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 론70년대 우리 소설의 한 경향을 대표하는 소설인 조세희의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이하 『난쏘공』으로 칭함)은 이른바 ‘난장이 연작’ 12편을 묶은 연작소설이다.이 시기는 산업화라는 대명제에 부수된 계층적 양극화 현상, 유신체제라는 정치적 도구로 인한 이념적 갈등, 남북 대화를 계기로 이루어진 분단 상황의 재인식 등의 대내적인 요인과 국제 관계의 미묘한 세력균형과 자원 민족주의의 팽배, 제3세계의 두각 등의 대외적 요인의 진정한 인간의 삶을 위협하며 그 존재 기반을 흔들어 놓은 때이다. 이 작품들은 단편소설로 발표 되면서부터 70년대의 정치, 경제적 모순이 낳은 소외계층의 문제를 내용으로 하면서 그 표현 양식의 특이한 기법으로 하여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고, 70년대의 한국 산업 사회화 과정에서 발생한 모순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인정 받았다조세희의 『난쏘공』은 산업화 과정에 의해 야기된 계층적 양극화 현상을 ‘난장이’로 대표되는 소외 계층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2. 본 론1) 연작소설로서의 성격과 그 의미『난쏘공』은 모두 열두 편의 단편 소설들이 결합되어 있다. 이 작품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난장이 일가의 삶으로 요약되는데, 산업화의 과정에서 자기 삶의 터전을 일구지 못한 도시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과 절망이 인상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난쏘공』에서 중시되고 있는 대립과 갈등, 화해와 사랑, 빼앗는 자와 빼앗기는 자의 거리, 의지와 좌절, 어둠과 빛,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과의 관계 등은 모두 작품 구조의 특성과도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연작성의 의미가 특히 주목된다.이 작품이 활용하고 있는 연작성의 방법은 계기적인 결합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다. 열두 편의 단편소설들 각각은 이야기의 전체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내적인 결합이 가능한 서술상의 단계가 고려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인물의 행위의 연결을 근거로 하는 플롯의 개념에 따라 단편소설들의 결합이 가능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난쏘공』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연작성의 방법은 이 작품이 거두어 들이고 있는 소설적 성과와 직결된다. 그것은 우선 라는 말로 규정할 수 있는 기법의 성공을 뜻하는 것이다.『난쏘공』이 연작소설의 형태로 발표되기 시작한 것은 열두 편의 단편 중의 하나인 「칼날」과 「뫼비우스의 띠」에서 비롯된다. 이 작품에서 난장이의 존재는 지극히 상징적인 소설적 장치로 그려진다. 일상의 현실에서 무위의 삶에 부대끼는 한 젊은 주부의 눈을 통해 난장이의 존재가 발견되며 철거민을 상대로 하는 아파트 입주권 사기사건 속에서 난장이의 존재가 정의로운 힘의 존재로 드러난다. 「우주여행」에서도 난장이는 비참한 삶의 주인공으로 표상된다. 이러한 일련의 방법은 난장이로 표상되는 비극적 존재의 원근법적인 인식에 다름 아니다. 난장이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연작소설의 내용을 압도하는 주인공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난쏘공』의 전체 이야기 가운데에서 그 중간부분은 난장이 일가의 비참한 몰락을 중심으로 꾸며지고 있으며 그 뒤에 이어진 이야기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살아가는 자본가 계층의 삶이 대조적으로 연결된다. 어두운 그늘이 있는 만큼 더욱 밝은 부분이 있기 마련이라는 판단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분열되어 있는 대조적인 두 세계의 모습에서, 난장이의 존재는 하나의 좌절된 삶의 상징처럼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그 같은 는 연작성의 방법에서 오는 주인공의 순환, 주제의 심화, 상황의 확대 등을 바탕으로 극대화된다고 할 것이다.2) 형식상의 특징이러한 연작의 구성이 소설에서 어떠한 효과를 가지고 있는가를 형식적인 면으로 고찰하여 보자.우선 난장이로 표상되는 신체적 조건이 정상인들과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대립과 단절의 이미지를 이미 내포하고 있음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비극적 삶의 세계가 주조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작품은 비극적 상황에 대한 환상적 전개를 보인다.우리 식구와 지섭을 제외하고 세계는 모두 이상했다. 아니다. 아버지와 지섭이마저 좀 이상했다. 나는 햇살 속에서 꿈을 꾸었다. 영희가 팬지꽃 두 송이를 공장 폐수 속에 던져 넣고 있었다.)내가 죽음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사막으로 이어지는 지평선이다. 어둘 녘에 모래 섞인 바람이 분다. 선 하나로 표시될 그 지평 끝에 내가 알몸으로 서 있다. 다리를 약간 벌리고 팔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머리도 반쯤 숙여 나의 머리카락이 나의 가슴을 덮었다. 눈을 감고 열을 세면 나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바람 부는 회색의 지평선만 남는다. 이것이 내가 아는 죽음이다.)작품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참혹한 현실, 그 현실의 비극을 더 잘 드러내게 하기 위해 환상적 기법이 종종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실과 상상이 겹치거나 현실에서 상상으로 가는 과정 등 이중의 장면을 통하여 처절함을 가속화 시킨다.‘시점은 화자가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시각의 문제다. 화자가 어떤 위치에서 사건을 보느냐 하는 위치의 문제이기도 하고, 화자가 어느 인물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는 초점의 문제이기도 하며, 화자가 작중인물의 마음속에 어느 정도로 들어가느냐 하는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난쏘공』에서는 빈번한 시점 전환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자주 살펴볼 수 있다. 크게는 12편 단편들의 제목이 다르다는 것과 그 단편 안에 살아 숨쉬는 인물들의 시점 전환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그 나름대로의 관점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와 독자가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1 에서의 ‘나’는 영수이다. 영수의 입장에서 아버지, 어머니, 영호, 영희는 모두 영수의 입장에서 관찰되고 파악되어진다. 2 에서의 ‘나’는 영호이다. 1의 영수의 관점은 이제부터 영호의 대상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3 에서의 ‘나’는 영희인데 마찬가지의 시점전환이 이루어진다. 1, 2, 3은 모두 난장이 아버지가 사회로부터의 경제적 압박에 못 이겨 결국 벽돌공장 굴뚝에서 투신 자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작가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관점을 모두 보여줌으로서 사회적 모순의 실체를 다방면에서 독자에 보여주기 위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아주 짧은 순간 앉은뱅이는 정신을 잃었었다, 사나이의 구둣발이 그의 가슴을 차 버렸던 것이다. 앉은뱅이는 거듭 들어오는 사나이의 구둣발을 정신없이 밟고 늘어졌다. 앉은뱅이는 너무 약했다. ...(중략)... 그는 승용차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굽혔다. 순간, 검은 그림자가 그의 명치 밑을 힘껏 차 왔다. 사나이의 큰 몸이 힘없이 나가 떨어졌다.)12편의 단편 중 프롤로그적 의미를 갖는 작품 ‘뫼비우스의 띠’에서의 앉은뱅이와 꼽추, 그리고, 부동산업자의 사투를 묘사한 장면이다. 간결하면서도 빠른 템포의 문체로 역동적이고 숨가쁜 상황을 독자로 하여금 숨죽이고 바라보게끔 만든다.그가 나를 더욱 약하게 만들었다. 나는 집을 나온 다음 편한 것을 이루어 본 적이 없다. 나는 모태에서뿐만 아니라 출생 후에도 충분한 영양은 축적이 되지 않았다. 내가 받는 정신적 압박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한 그가 거기서 취한 열량을 다시 빼앗아 갔다. 마지막 밤을 꼬박 새운 것도 영향을 주었다. 아무 데나 눕고 싶은 생각뿐이었다.)역시 간결하면서도 절제된 묘사가 두드러진다. 이 작품에서는 서술부분에서 대화 부분, 다시 대화에서 서술 부분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러한 묘사는 어느 부분에서나 작가 자신의 주관적 생각이나 느낌을 철저히 배제하고 객관적 묘사로 독자의 인상과 감동을 유발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3) 대립적 구조의 양상소외된 계층의 표상인 는 집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고 집 앞엔 방죽이 있는, 그리고 동네 아이들은 발육이 나빠 유난히 작아 보이는 지저분한 동네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부를 독점하여 상대적으로 비대해진 은 거리는 깨끗하고 집들은 그림같은 저택촌에서 살고 있다. 이러게 못 가진 자와 가진 자의 세계는 생활의 모든 부분에 대립의 양상을 보인다. 이렇게 못 가진 자가 사는 어두운 공간과 가진 자는 자가 사는 밝은 공간 사이에는 어둠과 빛의 경계만큼이나 분명한 구분으로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대립의 양상은 ‘못 가진자 - 고통 - 어둠 / 가진자 - 안락 - 밝음’ 으로 요약할 수 있다.소설의 이분법적 대립구조는 1970년대 한국 사회를 착취/착취당함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설명하는 것인데, 이처럼 단순한 현실 인식을 떠받드는 것은 그 것은 잘못된 것이고, 안과 겉을 구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3차원), 안이 곧 밖이고 바깥이 곧 안인 클라인씨의 병(4차원)이 의미하듯, 그 잘못된 것 속에서 사는 우리는 모두, 신조차도 예외 없이 죄인이라는 강렬한 윤리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