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만의 버킷 리스트죽음의 가치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유한성을 깨닫게 하는데 있다. 만약 내일 죽는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남은 시간에 쇼핑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플레이스테이션을 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불로초가 없음을 깨달을 때 사람들은 인생의 참의미를 고민하게 된다. 죽음은 인생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만든다.죽음은 삶의 종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죽음을 앞 둔 사람은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를 돌아보기 원한다. 그들의 관심은 자신의 흔적이 남아있는 과거로 좁혀진다. 또한 죽어가는 사람들의 바람은 ‘죽기 전에 무엇을 더 먹고, 더 입고, 더 볼까.’ 하는 감각적인 것들이 아니다. 그들은 짜릿한 스카이다이빙을 하기 보다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어 의미를 남기길 원한다.곧 죽을 두 노인이 버킷리스트를 만드는 것 까진 좋았다. 문제는 리스트의 내용이다. 그들의 리스트는 오감을 만족시켜 주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게다가 돈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다. 만약 두 노인의 버킷리스트가 일반적인 것이라면, 돈 없는 사람들은 한 많은 죽음을 맞아야 할 것이다. 리얼리티가 결여된 스토리 덕분에 한 노인은 필연적으로 부자일수밖에 없다.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은 안다. 죽어가는 이들은 가장 먼저 인간관계를 생각한다. 남겨질 사람들을 걱정하고, 그들 기억 속에 남겨질 자신을 상상해 본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자신이 누군가의 삶에 디딤돌이길 바란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길 바라고, 용서하고 용서받길 바란다. 오감의 만족은 그 다음이다. 자신의 오감을 만족시키기 위해 아내의 곁을 떠나는 경우는 생각하기 어렵다. 버킷리스트는 가짜의 냄새가 다분하다.이 리스트에 관객들이 쉽게 속는 이유는, 관객에게 죽음이 멀리 있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무의식적으로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하게 되고, 노인들의 리스트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럭셔리한 비주얼도 관객을 속이는데 한 몫 한다. 어쩌면 누군가는 비슷한 리스트를 작성하고는 돈을 모으려고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두 노인이 가장 처음 하는 일은 스카이 다이빙이다. 영화 ‘에프터 라이프’에서 여학생이 ‘짜릿한 놀이동산’의 기억을 뒤 엎은 것과 대조적이다.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일주일 뒤에 죽을 사형수에게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라고 해보자. 그가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베리 크림 프래쉬 그라탕’1)을 얘기할 것 같은가? 죽기 전에 한 번 먹어보자는 심정으로? 아니다. 평소에 즐겨먹던, 그러나 감방에선 도통 구경도 할 수 없었던 ‘아구찜’2)을 얘기할 확률이 크다.
집착.에는 한 여자와 두 남자가 등장한다. “날 위해서”라는 한 마디로 모든 걸 가능케 하는, 충만한 성적매력을 지닌 일로나 언니. 얼굴에 숯검댕만 좀 바르면 필리피노라 해도 무방할 외모의 안드리아 총각. 모 교수님과 유사한 외형으로 우리의 눈을 현혹시켰던 라즐로 아저씨.1) 이들의 관계를 뭐라 정의하면 좋을까. 모르겠다. 삼각관계지만 삼각관계가 아닌, 노멀 하지 않은 삼각관계다.온화한 얼굴의 라즐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로나를 완전히 잃느니, 한 부분이라도 가지겠어.” 참으로 무서운 대사다. 이거야 말로 ‘궁극의 집착’이 아닌가. 안타깝게도 일로나는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그렇게 그들의 2:1 연애는 시작된다.소유욕은 불안을 부른다. 서로가 서로에게 베스트임을 확신할 때 인간은 안정감을 느낀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불안과 고통을 느끼게 된다. “나는 이 사람을 아구찜2) 만큼이나 좋아하는데 이 사람에게 나라는 존재는?” 이런 생각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사람들은 ‘이렇게 행동’하면 상대방이 ‘저렇게 반응’ 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여러 가지 변수에 의해 기대는 빗나가기 마련이다. 대상에게서 기대하는 반응을 얻어내지 못할 때 인간은 고통을 느낀다. 소유욕이 부르는 불안과 고통은 견디기 힘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서로를 완벽히 ‘상호 소유’ 했다고 믿는 연인들의 안정감은 엄마 뱃속에서의 그것에 가깝다. 누구나 그것을 누리기 원한다. 하지만 라즐로는?4학년 때 부산에서 시골로 전학을 했다. 나는 새로운 학교에서 H를 만났다. 엄마 친구의 딸이었던 H와 나는 빠른 속도로 친해졌다. 뒤 늦게 알고 보니 H는 진정한 ‘엄친딸’3) 이었다. 그녀는 착하고 예쁘고 똑똑했다. 게다가 부반장이었다. 귀한 분이 나와 놀아주시니 나로선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뒤에 앉던 Y가 나를 옥상으로 불러냈다. Y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너, H랑 놀지마.”알고 보니 Y는 내가 전학 오기 전까지 H의 단짝이었다. 최근 H와 소원해진 Y는 그 원인이 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원인은 Y의 태도였다. H는 자신을 향한 Y의 집착과 이기심에 질려서 Y를 멀리했던 것이다.나는 Y덕분에 H의 인기를 실감했다. 어째서 인지, H의 인기를 실감하고 나자 내 마음에도 H에 대한 소유욕이 생겨났다. 다행히 나는 Y보다 똑똑하고 교활한 인간이었다. Y와 같은 실수를 할 수는 없다....... 나는 관심과 무관심의 경계에서 H를 대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대성공. H는 졸업 할 때까지 스스로 나의 단짝이길 자처했다.돌이켜 보면 기어이 내 머리채를 휘어잡은 Y의 천박한 집착도, H를 향한 숨겨진 나의 소유욕도 모두 섬뜩한 것들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소유하려 하다니. 재미있는 건, 중고등학교에도 비슷비슷한 일들이 종종 일어났다는 것.인기인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방법은 대체로 두 가지 이다. 첫째,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며, 그들의 총애를 구한다. 둘째, 그들의 소유욕을 자극할 만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하지만 나와 라즐로는 제 삼의 방법을 선택했다. 상대방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척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또 다른 사랑까지도. 선택을 강요하지 않으므로 일로나는 라즐로는 떠날 필요가 없다. H도 자신에게 비비적 거리지 않는 나를 편안해 했다. 하지만 나와 라즐로의 본의는 상대방를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궁극의 집착이 아닌가. 라즐로는 교활했던 11살의 나와 닮아 있었다.혹자는 일로나는 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정하자. 우리는 일로나가 부럽다. 누구나 사랑받고 싶다. 그것도 기왕이면 많은 사람에게. ‘파리의 연인’이나 ‘봄 날’ 같은 드라마가 괜히 뜬 게 아니다. 욕구에만 충실하다면 우리는 술탄의 할렘도 이해할 수 있다. 하물며 일로나의 행동쯤이야. 두 남자가 사이좋게 공존해 주셨으니 일로나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지만 그것도 능력이 돼야겠지. 고백하건데 내 매력으론 한 사람 간수하기도 벅차다.
천국으로 가는 길.바다는 선택 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이데아의 세계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만 그 입구를 볼 수 있고, 한 번 보고 나면 포기할 수 없는 완전한 곳. 그 세계에서 비쳐오는 희미한 빛을 봐버린 이들에게 지상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지상으로 복귀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완전한 바다’는 ‘지상의 불완전성’을 분명하게 인식시켜 주면서, 동시에 완전으로 이르는 길을 알려준다.1) 끝내 그들은 그 곳으로 가버린다. 죽음이라는 길을 지나.쟈크에게 바다는 그 자체로 완전한 공간이면서, 자신을 온전하게 해주는 곳이었다. 바다 속에서 그는 작고 여린 아이가 아니었다. 바다는 결핍된 모성2)을 채워주는 곳이었고, 먼저 간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으며, 형제인 돌고래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바다에서 그는 약하지도, 외롭지도 않았다.그런 그에게 지상은 의미 없는 곳 이었다. 그에게는 궁금한 세상사도 없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들려줄 얘깃거리도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바다 뿐 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바다로 돌아가길 바랐다. 그것은 그에게 기쁨인 동시에 고통이었다.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아가미가 없었다.엔조는 어린아이 같은 쟈크와 달리, 거대한 성인남자였다. 그런 엔조는 쟈크에게 있어서 또 한 명의 아버지였다. 쟈크는 엔조를 사랑했고, 여느 아들들처럼 아버지인 그를 뛰어넘고 싶어 했다. 쟈크를 다시 수면으로 돌아오게 하는 건 엔조에 대한 사랑과 승부욕이었다. 그랬기에 엔조의 죽음은 쟈크의 영원한 잠수를 의미했다.조안나는 지상에 존재하는 작은 이데아였다. 하지만 그랑블루와 비교할 때 그녀의 실체는 너무나 불완전 했다. 쟈크가 처음 그녀에게 느꼈던 따뜻한 모성은 곧 불안감과 애착, 책임감으로 바뀌어 갔다. 어린아이 같은 쟈크에게 아버지가 되길 요구하는 조안나. 쟈크에게 그 모든 것은 버거웠으리라. 이데아를 향해 떠나려는 쟈크에게 그녀는 애원한다. “그 곳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밑은 어둡고 차가울 뿐이고, 당신은 홀로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전 여기 있어요. 전 현실 속에 이렇게 있잖아요.” 하지만 그녀는 쟈크를 지상에 붙들어 두지 못했다.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뒤늦게 이데아를 발견한 엔조는 쟈크에게 말한다. “네 말이 맞았어, 아래가 훨씬 좋더군. 물속 말이야. 날 보내줘.” 그렇게 엔조는 쟈크보다 먼저 이데아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마치 유년시절, 뒤 늦게 나타나 빛나던 동전을 먼저 낼름 차지해 버렸듯이. 그들은 몰랐겠지만 그 동전은 불행한 사람들의 몫이었다.3) 정신을 놓은 채 엔조의 뒤를 따르려는 쟈크를 사람들은 불러 세운다. “돌아와 쟈크, 우리와 같이 있어야 돼!”
누가 청춘을 아름답다 했는가.그런 날이 있었다. 우두커니 앉아 나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날.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밥을 먹고, 낮잠을 자고, 화들짝 깨고, 티비를 보고, 또 밥을 먹고, 다시 존재의 위기를 느끼고는 서둘러 선잠을 청하던 날. 해야 할 일은 머릿속을 떠도는데 무기력함에 발목 잡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날. 그런 날이면 몸은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는데, 마음은 갈피를 잃고 온 세상천지를 혼자 방황하고 있었다.몽롱한 정신 속에서 시간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창밖의 해를 봐도 저것이 지는 해인지, 뜨는 해인지 구분 할 수 없었다. 시계를 봐도 그것은 물리적인 시간일 뿐 나의 시간은 과거, 혹은 미래의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얼른 밤이 찾아왔으면, 잠들어 버렸으면. 하고 바랬다. 절정으로 치닫지 못한 채 사그라지는 하루를 보며 위기감을 느꼈다. 난 뭐하는 인간인가....... 꿈속에서도 질문에 시달렸다. 미성숙한 나에게 외로움과 무기력함과 무한한 자유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이십대가 생각만큼 즐겁지 않다는 걸 이십대가 되고서야 알았다.불안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내가 인생에 조금만 소홀 할라치면 "어쭈? 요것봐라?" 하면서 불쑥 날 찾아와 괴롭혔다. 나를 잠식한 불안은 정체성 저변에 가라앉아 있던 실패, 고독, 게으름 같은 것들을 휘휘 저었다. 실패는 상실로, 고독은 외로움으로, 게으름은 무기력함으로 쉽사리 진화했다. 녀석들이 일상을 위협하기 시작하면 그 하루를 내다 버렸다. 그렇게 버려진 하루의 끝에는 실날같은 자존감만이 남아 있었다. "니가 뭔데?" 라는 질문에 "내가 나다." 라는 당당함으로 응수 할 수 없는 낮은 자존감. 더불어 팽팽이 당겨진 예민한 신경은 누군가가 살짝만 건드려도 투두둑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런 날, 그런 나를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나 아닌 누구에게라도 그런 순간은 있었겠지만.금성무는 방황했다. 그 방황의 흔적은 파인애플 통조림으로 남았다. 통조림은 사랑과 이별의 흔적이며, 무기력한 시간의 표상 이었다. 서른 개의 통조림을 꾸역꾸역 먹으며, 그는 빛바랜 날들이 지나 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클라이막스를 잃은 사랑과 그로 인해 지리멸렬해진 하루가, 한 달이, 청춘이, 등 뒤에서 사그라지기를.5월은 인생으로 치면 이십대에 해당한다. 이십대는 성숙의 시기이다. 금성무가 정말로 기다린 건 떠나간 메이가 아니라, 새로운 메이 였는지도 모른다. 임청하가 남긴 "생일 축하해" 라는 메시지는 무사히 이십대의 방황을 마치고 성숙한 걸 축하한 셈이다. 단단한 껍질을 뚫고, 무사히 거듭난 것에 대한 축하, 혹은 임청하 자신을 향한 자축.
아이들은 가난해요.꾀죄죄한 여자 아이가 보퉁이를 메고, 중국 벽촌의 한 초등학교에 들어선다. 가오 선생 대신 한 달간 임시교사로 일 할 13살의 웨이이다. 전교생은 고작 28명. 떠나는 가오 선생은 웨이에게 “한 사람도 없어져선 안된다”고 당부한다. 또 돌아 왔을 때 학생이 줄지 않았으면 성과급을 얹어 주기로 약속 한다. 하지만 ‘밍신홍’이 체육특기생으로 학교를 떠나고, ‘장휘거’마저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떠나버린다. 웨이는 도시로 간 장휘거를 데려오기 위해 길을 나서고, 결국 방송을 통해 장휘거를 찾게 된다.“아이들은 가난해요.” 주인공이 카메라를 향해 내 뱉은 첫 마디이다. 웨이의 말처럼 영화 속 아이들은 모두 가난하다. 덕분에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아이들의 가난은 곧 중국 민중의 가난을 의미했다.영화에는 '노동'하는 아이들이 등장한다. 순수하지만 결국 돈에 연연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씁쓸한 기분에 젖게 만든다. 급료를 못 받을까봐 불안해하는 웨이, 밍신홍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대가로 촌장에게 금품을 요구하는 장휘거, 벽돌을 옮기는 어린 학생들, 장휘거 찾는 것을 돕는 대가로 일당 2원을 요구하는 어린 노동자. 이들은 자본주의에 희생당하는 인민들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다. 그들은 먹이 피라미드의 맨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그렇다면 영화 속 어른들은 어떨까? 그들은 시종일관 무표정하며, 건조하고, 불친절하며, 무뚝뚝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웨이에게 좀 더 상냥하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관객의 머릿속을 맴돈다. 관객들의 바람과 달리 어른들의 행동은 철저히 개인주의적 이다. 그들의 모습은 꺄르르 웃는 어린 학생의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감독은 이들을 통해 중국 사회에 뿌리내린 자본주의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준다.하지만 장예모 감독이 초점이 비단 자본주의만은 아닌 것 같다. 장휘거를 혼내달라는 반장의 말을 무시하고, 공개적으로 반장의 일기를 읽게 하는 웨이의 모습은 무능력한 독재정권을 연상시킨다. 또 버스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난한 아이들에게 돈을 요구하고, 학생들을 벽돌공장으로 데려가는 장면은 공유재산제를 떠오르게 한다.하지만 도시로 가기 위해 흙길을 걷는 순간부터 웨이는 민중을 대표한다. 도시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가난한 인민이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광야 길을 지나 도시에 온 웨이민쯔는 장휘거와 마찬가지로 먹을 것을 구걸하는 신세가 된다. 이처럼 웨이는 중국의 아둔한 지도부인 동시에, 자본주의에 희생당하는 민중의 모습으로, 이중적인 캐릭터를 가진다.오성홍기를 앞에 두고 작은 입을 쫑쫑거리며 국가를 열창한 아이들이, 버스비를 가져오라는 웨이에게 “돈 없어요.” “돈이 없어요.” “돈 없는데......” 라고 가난을 얘기하는 현실. 멋지고 화려한 도시에서 아이들이 먹을 것을 구걸해야 하는 현실. 그것이 밀려드는 자본주의의 악영향인지, 기존 공산주의의 잘못인지는 누구도 판단하기 어렵다. 장예모 감독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