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시대 귀족사회를 통해 본 중국의 고대- 목차 -Ⅰ. 서론Ⅱ. 위진 귀족사회성립의 배경과 과정1) 정치?사회적 배경2) 구품중정제의 폐단3) 사상적 요인Ⅲ. 세설신어를 통해 본 위진시대 귀족사회의 특징1) 유가의 예교 그늘 속 귀족들의 모습2) 그늘 밖으로 나온 귀족들의 유교적 속박에 대한 거부3) 탈유교적 귀족들에 대한 이해Ⅳ. 결론Ⅰ.서론후한말?위진시대는 두 차례에 걸친 당고 사건과 팔왕의 난, 영가의 난 등으로 인해 혼란과 분열이 계속된 시기였다. 더욱이 환관의 전횡, 과중한 세금과 요역, 관료의 부정부패, 자연재해 등은 왕조의 몰락과 사회변화의 원인이 되었다. 변화 속에서 사회를 주도하며 정치?사회적인 영향력을 갖고 지적활동에 주도적이었던 계층들을 사대부라고 한다. 귀족 혹은 호족이라 불리는 사대부는 한대부터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다. 귀족사회는 3세기 이후부터 당나라 때까지 중국사회의 특색을 이루고 있다. 귀족사회라고 하는 것은 귀족 또는 호족이라 불리는 사회층이 넓게 존재하고 그들이 정치·사회·경제·문화의 모든 면을 담당하는 중심적인 존재가 되는 체제이다.후한이 무너지고 위진남북조 혹은 육조시대라 불리는 분열의 시대가 도래 한다. 이러한 분열과 혼란의 시대는 후한말인 180년대부터 시작되고 있었고,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 400여 년간 이어졌다. 이 400여 년간의 시기에 전제군주제는 확립될 수 없었지만, 귀족들은 명맥을 이어 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를 ‘귀족제 사회’라 규정할 수 있다. 사회계층은 몇 갈래로 분화되고 가문은 각각의 계층으로 고정화되는 경향이 강했다. 그리고 그 최상층에 자리한 명문이 되기 위해서는 대대로 풍부한 교양을 갖춘 지식인을 배출해야 했다. 무인은 전공을 아무리 많이 세워도 이들 귀족들 틈에 낄 수 없었다. 귀족계급은 무사가 아니라 교양 있는 문인이었다. 무력집단을 장악한 무인이 새로운 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 특히 화북을 지배한 여러 이민족들은 무력을 바탕으로 국가를 건설하였고, 그곳에서 무인가문도 생활을 지향하는 동안 호족층에 속하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사유재산의 포기와 향촌 사회의 일원적 지배를 위한 공권력과의 결탁이라는 모순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식인적 호족들은 오히려 자기모순을 향론의 지지를 받고 평판을 확립하는 기회로 삼아 향촌 사회의 지도력을 높이는 경우가 많았다.향촌 사회의 지식인들이 점차 ‘은일군자’ 되어갔다 하더라도 국가?천하의 명사로 이어지는 청의는 계속되었으며 탄압을 당한 명사는 더욱 유명해졌다. 탄압을 받으면서도 더 넓은 곳에서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계속 재야명사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은 황건의 난을 시작으로 현명한 사대부 계층을 만들어냈다. 황건의 난을 계기로 후한 정부는 당고의 금지령을 해제시켰으며 재야 명사들을 조정으로 초빙하는 등 정책적으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당고사건으로 인해 입지가 좁아졌던 재야의 인사들이 황건적과 연계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황건의 난은 재야의 명사들을 정치무대로 불려낸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황건의 난으로 인한 본격적인 혼란은 향촌사회로 하여금 존망의 위기를 가지게 하였고 그 결과 호족과 지식인들이 협동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향촌의 질서 회복을 추구함과 동시에 향촌사회를 보다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권력과의 결탁을 추진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지식인이 다리 역할을 하며 조조에게 모이게 된 것이었다. 마침내 213년 조조가 위공으로 봉해지면서 ‘위공국’이 성립했을 때 정부의 주요 관직들은 명사들이 장악하였고 이후 6조의 귀족들은 이들을 중심으로 성립되어 가게 되었다.이러한 위제국의 성립과 함께 중앙정부의 대신 진군은 관제 및 관리 등용법인 ‘구품관인법’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구품이란 1품부터 9품까지 벼슬의 품계를 9개 등급으로 나누는 것으로 관료 체계에서 신분조직을 정비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구품관인법의 관리 등용은 각 군국 출신자 1명을 군국의 ‘중정’으로 각각 임명하고, 은 진정한 의미의 중정이 되지 못하고, 권력자 층의 평가에 따라 향품을 매기게 되는 폐단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249년 위 조정의 실권을 잡은 사마의에 의해 군중정위에 소수의 주대중정이 설치된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 주대중정은 정부고관이 겸직하였는데, 주대중정의 설치로 인해 보다 많은 지역에서 향품을 수여하는 권리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결국 구품중정제는 ‘향거리선’을 실현하고 향촌의 공동체 원리를 국가에 확장시키려던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호족 또는 명사 집안에서 대대로 높은 관인이 배출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렇게 배출된 관인들의 관직은 자동적으로 세습되었고 기존의 호족이 세습되는 관직을 가지게 됨으로써 귀족으로 상승하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형성이 된 귀족들은 소위 ‘문벌’로써 세대를 거듭 할수록 자신들의 계층을 고정시키게 되었다.구품중정제도는 6조 제국으로 이어졌으며 특히 동진에서 남조에 걸친 귀족제 사회의 제도적인 기초 형성에 기여했다. 특정 성씨의 집안이 향품을 받고 그 집안 출신자는 정부 최고 요직을 점하였으며 초임관인 경우에도 최고 관직으로 향하는 출세가 보장되었다. 이렇게 같은 지식인층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고위 관직을 점하는 집안과 출세를 보장받지 못하는 집안 사이에는 격차가 벌어지게 되었고 일반 서민으로 인정되는 계층과의 구별도 뚜렷해지게 되었다. 즉, “상품에는 한문이 없고 하품에는 세족이 없다"는 말 그대로 계층 구조가 뚜렷하게 나뉘면서 귀족제 사회는 점차 고착화되었다.이러한 귀족제 사회가 정착된 배경에는 구품관인법과 중정제도의 운영이 큰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중정제도의 인물 평가가 기존 향론의 비중이 줄어들고 권력자 층의 목소리를 존중할 수밖에 없어졌다 하더라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당시의 인물평론을 참고로 하는 것이었다. 기존 계층의 향론에서 나온 평론의 터전은 위진정권 안에서 관직을 차지하고 있는 계층 간에 행해지는 담론이다. 이러한 담론을 청담이라고 한다. 한말의 청의에서 유래된 청담이 국가나 사회적 기반의 형 되자 일족인 조상이 이를 보좌하였는데 이때 조조의 사위인 하안이 등용되어 함께 정국을 담당하게 되었다.하안은 학식이 풍부하고 노자에 관한 논문인 「도덕론」과 『논어집해』를 지은 사람이었다. 그는 겨우 스무 살 난 천재적인 철학자인 왕필을 높이 평가하고, 궁극적인 실제로서의 ‘도’를 ‘무’라고 생각하는 왕필과 고도의 철학적인 담론을 주고받았다. 이는 기존의 유학에서 형이상학으로서의 ‘역’학을 뽑아내고 노자와 장자 등과 함께 궁극적인 도의 학문인 ‘현학’이라 불리는 형이상학의 장르를 여는 것이었다. 이런 하안과 왕필의 청담은 현학이라는 사상을 통해 한 시대를 풍미하고 이후 청담의 모범이 되었으며 당시 형성되고 있던 귀족사교계의 풍조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그러나 249년 사마의에 의한 쿠데타로 인해 조상과 하안이 주살되고 왕필도 스물넷에 병사하자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마의에 의한 쿠데타로 중앙정계는 그의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등 사마씨에게 장악되었다. 사마씨들이 위나라를 뺏으려던 이 혼란스러운 시기, 마치 도피라도 하듯 은일적인 풍조가 지식인들 사이에서 확장되어갔다. 그러한 인물 중 전형적인 형태가 바로 ‘죽림칠현’이다. 이들은 거문고를 뜯고 술에 취하여 슬픔을 달래기도 하며 책을 읽고 도를 이야기 하는 등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추구하였다. 그들이 본성을 추구하는 방법은 각자 달리했다. 산도와 왕융은 진나라 왕실을 섬겨 영달하였고, 완적은 신중한 처세를 관철하면서도 즐겨 반유교적인 언동을 취하였다. 또한 혜강은 관료사회의 허위성을 부정하고 은자풍의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하여 형사하는 등 그들의 자유로우면서도 진지한 삶의 방식은 이후 6조시대 문화인의 전형이 되었다.죽림칠현을 비롯한 이들이 이렇게 ‘은일’을 즐기는 동안 위와 진 사이에서는 선양이 이루어져 265년 사마염이 무제로 즉위하였다. 이것이 서진시대의 시작인데 이때에도 철학과 문학을 둘러싼 논의와 인물비평이 결합된 형태의 청담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Ⅲ. 세설신어를 통해 본 위진시대 귀족사회의 살 때 이후 후원에서 채소를 뜯다가 손가락을 다쳤는데 엉엉 우는 모습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아파서가 아니라 ‘신체발부는 감히 훼상해서는 안된다’고 했기 때문에 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유가의 근원 중에서도 효를 숭상하는 귀족사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다음으로 위진시대의 귀족사회의 특징 중에서 ‘청렴’과 ‘검소함’을 들 수 있다. 11장을 보면 관녕과 화흠이 채소밭을 일구다가 땅에 금 조각이 있는 것을 보지만, 관녕은 이를 돌이나 기와장과 같이 취급하였다. 또한 훌륭한 마차가 지나가도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탐하지 않았는데, 금에 대해 마음이 있고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화흠을 보고는 친구가 아니라 하였다. 21장을 보면 왕융의 부친 왕혼이 죽자 부친의 은덕을 입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수백만 전의 부의금을 들어왔다. 하지만 왕융은 이를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이러한 사례들로 미루어보아 귀족들에게 사치와 재물을 탐하는 것은 수치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의 특징은 ‘덕행’인데 그것은 19장에서 왕융이 태보의 뛰어난 덕행을 칭찬하는 것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2) 그늘 밖으로 나온 귀족들의 유교적 속박에 대한 거부반면 지금까지 언급한 위진시대 귀족의 긍정적인 면모와는 다른 제멋대로 방종하고 술을 지나치게 즐기는 귀족들도 존재하였다. 이들은 효로써 천하를 다스리겠다는 사마씨 왕실의 사상에 반기를 들고 자연과 더불어 술과 오락을 즐기며 은거하는 것으로 그들의 저항을 표출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죽림칠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귀족들의 방탕한 생활은 『세설신어』의 제23편인「임탄」에 잘 나타나 있다. 2장을 보면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완적은 모친상을 당했을 때도 진 문왕의 연회석상에서 술과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완적은 모친의 장례를 치르게 되었을 때, 살찐 돼지 한 마리를 삶고 술 두말을 마신 연후에 영결에 임하여 “끝났구나.”라고만 했다. 이 한번의 통곡 끝에 피를 토하더니 오랫동안 혼절했다.)이런 완적렸다.)
프랑스 혁명의 발전-1799 ~ 1848-1. 공화국의 탄생부터 나폴레옹 제국 전의 사회1) 공화국의 탄생1792년 8월 10일 연맹제에 참여하기 위해 입성한 국민방위대와 파리 민중들이 힘을 합쳐 튈르리 궁을 습격하였다. 이에 왕은 의회로 피신하게 되고, 입법의회는 왕권의 정지와 새로운 헌법 제정을 위한 국민공회의 소집을 결정하였다. 이 사건은 공화제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흔히 ‘제2의 혁명’이라고도 불린다. 입법의회는 8월 10일 사건을 계기로 입헌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채택했다. 1792년 9월 21일에 국민공회가 소집되고 만장일치로 군주제를 폐지하고 프랑스 제1공화국 탄생을 선포했다.국민공회는 다수의 중도적인 평원파와 지롱드파, 자코뱅파 등으로 구성되었다. 지롱드파는 부유한 부르주아의 이익을 대변하여 경제적 자유주의와 지방에 권한을 주는 연방주의를 주장하였고, 자코뱅파는 소부르주아와 중간 부르주아의 이익을 대변하여 현실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통제 경제와 강력한 중앙집권주의를 주장하였다.루이 16세의 재판을 계기로 지롱드파와 자코뱅파는 대립을 하게 되고 국내외적 혼란 속에서 급진적인 상퀼로트들에 의해 지롱드파가 숙청되었다. 권력을 잡은 자코뱅당의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적 성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 하에 공포 정치를 실시하였다. 1793년 10월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정부’를 선언하고 왕비의 처형을 시작으로 해서 수많은 반혁명 혐의자들을 처형하였다. 그의 독단적인 공포 정치는 자코뱅파를 분열시키게 되고 혁명정부의 법무장관이었던 당통은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던 인민 민주주의의 자유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이에 로베스피에르는 당통을 제거하고 전권을 장악하였다. 사람들은 점차 공포정치에 회의를 품게 되고 동료들도 등을 돌리게 된다. 1794년 7월 28일 마침내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들에 의해 처형을 당하게 되는데 이것이 테르미도르의 반동이다.2) 총재 정부 시대테르미도르의 반동을 일으킨 의원들은 1795년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였다. ‘95년 헌다. 그리고 튈르리 궁에 스키피오와 브루투스, 워싱턴, 미라보의 동상 등을 안치해 자신이 혁명의 계승자임을 과시하였다. 또 그는 프랑스 성직자들 사이에 만연한 무정부 상태를 정리하기 위해 1801년 7월 15일 교황과 정교협약을 맺었다. 이로 인해 국가는 주교를 임명하고 성직자에게 봉급을 지불하며, 성직자는 국가에 충성을 서약할 의무가 생겼다. 이제 가톨릭은 ‘국가 종교’가 아니라 프랑스인 다수가 믿는 종교가 되었다. 나폴레옹이 가톨릭을 인정한 것은 종교적인 동기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동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톨릭에 남아 있는 혁명 세력을 누르고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인 프랑스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였다.나폴레옹은 대외적으로 프랑스를 위협하는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평화를 가져왔다. 나폴레옹은 1800년 마렝고에서 러시아를 물리치고 1801년에는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켜 뤼네빌 평화조약을 승인시켰다. 그 조약에 의해 라인 강 연안에 벨기에 공화국이 세워졌다. 이로 인해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함께 제2차 대 프랑스 동맹을 맺었던 영국은 1802년 3월 아미앵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눈부신 성공을 발판으로 나폴레옹은 1802년 5월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종신 통령이 되었다. 또한 1804년 12월 2일에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로마 교황을 초청해 스스로 프랑스 제1국의 황제가 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나폴레옹은 1804년 3월 21일 민법전을 편찬하였다. 민법전은 간결하고 명료하게 써져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세기 프랑스 각 가정마다 반드시 성서와 민법전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법전에는 개인의 자유와 노동의 자유, 양심의 자유, 국가의 세속화, 법적 평등을 명백히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 민법전을 나폴레옹의 이중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로 나폴레옹의 통치는 독재적이고 반동적이었다. 그는 철저한 검열제에 의해 언론의 자유를 제한했다. 또한 재판 없이 구금하거나 영장제도를 무시함으로써 국민의 전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독일로 진출, 빈을 점령하였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는 북으로 달아나 아우스터리츠 부근에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와 합류, 8만 명이 넘는 동맹군을 조직하여 7만 명의 나폴레옹 군과 대치했다. 아우스터리츠는 현재의 슬로바키아의 슬라프코프이다. 나폴레옹은 동맹군의 중앙을 돌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삼제회전(三帝會戰)이라고도 한다. 전사자 2만 명을 낸 러시아는 폴란드로 물러나고, 오스트리아가 휴전을 요청하여 프레스부르크화약을 맺음으로써 제3회 대프랑스동맹은 붕괴되었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의 전성기를 상기시키는 전투이다. 1806년에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을 격파한 후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시키고 라인 연방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여전히 프랑스로서는 대적하기 힘든 상대였다. 이에 나폴레옹은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1806년 11월 영국의 모든 상품이 대륙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대륙봉쇄령(베를린 칙령)을 발령하였다. 대륙봉쇄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협조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1807년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와 평화 동맹을 체결하여 대륙봉쇄령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나폴레옹은 점령한 정복지에 자신의 가족과 형제들을 왕으로 앉혔다. 형 조셉은 나폴리의 왕이 되었고,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는 네덜란드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막내 동생 제롬은 독일 왕녀와 결혼하였다.1810년, 외국인 신병들이 점점 가세한 프랑스 군대의 수적 우세와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 덕분에 제국은 유럽 전체를 호령하게 되었다. 130개의 도가 벨기에, 네덜란드, 라인란트, 달마티아 등 광대한 지역을 아우르게 되었다. 이처럼 1810년 정도까지 프랑스는 최고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3) 나폴레옹 제국의 몰락최고 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프랑스에 몇몇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곳곳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민족운동은 1803년 스페인이 나폴레옹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이래 계속 증가되어 왔다. 1808년부터패를 당하게 되고, 이에 여새를 몰아 동맹군은 파리로 진군하게 된다. 결국 나폴레옹은 항복을 하게 되고 1814년 4월 6일 퇴위에 동의하였다. 나폴레옹은 엘바 섬의 군주로 보내졌으며, 프랑스의 국경은 1790년의 상태로 복귀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1815년 3월에 섬을 탈출해 파리 로 진격했다. 나폴레옹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왕정복고를 위해 돌아왔던 루이 18세와 그의 각료들은 벨기에로 도망쳤다. 나폴레옹이 다시 권력을 되찾자 반 프랑스 동맹은 100만의 병력을 동원해 전쟁을 선포하였다. 계속해서 항전하던 나폴레옹은 1815년 6월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하며 다시 코르시카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그 섬에서 생을 보내다 1821년 5월 5일 사망하였다.유럽을 지배하려는 나폴레옹의 야망이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의 제국은 프랑스 혁명이 낳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씨앗을 전 유럽에 뿌렸다. 그는 점령한 지역에 봉건제를 폐지하고 혁명적 제도를 도입하였다. 또한 나폴레옹의 점령은 그 지역 국민의 저항을 야기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유럽 민족주의가 성장하고 발전하였다.3. 부르봉 왕조의 부활과 몰락1) 빈 체제프랑스의 팽창주의가 나폴레옹의 패배로 막을 내린 뒤, 대 프랑스 전쟁을 이끌었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영국 등 유럽의 열강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모여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했다. 빈 회의를 통해 유럽에서는 절대왕정을 유지하고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적 혁명에 반대하기 위한 열강들의 복고적 성격의 협력 체제가 나타나는데, 이를 빈 체제라고 한다. 빈 체제는 신성동맹과 4국동맹을 기반으로 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재상이었던 메테르니히가 주도했기 때문에 ‘메테르니히 체제’라고도 한다.1814년 9월부터 1815년 6월까지 열린 빈 회의는 각국 영토와 지배권을 프랑스혁명 이전 상태로 복구한다는 정통주의와 강대국 간의 세력 균형이라는 원칙에 의해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나타난 유럽의 정치적 변동을 복고적으로 수습하였다. 빈 회의를 통해 유럽의 열강들 탄압을 강화하였다. 1820년에는 에스파냐와 이탈리아의 나폴리, 피에몬테 등에서 자유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메테르니히는 영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랑스와 함께 무력간섭을 단행하여 이탈리아에는 오스트리아가, 에스파냐에는 프랑스가 각각 진주하여 자유주의 운동을 진압하였다.빈 체제는 1830년대 초에 이르러 그리스의 독립과 프랑스 7월 혁명 등을 겪으며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1821년부터 1829년까지 진행된 그리스의 독립전쟁에서 영국과 러시아는 그리스의 자유주의자들을 지원함으로써 개별 국가의 이익이 '반자유주의'라는 동맹의 협의를 무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프랑스에서는 1830년 7월 파리의 시민들이 봉기하여 샤를 10세를 폐위시키고 루이 필리프의 새로운 입헌왕정을 세웠다.빈 체제는 1848년에 유럽을 뒤흔든 혁명으로 붕괴되었다. 프랑스에서는 2월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3월 혁명으로 메테르니히가 실각하였고,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던 중부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입헌정부가 수립되었다. 독일의 영방 국가 대표들은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통일 문제와 헌법 제정을 협의하였고, 이탈리아에서도 통일운동이 일어났다. 이로써 옛 질서를 유지하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압하기 위한 빈 체제는 막을 내렸다.2) 왕정복고나폴레옹의 백일천하가 실패한 후 루이 18세가 왕으로 추대되어 왕정이 복고되었다. 루이 18세는 나이 들고 우유부단했지만 신중하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왕이었다. 그는 혁명의 성과를 부인하면 왕정이 유지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자유주의적인 통치를 하였다. 그는 먼저 의회를 정비하는 일에 착수했다. 귀족원을 정비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위원들을 파면시키는 대신 94명을 새로 임명함으로써 귀족원의 총인원은 200명을 넘었다. 또 귀족원의 직위는 세습될 수 있음을 선언했다.1815년 8월 중의원 선거에 의해 왕당파가 대거 의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루이 18세는 이에 기뻐하며 “이번 의회는 최고의 의회”라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