둥글게 흙을 쌓는 봉토가 생겨났다. 일반 서민의 무덤은 시대를 막론하고 구덩 무덤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지배층은 생전의 권력을 과시하고 그 영화를 다음 세상까지 연장시키기 위해 크고 복잡한 무덤을 만들었다. 그리고 무덤 속에서는 많은 껴묻거리들을 함께 넣었다. 그래서 이들 지배층의 무덤은 그 시대의 신앙, 사상뿐 아니라 물질 문화의 최고 수준을 보여 준다. 이러한 세력자의 무덤에는 다음 세상에서도 주인에게 봉사하도록 아랫사람을 딸려 묻는 경우가 많았다.3)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무덤 고인돌우리 나라 무덤은 신석기 시대부터 나타난다. 하지만 무덤의 형식이 다양해지고 껴묻거리도 풍부해지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 시대부터이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는 고인돌을 꼽을 수 있다. 우리 나라 고인돌은 그 모양에 따라 남방식, 북방식, 변형 고인돌로 작게 되어 있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세골(洗骨)장을 한 것 같다. 이러한 남방식은 전라도, 경상도 등 주로 한강 이남 지역에 분포한다. 개석식으로 불리는 변형 고인돌은 남방식과 흡사하다. 매장 시설은 지하에 있고 지표에는 큰 돌을 올려 놓은 양식이다. 단지 남방식에 있는 받침돌이 없다는 것뿐이다. 이러한 변형 고인돌은 우리 나라 전역에 고루 분포한다. 남방돌과 변형 고인돌의 껴묻거리로서는 화살촉과 돌검이 주류를 이루고, 그 밖에 돌도끼, 가락바퀴, 민무늬 토기, 극소수의 청동기가 출토된다. 탁자식이라고 불리는 북방식은 네 개의 판석을 세워서 평면이 장방형인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 뚜껑돌을 올려 놓은 것이다. 돌방 내부 바닥에는 자갈이나 판석을 깔기도 하나 그냥 맨땅으로 두는 것이 보통이다. 뚜껑돌 크기는 보통 2-4미터지만, 황해도 은율의 고인돌처럼 8미터 이상인 것도 있다. 북방식은 주로 한강 이북에 분포하는데, 서해안을 따라 전북 고창 지방까지 나타난다. 북방식은 돌방이 지상에 있어 도굴이 쉬운 관계로 껴묻거리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면 고인돌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받침돌 위에 올려져 있는 거대한 뚜껑돌을 보노라면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강화도 부근리의 고인돌은 그 뚜껑돌의 무게만 해도 약 40톤이나 나간다. 이런 큰 돌을 움직이려면 힘센 장정 500명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런 고인돌에 묻힐 수 있는 사람은 힘센 장정 500명 이상을 거느릴 수 있는 지배층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당시 일반 사람들은 구덩 무덤에 묻히거나 막돌로 시신을 덮는 정도였다. 청동기 시대 후기, 초기 철기 시대가 되면 널무덤과 독무덤, 돌덧널 무덤 등이 많이 만들어졌다. 널무덤은 대체로 깊이 1미터 너비 1미터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나무널에 넣어 묻는 무덤 형식이다. 여기서 출토되는 동검이나 구리 거울 등으로 보아, 지배층의 무덤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독무덤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매장 방법으로, 우리 나라의 독무덤들은 민무늬 토기 제작 무덤이 중국에서 들어와 남한 지역으로 퍼졌고, 삼한 시대에는 돌덧널 무덤이 유행하였다.4) 삼국시대의 고분삼국 시대를 가리켜 고분 시대라 부를 정도로, 삼국과 가야의 중심지에는 거대한 고분군이 쉽게 발견된다. 이들 고분들은 내부에 벽화가 그려져 있기도 하고 각종 금은 세공품의 세련된 껴묻거리가 무더기로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벽화 무덤은 왜 고구려, 백제 고분을 중심으로 많이 나타나고, 신라 고분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일까? 이와 같은 의문을 풀기 위해 고구려, 백제, 신라의 고분이 갖는 공통점은 무엇이며, 또 각각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고구려 본래의 무덤은 돌무지 무덤이었다. 처음에 고구려인들은 강변의 모래 위에 냇돌을 깔고 널을 놓은 뒤 다시 냇돌을 쌓았다. 그러다 2-3세기 이후부터는 강변에서 산기슭으로 옮겨가고, 돌도 산에서 캐낸 모난 산돌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돌무지 무덤이 더욱 발전하면, 내부에 돌방이 생기는 돌방 돌무지 무덤이 된다. 통구에 있는 장군총 등 거대한 피라미드형 무덤은 이러한 돌무지 무덤이 가장 잘 정비되고 발달한 것이다. 장군총은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쌓은 7단의 계단식 돌무지 무덤으로, 높이가 13미터에 이른다. )널방은 제4층에 서남향으로 마련되어 있다. 널방 안에는 널을 놓는 받침대가 둘 있고 그 앞으로 )널길이 있다. 고구려의 돌무지 무덤은 5세기 초까지 계속 만들어지지만, 장군총처럼 크기가 커지면서 점점 만들기가 힘들어졌다. 거기다 고분 내부를 벽화로 장식하는 것이 유행하게 되면서 거기에 알맞게 굴식 동방을 갖춘 봉토분으로 바뀌어 갔다. 그런데 굴식 돌방무덤은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래서 현재 고구려 고분의 내부는 벽화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주의할 것은 굴식 돌방 무덤이라고 해서 반드시 벽화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백제의 고분은 고구려의 후손답게 고구려의 고분 양식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며 발전하였다. 서울 석촌동에 있는 초기 백제 고분은 마치 만주의 고구려 고분을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무덤이 바로 공주 무령왕릉이다. 한편, 통일 전 신라의 고분 중 왕릉으로 보이는 거대한 봉토분들은 대개 돌무지 덧널 무덤이다. 쉽게 말하면, 땅 위에 단을 쌓고 덧널을 안치한 후 그 위에 사람 머리 크기만한 냇돌을 두껍게 쌓아 올린 다음, 표면을 봉토로 덮은 것이다. 이들 돌무지 덧널 무덤은 시간이 지나면 덧널이 썩으면서 냇돌이 내려앉는다. 그래서 내부의 금관 등 껴묻거리가 납작하게 눌리기는 해도 돌방 무덤과 달리 도굴이 어렵다. 그래서 이런 형식의 무덤은 많은 껴묻거리를 남기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야의 고분은 대개 장방형 돌방 무덤이다. 삼국의 고분이 주로 평지나 산을 등지고 평지를 바라보는 곳에 축조된 것과 달리, 가야의 고분은 산마루의 능선을 따라 한줄로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 무덤들은 대개 원형 봉토분이지만, 간혹 일본이 그들만의 독특한 무덤 양식으로 내세우는 전방 )후원분도 섞여 있다. 이 무덤들에서도 토기, 철검, 옥제 장신구, 금제 장신구, 마구 등 다양한 껴묻거리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각기 특색을 자랑하면서 중앙 집권 국가의 강력한 왕권을 상징이라도 하듯 도읍의 주위에 우뚝우뚝 세워지던 고분들은 통일 신라 시대 이후 많은 변화를 보인다. 우선 고구려, 백제 문화의 영향으로 굴식 돌방 무덤이 주류를 이루나, 무덤의 크기는 점점 작아지고 껴묻거리도 줄어든다. 그리고 풍수 지리 사상의 영향으로 고분들이 평지를 떠나 산기슭이 이른바 명당으로 지목되는 곳에 몰리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시신의 머리를 누이는 방향도 동쪽을 향해 머리는 누이던 이전과는 달리 북쪽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중국의 천자능을 본떠 네 귀에 돌사자상을 세우고 귀부와 이수를 갖춘 능비와 )문무 석인 등을 배치하였다. 이와 함께 봉토 둘레에 십이지(十二支) 신상을 병풍석으로 돌리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중국에 없던 우리 나라의 독특한 형식이다. 또한 불교식 화장묘가 유행하여 화장한 뼈를 담았던 골호가 각지에서 많이 출토된다. 요컨대 통일 신이다.
R E P O R T【부여의 건국 신화】『‘ ’』강 의 :교 수 : 교수님학 과 :학번 / 성명 :보고서 제출일 : 2007부여의 건국 신화와 해모수1) 문제제기 / 역사적 의의지금 선양 랴오닝성 박물관에서 ‘요하문명전’ 이 한창 열리고 있다고 한다. 이 전시는 동양사, 더 나아가서는 세계사에 대한 새로운 정립을 하겠다는 중국 정부의 계획이다. 이는 ‘요하문명’ 이 세계적인 문명 발상지임을 세계에 알리려는 것이다. 이는 요서와 요동 전체를 포괄하는 ‘요하문명 공정’ 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인데, 이 전시에는 부여(B.C 3세기 - A.D 5세기)와 고구려는 물론이거니와 삼연(북연, 전연, 남연)의 유물이 주제 아래 전시되고 있다. 부여를 소개하는 코너에서는 ‘부여는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이른 시기에 국가를 세운 소수 민족의 하나’ 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중국은 랴오닝성에서 출토된 유물을 ‘초기 철기시대 것’ 이라고 소개해 왔으나 이번 전시부터는 ‘중국에 속한 부여’ 유물이라고 처음으로 밝혔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는 요하문명의 굳건한 바탕 위에 중국 문명을 접목하며 역사를 형성하여 왔다. 이 지역에서는 우리 말고도 타민족들의 영웅 호걸이 등장해 여러 제국을 건설하였지만 모두 중국의 역사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러나 고구려는 한때 요하문명의 ‘패자(覇者)’ 로 비록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으로 멸망하였지만, 그 열정적이고 패기넘치는 정신과 예술은 지금까지 맥맥히 살아남아, 세계적으로 독창적인 문화를 형성하도록 활력소를 제공해준 유일한 문화국가였다. 이 고구려 역시 부여의 혈통이거니와 부여 -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 통일신라 - 고려 - 조선 - 한국이라는 전승관계를 통해 우리 민족이 요하문명의 완성자임을 알아야 하고, 중국의 잘못된 동북공정을 바로잡아야 하겠다. 현재 우리 나라 국사 교과서건 역사책이건 부여에 대한 언급은 불과 몇 줄에 불과하다. 하지만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의 혈통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역사적 의의는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부여는 일찍이 철기 문명을 가진 부족이 송화강 유역에 있던 토착 세력과 연합하여 세운 국가이고, 고조선과 같이 건국 신화가 있어 건국과정을 신비화 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구려와 백제의 혈통과 연결되어 있는 중요한 고대 국가인 부여의 건국 신화와 해모수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2) 초기 철기 시대우리 나라를 포함한 동북 아시아 지역에서 신석기 문화가 시작된 것은 B.C. 6000년경이었다. 당시 이곳에 거주하던 민족은 고(古)아시아 족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정착한 지 대략 5,000년이 지난 B.C. 10세기를 전후하여 청동기 문화를 가진 민족이 들어왔다. 이 민족이 바로 예맥족이다. 이들이 선주민들을 흡수, 통합하는 과정은 바로 우리 민족이 형성되는 과정이다. 예맥족의 청동기 문화는 한반도와 요령, 길림 등지에서 나타난다. 옛 기록을 보면 예맥족을 ‘예’와 ‘맥’으로 나눈 것이 있는데, 이것은 지역의 차이에 의해 나누었을 뿐이고 원래는 동일한 민족이다. 맥족은 주로 지금의 중국 산동, 요동과 한반도 일부에서 살았다. B.C. 5세기경 송화강 유역에 부여가 건국된다. 부여는 청동기 시대에 세워졌던 고조선과 달리 철기 문명을 가진 부족이 건설한 나라이다. 부여 역시 고조선의 단군 신화와 마찬가지로 그 나라의 건국 신화를 가지고 있다. 부여의 형성 과정을 해모수 신화를 통해 알아 보자.3) 해모수 신화고조선의 건국 신화인「단군 신화」는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오던 시기에 나타난 국가의 형성 과정을 기술한 것이다. 부여는 고조선보다 뒤에 건국되었다. 그러므로 부여가 형성된 무렵은 앞 시대에 비하여 문화 수준이나 생활 양식이 상당히 발달했을 것이다. 부여의 건국 신화를 단군 신화와 비교해 보면 부여의 당시 상황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려 후기 충렬왕 7년(1281)에 고승 일연(一然, 1206∼1289)이 편찬한 역사서「삼국유사」에 실린 것을 보면, 한나라 선제 3년 임술 4월 8일에 하느님이 흘승골성에 내려왔다. 이 때 다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왔다. 도읍을 세우고 스스로를 왕이라 일컬었으며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 하였다. 자기 이름은 해모수라고 하였다.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부루라 하고 성씨를 ‘해’라고 하였다. 그 뒤 하느님의 명을 따라 도읍을 동부여로 옮겼다. 동명제(東明帝) 가 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 졸본주에 도읍을 정하여 나라 이름을 졸본 부여라고 하니 곧 고구려의 시조였다. 그 다음으로「세종 실록」제 154 지리지 ‘평안도 평양’조에 실린 부여의 건국 신화이다. 천체가 태자 해모수를 보내어 부여 고도에 내리어 놀게 하였다.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다섯 마리 용이 이끄는 마차를 타고 시종 백여 명은 흰 고니를 탔다. 오색 구름이 그 위에 떠있고 음악 소리가 구름 속에서 울려 나왔다. 웅심산에 머물러서 열흘을 지내고 난 다음에 비로소 땅으로 내려왔다. 머리에 까마귀 깃털의 관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을 찼는데, 아침이면 땅에서 일을 보고 저녁이면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에서 이르기를 ‘천왕랑’이라고 하였다. 위의 건국 신화를 토대로 부여가 탄생한 과정을 알아보면, 먼저 천체가 태자 해모수를 부여에 내려가 놀게 하였다는 것은 하늘의 신들이 땅으로 내려온다는 것은 북방계 신화가 가지는 특징이다. 이것은 철기 문명을 가진 북방계 민족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하늘의 신성함과 그 위력을 내세우며 지배력을 장악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해모수는 ‘해 모습’, 즉 태양신을 의미한다. 태양은 포용력 있고 포괄적인 하늘보다 더 강렬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을 의미하는 환웅보다 태양을 의미하는 해모수가 보다 강력한 존재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면, 그의 행렬은 아주 화려하다. 그는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그의 시종들은 흰고니를 타고 온다. 더구나 오색 구름이 그 위에 떠 있고, 음악 소리가 구름 속에서 울려 나온다. 이것은 환웅이 바람, 구름, 비의 신과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에 내려온 것과 비슷하다. 해모수는 웅심산에 머물러서 열흘을 지내고 난 다음에 비로소 땅으로 내려왔다. 여기서 웅심산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보자. 하필이면 왜 웅심산일까? 웅이란 곰을 의미한다. 단군 신화에도 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단군 신화에 나오는 곰은 인간이 되어 환웅과 결혼하였다. 이것은 곰 토템을 가진 부족이 환웅 부족과 연합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해모수가 웅심산에 머물렀다는 것은, 철기 문명을 지닌 해모수가 북방으로부터 내려와 곰 토템을 가진 부족과 연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해모수는 하늘에서 땅으로 곧장 내려오지 않았다. 왜 그는 웅심산에서 열흘간 머물렀을까? 이것은 해모수가 부여를 세울 때, 그곳에 있던 곰 부족과는 쉽게 연합을 이루었으나, 다른 토착 부족과는 일정 기간 대립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고작 10일 이었다. 이것은 단군이 고조선을 세우기까지 2대가 걸렸지만 부여의 건국 신화에는 해모수가 열흘 만에 땅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지상에 내려왔다는 것은 곧 나라의 건국을 의미한다. 부여 시대에는 그 만큼 민족의 이동과 나라의 건국이 빠르고 의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 해모수가 다섯 마리 용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까마귀의 깃털로 장식한 오우관을 쓰고, 용광검이라는 신기한 칼을 찼다는 부분은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예로부터 까마귀는 신의 전령이라 하여 신성한 새로 간주되어 왔다. 특히 세 개의 다리를 가진 까마귀는 태양을 상징한다. 해모수가 까마귀의 깃털로 장식한 관을 쓰고 있었다는 것은 태양신으로서의 권위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용광검이라는 칼을 가졌음은 태양신인 해모수의 정치적 권위와 군사적 힘이 강력했음을 뒷받침해 준다. 즉 해모수는 강력한 정치력과 군사력으로 부여를 세웠던 것이다. 다시 단군신화를 보면 고조선의 건국 과정은 상당히 자연스럽다. 곰과 호랑이 부족과 환웅 부족 사이에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곰과 호랑이가 환웅을 찾아와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간청할 정도였다. 환웅은 결코 무력으로 이들을 정복하지 않았고, 이들을 받아들이는 데도 신중하였다. 쑥과 마늘 그리고 동굴의 생활을 시험함으로써 문화적 동화 가능성을 알아본 것이다.
R E P O R T【태평 천국 운동의 성장과 붕괴】『‘ ’』강 의 :교 수 : 교수님학 과 :학번 / 성명 :보고서 제출일 : 2006태평 천국 운동의 성장과 붕괴1) 태평 천국 운동의 배경청(淸)나라 말기 홍수전(洪秀全)과 농민반란군이 세워 14년간 존속한 국가(1851∼1864)와 그 운동을 말한다. 청나라에서는 이들이 변발을 자르고 머리를 길렀으므로 장발적(長髮賊), 월비(豆匪) 등으로 불렀다. 일반적인 배경으로는 한 나라 왕조의 말기 현상, 중앙과 지방의 행정 구도 변화, 관료들의 부패, 지주제 등 경제적 모순의 심화, 자연재해의 빈발 등과 이로 말미암은 보편적인 사회적 무질서 현상을 들 수 있다. 특히 청 말기에는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경작 면적이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태평 천국 운동의 진원지인 광시 성[廣西省]은 이런 일반적 현상을 내포하고 있었다. 더욱이 지리적 특성 때문에 종족적·사회적·경제적으로 더욱 복잡했고 아편 전쟁의 결과 1842년 난징 조약이 체결되면서 중국 경제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상품 시장에 편입되었다. 1844년부터 영국의 근대화된 방직 공장에서 생산되는 면포 등 값싼 공산품의 수입이 급증하게 되어, 중국의 소농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던 토착 수공업 중의 하나인 방직 공업은 타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거액의 전쟁 배상금은 중국의 농촌을 파탄으로 몰고 갔고, 급증하는 아편의 수입은 은의 해외유출로 은가(銀價)가 등귀함으로써, 농민의 피폐를 가중시켰다. 국제 수지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 청조(淸朝)는 농민으로부터 여러 가지 명목으로 한층 더 무거운 세금을 징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적 부담은 주로 생산성이 높은 양쯔강 유역과 그 이남 지역에 집중적으로 지워졌기 때문에 이 지역 주민들의 불만은 한층 가중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때에 가장 오래 된 개항지인 광둥 지방에서는, 이질적인 외국문화의 토착 문화의 혼돈 상태하에서 반청 민족주의와 크리스트교 신앙이 결부된 태평 천국(太平天며 글공부에만 전념했다. 홍수전은 7세에 서당에 들어가 글공부를 하였고, 15세 때 처음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예비 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본 시험에서는 낙방하였다. 이후 그는 마을 서당의 훈장으로 있으면서 평생 동안 네 번에 걸쳐 과거에 응시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만다. 이 후 그는 관료가 되기 위한 길을 포기하게 되지만, 이 네 번의 과거 준비 기간 중에 두 번의 중대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첫 번째는 그가 세 번째 과거를 보기 위해 광주(廣州)에 머물러 있던 1836년, 한 중국인 기독교 신자에게『권세양언』이란 책을 얻고 나서 일어났다. 한문으로 쓰여진 이 책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계명을 지키며 마귀에게 예배하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는 일종의 기독교 전도서였다. 그러나 처음에 홍수전은 이 책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데 1837년 그는 과거에 실패하고 열병에 걸려 죽을 뻔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 홍수전은 과거가 열렸던 광주에서 돌아와 수일 동안 고열과 함께 일종의 정신 착란상태에 빠졌는데, 가족들은 그가 죽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였고, 조리 없는 말을 해대는가 하면 발작 증세도 일으켰다. 과거에서 낙방한 굴욕감과 가족을 실망시켰다는 생각이 그에게 신경 과민과 함께 신경 쇠약 증세를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40여 일간 열병을 앓은 후 기적적으로 완쾌되었는데, 이후 그는 몸놀림이나 말씨 등에서 이전과 현저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의 행동은 신중하고 대범해졌고, 태도는 친절하고 활발하게 바뀌었다. 홍주전은 앓아 누워 있던 이 기간 중에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고 말하곤 하였다. 『“너는 하늘에 올라가 훌륭한 궁전에서 금발 머리에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은 전 세계 인류를 자신이 낳고 키웠는데도 어느 누구 하나 자신을 생각하지 못한 채 악마를 숭배하고 있다고 한탄하면서, 나에게 속세의 마귀들을 쫓아 버리고 형제, 자매들을 구제하라고 말했다. 또 키가 장승처럼 큰 선비 한 사람이 나타나 자고, 그를 서당 훈장 자리에서 쫓아내었다. 일자리를 잃은 홍수전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 풍운산과 함께 고향 마을을 떠나 광서성의 남동부로 들어갔다. 이 곳에서 그는 빈민들을 상대로 교리를 전파하여, 1844년 자형산(紫荊山) 을 근거로 새 신앙의 신도 조직인 상제회(上帝會) 를 조직하였다. 상제는 하느님을 뜻하는 것으로, 이 조직이 바로 후에 태평 천국 운동의 핵심 단체가 되었던 것이다. 홍수전은 스스로를 하느님 여호와의 둘째 아들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이라고 자처하며, 지상에 내려와 요귀를 물리치고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러 왔다고 설교하며 세력을 급속히 확장시켰다. 그는 크리스트교와 예부터 중국에 전승되어 오던 )대동(大同) 사상을 결부시켜 독자적인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었다. 상제회에는 천시당하던 객가 출신의 가난한 농민과 산중에서 숯을 굽는 막벌이꾼, 광산 노동자, 상하이 개항으로 광둥으로부터의 물자 수송이 적어져 실직당한 수송 인부 등이 많이 가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학식과 재산이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관료나 지주들에게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공자 상을 파괴함으로써 지방의 유력 계층인 향신층과 대립하기 시작하였다.3) 태평 천국의 성장상제회에 대한 감시가 삼엄해지고 이를 탄압하면 할수록 신도들의 단결 의식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1850년 7월, 홍수전은 상제회 신도들에게 광서성 계평현 금전촌에 집결하도록 명했다. 상제회가 관군과 무력으로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고 판단한 홍수전은 적극적인 반정부 군사 행동을 결심한 것이었다. 이때 모인 신도들은 재산의 공유제를 확립하였다. 즉, 신도들은 집, 토지, 기타 재산 일체를 팔아 얻은 돈이나 현물을 성고하고 불리우는 공동의 창고에 납부하고, 여기에서 똑같이 평등하게 옷과 식량 등을 지급받았던 것이다. 이를 통해 상제회는 특수하게 상제를 숭상하는 신도의 종교적 집단이라는 틀을 넘어서 하층 민중, 특히 극빈 농민과 유랑민을 포섭하는 군사적, 정치적 집단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1851년 1월 1다. 이를 통해 태평 천국의 지도부는 하층 출신과 지주 출신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위창휘나 석달개와 같은 지식층이 태평 천국의 체재 정비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도 결국은 청조 지배하에서 정상적인 출세의 길이 막힌 불평 세력으로, 당시 지배 세력에 대립되는 계층이었음을 파악해야 한다. 태평 천국은 만주족의 청조가 한족(韓族)에게 변발을 강요한데 대한 반항의 의미로, 태평 천국은 신도들에게 머리를 기르도록 하였다. 그래서 청조를 비롯한 상제회 신도 외의 사람들은 이들을 장발족이라 불렀고, 서양 사람들은 이들을 태평군이라 불렀다. 이들의 긴 머리는 신도의 탈주를 방지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정식 국가를 선포한 태평 천국군은 1852년 관군의 엄중한 포위를 돌파, 북상하여 악주를 함락하고, 호북성의 성도이며 전략적 요충지인 무창을 점령하였다. 종교적인 정열에 불타는 매우 용감한 신도들이었지만, 군사 지식이 없었고 특히 대포와 같은 화기 취급에 서툴렀기 때문에 대포로 무장한 청군의 성을 공략할 때, 남왕 풍운산과 서왕 조소귀가 전사하는 등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악주를 점령하고 관군의 대포를 노획한 이후에는 전법도 많이 개선되었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태평 천국군은 날로 그 수가 늘어 수륙 양군을 합하여 100만 대군을 헤아리게 되는데, 이를 24개 영으로 조직하였다. 이렇게 세력이 더욱 강해진 태평 천국군은 양쯔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동진하여 1853년 난징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곳을 천경(天京) 이라 고쳐 태평 천국의 수도로 삼았다. 이와 같이 태평 천국군의 급속한 진격이 가능했던 것은, 청군이 무력했던 탓도 있지만, 향민(鄕民) 자체가 청조를 포기하고 오히려 태평 천국군에게 호의를 보인 데 보다 큰 이유가 있다. 태평 천국군은 청조의 관리, 지주, 고리 대금업자 등 국민의 지탄 대상을 상대로 투쟁하였다. 진군 도중에는 이르는 곳마다 조세 장부, 전답 문서, 차용 증서 등을 불살라 버리고,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이를 빈민었다. 그러나 그의 외람되고 분에 넘치는 월권 행위에 분노한 홍수전은, 북왕 위창휘를 불러다 양수청과 그의 일당을 몰살시켜 버렸다. 이런 사실을 알게된 태평 천국의 맹장 익왕 석달개는 홍수전의 행동이 지나친 데 불만을 품고, 홍수전과 헤어져 사천성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함으로써 태평 천국은 분열되고 말았다. 청조는 이러한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정벌군을 진군시켰다. 그 주축은 향신층이 조직한 흔히 향용이라 불리우는 의용군이었다. 이 향용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증국번의 상군(廂軍), 이홍장의 회군(淮軍), 좌중당의 초군(楚軍) 이었다. 향용의 조직은, 관군의 작전 능력이 약한 것을 본 청조가 호남성 출신의 관료 증국번으로 하여금 향촌의 자위 조직을 군사작전 단위로 편성케 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청조는 이 신설부대의 지휘관에게 지방 행정관의 관직을 제수하였으며, 군비 징수권을 부여하였다. 향용의 지휘관들은 이른바 향신층으로서, 이들은 태평 천국이 유교 질서를 바탕으로 한 사회 질서를 부인하는 것에 대하여 특히 반발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병사들에게 종래의 관군보다 월등히 좋은 보수를 주었고, 유교적 의식과 동향(同鄕) 관계를 골자로 하는 상하 관계를 구성해 전투력을 높였다. 수세에 몰린 태평 천국군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한 것은 상하이 점령 실패와 영국과 프랑스의 군사적 간섭이었다. 상하이를 중국을 향한 경제적, 문화적 진출의 근거지로 삼은 서양 세력은, 초기의 방관적 중립 정책을 버리고 상승군이라 불리는 군대를 편성하여 상하이를 지키기 위한 작전에 나섰다. 원래 상하이는 미국인 워드가 외국인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조직하여 태평 천국군과 싸우고 있었는데, 이를 양창대라 하였다. 양창대는 그 후 중국인들을 대원으로 하고 외국인을 장교로 하는 상승군이 되었는데, 상하이에 상륙한 이홍장은 이들의 무기가 우수한 데 경탄하여 후일 양무 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우수한 화력을 가진 이들 서양군의 공격으로 불리해진 태평 천국군은 상군에 의한 집요한 난징 공략을 견디지 못다.
R E P O R T【중세 유럽 봉건 제도의 성립과 주종관계】『‘ ’』강 의 :교 수 : 교수님학 과 :학번 / 성명 :보고서 제출일 : 2006중세 유럽 봉건제도의 성립과 주종관계1) 머리말 / 개요유럽 로마를 정점으로 하던 고대 사회가 게르만 족의 침입으로 무너지면서 유럽 사회는 중세로 접어들었다. 유럽의 중세는 봉건제 사회로 특징 지어진다. 봉건 사회란 봉토를 매개로 주군과 봉신이 주종 관계를 맺는 구조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즉 신하가 주군에게 토지를 받는 대가로 주군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다. 이것은 게르만 족의 종사제와 로마 제국에 있었던 은대지(恩貸地) 제도가 결합된 형태이다. 오랜 기간 중세를 떠받치고 있었던 봉건 제도가 성립되는 과정과 그 내용에 대해 주종 관계를 중심으로 자세히 살펴보겠다.2) 봉건제도란?봉건 제도란 근대 역사가들이 만들어 낸 모호한 용어 중의 하나로서, 흔히 중세 초 유럽에서 성립한 새로운 사회적, 군사적, 정치적 체제를 의미한다. 즉, 정치적으로는 지방 분권 체제, 군사적으로는 주종 관계, 경제적으로는 장원 제도에 기초하여 성립된 총체적 사회 질서를 의미 하는 것이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사회가 혼란하던 중세 초의 유럽, 혼돈된 상황 속에서 귀족층이 무력과 토지를 독점하는 봉건적 사회 질서가 탄생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 질서의 결집체가 바로 봉토(封土)를 수여하고 그 대가로 군사적 봉사를 제공받는 봉건적 주종 관계였다. 서 유럽에서는 내부의 분열과 이민족의 침입으로 말미암은 오랜 혼란 속에 국가의 힘이 약화되어 법과 질서의 유지가 어렵게 되자,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무력을 갖추어야 하였으며, 그렇지 못한 자는 힘 있는 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각지에서 일어난 무사들이 치안을 유지하고 외적을 막는 한편, 농민을 예속시켜 그 지역의 사실상의 지배자가 되었는데, 이들의 지배 체제로서 성장한 것이 봉건 제도였다.?중세 봉건 제도의 성립과 특징? 프랑크 왕국의 분열(9세기 초)? 노르만 족의 이동(9세기~11세기)? 마자르 족, 슬라브 족의 침입(9세기)?종사 제도봉건 제도정치적 - 주종 관계은대지 제도경제적 - 장원 제도3) 봉건적 주종 관계의 기원봉건제와 관련된 관행은 게르만 족의 침입으로 유래한 것도 있고, 로마 제국으로부터 기원한 것도 있다. 우선 충성의 서약으로 맺어지는 봉신과 주군의 관계가 게르만의 )종사제(從事制)에서 기원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반면에 봉사를 한 대가로서 얻는 조건부 토지 보유는 옛 로마의 토지법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프랑크 족 치하의 갈리아 지방에서는 그렇게 보유된 토지를 은대지(恩貸地)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봉건제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이주하기전 시기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따로따로 있었다. 주군을 위해 싸울 것을 맹세한 전사가 반드시 주군으로부터 은대지를 부여받은 것도 아니었으며, 대부분의 은대지 보유자들 역시 충성의 맹세를 한 봉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봉건제 형성에 있어서 첫 번째 관심을 갖아야 할 시기는 8세기 초 프랑크 왕국에서 카를루스 마르텔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을 때이다. 이 때 프랑크 족은 처음으로 대규모의 기병을 이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등자(말을 탔을 때 두 발로 디디게 되어 있는 물건) 를 사용하고 갑옷과 방패로 몸을 보호하며, 칼과 창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비는 매우 값비싼 것이었고, 이러한 장비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했다. 말에 탄 채 방패와 칼, 창을 다룬다는 것은 오랜 연습과 엄격한 훈련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재주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병이 되려면 말과 장비를 갖출 수 있을 만큼 부유해야 하는 동시에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는 필요에서 벗어나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마르텔이 기병을 양성하고자 했을 때 가장 먼저 했던 것은 기병들에게 토지를 지급하고 그 토지를 경작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일이었다. 마르텔은 유능한 전사들을 모집하여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게 하고, 그들에게 생계와 무장에 충분한 면적의 영지를 은대지로 부여하였다. 이들이 바로 카를루스 마르텔의 봉신이었으며, 그들은 카를루스 마르텔에게 충성하는 한 이 토지를 보유할 수 있었다. 마르텔의 이러한 노력에 의해 종사제와 은대지 제도가 결합되었고, 이후 이러한 관행이 널리 보급되었다. 봉건 제도의 발전에 있어서 두 번째의 결정적인 시기는 이민족의 침입이 극심했던 9세기에서 10세기 때이다. 카를루스 대제 사후 그 아들과 손자 대에 이르러 벌어진 격렬한 내분의 그 자체만으로도 거의 무정부 상태를 빚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노르만 족과 이슬람 족 그리고 마자르 족의 침략까지 격화되어, 힘이 곧 법이요 전사가 판을 치는 사회가 도래했다. 그리하여 무장한 전사에 의해 보호받지 않으면 농민이 밭을 갈지 못했고, 사제는 교회에서 미사를 올리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하며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한 것이 바로 카를루스 마르텔 이래 성장해 온 기병들이었다. 이 시기의 기병들을 역사가들은 기사라고 부른다. 이 혼란의 시기에 두 가지 과정에 의해 강력한 계층인 봉건 영주가 등장하게 되었다. 봉건 영주는 자기 영지 내에서 배타적 지배권을 가지는데, 이를 불수 불입권이라 한다. 처음에 불수 불입권은 토지 보유자가 범죄자를 체포하여 정치적, 사법적 권한을 행사하던 백(伯)이라는 대귀족에게 인도하는 권한만이었으나, 9세기경에는 직접 재판과 처벌까지 떠맡게 되었다. 권세 있는 영주는 그 영지 내에 살고 있는 사람에 대해 완전한 사법권을 행사하였고, 중소 영주는 부분적인 사법권을 행사하는데 그쳤다. 이러한 구분은 극형 선고권의 유무에 의한 것인데, 이로 인해 당시 사회에서는 교수대를 소유하는 것이 곧 신분과 지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징표가 되었다.4) 주종 관계의 성립주군과 봉신의 관계는 신서와 충성의 맹세라는 엄숙한 의식으로 맺어졌다. 봉신은 주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으로 주군의 손 사이에 놓고 충성스런 봉신으로서 봉토에 부과된 의무를 다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주종 관계의 의식은 주군이 봉토 부여의 상징으로서 한 줌의 흙을 봉신에게 건네 주는 경우도 있었다. 주종 관계에 의한 봉건적 위계 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주군과 봉신 사이의 관계도 심각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관계 변화의 주 원인은 봉신이 살아 있을 동안만 보유할 수 있었던 봉토가 세습화된데 있다. 이는 현실적으로 봉신의 성장한 아들이 봉토를 상속하는 것을 막기가 극히 어려웠기 때문에 나타났다. 대략 10세기경에는 대부분의 봉토가 세습되고 있었는데, 상속의 형태는 장자 상속이 일반적이었다. 주군이 임의로 봉토를 회수할 수 있을 때는 봉신의 의무가 주군의 뜻에 따라 정해지게 되어 있었으나, 봉토가 세습화되자 봉신의 의무는 상호계약에 따라 규정되었다. 주군과 봉신의 상호 의무를 규정한 계약 조건은 개개의 영주 및 봉신에 의해 다소 개별적으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봉신의 계약은 봉신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주군과 봉신 사이의 관계가 규정되어, 개개의 봉토는 각각 고유한 관습을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봉건적인 관행은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달랐으며, 두 봉토의 관습이 똑같은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5) 봉신과 주군의 의무봉건적 주종 관계는 주군과 봉신 쌍방간에 의무가 발생하는 쌍무계약적인 관계이다. 그러면 봉토를 받는 대가로 봉신이 주군에게 바쳐야 하는 의무에는 무엇이 있을까? 첫 번째로 봉건적 관계의 기본적인 목적은 전쟁에서의 협력이었다. 주군의 주된 기능은 그의 봉신 및 봉신의 토지를 보호하는 것이었고, 봉신의 주된 기능은 주군의 군대에서 복무하는 것이었다. 노르만 족의 침략이 격화되고 서 유럽 전체가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들었을 때에는 주군이 봉신에게 요구하는 군사적 봉사에는 제한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봉신들은 두 가지 유형의 전쟁 즉, 공격전과 방어전을 구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주군의 봉토가 침략당하고 있는 방어전의 경우 그의 봉신들은 적이 물러날 때까지 주군에게 봉사했다. 두 번째 군사적 봉사 이외에 봉신이 지고 있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주군이 부르면 언제라도 주군의 궁정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중세인들은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반드시 협의를 거쳐야 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관행에 따라 봉건 영주는 자신의 봉토에 관한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기 전에 봉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이는 주군이 봉신의 도움이 필요한 계획을 실행하려 할 때에는 더욱 필수적이었다. 군사와 조언의 의무 이외에도 봉신은 경제적 부조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주군은 자기의 수입보다 많은 물자가 필요한 경우 자연스럽게 그의 봉신들의 도움을 받으려 하였다. 중세 봉건 사회에서 새로이 주군이 된 상속자는 상속받은 봉토에 대한 상속세가 부족한 경우 그의 봉신들로부터 부조를 기대하였다. 한편 주군은 이러한 권리 외에도 봉신 및 봉토에 관하여 봉건적 관계의 기본적인 성격에 비롯되는 권리를 지니고 있었다. 우선 봉신은 그의 사위를 고르는 데 주군의 승인을 얻어야만 했다. 또 봉신이 전투에 참가할 수 없는 어린 아들이나 미혼의 딸을 남긴 채 죽은 경우, 봉토에 부과될 의무를 수행할 사람이 없으므로 주군은 봉토 관리자를 지명하여 그로 하여금 의무를 수행하도록 할 수 있었다. 또 봉신이 상속인으로 인정할 만한 후손을 남기지 않은 채 사망했을 경우 주군은 그 봉토를 회수할 수도 있었다. 주군과 봉신의 관계는 쌍무적인 것으로서 주군 또한 봉신에게 여러 의무를 지고 있었다. 물질적인 면에서 주군은 봉신 및 봉신의 봉토를 모든 적으로부터 보호할 의무가 있었으며, 아울러 자신의 궁정에서 봉신을 온당하게 대접하며 봉신의 가족과 개인적인 이익을 존중해 주어야만 할 의무가 있었다. 봉신은 주군이 자신을 푸대접했을 경우에는 동료 봉신들 앞에서 이를 항의할 수 있었고, 항의가 정당한 경우에 주군은 이를 인정해야만 했다.
환경경영론정부의 입장에서 본 환경경영『지속가능발전 속의 정부』ㅡ 목 차 ㅡⅠ. 환경정책의 개념과 특징 ?????????????????????????????????????????????????????????????????????? 41. 환경정책의 개념 ???????????????????????????????????????????????????????????????????????????????????????????????? 41) 환경문제 ????????????????????????????????????????????????????????????????????????????????????????????????????????????????? 42) 환경정책 ????????????????????????????????????????????????????????????????????????????????????????????????????????????????? 53) 환경 행정 ??????????????????????????????????????????????????????????????????????????????????????????????????????????????? 72.환경 정책의 특징 ????????????????????????????????????????????????????????????????????????????????????????????????? 71) 환경 정책과 경제 발전 : 상충의 조화 ???????????????????????????????????????????????????????? 72) 환경 정책과 이론 또는 기술 ??????????????????????????????????????????????????????????????????????????? 83) 환경 정책과 다수의 참여자 ????????????????????????????????????????????????????????????????????????????? 94) 환경 한 바와 같이 정부 개입을 총해 환경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정책 과정 전반에 걸쳐 무수히 많은 장애물들을 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일단 환경 문제가 정책 의제화되어야 하고, 강력한 내용을 가진 정책이 결정되어야 하며, 또 집행에 필요한 충분한 자원이 배분되어 이를 충실히 집행에 옮겨야만 환경 문제의 해결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환경정책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정책적인 특징은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매우 복잡하고 어렵게 만든다. 이로 인해 환경 정책의 효과성이 저해되는 것이다.3) 환경 행정일반적으로 행정이란 행정부 내에서 공무원들이 공공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행하는 의사 결정이라고 정의되고 있는 바, 이러한 점에서 환경 행정은 환경 문제의 해결을 위해 환경 정책 과정을 관리하는 정부의 행위를 의미한다. 즉 환경 행정이란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활동으로서 좀더 구체적으로는 환경 정책 수단을 만들고 집행하는 정부의 활동을 말한다. 정부 내에는 각 사회 문제에 대응하여 해당 분야의 문제 해결책임을 지고 있는 부서가 있다. 예컨대 교육 문제는 교육부, 외교 문제는 외교 통상부, 노동 문제는 노동부 등이 맡고 있고, 환경 문제는 환경부의 소관 사항이다. 이러한 점에서 환경부의 활동은 곧 환경 행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사회 문제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환경 문제의 경우는 다른 사회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서 환경부가 환경 문제의 해결을 위한 활동을 전담할 수 없어 다른 부처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있을 수 있으며, 어떤 환경 관련 분야는 다른 정부 부처가 그 문제의 해결을 책임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환경 문제 중에서 해양 오염의 관리와 산림 자원의 보전은 각각 해양수산부와 산림청에서 상당 부분 책임지고 있으며, 환경 파괴에 큰 영햫을 미치는 각종 사회간접자본 시설의 건설과 관리는 건설교통부의 소관 사항이다.따라서 환경 행정은 좁은 의미로 보면 환경우의 환경 관리 활동이라고 할수 있지만, 넓게 보면 환경 관리와 관련 배출업소의 오염방지시설 설치를 지원하기 위한 조세감면제도와 관세감면제도가 일찍이 도입되었다. 조세감면제도는 1960년대부터 실시되었지만, 환경부문에 도입된 것은 1981년 법 개정 이후부터이다. 환경관련 물품의 수입에 대한 관세감면제도로 관세법에 의해 시행되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말까지는 환경보전산업의 생산규모나 민간 및 정부부문의 환경보전 지출규모가 매우 작았으므로 이 같은 지원제도가 큰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했다.2) 1990년대 이후직접규제방식을 주로 채택하던 환경오염 규제체계는 1990년대 들어서면서 오염원인자 부담원칙과 배출기준을 바탕으로 하는“가격기능과 환경기준에 의한 규제방식”(charges and standards technique)으로 전환되어 오고 있다. 가격기능에 의한 규제는 오염원인자 부담원칙에 입각한 방식으로 흔히 경제적 유인수단으로 불리기도 한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주요 경제적 유인수단으로는 배출부과금제도, 폐기물예치금제도, 폐기물처리 부담금제도, 환경개선부담금제도 등이 있다.전술한 바와 같이 배출부과금제도가 시행되었다. 폐기물예치금제도는 재활용이 가능한 제품이나 용기에 부과금을 부과함으로써 재활용률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폐기물부담금제도는 특정 유해물질 또는 특정 유독물질 또는 특정 유독물질을 함유하고 있거나 재활용이 어렵고 폐기물관리상의 문제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제품, 재료, 용기에 대해 부과금을 부과함으로써 이들 제품에 대한 수요를 억제시키기 위해 도입되었다. 폐기물부담금은 1992년 12월에 제정된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촉진에 관한 법률」에 근거하여 도입되었으며, 종전까지 부과되어 오던 합성수지 폐기물처리 부담금은 폐기물부담금제도로 편입되었다. 1993년도에는 유통?소비과정에서 환경오염물질을 다량 배출하는 건물이나 시설물 또는 경유자동차 등을 대상으로 하는 환경개선부담금제도가 도입되어 현재까지 시행되고 있다.이처럼 최근에는 비교적 다양한 형태의 부과금제도가 시행되고는 있으나 그 효율이 낮아 오염저감효과가 작을 뿐의 잠재적인 환경영향을 data Sheet 형태로 부착하게 하는 ‘환경성적표지제도’이다.나. ISO 14000 시리즈환경관리를 위한 조직을 평가하는 영역과 제품 및 공정을 평가 분석하는 영역으로 대별 된다. 환경 경영체제, 환경 심사 그리고 환경 성과 평과 등은 조직의 환경 경영에 대한 평가를 위한 표준이며, 환경 레이블링, 전과정 평가와 제품규격에 관한 환경 측면 등은 생산 제품과 생산 공정의 환경성에 관한 평가 표준이라 할 수 있다.다. 제품전과정 분석(LCA : Life Cycle Analysis)제품의 환경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제품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즉 제품의 전 생애인 제품 디자인, 생산, 수송 및 배분, 소비, 폐기처분까지에 걸쳐 환경적 영향을 과학적으로 분석 및 평가하는 기법이다. 다시 말하면 제품 생산의 전단계에서 사용된 에너지와 재료 그리고 환경오염물질 또는 폐기물 발생량을 정량화하고 이를 토대로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규명하는 방법이다. 이는 제품에 대한 환경정보를 소비자들에게 전달함으로써 환경외부효과를 내부화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라. 환경 회계기업의 환경회계는 환경비용을 명확히 규명하고 측정함으로써 경영자의 의사결정에 도움을 주며, 환경영향으로 인한 잠재적 손실을 고려한 투자분석 및 평가기법을 활용하는데 필요하다. 또한 환경경영체제를 구축하고 환경성과를 효과적으로 평가하는데 필수적이다. 그리고 기업의 이해관계자들을 대상으로 대외적으로 공포하기 위한 틀이 된다.(4) 환경영향평가제도환경영향평가제도란 개발사업 계획으로 인해 환경에 미칠 영향을 미리 평가 검토하여 환경오염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으로 환경영향 평가법에 따라 실시된다. 환경 영향 평가는 정부기관 또는 민간에서 대규모 개발사업 계획을 수립하는 경우 이로 인해 환경에 미칠 영향을 미리 평가, 검토하여 환경오염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다. 또한 환경은 일단 한번 파괴되면 복구에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므로 환경오염에 대한 사전예방이 매우중요하다. 환을 달성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사용되는 수단이 배출허용기준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환경기준만큼이나 배출허용기준도 환경목표를 달성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배출허용기준은 수질환경기준을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배출업소 전체의 오염물질 배출량, 설정된 배출허용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처리기술의 존재유무, 처리기술의 경제성 등을 고려해서 설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우리나라 배출허용기준은 이러한 요소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환경기준과 마찬가지로 외국의 기준치를 다소 변형하여 사용하고 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나 일본의 배출허용기준보다 우리나라의 배출허용기준이 결코 낮지 않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점에서 연유한다.①-2. 대기환경기준과 배출허용기준대기환경기준도 수질환경기준과 마찬가지로 대기관리의 목표라 할 수 있다. 수질환경기준은 대기질 특성의 변화에 따라 변경되어 왔으며, 일부 오염물질에 대해서는 강화되었다. 예를 들어 아황산가스와 일산화탄소 항목은 연료규제정책과 저공해자동차 보급확대 정책으로 이전에 규정된 환경기준이 달성됨에 따라 기준을 보다 강화하였다. 또한 1995년부터는 먼지항목에 PM-10(입경 10??(묘환) 이 하 )의 미세먼지기준을 새롭게 설정하여 시행하고 있으며 오존의 경우는 연평균기준 대신 8시간 평균기준을 새롭게 추가하여 강화하였다.대기오염물질에 대한 배출허용기준은 배출업소의 대기오염물질 배출감축과 오염방지 기술개발을 유도함으로써 대기환경기준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배출허용기준에는 농도규제와 총량규제가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최대허용기준으로서 농도규제만을 사용하고 있다. 배출허용기준이 설정되는 대기오염물질은 황산화물, 질소산화물 등 16종의 가스상 물질과 먼지, 카드뮴 등 9종의 입자상 물질, 그리고 악취 등 총 26종이다. 배출허용기준은 배출시설별로 설정되고 있으며, 특히 엄격한 관리가 요구되는 울산?온산공단, 여천산업단지 등 대기특별대책지역의 경우 기존시설에 대해서는 타 지역보다 더 강화된 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