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비잔티움 제국은 330년 5월 11일 일요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이래 1453년 5월 29일 화요일 오스만 술탄 메메드 2세에 의해 함락되기까지 장장 1123년 18일 동안이나 존속했던 제국이다. 이는 1066년 노르만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때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시간보다 더 길고 오랜 세월이다. 천문학자와 지질학자를 제외한다면 누구나 이 기간이 기나긴 시간이라는 데 쉽게 동의할 것이다.이렇게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던 비잔티움 제국이 어떻게 멸망했을까? 나는 그 원인과 대책을 알아보고자 한다. 특히 동, 서 교회 분열을 중심으로 콘스탄티누스 시대와 비교하여 살펴 볼 것이다.Ⅱ. 본론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과 제 4차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콘스탄티노플 침공, 국내 혼란의 가중과 세금의 증가로 인한 백성들의 불안으로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또한 오스만 투르크 족은 셀주크 투르크의 영향에서 벗어나 대제국을 건설하고 수도를 아드리아노플로 옮긴 후 비잔틴에 대한 압박을 심하게 하였다. 결국 비잔틴은 오스만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도 비잔티움 제국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주목하는 점은 동, 서 교회의 분리이다.1300년대 말기, 1400년대 초반에 분열되어 있던 교회를 통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되나, 서유럽 교회 측에서 사실상 서유럽 교회로의 통합을 주장함으로써, 서유럽으로부터 마지막 지원군을 얻어낼 기회를 놓친다. 1453년 당시 제노바, 베네치아, 아라곤 등에서 도움을 주긴 하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고 결국 술탄 메메드 2세 휘하의 대규모 투르크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포격한다. 나는 근본적으로 동, 서 교회의 분리로 말미암아 서유럽의 원조가 줄어들었고, 이는 비잔티움 제국 멸망의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비잔티움 제국 멸망에 영향을 준 원인 중 콘스탄티누스 시대와 비교해 볼 때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을 국가에서 차지하는 종교의 위치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음을 알 수 있다.우선,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왜 갈라서게 되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두 교회는 성상(聖像) 사용문제를 놓고 대립했다. 8세기 비잔틴 제국의 일부 황제들이 성상을 금지시킨 반면 로마 교황청은 성상의 사용을 주장했다. 서유럽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세속 권위보다 우월했다. 반면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황제가 교회 최고 우두머리로 정치적 목적으로 교회를 복종시키는 것이 당연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황제와 교회가 대립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황제는 성직자들을 견제하고 교회에 대한 간섭의 기회로 삼기 위해 성상 사용을 금지하는 이른바 성상파괴 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725년 계속된 심각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성상숭배 금지령을 내린 레오 3세(717 ~ 744) 에게도 교회나 수도원이 성상 사용금지에 반발할 경우 그것을 구실로 교회나 수도원 소유의 토지를 몰수하여 국가재정을 확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점을 볼 때 이 시기 비잔티움 황제들은 오직 국가나 황제의 이익만을 위한 종교로서 기독교를 인식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반면, 콘스탄티누스 시대 콘스탄티누스는 종교로서 기독교를 존중했다. 물론 국가의 지배를 위해 기독교를 열성적으로 후원했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레오 3세 때의 비잔티움 황제들과 비교해 볼 때 종교로서 기독교를 인정했다. 기독교 탄압당시 몰수된 교회 재산에 대해 단순히 반환명령만 내린 것이 아니라 국가의 보상을 약속했다는 점, 성직 계급의 독립을 강력히 후원한 점을 예로 들 수 있다.만약, 비잔티움 황제들이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서만 바라 보았더라면 레오 3세처럼 황제가 교회를 복종시키려는 목적으로 성상 파괴령을 내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이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를 결정적으로 갈라놓는 계기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둘째, 앞에서살펴보았듯이 레오 3세가 성상 숭배 금지령을 내리는 것을 계기로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갈라서게 되는데 이때 만약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있었다면 어떻게 하였을까?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하였던 것처럼 논쟁이 되는 것의 해석 차이를 조정하였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교리를 둘러싼 성직자들 사이의 논쟁을 방치하지 않고 개입하였다. 방치하면 그가 진흥하려고 애썼던 기독교 교회가 분열해 버리기 때문이다. 일단 분열을 허락하면 분열은 차례로 분열을 낳아 결국에는 자멸을 향해 굴러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하여 삼위일체설을 최종적으로 교리의 해석 차이를 조정했다. 성상 논쟁에 대한 싸움이 승부가 나지 않고 결국 각자의 길을 걷게된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와는 아주 다른 양상이지 않은가?끝으로 어떠한 열악한 외부, 내부적 환경 속에서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같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지략가가 나타났다면 1453년 비잔틴의 최후를 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카일 8세는 비잔티움을 위협하는 앙주의 카를로를 견제하기 위해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교회 통일을 승인하는 대가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에게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자존심보다 실익을 택한 황제에게 비잔티움 사람들은 큰 배신감을 느꼈고, 백성들의 감정을 외면한 채 황제의 펜 끝에서만 이루어진 교회 통일은 실패로 끝난다. 둘째에서 언급한 내용과 이어지는 맥락에서 교회통일의 실패를 살펴보면, 미카일 8세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한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 통치자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통치자가 얼마나 민심을 사로잡느냐 하는가도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한 면에서 미카일 8세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배워야 할 점이 많다.한 단면을 살펴보면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 공인전 클리우디우스 소티쿠스 황제를 자신의 조상이라고 말한 것이나 널리 알려져 있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태양신을 부흥시킨 것은 부하 장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수단이었다. 4세기 로마군의 주력은 발칸 출신이었고,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와 아우렐리아누스는 발칸 출신의 군인 황제들 중에서도 걸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같은 발칸 출신인 콘스탄티누스는 이 무렵 ‘부제’에서 ‘정제’로 나아가기 위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반드시 장병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 그 지지를 확실히 얻을 수만 있다면 피 한방을 섞이지 않은 사람을 조상이라고 부르거나 태양신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것쯤은 간단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주도면밀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같은 인물이 1274년에도 존재했다면 여론을 움직이고, 1274년 동, 서 교회가 통일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Ⅰ. 서론일본은 우리나라에게 있어 매우 다양한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나라일 것이다. 거리상으로는 가깝지만, 오랜 세월 있어온 전쟁과 다툼으로 인해 먼 나라이기도 하다. 일본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아직도 매주 한번 씩 일본 대사관 앞에서 정신대 피해자들은 시위를 계속하고 있으며, 일본 총리나 국회의원 등의 발언들에 국민들은 분노하기 일쑤다. 그런 반면에 일본 에니메이션은 청소년들에게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널리 지지되고 있고, 극장가에는 일본의 영화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범람 속에서 과연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우리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듯 하면서도 정작 알고 있는 부분이 너무나 적고, 이제 그냥 왜놈이라며 무시할 수 있는 단계는 이미 지난지 오래이다. 그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나라에 대해 많은 것을 공부하고 있고, 우리가 잊고 있는 사이에 우리의 아름다움과 재산을 하나씩 포장만 바꾸어 자기들의 아름다움이라며 세계시장에 내놓으며 자랑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그저 일본을 욕만 하고 있는 것일까? 일본이라는 나라를 아는 것이 그 나라를 이길 수 있는 최선이 방법이 아닐까? 근래에 들어서야 일본에 관한 많은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데, 현대 일본을 조명하기 위해서 과거 또한 등한시해서는 안되며, 일본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해야한다.현대 사회의 일본이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따져보면 그 또한 과거의 천황제의 시작에서부터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의 사회, 습성의 특징은 결국 역사에서 찾아보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국화와 칼』, 이 책이야 말로 그러한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전후 일본에 대하여 쓰여진 서적 중 가장 유명한 이 책을 통해 일본과 일본의 보편적 정신세계를 이해해 보자.Ⅱ. 본론우선, 이 책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다른 나라를 상대로 외교 업무를 할 때 우선 알아두어야 할 것야 할 것인가를 알고자하는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연구된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인류학의 고전이 될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이로 인해 루스 베네딕트는 인류학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류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이 책의 서문 격에 해당되는 제 1장 연구과제 편에서, 루스 베네딕트는 현지 조사를 포기하는 대신 취할 수 있었던 여러 방법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녀는 일본에 대한, 또는 일본인에 의해 쓰여진 자료와 영화, 인터뷰 등 현지 조사를 제외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일본 문화의 틀이라는 부제가 아깝지 않게 총 13개장으로 나눠 일본인의 본질적인 의식구조와 역사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분석과 비평은 놀라울 따름이다.저자에 따르면 일본인의 의식구조의 뿌리는 계층 제도 있다. 맨 위로부터 천황, 쇼군, 다이묘...... 의 순서로 철저한 계층 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다시 말해 일본은 중국이나 조선처럼 중앙 집권적 체제를 유지하지 않고 서구적 의미에서의 봉건주의 국가였다. 중국이나 조선처럼 일시적인 관료성을 띠고 있지 않고, 그들은 영구적이며 영지에 예속되어 있는 그러한 상하관계였다. 아무리 밑에 있더라도 언제든지 반란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중국이나 조선이라면 일본적 사고는 신분의 변화가 절대 불가하므로 영구적인 상하 관계가 성립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일본적 사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 이래 봉건제도 유지를 위한 철저한 신분제도, 즉 카스트 제도와 같은 의미에 기인한다.이러한 계층제도는 제 2차 세계대전까지 정당화 시키는데 모든 나라는 하나의 국제적 계층 제도 속에 제각기 포섭되어서 하나의 세계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 계층선상의 가장 위에 일본이 있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이러한 계층제도의 습관은 가정 내부에서의 습관이 경제, 정치 생활 등 넓은 영역에 적용된 것이다. 각 계급에는 물론 제한이 많았지만 질서와 보증을 가짐으로써 일본인들에게는 이러한 계층제도의 습관을 무너뜨릴 생각이납득한다면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은혜, 즉 온, 기무, 기리에 대한 일본인의 특성에 대해 베네딕트는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근본적으로 일본인이 온(恩)을 중시하며, 일본인의 독특한 민족성향도 이러한 온과 온의 반대의무를 갚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발생되었다고 본다.온은 분수에 맞는 위치 찾기에서 수직적, 즉 하향적 구조로서 볼 때 위로부터 받는 것이 온이다. 자기가 누구에게서 온을 받았을 때 그 누구라는 이 모든 사람은 모두 자기의 온진(恩人)이 되고, 이 온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의무이다. 우리나라의 은혜라는 말에 해당되는 온을 우리의 사고방식으로 해석하려 하면 온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온은 수동적으로 입는 의무로써 사람이 할 수 있는 한의 힘으로써 질 수 있는 부담, 채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남에게 신세를 지면, 그것에 대해 고마워할 뿐 꼭 보답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런 온을 입으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한다.일본인은 끊임없이 상반하는 기분을 품고 온을 입는데, 온이 내포하는 커다란 채무는 오로지 전력을 다하여 은혜를 갚게 되거나 채무자가 되는 것에 대해 화를 내기도 한다. 본문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일본의 거리에서 무슨 사고가 일어났을 때 모인 군중들이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은 단지 자발성이 없어서 가 아니다. 그것은 관헌이 아닌 사사로운 사람이 제멋대로 손을 대면 그 행위에 의해 그 사람에게 온을 입히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그런 경우에 분명한 권한이 없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인간 은 무언가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받게 된다.이렇게 선뜻 남을 돕지 않는 일본인의 습성은, 지고 싶어 하지 않는 빚을 남에게 지울까 싶어 오히려 곤란에 처한 그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이 돕는 것이라는 그들만의 상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지나친 신경과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일본인들에게 그것은 미덕인 것이다.온의 반대 의무로는 기무(義務)가 있는데 이것은 아무리까지 싸우자는 태세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맞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천황의 한 마디에 모든 일본인이 태연하게 일상생활로 돌아간 것은 다 이러한 주의 개념으로 설명될 것이다.천황의 존재에 관해서 조금 덧붙이자면 일본에서의 신은 원래부터 서구와 달리 인간적 존재와 확연히 구분되는 그 어떤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신을 마치 인간들이 구성하는 계층제 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무엇쯤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이들이 그 신의 자리에 천황을 갖다 올린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사업의 성공은 다른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도 초연하게 효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기무와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 것에는 기리(義理)가 있는데 이것은 기무와는 달리 무한정한 것은 아니다. 기리는 일종의 답례로서 계약의 이행과도 같은 성격을 가진다. 즉 받은 것은 그 만큼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리는 세상에 대한 기리와 이름에 대한 기리가 있다. 특히 이름에 대한 기리는 사람으로부터 모욕이나 핀잔을 받았을 때, 그 오명을 씻는 의무로 즉 보복, 또는 복수를 갚는 것은 불법한 공격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와 참 다른 관념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명예를 중시하고,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에서 발생된 것이다. 저자가 명예에 대해 호소하는 비평이 가장 설득력 있었다. 일본인의 영원불명의 목표는 명예이므로 타인에게 존경을 얻는 것은 필수적이었다.나는 특히 전문가로서 이름에 대한 기리, 한 인간이 그의 사업과 함께 극단적으로 동일시되고 있고 그리하여 그 사람의 행위 또는 능력에 대한 비판은 자동적으로 그 인간 자체에 대한 비판이 된다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자신의 직업상 과오에 관하여 부끄러움이 많은 경우 저자는 의기소침하게 되는 원인이라고 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부끄러움이 강한 분발의 자극이 되어 일본을 지속시키는 힘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일본인은 전통적으로 ‘이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기리’와 동시에 ‘윗사람에 대해 지켜야할 도리인 기무’ 관계 사이에서 했다.일본인에게 있어서 최대의 미덕은 각자의 주어진 위치에서 이러한 두 가지 모순될 수 있는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에게 크나큰 스트레스를 줄 것이다. 이 스트레스를 야기하는 원인은 남이 나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하는 자기명예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기를 ‘행동하는 나’ 와 ‘관측하는 나’ 가 있는데 관측하는 나를 의식하여 항상 신중하고 계획된 행동을 한다고 한다. 여기서 ‘일본이 수치를 기조로 하는 문화다.’ 라는 것까지 연결되는데 수치를 기조로 하는 문화의 경우, 남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에 더 신경을 쓴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도 끝까지 밀고나가지 못하고, 남이 안볼 때는 나쁜 짓도 할 수 있다.일본인의 양육 방법에 관해서는 갓난아이와 노인에게 최대의 자유와 관대함이 허락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예닐곱 살이 지나서부터 주의 깊은 행동과 ‘부끄러움을 아는’ 책임이 부과되는데, 그것은 만일 그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배척된다는 가장 강력한 강제성으로 지지된다.이렇게 극단적인 의무와 철저한 자기 절제를 요구하는 일본에게 개인적 욕망은 어떻게 인식되었을까? 일본인은 자기 욕망의 만족을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좋은 것, 함양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일정한 한계 내에만 머무르면 되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이 패권을 획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운다는 서구와 철학과 다른 점이다. 한발 더 나가서 세계는 선과 악의 싸움터가 아니라고 결론짓는다.온욕, 수면, 먹는 것, 로맨틱한 연애, 자음적 향략, 일부의 동성애, 음주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의 인정관에 대한 저자의 관찰력은 놀라웠다. 쾌락을 따로 학습하며, 동시에 절제훈련을 하는 민족이 바로 일본인이다. 평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게이샤나 창녀의 문화가 비교적 자유롭게 허용되는 배경도 이 기회에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저자는 전시중의 일본인들의 행동을 이해함에 있어 그들이 전쟁을 수행하는 방식을 군사적 문제가 아닌 문화적 문제로 해부했다. 서구인의 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