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 안에는 나와 같은 성을 가진 사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와 다른 성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나와 같은 성을 가진 사람만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상대방 이성이 나와 비슷해지기를 기대한다. 남자는 여자가 남자와 같은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라고 믿고, 마찬가지로 여자는 남자가 여자처럼 느끼고 반응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러한 그릇된 믿음이 남녀 사이에서 갈등과 오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만약 서로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하고 존중한다면 우리는 이성과 갈등을 겪지 않을 것이다. 남자들은 화성에서 왔고 여자들은 금성에서 왔다는 사실만을 기억한다면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남자는 능력과 효율, 업적을 중요시한다. 남자들에게 있어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유능함을 입증하고 스스로 만족감을 얻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혼자 힘으로 무언가를 이룩했을 때라야만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긍지를 갖게 된다. 남자들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 도움을 청하는 것을 유약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 도움을 얻어내는 것이 능력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래서 여자들이 자기 문제를 이야기할 때 남자들은 자꾸만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한다.반면에 여자들은 자기의 느낌과 남들과 관계를 맺고 함께 나누는 일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을 느낀다. 여자들은 관계 지향적이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느끼는 데서 엄청난 만족감을 얻는다. 여자들에게 있어 조언과 충고는 관심의 표시이다.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원하지도 않는 조언을 하거나 그를 도와 주려고 하는 것은 여자들만의 관심의 표시인 것이다.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르게 생각한다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여자가 자기 문제를 이야기해 올 때는 가까워지고 싶다는 증거이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함으로써 여자들은 위로를 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러한 여자들의 마음을 모르는 남자들은 여자들이 해결책을 남자들은 상대의 요청이 없으면 조언을 하지 않는다. 그가 도움을 청하지 않는 한 혼자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 주는 것이 예의이며 그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남자들의 특성을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대개 조언을 해주고 도와주려 한다. 이것은 여자들에게는 관심의 표시인 것이다. 그러나 남자들은 여자들이 자신에게 도움을 주려는 행동을 이렇게 오해한다. 그녀가 자기를 고장난 물건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여자들이 도움을 주려하는 행동을 오해하고 비참한 느낌을 받는다.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가치관뿐만 아니라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자세에서도 나타난다. 남자들은 조용히 자기만의 동굴에 들어가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그 문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해결책을 찾고 나면 그는 기분이 한결 좋아져서 동굴 밖으로 나온다. 자기 동굴에 틀어박히게 되면 남자는 그 배우자가 기대하는 만큼의 관심을 기울일 능력을 상실한다. 반면에 여자들은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었다거나 기분이 우울할 땐, 자기가 믿는 사람을 찾아 그에게 자기 문제를 속 시원히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여자들은 자신의 어려운 문제와 우울한 기분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랑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에서 위로를 받는다. 그래서 여자들은 자기네들이 하듯이 남자들이 마음을 툭 터놓고 자기 문제를 솔직히 이야기해 주기를 기대한다. 여기에서 남자와 여자의 갈등이 발생한다. 여자는 동굴에 들어가 있는 남자에게 당장 마음을 털어놓으라고 재촉하고 남자들은 동굴 속에 들어가 있을 때 여자들이 하잘 것 없는 존재로 버려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그러므로 남자들은 여자들이 우울한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고, 여자들은 남자들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이성인 상대방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많은 것을 이끌어 내는 방법에 있어서도 남자와 여자들은 차이가 있다. 남자들은 누군가가 자기를 필요로 한다고 느낄 때 힘이 지쳐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그 동안 너무나 많은 것을 베풀어 왔다고 느끼면, 여자는 자기가 행복하지 못한 데 대해 상대방 남자를 탓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 쪽만의 잘못이 아니다. 여자들은 사랑을 받는 일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남자들은 사랑을 주는 일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는 형상일 뿐이다. 여자들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고 비난받고 결국에는 버림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기가 쉽다. 그리고 남자들은 상대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실패할까 봐 두려워 지레 포기해 버린다. 때문에 여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를 원망하지 않고 자기가 어느 정도까지 베풀 수 있는지 그 한계를 인식하는 일이다. 자기가 베푼 만큼 상대로부터 받기를 기대하는 대신, 자기가 너무 많이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수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 또한, 남자들은 실패를 해도 괜찮고, 더러 실패를 할 수도 있으며 반드시 그가 모든 해결책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그리고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가장 큰 원인은 의사전달에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자기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하여 과장과 은유, 막연한 표현 등을 동원해 사용하고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을 직접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자들은 여자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남자들은 사실과 정보를 전하는 수단으로써만 언어를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또한 남자들에게 있어 가장 큰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여자가 자기 감정을 이야기할 때 그것을 어떻게 하면 정확히 이해하고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반면에 여자들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난제는 남자가 말을 하지 않을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며, 어떻게 해야 그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정확히 제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남자들은 여자가 마음 속의 불만을 털어놓고 싶을 때에 과민반응을 보이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며, 여자들은 남자가 스스로 관계 속에서 남자들은 자기들이 받고자 하는 것을 여자들에게 주는 것이 보통이고, 이는 여자들도 다를 바 없다. 남자는 근본적으로 신뢰?인정?감사?찬미?찬성?격려를 필요로 하고, 여자는 관심?이해?존중?헌신?공감?확신을 얻고 싶어한다. 여자의 주된 사랑의 욕구는 관심을 받고 이해 받는 것이기에 그녀는 자연히 자기 남자에게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같은 보살핌은 남자로 하여금 그녀가 자기를 믿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든다. 남자가 받고 싶어하는 것은 신뢰이지 보살핌이 아니다.남자가 여자의 근본적인 사랑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대화다. 여자의 감정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을 익힘으로써, 그는 관심과 이해, 존중과 헌신, 공감과 확신을 그녀에게 줄 수 있다. 여자들 또한 남자들의 기운을 북돋워 주는 기술을 익힐 필요가 있다. 남자에게는 자신의 불완전함과 관계없이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따라서 남자는 상대가 자기를 신뢰하고 인정하며, 감사하고 찬미하며, 찬성과 격려를 보낼 때 힘을 얻는다. 남자가 여자의 감정을 고쳐 주려고 하는 것이 잘못이듯, 여자가 남자를 향상시키려고 노력하는 것 역시 오산이다.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도움을 요청할 경우에도 나타난다. 여자들은 자기들이 굳이 도움을 청할 필요가 없다는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다. 다른 사람의 욕구를 직감적으로 느끼고,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채워 주고 싶어하는 그들은 남자들도 자기들의 마음과 같으리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남자들에게는 이런 접근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남자들에게는 도움을 받고 싶으면 청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에게는 누구를 도와 주고 싶은 마음이 본능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며 그들은 요청이 있어야만 비로소 움직인다. 그러므로 남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에는 직접적이고 간명하게 해주겠어요? 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또한, 남자들은 요청 받는 일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여자들은 자기 감정을 이야기할 때 상대가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주고 자기를 이해해 주는지에 예민한 반응을금성에서 온 여자 의 내용은 위와 같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고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화성이란 행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이란 행성에서 온 여자란 제목처럼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그만큼 다른 점이 많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이 책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차이를 보이는 것은 생물학적 차이, 부모의 영향, 교육, 형제간의 서열에서부터 역사와 사회, 매스컴에 의해 조성된 문화적 환경에 이르기까지 다각적 접근이 가능한 매우 복잡한 문제라고 하였다. 나도 작가의 이 생각에 동의한다.그러나 나는 남자와 여자가 차이를 보이는 것은 사회화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본다. 무력한 유아가 사회의 성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능(언어?규범?가치?생활양식?문화?법 등등)을 배우고 학습하는 과정을 사회화 과정이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가 배우는 과정은 남자와 여자라는 성에 따라서 많이 다르다. 성역할의 사회화를 학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출생을 해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끊임없이 사회화 과정을 거치는데, 그 과정들 속에서 남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여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물론 이제 남녀 차별이 없는 시대가 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잔존해 있는 남녀 차별을 무시할 수는 없다.남녀의 차이를 사회화 이론인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살펴보자.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남녀의 차이가 사회화된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동일시 이론이라고도 하는 데 이것은 4~5세 경의 남자아이가 엄마를 첫 번째 사랑과 성의 욕구의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아빠를 증오하고 미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아빠에 대한 증오와 질투는 아빠가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한 공포로 변하면서 아이는 아빠가 자기와 같은 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는 아빠를 자기와 동일시하여 아빠를 통해서 아빠의 성역할을 모방한다.된다.
Ⅰ. 들어가는 말역사는 흔히 ‘사실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라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즉, 역사에는 ‘객관적 사실-시간적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모든 과거 사건’과 ‘과거의 사실을 토대로 역사가가 이를 조사하고 연구하여 주관적으로 재구성한 기록’이라는 두 가지 뜻이 존재하고 있다.이에 따르면 역사에는 객관적 의미의 역사 이외에도 주관적 의미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주관적 의미의 역사를 대표하는 것으로는 역사서가 있다. 과거의 사실을 역사가가 자신의 관점과 가치관에 따라 기록해 놓은 역사서는 주관적 의미의 역사를 대표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서는 현재까지도 가장 좋은 사료가 되고 있다.그런 점에서 역사서는 오늘날에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많은 역사가들이 남긴 역사서는 역사학에 있어서 크나큰 역할을 하고 있는데 특히, 이 중에서도 그 많은 역사서들의 근본이 되어주는 역사서가 있다. 그 역사서가 바로 《사기(史記)》이다.중국의 역대 사서(史書) 중에서 전한(前漢)의 사마천(司馬遷)이 저술한 《사기(史記)》만큼 많은 독자들을 지니고 있는 책도 없을 것이다. 굳이 중국사에 관심을 지니고 있지 않은 독자들이라도 중·고등학교 시절 한 번쯤은 《사기(史記)》에 대해 접해 본 경험이 있을 정도로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것은 모두 이 책이 역사서로서 지니고 있는 의미 때문으로 《사기(史記)》는 중국 최초의 문명단계로 믿어지는 황제시대(黃帝時代)에서 전한(前漢) 무제기(武帝期)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총 130권의 방대한 사서(史書)이며,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사의 편찬에 채용된 체제인 기전체(紀傳體)의 효시가 되었다.때문에 이러한 이유에서 《사기(史記)》는 오늘날까지도 중국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에게는 필독서로 인식되어져왔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전공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도 역사에 관심이 있거나 교양적인 차원에서 흥미를 가진 사람들은 《사기(史記)》에 대해 많은 관심을 지 역사의 진실을 담고 있다.4. 폭넓고 심도 있는 역사의 이해를 제시《사기(史記)》는 실로 위대한 천재 특유의 예리한 통찰력과 번득이는 사안(史眼)으로 이해된 사서(史書)이기 때문에 독자에게 중국 고대사의 발전 과정과 성격에 대한 평이하고 직절(直切)한 이해를 제공함으로써 ‘모든 사람은 그 스스로 하나의 사가(史家)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따라서 《사기(史記)》는 오늘날까지도 단순한 고전이나 학술사적인 가치를 넘어서서 읽을 만한 사서로서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5. 역사 서술에 있어서의 높은 문학성과 문장력《사기(史記)》는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평가될 만큼 뛰어난 문학성과 문장력이 돋보인다. 이는 역사관과 통찰력이 가장 자연스럽게 표출된 결과로서 예술적 감성과 냉철한 이성의 혼연(渾然)한 일체로서 역사를 이해할 수 있었던 사마천(司馬遷)의 경지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사기(史記)》의 외형적인 형식을 모방한 후세의 사서(史書)에서 《사기(史記)》의 문학성을 볼 수 없는 것은 이와 같은 역사에 대한 통찰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므로 《사기(史記)》는 바로 이러한 경지에서 역사적인 진실과 예술적인 진실이 맞부딪치는 인간의 생동하는 삶의 본질에 접근하였기 때문에 독자에게 이성적인 감흥을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Ⅲ. 서술의 동기와 목적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는 《사기(史記)》의 편찬 목적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凡百三十篇 亦欲以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궁구하여 밝히고 고금의 변화를 관통하는 원리를 밝혀 스스 로 독자적인 입론체계를 이루려는 것)《사기(史記)》의 서술 동기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사마천(司馬遷)의 부(父) 사마담(司馬談)의 유업(遺業)을 계승한다는 개인적인 문제부터 접근해 볼 수 있다. 또, 여기서 더 나아가 이들 부자가 공유한 역사 서술의 의미와 기능 그리고 그 현재적인 요청에 대한 자각과 실천의 의미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있다.1. 《춘추(春秋)》의 계승사마천(司馬遷) 부자사기(史記)》를 그 계승으로 주장하였던 것이다.이와 함께 사만천(司馬遷)은 맹자(孟子)의 유명한 “五百年必有王者興{) 요(堯)·무(舞)에서 탕(湯)까지 탕(湯)에서 문왕(文王)까지 문왕(文王)에서 공자(孔子)까지의 시 차가 각각 500년임을 지적하면서 500여 년마다 반드시 왕자(王者)가 출현한다는 이론”를 인용하여 아니 이에 천운(天運)의 객관적인 법칙이라는 근거를 더하여 《사기(史記)》를 통하여 천(天)과 인간(人間)의 관계를 구명(究明)하려고 하였다. 규칙적으로 변동하는 천운(天運)의 객관적인 존재와 이에 대한 인간의 대응 속에서 역사가 진행된다는 전제를 두어 천운(天運) 대응을 《춘추(春秋)》의 계승으로 대처하고자 했다.그러므로 사마천(司馬遷)에게 있어서 《춘추(春秋)》의 계승은 천운대변(天運大變)에 따른 역사적 과제의 자각과 그 실천을 의미하는 하나의 역사적 행위였다.2. 태사령(太史令)의 직분사마천(司馬遷) 부자는 태사령(太史令)이라는 직분을 재해석하여 이를 통해 《사기(史記)》 저술의 목적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태사령(太史令)이란 종묘(宗廟) 제사와 의례를 관장하는 태상(太常)의 속관으로서, 천시(天時)·성역(筬曆)을 관장하여 연말에 새해의 曆을 진상하거나 국가의 제사·상례·혼례시·길일 및 금기의 시절을 판단 진상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을 말하였다. 이로 볼 때 사서(史書) 저술과는 무관하게도 볼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사마천(司馬遷) 부자는 그들의 현실의 관제(官制) 상 규정된 태사령(太史令)의 성격과 그 기능을 넘어선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한편, 사마천(司馬遷)은 스스로 태사령(太史令)의 성격을 “掌天官不治民”이라 규정하였다. 이는 ‘천관(天官) 즉 천문·역법을 관장하기 때문에 직접 민(民)을 다시르는 목민관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보이나 사마천(司馬遷)은 이 말을 가지고 태사령(太史令)의 특수성을 일반 관료와 구분하여 그 자부심과 긍지를 시사하였다.그리하여 주나라 때부터 태사 집안이었던 사마천(司馬遷) 부자는 태사하여 《사기(史記)》 완성을 통해 양명(揚名)이라는 큰 효로써 자신의 불효를 다소나마 씻으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것으로도 보인다.{) 사마담(司馬談)의 유언 중 “또 효란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처음이고, 임금을 섬기는 것이 중간이고, 입신하는 것이 끝이다. 이름을 후세까지 날려 부모를 드러나게 하는 것은 큰 효인 것이다.”그러나 입명(立命)·양명(揚名)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가장 큰 효’를 실천하려는 욕구와 함께 궁형(宮刑)을 계기로 인간의 도덕과 현실적인 화복(禍福)의 문제를 성찰하게 되었으며 이를 을 통해 말하고 있다.…若至近世…非公正不發憤 而遇禍災者 不可勝數也…子曰 道不同不相爲謀…如不可求 從吾 所好〔…근세에 이르러서도…공정한 일이 아니면 분발하지 않았음에도 오히려 재앙을 만나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나는 매우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천도라 하는 것은 과연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공자가 말하길 실천하는 도가 같지 않으면 서로 도모하 지 않는다.…내가 좋아하는 대로 (옛날사람의 도)를 따르겠다.〕사마천(司馬遷)은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명성이니 명성만 얻으면 족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이를 자신의 삶의 보상이라 생각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명성에 큰 관심을 보인 것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명성에도 관심을 보였다. 역사상 위대한 공업(功業)을 성취한 인물 또는 기억할 만한 덕행지사(德行之士)의 명성을 전하는 것을 사가(史家)의 임무로 보았다. 그래서 이를 위하여 열전(列傳)을 서술하였으며 여기에는 ‘이릉(李陵)의 화’ 이후 사마천(司馬遷)의 인생관이 반영되어 있다.또한, 이와 함께 내적인 충동의 문제로 사마천(司馬遷)은 자신의 저술 역시 울결(鬱結)된 뜻, 기록과 전문의 진부,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한 자신의 평가와 논단, 인간의 역사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와 전망 요컨대 자신이 발견한 그래서 승화시킨 역사의 진실을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다.아울러 《화식열전(貨殖列傳)》{) 사가의 권말은 편집 후기라고 할 수 없는 이설(異設)의 경우에는 의심나는 것은 그대로 둔다 라는 원칙을 설정 사기에 수록하였다. 그리하여 구체적으로 미확인 사실은 가급적 언급하지 않고 불확실한 자료나 억측을 나열하기 보다 그 부분을 공백으로 남긴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신용할 만하나 단정치 어려운 경우 개(蓋) 라는 의사(疑辭)를 붙여 의문의 여지를 표시하였다. 또한, 그 시비를 판단하기 어려운 異說은 병기하여 신중하게 처리했다.물론 이처럼 사료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정해 자료를 선택하였으나 그 결론이 다 실제로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실에 근거한 과거의 이해를 최초로 인식하고 그것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사기는 사료가 아닌 사서(史書)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2. 허구적인 일화의 채록《사기(史記)》는 합리적인 기준을 통해 자료의 신빙성을 판단했다. 하지만 그 사실성이 극히 의심스러운 일화나 비화가 대거 수록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겠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서술의 주제와 목적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 사실로 인정할 수 있나 하면 단순한 추측과 허구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화나 비화가 이용된 것일까?사마천(司馬遷)은 이러한 고사나 민담이 허구일지라도 그것이 당시인의 입장에서 그 당시 사건에 대해 가진 이해와 감정을 표현하였다고 이해한 것이다. 즉, 역사적 진실이 단순한 사실 자체만이 아니라 그에 대한 당시인들의 이해와 평가가 함께 추구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본다면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많은 일화나 비화가 기록된 것이다.3. 사실(史實)의 취사(取捨)수집한 사료의 진위 여부를 판단한 후 무엇을 어떤 비중으로 서술할 것인지는 사료의 성격을 크게 결정짓는다. 그래서 사마천(司馬遷)은 다섯 가지 기준을 세워 史實의 서술 비중을 결정하였다.첫째, 상근략원(詳近略遠) 의 원칙을 세워 처리하였다. 사마천(司馬遷)은 이 원칙을 통해 모든 시대에 동등한 비중과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시간.
Ⅰ. 들어가는 말원시 문학 시기와 고대 가요 시기를 거쳐 등장한 삼국 시대는 중국 대륙 문화의 영향을 받아 고도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현재에는 이 시기의 문학 유산이 거의 영락(零落)하여 그 소상한 면모를 찾아보기가 힘든 실정이다.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중국 문화를 수입한 고구려의 경우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악지(高麗史樂志)·증보문헌비고악고(增補文獻備考樂考)에 단편적으로 가요의 유래만이 전해지고 있고,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여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쳤던 백제의 경우에도 고려사악지(高麗史樂志)·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악학궤범(樂學軌範)에 가요가 실려 있으나 정읍사(井邑詞)를 제외하고는 지이산가(智異山歌), 무등산가(無等山歌), 선운산가(禪雲山歌) 등이 모두 가사가 전해지지 않고 있다. {) 김석하, 『한국 문학사』, 신우사, 1975이에 반해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였던 신라의 경우에는 향가가 다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향가 작품들을 통해 당시의 문화에 대해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신라는 외래 문화의 수용 시기가 늦어 고유의 문화가 그다지 침식당하지 않는 범위에서 외래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에 독특한 자국의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화적인 특색은 향가 문학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이에 따라 향가 속에는 우리 민족만의 사상·감정·정서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때문에 향가는 우리 민족의 정서를 노래한 고유의 시가라고 할 수 있다.이와 같은 향가 문학은 이후 남북국 시대를 거쳐 고려 시대까지도 그 명맥이 이어졌다. 특히, 고대 후기에 해당하는 남북국-통일 신라 시기에는 향가 문학이 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는 현재 전해지고 있지는 않으나 1,000여 수의 향가가 수록되어 있다고 하는 삼대목이 진성여왕 시기(A. D. 888)에 편찬되었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통일 신라 시기에 향가 문학이 널리 성행하여 찬란한 꽃을 피웠다는 것을 추을 달리하여, 현존 신라 향가의 작가를 왕자·화랑 등의 상류가 2인에 3수, 국선·승려가 6인에 18수, 신도·평민이 4인에 4수라 하였으며 여기에 고려조 균여의 보현십원가 11수를 국선·승려의 작에 포함시켰다.{) 조지훈, 「신라 가요 연구 논고」, 『향가 여요 연구』, 이우출판사, 1985그러나 이처럼 다른 견해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연구들은 모두 승려와 화랑이 향가 작가로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향가의 향유층이 상류층이라는 의미가 될 수 있다.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도의 문제이고 또, 구비 전승되던 노래였던 향가가 전승과정과 문자(향찰)로의 정착과정에서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향가를 지배층의 문학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오히려 문자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문화의 대표적 주도 계층인 지배층 위주의 향가만을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향가의 작품들 중에서도 원왕생가의 광덕이나 풍요의 민중, 서동요의 서동, 헌화가의 노인 등의 평민 작가들이 있는 것을 볼 때 1,000수에 이르는 삼대목의 작가들을 승려와 화랑으로만 추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더욱이 우적가는 향가가 일반 대중 속에서도 즐겨 향유되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재가 도적들에게 잡혔을 당시의 대목이 바로 그것인데, 도적들은 그가 영재라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향가를 지어보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에게 향가를 청해 듣고자 한 것은 깊은 산골짜기에 사는 도적떼조차 향가에 능한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 이는 향가로 인해 감명을 받았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이유에서 향가는 어느 특정 계층에 의해 독점 향유된 것이 아니라 두터운 작가층과 향유층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2. 향가의 작가 문제초기 국문학 연구자들은 향가의 작가에 관한 모든 정보를 삼국유사의 문맥에만 전적으로 의지하였기 때문에 유사에서 전해주고 있는 기록에 따라 작가를 추회개시켰다는 데서 유래處 容: 역신에 대해 관용으로 처리해 주었던 데서 유래또는 얼굴(가면)을 내걸어 역신의 침입을 막은 데서 유래이와 같이 신라 향가 14수 중 민요로 분류되는 풍요, 실명(失名) 노인의 작으로 알려진 헌화가, 그리고 득오곡이 지었다는 모죽지랑가를 제외하고는{) 득오곡이나 죽지랑은 향가 배경설화의 다른 인물명과는 달리 이두식의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설화 내용과 인명의 관계를 밝히기가 어렵다.나머지 향가 11수에 대한 작가 9명의 이름이 모두 설화 내용과 일치되거나 또 설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특성을 잡아 이를 이름으로 쓰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은 유사에 작가로 언급되어 있는 이들이 실존 인물이 아닌 설화상의 작위의 인물일 것이라는 추정을 뒷받침해주고 있다.2 향가 작가에 대한 이설(異說) 제기유사의 원문이 보다 정밀하게 읽혀지면서 해석여하에 따라 향가 작가에 대한 이설들이 제기되었다. 이 중에서 가장 이설이 분분한 것은 원왕생가이다. 원왕생가는 크게 세 가지로 작가가 추정되고 있는데, 광덕과 광덕의 처, 원효이다. 그런데 원효는 다음의 단원에서 다루고 여기에서는 광덕과 광덕처에 대해서만 다루기로 하겠다. 우선, 광덕과 광덕처의 구분은 밑의 원문을 어떻게 띄어 읽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其婦乃芬皇寺之婢 盖十九應身之一德嘗有歌云”여기에서 광덕의 부인이 ‘십구응신의 한 분인데 일찍이 노래를 불렀으니 운운(盖十九應身之一德 嘗有歌云)’으로 읽을 것이냐, 아니면 광덕의 부인은 ‘십구응신의 한 분이다. 광덕이 일찍이 노래를 불렀으니 운운(盖十九應身之一 德嘗有歌云)’으로 읽을 것이냐 하는 데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전자는 광덕처가 작가라는 주장으로 그녀를 십구응신의 한 분(一德)으로 해석하고, 다음 구절의 주어 역시 광덕처로 보는 것이다. 이 주장은 小倉進平과 양주동선생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 小倉進平, 『鄕歌及び 吏讀の 硏究』, 京城帝國大學, 1929양주동, 『재정 고가연구』, 일조각, 1973반면 후자는 德字를 광덕(廣德)이라는 이름의 줄임자로 다섯 살이 되면서 갑자기 눈이 멀었다. 하루는 그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분황사 좌전 북쪽 벽의 천수대비화상 앞에 나가 아이로 하여금 노래를 지어 기도케 하자 드디어 눈을 떴다.”(漢岐理女希明之兒 生五稔而忽盲 一日其母抱兒 詣芬皇寺左殿北壁 畵天手大悲前 令兒作歌禱之 逐得明)이 원문 중 문제의 핵심은 “아이로 하여금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드디어 눈을 떴다”는 대목이다. 원문대로라면 아이가 노래를 지어 기도했다는 내용이 된다. 또, 도천수대비가의 시적 자아, 화자 역시 아이로 나와 있다.하지만 이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기껏해야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상당히 고급 내용의, 그것도 10구체 향가를 지어 불렀다는 점은 상황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축자적인 해석을 좇아 다섯 살 된 아이가 천수대비가를 지어 노래하고, 그로 말미암아 득명을 했다고 보는 것은 언어 이전의 상황적 사실과 서로 맞지 않는다. 득명(得明)은 아이가 했지만 희명(希明)은 그 어머니의 몫이었다. 따라서 도천수대비가에서는 이와 같은 이유에서 상황적 사실이 언어적 사실보다 우선할 때가 있다는 주장으로 작가에 대한 이설이 제기되고 있다.앞의 세 편의 향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최근에는 기존의 향가 작가에 대한 이설이 많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더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겠다.3 향가 작가를 역사상의 실존인물에서 찾으려는 움직임신라의 향가는 소위 설화집이라고 할 수 있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관계로 작가의 사적(事跡) 역시 매우 설화적이고, 또 거의 모든 향가 작가가 설화적 사실과 일치하는 인명으로 불리는 이유로 논란이 많다. 이런 이유로 기존에 향가 작가로 알려졌던 인물들이 과연 역사적인 실존인물일 수 있겠느냐 하는 의구심이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과는 반대로 향가 작가를 실존인물에서 찾고자 하는 노력도 활발히 일어났다.이와 같은 노력의 하나로 김사엽 선생은 원왕생가의 실제 작가를 원효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삼의 일고찰』, 성대 동양문화연구원 별집, 1972그러나 아직까지 이러한 주장은 하나의 이설로써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도 앞으로 더욱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겠다.Ⅲ. 향가의 문학사적 의의1. 자국 문자의 창안향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향가가 향찰로 기록된 차자문학이라는 점이다. 차자(借字)라는 말 자체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향가는 남의 글을 빌어 우리말을 기록해 놓은 작품군이다. 따라서 향가는 다른 나라의 글을 빌었다는 점에서 국문은 아니다. 하지만 국어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이는 향가를 태두로 하여 고려가요와 시조, 가사 등이 우리말로 노래되어 우리 시가문학사의 굵은 줄기를 이루었기 때문으로 차자든 국문이든 우리말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향가로부터 우리의 노래가 우리의 말로 적어야 한다는 인식이 비롯되었고, 그 후 계속해서 이런 문예론적 의식이 일관된 한 조류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향가 문학의 가치는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이렇듯 향가는 우리말에 의해 고유의 개성적인 정서를 일구는 문학으로 자리했던 것에 못지 않게 훈민정음 이전에 벌써 향찰 표기로 국어 문학을 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산문이 훈민정음 창제 이후조차도 주로 한문으로 기록되었던 것에 반해서 국어 표기를 하였던 가요 문학의 연원이 향가에까지 이른다는 점에서 향가의 국어 문학에 대한 기여도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2. 단연형(單聯形) 정형시의 원형한국 단연형 시가의 정형성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이 된다. 하나는 시상 전개상의 구성법이고 다른 하나는 낙구법이다. 10구체 향가를 비롯해서 고려 가요 중 아소님하형, 시조, 가사 등에 공통되고 있는 시형상의 공통점은 3단 구성으로 짜인 시상 전개법이며 다른 하나는 낙구형의 감탄사가 적절하게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이 신라시대 향가에서 비롯되어 고려와 조선조 시가에
Ⅰ. 들어가는 말역사와 인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는 인간들의 삶이 모여 역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으로, 개개인의 삶이 모여 시간이 형성되고 그 시간들이 다시 모여 역사가 이루어진다. 때문에 역사는 과거에 있어서의 인간 행위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그리고 이것은 한편으로 인간이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인간이 역사의 흐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선택에 의해 역사의 전개가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연구는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반대로 인간 역시 역사의 영향을 받는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고대이냐 중세이냐, 서양이냐 동양이냐에 따라 인간의 삶은 달라진다. 또, 중세라도 중세 초기냐, 중세 중기냐, 중세 말기냐에 따라 인간이 받는 영향은 다르고 같은 지역이라도 국가에 따라 다르다. 더욱이 인간은 때로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배당하기도 한다. 전쟁이나 종교, 제도 등에 의해 삶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역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처럼 역사와 인간의 관계는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의 인간은 대부분 역사 앞에서 미비한 존재처럼 인식되어졌다.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혹은 경제적인 이유에 의해 희생을 강요받고 고통을 감수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평범한 인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고,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들도 역사적인 힘에 의해 역사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가 이제부터 살펴볼 잔다르크처럼 말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카톨릭의 성녀라 불리는 잔다르크를 통해 역사와 인간의 관인 프랑스를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성녀(聖女)로서 추앙 받고 있다.그런데 과연 그녀가 성녀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답을 내릴 수가 없다. 물론, 잔다르크는 1920년 교황 베네딕투스 15세에 의해 성녀로 시성(諡聖)되었고 이에 따라 카톨릭에서는 그녀를 성녀로 추앙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카톨릭을 믿지 않는 일반인들에게 잔다르크를 성녀라고 믿기에는 의문점이 많다. 왜냐하면 우선은 그녀가 들었다는 신의 음성이나 신이 보여주었다는 표식을 쉽게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에 의한 검증을 중시하는 현대만이 아니라 당시 신을 믿었던 중세 사회에서도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었다. 잔다르크가 샤를 7세를 비롯한 프랑스 왕국에 의해 처녀성을 검사 받고 교회의 성직자들에 의해서는 신의 사자임을 증명하라는 청문을 받았으며 오를레앙을 지키던 성주 뒤느아 공에게는 성녀가 아닌 여성으로 취급받았다는 사실들은 중세에도 그녀를 성녀로 보는 데에 의심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또한, 그녀가 보여주는 태도에도 성녀의 모습보다는 인간적인 모습이 훨씬 많았다. 끊임없이 고해를 통해 죄를 사하려고 했던 모습이나 피로 얼룩진 전쟁터를 보며 눈물 흘리는 모습, 자신의 집착과 편협을 꼬집는 내면의 소리에 괴로워하는 모습 그리고 사형선고가 공포되기 전 자신의 믿음을 버리고 서약서에 서명을 하는 모습 등 그녀의 모습은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 그 자체였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신의 대리인 , 신의 사자 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따라서 이런 이유에서도 잔다르크를 성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때문에 그녀를 성녀로 보지 않는 역사가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 역사가 자크 코르디에는 잔이 신의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라 정신장애와 같은 환각의 일종인 가상기억 즉, 무의식 중에 기억을 위조하는 병을 가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잔이 환각을 앓고 있었다는 자크 코르디에의 주장에 찬성을 할 수는 없다. 잔이 보여준 모 무의식 중에 사용한 것이었다는 주장에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이것은 즉, 잔이 역사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으로 잔의 소명의식이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영웅적인 행위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잔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임과 동시에 조국을 사랑하는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잔은 종교심과 애국심이 섞여서 프랑스 왕국을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보았고 프랑스 국왕을 하느님의 사자로 여겼다.이러한 잔의 모습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녀는 오직 프랑스의 황태자였던 샤를 7세에게만 신의 계시를 전하였고 프랑스를 구하는 것을 자신에게 신이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잔은 샤를 7세의 대관식을 위해 영국과의 전투에 참가하였고 프랑스를 영국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하여 끝까지 전쟁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잔은 성녀보다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했던 영웅적인 소녀로 보는 편이 옳다고 생각된다.Ⅲ. 시대가 배출한 성녀, 잔다르크그렇다면 잔다르크는 왜 성녀로 추앙 받을 수 있었을까? 이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과 부르고뉴의 연합세력에 의해 파리가 점령당하고 루아르 남부지역의 마지막 보루인 오를레앙마저 포위되었던 상황이었다. 오를레앙을 영국에 빼앗기면 프랑스로서는 회생의 기미조차 찾을 수 없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런 절대 절명의 순간에 잔다르크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신의 계시를 받은 신의 사자라고 말하면서 프랑스를 구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이러한 그녀의 외침이 당시 민중들에게 얼마나 많은 지지와 환호를 받았는지는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영국군의 약탈과 살인으로 인해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프랑스 민중들에게 절대자인 신의 사자가 찾아와 구원해주겠다는 말은 천국으로 이끌어주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잔은 그 당시 나라 곳곳에서 신이 보낸 예언자요 투사로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녀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들은 잔이 탄 말의 발굽을 편입하여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또한, 그런 인물들은 민중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어졌다. 예를 들어 이집트 왕조의 압박으로부터 유대인을 구한 모세나 서양 열강의 침입에 의해 무너져 가는 중국의 근대사에서 태평천국이라는 국가를 세워 자신을 천왕이라 칭하였던 홍수전 등이 모두 이와 같은 인물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잔다르크 역시 이들과 같이 시대적인 상황에 의해 배출된 영웅이었고 신의 사자로써 불려졌던 것이라고 생각된다.여기에서 우리는 역사와 인간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역사와 인간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역사는 인간 행위의 영향을 받으며 인간에 의해 좌우되기도 한다. 즉, 인간의 행위에 의해 역사의 흐름이 달라지는 것이다.이는 잔다르크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 만약 잔다르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프랑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를 생각하면 그녀의 등장이 프랑스 역사에 있어 끼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영토의 반을 잃고 그들의 마지막 보루였던 오를레앙마저 영국군의 침입을 받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곳을 빼앗긴다는 것은 프랑스에게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순간에 잔다르크가 등장하였고 그녀는 오를레앙을 해방시키면서 영국의 계속되는 승리를 막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프랑스군은 사기가 고취되어 묑과 보장시를 접수하고 파테 전투에서도 승리하였다. 이로 인해 샤를 7세는 랭스에서 무사히 대관식을 치를 수 있었으며 프랑스의 왕으로 비로소 등극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볼 때, 잔다르크의 등장은 프랑스 역사에서 프랑스를 멸망이 아닌 존속의 길로 이끈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다음으로 역사와 인간의 관계는 인간이 역사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는 한 마디로 인간이 시대의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로써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잔다르크가 성녀로 추앙 받을 수 있었던 이유에서 잘 나타나 있다. 즉,하지만 이러한 그녀의 주장이 전쟁시가 아닌 평화시였다면 과연 얼마만큼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는지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만약 당시가 평화시였다면 그녀는 전쟁시에 비해 큰 호응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와 같은 주장을 하자마자 마녀나 악마의 화신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른다.왜냐하면 극한의 위기에 있었던 상황에서조차 샤를 7세를 비롯한 프랑스의 귀족들이 잔의 주장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녀를 의심하였고 샤를 7세가 그녀를 만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는 민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일부는 잔이 파리 공략과 라샤리테 공략에서 연달아 실패하자 잔의 신비한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를 이끌던 음성이 이제 떠나버렸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우리에게 커다란 의미를 제시해준다. 그것은 바로 잔다르크가 성녀로 추앙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시대적인 상황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말해 인간이 역사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Ⅳ. 정치의 희생물 잔다르크잔다르크의 삶을 바라보면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역사의 힘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역사 앞에서 나약하기만한 인간의 존재에 비애감마저 들게 된다.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하고도 이교도로 몰려 화형을 당한 잔다르크의 삶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녀의 삶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녀가 그녀의 행위에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하지만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그녀의 인생의 끝은 너무나 불쌍하고 슬펐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정치적인 요소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잔의 죽음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 협상이 큰 이유였기 때문이다.프랑스의 왕으로 등극한 샤를 7세는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원하던 왕관을 얻음으로써 전쟁 대신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 바랬다. 반면에 잔은 힘의 논리에 의한 협상을 해야한다고 보고 이를 다.
한국 문학의 특징과목: 고전문학사담당: 성낙희 교수님학부: 인문학부학번: 0010123이름: 한아름Ⅰ. 들어가는 말한국 문학은 역사적으로 한민족에 의해서 지어지고 읽혀진 문학을 말한다. 이러한 한국 문학에는 국어로 쓰여진 한글 문학만이 아니라 한자를 빌어서 표기한 차자 문학, 한문으로 표현한 한문학이 모두 포함된다. 그리고 이들 기록 문학 이외에도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는 구비 문학도 포함된다. 이는 한국 문학이 한글로 서술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민족에 의해서 선사 시대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창조된 문학 전체를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따라서 한국 문학 속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담겨 있고 삶이 담겨 있다. 또, 우리 민족의 사상과 감정·정서가 담겨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국 문학을 통해 시대의 흔적을 찾을 수 있고 우리 민족 고유의 뛰어난 문학적 역량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정서를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한국 문학은 한국인들에게 있어 그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이와 같은 한국 문학들은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을까? 이를 아는 것은 한국 문학이 지닌 가치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하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한국 문학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겠다. 특히, 한국 고전 문학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한국 문학의 특징(1) 풍류의 문학한국 문학의 특징 중의 하나로 풍류를 들 수 있다. 풍류라는 말은 우아하고 멋스러운 정취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달픈 현실 생활 속에서도 늘 마음의 여유를 갖고 즐겁게 살아갈 줄 아는 삶의 지혜와 멋을 가리킨다. 이러한 풍류의 멋은 가무를 즐기고 자연과 조화되는 모습 등을 통해 나타나는데, 한국 문학 속에는 이와 같은 풍류의 멋이 살아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고려 시대의 경기체가와 조선 전기의 사대부 시조, 조선 후기의 화전 가사 등을 통해 이러한 우리 민족의 풍류의 멋을 찾아볼 수 있다.우선, 고려 시대의 경기체가는 자연의 경치를 제재로 삼아 신진 사대부들의 득의에 찬 삶과 호탕한 기상을 노래하였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안축의 이나 은 각각 관동과 숭흥의 절경을 노래하였고 조선 초의 경기체가인 정극인의 은 전원 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하였다.특히, 이와 같은 풍류의 멋은 조선 전기의 사대부 시조에 의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사대부들의 시조는 자연 속에서 심성을 기르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그리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사대부들은 강호에 묻힌 자신의 생활을 춘·하·추·동 사철의 자연의 변화와 결부시켜 각 한 수씩 4수로 읊은 맹사성의 『강호사시가』를 시작으로 자연 속에서 풍류를 노래하였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이현보, 송순, 이황, 이이, 정철 등의 사대부들에 의해 ‘강호가도’의 풍조를 형성하였다. 이에 따라 강호한정가로 불리는 수많은 작품들이 등장하였고 이들 작품들은 풍류의 멋을 잘 표현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규방 가사의 한 계열인 화전 가사가 등장하여 여성들의 자연 속에서의 감흥을 노래하기도 하였다.이처럼 한국 문학은 각박한 세속적 삶의 현실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마음의 여유를 찾는 풍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자연 친화적인 의식은 이후에도 이어져서 청록파 시인들에 의해 자연을 소재로 자연 속에서 인간의 심성을 담은 작품들이 나타났다. 그러므로 이를 토대로 볼 때, 한국 문학은 풍류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2) 충효의 문학한국 문학은 충효의 사상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문학 속에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예의를 중시하였던 민족적인 정서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민족적인 정서는 시대를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문학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예를 들어 효행 사상을 그림 작품으로는 신라의 민간 설화인 를 비롯하여 고려 가요인 , 조선 중기의 사대부인 정철, 박인로의 시조 등이 있다. 여기에서 는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그렸으며 은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보다 더 크고 지극함을 낫과 호미에 비유하여 읊었다. 그리고 정철은 에서 “어버이 사라신 제 제 셤길 일란 다 힝여라” 의 시조를 통해 부모에 대한 효성을 노래하였고 박인로는 “盤中(반중) 早紅(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의 시조를 통해 효를 노래하였다.또한, 한국 문학 속에는 이러한 효행의 사상과 함께 충의의 사상도 담겨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고려 가요인 과 사대부 시조가 있다. 은 충신이 임금을 그리워하는 노래로 ‘충신연군지사’로 불린다. 이후 정철의 가사인 과 에 영향을 주어 이들 작품들은 연군의 정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사대부 시조에는 정몽주, 이색 등의 여말 시조를 비롯하여 조선 전기의 절의가가 포함된다. 또한, 맹사성의 , 정철의 시조인 “江湖의 期約 두고 十年을 奔走 힝니” 등과 같은 충의가들에도 이러한 충의의 사상이 담겨 있었다.이처럼 한국 문학 속에는 효행과 충의를 그린 작품들이 시대와 상관없이 존재하였다. 이는 즉, 한국 문학에 충효의 정서가 담겨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한국 문학은 충효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3) 여성성의 문학한국 문학은 ‘詩歌史’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가 문학이 발달하였다. 특히, 고전 문학에 있어서 시가는 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 후기에 평민 의식이 성장하여 작품들이 시가 중심에서 산문화되고 장형화되기 전까지 한국의 고전 문학은 시가 중심이었다.그런데 고전 시가 작품들을 살펴보면 작중 화자들의 상당수가 여성적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비록 작가가 남성이라도 노래 안에서의 음색과 음조가 매우 여성적인 것이다. 특히, 이는 사랑·이별 등의 애정의 문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예를 들어 고대 가요인 의 경우 작가는 고구려 제2대 유리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의 내용을 살펴보면 남성의 노래보다는 여성의 노래인 것처럼 느껴진다. 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꾀꼬리에 의탁하여 표출한 점이나 실연의 슬픔을 노래한 점에서 남성보다는 여성의 섬세한 감정을 노래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려의 문신이었던 정지상이 지은 역시 여성이 지은 작품으로 느껴진다. 은 대동강을 배경으로 이별의 슬픔을 그리고 있지만 이별의 한과 이별의 눈물을 그렸다는 점에서 님과 이별하는 여인의 정한을 그린 것처럼 보인다.또한, 조선 후기에 등장하였던 애정 시조에서도 작가의 이름은 남성으로 되어있음에도 작품은 여성성을 띤 경우가 많이 있다. 더욱이 이러한 경향은 상층 사대부 남성의 작품에서조차 발견되고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이정보의 시조 “님이 가오시매 사매 잡고 이별할 제”는 마치 여성이 지은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이밖에도 남성이 여성적인 음색과 음조로 지은 작품들은 많이 발견되고 있다. 버림받은 여인의 비극적인 삶을 형상화한 이곡의 한시인 이나 표면적으로 님을 그리워하는 여성 화자의 마음을 초에 비유하여 연군의 정을 노래한 이개의 시조, 임금에의 사모의 정을 이별한 남편을 그리는 여인의 심경에 의탁하여 읊은 정철의 등은 모두 여성적인 정감을 지니고 있다.이와 같이 고전 시가는 상당수 여성적인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시가는 여성적인 목소리를 담고 있었을까? 이것은 당시 남녀의 문제를 논하지 않는 유교적인 이념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이고 더 근본적인 것은 여성의 섬세한 정서와 감수성이 운문인 시가를 표현하기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고전 문학 시대 이후에도 김소월, 김영랑, 서정주, 박재삼 등의 남성 시인들이 여성적인 음색으로 노래하는 것을 보면 여성의 정감이 시와 잘 어울린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문학은 여성성의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4) 한의 문학한국 문학은 한(恨)이라는 정서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은 주어진 운명에 대결하지 않고 순응함으로써 슬픔을 승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즉, 압박의 사회에서 저항하여 해결하기보다는 속으로 삭이고 순응하려는 정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흔히 우리 민족은 한을 가진 민족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이는 문학에 있어서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한국 문학 속에는 우리 민족이 가진 이러한 한의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이는 외세의 침략이나 신분적 억압 체제, 전통적 도덕주의와 숙명론의 굴레 등과 같은 역사적 배경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이라는 외세의 침략 속에서, 신분에 따른 차별이 철저하였던 사회적 배경 속에서, 관념적인 유교 이데올로기와 여성에 대한 숙명론적 인식 속에서 우리 민족은 한이라는 정서를 통해 슬픔을 승화하였고 이러한 정서는 자연히 문학 속에 투영되었다.그리하여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민족적 한은 고려 시대 때의 몽고 침입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 일제 침략기였던 1920년대의 현대시 속에서 표현되었으며 신분적 차별로 인한 한의 정서는 사설 시조와 소실·기녀들의 한시 등을 통해서 나타났다. 여기에서 이들은 차별 받는 사회 속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불행의식을 표현하였다. 또, 남존여비의 유교적·봉건적 도덕률 속에서 각종 사회적 구속에 얽매였던 여성의 한은 시집살이를 하던 부녀자들의 슬픔과 고난을 감동적으로 노래한 ‘시집살이요’와 같은 민요와 , , 등의 가사에서 표현되었다. 특히, 여성들의 한은 情恨이라 하여 님과의 이별을 주로 노래하였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고대가요인 을 비롯하여 와 같은 고려가요, 황진이의 시조, 민요 등이 있다.이와 같이 한국 문학 속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배경과 관련하여 한의 정서가 많은 부분에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한의 정서는 이후에도 이어져서 김소월의 , 서정주의 , 이청준의 등의 작품 속에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한국 문학은 한의 정서를 지닌 한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