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처음 생각해 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모방은 쉽다.과 목 명 : 서양의 역사와 문화학 과 : 컴퓨터 공학부학 번 : 2004185059이 름 : 류 선 정제출일자 : 2009.05.25목 차1. 사 전2. 서 평3. 주 제4. 일 지5. 소 감1. 사 전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1451.8.26?~1506.5.21]이탈리아의 탐험가. 에스파냐 여왕 이사벨의 후원을 받아 인도를 찾아 항해를 떠났다. 3차에 걸친 항해 끝에 쿠바, 아이티, 트리니다드 등을 발견했다. 그의 서인도 항로 발견으로 아메리카대륙은 유럽인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고, 에스파냐가 주축이 된 신대륙 식민지 경영도 시작되었다.본명 Cristoforo Colombo국적 이탈리아활동분야 탐험출생지 이탈리아 제노바↑ 콜럼버스 동상 / 1493년 11월 콜럼버스가 이 섬에 상륙하여 에스파냐 국왕의 영토임을 선언하고 섬의 이름을 산후안보티스타(San Juan Bautista)라고 하였다.본문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는 이름은 영어식 표기이며 실제 그의 이름이 이렇게 불렸을 가능성은 없다. 이탈리아명은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ristoforo Colombo)이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생하였고 1477년에 리스본에 나타날 때까지의 행적은 명백하지 않지만 상당한 학식을 지녔으며, 일찍부터 항해에 종사하였다고 전해진다. 1479년 결혼하였는데, 그의 장인이 선장이었기 때문에 해도제작(海圖製作)에 종사하였다. 이 무렵에 그는 수학자 P.토스카넬리에게서 지도(地圖)를 구해 연구한 결과 서쪽으로 항해하여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1484년 포르투갈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탐험을 헌책(獻策)하였으나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1486년 콜럼버스는 에스파냐로 건너가 후원자를 찾았다. 그는 에스파냐 카스티야 왕조의 이사벨 여왕을 만나 그의 대담한 항해계획을 설명하였고 지원을 요청하였생을 개척하기 시작했다.그는 제도학과 천문학, 라틴어에 능통했으나 제대로 된 교육은 받은 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스스로도 “뱃사람이 된 후 나는 모든 책을 읽었다. 역사책, 연대기들, 철학책, 그리고 여러 다른 책들을 읽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독학으로 이 모든 지식을 습득한 듯하다.콜럼버스는 제노바에서 선원으로 첫발을 내딛었으나 1477년 리스본으로 옮겨 그곳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리스본은 항해에 뜻을 둔 이들이 모여드는 항구도시였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 동생 바르톨로메와 지도를 제작해 판매하는 일을 하며 때때로 항해에 참여하곤 했다. 바르톨로메는 이후 콜럼버스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영국의 헨리 7세, 프랑스의 샤를 8세를 찾아가는 등 콜럼버스의 계획이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왔다.1479년 그는 명문가 출신 펠리파 페레스트렐로 에 모니즈와 결혼했다. 펠리파와 그 가족들은 콜럼버스가 포르투갈의 권력자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펠리파는 장남 디에고를 낳고 얼마후 사망했다.이즈음 콜럼버스는 파올로 토스카넬리의 저술에 큰 영향을 받았다. 토스카넬리는 포르투갈의 왕 알폰소 5세에게 서쪽으로 항해하면 인도에 도착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던 사람이다. 특히 왕실의 서고에 보관되어 있던 그의 서신을 보게 된 콜럼버스는 더욱 강력한 자극을 받았다. 콜럼버스는 1484년경 포르투갈의 왕 주앙2세를 만나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주앙 2세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는 곧 아들 디에고와 함께 비밀리에 에스파냐로 떠났다.에스파냐의 팔로스 항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라 라비다 수도원에서 기거하게 되었는데 원장 후안 페레스 신부는 그의 계획을 듣고는 콜럼버스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 외에도 콜럼버스는 안토니오 마르체나 신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메디나 셀리공작 등의 도움을 받아, 1486년 6월 드디어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을 만나게 되었다. 콜럼버스의 말에 흥미를 느낀 것은 이사벨 여왕이었다.. 결국 콜럼버스는 두 국왕에게 재판관의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즈음 두 국왕은 콜럼버스에게서 총독의 권한을 박탈하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1499년 초, 두 국왕은 프란시스코 보바디야를 최고 재판관으로 임명하여 에스파뇰라로 보냈다. 1500년 8월 산토 도밍고에 도착한 보바디야는 콜럼버스를 해임했다. 또한 그와 그의 두 형제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가 10월 말경 카티스로 돌려보냈다.콜럼버스와 형제들은 12월이 되어서야 그라나다에 머물고 있는 두 국왕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콜럼버스의 경제적 특권과 제독의 칭호를 회복시켜 주었으나 끝내 총독의 칭호는 되돌려 주지 않았다.1502년 3월 두 국왕은 에스파뇰라에 기항하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콜럼버스가 제출한 4차 항해 계획을 인가했다. 콜럼버스의 마지막 항해에 함께한 사람은 140여명 이었다. 모두 4척의 배에 오른 이들은 1502년 5월 9일 카디스 항을 떠났다. 에스파뇰라 근처를 항해할 무렵, 폭풍을 예견한 콜럼버스는 항구에 정박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때문에 그는 2척의 배를 잃었다. 1503년 4월, 남은 배 2척을 이끌고 귀항길에 올랐으나 자메이카 근처에 이르러 배가 좌초되었다. 그는 구조를 요청하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카누 2척으로 항해를 감행햇다. 다행히 이 카누들은 9월에 100마일 이상 떨어진 에스파뇰라 섬에 도착했으나 구조대는 즉시 출발하지않았다. 콜럼버스는 이듬해 8월에야 도착한 구조선을 타고 에스파뇰라 섬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같은 해 9월 12일 그곳을 떠나 한 달 후 에스파냐에 도착했다.그는 곧 두 국왕을 만나고 싶다는 의견을 전달했지만 왕실에서는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이사벨 여왕이 위독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콜럼버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여왕은 1504년 11월 26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에도 콜럼버스는 자신의 권리를 회복하려고 페르난도 왕을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아픈 몸을 이끌독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서 약간 벗어나고 있는 것 같다.”라는 주를 달아놓기도 했다.제 아무리 콜럼버스가 계속해서 인디언들의 순박함과 천진함을 찬양하고, 그들이 새로운 크리스트교의 사도가 될 수 있다고 말하더라도 결국 그는 정복자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인디언들에게 크리스트교를 전파함으로서 신의 구원을 받게 해 주겠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크리스트교의 전파는 까스띠야 왕국의 영토를 넓히는 것이며, ‘미개한’ 원주민들을 스페인 아래 종속시키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그러한 생각 역시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특히 이러한 그의 우월주의는 인디언들의 외양 묘사에서도 나타나는데, 좀 더 문명 수준이 낮은 까나리아 제도의 원주민들에 비해, 에스파뇰라의 원주민들은 피부가 훨씬 더 ‘희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식인종이자 약탈자이며, 콜럼버스가 대륙의 지배자인 ‘칸’의 부하들이라고 착각했던 까리베 부족만이 선원들을 먼저 공격했으나 선원들이 그들을 대파했다고 적고 있다.영화에서의 콜럼버스는 이러한 점에 있어 원래의 콜럼버스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 아메리카에 상륙한 직후, 제일 먼저 만난 원주민 부족은 콜럼버스 일행에게 적대적으로 다가온다. 여기서 공격하려던 부하들을 말린 것은 바로 콜럼버스였다. 덕분에 그들은 원주민 부족과 평화로운 생활을 보낼 수 있었으며, 영화 속 가상인물이긴 하나, 우타빤이라는 인디언 친구까지 얻게 된다.그 후 산토 도밍고로 돌아와 선원들이 세웠던 요새가 습격받고 동족들이 모두 학살당했음을 알게 된 후에도,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데에 반대한다. 그리고 도시를 세우고 운영하는 데에도 그들을 동등하게 대했으며, 처벌함에 있어서도 스페인 사람들과 동등하게 대했다. 여기까지 보건대, 영화 속의 콜럼버스는 실제 콜럼버스의 행적 중에서도 가장 밝고 현대적 시각으로 볼 때에 정당한 일만을 행하고 있다.여기서 제국주의적 면모를 드러내며, 위의 콜럼버스의 말처럼 원주민들을 “일을 시키기에 아주 적당합니다.탈리아 남서 해안의 항구 도시인 제노바에서 도미니코 콜럼버스와 수산나 디 폰타나로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 부부에게는 두 아들 바르톨로메오와 지아코모가 있었는데, 이들은 형을 도와 같이 탐험을 했다. 콜럼버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다만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 성장해 아버지의 직업인 양모 직공 일을 도왔다는 정도만 남아있다. 15세기 제노바는 조선업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주요 항구였기에, 이곳에서 자란 콜럼버스는 자연스럽게 바다를 보면서 소년의 꿈을 키웠고,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무역 거래를 눈으로 보면서 무역 항로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대 이탈리아 상인들과 동방 상인들의 거래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훗날 콜롬버스가 ‘동양’을 찾아 떠난 이유는 기존의 무역 항로에서 벗어나 동양의 진귀한 물품들을 들여올 새로운 무역 항로를 찾기 위해서였다.꿈을 실현시켜 줄 결정적인 계기는 인생의 큰 위기가 지나고 나서 오기 마련이다. 콜럼버스는 1476년 그의 나이 25세 때 탑승한 제노바의 상선이 프랑스와 포르투갈 해적선의 공격을 받아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고 침몰해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때 그는 바다에 떠있는 노를 잡고 수영을 해서 기적적으로 살아나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갔다. 리스본은 대서양을 향해 열린 유럽의 거대 항구로서 전 유럽에서 건너온 선박들이 머무는 곳이기도 했다. 콜럼버스는 리스본에 이미 와 있던 동생 바르톨로메오와 함께 지도 제작을 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항구도시 리스본은 그의 꿈을 실현시키기에 매우 적절한 장소였다. 그곳에는 막 항해를 마치고 온 선장들과 미지의 땅에 대한 도전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젊은 콜럼버스의 주위에서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리스본에서 콜럼버스 형제는 뛰어난 지도 제작자로 명성을 날렸다. 항로와 육로를 정확하게 인식하게 된 이 시기는 이후 콜럼버스가 항해를 할 때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준비기간이 있었기에 대서양 횡단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불어 독학으로 에스파냐어를 공부했고, 독서를 통해 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