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그래피의 찬성과 반대,그 이분법적 틀 안에 가려진 이데올로기I. 서론 - 1. 포르노그래피의 어원 - 우리가 흔히 포르노(porno)라 부르는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의 어원은 “최하층의 여성 매춘부”를 의미하는 ‘porne’와 “글쓰기, 그리기”를 의미하는 ‘graphos'의 두 고대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매춘부에 관하여 쓰기”를 의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이처럼 포르노그래피는 시작부터 표현의 대상에서 남성은 배제하고 여성, 그것도 성을 매매하는 매춘부에 한정시킴으로써 성을 구입하는 것은 남성, 성을 판매하는 것은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포르노 산업을 통해 그러한 이미지는 계속되고 있다.2. 포르노그래피의 정의 - 인간생활의 기본적 현실을 묘사하기보다는 독자를 성적으로 흥분시키기 위하여 에로틱한 심상을 야기함으로써 심리적 최음제의 역할을 하려하는데 그 목적을 둔 포르노그래피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의 성적 행위의 사실적 묘사를 주로 한 문학, 영화, 사진, 회화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성행위 묘사 여부로 포르노그래피를 판단한다는 한계를 지닌 의미라고 생각된다.반면에 사회학적으로 접근한 포르노그래피의 정의는 “섹스에 관하여 쓰기” “관능적인 것의 묘사” “성적행위의 묘사” “성의 표현” 등으로 해석되어 왔으나 현대에 와서는 “성에 대한 음란 표현물” 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는 포르노그래피를 구분하는 기준이 시대가 정하는 검열의 경계와 독자층과의 관계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절대적 규준 역시도 시대와 사회, 혹은 개인의 가치판단에 따라 변하게 됨을 의미한다.단적인 예로 우리나라 헌법 상에서 “음란물”로 명시되어 검열의 대상이 되는 포르노의 정의는 첫째, 인체의 특정부분을 확대하여 노출시키거나 성행위 장면이 지나치게 음란하고 선정적인 것. 둘째, 기성, 괴성을 수반한 원색적이고 직접적인 성애를 묘사한 것. 셋째, 사회통념에 어긋나는 변태적 성행위, 동성애, 혼음, 매춘, 강간, 윤간, 근적 관점, 보수주의적 관점) 을 살펴보고, 포르노를 분석하여 그 속에 비춰진 여성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한다.II. 본론 - 1 1. 우리 사회의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논의 - 가. 자유주의적 관점 - ① 표현의 자유성이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일 것이다. 포르노는 이러한 성을 표현하고 있다. 소위 ‘서비스컷’ 이라고 일컬어지는 성행위 장면은 영화나 소설에서 흥행을 위해 삽입되어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한다. 최근 화제를 끌고 있는 미국드라마 ‘스파르타쿠스’ 는 드라마의 주제나 이야기 흐름 보단 과도한 노출 장면과 성행위 장면으로 사람들에게 회자될 정도로 성에 대한 표현, 그리고 그 도구로서 포르노는 성의 생산적 기능만을 이야기하던 시대에서 재생산의 촉진을 돕는 촉매제로 우리 사회에서 표현된다.또한 포르노는 성의 건전한 도피처이자 편리한 대체적 성경험을 제공하기도 한다. 성이란 주제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특성에 따라 쉽게 표출 될 수 없지만 포르노는 쉽게 이야기 될 수 없는 성에 대해 자유롭게 표현함으로서 성적인 해방구 역할을 한다. 특히 성에 대해 억압과 소외받고 있는 대상들에겐 성적인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가학·피학적 변태 성욕자에겐 현실적으로 자신의 성적 취향을 해소할 수 있는 대상을 찾기 어렵지만, 간접적으로 포르노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낌으로서 성적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것이다.이러한 표현의 자유에 입각한 포르노의 자유주의적 관점은 개인의 성적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는 어떠한 종류의 검열에도 반대하고 있다.② 정치적 의미포르노를 보고 있는 자유주의적 관점의 다른 하나는 진보주의적 남성학자들에게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성을 억압하고 금기하는 태도 자체가 위계적 이분법에 근거한 정상적이고 규범적인 성과 비정상적이고 일탈적인 성으로 구분하는 지배 권력의 통치 의도에 부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러한 지배 권력에 저항하는 행위 자체로 포르노그래피를 주장한다.권력 저항으로서의 포르노의 사례는 18세기 프랑을 미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연구자들은 일반인들과 성범죄자들 사이에 포르노그래피의 이용 양식에 대한 어떠한 차이점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이러한 조사 결과들을 볼 때, 포르노그래피와 성범죄 간에 뚜렷한 인과 관계를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포르노그래피가 일종의 판타지를 통한 억압된 성적 욕구의 해소처를 제공한다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 또한 성범죄가 기본적으로 여성 억압적이고 보수적인(그리고 대체로 포르노그래피를 억압, 음성화 시키는) 가부장제 구조 내에서 더욱 강력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볼 때, 성범죄의 발생이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비난 근거가 되기는 상당히 부족한 점이 있다 할 것이다.나. 보수주의적 관점 - 포르노그래피의 보수주의적 관점은 포르노가 혐오감과 불쾌감을 주며 현 사회의 도덕적 합의를 위협하여 그 자체를 부도덕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의 성행위를 그 본질로 매체를 제작, 유통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성적 윤리에 어긋나는 행위이라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으며, 이것은 나아가 포르노가 사회적으로 유해한 태도나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한다. 보수주의적 관점에선 보다 실질적인 측면에서 포르노그래피 확산이 모방을 통해 사회에 강간, 가학적 성 행위를 확산시킬 수 있다고 보고 있다.2. 서구 페미니스트들의 논쟁 - 가. 반포르노파 - ‘포르노는 여성에 대한 비하이자 폭력이며 이를 조장하는 남성 지배의 도구이다’라고 드워킨은 주장하고 있으며, 매키넌 역시 여성의 종속과 착취를 조직적으로 실행하는 정치적 실천 행위로써 포르노를 성표현물이라고 보는 방식의 오류를 지적한다. 이들의 입장에서 포르노는 “강제화 된 성관계, 성정치의 실천, 성불평등의 제도”로 보고 있으며 이것은 남성에 의한 여성 섹슈얼리티의 착취, 여성 종속을 심화한다고 보고 있다.러셀은 포르노와 강간의 인과관계를 강조하면서, 포르노를 강간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즉 왜곡된 정보로써의 성적 욕망을 구성하는 주요 원천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남성의 관 알 수 있듯이 포르노그래피에서 성적 묘사의 대상은 여성이고, 그 것을 소비하는 대상자는 대부분 남성들이다. 때문에 포르노그래피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의 이미지는 남성이 바라는 대상화된 모습으로 살 냄새만 풀풀, 풍기는 동물보다도 못한 모습으로 여성은 남성에 의해서라면 무시되어도 괜찮은 단순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섹스가 여성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여성에게도 분명히 섹스가 존재한다. 문제는 포르노그래피에 표현되고 있는 여성의 성은 여성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2. 포르노그래피의 경험 - “야동을 한번도 안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본 사람은 없다.” 우스갯 소리지만 이처럼 한국에서 성인남성의 거의 대부분이 포르노를 본 경험이 있고, 또 그 중 대부분이 현재 진행형으로 포르노를 보고 있다. 언론과 법에서는 포르노를 마치 인간의 정신을 황폐화 시키는 악의 축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그런 이야기는 언론과 법의 겉치레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즉 남성세계에서 포르노는 공공연하게 보아지고 있고, 대부분의 남성이 그 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반면 한국에서 많은 여성들은 포르노를 접하지 못하거나 멀리 한다. 이유를 들자면 첫째로 대부분의 포르노가 남성을 위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여성의 성을 억압, 왜곡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봄으로써 성적쾌감을 얻기 보다는 불쾌감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둘째는 한국의 가부장제 사회 구조 속에서 여성은 성적인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인식되는데 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성을 밝히고 성적인 욕망에 대해서 능동적이면 그 여성은 남성들뿐만 아니라 같은 여성들에게도 질타 당하고, 여성의 계급이 결정되는 남성과의 결혼에 있어서 자신의 상품가치가 떨어지게 되는 빌미가 된다. (물론 이런 인식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는 예로부터 시작된 유교중심의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남성들에게 좋은 결혼 상대는 성적으로 무지하고 정숙한 여성이고, 성적인 쾌였을 때, 포르노를 본 대다수의 남성들은 포르노를 통해 사회화 받은 이데올로기를 사회 속에서 성 불평등의 모습으로 재현한다. 즉 남성들은 포르노를 통해 생성된 이데올로기는 현실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서의 모습으로 여성을 억압함으로서 실현된다.4. 포르노그래피 속의 여성 - 가. 포르노의 내용적 측면 분석 - ① 포르노의 장르에 따른 분석* 강간강간 포르노 공통된 특징은 처음에는 절대적으로 저항하는 움직임을 보였던 여성들이 강제적인 방식으로 성관계를 맺으면 점점 여자도 성적인 흥분을 맺고 즐기게 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최초에 여성이 보였던 거부반응이 단순히 내숭으로만 보여짐으로써 여성이 강간의 피해자가 아니라 같이 즐긴 동시 책임자로 인식된다. 이렇게 강간 포르노 속에서는 일방적 의사에 의한 강간과 쌍방의 의사에 의한 성관계의 구분이 모호해 지고, 그로 인해 여성이 강간을 당하고 싶어 하고 즐기고 있다는 어긋난 인식을 전달한.* 여성가학 - 수간, SM수간에서는 여성들이 동물들과 성관계를 갖는 모습을 다룬다. 여기서 여성은 억지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동물과의 관계를 즐긴다. 여성이 동물과 성관계를 갖게 되고, 더욱이 그 관계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여성은 동물과도 섹스를 할 수 있는 비인격적 존재로 만든다. SM은 각종 가학적인 행위를 담은 포르노로 SM에서 주로 가학의 대상은 여성으로 남성은 여성에게 각종 폭력적이고 변태적인 행위를 시도하며 여성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이런 행위를 통해 성욕과 쾌락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동물과 성관계를 맺는다거나 가학하는 행위는 매우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여성의 성적 존엄성을 침해하는 동시에 여성을 비하하고 비인간화 한다. 현실적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 포르노에서는 이뤄지고 있지만 여성들이 이를 즐기는 것으로 표현됨으로써 여성들을 성적으로 문란한 존재, 남성보다 낮은 지위를 가진 물적 존재로 전락시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당연시하고 지속시키는 도구로 이용된다.* 반윤리적 행위 -현된다.
호남의병사I. 서론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외세로부터 수많은 침략을 받았다. 그때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이 스스로 전쟁에 참가하여 외세에 저항했고, 그들의 이러한 노력들이 우리나라를 오늘날까지 독립국으로 유지시켜 나아 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처럼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일어난 군사를 우리는 의병(義兵)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의 의병활동은 임진왜란이나 몽고의 침입 때에도 두드러지지만(물론 그 외에도 많은 경우가 있다.) 최근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가 다시 대두되고 있는 상황이기에 한말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항일 의병 항쟁을 그 주제로 정했다.개항 이후 우리의 근대사는 제국주의 외세의 침략을 배격하는 반제 ? 반침략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외세에 대한 저항은 동학농민전쟁을 거쳐 의병 전쟁으로, 그리고 다시 식민지 시기의 독립 전쟁으로 면면이 이어지면서 근대 민족 운동사의 큰 줄기를 형성하였다. 이 가운데 의병 전쟁은 일제의 침략이 거세지던 1894년을 기점으로 20여 년 간 한반도 전역에 걸친 최대의 항일 무장 투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의병 활동 중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호남지방의 의병을 어땠을까? 지금부터 호남지방의 의병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II. 호남지방의 의병전쟁1. 의병운동 준비기 (1905.11 ~ 1907.8)1). 최익현의 태인의병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항거하기 위한 의병이 전국에서 크게 일어났다. 하지만 당시 호남지방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에도 반일의병을 조직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전북 고창 출신의 유생 고석진과 진안 출신의 유생 최제학, 그리고 전 낙안군수 임병찬 등이 의병을 도모하였다. 이들은 거병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다가 충남 정산에 머물던 최익현을 전라북도에 모셔 와 의병장에 추대할 계획을 세웠다. 최초 최익현은 호서의 유생들로부터 맹주로 추대되었으나 이미 민종식이 거의하였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고, 삼남의 각 지역에서 서로 호응하여 봉기해야 일였으며, 해산의 촉구에도 끝까지 남은 최익현을 비롯한 13인은 6월 14일에 진위대에 의해 모두 체포, 서울로 압송되었다.2). 태인의병의 영향과 의의, 그리고 한계약 열흘 만에 태인의병의 활동은 종식되었지만 이들이 호남지역의 후기의병에 미친 영향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1907년 후반에 시작된 후기의병의 주무대가 전라도였다는 점을 보더라도 태인의병이 기폭제의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쓰시마 섬에 끌려간 최익현 일행이 온갖 고초 끝에 순국한 사실이 전국에 널리 파급되었기 때문에 태인의병의 영향력이 비단 전라도에서 그치지 않고 전국적으로 퍼졌음은 물론이다.* 1906년 11월 전 주사 백낙구가 고광순, 이광선 등과 통모하여 구례에서 의병을 이끌고 광양, 순천 으로 진출. 이 때 의병장 백낙구는 부대를 이끌고 다시 구례로 퇴각하였으나 수일 후 체포됨.* 1906년 12월 양한규가 남원에서 봉기, 진위대를 습격했으나 역부족으로 패함. 양한규는 전사하고 박재홍은 체포됨.* 1907년 경남의 유생 이광선과 연합한 양회일의 의병진이 4월 22일 능주군에서 봉기, 능주를 습격 하고 군아와 주재소에서 총기를 탈취한 뒤 화순으로 진격하여 다시 그 곳의 군아와 분파소를 공격. 그러나 일본군의 추격에 패전하고 양회일 등 6명의 의병진 간부가 체포됨.* 이밖에도 최산홍을 비롯하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농민군 내지 평민 의병진 존재.이처럼 최익현의 의병봉기는 호남지역의 의병투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전국의 의병항쟁을 고조시킨 데에도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하였다. 태인의병은 호남지역 중기의병을 선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 ? 후기의병 활성화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이다. 또한 태인의병은 상소 형태의 청원운동을 지양하면서 무장투쟁으로 전환하였다는 점에서 후기의병의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양반 주도의 의병운동은 무력항쟁보다는 상소운동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식이 강했다. 태인의병이 그러한 한계를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미흡한 보수적 사상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농민들은 태인의병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태인의병의 지도부는 귀천에 관계없이 지용만으로 직책을 정한다고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기에 태인의병의 장기화는 더욱 힘들었으리라 생각된다.2. 의병운동의 전환기 (1907.8 ~ 1908.2)1).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과 의병1907년 8월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조치가 내려지고 강제 해산되자 의병운동은 전례없이 전력이 강화된다. 그 해 11월에는 특히 강원도와 충북, 경북 접경지대, 경기도를 중심으로 일본군과의 교전에 참여한 의병수가 1만 5천여 명에 달하게 된다. 이에 그치지 않고 강화된 전력으로 12월에는 이인영을 중심으로 한 13도 연합군의 서울 공격이 시도된다.2). 호남창의회맹소1906년 6월 태인의병의 여파는 특히 유림세력이 강했던 전남 장성에도 이어져 기삼연의 장성봉기에 까지 이르게 된다. 1851년 장성 황룡면 아곡리에서 출생한 기삼연은 노사 기정진의 재종질로 명문 유생 출신이다. 이미 1896년 기우만이 주도했던 장성의병에 참모로 적극 참여했고, 이 후 꾸준히 여러 갈래로 의병을 추진하던 인물들과 직 ? 간접으로 연관을 맺으며 호남에서의 동시 다발적인 의병봉기를 기대하면서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했던 기삼연은 1907년 10월 30일 장성의 수연산 중턱에 있는 석수암을 거점으로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였다. 맹주에 기삼연, 도통령에 김용구, 선봉장에 김준, 중군장에 이철형, 후군장에 이남규 등 각자의 직책이 정해진 ‘호남창의회맹소’의 도드라진 특징은 다음과 같다.첫째, 호남창의회맹소의 주요 구성원들은 대부분 전라도 서부지역의 양반 유생들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동일한 지역적 기반에 기초한 양반 유생 중심의 의진으로 특히 지역적 안배를 고려하여 지도부를 구성한 듯하다. ‘회맹’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도 여러 지역에서 참여한 4~5개의 의진이 하나로 통합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사실상 각각의 조직이 독자적으로 의병투쟁을 전개 이전의 의병들과는 차별화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이처럼 체계적인 틀을 갖춘 호남창의회맹소 계열의 활동이 전라도 전역으로 확대되자 일제는 군사작전과 회유공작을 병행하였다. 1907년 후반에는 자위단을 편성하여 의병에 대한 정찰과 경계 활동을 강화했으며, 의병들에게는 귀순공작을 병행함으로써 의병 내부의 분열을 부추겼다. 때로는 특정 의병부대를 와해할 목적으로 특설순사대나 전담 토벌대를 편성하여 집요한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호남의병들이 희생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남창의회맹소는 주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적절한 투쟁방략과 의진의 분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의병투쟁을 전개함에 따라 전라도가 후기의병의 중심무대가 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3). 김동신 의병부대와 전북지역의 의병1907년 후반부터 시작된 의병봉기의 본격화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앞에서 설명한 ‘호남창의회맹소’ 뿐만이 아니다. ‘호남창의회맹소’의 거점이 전남의 장성이라면 전북 지역에서는 김동신 의병부대가 호남지방의 의병봉기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충남 회덕 출신의 한의였던 김동신이 영남과 호남지방에서 의병을 모으게 된 까닭은 아마도 전라도 ? 경상도 지방에 그가 예전부터 자주 왕래한 지역이라 친숙하다는 점과 그의 출신지인 충남 회덕이 전라도의 산간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양반세력이 강한 지역이라 신분이 낮은 그가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1907년 음력 8월 내장산의 연암사에서 기우만 ? 고광순과 공모하여 의병을 일으킨 김동신 의병부대는 전라북도로부터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경남의 함양, 전북의 남원 ? 순창 ? 정읍, 전남의 곡성 ? 장성 ? 구례 등 3개 도에 걸쳐서 활동했다. 그 규모가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1,000여 명을 상회한 적도 있었지만 그가 1,000여 명을 직접 통솔하지는 않은 듯 하며, 이는 타 의병부대와 연합하였을 때의 규모로 추정된다. 당시 이들과 밀접히 연결된 대표적 의병장들의 출신지가 대체로 삼남지방이고, 대부발견해 불태워 버림으로써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 후 의병장 김동신이 의병투쟁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상경하던 중에 체포되면서 약 1년 동안 지리산을 근거지 삼아 전라도 산간 내륙과 경상남도 서부지역의 반일의병투쟁을 선도했던 김동신 의병부대는 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장기항전 전략인 이른바 ‘의병전쟁준비론’에 따라 지리산 중심의 의병기지 건설을 시도했다는 점에 그 의의를 둘 수 있겠다.이 외에도 익산의 유생 이규홍이 유지명 등과 함께 1907년 11월초 익산에서 봉기하여 이듬해 4월 부대를 해산할 때까지 익산 ? 금산 ? 진안 ? 장수 ? 용담 등 전라북도 북부 산간지방에서 활동하였고, 전북 내륙의 평야지방에서는 이학사로 널리 알려진 이석용이 기삼연에 호응하여 임실 ? 진안 ? 전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3. 의병운동의 고조와 호남의병대학살 사건1). 의병운동 고조기 (1908.3 ~ 1909.8)1907년 가을 이후 일본군은 파견대와 수비대를 중심으로 의병 토벌을 시작하고, 1908년 2월에는 키쿠치 대좌를 중심으로 대규모 토벌대를 구성하여 공세를 강화함으로써 150여 회에 걸친 토벌 작전을 통해 756명의 의병을 사살하고 700여 명의 포로를 잡아들였다. 하지만 1908년 3월 전남 함평의 유생 심남일의 전남 서부지역과 남부지역 일대를 거점으로 한 봉기를 시작으로 안규홍의 보성군 동소산 봉기가 이어져 전남 동남부지역을 무대로 활동함에 따라 의병활동이 전남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또 기삼연과 김태원 등이 이끌던 의병 잔여 세력은 부장급 간부였던 박도경, 조경환 등 의병장들에 의해 재규합되고 그 세력이 확대되었다. 박도경은 전북 부안 ? 고창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였고, 조경환은 전남 나주 ? 광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 격전을 벌이다 1909년 1월 광주군 운수동에서 전사했다.1908년 하반기 들어 호남의병의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것은 전해산의 봉기이다. 전해산은 임실 국평리 출신으로 이석용의 진안 봉기 때에 참모로 참여, 그해 5월 이석용과 상의한 뒤 남하하.
MB정부의 방송 정책과 미디어 산업2008년 2월 25일, MB정부의 출범에 따른 새로운 방송 정책의 시작으로 현재 우리나라의 방송 산업은 큰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문제는 MB정부는 한편으로는 언론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디어를 시장논리에만 맡겨 놓으려는 정책 등을 시행하려 한다는 점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우선적으로 MB정부가 시행하는 정책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또 그 정책들의 무슨 점 때문에 문제가 되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문제점들을 고치기 위해 우리와 정부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인지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지금부터 MB정부 방송 정책들의 주요 쟁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정책들의 시행으로 인하여 일어날 수 있는 사회적 현상은 무엇이고 그 마지막은 어떨지 나 개인의 생각과 의견을 적어보려 한다.MB정부의 방송 정책MB정부가 내세운 주요 방송 정책들은 다음과 같다.1). 방송첫 번째, 1공영 다 민영 체제의 고려라는 틀 안에서 MBC 민영화와 KBS-2TV의 분리.두 번째, 충분한 컨텐츠의 확보를 통한 지상파 다채널 서비스(MMS)의 신중한 도입.세 번째, 경영의 합리화, 공정성 확보 방안을 바탕으로 한 KBS 수신료의 인상.네 번째, 약 2조 242억 원의 추가 투자비용을 필요로 하는 디지털 방송 전환 비용을 국고 지원과 수명을 마치는 아날로그 주파수 매각을 통해 마련.2). 방송통신 융합첫 번째, 방송통신 융합기구와 정부의 기능을 분담하는 방안의 고려와 정보통신부와 문화관광부의 일부 기능을 결합해서 ‘정보미디어부’ 또는 ‘문화미디어부’의 신설 검토.두 번째, 9인일 경우 정당별 의석 비례 추천과 대통령 임명, 5인일 경우 대통령 추천의 고려와 국회의 2인 추천을 통한 방송통신위원 선출.3). 신문첫 번째, 미디어 겸영과 탈규제라는 세계적 추세 속에 방송사가 신문사를, 신문사가 방송사를 겸영하는 것을 허용.두 번째, 신문법은 참여정부가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것, 선도 사업자에 대한 과도한 규제는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하여 대체입법을 전제로 폐지 검토.세 번째, 특정 신문에 대한 언론의 직접 지원은 지양하고, 신문 발전기금과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통합해서 체계적으로 정리.네 번째, 신문 발전위원회, 지역신문 발전위원회, 한국 언론재단, 신문 유통원 등 신문 관련 기관의 통합과 재정비.정책 별 문제점1). 방송먼저 MBC와 KBS-2TV의 분리를 통한 민영화 정책은 현재 가장 이슈가 되는 MB정부의 방송 정책 중 하나이다. 대기업의 지상파 방송 소유 규정이 3조원 미만에서 10조원 미만으로 크게 완화되는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이 지난 7월 30일부터 입법예고에 들어감에 따라서 MBC와 KBS-2TV의 민영화 현실화 가능성이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방송의 민영화는 단순 시장경제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지상파 방송이 대기업의 소유가 될 경우 정치나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경제적으로 접근할 경우에 파생될 부작용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소유주가 자사의 이익을 위해 미디어를 이용할 경우 공공성의 차원에서도 큰 문제가 될 것이다.그리고 KBS 수신료의 인상은 방송과 통신의 융합으로 통신 사업자의 거대자본이 유입됨에 따라 기존보다 경쟁력을 상실하게 될 지상파 방송에 대한 배려는 용납이 가능한 선에서 허용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단, 그 전제로는 정책상에서도 명시했듯이 공정성의 확보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KBS 스스로가 공정성 장치를 마련하고 정부와 정파로부터 독립을 꾀해 거리를 유지하며 공익을 위한 프로그램의 비중을 늘리는 등의 자구적 방법을 취함으로써 국민으로부터 신뢰와 믿음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2). 방송통신 융합방송통신위원 선출의 방식에서 우리나라 방송 산업의 한계성을 찾아볼 수 있다. 방송통신위원의 선출이 정당별 의석 비례 추천과 대통령 임명으로 되어 있는데 애초에 구성부터 정치와 줄을 대서 커넥션으로 이뤄지는 위원들을 중심으로 방송의 자유와 공공성 및 공익성을 보장한다는 방통위의 역할을 안정적으로 해낼 리 만무하다.이는 조금 더 개방된 방식의 방송통신위원 선출 방법을 통해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3). 신문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는 방송 산업의 성장을 위해 대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신문 방송의 교차소유. 즉, 신방 겸영 허용을 적극 검토키로 했다. 그 구체적 방안으로 위에서 적은 바 있지만 ‘대기업의 지상파 방송 소유 규정 완화’와 ‘케이블 TV와 IPTV의 보도-종합편성 채널에 대한 신문의 겸영 허용’을 제시하고 있다.이에 대해 MB정부와 여당인 한나라당은 기존의 소유, 겸영에 대한 엄격한 규제로 방송 산업에 대한 신규 투자와 성장이 제한되어 왔다며 미디어 산업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선 구조개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하지만 이는 방송의 공적 기능을 무시하고, 방송을 단순히 ‘산업’으로만 규정짓고 있는 것이다. 신문과 방송의 겸영은 조선, 중앙, 동아로 대변되는 거대 신문사들의 방을 통한 언론 장악까지 가능케 함으로써 여론이 독과점화 되고 방송의 공공성이 사라지는 등의 부정적인 측면을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신문법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MB정부는 처음에는 신문법을 참여정부가 언론 통제를 위해서 만든 법이므로 폐지하겠다는 의견을 밝히면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발행 부수가 많은 신문사를 차별하여 신문사의 평등권과 언론의 다양성, 신문 자유를 침해한다는 헌재의 신문법 위헌 결정을 받아냈다.어쩌면 이러한 헌재의 결정은 평등과 자유의 원칙을 기초로 한 것 같은데 본인이 생각하는 신문법이라 함은 언론 통제의 구실을 하기보다는 조선, 중앙, 동아의 상위 3개 신문사의 시장점유율을 견제함으로써 약자의 입장에 처해있는 소수 신문사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라 생각한다.조중동과 같은 거대 신문사가 기존 신문법에 따라 시장지배적 사업자로 선정되어 신문발전기금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존폐의 위기를 느끼겠는가? 전혀 아니다. 신문법의 개정은 거대 규모의 신문사들에 의한 언론의 독과점을 막고 소수 언론의 보호와 그 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시 생각해봐야할 문제임에 틀림이 없다.MB정부의 신자유주의와 거대 미디어 그룹, 그리고 언론의 본질위에서 설명한 MB정부의 방송 정책에서도 알 수 있지만 현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며 정책을 펼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MB정부의 출범과 함께 이제야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지만 신자유주의를 앞세워 제일 먼저 그 문을 열었던 미국의 경우는 이미 많은 거대 미디어 그룹들이 등장했다.세계적 미디어 복합기업 뉴스 코퍼레이션의 대표로 있는 ‘루퍼트 머독’을 필두로 거대 미디어 그룹들은 끊임없는 탐욕으로 다른 매체를 인수 합병하고 그 몸집을 불려가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깃발 아래 거대 자본을 이용해 자국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눈을 돌려서 세계 미디어 시장들을 잠식해 나아가고 있다.이러한 현재 상황에서 뒤늦게 신자유주의를 표방하여 방송과 통신의 융합을 통해 거대 자본 유입하여 국내판 거대 미디어 그룹을 탄생시키려는 정부의 의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과연 MB정부는 지금 우리의 미디어 산업 상황에서 거대 미디어 그룹이 나온다고 해서 해외 거대 미디어 그룹과 경쟁을 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신자유주의적 방송 정책을 펼치는 걸까?일부에서는 대기업이 방송 겸영을 통해 대형화를 이루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미디어 그룹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방송 겸영에 대해 부정적인 나조차도 해외 거대 미디어 그룹들의 유입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도 거대 미디어 그룹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자본이 자본을 삼키는 시대에서는 조그맣게 나누어져서 잘근잘근 씹히는 것 보다는 하나로 뭉쳐 삼켜지지 않게끔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오타쿠(オタク) 문화- 1 -90년대 말 즈음,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 나는 네 살 터울 누나의 손에 이끌려서 누나와 함께 영화관에서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를 봤다. 이전까지 허용되지 않았던 일본 문화의 개방이 점차적으로 허용됨에 따라서 가능케 된 것이다.당시 일본 문화에 별 관심이 없던 어린 나조차도 일본 문화의 개방논란으로 인해 각종 매체에서 일본 문화에 대한 평가와 소개를 하고 앞 다투어 다뤘기에 본의 아니게 일본 음반이나 만화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되었고, 만화가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중학교 친구를 통해서 일본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그때는 ‘오타쿠(オタク)’가 무엇인지 잘 몰랐기에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에 와서 익숙해진 오타쿠라는 용어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그 친구가 일종의 오타쿠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오타쿠라는 말이 익숙한 단어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단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만 해석되고 사용되기에는 오타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너무 부족하지 않나 싶다. 그래서 지금부터 오타쿠가 뜻하는 본래의 의미와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 영향력 등을 다루어 보려고 한다.- 2 -お-たく [御宅] : 1. 상대편 집?가정?회사 등의 높임말. 댁2. (俗)당신. 댁. 귀하오타쿠의 사전적 의미는 위와 같이 ‘당신’이라는 2인칭 대명사이다. 그러나 일본사회에서 사용되는 오타쿠의 일반적 의미는 ‘그들만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로 주로 망가, 애니메이션이나 비디오 게임 등에 푹 파져서 미친 사람들을 뜻한다. 하지만 이는 오타쿠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결여된 단편적 표면적인 시각에 불과하다. 일본 문화 평론가 김지룡씨는 오타쿠란 ‘단지 좋아하기만 하는 팬이나 관련 상품을 사 모으고 자기 만족적인 마니아의 수준보다 한 층 위의 사람들 (김지룡, ‘나는 일본 문화가 재미있다’)‘ 이라고 칭했다. 이는 오타쿠가 전문가의 시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비평가적 시각까지 가져야 하며, 애정의 대상을 다 각도에서 인식하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연관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사실 아직도 일본에서 오타쿠는 1989년, 소위 M사건이라고 불리는 연쇄 살인사건의 영향력으로 인해 자기 자신의 세계에만 깊이 빠져서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정신 장애인이라는 인식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인 재패니메이션이 세계적으로 성공함에 따라서 긍적적 인식도 많이 생겨 한편으로는 일본 각종 분야의 전문가로서 대접받고 있기도 하다.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무기력하고 어두운 마이너 성향을 대표하던 80년대에 비해 지금은 신인류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그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3 -오타쿠가 지금 이러한 위치에 있도록 한 특징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오타쿠의 특징들로는 그 특유의 분석성과 백과사전적 능력, 그리고 폐쇄성 등이 있다. 지금부터는 각 특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려고 한다.첫째, 오타쿠는 매우 ‘분석적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이들의 분석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작화의 미묘한 변화를 보고 작가, 애니메이터, 스텝들을 예상해내며, 그것은 거의 빗나가지 않는다. 이는 애니메이션의 장면 하나하나를 프레임 단위로 끊어 타이밍을 잰다거나, 누가 작화 감독인지, 누가 원화를 그린 사람인지를 분석하고 정리해서 각각의 스타일을 연구하는 등.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매우 분석적인 행동을 보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거기서 그치지 않고 프레임 단위의 영상을 다시 연속화면으로 만들어낼 시의 화면구성이나 여러 가지 기법들을 이해하는데도 능숙하다.둘째, 오타쿠는 고도의 ‘백과사전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일반적으로 일본에서도 무언가 한 가지에 대해 깊게 알고 있으면 오타쿠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틀린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팬 또는 마니아에 불과하다. 오타쿠적 센스란 ‘미국적 방식’, ‘페미니즘’, ‘생태주의’ 같은 일종의 가치관, 세계관을 말한다고 한다. 오타쿠는 장르를 넘나들며 모든 지식에 박학다식해야 한다. 애니메이션 한 편을 보더라도 위와 같은 관념들과 연관 지어 분석해 낼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타쿠는 미디어에 구애 받지 않는다. 오히려 미디어들끼리 연결시켜 즐긴다 볼 수 있다. 요약하자면 작품을 만든 당사자들보다 더 높은 경지에서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오타쿠인 것이다.셋째, 오타쿠는 ‘극도의 폐쇄성’을 보인다.폐쇄성은 오타쿠의 가장 잘 알려진 특성 중 하나일 것이다. 이것은 오타쿠가 시작된 일본의 국가적 특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일본은 매우 집단적인 사회로 알려져 있다. 전체를 위해서 개인은 희생될 수도 있다고 믿는 일본의 특성은 교육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일본의 학생들은 못하는 과목이 있으면 보충을 받아야 하는 식으로 무엇이든 어느 정도는 하지만 특별히 잘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다. “튀어나온 못은 두드려야 한다.”라는 일본의 격언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이런 현실에서 일본인들은 최대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하는 자세가 생기고, 이는 서로간의 보이지 않는 벽을 형성했다. 자신의 열정을 주체 못해 ‘벽’에서 삐져나오면 곧바로 ‘튀어나온 벽’이 되고, 이것은 ‘집단 따돌림(이지메)’로 이어지는 것이다. ‘벽’을 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신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대상을 찾고 그 것에 깊이 매몰하게 된 사람들, 이들이 바로 오타쿠다.이러한 오타쿠의 폐쇄성은 그들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문제화 되는 것에도 한 몫을 했다.- 4 -그렇다면 오타쿠는 어떻게 탄생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그 사회적 위치는 어떨까?오타쿠는 TV가 보급되기 시작한 때부터 등장했다. 물론 대외적으로 사회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TV의 보급과 함께 오타쿠적 자질을 가진 사람이 등장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비디오는 물론 애니메이션 잡지도 없었던 시절의 오타쿠들은 매우 극소수였고, 지금과 비교하면 턱없이 작았던 인프라 때문에 당연히 엄청난 고생을 하며 애니메이션을 시청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인이라면 그냥 즐기고 끝냈을 TV 애니메이션을 분석하기 시작하며, 처음엔 단순한 흥미로 시작했던 이들의 분석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정도가 깊어졌다.그리고 비디오와 애니메이션 잡지가 생기면서 그들의 오타쿠적 성향은 진화했고, 그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며 분석하기 시작했다. 비디오는 물론 공 비디오 테이프 조차도 매우 비쌌던 당시에는 애니메이션 한편을 녹화하면 수없이 반복해서 보고, 또 보면서 분석을 했다.1980년대, 일본의 경제가 급속한 발전과 함께 오타쿠도 같이 성장한다. 비디오 가격이 갈수록 싸지고 오타쿠의 수도 늘어나기 시작한다. 1980년대 초반, 오타쿠라는 말이 게이오 대학의 유치원 출신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처음 사용되는데 이들 중 일부가 애니메이션 기획회사에 취직하여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를 만들어 크게 성공한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 두 남녀가 서로를 ‘오타쿠’라고 부르는 데, 이를 계기로 오타쿠는 일종의 동경의 대상이 되어 이 호칭이 조금씩 퍼져나가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오타쿠는 일반인들에게는 전혀 이해받지 못하는 소수의 차별적인 용어로 쓰였다.1989년, 오타쿠는 앞서 언급한바 있는 소위 M사건으로 인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1988년 여름부터 4살에서 7살에 이르는 4명의 여자 어린이들이 실종되었는데, 첫 희생자가 사라진지 6개월 후 아이의 가족에게 치아와 뼈가 몇 개 담긴 소포물이 배달되면서 의혹은 한 층 깊어진다. 그리고 1989년 7월 23일, 27살의 한 청년이 다섯 번째 소녀를 유괴하려다가 체포되는데 그의 이름은 ‘미야자키 쓰토무’, 오타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인물이다.미야자키의 방에는 무려 6,000개에 이르는 비디오테이프가 차곡차곡 쌓여있었고, 방바닥에는 만화책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수사가 진척되면서 미야자키가 소녀들의 시체에 심한 성추행을 했으며, 그들을 토막내고, 심지어 먹기까지 하고, 자신의 야만적인 행위를 비디오로 찍어놓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미야자키는 손바닥을 뒤집지 못하는 장애에 빠진 사람이었다고 한다. 유치원, 학교생활 내내 따돌림 당했으며, 자기 자신만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어 자신이 혼자 애니메이션이나 ‘특촬물 (특수촬영물 : 고지라 등)’을 볼 때에만 심리적 안정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을 극도로 보살펴 주던 할아버지가 죽자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어린 소녀들에게 접근해 할아버지를 되살리려는 희망에서 죽음의 의식을 집행했다.각종 언론은 “미야자키는 오타쿠다. 미야자키는 살인자다. 그러므로 오타쿠들은 (잠재적인) 살인자다.”라는 궤변으로 오타쿠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일본인들에게 오타쿠는 음침하며, 사회 부 적응자에 다가, 없어져야 할 혹은 개화되어야 할 존재로 인식되었다. (에티엔 바랄, ‘오타쿠 - 가상세계의 아이들’)1990년대에 들어서야 오타쿠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해를 거듭하면서 달라지게 된다. 이는 달라지는 용어의 의미 변화에서 엿볼 수 있는데, ‘현대용어의 기초 지식’ 1990년 판에는 매우 부정적인 관점에서 서술하던 것이 1991년 판에는 보다 자세하면서도 좀 더 조심스러운 평론을 하게 된다. 1992년엔 ‘정보화 사회의 뉴 페이스로서 긍정적으로 취급하는 견해도 늘고 있다.’는 긍정적인 관점까지 싣게 되고, 1997년에 이르러서는 동경대학교에서 ‘오타쿠학’이 등장하게 된다.이렇게 등장에서부터 1980년대까지 소외되어 왔던 오타쿠는 1990년대 들어 영향력 있는 하나의 새로운 세력으로 재평가 받게 된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그들은 사회, 문화 곳곳에 영향을 끼치는데, 그들의 전문가적 식견은 일본의 게임, 애니메이션을 질적으로 향상시켰고 그에 힘입어 재패니메이션과 오타쿠 문화는 전세계에 퍼졌다 볼 수 있다.
YouTube2006년에 전 세계적으로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은 단연 YouTube일 것이다. YouTube는 2006년 ‘타임’에 의해 ‘올해의 발명품’으로 선정되었으며, 2006년 10월에는 세계 최고의 인터넷 기업인 구글에 의해 16억 5천만 달러라는 거액에 인수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 2008년에 와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동영상 사이트로 성장해 그 영향력은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나가는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올해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그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그렇다면 YouTube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며 그 성공의 의의는 어디에 둘 수 있을까? 지금부터 YouTube에 대한 기업의 소개와 전반적인 성장배경과 함께 맞물려 있는 저작권과의 문제점, 그리고 성공의 요인을 알아보려 한다.기업 소개YouTube는 사용자가 영상을 업로드 하거나 볼 수 있고, 공유도 할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동영상 무료 공유 사이트다. 2005년 2월 PayPal 직원이었던 채드 헐리(Chad Meredith Hurley, 현 YouTube CEO)와 스티브 첸(Steve Shih Chen), 자웨드 카림(Jawed Karim, 퇴사)이 공동으로 창립하였다. 사이트 콘텐츠의 대부분은 영화와 텔레비전 클립, 뮤직 비디오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아마추어들이 만든 영상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2006년 10월, 구글사가 YouTube를 주식 교환을 통해 16억 5천만 달러에 인수하기로 결정하였고, 이어서 2007년 6월 19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구글 프레스데이 2007’ 행사에서 YouTube의 국가별 현지화 서비스 시작을 발표하고 먼저 네덜란드, 브라질, 프랑스, 폴란드, 아일랜드, 이탈리아, 일본, 스페인, 영국 사용자를 위한 페이지를 공개했다.국내에서는 지난 2008년 1월 23일에 영국, 프랑스, 호주, 일본 등에 이어 전 세계 19번째로 (http://www.youtube.co.kr) 사이트를 통해서 국내 런칭을 했다.2008년 현재 47% 이상에 비해 33% 정도 감소했다.이처럼 YouTube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미미하지만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수익 구조현재 국내나 해외 UCC업체의 최대 관건은 수익구조의 창출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기업의 기본적 목적은 수익의 창출을 통한 이윤의 극대화에 있기 때문이다. YouTube 운영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수익 구조를 알아보자면..첫 번째, 광고를 통한 수익의 창출이다. UCC를 통한 수익 창출의 방법으로 가장 흔히 얘기되는 것이 광고 수익인데 그 모델이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다.국내 UCC업체는 주로 동영상 앞에 보여주는 약 15초 가량의 광고와 그 외 사이트 광고, 플레이어 삽입 광고를 통해 수익을 얻는 방식을 취한다. 이에 반해 해외 UCC업체의 대표적 케이스인 YouTube는 광고가 지나치게 되면 그 반발로 이용자들이 떠나게 되므로 가능한 동영상 자체에 광고를 넣는 방식은 취하지 않고, 구글의 애드센스라는 광고를 유치해서 수익을 올리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http://www.google.co.kr/intl/ko/ads)YouTube 동영상을 볼 때 메뉴부분과 동영상 중간에 나오는 텍스트 링크를 볼 수 있는데, 이 부분이 바로 구글의 애드센스이다. 이는 아직 국내에서는 YouTube가 시장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지만, 북미지역이나 유럽지역에서는 전체 검색의 50% 이상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두 번째, 타 업체들과의 파트너십을 이용한 수익 창출이다.YouTube는 한국어 사이트를 통한 국내 런칭을 하면서 국내의 동영상 업체인 엠군미디어, SM 온라인, CJ 미디어, 중앙 방송, DDH, TU 미디어, 캐스트 넷, JYP, 아이토닉 등 여러 국내 업체들과 컨텐츠 제휴를 위한 파트너십을 맺었으며 이를 통해 YouTube 한글 사이트에서는 각 파트너 사의 동영상 검색 및 공유를 제공하고 있다.이러한 방법은 글로벌 미디어 기업들이 세계화, 현지화 사업을 하는데 가장 많이 활용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자국이 아닌다.그 예로 2006년 12월에 이란에서는 다른 몇몇 사이트와 함께 YouTube의 접속을 차단했고, 2007년 3월 터키에서도 국부를 모독하는 동영상이 게재되었다는 이유로 YouTube의 접속이 짧은 기간이지만 차단되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2007년 태국에서 왕을 모독하는 동영상이 게재되어 모든 YouTube 유저들이 태국어 사이트에 진입하는 것을 한 때 차단했던 사실도 있고, 2008년 3월 16일에는 중국 정부가 세계 최대의 동영상 사이트인 YouTube에 티베트 시위 장면이 담긴 동영상 10여 편이 올라온 후 해당 사이트 접속을 엄격하게 차단한 경우도 있다.이는 자유로 대변되는 웹이라는 공간과 그 전달력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지닌 영상이라는 두 가지 매체의 결합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들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들을 단순히 갈등을 빚었던 국가와 YouTube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문제점이라 할 수 있겠지만,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는 어떻게 보자면 바람직한 측면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 -두 번째는 YouTube 콘텐츠의 대부분이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편집하여 올려진 것이라는 그 구성에 있어 저작권의 문제라는 본질적인 문제점을 떠안고 있다. 비아콤과의 갈등과 소송이 그런 문제점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2007년 2월 YouTube의 자사인 구글은 대형 미디어 업체인 비아콤(Viacom)으로부터 YouTube를 통해 서비스되고 있는 자사 소유의 방송 콘텐츠 10만건의 삭제 요청을 받았다. 비아콤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케이블채널 MTV와 Nickelodeon, VHI, Comedy Central 등을 YouTube가 이들 프로그램을 불법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비아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YouTube가 저작권 침해 행위를 막기 위해 적극적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으며, 불법 콘텐츠를 통해 트래픽을 유발시켜 광고를 판매하는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명백한 불법이고 저작권법에 저촉된다고 이 되지 않도록 할 것이며, 더 많은 이용자와 트래픽을 끌어들이고 더욱 강력한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YouTube의 기능을 잃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라고 밝히며 맞섰다.저작권의 문제로 인한 미디어 업체와 YouTube 간의 갈등은 비단 해외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2008년 3월 13일 KBS, MBC, SBS 등 방송 3사와 인터넷 자회사인 KBS인터넷, iMBC, SBSi 등 방송 i3사가 YouTube 측에 1차로 저작권 위반 행위의 중지와 재발방지 조치를 촉구하는 내용증명 등의 공문을 발송한 바 있다.방송 3사와 방송 i3사는 “YouTube가 국내 서비스를 개시한 만큼 국내 저작권 및 관련법을 준수하는 서비스를 진행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며 “내용증명 수신 이후에도 적극적인 저작권 보호가 없을 경우 국내 OSP 업체의 저작권 침해에 대한 대응을 다음과 같이 법적 대응도 고려 중이다.”라고 밝혔다.이처럼 YouTube의 인기가 치솟자 전통적인 미디어 업체들은 자신들의 프로그램이 아무런 대가 없이 노출되면 시청자를 잃게 되고 결국 광고 매출이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우려해 왔다. 16억 5천만 달러에 YouTube를 인수한 구글은 법적 분쟁을 피하기 위해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미디어 업체들의 콘텐츠를 합법적으로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으나, 대형 미디어 업체들과의 제휴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저작권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과 제 3의 길YouTube도 저작권 보호를 통해 콘텐츠를 보유한 업체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중이다.그간 미디어 회사들은 YouTube를 ‘해적판 비디오의 온상’으로 지목하며 불법 콘텐츠 제거 요청은 물론 소송도 불사해왔다. 그런데 최근 수개월 사이에 몇몇 미디어 회사들의 YouTube에 대한 입장이 ‘적’에서 ‘친구’로 180도 바뀐 것이다. 다음은 지난 8월 17일 뉴욕타임스의 내용이다.YouTube와 CBS, EA, 라이온스게이트, 유니버설 뮤직 등은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게재 동참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YouTube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광고가 실리는 비디오 클립은 전체의 3%에 불과하다. 따라서 미디어가 YouTube가 당장의 광고 수입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미디어 업체들이 YouTube에 보내는 시선은 예상을 훨씬 초월할 정도로 따뜻한 것으로 나타났다.YouTube 저작권 침해를 제기하고 나선 미디어 회사들의 90% 가량이 Video ID를 이용해서 합법 여부를 가리고 해당 비디오들을 계속 YouTube에 남겨 놓는데 동의한 것이다. 나머지 10%의 미디어 업체들은 저작권 침해 비디오를 YouTube에서 삭제시키거나, 자체 검증 수단을 활용해서 합법성 여부를 가리고 있다.흥미로운 점은 동일 계열의 미디어 회사들이 서로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 일례로 위의 기사에도 나온 내용으로 CBS는 YouTube와 손을 잡았지만, CBS의 관계사인 비아컴은 YouTube에 대한 10억 달러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저작권 문제의 해결과 수익을 위한 YouTube와 많은 미디어의 양보와 새로운 시도를 통한 노력은 서로의 이익만을 위해 생겼던 갈등을 벗어난 제 3의 길이라 박수 쳐줄만하다. 하지만 UCC를 통해 제작된 비디오 클립과 광고를 결합하는 방식이 사업 모델로 자리 잡는 것은 아직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사업 모델에 대한 거대 미디어들의 입장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우선 타임워너와 뉴스코퍼레이션 등 대형 미디어들이 지켜보자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 대형 미디어들은 “시험할 만한 사업 모델임에는 분명하지만, 어설픈 UCC 비디오 클립에 광고가 실릴 지는 미지수”라고 말한다. 한편 NBC와 디즈니는 자신들의 자체 사이트에만 UCC가 실리는 것을 바라고 있다. 즉 NBC와 디즈니는 자체 콘텐츠를 가공한 UCC 비디오가 YouTube와 같은 외부 사이트에 업로드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이야기다.새로운 길에 대한 가능성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확실한 수익이 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