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학을 배우고 있는 학생 중 마리아 몬테소리를 모른다면 아마 간첩이 아닐까? 그만큼 몬테소리는 어린이 교육을 위한 교사양성과정의 지도자이기도 하고 장애자와 정상아를 위한 진정한 아동교육자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현재 상당수의 원에서 몬테소리 프로그램을 취하고 있는 곳들이 많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간략하게 몬테소리의 생애에 대해 소개하자면 몬테소리는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열세 살 때 Michelangelo Buonnarroti라는 기술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모든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아버지의 반대로 학교를 중퇴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학교에서 생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의과대학에 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이탈리아 에서는 여성이 의과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부딪힘이 있었지만 끈질긴 설득으로 1890년 로마 대학에 입학하여 자연과학을 연구하였고 1896년 이탈리아 최초로 여성 의사 1호가 탄생하게 된다. 몬테소리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엄격한 훈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훗날 몬테소리의 교육방법에도 나타난다. 유아교육과정을 배우면서 교수님께서 몬테소리가 놀고 있는 거지아이를 보고 계기가 되어 아동들에 대한 교육방법에 대한 연구과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이처럼 몬테소리는 처음에 정신지체아의 교육을 하였다. 정신지체아의 교육방법은 일반적인 것 보다 더욱 합리적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믿었고 그녀의 노력으로 정신지체아들의 정신력은 매우 향상이 되었다고 한다.우리가 몬테소리에 대해 어느 정도 배워서 알고 있듯이 몬테소리는 유아가 자기 스스로 발달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즉 유아는 아직 불완전한 존재, 어딘가 서투른 존재이기 때문에 무조건 도와주고 어른이 결정하게 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존재로 자신을 창조해 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나는 몬테소리의 교육사상에서 이 부분이 참 마음에 든다.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과잉보호를 받아왔다.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엄마는 내가 행여나 다치지는 않을까, 실패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셨는지 먼저 도와주시곤 하셨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아동학을 복수전공하면서 이런저런 지식을 배우게 되다보니 그런 부모님의 교육이 결코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실패하더라도 내 스스로 무엇인가를 도전해보고 또 성취감을 맛보는 것이 나아가 자신감까지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예전에 몬테소리와 관련된 책을 읽었는데, 몬테소리는 30대 말이 될 무렵 첫 번째 어린이집에서 발달교구를 다루는 데 푹 빠져 있는 여자 아이를 관찰하게 된다. 그 아이는 그 교구활동에 푹 빠져있었고 아이는 과제를 끝마칠 때까지 연습을 계속하려했고, 오랜 시간 동안의 연습 끝에 이 과제를 마치자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지난 겨울방학 때 어린이 집 실습을 하면서 느꼈던 것이 아이들은 집중시간이 상당히 짧기 때문에 교구를 그냥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 다루는 구나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내용에서 마리아가 본 아이는 일반적인 선입견을 뒤엎었으므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몬테소리는 이것을 관심의 양극화라고 불렀다. 주의를 분산시키는 다른 환경은 무관심하게 제쳐두는 반면, 아이와 교구는 완전히 하나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아이가 몬테소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넘쳐나는 보조 수단들이나 그들의 관심을 일부러 끌려고 하는 요란한 자극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그들에게 적합하고, 손으로 만지면서 직접 다뤄 볼 수 있는 교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라는 게 이 아이가 시사하는 바였다.그렇다. 이미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수많은 어린이집에서 몬테소리 프로그램을 취하는 원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몬테소리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 자발적인 관심과 활동이다. 그리고 그 교육을 올바로 알고 실행할 수 있는 교사의 자질도 매우 중요한 것 같다.실습을 하면서도 느낀 점이지만 아이들을 교육하고 다룸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인내심인 것 같다. 마음만 먹으면 아이들의 신발을 단 30초 만에 후다닥 신겨줄 수 있고, 내가 오늘 계획한 교육적인 진도를 한 시간 안에 다 나갈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교육은 결코 아이들에게 내재된 자발성과, 책임감과 독립심 등을 무시해버리는 교육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 스스로 경험해보고 또 실패도 해본 뒤, 교사가 그 실패를 다시 성공으로 이끌어 주기위해 뒷받침이 되어 주는 교육이 참다운 교육이며, 그것이 바로 몬테소리가 주장하는 - 가장 강조하는 부분이라고 본다. 책을 읽다보면 몬테소리가 제시하는 아이들의 발달에 필요한 교구들을 설명해놓은 부분이 있다. 실습 기간에 내가 맡은 초롱이슬반의 교구구조를 보면서 이 곳은 종이접기 하는 곳, 이곳은 블록 쌓기하며 노는 곳, 이곳은 휴식을 취하는 곳, 이곳은 퍼즐 게임을 하는 교구들이 잇는 곳,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있었는데, 교구를 구성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 빗자루와 쓰레받기교구는 환경관리에 관한 인식을 할 수 있는 교구로써 일상영역을 통해 아이들이 삶의 가장 기본적인 일들을 익혀갈 수 있으며, 퍼즐 교구나 숫자카드 같은 것들을 통해 수에 대한 개념을 익힐 수 있으며, 휴식공간과 함께 비치되어 있는 전래동화책들을 통해 언어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이처럼 몬테소리는 환경이 적절한 자극을 전달하면, 아이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 발달 영역을 익히고 자기 것으로 만들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작품을 책으로만 접하다가 실제로 영화로 보니 내용전개도 훨씬 빠르고 영상이 책만큼이나 잘 짜여 있어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미국 연극계의 최대의 걸작의 하나라는 이름이 가히 부족하지 않을 만큼 훌륭한 것 같다. 이 영화의 주인공 윌리 로만은 원래는 전원생활과 노동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생하지 않고 성공하겠다는 심산으로 세일즈맨이 되고 거의 평생을 그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성실히 일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믿고 그것을 두 아들에게도 세뇌시킨다. 영화에서 보면 윌 리가 아들 비프에게 거는 기대와 집착하는 면이 아주 잘 드러난다. 그런데 두 아들은 윌리의 기대를 저 버리고 타락해버리고 윌리 자신도 오랜 세월 근무한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해고당한다. 그리고 그는 끝내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주려고 매일 다투어온 아들 비프와 화해하던 날 밤에 자동차를 과속으로 달려 자살하고 보험금을 장남에게 남겨준다. 이 작품은 현대사회가 산업화되고 물질문명이 과속화 되면서 인간의 소외현상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교수님과 함께 교재를 통해 배우면서 그리고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더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책에서는 윌리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정신세계와 아주 다양한 과거회상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상황들을 상상해볼 수 있다는 것에 묘한 재미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영화로 직접 보니 여러 가지 복잡한 회상장면과 정신세계를 아주 짜임새 있는 영상으로 잘 만들어 진 것 같아서 책을 통해 접하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주인공 윌리 로만이 오락가락 하는 정신상태의 불안정함을 나타내는 장면과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들을 겹쳐 놓고 있는 면이다. 사실 인간의 내면세계를 외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데 영화에서는 아주 잘 표현하고 있어서 책이 아닌 다른 미디어 형태로써도 이 작품의 매력을 느껴볼 수 있었다.세일즈맨의 죽음에서는 삶의 애착이나 퇴직 후의 삶의 방향, 부부관계 및 자식과의 이해와 사랑, 실망을 다루고 있지만 설상가상 해고를 당한 상황에서 절친한 친구에게 몇 푼 되지 않은 돈을 벌기 위해 친구 아들에게 사정하는 장면이나 과거 자신을 아꼈던 사장의 아들에게 사정하고 화를 내는 장면에서는 인생의 씁쓸함과 서글픔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사회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이 영화의 끝을 윌리 로만의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표현하였다. 하지만 현 시대를 반영했다면 과연 비극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현대는 점점 고령화 사회가 되고 있고, 어느 정도의 노후복지가 잘 되어 있기 때문에 희망적인 결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여인의 초상 (THE portrait of a lady)여인의 초상, 내가 미국 소설 강의의 북리뷰로 택한 작품이다.이 작품은 97년도에 실제 영화로도 개봉이 된 바 있다. 작품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해보자면, 작품의 주인공인 이자벨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총명한 여인이다. 부모가 사별을 하고 고향 미국을 떠나 백부가 있는 영국으로 건너오게 된다. 그 곳에서 이자벨은 수많은 귀족 청년으로부터 프로포즈를 받지만 이자벨은 사랑 없이 하는 결혼은 원치 않고 그는 결혼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고 말을 한다. 뒤에서 표현하지 않고 이자벨을 사랑하는 사촌 랠프는 아버지의 유산이 모두 그녀에게 상속되도록 한다. 이자벨은 랠프와 친분이 있는 벨 부인과 함께 이태리 여행을 떠나게 되고, 그곳에서 오스먼드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오스먼드는 “난 당신에게 완전히 빠져있소”라는 말과 함께 이자벨의 육체 뿐 만아니라 영혼까지 사로잡게 되어 결국 이자벨은 오스먼드와 결혼하게 된다. 작품을 읽다가 중간에 알게 된 것이지만 오스먼드는 이자벨의 막대한 유산을 가로채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꾸며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자벨의 결혼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오스먼드의 집착과 냉혹한 카리스마, 거짓된 사랑이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 뿐 이었다. 이때, 이자벨은 랠프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게 되고 랠프에게 가려고 하지만 오스먼드는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한시도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말로 그녀를 괴롭히나 그녀는 결국 상처를 안고 영국으로 돌아온다. 죽음의 문턱에서 랠프는 그녀에게 사랑고백을 하게 되고 이에 이자벨의 마음은 더욱더 혼란과 상처를 받게 된다. 결국 랠프가 죽고 이자벨은 로마 귀환을 무작정 미루며 가든코트에 머문다. 그녀는 사악한 남편이 기다리는 로마로 다시 돌아가기가 싫은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이사벨은 몇 년 전 굿우드의 편지를 읽으며 야외에 앉아 있을 때 워버튼이 다가와 청혼했던 나무의자를 알아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굿우드가 갑자기 나타난다. 랠프는 굿우드에게 이사벨의 곤경을 얘기해주면서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새하얀 번개” 같은 그의 입맞춤을 받으며 이사벨은 굿우드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굿우드 로부터 달아나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는다. 결국 이자벨은 로마로 돌아가게 된다.이 작품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여인의 인생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자벨은 정말 아름답고 똑똑하며 당차고 세상을 알고 싶어 하는 그런 모험심을 가진 젊은 여인이다. 그런 부분이 같은 여자로서도 너무 부럽고 끌렸던 주인공의 매력이었다. 그런 그녀의 매력은 주위에 많은 남자들에게 호감을 갖고 정말 부유하고 신사다운 워버튼 경이 청혼을 했지만 그녀는 바로 앞에 놓인 행복보다는 다른 새로움을 찾기 위해 자신의 내면의 어떤 이상적인 사랑을 찾기 위해 그의 청혼을 거절하는 부분에서는 “아 정말 자존심도 강할뿐더러 이자벨은 정말 당찬 여인”이라는 이미지로 내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거짓으로 다가온 오스먼드와 결국 결혼하게 되고 훗날 이자벨이 그의 진심을 알게 되고 고통스러워하는 부분에서는 정말 안타까웠다. 그녀는 어찌 보면 이자벨은 스스로 자신의 삶의 고통을 택한 건지도 모르겠다. 사촌 랠프가 죽고 극한 상처를 입은 그녀에게 예전에 자신에게 청혼했던 신사 워버튼 경이 다시 나타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지만 그녀는 그 손을 잡지 않고 결국은 로마로 돌아가게 된다. 이 부분은 정말 이해되지 않았다. 왜 그녀는 다시 로마로 돌아간 것일까? 나 같았으면 오스먼드의 사악함을 알아챘을 때 배신감을 느끼고 도망치려고 발버둥 쳤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여자라면 누구나 오스먼드 같은 권위적인 남자보다는 랠프 같이 마음 따뜻한 남자가 더 좋을 텐데 이자벨은 왜 그 고통속으로 다시 되돌아 가려고 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 작품에서 작가는 무엇을 시사하기 위해 이렇게 결론지은 것일까? 이자벨처럼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스스로 고통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사회의 따가운 눈총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뜨겁게 끌어당기는 모성애에 이끌려 미혼모로 살아간다거나, 재벌 2세로 태어나 굳이 힘들게 공부하고 돈벌지 않아도 그 권위를 세습 받을 수 있지만 그런 길 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발전을 이루기 위해 험난한 길을 택한다거나 말이다. 하지만 이런 고통은 우리가 선택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그 선택을 끊을 수도 있다. 나는 이자벨이 왜 자신의 고통을 끊지 못하고 다시 불같은 고통 속으로 자신을 내던진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자신의 숙명이라고 생각한걸까? 초반의 그 당찬 여인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어쩌면 이자벨은 불행한 그 결혼생활에 체념을 했거나 아니면 그 환경에 익숙해져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환경이 만든 이자벨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더구나 영화 속에서 이자벨이 오스먼더를 증오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오스먼드에게 종속되어 인정받지 못해 힘들어하는 모습에서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자벨은 자기 스스로 고통스러운 결혼생활과 삶을 택했다. 수많은 남자들이 이자벨에게 고백을 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바치고 사랑해주고 힘이 되어주는 남성들에게 아마 어떠한 매력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자벨은 자신을 힘들게 하고 두렵게 만들고 이기적인 남자의 모습에서 남성적인 매력을 느끼고자신이 더욱 더 노력해서 그 남자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자신에게 행복한 결혼 생활이라고 느끼는 여자 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 이자벨은 매우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친 여성으로 그려졌다. 그래서 결혼만큼은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며 여러 귀족 남성들의 프로포즈도 마다한 여인이지 않은가? 그 모습에서만 봐도 자신에 대한 굳은 의지가 있는 여성이란 걸 알 수가 있다. 그런 점을 미루어 본다면 이자벨이 다시 고통스런 결혼생활로 돌아가려고 한 그녀의 의지가 조금은 이해가 된다. 자신의 대한 믿음과 어쩌면 이 작가도 그 시대의 여성상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