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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모와 아이들사이` 요약및 논평 ,독후감
    하임 기너트의 “부모와 아이들 사이” 요약 및 논평나는 부모교육서적으로 하임 기너트의 서적인 “부모와 아이들 사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직면할 수 있는 여러 상황속에서 부모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인지 상황에 맞게 여러 재미있는 사례들을 들면서 그 방법을 제시 하고 있었다.그 첫 번째로 “아이들과의 대화” 부분에서는 아이들이 질문을 하거나, 자신 또는 다른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 그 말을 곳이 곳대로 듣고 그 말에 대한 답변을 먼저 생각하거나 답하지 말고, 그 말의 숨은 뜻을 잘 새길 것을 당부하였다. 아이가 질문이나 이야기를 하면, 왜 그러한 말을 했는지, 왜 그것이 궁금했는지를 먼저 생각 하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무엇인가 해결책을 원하기 보다는 자기의 감정을 부모가 이해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에게 화를 내거나 충고를 해야 할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그 상황에 대해 꾸짖기 보다는 현재 아이의 감정을 먼저 헤아리고 그것을 알아주어야 한다고 한다. 그냥 꾸짖기만 해서는 아이가 그 상황을 반성하기보다는 꾸중을 듣고 있다는 상황만 불평을 하게 된다. 자기의 감정을 부모가 이해해 주고 있다고 느끼면, 아이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사라지고, 부모의 깊은 동정심은 마음을 달래 주는 정서적인 치료제의 구실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두 번째는 “칭찬과 비판의 새로운 방법”에 관한 내용이다. 먼저 칭찬에 관해서는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성취감과 만족감을 주기위해 칭찬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 아이에게 자신감과 안정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칭찬의 방법이 잘못되면 오히려 긴장과 나쁜 행실의 결과를 가져다주는 수 가있다. 칭찬은 아이의 노력과 일, 달성, 도움 등의 진가를 알고 있음을 명료하게 말해주어야지 그렇지 않고 훌륭하다, 강하다, 너그럽다 등의 인격과 성격에 관한 칭찬은 자기 스스로 그렇게 까지는 생각하고 있지 않은데 그런 칭찬을 받음으로써 부담스럽고 죄책감을 일게 하여 오히려 부정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판의 경우 아이가 사소한 잘못을 했을 때 그 잘못의 가치만큼만 나무라야지 그 이상이 되어버리면 아니 되며, 일어난 일 자체를 다루어야지 잘못을 저지른 자의 개성에 대하여 나무라는 것 또한 좋지 못하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에 의해 분노가 발생 하였을 때에는 그 분노를 그대로 다 표출해 버려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참아서도 안 된다. 그러면 아이는 부모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해 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세 번째로 “자신의 패배감을 모면하려는 방법들” 에서는 부모들이 자녀를 기를 때 자신의 패배감을 모면하려고 여려 가지의 방법을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그중에 하나가 위협인데, 그런 위협을 받은 아이는 오히려 위협에 대한 도전 정신에 의해 나쁜 행실을 반복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한다. “~하면 ~한다”라는 설득은 때때로 눈앞에 나타나는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아이에게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조건을 붙인 말은, 그 이면에는 아이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다는 뜻을 내포하여 계속적인 효과는 볼 수가 없다는 것 이다. 그리고 아이에게의 빈정대는 말은 아이들과 의사를 소통하는 데에 장해가 되기 때문에 절 때로 해서는 안 된다.네 번째는 “책임감과 독립성”으로써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책임감을 가르칠 기회를 찾고 있는데 그래서 많은 가정에서는 아이들에게 집안일을 돕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결코 강제로 책임감을 갖게 해서는 안 된고 아주 구체적인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책임감을 느끼게 해야 한다고 한다. 아이들이 자기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 있는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게 말이다. 그리고 부모의 태도와 행동이 아이들에게 책임감을 갖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므로 부모들은 아이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감정의 발로를 인정해 주어야한다고 한다.다섯 번째, “훈계 : 관용과 제한”에서는 관용은 아이들의 아이다움을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이 말은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상징적인 행동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령, “나무는 기어오르는 것이다”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관용은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데 확신을 주고 재능을 풍부하게 하지만, 지나친 관용은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허용하게 하고, 불안을 갖게 하며, 허락할 수 없는 특권을 요구하게 할 뿐이기 때문에 적절한 조절은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훈계는 아이의 달갑지 않은 행동에 교육적이고 인격의 성장을 위해 분명한 제지를 가하여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훈계는 아이가 적어도 알아들을 수 있을 때 한 번에 해야 한다. 여러 번 훈계를 하면 잔소리로만 듣게 되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반항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여섯 번째 “아이들의 하루생활” 에서는 아이의 하루생활 중에 여러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설명해놓았는데 먼저 아이의 아침기상에 대해서는 아이를 윽박질러서 깨우려고 하기보다는 괘종시계를 선물하여 스스로 마음에 내켜서 일어나게 해야 한다고 한다. 아침식사 때에는 아이들에게 학습등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맛있는 음식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의 옷차림은 아이들이 언제나 옷을 깨끗하게 입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말아야하며 그에 준하여 옷을 선택하여야한다. 취침시간에는 부모와 아이가 서로 욕구 불만을 가지고 마찰이 가장 많을 수 있는 때이다. 하지만 마찰을 최소로 줄이기 위해, 아이를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하는지 최대한 이해시키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일곱 번째 “아이들의 질투심” 에서는 아이들의 질투심의 대표적인 예는 바로 아이의 동생에 대한 질투심이다. 아이의 질투심은 억제하려고 할 때는 여러 가지로 자기의 감정을 꾸미거나 나쁜 행동으로 나타내거나 징조로 나타내기 때문에 이런 것 보다는 말로 나타내게 할 필요가 있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감정을 터놓게 하기 위해 도와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녀들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자기만은 특수한 사랑을 받기 원하기 때문에 누구나 다 사랑한다는 인상보다 자녀 하나 하나에게 자기만 유독히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한다고 한다.여덟 번째 “아이들이 걱정하는 원인들” 에서는 부모들은, 아이면 누구나 공포와 걱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지만 그러한 걱정의 원인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부모는 거의 없다고 한다. 아이들이 걱정을 하는 원인은 몇 가지가 있는데,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못 받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할 때, 가장 크게 걱정하기 때문에 아이를 무관심 하게 버려둬서는 결코 안 된다. 그리고 잘못을 저질렀을 때 오는 감정이 있는데, 아이는 사회적으로 도덕적인 행동의 규제를 어겼다고 하면, 죄책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에게 잘못에 대해 알려주면서 그 잘못으로 인한 너무 많은 책임을 한 번에 다 지게 해서는 안 된다. 또 가정불화로 인하여 오는 걱정이 있는데, 부모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면, 아이들은 걱정을 하고, 죄책감마저 느낀다고 한다. 아이들은 부모들의 싸움에 중립을 지킬 수 없어 아버지나 어머니 편의 어느 쪽이 되기 마련인데 그 결과로 아이들의 성격과 남녀의 특징을 형성하는데 손해가 되며, 부모들이 자녀의 애정을 독차지하려 경쟁을 하게 되면 그 자녀는 일관성이 없는 성격이 될 수 있고, 자녀는 자기 보호를 위해 부모들 사이에서 적당히 공평한 행동을 취하게 되며, 정직한 것은 오히려 손해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경함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아이들은 정신 분열증에 걸린 사람과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고 한다.아홉 번째 “성교육 어떻게 할까?” 에서는 아이는 될 수 있는 데로 자기의 육체에 관해 알아보려 자기의 팔과 다리를 흔들어 보고, 만지고 때려서 촉감을 느끼며 즐거워하는데, 이런 아이의 몸을 만져 주고 쓰다듬는 것도 성교육의 일부라고 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성기와 용변을 보는 기관과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용변 훈련을 위한 행동은 성적인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 처음에 용변에 대한 훈련을 시킬 때는, 아이들이 제 용변을 갖고 놀지 못하게 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그 욕망을 지나치게 금지할 필요는 없으며, 모래, 진흙, 페인트, 물 따위를 마음대로 갖고 놀게 함으로써, 금지된 행동을 대신하여, 아이들의 욕망을 채워 주는 것이 매우 좋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렇게 육체와 감정이 발달함에 따라 아이들은 성기에서 쾌감을 느끼게 된다. 부모는 아이들이 죄책감을 갖지 않고, 육체에 대한 쾌감을 느끼게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성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으로 한꺼번에 지나친 말을 너무 많이 하여 아이들에게 부담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되며 아이가 성에 관하여 질문을 할 때가 그에게 성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가르쳐 주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이다. 이때 다른 동물이나 사물에 빗대어 설명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를 설명해주는 것이 좋은데, 그렇다고 아이의 질문 내에서 꼭 설명하지 않아도 될 답변은 구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독후감/창작| 2010.12.26| 3페이지| 1,500원| 조회(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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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축법 관련기사에대한 발표자료
    발행처 : 연합뉴스 발행일자 : 2008-9-25발행처 : 매일경제 뉴스센터 발행일자 : 2009-2-19위의 두 기사는 건축물에 주차장법에 관련된 기사이다. 먼저 첫 번째 기사는 제주시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차고지 증명제를 실시하고 있는 가운데 건축물 부설 주차장을 제대로 운영하지 않아 주차장법을 위반하는 사례가 많아 지도 점검을 실시하여 적발된 일부는 원상회복 시켰으며, 나머지 일부는 원상회복을 명령했다는 기사이다.2천770개의 건축물의 부설주차장중 20%인 565개의 건축물이 주차장법을 위반한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상당히 많은 주차장이 주차장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우리나라는 주차문제에 많은 곤욕을 치르는 나라중의 한나라로써 주차장법의 위반단속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같다.“건축법 제1조. 이법은 주차장의 설치, 정비 및 관리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정함으로써 자동차 교통을 원할하게 하여 공중의 편의를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이처럼 주차장법은 건축물에 적용되는 법 중 주차장법은 특히나 공중의 편의를 도모하기위하여 중요한 법이다.하지만 두 번째 기사를 보면 알수 있듯이 요즘 정부에선 현재 주차장법 개정을 준비 하고있다. 주차장법 개정의 요지는 일정 면적이하의 건축물에 대해서는 주차장 의무 규정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1만5000㎡(약 4530평)의 면적에 건물을 지을 경우 자동차 50대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의무적으로 만들어야 했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주차장법 2009.1.9자) 정부에서 이번에 주치장법을 개정하는 이유로는 건물주의 주차장 설치 부담을 덜어주고 자가용의 도심 진입을 억제해 교통 혼잡이 완화될 것이라는 것이다.이 법안 개정은 이번 달에 입법예고를 하고 4월에 본격적으로 시행을 한다고 하는데 이 법이 개정이 되면 정말 정부가 뜻하는 데로 이루어질까?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해결은커녕 더 엉망이 되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왜냐하면 현재 오래전 건물을 건축해 주차장이 없는 건물들을 살펴보면 건물의 앞 도로나 인도에 늘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도로에 자동차들이 주차되어 있는 경우는 도로에 혼잡을 줄뿐만 아니라 여러 사고의 원인이 되고, 그리고 인도에 주차가 되어 있을 경우는 인도를 다니는 시민들에게 인도가 차도 이상으로 위험한 곳이 되어버린다는 점이다.그렇다면 이러한 법안은 과연 누구에게 이익이 가는 법안일까? 그것은 바로 지금의 정부를 지지하고 있는 소위 있는 사람들 일 것이다. 보통 약 4500평 이라고 하면 한 층에 200평 정도만 잡아도 무려 지하포함 22층 이상이 되는 건물로 상당히 큰 건물인데, 이 정도의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의 건물주에게 경우 50대 정도의 주차공간을 만드는 것이 과연 얼마나 부담이 된다고 이 법안을 없앤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정도의 규모의 건물이라고 하면 보통 지하에 1개층 크게는 3개층 정도를 주차장으로 만드는 경우가 보통인데, 앞으로는 건물주가 이 공간을 임대시설로 만들어 임대를 해 줄 수 있으므로 건물주에게는 상당한 이득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임대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나 그 건물에 입주를 해서 일 또는 영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공학/기술| 2010.12.17| 4페이지| 1,000원| 조회(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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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대왕의 리더십
    1.세종대왕의 업적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종의 왕위를 받아 즉위한 조선 제4대 왕(재위 1418~1450)이다. 즉위 후 젊은 학자들을 등용하여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으며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등의 과학 기구를 제작하게 했다.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고 쓰시마섬을 정벌하는 등 정치·경제·문화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그는 정치적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1420년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황희·맹사성·허조 등의 청백리를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위하여 노력하면서 의정부를 견제했다. 또한 이를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변계량·신숙주·정인지·성삼문·최항 등의 젊은 학자를 등용하여 정치 자문·왕실 교육·서적 편찬 등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1443년(세종 25) 한글을 창제하고, 1446년 이를 반포하였다. 또한 이천에게 명하여 경인자·갑인자·병진자 등을 제작하게 하였는데, 이 가운데 갑인자는 정교하기로 이름난 활자이다.초기에는 억불책을 써서 5교 양종(兩宗:천태종·조계종)을 선종과 교종의 2종으로 통합하여 각 18개 사찰만 인정하고 경행을 금지했다. 하지만 말년에는 궁중에 내불당을 짓고 승과제도, 경행을 인정하는 등 왕실 불교로 장려하여 불교 발달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음악에도 관심을 기울여 1425년 관습도감을 설치하고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하게 하여 음악을 장려하였다. 악기도감을 설치하여 많은 아악기들이 제조되었으며, 편경과 편종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실록 보관을 위하여 춘추관·충주·전주·성주에 4대 사고를 설치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다.과학기술 업적은 1442년 이천·장영실로 하여금 우량 분포 측정기인 측우기를 제작하게 했는데, 이는 1639년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발명한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리고 궁중에 과학관인 흠경각을 설치하고 과학기구를 비치하게 했고, 혼천의·해시계·물시계 등의 과민정책을 실시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노력하였다.그리고 일본과는 1419년(세종 1)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을 정벌하게 했으며, 이후 쓰시마 도주 소 사다모리가 사죄하고 통상을 간청해오자, 1426년 삼포를 개항하였다. 이후 왜인의 출입이 증가하자 1443년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하여 신숙주의 교섭으로 변효문과 소 사다모리 사이에 계해조약을 체결하게 하여 1년 동안에 입항할 수 있는 세견선을 50척으로 제한했고, 세사미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한편, 반드시 수도서인에 한하여 왕래하도록 무역과 출입을 통제하였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왕대리에 있는 영릉인데 처음에는 광주에 있었으나, 1469년(예종 1)에 이곳으로 옮겼다.2.선정한 ,이유오랜 역사에 비추어 보면 수많은 리더가 있고, 그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의 전형이 있지만, 우리 역사로부터 배우는 리더와 리더십은 지금 시대에 와서도 결코 많이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시대를 불문하고 리더와 리더십이 연구되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대를 뛰어넘어 끊임없이 진화, 발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리더와 리더십의 주제이기 때문이다.맥스 드프리는 '리더십은 예술이다'라는 책에서 리더를 가리켜 "팀원들이 조직 내 필요한 존재가 되는 권리를 부여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조직의 부속물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온전하게 평가 받고, 인정받는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이다.그런 까닭에 리더는 자기에게 지도의 권한을 부여하는 사람들의 삶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 다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삶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통해, 남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고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리더에게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리더십이라고 하면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지금의 우리나라는 새 정부가 들어선지 오래 되지 않아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가 아주 큰 시기이며, 요 근래에 있었던 새 정부의 조금은 밀어붙이기식 정치에 국민들의 원기간 동안 어떻게 그토록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 그의 리더십은 어떤 측면에서 남다르며,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까? 오늘날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라고 생각한다.세종이 왕위에 오른 15세기 초는 신생 조선으로서는 창업에서 수성으로 넘어가는 시기였고, 세종은 이 시기에 꼭 필요한 리더였다. 그는 리더십 발휘에서 매우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경영을 창조의 과정으로 한층 격상시켰다. 다시 말해, 국가 경영이란 개념조차 없던 암흑기에 지배와 통제를 '국가 경영'으로 승화시켰다.그의 리더십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직접적인 참여와 권한 위임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많은 그의 업적들이 세종의 참여적 리더십을 기초로 이루어졌다.?세종의 위임정치세종의 재위5년(1423년) 즉, 재위 초기의 일이다. 세종에게 세자자리를 빼앗긴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은 나라에서 금지한 사냥을 하거나 술판을 벌이는 정도는 예사고, 남의 첩을 훔치거나 사람을 함부로 죽이기까지 하는 끊임없는 말썽 때문에 모든 대소신료들은 양녕대군을 중벌에 처해야 한다는 고했다. 그러나 세종은 형을 벌할수 없다고 생각하여 적당히 얼버무렸고, 양녕의 꾐에 빠져 함께 소란을 벌인 사람들만 애꿎게 처벌하고는 했다.이렇게 되니 사사로운 것을 버리고 공의를 우선해야 할 임금다운 처사가 아니라는 말이 나올 만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양녕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까지 끊임없이 나돌고 있었다. 당연히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상소가 나오더니 급기야 온 조정의 대소신료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동맹파업 시위’를 벌인 것이다.하지만 이건 눈에 보이는 현상일 뿐이었다. 태종이라는 냉혹하고 노회한 군주 밑에서 숨도 못 쉬고 지내온 신하들은 이제 막 홀로서기에 나선 젊은 군주를 “잘 길들여서 기 좀 펴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하고 있었다. 이것이 법 질서 수호라는 명분과 합쳐져 대대적인 항명 사태를 불러온 것이다. 젊은 군주와 기 싸움이라는 일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세을 운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세종이 목숨을 걸고 쓰러뜨려야 할 상대는 딱히 없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절로 신하들의 신뢰와 충성을 얻고 성군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종을 위해서였다고 했지만 태종이 외척과 공신들을 쓰러뜨릴 때마다 높아지는 것은 세종이 아니라 태종의 권위였다. 그 권위가 없어지자 세종은 스스로의 힘으로 리더가 되어야만 했다.세종이 신하들의 마음을 얻고 있었던 것은 늘 공부하는 자세였다. 성군이라면 모름지기 호학(好學)해야 한다는 상식이 통하던 시대에, 어릴 때부터 책에 묻혀 살았던 세종은 신하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집현전을 확충하고 날마다 학문을 토론하는 경연에 임함으로써 무인 기질이 넘쳤던 태조나 태종과는 전혀 다른 신선함을 보여주었다.하지만 그것으로는 불충분했다. 말만 잘한다고 기업의 CEO가 될 수 없듯 책 좋아하는 왕이라는 호의적 평가만으로는 신하들을 마음으로부터 복종시킬 수 없었다.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하고 신하들의 마음을 얻을 것인가?세종은 먼저 신하들의 태도를 세심히 관찰했다. 그 결과 ‘일치단결’해 자신을 압박하는 것 같아도 사실 그들 사이에 미묘한 입장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일단 신하들의 뜻에 굴복하는 듯 양녕을 처벌했으나, “전답을 몰수하고, 청주로 보내 살도록 한다”는 미온적인 조치에 그쳤을 때 나온 반응에서도 뚜렷했다.젊은 신하들은 이게 무슨 처벌이냐, 이럴 바에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핏대를 올렸지만 나이 지긋한 대신들은 이제 이만하면 되지 않았느냐며 한발 물러서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젊은 신하들은 기존 체제에 연연할 것도 없고, 어떻게든 자신의 이름을 날리기 위해 이상주의적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나이가 든 축은 이제껏 쌓아 놓은 것도 있고 해서 과격함에는 한계가 있다.세종은 이 차이를 이용했다. 대신들에게 업무를 대폭 위임한 것이다. 위임을 해 놓으니 국정에 대한 불만은 1차적으로 대신들 선에서 처리됐다. 욕을 먹어도 대신들이 먼저 먹었고, 싸움이 나도 대신과 프로젝트에 우선순위가 밀려 힘을 쓰지 못했다. 세종은 이런 상황을 유도했다.“아직도 그런 자잘한 문제에 연연하고 있느냐? 봐라, 위대한 시대가 보이지 않느냐? 나와 손잡고 그 시대로 달려가지 않겠느냐?”?세종의 조직혁신 (세종. 조선이라는 오페라를 지휘하다.)세종 16년(1434년)에 장영실을 비롯한 기술관료들은 앙부일구·자격루·혼천의를 잇달아 완성했고, 바로 전해에는 고유의 전래 의학과 중국 의학을 집대성한 ‘향약집성방’을 완결했다. 국방에서는 1∼2년 전 4군과 6진의 개척이라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크고 화려한 군사업적으로 남을 성과를 맺고 있었다. 온 조정이 활기로 넘쳐났다.하지만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이다. 어느 시대, 어느 정권에나 뒷공론이 없을 수 없다. 세종 16년 오늘날 검찰 역할을 맡았던 사헌부에서 불만이 늘어가고 있었다. 세종이 뽑은 18명의 도승지 중에서도 임기가 가장 길었던(4년 1개월) 안숭선은 세종의 측근 중 측근이었다. 그러나 “성격이 급해 쉽게 성을 내고, 동료들에게 말을 가려서 하지 않는다”는 실록의 평가처럼 결코 원만한 성품은 못 되었던 듯싶다. 게다가 그는 사실상 인사를 총괄했기 때문에 한편으로 뇌물과 청탁을 받는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왕에게 올리는 상소를 일단 검토한 후 추려서 올렸기 때문에 왕의 눈과 귀를 가린다는 비난을 받았다.하지만 문제의 시작은 안숭선이 아닌 세종 자신에게 있었다. 인재를 무척 아껴 능력을 확인하면 끝까지 밀어주었던 특유의 인사 스타일, 왕의 비서실 격인 승정원 권한을 강화한 데 따른 잡음이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측근정치에 대한 반발이었다.세종은 자신이 추진하는 여러 프로젝트를 챙기느라 바빴기 때문에 일반 업무 처리에는 최대한 시간을 절약해야 했다. 특히 인사 문제는 믿을 수 있는 측근과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했다. 그래서 승정원의 역할을 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승정원에 올라오는 상소를 일단 한 번 거르도록 한 것도 불가피했다. 어전회의에서는 프로젝트 진행 문제가 주로 논의됐기다.”
    경영/경제| 2010.12.17| 7페이지| 1,000원| 조회(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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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까지의 건강관리와 앞으로 나의 건강관리계획
    1.리포트를 시작하면서.......정말 인생에 있어서 건강보다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건강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각자의 분야에서 아무리 능력이 우수하고 노력을 하더라도 이룰 수가 없으니깐 말이다. 나또한 건강을 정말 등한시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건 아마도 왜 건강이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인지 깨닫지 못해서 인 것 같다. 그것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조금의 관심과 노력만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가 있는데 말이다.나는 이 리포트로써 대학 입학 후 나의 건강관리에 대해 반성하고 앞으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위해 나의 건강관리 인생계획을 나이 대 별로 계획해 보고자 한다.2.나약했던 어린시절...나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너무 허약하여 부모님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그 이유로 좋은 약이란 약은 다 먹고 자랐다. 그리고 운동에 소질이 있어나 좋아하는 것도 아니어서 초등학생 때부터 살이 찌기 시작하여 비만까지는 아니었지만 거의 비만 직전까지 살이 찌고 건강해지기 보다는 오히려 몸이 더 둔해지고 건강도 더 안 좋아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렇게 언제부턴가 ‘돼지’라는 별명을 달고 다니다가 따로 살을 빼려고 한 적은 없는데 고등학생 때 저절로 살이 많이 빠지더니 대학교에 진학해서는 건강한 정도는 아니지만 요즘 보통 학생들의 몸처럼 되었던 것 같다. 겉보기만 그리 보였지 여전히 몸은 체력, 근력, 지구력 등의 면에서 매우 약한 상태였다.3.건강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던 대학생활나의 대학 입학 후 건강관리에 대해 논하자면 그 전에도 그랬지만 건강에 대해서는 정말 특별하게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아니 관심이라기보다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을 것 같다. 물론 고등학교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 갑자기 맞닥뜨린 달콤한 캠퍼스 생활로 인해 자유를 다른 보통의 친구들처럼 술을 자주 가까이하고 매우 불규칙 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었다.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나는 경남대학교의 건축과에 진학을 하였다. 1학년 때에는 건축학과라는 과의 특성상 기초적이 도면의 이해와잠이 부족하게 되어 늦잠을 자고 부랴부랴 다음날 학교를 가느라 아침을 거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렇게 되다보니 학교를 가면 당연히 학업에 집중이 잘되지 않고 졸면서 수업을 들었던 적도 많았던 것 같다. 물론 늦잠이 심한 날은 지각이나 결석을 한 적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다 보면 밀린 과제를 하루 만에 다 하려다 보니 잠 한숨 못자고 밤을 세는 날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정말 지금 생각해 보면 악순환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운동에는 영 소질이 없고 관심도 별로 없었기에 운동을 하는 날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컴퓨터 게임에 취미가 생기게 되고 많은 시간을 컴퓨터 앞에 가만히 앉아 게임을 즐기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니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아주 안한 것은 아니었다. 친구와 함께 헬스장을 함께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일단 한 달을 결제하고 운동을 시작했었는데 처음에는 좀 열심히 했었던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 작심삼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한 달 중 운동을 하러 나간 날이 손에 꼽힐 정도였다. 중간에 반전을 노려봤던 나지만 역시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악순환의 연속인 생활에 빠져 들고 있었다.대학교 2학년 때도 1학년 때보다는 좀 덜하였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크게 나아진 생활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대학교 2년의 생활이 그렇다 보니 그때의 외형적인 나의 몸 상태를 글로 표현을 하자면 내 키에 대비해서 이상적인 몸무게는 유지를 하였지만 그건 단지 몸무게 일뿐 근육은 거의 없고 다른 부위에 비해서 뱃살이 나와 있는 그런 나이에 맞지 않은 몸이었다.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다 저렇게 어리석은 생활을 하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운동이나 생화습관 또는 식생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신경 써서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하나도 없으며 몸의 건강이 얼마나 나빠져서 나약해 지고 있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담배까지 피웠다면 정말 얼마나 건강이 나빠졌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가지나 수행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100가지 중에 1가지 정도나 제대로 이행했었을까? 하는, 부끄럽지만 그런 최악의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 같다.4.인생의 전환기를 맞은 군생활그런 내게 군대는 건강한 남자의 매력이라는 관심사를 만들어준, 건강뿐만 아니라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가도록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곳이었다.대학교는 2학년까지 이수하고 입대를 하게 되었는데, 훈련소에서 훈련병 딱지를 떼고 처음 자대를 배치 받아 새로운 사람들과 군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막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훈련과 운동으로 다져진 우람한 체구의 선임들과 함께 있으면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더더욱 주눅 들고 실수도 많이 했으며 훈련, 작업, 훈련 간에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선임들이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은 힘든 후임 병 생활을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있었던 부대 특성상 내 맞선임이 나와 11개월 차이가 났는데 상병이 되기도 전에 분대장이 되어버리는 전국에서 정말 찾아보기 힘든 풀린 군번 이었다. 하지만 풀린 만큼 그 책임감은 더더욱 커진다는 것 또한 감안 하여야 하였기에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 보다 경험도 적은 상태에서 분대장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으며, 더욱이나 한꺼번에 몰려들어올 후임 병들을 지휘하고 지도 하려면, 빠른 시일 내에 적응하고 훈련을 익히는 것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면에서 후임 병들의 본보기가 돼야했기에 체력, 근력, 지구력 등 어느 것 하나 내게울 것 없던 내 몸은 결코 분대장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시대의 군대라는 조직의 특성상 계급이 낮을 때에는 운동을 하는 것도 아주 제한 적이었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질 때만이라도 최대한 열심히 하여 조금이라도 건강해지자는 생각을 하였다. 정말 살아오면서 그때가 처음으로 운동이 정말로 하고 싶고 운동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던 순간 이었던 것 같다.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자유가 보장이이 걸렸지만 나름대로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근육도 만들어서 내 몸을 부러워하는 후임들도 조금씩 생겨나기도 하였으며, 몸이 건강해지니 마음까지 건강해지는 기분 이었다. 매사에 자신감이 생기고 적극적여 졌으며, 그 덕분에 1년이 넘는 분대장의 임무도 훌륭하게 완수하여 아직도 군 생활에 대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5.새로워진 나이젠 군대도 제대를 하고 학교에 복학하여 다시 학교생활을 시작한지도 1년이다 되 가고 있다. 복학한 이후의 기간을 돌이켜보면 확실히 군대에 있을 때만큼의 운동에 대한 열정은 확실 없어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만큼의 근육도 유지하고 있지를 못하다. 하지만 군 입대전의 나와 제대 후의 나는 분명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비록 군 생활을 하던 만큼 열정적으로 운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때의 건강한 정신이 아직도 조금씩 유지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되도록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려는 나의 모습이 보여 질 때 아직도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보니 항상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일어나면 잊지 않고 스트레칭을 하려고 노력하며 복학 후 정말 아침을 거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비타민제를 항상 챙겨먹으며 인스턴트식품이나 과자류 등은 거의 먹지 않고 밥을 먹을 때에도 되도록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는 것을 고려하여 메뉴를 고르는 버릇도 생겼다. 운동은 샤원 전 이틀에 한번이나 삼일에 한번 꼴로 꼭 집에 있는 아령으로 30분 이상 무 산소 운동을 한다. 그리고 항상 물을 자주 섭취하기 위해 물통을 가지고 다니며 적당한 양만큼 수분을 섭취해주고 있다. 지난여름엔 친구들과 자전거 하이킹을 하기 위해 자전거를 하나 구입했는데 너무 멀지않으면 되도록 버스를 타지 않고 자전거를 이용 하는 등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으며 건강까지 챙기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달에 술자리를 많이 가져봤자 네 번밖에 가나하나 분명히 짚고 넘어 갈수 있으며 그것을 고치기 위해 따로 노트를 해놓았다가 나의생활규칙에 추가 시킨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평소 균형 감각이 부족했었는데 요즘은 매일 강의에서 배운 균형감각운동을 매일 한번 씩 해주고 있다. 그리고 유연성 운동도 해주고 있으며, 디지털에 의지하기 보다는 되도록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하고 있다.이처럼 지난 1,2학년 때의 대학교 생활과 지금의 생활을 비교하면 이렇게 심하게 별할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나도 이 리포트를 쓰면서 놀라고 또 놀라는 나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배운 대로 생활 습관을 고치려 노력하고 있지만 잘 되지 않고 있는 부분 있다. 무산소 운동은 열심히 하고 있지만 유산소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아 학교 앞 운동장에서 일주일에 2,3일은 30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잘 지켜 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식습관에서 식사를 할 때 남들보다 조금 빨리 먹는 편이고 과식을 좀 하는 편인데 고치기 위해서 노력중이지만 잘 고쳐지지 않고 있는 부분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앞으로 나의 남은 학교생활의 건강관리 계획을 세우라고 한다면 현재의 생활 습관을 계속 유지하면서 아직 보완되지 않은 부분들을 보완해서 최상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6.졸업 후 나의 건강관리 인생 계획(1)20대대학교를 졸업 후 나는 아마 나의 전공을 살려서 건설회사 쪽에 취직을 할 것이다. 물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특히 우리나라의 사회분위기상 자기관리를 하기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은 아무리 최악의 상황에 놓이더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많은 것을 변화 시킬 수 있는 것이 사람인 것 같다. 자기 시간이 주어 졌을 때 열심히 일했으니 막무가내로 쉬겠어. 라는 생각하지고 자기관리를 위해 시간을 할당한다면 충분이 건강관리를 위해 시간을 할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졸업 후 20대에는 지금의 나에 모습과 마찬가지로 규칙적이 생활 습관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헬스클럽을 이용하여 무
    의/약학| 2010.12.17| 5페이지| 1,500원| 조회(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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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성곽의 기원,역사와 경남지역 성곽 문화재 현황
    1.우리 나라 성곽의 기원과 역사우리 나라 전국에는 수많은 성곽이 남아 있다. 높은 산에는 산성(山城)이 있고 야트막한 산에는 토성(土城)이 있으며 평지나 바닷가에는 퇴락했지만 역사의 이끼가 덮인 읍성(邑城)의 성벽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성곽 유적은 우리 조상들이 삼국시대 이래 끊임없이 이어진 외적의 침입에 맞서 이 강토를 지키려했던 호국 의지의 표상이라 하겠다. 조선 세종 때 양성지는 "우리 나라는 성곽의 나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일찍이 중국에서도 "고구려 사람들은 성을 잘 쌓고 방어를 잘 하므로 쳐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2.성곽의 기원우리 나라는 언제나 성곽이 나타났는지는 분명히 밝힐 수 없다. 문헌상에 나타난 것으로는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에 평양성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처음인데 이는 대체로 기원전 2세기에 해당된다. 한편 남한에서는 이보다 훨씬 늦은 삼한시대에 성곽에 관한 문헌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철기 문호를 누리고 삼국의 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한 서기 1세기 무렵에는 적어도 삼한이나 삼국에 성곽과 비슷한 방어시설이 생겨났다고 보이며 백제나 신라는 그 영역의 확장에 따라 성이나 책(柵)을 신축했으며 성을 기초로 한 성읍국가를 이루고 있었다고 보인다.3.성곽의 종류1) 도성도성은 왕궁이 있는 도읍지에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곽으로 고조선시대에 평양성의 존재가 문헌에 전해지고 있으며 삼국시대에도 도성을 쌓았다. 평원왕 28년(586)에 축조된 장안성은 고구려후기의 대표적인 도성으로 수나라의 도성제도를 참고하여 쌓은 것으로 성 안 평지에 바둑판 모양의 시가지를 만들어 규칙적으로 이방(里方)을 배치하였다. 바둑판 모양의 가로에는 큰 냇돌을 깔았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장안성은 현대적인 도시계획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2) 산성우리 나라 성곽의 대표적인 형태는 산성이다. 산의 자연적인 지세를 최대한 활용하여 능선을 따라 용이 산허리를 감듯 꾸불꾸불 기어올라가는 산성은 자연에 순응하고 동화하려고 에는 방어 기능의 성곽이 되어 성문을 굳게 닫고, 군·관·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성을 지킨다. 이러한 읍성은 우리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존재로서 고려말에 처음 등장하여 조선 초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승주군의 낙안읍성과 홍성의 해미읍성 등은 평지에 축조된 대표적인 읍성이다.4) 장성국경의 변방에 외적을 막기 위해서 쌓은 것이 장성(長成)인데 행성(行城)또는 관성(關城)으로도 부른다. 장성은 이름 그대로 길이가 수십 킬로미터나 되는 큰 규모의 성으로 산과 산을 연결하여 축조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 나 장성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한 것은 고려 때 쌓은 천리장성이다. 12년에 걸쳐 완성된 성벽의 높이와 너비가 각 25척이나 되었다.우리 나라 성곽의 발달삼국의 성곽 시설로는 대부분 간단한 목책(木柵)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본격적인 석축에 의한 성곽은 삼국이 고대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3세기 이후에 가능했다. 처음에는 간단한 목책의 시설물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토성으로 발전해 갔으며 그 다음 단계에는 많은 인력과 경비가 소요되는 석성을 쌓았다. 목책은 나무 기둥을 엮어 세워 적이 넘어오지 못하게 만든 원시적인 울타리 흙을 다져 넣어가며 쌓는 판축(版築)식과 토성이 축조될 곳의 좌우 흙을 파내 둔덕을 쌓아 올리는 삭토(削土)식이 있는데 판축식은 주로 평야에서, 삭토식은 산등성이에서 사용되었다. 목책성이나 토서, 석성 등은 그 출현시기가 각기 다르지만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기능에 따라 혼재(混在)해 왔으며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벽돌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나 정조(正祖)때 수원성 축성에 부분적으로 채택되었을 뿐 우리 나라의 성곽은 석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경남 지역의 성곽 문화재 현황1.군사지역의 성곽⑴창녕?화왕산성[火旺山城]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玉泉里)에 있는 가야시대의 석성(石城).사적 제64호.1963년 지정. 면적 18만 5724m2. 조선 전기의 기록을 보면 둘레가 1,217보(步:1보는 6尺)이며, 성 내에는 작은 석성이다. 562년(진흥왕 23)에 신라가 창녕 지방을 점령하던 당시 초계(草溪), 의령(宜寧) 방면의 왜적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축성한 것이다.조선시대에는 곽재우 장군이 인솔한 의병군이 이곳에서 유격전으로 왜군을 격퇴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전체의 8할 정도가 무너지고 성터만 남아 있다.?목마산성 [牧馬山城]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동(松峴洞)의 화왕산(火旺山) 서쪽 지맥에 있는 산성.사적 제65호. 측면식(側面式:山腹式) 또는 반면식(半面式) 산성의 대표적 보기이다. 산성 둘레는 약 1,900 m이고, 석축(石築)도 현재 남아 있는 산성으로는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산성으로서는 큰 편에 속하여 부근의 화왕산성(火旺山城)과 거의 같은 규모이나, 이 산성이 반면식인데 대하여 화왕산성은 마안형(馬鞍形)으로 그 형식만 다른 점도 산성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郭再祐)가 축성하였다는 설과, 말을 기르기 위한 성이었다는 설이 있다.⑵거창?거열산성[居列城]경상남도 거창군에 있는 백제 때의 석성.건흥산성(乾興山城)이라고도 한다. 성 둘레 약 2km, 성벽 높이 8m이다. 신라에 망한 백제의 충신·열사·의용군들이 나라를 재건하려는 목적으로 지리산·덕유산 일대에 쌓은 성이다. 백제 멸망 이후 이곳에서 치열한 부흥운동이 있었으나, 663년(문무왕 3) 신라의 김흠순(金欽純)·천존(天存) 등의 공략을 받아 함락되었다. 성은 덕유산 줄기의 건흥산 꼭대기에 위치하여 성 아래에서는 성곽이 보이지 않으며, 산세(山勢)와 능선의 기복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이다.서쪽 성문지(城門址)에서 성 아래까지 옛날 도로가 남아 있고, 7개소의 망루를 세운 흔적이 있다. 동쪽 성문 밖에는 평탄한 지대가 있어 당시에 병사 훈련이나 목마(牧馬)를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 안에는 건물의 유적으로 보이는 축대와 우물터가 있으며, 성벽은 대부분 남아 있는데 당시의 석재가 그대로 있어 원형 복원이 가능하다.⑶합천?악견산성 [陜川嶽堅山城]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성리에 있는 성곽마치 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왜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합천군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2.왜성?기장 죽성리 왜성 [機張竹城里倭城]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일본식 석성.1999년 3월 9일 부산광역시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장수인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축성하였다. 1593년(선조 26) 서울에서 후퇴한 왜군이 장기전에 돌입하기 위해 해안에 면한 기장읍 죽성리 마을 뒷편의 요충지를 택하여 쌓은 성이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 따르면 죽성리 왜성은 1595년(선조 28)에 축성되었다. 성벽은 화강암을 써서 70도 정도로 비스듬히 쌓았으며, 성벽의 총 연장은 300m 정도이고, 성의 둘레는 약 960m, 성벽높이는 4∼5m이다.왜성은 강이나 바다에 가까운 구릉을 택하고 선박의 출입이 편리한 장소에 축성되었다. 죽성리 왜성은 남쪽 해발고도 64m의 독립된 구릉의 높은 곳을 본환(本丸)으로 하는 윤곽식 산성으로 전형적인 일본식 성곽이다. 성의 대부분은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데, 성 주위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고 외곽에 주택이 들어서 있다.임진왜란 때 왜군은 전라남도 여수에서 울산에 이르는 동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지구전략으로 조선을 굴복시키려고 하였는데 죽성리 왜성은 이때 쌓은 왜성 가운데 하나이다. 이 성은 울산의 서생포 왜성(西生浦倭城)과 학성(鶴城), 그리고 부산성을 연결하는 중간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3.시지역의 성곽?관문성 [關門城]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外東邑) 모화리(毛火里)와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範西邑) 두산리(斗山里) 사이에 있는 산성.722년(신라 성덕왕 21) 10월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축조한 성이다. 산과 산을 연결하여 길게 축조한 특수 양식의 산성으로 《삼국유사》에 '각간(角干) 원진(元眞)이 3만 9262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쌓았으며, 길이가 6,792보 5척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로 40∼50cm, 세로 20∼30cm의 것으로 보이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증보문헌비고》와 《동래읍지》에는 1703년(숙종 29)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석축으로 개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707년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수축하였고, 1808년(순조 8) 부사 오한원(吳翰源)이 동문(東門)을 신축하고 성을 보수하였으며, 1824년 부사 이규현(李奎鉉)이 성내에 건물을 짓고 진장(鎭將)을 배치하였다. 1970년에 4 개 성문 중 동 ·서 ·남문이 복원되었다.?이산성지 [鯉山城址]경상남도 마산시 회원동에 있는 삼한시대 테뫼식 산성.1981년 12월 21일 경상남도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었다. 정확한 축조연대는 알 수 없지만 삼한시대 변한(卞韓)의 정치세력이 쌓은 것으로 추정되며, 성곽의 동서 길이는 200m, 남북 길이는 120m, 둘레는 500m이고 면적은 1만 4,456㎡이다.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타원을 형성하며 남쪽으로 바닷가를 향해 낮은 부분에 출입과 배수를 위한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의 북쪽은 허물어졌지만 동서쪽의 문터와 남쪽의 성벽은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산성 일대에서 가야토기 조각들이 출토되었고 주거지로 추정되는 성벽 아래에는 붉은 간 토기[紅陶] 조각들도 발견되었다.성벽은 기단을 할석으로 보강한 흔적이 있으며, 중부·남부 지방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지어진 성벽이다.?합포성지 [合浦城址]경상남도 마산시 회원구 합성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성터.1976년 12월 20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경상우도(慶尙右道) 병영성(兵營城)의 터로, 성은 부원수(副元帥) 배극렴(裵克廉)이 왜구를 막기 위해 고려시대인 1378년(우왕 4) 3개월에 걸쳐 돌로 쌓았다.1426년(세종 8)에 경상 좌·우도 병영이 합쳐지면서 경상도병영성이 되었다가 1430년에 고쳐 지었다. 1437년 경상좌·우도로 다시 분리된 뒤 1583년(선조 16)에 경상병사(慶尙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우도병영을 진주로 옮긴 후로는 합포진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합포는 신라시대의 골포현(骨
    인문/어학| 2010.12.17| 6페이지| 1,000원| 조회(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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