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사이트 체험 비교모두들 정보화시대라고 입을 모으는 요즘, 유치원 다니는 조그만 꼬마들도 각자 메일주소 한두 개쯤 가지고 있고 노트북은 물론이요 핸드폰으로 웹 서핑을 즐기는 것도 이제는 너무나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요즘 들어 더욱 두드러지는 현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검색사이트의 강세’이다.텔레비전을 켜면 ‘거기’, 혹은 ‘네이버 지식인에게 물어봐’ 등의 광고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최근에는 더욱 경쟁이 거세져 거액의 톱스타들의 광고에 출현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은 검색사이트라기보다는 포털 사이트의 전쟁이라고 불러야 마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시작이 검색사이트였고 가장 메인으로 제공되는 서비스가 검색 서비스이므로 검색사이트의 포털 사이트 화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리라 본다. 검색 사이트 = 포털 사이트의 공식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므로 따로 언급하지는 않도록 하겠다. 그러나 검색사이트가 포털 사이트가 되고 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많아짐에 따라 우리의 생활에서 이런 검색사이트들의 존재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심지어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제작에 있어서도 이들의 존재는 무시할 수 없어서 우리는 ‘스펀지’등의 충분히 노골적인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상상 플러스(www.nate.com)’, ‘찾아라 맛있는 tv(www.yahoo.co.kr)'등 많은 프로그램들의 끝부분에서 검색사이트를 통해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해달라는 내용을 보게된다.이미지, 동영상, 사전, 뉴스, 쇼핑, 책, 카페, 블로그, 지도(지역), 맛집까지 검색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젠 무엇이든 물어보라며 당당한 도전을 한 ‘지식인’서비스까지 검색사이트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발전을 거듭해오고있다. 특히 최근의 검색사이트들은 생존전략의 하나로 차별화된 특성화 전략을 채택하고 있는 곳이 많다. 이런 검색사이트들의 현재 상황과 그 사이트들의 제공 서비스를 비교하기 위해서 요즘 가장 뜨고 있는 검색 포털 사이트인 naver와 학술 정보 검색에 있어서 가장 효율적이라는 평을 듣고 도록 하자.NAVER의 뜻는 항해하다의 뜻을 가진 navigate와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er의 합성어로 삼성 SDS 정보 기술 연구소의 검색엔진팀인 웹글라이더팀이 사내 벤처 프로그램으로 독립하여 제작한 검색엔진이다. 1998년 1월부터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고 그해 6월 한경 인터넷 대상을 수상한바 있고 1999년 6월에는 네이버컴(주)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인터넷 포털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그 이후 2000년 까지는 별다른 특이점을 보이지 않다가 2001년 9월에는 NHN(주)로 회사명을 바꾸고 2001년 1월 ABC협회로부터 1억 PV 돌파 인증까지 받지만 사실 그때까지 네이버는 지금과 같은 강세를 보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지금도 강세를 보이고 있는 야후, 엠파스 등의 검색엔진들이 더 강한 선호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네이버는 ‘지식인’서비스를 통해 확실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많은 사람들이 네이버가 처음으로 선보였다고 알고 있는 묻고 답하는 식의 지식검색 서비스를 처음으로 시작한 것은 네이버가 아니라 디비딕이었다는 사실이다. 2000년 디비딕은 묻고 답하는 식의 지식인서비스를 처음으로 선보여 많은 호응을 얻었지만 2002년 10월 네이버가 지식인 서비스를 시작하기 한달 앞서 디비딕이 유료화 됨에 따라 네이버는 사용자 수가 급격히 늘게 되어 상승의 기류를 타게되는 반면 디비딕은 그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후에 엠파스가 디비딕을 인수하여 누가 먼저냐에 대한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네이버 채선주 홍보팀장의 “계급이나 커뮤니티 기능은 지식인에만 있는 것으로 지식인이 디비딕을 참고하기는 했지만 더욱 서비스를 발전시켰다”는 말처럼 현재 지식인의 위상은 당시의 디비딕과는 물론, 현재의 엠파스와도 많은 격차가 있다.네이버 지식인 서비스의 초기, 네이버 지식인 때문에 미래에는 질문하는 사람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광고를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당시 네이버의 지식인 서비스는 우리에게 그만큼의 새로운 충격을 가버의 위상은 대단하다.그러나 사실 실제적으로 네이버 서비스를 이용해봤을 때는 그 위상에 비해 허점이 꽤 많다. 그중 가장 많이 느끼게 되는 것은 지식인 서비스에 있어서의 문제점이다. 물론 네이버가 지식인 서비스로 인해 터닝포인트를 맞았고 여전히 지식 검색 서비스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치인 것에는 틀림없으나 그 내용의 질에 있어서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간혹 있다.예를 들면, 같은 질문의 중복이나 고만 고만한 답변들, 출처도 없는 무단 도용 등의 문제는 다른 지식 검색 서비스도 당면해있는 문제라고 하지만 특히 네이버에서 성의 없는 답변이라거나 질문과 무관한 글이 많이 올라와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1위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많은 회원수와 ‘내공’제도)로 인한 부작용일 것이다. 그러나 불쾌하게까지 느껴지는 그러한 답글에 대해서 어떠한 제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 힘들 정도의 난무는 어떨 땐 짜증이 날 정도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공’제도의 부작용이라고 보이는 것인데 내공을 걸지 않거나 내공을 걸어도 내공의 양이 많지 않은 경우 답변을 받는 것, 혹은 답변을 받아도 성실한 답변을 얻기가 힘이 든다는 점이다. 실제로 내가 pinesherbet이라는 아이디로 2004년 10월 9일 올린 질문은 2005년 6월 현재까지도 제대로 된 답변을 얻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그리고 얼마 전, 길을 가다가 네이버의 힘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어떤 사람이 길을 물어볼 때였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어떤 차가 앞에 서더니 길을 물었다. 그러면서 보여준 것이 노트북에 있는 네이버 지역정보였다. 사실 나는 길을 아주 못 찾는 편에 속하기 때문에 그분을 도와줄 수는 없었지만 그냥 주위에서도 네이버 지역 정보 검색 결과를 출력해서 가지고 다니며 길을 찾는 사람을 자주 볼 수 있다. 실제로 나도 그렇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길을 아주 못 찾는 편에 속할 뿐 아니라 자주 길을 잃어버리기도 해서 어디 모르는 곳에 갈 때는 꼭 네이버 지역 정보 검색을 광주에 있는 제과 제빵학원 세 곳의 연락처와 위치를 지도로 표시해주었다. 지도의 확대, 축소는 물론 이동에 거리, 입체, 지도 축척 조절에 스카이뷰 기능까지, 하단부에는 지역관련 Q&A의 질문과 답변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또 한 가지 네이버의 장점을 들자면 책 정보 검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학기 초 독서지도론 수업의 서지사항과 서평조사 리포트를 쓰면서 이 서비스의 도움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 서비스에도 지적하고 싶은 점이 있는데 그것은 미디어 서평 외에 독자서평 등의 자료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간혹 책 정보 공유라기보다는 출판사 광고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여러 인터넷 서점들의 가격비교는 정말로 유용하다. 몇 번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하면서 이용해 봤었는데 배송료 정보는 물론 적립금 정보까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본문 검색을 통해서 책을 미리 보는 즐거움과 돈을 아끼는 재미까지 얻을 수 있다.그리고 네이버의 서비스 중에서 문헌정보학 개론 수업을 들은 뒤 가장 주목하고 있는 게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검색 창에 검색어를 입력할 때 검색에 도움이 될만한 여러 항목들을 보여주는 [검색어추천]서비스이다. 이것은 일종의 키워드 통제 장치로서 검색결과의 정도율을 높여주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또한 내가 이전에 검색했던 검색어를 기억하고 자주 검색하는 검색어를 저장하는 [내가 찾은 검색어], [검색포켓]서비스는 자주 검색하는 검색어의 경우 검색 창에 매번 검색어를 입력해야하는 번거로움을 덜어준다.그러나 무엇보다도 일상생활에서 네이버를 가장 자주 쓰는 이유를 꼽으라면 나는 검색기능 중에서는 이미지 검색을 가장 많이 하는 편이다. 네이버의 이미지 검색을 쓰는 이유는 뭐니 뭐니해도 검색되는 양의 차이에 있다. 포토갤러리, 포토앨범이미지, 포토앨범, 포토뉴스, 블로그, 디자인 파일 등 이미지의 분류별로 볼수도 있고 정확도, 해상도, 등록일 순으로 재배열도 가능하다. 해상도와 이미지 파일의 크기를 클릭하지 않아도 볼수 있다는 것은 카페나 블로그, 미니홈사진을 따로 이동해 들어가지 않아도 편하게 볼 수 있으므로 유용하다.다음으로 우리가 알아볼 것은 학술정보 검색으로 유명한 구글이다. 구글의 메인은 다른 검색 포털사이트들과는 다르게 깔끔하고 심플하다. 단지 흰색의 배경에 색깔있는 로고로 꾸며지고 최소한의 딱 있을만큼의 아이콘이라기에도 민망한 글씨들이 쓰여져있다. 그래도 때때로 기념일이라던가 국가의 특별한 날마다 바뀌는 독특한 구글만의 로고 디자인은 마니아가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다고 한다.구글의 학술정보 검색 서비스는 문헌정보학과 학술지 검색에 관련된 리포트 작성을 해야했을 때와 출판문화론 수업을 들으면서 구텐베르크에 관련된 발표를 준비하면서 그와 관련된 자료를 찾았을 때 많이 느끼게 되었다. 확실히 구글은 다른데서는 잘 검색되지 않는 학술지정보라든지 논문 정보, 학회의 사이트도 잘 검색해내곤 한다.그리고 이미지 검색의 경우가 눈에 띄는데 다른 검색사이트의 경우 리포트 자료라든가 하는 필요에 의해서 검색을 했을 때 정작 필요한 자료보다는 다른 애니메이션 자료랄지, 연예인 사진등의 자료가 대부분인데 반해 구글은 이미지 자료의 경우에도 필요한 자료, 검색어, 주제에 관련된 자료가 비교적 많이 검색되어 재현율, 정도율이 타 사이트보다 높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이것은 구글 자체만의 특화라기보다는 우리나라의 사이트와 외국 사이트와의 차이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이미지 자료를 검색했을 때 해당 이미지만 뜨는 것이 아니라-물론 다른 사이트에서도 출처의 주소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이미지 자료의 출처 원문을 클릭하지 않고도 보여준다는 점이 좋았다. 그것은 이미지 자료에 대한 설명에 도움이 되고 관련된 다른 이미지 자료를 찾기에도 좋다. 그렇지만 네이버와는 달리 종류별로 재배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단지 검색된 결과, 출력된 순서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지의 양이 많을 경우 특정 이미지를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효율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그리고 네이버와 구글을 동시에 띄워놓고 같은 검색어로 검색을 했을 경우다.
그리스 희극에 대한 고찰사실 사람들은 그리스 연극하면 당연히 비극을 먼저 연상하고 희극을 먼저 연상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그리스 비극은 역사와 문화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분야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양 고전으로써 여러 가지 매체에서도 소개되고 있고 소위 필독서라는 책들의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까닭도 있을 것이다. 심리학 분야에서만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엘렉트라 콤플렉스 같은 말들은 우리에게도 흔히 사용되고 있을 정도이니 오이디푸스 같은 경우에는 굳이 희곡을 읽거나 연극 등을 보지 않았다하더라도 내용 정도는 익히 알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그러나 나는 인간의 숙명적인 비극이니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니 하는 비극보다는 풍자와 해학적 웃음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희극 쪽이 훨씬 더 마음에 닿는다. 비극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서 [시학]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진지하고 완전하고 또, 그 자체에 위엄이 있는 행동의 모방이며 공포와 애련의 감정을 일으키는 사건으로, 이를 통해 이와 흡사한 감정의 정화를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라고 한다면 희극은 오히려 그 반대의 보통의 인간, 혹은 그 이하의 인간을 모방함으로써 웃음을 통해서 감정을 정화시키며 또한 그 속에 보다 자유롭게 작가의 의도라든지 당시 사회상에 관계되는 메시지가 담겨 일반 대중에게 보다 가깝게 그리고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데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그리스 희극(comedy)은 가면과 과장된 복장을 한 배우들이 무질서의 신 디오니소스의 축제에서 남근을 드러내놓고 추는 ‘코모스(komos)'라는 춤에서 유래되었다. 이것은 후에도 극중에 사용되어 코로스는 과장된 남근 모형을 달고 춤과 노래를 하기도 한다.그리스 희극은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있던, 그리고 페리클레스에 의해 안정된 정치가 이루어지던 아테네의 이른바 황금 시대에 들어와 가장 번영하였다.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적어도 질적으로는 점차로 몰락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리스 희극은 아테네의 최전성기와 몰락기를 함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중요한 사건들이 집 앞, 사원 앞, 궁정 앞에서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그러나 경우에 따라 집내부에서 사건이 일어나야 할 때에는 부득이 아키클레마(Accyclema)라는 특수한 이동식 장치를 사용했다. 기원전 5세기에 극장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이 장치는 바퀴가 달린 조그만 이동식 무대이다. 스케네 뒤에 준비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는 배우를 그 위에 태우고 밀고 나왔다. 특히 에우리피데스와 아리스토파네스가 이러한 장치를 즐겨 썼다.연극에 사용했던 장치에는 페리아크토이(periaktoi)라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마치 프리즘 모양 같은 삼 면을 갖고 있는 것으로 각 면에 양식화된 간단한 장치가 그려져 있어 삼 면 중 그 일면을 극의 장면 여하에 따라 관객을 향해 세워둔다. 물론 이것도 이동식으로 되어 있었다. 주로 흑백 두 빛으로만 양식화된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것이 언제쯤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이 밖에도 메카네(mechane)라는 장치가 있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기중기로 그 당시에 와이어액션을 가능하게 했다. 극의 종말에 가까워져 신의 출현, 즉 최후의 심판을 하기 위해 신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든가, 또는 죽은 신이 지상으로 내려와 인격화될 때 사용했다. 이 메카네를 이용해 신을 모방하는 배우를 공중에 매달아 놓아 ‘하늘에 있는 거룩한 존재’를 나타냈다. 아시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가 이 장치를 사용했으며, 아리스토파네스의 걸작 [구름]에서 소크라테스가 ‘나는 공중을 걸으며 태양을 사색하노라’라는 대사를 말하는 장면은 소크라테스가 이 메카네에 몸이 묶여 공중에 매달려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거대한 야외극장에서 2만이라는 큰 관객을 상대로 연기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대사의 전달도 그렇고, 웬만한 동작은 눈에 띄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 인들은 몸과 동작을 크게 나타내고, 소리를 좀더 높이고 폭을 넓히려 노력했다. 무대와 관객석 사이의 거리가 하도 멀기 때문에 얼굴 표정이나 부분이다. 그 후에는 프니고스(pnigos)라고 칭하는 열렬한 템포의 숨쉴 틈도 없는(프니고스는 바로 이뜻) 속도의 통쾌한 노래와 춤이 있다.이것이 극의 주요 부분으로서 에페이소디온과 파라바시스 부분이 교대로 이루어지는데, 몇 개의 에페이소디온과 파라바시스 부분이 교대됨으로써 극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다. 이렇게 에페이소디온과 파라바시스가 몇 차례 교대된 후에는 엑소도스(exodos)라는 이른바 종막 부분이 나온다. 이것은 관객들이 보는 과운데 스케네 양쪽 출입로 파로도스를 따라 코로스가 퇴장하는 과정을 말한다.코로스와 그 역할에 대해서는 이미 부분적으로 언급했지만, 정리해보면 첫째, 시의 아름다움과 무용미를 발휘했으며 둘째, 극의 주제와 분위기를 설명했고 셋째, 극도로 고조된 긴장감을 풀어주었으며 넷째, 경우에 따라 고민하는 또는 무모한 행동을 꿈꾸는 극중 인물에게 솔직하게 충언과 조언을 해주었으며 다섯째, 때로는 작가나 일반 시민을 대변해 의견을 전개하고 관객을 설득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끝으로 진행되는 극의 배경 또는 장치 역할을 했다.이러한 요소들은 아티카 고희극에서는-완전한 모습으로 전해져 현존하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이나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로 추측한다면-적어도 전성기 때에는 거의 일정한 구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벌]을 예로 들어보면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프롤로고스(프롤로그)1∼135행제1에페이소디온(에피소드)136∼229행파로도스230∼316행제2에페이소디온(아곤)317∼1008행제1파라바시스1009∼1121행제3에페이소디온1122∼1264행제2파라바시스1265∼1291행제4에페이소디온1292∼1449행부(附)1450∼1473행엑소도스1474∼1537행제2 파라바시스는 제1 파라바시스보다 훨씬 간단하고 짧은 것으로 아리스토파네스의 초기 일부 작품에는 완전한 모습으로 볼 수 있는데 다른 작품에서는 종종 변형되어 있기도 한다. 제1, 제2 파라바시스는 다 같이 극의 전개가 일단락 지어진 곳에 주입되어 있는데, 특asis)'등의 고희극의 구조를 이용하여 반전사상을 비롯한 다방면의 비판적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처럼 고희극은 그 구조에 의지하여 시대상황을 반영하며 짙은 정치색을 띠게 되었다.그러나 신희극은 고희극과 아주 다른 형태로 변하여, 인물도 현실적이고 사건도 환상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보편적인 조율의 희극이 되었다. 신희극은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연애 이야기를 다루는데, 여기에 고안된 비극적 상황은 오래 계승되며 서양의 희극 발달에 있어서 많은 소재를 제공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스 희극은 고희극의 정치풍자 대신 가벼운 일상을 다룬 신희극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이 경향은 헬레니즘 시기를 거쳐 역사의 대세가 로마 쪽으로 기울면서 더욱 강화되었다.그중에서도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는 신희극의 메난드로스에 대해 고희극을 대표하는 희극 작가인데, 페리클레스가 다스렸던 아테네 황금시대에 태어났지만, 청?장년시절이 펠로폰네소스전쟁 무렵이어서 그의 작품은 정치색이 짙다. 그는 전쟁으로 농지가 황폐해지자 고통받은 농민의 입장에서 평화론을 주장하고, 수공업자층에서 갑자기 출세한 선동정치가를 증오하며 당시 유행한 사상과 윤리를 풍자하였다. 작품 제목은 44편이 알려졌지만 완전한 형태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11편이다. 현존하는 작품을 주제별로 나누면 대략 다음과 같다. 파르타와 화평을 맺어 행복해진다는《아카르나이의 사람들(BC 425)상연)》, 농부가 퐁뎅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평화의 여신을 찾아내어 평화를 실현하는《평화(BC 421)》, 《여자의 평화(BC 411)》 등 반전(反戰)을 주제로 한 것과 야비한 방법으로 출세한 정치가 클레온을 비판한《기사(騎士 BC 424)》, 선동정치가에게 조종된 어리석은 사람들이 죄도 없는 사람들을 엉터리 재판으로 치죄하는 재판제도를 비판한《벌(BC 422)》등이 있다. 어리석은 인간세상을 버린 두 사람이 하늘에 이상국가를 세우는 《새(BC 414)》는 유토피아 환상이 뛰어난 작품이며 또한 비극시인 에우리피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가 사용한 진리에의 도달 방법이 소피스타의 그것과 비슷했으며, 그의 인습에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토의는 이 작품에서 풍자되고 있는 정론, 사론의 토의와 비슷한 점이 잇었는지 모른다. 이 작픔에 그려진 소크라테스의 풍모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에게 주어진 사고방식이나 주장은 플라톤과 크세노폰을 통해 전해진 것과는 정반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자와 같이 그려진 이 상형의 소크라테스와 대조적인 이 작품의 소크라테스를 보면서 우리가 몰랐던 그의 또 다른 일면을 표현하는 희화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닌가한다.이 작품은 기원전 423년에 상연되어 삼등, 그러니까 꼴찌를 차지했다. 현존하는 이 작품은 이러한 실패에 자극을 받아 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작품에서는 스트레프시아데스와 페이디피데스가 소크라테스에게 가르침을 받으려하는 부분에서는 코로스가 둘로 나뉘어 각각 정론과 사론을 대표하여 싸우는 아곤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아리스토파네스의 대표작중의 하나인 도 펠로폰네소스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 발상과 내용의 재기발랄함이 재미있고 색다르기 때문에 주목할만하다고 생각되어 여기 소개한다. 는 기원전 411년에 상연되었는데 그 당시 아테네는 일대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10년에 걸친 스파르타와의 패권을 둘러싼 투쟁은 니키아스 평화조역(BC 412년)으로 일단락 지어지는 듯하더니, 기원전 418년의 만티네이아 전투로 하여금 다시 적의가 표면화되어 아테네는 시칠리아 원정을 계획하여 기원전 415년 여름. 그리스 사상 최대의 함대로 이루어진 원정군을 시칠리아로 파견하으나 이 계획은 무참한 실패로 돌아가고 육군과 해군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여, 아테네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수많은 청년들과 위대한 지도자들이 목숨을 잃었다.한편 오랫동안 아테네에 공세를 바쳐오던 동맹 동시들이 키오스, 밀레토스를 비롯해 속속 이탈하기 시작했고, 스파르타는 해상관을 장악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아테네는 최
격동의 현실과 강인한 정신-여왕 마고당대 최고의 여배우 이자벨 아자니가 피칠갑을 한 흰 드레스를 입고 있는 포스터라니 관심이 생기지 않을래야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화의 배경이 종교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시점에 있어서의 구교와 신교의 결혼이라는 점, 게다가 저 강렬한 포스터에서 원만한 내용은 아닐거라고 짐작하기는 했지만 막상 영화를 봤을 때의 느낌은 기대 이상이었다.비디오 테잎 2개, 약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이었지만 지루한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홍도의 멀티미디어실에서 본거라 화면도 어둡고 작긴 했지만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잠깐씩 까먹을만큼 박진감 넘치는 내용이었다.영화는 전체적으로 종교개혁과 그 후에 촉발된 종교세력간의 탐욕과 음모, 전쟁 등의 처절한 다툼 중의 하나인 프랑스의 신교도들인 위그노와 구교인 카톨릭 세력간의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위그노란 프랑스의 캘빈주의를 신봉하는 신교도들을 일컫는 말로써 장엄한 성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카톨릭 교도들이 의식적 행동보다 의식과는 관계없이 항아리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단순히 옹기종기 모여 생활하는 신교도들을 경멸해서 부르는 말이다.16세기 전반에 프랑스는 전통적인 카톨릭이 강한 가운데 캘빈의 영향을 받은 신교도들이 탄압정책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조직을 통해 왕족과 유력한 귀족에게까지 침투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프랑스 왕들은 신교를 탄압해왔고 프랑스와 1세를 뒤이은 앙리 2세 역시 신교를 극단적으로 탄압하여 많은 적을 만들었다. 프랑스의 신교도들은 주로 도시민, 부농, 상공시민, 그리고 유력한 귀족들에게 큰 영향을 발휘하면서 전국적인 조직을 결성하고 만만치 않은 정치 세력으로 등장했다.발로아 왕가의 전통적인 카톨릭 신봉자였던 앙리 2세와 왕비 메디치의 캐더린은 5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 영화의 주인공 마고(Margot, Margaret의 애칭)은 그중 5번째, 막내딸이다. 왕의 ?이고, 왕의 여동생이고, 또 나바르의 왕 앙리와 결혼함으로써 왕의 아내가 된 마고는 진정한 의미에서 여왕이 아닌가 하는 의미에서 영화의 제목을 ‘여왕 마고’라고 한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서 드러난 가장 감동적인 것은 그녀의 위치가 아니라 그녀가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던 강인함이라고 생각한다.이 발로아 왕가는 프랑스 내 대 귀족들의 세력균형 위에서 왕권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1559년 앙리 4세가 죽고 어린 아들 프랑스와 2세는 집권하자 그의 왕비의 삼촌이 되는 기즈 공작이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으며 그는 열광적인 가톨릭 교도로 왕권을 배경으로 신교의 세력을 탄압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신교도들은 인구의 10%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유하고 활동적인 도시상공 시민층과 전통적인 부농계급들이 중심이 되어 있어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신구교도간의 갈등은 근본적으로 볼때 종교의 갈등이었지만 그 내부에는 귀족간의 갈등, 귀족과 왕권의 갈등, 왕위 계승문제, 국제적 외교문제(영국은 신교, 스페인은 구교를 지원) 등의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그런 와중에 프랑스와 2세가 2년만에 죽고 그의 동생 샤를르 9세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샤를르 9세는 열 살 밖에 되지 않았고 자연히 권력은 어머니인 캐더린에게 넘어갔다. 섭정을 이끈 캐더린 역시 극단적인 카톨릭 신봉자였지만 귀족들 간의 혹은 신구교도의 갈등 사이에서 왕권강화를 위해 위그노들에게 제한적이었지만 종교적 자유를 허용했다. 그러나 캐더린의 이 조치는 기즈공을 비롯 프랑스의 카톨릭 세력들의 강한 불만을 샀고 결국은 양파간의 전쟁이 발생했다.1562년 기즈공의 바시에서의 위그노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프랑스의 신구교도의 갈등은 증폭되었으며 약 10년이 넘는 유혈갈등으로 결국 두 세력은 타협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바로 하나뿐인 공주, 마고의 결혼이었다. 신구교도의 타협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왕족의 결혼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신교도인 나바르의 왕 앙리와 구교도인 마고를 결혼시키기로 한 것이다.결국 1572년 성 바르돌로매의 제일날 결혼식은 성대하게 진행되었지만 이날의 새벽 종소리를 시작으로 구교도들에 의한 신교도들의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영화는 이러한 장면들을 시작으로 진행되었다. 영화 초반을 사로잡은 이 무자비한 학살은 캐더린과 기즈의 치밀한 사전 음모 아래 위그노 지도자 꼴리니를 비롯하여 약 2,000명 이상이 살해되었는데 이를 ‘성바르돌로매 대 학살’이라고 한다.이렇게 신구교도가 타협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결혼하게 된 두 사람, 그러나 결혼 첫날부터 피로 물들었으니 그 사이가 과연 평탄할 수 있을까. 영화속에서 마고는 이미 애인이 있는 상태로, 결혼 첫날밤 남편이 된 나바르의 앙리가 마고의 방을 찾지만 그곳엔 이미 마고의 애인이 찾아와 있었다. 게다가 마고는 애인이 한두명이 아닌데다가, 결혼한 직후 남자를 찾아 거리로 나서고 거기서 중요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라 몰르’로 그들은 그것을 계기로 진정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그러나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결국 마고는 나바르를 도와 살아날 궁리를 하고, 나바르는 마고와 라 몰르의 도움으로 프랑스를 탈출, 나바르로 돌아가게 된다. 영화속에서 마고의 어머니인 캐더린은 냉정하고 셋째아들 앙리 3세만을 편애하는 냉혹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앙리 3세에게 평화롭게 왕위가 넘어갈 수 있도록 마고의 결혼을 추진한 장본인이기도 하고 앙리 나바르의 어머니의 죽음을 사주하고 앙리 나바르까지 죽이기 위해서 책에 독을 바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 독에 결국 죽임을 당한 사람은 캐더린의 둘째 아들, 당시 프랑스의 왕이었던 샤를르 9세이다. 샤를르 9세는 영화속에서 병약하고 의지할 곳없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마고를 아끼고 끝까지 곁에서 떠나보내지 않으려고 한다. 사냥터에서 죽을뻔한 것을 나바르가 구해줌으로써 나바르를 신용하고 따르게 되고 결국 나바르의 책상에 놓여져있던 독이 발라진 책을 읽게 됨으로써 죽음에 가까워지게 된다.영화속에서는 아들 앙리 3세를 왕위에 올리기 위한 캐더린의 냉혹한 음모와 당시의 왕실과 귀족들의 타락과 대비해 마고와 라 몰르의 사랑을 부각시키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마고와 앙리 나바르의 처절한 삶을 그려낸다.결국 앙리 나바르를 도망가게 도와주고 다시 마고를 구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잡혀 사형의 위기에 처한 라 몰르를 살리기 위한 마고의 노력은 샤를르 9세의 죽음과 함께 물거품으로 돌아가 라 몰르는 처형당하고 마고는 라 몰르의 머리를 안고 마차에 올라 사라지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영화 이후의 시대에서는 나중에 프랑스의 왕위에 오름으로써 부르봉 왕가를 연 앙리 나바르(이후부터는 앙리 4세로 지칭)가 1598년 4월 13일 공포한 낭트 칙령)에 의해 신교도들은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았으며 약 30년간 지속된 프랑스의 종교전쟁(위그노전쟁)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항구적인 자유가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1610년 5월 14일 교황청이 보낸 자객에 의하여 앙리4세가 살해되면서 종고적인 자유는 종종 위협을 받았다. 특히 앙리의 미망인 마리 드 메디치(앙리 4세가 마고와 이혼 후 결혼한 부인)가 약 7년 동안 어린 아들 루이13세를 도와 섭정하면서 위그노에 대한 차별 정책을 폈기 때문에 위그노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앙리의 아들 루이 13세는 1624년경부터 추기경 리슐리외를 수상으로 임명하여 절대 왕정을 추구하면서 위그노에 대한 차별 정책을 실시하였고, 그의 아들 루이 14세는 위그노를 절대왕조 건설의 걸림돌로 여겼다.루이 14세가 절대 왕정을 실현하기 위해서 종교와 정치의 통일을 역설한 반면, 위그노들은 정치와 종교의 영역은 다르므로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이 14세는 이러한 위그노의 정치 사상이 그가 추구하던 절대 왕조 건설의 가장 큰 장애물로 여겼고, 위그노에 대한 박해 정책을 전개하였다. 그는 1665년 위그노 자녀들을 로마 천주교도 밑에서 교육 받도록 했고, 로마 천주교로 개종시키기 위하여 폭도를 동원하여 협박하기도 하였다.루이 14세에 의한 기독고 박해가 재개되자, 프랑스의 고위층을 형서하였던 위그노 귀족들, 학자들 , 상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과 미국등으로 이민의 길을 떠났다. 이와 같은 고급 인력의 해외 유출은 프랑스 경제만이 아니라 사회 생활에 심한 타격을 가하였다. 인적인 자원의 손실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손해가 막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 14세는 위그노 박멸정책을 고수하였다. 그는 위그노가 떠나면서 로마 천주교회의 세력이 다수를 이루자, 1685년 10월 17일 위그노가 없다는 것을 구실로 낭트 칙령을 폐지하였다.
삼 국 유 사*구성:정제된 체제로서 구성된것×.자의적인 편집에 의해 구성됨.,,,,,,,,*의의-사료적 가치: 전거밝힘.인용문 자의 변경×.향가의 기록 등-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적 태도-민족적 자주성 강조:한국의 고유 문화에 대한 존중-민족적 자주성의 표시*작자 - 일연-충렬왕을 모시면서 국사로 책봉되기도 함. 국사라는 직책은 따지고 보면 역사 기록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것은 별로 없으며, 저술의 직접적인 동기는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일연은 국사로 있으면서 궁궐에 소장되어 있는 모든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었고, 또 마음만 먹으면 자료 수집을 위하여 유적을 답사할 수 있어 그 분야에 대해 알고 있는 지역 사람들에게도 전해들을 수 있는 기회가 적지 않았다.-삼국유사 곳곳에 마치 답사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적지 않음. 생동감 넘치는 책으로 만드는 계기 부여. ,같은 데서 그 전거를 두면서도 직접 체험하며 얻은 느낌을 첨가하여 생생하게 적음.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 ‘상지론지’,‘의왈’ 등으로 자신의 의견임을 밝힘.-왜 를 지었는가? 삼국유사 기이편의 맨 처음에 있는 서왈.자주 의식의 소산. 당시 고려 전기의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사회가 지나친 사대주의로 일관해 중국 문화의 주변 혹은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의식을 비판적으로 생각하게 됨. 고려가 떠받들던 중국 송나라가 망하고 중국인들익 그토록 무시하던 몽골족이 새롭게 원나라를 세운 사실은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옴. 삼국사기가 유교의 도덕적 사관에 의지한 편협된 시각에서 저술된 것이라고 판단 삼국사기에 빠진 부분을 보강한다는 취지. 탈 유가적 가치관에 바탕. 인간평등의식-찬왈; 후반후항목마다 빠짐없이 실려있는 한편의 시. 효과적 마무리. 일정한 의미부여. 산만하게 편찬된 체제에 통일성 부여.(철저한 비판의식 없이는 불가능)
인간,생존,현실-경제사관에 관하여“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다”라고 흔히들 말한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혹은 부정도 하겠지만 그 역시도 ‘돈’의 문제, ‘돈’의 세력권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경제사관이란, 역사 역시 ‘돈’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사실 ‘돈’이라는 한정된 무엇이 아니라 물질이라는 좀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하겠지만 말하자면-그것을 뛰어넘어서 경제의 흐름에 따라 역사가 진행되어 왔다고 하는, 다시말하자면 역사가 경제의 지배를 받는다고 하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는 사관이다. 백과사전을 빌려 정의하자면 경제사관은 ‘역사를 사회발전의 가장 기본적인 動因이, 즉 진보의 조건이 되는 인간의 사고와 생활의 변화를 가져오는 요인이 경제라고 보는 사관’이다.이를테면 고대 사회에서의 노예제의 생성 역시 경제적 관점에서 파악된다. 농업 혁명이후 인간에게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과 노동력의 중요성이 크게 증가하게된다. 그러므로 부족간에는 더 많은 토지와 더 많은 노동력을 얻기위한 전쟁-정복운동이 발생하게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전쟁은 후기의 전쟁처럼 많은 인명피해나 땅의 황폐화를 초래하지 않았다. 무기 등의 여러 가지 전쟁 도구들이 발달하지 못했음도 하나의 이유이기는 했지만 보다 근본적이 이유는 전쟁의 목적이 생산의 도구를 획득함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때까지는 이렇게 이루어진 부족간의 통합 이후의 지위에 대해서도 거의 차별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지나 이러한 정복전쟁이 일상적이 되어감에 따라 계급 분화가 발생되었고 정복자는 피정복자를 부족의 공동 노예로 삼았다. 이 노예의 신분은 혈통적으로 그 자손에게까지 계승되었으며 이러한 부족의 공동노예는 부족 공동체 내의 부의 차등, 지배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지배계급의 사유노예로 옮겨졌고, 부족 공동체 내의 부의 차이로 인하여 다시 동족간에도 노예가 발생하게 되었다. 부채 미납자의 노예전락, 자녀의 매매에 의한 동족노예의 발생이 그것이며, 또 동족 공동체의 체제가 확립되면서는 범죄자에 대한 벌칙는 것이다. 공동체 내부에는 계급적 분화 및 사적 소유제가 발생하지 않은 채 공동체장은 가부장적 지위로서 중앙집권적 군주국가의 관료군에 편입되었다는 것인데 따라서 여기서는 생산수단인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는 발생하지 않았고 전제군주 국가는 관념상 토지의 소유자이며 각 공동체는 토지의 점유자로서 이를 경영하고 있다고 본다. 이에 관한 마르크스의 “토지 소유권의 결여는 실제로 동양 전체를 이해하는 관건이다. 거기에 바로 정치 및 종교의 역사가 있다”라는 말은 경제사관이란 어떠한 것인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이러한 토지 소유권 사상을 왕토사상이라하며 왕토사상은?천하의 토지는 왕의 토지가 아닌 것이 없고, 천하의 신하는 왕의 신하가 아닌 것이 없다?라는 《시경(詩經)》에서 비롯되었는데 실제로 내가 읽었던 다른 많은 책에서도 동양적 전제 군주와 서양의 황제와의 차이가 군주의 토지소유권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군주는 원칙적으로 모든 땅의 주인이므로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재분배했었던 사례-세조 12년에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과전법의 모순점인 세습, 세전성을 차단하기 위해 이미 주었던 토지를 몰수하고 재분배한 사례 등-가 있었다. 이것은 서양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서양에서는 중세 영국왕과 프랑스왕의 미묘한 관계(왕과 국가의 동일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와 왕의 영토는 동일시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영국왕은 꽤 오랫동안 프랑스왕의 가신으로서 프랑스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영국왕이기도 할 수 있었다. 동양에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와 중세 말기 영주들이 임의로 땅을 대여하거나 도시정부 등에게 팔아넘기기도 했던 점을 보아도 차이는 분명하다.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봉건제는 왕과의 군사적 보호 계약인데도 이러한 차이점이 나타났던 이유는 서양에서는 대가로 토지를 ‘주고’ 동양에서는 ‘빌려주고’의 개념으로 설명하려해도 무어가 모자란듯한 느낌이 든다-서양에서도 동양에서도 충성심을 일정 기간마다 확인하는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조선을 봉건제 사회의 단계라고 만들어내게 되었다.도프쉬의 개별 주의 사학은 19세기 사학에 대해서는 하나의 전진적인 성과였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그의 방법론도 너무나 개별적인 사관에 치중한 나머지 체계를 잃고, 역사의 발전성을 뚜렷이 파악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두 번째로는 마르크스의 계급 투쟁 사관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겠다. 마르크스 방법론에서 비판받고 있는 또 하나의 점은 그가 너무나 계급 구성의 면을 강조하는 나머지 생산수단의 소유 내지 지배양식의 구명에 치중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그의 경제사관은 하나의 투쟁사관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경제사연구가 계급투쟁을 이론적, 역사적으로 지원?해명하려는 의미로서만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경제사학은 생산수단을 누가 지배하고 있는가에 그치지 않고 그것은 ‘어떠한 양식으로 경영되었는가’에 대한 보다 깊은 실증적인 구명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세 번째로 자본주의 종말론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다. 마르크스의 경제사학에 대한 또 하나의 비판점은 자본주의 사회의 증언에 대한 예언이다.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필연적인 것이며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의 생산력의 부단한 발전은 자본주의 생산 양식 그 자체를 부정하게되어 자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와 동시에 혁명이론을 첨가하여 자연적인 그 사회의 붕괴를 혁명을 통해 인위적으로 촉진시킬수 있다고 하였다.그러나 20세기 이래의 자본주의사회 내부에서 일어난 현실이 마르크스의 예언과 부합되지 않았다. 20세기 이래 세계 선진 자본주의 사회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말기적 양상을 나타내고 있거나 붕괴되기 보다는 오히려 번영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미개발지역을 개발하면서 국내의 과잉자본을 수출하고 고용을 증대시키고 국민소득은 이로 말미암아 상승됨으로써 노동자의 생활수준은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나 높아지므로 계급대립은 격화되기보다는 둔화되어 간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은 자본주의가 성숙한 곳에서 있어서 가장 중요한 즉 이윤동기보다 훨씬 중요한 원동력의 역학을 하여왔다’고 말하고, 그는 이러한 비경제적 요소가 전통적 사회의 근대화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경제적 요소, 어떠한 비경제적 요소가 작용했는가의 문제가 각 나라의 사정에 따라 한 가지가 아니었음을 밝히며 예를 들고 있다. 독일에서는 융커와 서부 상공업자,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계급과 곡물상인, 1861년 이후의 러시아에서는 중류 상인 계급과 진취적인 관리 및 군인 간의 단합을 들고 있다. 그의 이와 같은 견해는 동양사회의 근대화, 오늘날 후진국의 정부 역할을 보아도 수긍될 수 있는 일이다.그러나 또한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는 있다. 당장 우리나라의 예를 들어보더라도 조선시대의 우리 민족은 걸핏하면 건너와 사람을 해치고 약탈을 자행하는 왜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배타적 민족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왜에 대한 배타적 민족주의는 발전하여 외세에 대한 배타성으로 발전하고 결국에는 흥선대원군시절에 척화비를 세우는 등 철처한 쇄국정책을 펼치게 된다.그리고 현대의 정치 상황은 말 그대로 약육강식의 논리가 통용되는 사회이다. 잘 살고 큰 나라에게 못 살고 작은 나라가 불이익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부의 정책이 경제적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이러한 경제적 힘의 논리에 의해서 가능한 행동 반경이 축소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엄연한 현실로 인정해야 할 것 이다.로스토우는 또 마르크스가 예언한 자본주의 말기의 과잉 생산에 대응치 못하는 과소수요, 이에 따르는 일반 공황 및 자본주의의 붕괴라는 과정은 정부의 정책적 조작으로 대량생산에 호응하는 대량소비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보며 거기에 따르는 일반 국민의 소비 수준의 향상으로 계급의식은 둔화 내지 소멸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로스토우는 마르크스의 사회 경제 사학을 비판하고 도전의 대상으로 보았지만 20세기 이래의 신 실증주의사학에서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해서는 눈감아 버렸다는 점에서 그는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않고 어디까지나 사료에 충실하고 사료로 하여금 말을 시키는 철두철미한 실증주의를 고수한 것이다. 도프쉬의 실증사학은 경제사를 역사학의 영역에까지 끌어올렸고, 이점에서 20세기 경제사학에 공헌한 바 컸다고 하겠으나, 반면에 경제사학에 있어서의 19세기에 남겨놓은 이론적인 발전에는 쐐기를 박아 놓았다는 비난도 아울러 받게 된 것이다.실증 경제 사학의 대두와 더불어 경제사는 역사학의 수준에까지 발전하고 있었다 함은 앞에서 기술한 바이나, 또 한편으로 경제사는 이론 경제학으로의 접근이 보다 강하게 나타나는 것도 20세기 경제사학의 특징이라고 하겠다.포스탄이 지적한 바와 같이 “경제 사학은 수나귀와 암말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노새와 같은 것이다” 즉 경제 사학은 역사학과 경제학이라는 두 개의 학문적 계보에서 태어난 것이며, 역사학과 이론 경제학의 성장의 성과를 채용하면서 경제사학도 발전하여 가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 사학이 결코 독자의 학문 분야를 가지고 있지 않는 다는 뜻은 아니다. 경제 사학은 역사학에서 할 수 없는 분야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이론 경제학 만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분야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중엽 이후 경제사학이란 학문의 형성이 필요케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그는 사회경제사의 임무에 대해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경제사가 사회과학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개개의 상태, 예를 들면 13세기 영국의 농촌사회, 18세기 미들랜드에 있어서의 근대산업의 흥융, 19세기 전반에 있어서의 임금 및 노동시간에 대한 노동자의 태도, 19세기 후반기에 있어서의 독일의 기술 교육, 중세의 영국양모무역 등등의 연구에 종사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상태의 연구를 통하여 문제점을 바로잡고 사회적 제원인의 작용을 밝혀낼 수 있는 해답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13세기의 농촌사회를 연구함으로써 인구의 성장에 의한 경제적 변동이 논증될 것이다. 역사연구에 있어서의 이러한 현미경적 문제는 소우주적인 것이며, 그 문제 자체보다도 더 큰 세계를 반영할 수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