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산업적 측면우리나라에서는 별5개에서 총4개를 차지하였으며 20대가 약 50~60%의 비율로 예매한것으로 보아 젊은층이 가장많이 보았다. 여성, 남성비율은 약 40대60으로 남성이 많이 보았으며 CGV의 경우 점유율 2%로 동시에 개봉된 영화들이 여가생활로 즐기기에 어울리는것이 많아서 작품성에비해 호응이 낮았다고 본다. 하지만 보고난 사람들은 감동을 느끼고 높은 점수를 줬다.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평점을 매긴 관람가들은 영화는 좋은것 같지만 한국인으로써 좋은 점수를 주기가 꺼려지는 작품이라고 했다. 따라서 채워지지않은 별하나는 꺼려지고 가리고 싶은 것을 외국인이 알고있기 때문에 비운 자리라고 생각했다.참고 (CGV평점그림)반면 해외에서는 호평을 받았다고 알고있다. 2005년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경력을 보인 란 영화를 배경으로 각본에 연출, 시나리오와 감독, 음악까지 맡아 철저히 '폴 해기스'라는 프리미엄을 붙인 제작 예보를 하였다. 또한 2006년 아카데미에서 작품, 각본, 편집상을 수상하여 예상수익원인 모든 15세이상의 관람층에게 아카데미와 폴 해기스라는 보증표시와 프리미엄으로 에대한 기대효과를 높였다.결과적으로 650만불을 투자하고 미국에서만 5,500만불의 수익을 올림으로써 세계적으로 적어도 약9배가 넘는 이른바 "대박"을 터트려 우리나라에서는 반영할 수 없지만 수익성측면에서 아주 우수했다고 본다.2. 예술미학적측면대본을 읽고 '온 몸이 짜릿했다'는 골든 글로브 수상자 '돈 치들'은 "어떤 역이든 배역만 달라“는 주문을 했다고 한다. '산드라 블록' 역시 "어떤 역이든 상관없으니, 출연만 했으면 좋겠다." 는 고백을 한다. 그들이 원한 대가는 자신이 에 출연한다는 자부심이었던 것이다. 감독 폴 해기스는 배우들 모두가 극에 완전히 몰입했고, 단 한순간도 스타의식을 가지지 않았다고 말한다.즉, 배우들이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면서 각자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고 군더더기 없는 연기를 펼칠 수 있었던 건 모두가 진정으로 협력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헐리웃 최고의 느낌을 주었다. 특히 Crash는 편집에서 뛰어난 작품성을 보인다고 홍보했었다. 영화를 편집한 휴즈 윈본(Hughes Winborne)에 대해 자세한 정보가 없어서 알수는 없었다. 조원들 모두 Crash를 보면서 캐릭터의 성격을 알기도 전에 이름도 못외워서 빠른 전개에 휩쓸려 가는 상황이었지만 상당히 복잡한 36시간을 나름대로 차근차근 전개했고 결과적으로 모두가 돌고도는 세상이라는 메세지를 보았다.또한 Crash는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살벌한 세상이기에 암울하다고 느낄수 있는 영화이기도 했고, 서로에게 마이너스적 영향을 주다가 플러스적인 계기를 갖게 되면서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한 중간 단계에서 앞으로 희망찬 밝은 내일이라는 캠페인같은 영화가 될수도 있었던 영화였다. 하지만 어두운 조명과 함께 시사점과 우리에게 문제를 안겨주고 끝나는 영화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음악도 큰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의 음악담당인 마크 아이샴(Mark Isham)은 그래미, 에미, 클리오 상을 비롯한 다수의 상을 받았다. 그래미, 아카데미, 골든 글로브 음악 부문에 작곡가와 레코드 아티스트로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아이샴의 음악적 재능은 잘 알려진 영화 (Cinescape.com에서 뽑은 2005년 최고의 영화 음악), , , , , , , , 에서 엿볼 수 있다. 아이샴은 70편이 넘는 영화 음악을 만들었는데 스타일의 범주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전통적인 음악에서부터 현대의 단순한 음악, 스윙, 아방가르드 재즈, 아메리카나, 월드 뮤직 등으로 무척 넓다. 트럼펫 연주자인 아이샴은 다양한 장르에 독특한 음색과 분위기를 담아낸다. 그가 솔로로 녹음한 음악 장르는 일렉트릭 재즈, 클래식 재즈에서 뉴에이지, 월드 뮤직에 이른다. 업계 최고의 아티스트들과 작업도 활발히 하고 있다. 마크 아이샴은 Crash에서 여성의 부드러운 음성과 클래식한 연주로 살벌하고 차가운 도시에서의 상황을 따듯하게 감싼다.“정이 그리워 이러는 거야. 다른 도시에선 길을 걸어도 사람들과 부보기만 한다. 아마 부딪히고 서로를 겪지 않았다면 사랑과 감동이라는 보편적 정서에 다다를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속, 그들이 찾고 싶어 하는 희망에 그처럼 함께 목말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충돌(Crash)이란 접촉(Touch)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며,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었다는 것을 말이다.그리고 이렇게 눈덩이처럼 불어난 상처 한가운데에서 그들은 스스로 묻게 된다."어떻게 하면 당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까?..."3. 기계적 측면처음 영화가 시작될 무렵의 희미한 불빛들을 멀리 있는 크리스마스의 꼬마 전구처럼 따듯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표현하려고 보았다고 한다. 어두운밤 눈내리는 모습을 클로즈업하여 천천히 보는듯하였다고 했다. 조원들의 끊임없는 추론을 만든 무수히 많은 점들은 빌딩으로 바뀌어 익스트림 롱 쇼트로 LA시내를 비춘다. 이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 미리 암시해 주는듯하다. 카메라의 위치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내려오며 그레이엄을 비춘다. 우리들의 일반 시선인 아래에서 위로가 아닌 반대로 시선을 보여준 것은 그만큼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36시간동안 있었던 일을 비추는 동안 대체로 조명은 어두웠다. 차를 강탈당했을때도 밤이었고, 방송국 감독의 아내인 크리스틴 테이어(탠디 뉴튼)이 라이언경찰에게 성취행당할때도, 결정적으로 피터가 살해된것도 밤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두운 사건인 만큼 상황과 조명이 어둡게 처리된 것 같다. 또한 피터의 운동화를 클로즈업함으로써 그가 살해되었음을 암시했다고 본다. 동생의 시체를 목격하게 된 그레이엄은 자신의 책임인것 마냥 죄책감을 떨칠수가 없다. 어머니의 말을 되내이는 과정에서 클로즈업을 사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더 집중할수 있도록 하였다.영화는 서로가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들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해결되고, 화해하고 이해하기 시작한다는것을 보여주기 위해 하늘에서 눈이 오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눈이 내리자 지역방송PD인 카메론 테이어(테렌스 하워드)는 아내부분에 자동차 사고가 나고 앞뒤로 내린 피부색이 옅고 짙은 사람들이 내려서 화를 내고 싸우는 부분에서 LA는 이런일이 일상이고 또한 모든 사람 사는 세상이 서로가 부딪히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때문에 나중에 모두가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포근해보이는 눈송이로 마무리하는것은 헐리우드영화 특성을 살렸다고 본다. 하지만 겨울 평균 최저 12도를 넘지않는 LA에서 눈이 내린다는 설정은 부직이수로 일어나는 범죄 속에서 모든 연관된 사람이 서로를 용서하고 감화할 일은 있을 수 없으며 그일이 불가능함을 증명한다고 나타내기 위해 내릴수 없는 눈을 내림으로써 상황을 아이러닉하게 표현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자신이 백인이고 경찰이라는 점에서 용의자가능성이 없고 아버지로 인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있던 라이언 경찰이 성추행한 여성을 폭발직전의 사고안에서 구출함으로써 스스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깨닫고 크리스틴 부인이 용서했다고 관람한 우리 스스로가 느끼고 있기때문에 화해 구도의 결과를 도출할수 있었다고 보았다.4. 감상영화를 보러 들어가기 직전까지 매표 상황을 체크했다고 한다. 예상한것 의외로 6석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토요일 오후의 강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영 일정이 많지않은 경우인데도 자리가 남은것을 보면 확실히 사람들이 꺼리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일찍 들어가서 들어오는 관객들의 유형을 살펴보았다. 대부분이 커플인것은 당연하겠지만, 주로 영화 팜플렛을 들고 읽고 있거나, 점잖은 데이트를 위해 점잖은 영화를 본다라는 느낌이었다. 15세 이상 관람임에도 불구하고 유심히 관찰한 관객의 연령층이 그 두배로 보이는것과 마찬가지로 보는와중의 사람들의 매너도 좋았다. 통화때문에 상영시간에 살금살금나간 사람은 한명뿐이었다.또한 상을 많이탔다는 말에 왜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는지, 장르 또한 범죄, 미스터리라기에 [본 콜렉터]처럼 잔인하고 화가 나는 영화는 아닐지 보아야하나 말아야 하나 표를 끊고나서도 마음을 다잡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솔직히 crash는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전개 때문에 오히려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다들 즐기기위한 여가활동인 영화관람을 과제를 위한 수단으로써 경험하자니 거부감이 들었던것이 공통점이었던것 같다.영화 전체적으로 완성도 높고 관객과 영화속 사람들의 편견을 말끔히 해소하기 충분했던 화해와 화합을 앞두고 오직 한국인에게 만큼은 편견의 고리를 떨치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생명보다 돈밖에 모르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파렴치한 인신매매범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편견으로 폴해기스 또한 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며 좋은 영화였지만 서운하고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한다.이점에서 다들 동의했다. 폴 해기스 감독이 흑인 청년들에게 차를 강탈 당했던 실제의 경험을 토대로한 영화라지만 실지로 있을수 있는 일인지 상상이 안되는 부분이 많다. 변역이 미화되기도 했지만 배우들이 영화 속에서 화를 낼때나 짜증을 낼때는 정말 리얼한 욕설과 상스런 말투가 나와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게다가 한국인을 계속 중국인이라며 욕하다가 나중에 일어나 앉지도 못하는 몸으로 재빠르게 "빨리 은행가서 캐쉬해와."라고 하자 맨처음 그레이엄과 라틴계 연인인 여형사와 교통사고로 화를 내는 여성이 흥분해서 들어오다 그말을 듣자마자 얍삽하게 변하는 눈빛을 보면서 왠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또한 그렇게 느끼는 우리가 싫었다. 그리고 그런 범죄를 벌이고 있을 우리 동포의 어두운 면을 못본 척하고 플러스요인을 줄수없는 백제인 교포나 고려인 교포들의 문제를 무시하면서 그랑프리나 백인들이 타던 상을 타거나 유명한 스타의 마누라가된 한국 여성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니면서 잘난 척했다고 느꼈다.상대방에 대해서 잘알지 못하지만, 내스스로 그사람들을 어떤 분류의 사람으로 단정질때가 많다고 한다. Crash를 보면서 사람은 그사람 자체로만으로 봐야한다는것을 다시한번 느꼈다. 자신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는 백인경찰이 피터를 쏘는 장면을 보고 사람들의 편견에 대해 일깨워주는 부분이기도 한 것 같다. 사람들의 시선은 '너'가 아닌 '나'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저마
프롤로그이병철 회장의 집안은 중교리 지역에서 대대로 대지주였다. 원래부터 천석꾼은 아니였고 할머니가 근검절약을 하여 천석지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병철의 집안은 대대로 유학집안이었고 자연스럽게 이병철은 천자문, 사서삼경, 통감, 논어 등을 배웠다. 그로인해 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대한민국에서 유교를 가르치는 유일한 대학인 성균관대를 인수하고 그 대학의 발전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 후 학내분규로 인해 학생이 교수를 때린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미련 없이 성균관대학을 한 때 국가에 헌납하기도 한다. 신용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부친이 가르침은 삼성의 중요한 경영철학 중 하나가 된다.이병철은 열 살까지 이 마을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진주시 지수면에 있는 당시 일본인들이 가르치던 근대적인 학교인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게 된다. 마침 이병철의 둘째 누님이 그곳에 시집가서 살고 있었다. 누님의 시댁은 허씨 집안이며, 그 집안은 지수면의 대지주 중 하나였고, 나중에 삼성 계열사를 창업할 때 허씨 집안 사람들과 함께 사업을 도모하기도 한다. 지수보통학교에서 1년을 다니다 서울 종로에 있는 수송보통학교로 전학을 간다. 그 자신이 좀더 큰 대처로 나가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수송보통학교에서 근대식 교육을 받게 되지만, 경상도 시골 출신이라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바람에 서울 학생들과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서, 상당한 애를 먹었다. 수송보통학교를 다니다 중동중학의 속성과로 옮긴다. 그러던 중, 1928년, 18살 때 결혼을 하게 된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 갈 것을 결심한다. 부모님의 반대가 있더라도 몰래 출국할 생각이었다. 문제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그의 수중에는 당장의 여비조차 없었다. 고향 중교리의 옆 동네에 살았던 조흥제를 찾아간다. 조흥제는 상당한 부자였고, 유학에 필요한 경비인 500원을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당시 500원은 상당한 거금이었다. 조흥제도 유학을 가고 싶어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거금 1000원을 준비하장 운영은 지배인인 이순근에게 맡기고, 1942년 봄에 그는 고향 중교리로 돌아온다. 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는 3년 동안 칩거했다. 이 칩거에 대해 이병철은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자고로 성공하는 세 가지 요체가 있다. 운(運), 둔(鈍), 근(根)이 그것이다. 사람은 능력 하나만으로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운을 잘 타야 하는 법이다. 때를 잘 만나야 하고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그러나 운을 잘 타고 나가려면 역시 운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둔한 맛이 있어야 한다. 운이 트일 때까지 버텨내는 끈기와 근성이 있어야 한다. 고 말이다.1944년 사이판이 함락되면서 승기를 잡은 미국은 일본의 전 국토에 폭탄을 쏟아 부었다. 이에 일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1945년 8월 14일 저녁, 중교리의 집으로 친구들이 찾아왔다. 일본 순사들이 주재소에서 일본 순사들이 비밀 문서를 태우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8월 15일 정오, 라디오에서 일본 천왕이 일본의 항복을 알렸다. 한국이 일제 36년의 기나긴 지배 하에서 독립하던 순간이었다.3장 장사에도 우선은 사람이다.36년 만에 조국을 찾았으나 경제상황은 극도의 빈사상태였다. 일제가 물러난 이후 그 폐해가 눈에 띄게 이곳저곳 발견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속속 한국의 기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이병철도 서울로 올라왔다. 이미 대구에서 삼성상회와 조선양조로 기반을 잡은 그는 서울에서 좀더 큰 사업을 벌여보고 싶었다. 모든 것이 어수선하던 때에도 이병철은 사업에 대한 구상에 몰두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무역업이었다. 1948년 11월. 종로2가 영보빌딩 2층에 삼성물산공사 라는 간판이 걸렸다. 공사라는 이름을 내건 것은 장차 주 거래선이 될 화교상인들에게 친숙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 삼성물산공사는 주식회사 체제로, 이병철과 함께 여러 명의 출자자들이 투자를 하였다. 또한 사원들에게 25퍼센트만큼의 출자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출자자들 중 한명이었던 조흥제는 이병철의 형인 이병각과 되어 사리사욕만을 채울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 설탕 값 올리자는 의견은 없었던 걸로 합시다. 라고 말한다. 이에 분위기는 숙연해진다. 또한 사업이란 단기간에 승부하는 것이 아니고 장기적인 것입니다. 제당과 같은 장기적인 사업에는 무엇보다 신용이 제일입니다. 신용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그것을 오래도록 지켜나가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신용이란 기업에 대한 국민의 신뢰입니다. 기업의 이익을 위하여 국민의 신뢰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병철은 사업초기에도 상도를 내세워 소비자의 신뢰를 얻는 데 주력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제일제당은 이미 초기에 국내 시장점유율 50퍼센트 이상을 달성하면서 입지를 굳혔고, 1960년에는 국내 설탕시장의 69퍼센트를 점유하는 설탕업계의 기린아가 되었다. 제당사업이 잘되자 국내에서는 여기저기서 제당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데, 제일제당은 이미 기반을 잡고 있었고 경영 합리화를 추진해나가면서 국내 설탕의 70퍼센트를 점유했다. 훗날 제일제당의 설탕 생산량은 세계1위가 된다.1957년 10월 이병철은 제일제당 공장 내에 제분공장을 또 세웠다. 제일제분은 공장 설비를 모두 국산으로 갖추었다. 제분공장 설립은 불과 6개월 만에 완공되어 1958년 5월에는 그 첫 제품이 시장에 출하된다. 이병철은 그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가장 근대적이고 제조업다운 제일제당의 설립과 판매에 성공함으로써 오늘날 삼성그룹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닦은 것이다. 제일제당은 유전공학 분야에도 진출하여 미생물 발효, 식품가공 등의 분야에서 항생, 항암제 등 기초 의약품 원료를 국산화하고 당뇨병 치료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인터페론을 생산해냄으로써 첨단기술 분야에까지 띄어든다.제당공장이 잘 돌아가자 이병철은 새 사업에 착수한다. 바로 모직 생산공장이다. 모직, 즉 양복지를 만드는 모방산업은 영국이 본류 이지만 미국에서도 성공한 사업이었고 일본에 건너와서도 성공적이었다. 당시에 마카오에서 밀수입된 영국산 모직으로 양복을 해 입고 다녔다. 이른바 마카오 신사획서, 수입지출 예상서, 은행의 지불보증서 등을 보내달라고 한다. 놀랍게도 이 회사도 한국과 인연이 깊었다. 일이 순조롭게 해결되자 이병철은 로마로 떠나 관광을 즐긴다. 하지만 한국에서 4.19혁명이 터졌다는 소리를 듣고 한국으로 귀국할까 하다가 미국과의 차관교섭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미국에서는 유럽에서와 달리 냉담한 반응이었다. 한국이 4.19 혁명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으며 상환능력이 의심스러워 차관교섭에 응할 수 없다고 한다. 이에 모든 것이 무산되고 만다. 미국에서 도쿄로 건너와 한국정세를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고 한국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상황을 더 지켜보도록 한다. 일본에서 특별히 할일이 없었다. 그가 들르던 곳은 골프장이었다. 이 와중에 골프를 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으나 마음이 울적해서 도무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골프 상대는 일본 재계의 거물들이었다.6장 도전의 나날들한국에서 터진 4.19 혁명으로 인해 이병철은 하루아침에 부정축자재로 몰리게 된다. 당시 일본에 있던 이병철은 귀국하기가 난감했으나 언제까지 일본에 머물 수는 없었기에 7월 26일 한국으로 돌아온다. 사회불안은 계속되고 가난은 더욱 깊어져 이병철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느 날 검찰에서 출두하라는 명령서가 떨어진다. 삼성의 계열사 열다섯 개가 모두 탈세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병철 뿐만 아니라 삼성의 간부들도 조사를 받게 되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자기 책임이라고 스스로 죄를 덮어쓰려 하고 있었다. 이병철은 그때 삼성의 사원들이 보여준 강항 애사심에 깊은 강명을 받았다고 한다. 조사는 그렇게 끝이 나고 9월에 들어서자 검찰에서는 50여 개 회사에 대하여 추징금 200억원을 통보했는데 삼성의 경우도 6개 계열사에 50여 억 원의 추징금이 과세되었다. 결국 이병철은 50여 억 원의 추징금을 내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어느 날 김영선 재무부장관이 임명장를 받자마자 이병철의 자택에 찾아왔다. 그는 사회의 혼란과 경제 침체를 일본, 서독에 견적서를 냈다. 기계설비비로 미국이 6,500달러, 서독이 6,000만 달러, 일본이 5,000만 달러의 견적서를 냈고, 가격과 기계의 성능에 있어 가장 이점이 많았던 것은 일본이었기 때문에 이병철은 당장 일본을 방문해, 비료건설 계획을 추진한다.일본의 비료업계에서는 한국의 비료공장 건설을 반대했다. 한국이 가장 큰 수출국이었기 때문이다. 비료업계와는 달리 일본의 재계 인사들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중에서도 야하타제철의 이나야마 사장이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이나야마 사장의 도움으로 비교공장 건설은 미쓰이물산을 단일창구로 추진하게 되었다. 담당은 미쓰이 물산의 해외담당 본부장인 나가 본부장이 맡았는데 그는 한국의 비료공장 건설이 불가능하다고 비웃는 말투로 이야기한다. 이에 이병철은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나가 본부장은 그 후 이병철을 여러 번 찾아와 사과를 한다. 그의 사과를 받아들인 이병철은 미쓰이측의 마진을 3퍼센트로 하고 계약을 하였다.차관이 4,190 달러로 결정되는데 이것이 외국에서 도입한 한국의 민간차관 제1호이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병철은 8월 27일 자본금 2억 원의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33만 톤 규모의 비료공장 건설에 필요한 기간은 평균 40개월 이었으나, 이병철은 18개월에 공장을 완성할 계획을 세웠다. 우리나라의 기술자와 노무자들의 근면성실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964년 한국정부와 일본정부는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교섭의 최종단계에 있었다. 이른바 한일협정으로 한국이 일본측으로부터 과거 36년간의 지배에 따른 보상을 받는 회의가 열렸다. 한일회담의 골자는 대일 청구권 문제 해결이었다. 이 대일 청구권 금액 속에는 한국비료에 제공될 차관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대일 청구권은 논의 끝에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1억 달러로 결정되었다.얼마 후 차관승인이 떨어졌다. 차관 액수는 비료부대공장과 실험실 등 설립에 따른 비용이 추가되어 4,390만 달러로 확정되었고 차관도입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