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1945년 해방 이후 1950년 6·25 전쟁을 거쳐 남과 북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50여 년의 시간을 서로 단절된 채 각자의 체제와 이념을 발전시켜왔다. 그 시간동안 분명 한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은 서로 다른 발전형태로 인해 그 이질성과 적대감이 발생하여 누적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의존적 경제로 전후 성장을 지속해 온 남한은 시장경제에 입각한 자본주의 사회가 되었고 소련과 중국의 지원 하에 국가를 수립·발전시켜온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발전시켜 한 대 남한을 능가하는 경제력을 갖추었지만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붕괴와 계획경제가 내포하고 있던 모순적 구조로 인해 급속한 경제하락이 발생하여 현재는 주민들의 식량문제조차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다른 모습으로 50여 년의 시간을 지내온 동안 남북은 통일을 위한 어떠한 노력을 하였는가? 정답은 그리 만족스럽다고 할 수 없다. 각자 지금껏 나름대로 많은 통일방안과 정책을 수립·제안하고 추진하여 왔지만 최근까지도 상대를 인정조차 하지 않았고, 통일방안 또한 통일을 위한 방안이라는 모습보다는 자신들의 체제 정당성 강화를 위한 수단적인 면이 많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후 그 대를 이어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된 김정일 정권이 탄생하고 1998년 여·야의 평화적 정권교체로 김대중 정권이 출범한 이후 남북 관계는 기존의 적대적인 구조를 벗어나 조금 더 획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결실이 바로 2000년 6월에 이루어진 남북 정상회담이었다. 이는 분단 이후 최초로 이루어진 정상회담으로 반세기동안 지속된 분단 체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역사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정상회담의 성사는 무엇보다도 상호 실체의 인정이라는 남북 문제의 근본적인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남북 관계의 기본 성격이 불신과 반목, 적개심과 적대적 대결관계에서 신뢰와 화해, 호혜적 상호 협력관계0,7029,24049,942(0.2)초등졸**1,281,490355,5521,637,043(7.2)초등중퇴190,25064,555254,805(1.1)간이학교864,308115,814980,112(4.3)불취학자8,403,94011,211,83519,642,755(86.2)계10,995,62811,798,13822,793,766(99.9)(표주) *) 국민학교 고등과 졸업**)국민학교 심상과 졸업자료 : 이향규, 김기석 『북한 사회주의 형성과 교육』, 19∼21pp이 시기의 북한 교육은 사회주의 교육이라는 목표보다는 반봉건,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문맹퇴치 운동을 통해 노동자·농민 등 공산당 지지세력들을 공산주의화 시키는데 노력하였고, 지식인들의 대거 남하로 인한 지식기반의 공백을 메우려 한 의도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1950년 발생한 6·25 전쟁은 남북한을 막론하고 교육제도의 정상적 운영을 불가능하게 하였으며 정상적 교육기관의 운영은 전쟁 이후에야 복구되었다. 전쟁시기에 북한은 7명에서 10명으로 이루어진 학습반을 조직하여 북한 전역에서 이동식으로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는 빨치산식 교육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미군의 폭격과 잦은 이동으로 인해, 정착된 건물에서 교육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북한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생각되어진다. 남한 역시 이와 비슷한 임시 학교를 만들어 교육하였다. 북한은 1951년 2, 3월경부터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부터 대학이 복구되기 시작하였고,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고착되어 전쟁이 장기화하는 정세 하에 1951년 신 학년부터는 내각결정에 의하여 각급학교를 전반적으로 개교하게 되었다. 전시에 북한 교육의 특징은 지하·반지하 교실을 많이 만들어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1951년 현재 복구 건설된 각급학교 교실 수는 지상교실, 반지하 교실, 지하교실을 합하여 총 13,000여 개의 달했다고 한다.{)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조선통사 (하)』, 555p1953년에 휴전이 이루어진 태에서 보여준 소련의 무력함과 함께 남한에 수립된 군사정권으로 인해 국방의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주체사상이라는 통치 이념으로 국방의 자위를 추구하게 되었다. 국방의 자위를 완수하기 위해 북한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주민들의 공산주의도덕·혁명전통 교양의 강화라고 김일성을 느꼈다고 판단되어진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은 바로 애국주의를 고양시키고 적에 대항하여 싸우는 투쟁정신을 가르치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2년제 고등기술학교를 3∼4년제로 변경한 것은 산업의 다양화로 인해 기초과학의 필요성을 인식한 북한이 기초과학의 육성을 위해 취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은 1962년 10월 16일 발표한 『보통 교육 사업을 개선 강화할 데 대하여』를 통해 과학기술 교육과 기술 학교의 올바른 배치와 균형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1966년의 교육개정은 기술보다는 국방을 중요시하는 정책이 더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66년 교육개정 이후 북한은 더욱 적대적이며 투쟁적인 교육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김일성은 학생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후비대로 자라나게 한다는 구실하에 혁명전통교양을 실시하여 1930년대 항일무장 투쟁시기의 자신의 경험을 다시 살리는 교육을 강행하고 있다.1970년대에 이르러 정치적인 일당독재와 김일성 개인숭배 및 김일성 가계를 중심으로 한 권력구조를 확립하고 사회주의 경제기반을 구축했으며 국방의 자위 체제를 만들어 놓은 북한은 1972년 7월 4일 남한과 함께 통일에 관한 기본방침을 성립한 7·4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곧이어 12월 27일 사회주의헌법을 공포하였다. 남한의 박정희 정권이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제정하기 전에 사전작업으로 7·4 공동성명을 이용한 것과 같이 북한 역시 남북회담을 구실로 김일성의 절대적 권력의 법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또한 1973년 4월 10일에 교육 개정법을 발표하여 현재까지 이 개정법에 의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교육이 본질적으로 계급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당성과 노동계급적 성격이 교육에서 나타나야만 당과 혁명에 충실한 혁명인재를 키울 수 있다고 한다. 결국 교육을 통해 북한당국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는 학생들을 혁명화, 노동계급화, 공산주의화 하여, 김일성 부자에 무한히 충직한 혁명투사를 양성하는데 있다.북한에서는 해방과 더불어 『북조선 학교교육 실시 조치법』을 제정하여 종래의 국민학교를 일제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명분에서 인민학교로 개칭하고, 예비반 1년 과정을 포함하여 6년제 인민학교를 시작으로 근대적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그 후 여러 차례 걸쳐 학제를 개편하였으며, 최근 실시되고 있는 학제의 골간은 1975년부터 실시된 전반적 11년제 의무교육 제도이다. 11년의 의무교육기간은 유치원 높은 반 1년, 인민학교 4년, 그리고 고등중학교 6년을 의미한다. 북한의 의무교육은 최고인민회의 제1기 4차 회의(1949.9)에서 1950년 7월 1일부터 전반적 초등의무교육제를 실시키로 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인해 실시되지 못하다가, 1956년부터 단계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1956년부터 초등의무교육제(4년제 인민학교)가 실시되고, 1958년부터 3년제 중등교육까지 의무교육이 확대되었다. 1975년 9월부터는 유치원 높은 반 학생을 학교전 의무교육 에 포함시킴으로써 오늘날의 전반적 11년제 의무교육 의 틀이 마련되었다. 북한에서는 초·중등교육을 의무교육제로 하고 있다. 이 같은 의무교육제도는 사회의 모든 성원들을 공산주의적 인간으로 키우기 위한 전민적 교육 으로 하기 위함이며, 이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표2》 북한의 현재 학제{연령고등교육26박사원·연구원(2∼4년)252422대 학(4∼7년)2120단 과 대 학(3∼4년)19고등전문학교(2∼3년)1816의무교육고 등 중 학 교 (6년)중등교육1410인 민 학 교 (4년)초등교육65유 치 원 (2년)높은 반 (1년)학교전교육4낮은 반 (1년는 개인 찬양·충성,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노력동원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다섯째, 학교전 교육, 학교교육, 성인교육의 병진 방법이다. 이 방법은 사람들의 사상의식은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라 조건과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는 전제 아래, 어린이로부터 늙은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유치원으로부터 성인교육에 이르기까지 공산주의 혁명사상 교양과 도덕교양을 기본으로 교육한다는 점은 이미 지적하였다. 북한의 교육은 이와 같이 다섯 가지 혁명적인 사회주의 교육방법 을 기초로 하여 가능한 모든 매체(당, 가정, 교육기관, 조직단체, 대중매체 등)들이 관여한다. 교육·교양 내용은 일차적으로 당원으로부터 핵심군중(계층)으로 전달되며, 마지막으로 일반 대중에게 확산하는 방식을 취한다.마지막으로 인민학교의 교육시간을 살펴보면 하루 평균 5시간을 가르치며, 과목당 45분 수업에 10분 휴식을 원칙으로 한다.{) 통일부 위에 책, 198p수업은 보통 8시에 시작한다. 인민학교는 8시에 1교시를 시작하여 12시 35분까지 5교시를 마친다. 3교시와 4교시 사이에는 15분간의 업간 체조 시간이 설정되어 있으며, 5교시를 마치고 1시간 50분간(12:30∼2:20)점심시간을 갖는다. 점심시간에는 오침시간이 포함되어 있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5교시를 시작하여 3시 15분이 되면 6교시가 끝난다.이상 북한의 의무교육제도의 전반적인 면과 인민학교 교육제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러면 인민학교 교과과정에서 매 학년마다 1주일에 1시간씩 배정되어 있는 김일성을 비롯한 김일성 가계에 대한 수업을 연구하여 보았다.Ⅲ. 본 론A.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 어린시절인민학교에서 교육하는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 어린시절』은 학년마다 각기 다른 교과서를 사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즉 국어 교과서가 1학년용, 2학년용 등 학년마다 다른 바와 같이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 어린시절』역시 학년에 맞게 교과서가 제작되었다. 교육도서 인쇄공장에서 있다.
어떠한 경제적 교류?협력이정치적 협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Ⅰ. 서 론1945년해방 이후 1948년 한반도는 남에는 대한민국, 북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상이한 체제가 수립되었다. 그 후 두 체제는 서로를 인정치 않는 범위에서 서로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여 왔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통일 시도마저 실패한 이후 남과 북은 서로를 정치?경제?군사적 경쟁상대로 여기고 제한적이고 형식적인 접촉만을 행하였고, 그러한 흐름은 198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국제 정세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여 1988년 노태우 정부는 7?7 선언을 통해 북한을 대결의 상대가 아니라 선의의 동반자로 간주하고, 남과 북이 함께 번영을 이룩하는 민족 공동체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통일 조국을 실현하는 지름길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남북간의 대결구조를 화해의 구조로 전환시켜 나가는데 필요한 조치의 기본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남북간의 교류?협력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에 이르기까지 남?북간의 다방면의 교류?협력이 이루어졌고, 특히 김대중의 국민정부 때는 괄목할 만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98년 2월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대북 정책의 기조로 제시했는데, 이는 성급한 통일의 추진이 아니라 안보를 튼튼히 하는 가운데 화해협력을 추진하면서 남북관계를 개선해 나간다는 정책이었다.) 이러한 대북 화해협력 정책은 남남갈등 유발과 구체적, 가시적 성과를 위한 즉흥적 정책 수행 그리고 한?미?일 공조의 약화 등을 초래했다는 점에서는 그 아쉬움이 있으나,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내고, 한반도의 전쟁위험의 긴장을 완화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국민의 정부가 대북 정책을 수행함에 있어 특히 중점을 두었던 것은 경제적 협력을 통한 남북 교류의 증진이었다. 이는 다른 분야와 더불어 경제 분야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상호 신뢰를 구축하고 민족공동체를 건설해 나가 동유럽 국가들이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된 것도 독일 통일의 커다란 원인이겠지만,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 ‘접촉을 통한 변화’. ‘작은 걸음’ 전략에 따라 꾸준히 양독간의 교류 협력을 지속한 것이 통일의 가장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빌리 브란트 수상은 집권 후 모스크바 조약(70.8.12)을 비롯하여 바르샤바 조약(70.12.7), 베를린 협정(71.9.3), 동?서독 기본 조약(72.12.21), 프라하 조약(73.12.11)등을 이끌어내어 동서독 통일에 대한 주변국들의 우려를 씻어내려 했고, 동시에 동서독간의 교류를 통해 통일 여건 조성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꾸준한 인적, 물적 교류를 통하여 상호 경제 의존성 증대와 동독 시민들의 개혁의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독일의 통일에서 경제적인 협력이 그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1951년 내독교역의 법적 근거가 체결되고 1960년 베를린 협정 이후 본격화된 동서독의 내적 교역은 통일 전까지 꾸준히 발전되어 왔다. (표. 2 참조)표.2 동?서독 교역의 발전 (1960~1986)서독의 대동독 수출(단위:백만 마르크)서독의 대동독 수입(단위:백만 마르크)전체량19601,0301.0072,03719702,4842,0644,54819805,8755,85511,73019807,6817,56215,24319867,8377,34415,180출처: 이영기,「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한국은 탈냉전 시대에 들어 남북 교역을 추진하면서 독일의 모델을 많이 참고하였는데, ‘민족 내부거래’로서의 간주, 무관세와 부가가치세 면제 등이 그러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서독은 동독에 대한 간접적 지원을 위해 무이자 무역신용을 공여하였다. 이러한 교역속에서 서독에서 동독지역으로 거는 전화통화는 1988년 4천만 회에 달했으며, 2억통의 편지와 3천 6백만개의 소포가 상호 교환되었다.) 이러한 동서독간의 통일 전 교역을 통해 살펴보아야 할 것은 경제적 교역(인적?물적 교류 경제구조 개혁의 지연, 낙후된 산업구조 등의 복합적 작용으로 경제 강대국이었던 독일은 지금까지 상당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표.3 1991년에서 2000년까지 구동독 지역의 편입과 재건을 위한 국가지불 비용 추정 (단위: 십억 DM, 1990.10.10 현재)구 분최소치서독 수준실업보험,의료보험,연금보험,단축조업지원4백만 노동자에 대한 직업기술 수준 향상주택건설, 도시재건환경재건에너지 공급전기공급, 원거리 난방에너지 절약 프로그램농업교통철도도로우편/통신교육/대학소련군 철수동독부채와 교역의무 이행신탁관리청100.020.0200.0200.060.025.070.0100.0100.030.06.513.0280.040.0300.030.0800.0410.5130.050.0110.0150.0150.045.06.513.028.040.0추가경정예산1990년 5월1990년 7월1990년 9월베를린 수도 이전6.84.920.010.06.84.920.040.0총 계 (자체 계산)1,034.22,334.7연방정부 추정 수입조세수입통독 기금(연방, 주, 자치단체 모금)310.093.0이는 단계적 통일 방식보다는 정치적 논리를 앞세운 무리한 통일 방식 때문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는데, 독일에 비해 남북간 교류 협력 단계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있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할 수 있겠다.수많은 문제점과 부작용 속에서도 통일 후 10여 년이 지난 독일은 그동안 많은 노력과 시행착오 끝에 어느 정도 피해를 최소화하고, 통일 초기에 우려했던 경제 문제를 상당히 해결하면서 경제적 도약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갖춰 나가고 있다. 우리는 통일 전 동서독의 경제적 교류 협력 과정에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교류를 지속하면 그 영향은 분명 정치적인 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경제 협력 〓 정치 협력은 아니었다 라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양자간의 세력의 균형이 맞지 않고 어느 한 국가 상대국에 비해 경제적으로 열세에 있다면 경제적 협력의 영향력은 우세할 것이다. 동독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항상 열어 둘 수 있을 것이다.)c) 세계 정치에서 미국의 정치 경제적 의의9?11 테러 이후의 미국은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제 정치 사회에서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이라크와의 전쟁을 통해 명실상부한 세계 유일 초강대국의 모습을 보여준 미국은 정치적인 면에서도 세계 질서를 이끌어 나가려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미국은 여타 세계의 주변국들과의 관계에서 경제적 우위에 입각한 경제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정치적인 협력, 더 나아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이라크 전쟁을 통해 알수 있듯이 미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국제 사회의 여론을 주도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현실정치에 입각하여 독단적인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초기에 전쟁을 반대했던 국가들도 현실적인 경제, 정치 관계를 고려하여 결국 미국에게 손을 들어준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경제력에 기반을 둔 현 국제 질서에서 미국의 위상은 확고하다고 볼 수 있다.구 소련의 붕괴 이후 미국에 경쟁자로 부상한 중국 역시 미국에 대한 경제적 관계로 인해 자국의 정치적 의사를 100% 제시한다고 볼 수 없다. 실제 부시 정권의 출범 이후 중?미 관계는 2001년 4월 군용기 충돌사건과 미국의 대만에 대한 첨단 무기 판매결정 및 5월 대만 총통의 미국 통과 방문 허용 등으로 인하여 최악의 상황으로 발전되었으나 중국이 미국의 대테러전을 적극 지지하고 부시 대통령이 상해 아?태 경제협력체 지도자 회의에 참석하여 중국을 경쟁자가 아니라 건설적 협력상대라고 지칭함으로써, 중?미 관계가 호전된 사례가 있다.) 이번 대이라크 전쟁에서도 중국은 단지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유엔 체제 내에서 이라크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강조하는 원칙적인 입장을 재천명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다. 이렇게 중국이 미국과의 정치적인 충돌을 피하려 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관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는 어떠한 교류 협력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우선 우리는 북한과의 교류 협력에 임하기에 앞서 북한에 대해 더욱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주적 개념으로서의 이해도 물론 중요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이해의 필요성은 일정한 경제적, 정치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국가로서의 북한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미국은 1992년 북핵에 대한 위기가 발생하기 전부터 북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물론 체계적인 연구가 더욱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정작 한반도 통일 문제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한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연구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단순히 경제적, 문화적 교류 협력을 지속하면 우리가 원하는 정치적 협력이나 성과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그 타당성을 찾을 수 없다. 지난 국민 정부의 대북 정책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이제는 대북 경제협력의 추진에 있어 전략적 선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정치적인 전제조건 없이 혹은 남한의 국민 여론에 의식하여 즉흥적으로 추진되는 교류 협력 정책은 단기적으로 상징성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장기적 관점에서는 득보다 실이 많을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는 북한이 취하는 정치, 군사적 긴장완화와 남북관계 개선 행위에는 보다 큰 경제적 이익이 따라 올 수 있으나, 북한의 도발이나 위험 행위에 대해서는 큰 경제적 손실이 초래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전략이 필요하다.) 북한의 협력에 대해서는 보상해 줄 수 있는 능력(경제력)과 도발에 대해서는 응징할 수 있는 능력(외교력, 군사력)을 겸비하여, 도발과 같은 상황이 발생할 경우, 경제 봉쇄 정책 등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의지를 가져야 할 것이다.) 경제적 협력이 지속되면 양국간의 상호 의존성이 심화되어 정치적 협력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 반대로 양국간의 정치적 상황 변화에 의해 경제적 협력관계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민의 정부는 지금껏 북한을 적보다는 동반자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경제 협력을 추진하여 왔다. .
목 차제 1 장 서 론 ....... 1제 2 장 역사 왜곡의 경과 ........ 3제 3 장 역사 왜곡의 실태 ........ 4제 1 절 임나일본부설제 2 절 조선 국호제 3 절 강화도 사건제 4 절 한국 강제 병합제 5 절 군대위안부제 6 절 한국 전쟁제 4 장 결 론 ....... 15개 요역사 왜곡은 예전부터 일어나고 있는 큰 문제 중의 하나이다. 새로운 경제의 강국으로 떠오른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고 동북3성의 조선족들을 대상으로 강압식 일체화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적 지정에서 북한과 동시에 고구려 유적을 등재시킨 중국은 바야흐로 위대하고 강한 중국 건설을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중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닌 일본, 유럽에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가 전 세계적으로 잘못 서술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것에 대해 안타까워할 뿐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 논문의 주제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서론부분에서는 논문을 쓰게 된 동기 및 일본의 교과서 제도와 교과서 검정 채택 과정, 새역모는 어떤 단체인가에 대해서 기술하였다.본론부분에서는 일본의 교과서 왜곡 과정에 대해 크게 세 차례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후쇼샤 교과서와 우리나라의 국사 교과서를 비교하여 일본이 어떤 부분을 왜곡하였는지에 대해 서술하였다. 왜곡 부분을 첫째, 임나일본부설 둘째, 조선 국호 셋째, 강화도 사건 넷째, 한국 강제 병합 다섯째, 군대 위안부 여섯째, 한국 전쟁으로 정하였다.‘새역모’에서 집필한 후소샤 교과서는 7개 출판사가 교과서전시회를 대비해 견본용 도서를 준비하는 동안 관행을 어기고 교과서를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교과서 채택을 위한 공정한 룰을 벗어나 여론몰이를 통해 채택과정에서 부당한 압력을 넣겠다는 계산이었다. 실제로 후소샤의 단행본 교과서는 50만부 이상이나 팔린 것으로 집계됐다. 교과서 전시회는 6월 중순에 시작되어 7월 중순에 끝났다.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는 교과서 채택기간으로서 향후 4년간 사용될 교과서를 8개 교과서 중에서 하나 채택하는 기간이었다. 결과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후소샤 교과서는 0.039%라는 미미한 채택률을 기록했지만, 기록에 보이지 않는 사실은 4년 뒤를 어둡게 하고 있다. 채택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원래 일본에서는 교과서 채택을 각 학교별로 하게 되어 있었고, 학교별 채택은 교과 담당 교사의 판단에 크게 의존하였다. 1963년 ?소중학교 교과서가 무상으로 배포되면서 학교별 채택은 채택구별 채택으로 변경되고 현장교사는 채택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채택구별 채택은 몇 개의 행정단위를 묶고 채택위원들이 하나의 교과서를 채택하면, 그 채택구 내의 모든 공립학교가 그 교과서를 사용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그 후 전일본교직원조합(이하 일교조)은 채택위원에 조합원을 추천하고, 도시부에서는 학교투표제를 만들어 현장교사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학교투표제는 각 학교에서 교과담당자를 중심으로 조사 ? 연구 ? 검토하여 사용하고 싶은 교과서를 13위까지 선택해서 직원회의에서 확인하여 각 교과마다 희망순위를 기입한 서류를 교장이 관할 교육위원회를 통해서 채택구별 교육위원회에 제출하고, 채택구의 교육위원회는 관내 학교에서 가장 선호하는 교과서를 선택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새역모’는 자기들이 만든 교과서가 현장교사들에게 큰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제도의 폐지를 ‘교육위원의 권한을 침범한다’는 이유로 각 지방회의에 일제히 청원했다. 그 결과 2001년 채택과정에서는 학교투표제 방식이 거의 폐지되 중?고 일관교육학교인 하쿠오(白鷗)고교부속중학교가 사용할 역사교과서로 우익단체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후소샤판을 채택키로 결정한 것이다.제 3 장 역사 왜곡의 실태건전한 민족주의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밝은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는 명분 아래 '자학사관'을 제거하고 집필했다는 게 이른바 후소샤 판이다. 이 교과서는 일본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팽창정책과 침략정책을 긍정적으로 서술하는 등 철저히 우익적 관점에서 기술함으로써 역사를 왜곡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한국합병이 동아시아를 안정시켰으며, 식민지배가 조선 근대화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대동아전쟁으로 표기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임나일본부존재 기정사실화와 종군위안부에 대한 기술 회피, 일본의 침략이 아시아 독립에 기여했다는 등 교과서 곳곳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특히 현재 검정 신청 중인 내년 개정판에서는 강제연행에 대해 ‘다수의 조선인이 끌려갔다’ 등 모호하게나마 일본의 책임을 인정했던 부분을 모두 삭제한 것으로 알려졌다.)후소샤 교과서의 역사 왜곡 부분을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와 비교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제 1 절 임나일본부설임나일본부설이란 일본의 야마토왜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는 설이다. 이것에 대한 우리나라 교과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팽창)4세기 초 미천왕 때에는 낙랑군을 공격하여 중국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았다(313). 그러나 고국원왕 때에는 서쪽으로부터 전연, 남쪽으로부터 백제의 침략을 받아 큰 타격을 받기도 하였다.이에 4세기 후반 소수림왕 때에는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진과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체제 정비에 힘썼다.이를 바탕으로 하여 광개토 대왕은 영토를 크게 넓혀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의 업적은 만주의 집안에 남아 있는 하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먼저《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적힌 내용을 보자.《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뒤 임나(任那:伽倻)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또한,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도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론되었다.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한편, 남조(南朝)·송(宋)·제(齊)·양(梁) 나라의 역사기록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기사도 들고 있다. 여기에는 왜왕이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이라는 관작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七支刀)도 왜의 군사적 우세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인정한 ‘번국(蕃國)’ 백제가 야마토조정에 바친 것으로 해석되었다.)그러나 ‘임나일본부’란 명칭은 《일본서기》의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기록에는 빈번히 나타나지만 한국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 존재 여부조차 의심되었고 이에 대한 반론들이 제기되었다.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던 ‘왜(倭)’의 문제의 총합으로서 제기되는 임나일본부 문제는 한국고대사의 복원뿐만 아니라 한일관계사 및 동아시아 역사상(歷史像)의 재구축과 올바른 한·일 관계 정립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이다.일본이 일부 검토 필요가 있는 부분만을 근거로 하여 한반도 남부가 자신들의 영역권 안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허황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가야는 엄연한 독립왕국이었으며 왜에게 철 자원 수출을 하는 등 대등한 무역관계를 해왔다. 이는 여러 느 나라와도 국교를 수립하지 않고 있었고, 미국이 강화도에서 물러난 1873년 이후 강화도 인근 해역에 대한 수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국교도 수립되어 있지 않은 나라의 해안을 근접하며 남의 나라 땅을 측량한다는 것은 국제법으로 보나, 당시의 우리나라 상황으로 보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우리나라 교과서에서는 강화도 사건이라고 부르지 않고 운요 호 사건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일본이 일으킨 공작에 의하여 개국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이렇듯 일본은 조선의 발포를 유도한 계획적인 군사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발의 주체, 목적, 경위 등의 사실을 은폐하였다. 이에 일본은 이미 군함이 '시위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군대와 교전하였다고 기술되어 있고, 또한 강화도 사건의 목적 등에 관하여 제도상 기술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제 4 절 한국강제병합일제는 1910년 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를 3대 통감으로 임명, 한국식민화를 단행하도록 하였다. 그는 막바지 준비작업으로 헌병경찰제의 강화와 일반경찰제의 정비를 서둘렀다. 경찰제의 정비는 1907년 10월 한국경찰을 일제경찰에 통합시켰는데, 1910년 6월 각서를 교환, 종래의 사법?경찰권 이외에 일반경찰권까지 탈취하여 완전히 그들의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일제는 이로써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할 시기만을 노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통감은 8월 16일,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그 수락을 독촉하였으며 같은 달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됨으로써 한국은 암흑의 일제시대 36년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런 한국 병합에 대해 우리나라 교과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을사조약과 민족의 저항)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을 강요하였다(1905). 이 때, 고종 황제를 비롯하여 내각은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 About Being John Malkovich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존 말코비치 되기』는 헐리우드 역사상 가장 특이한 소재를 영화에 대입시킨 최초의 영화가 아닌가 한다. 우선 단순한 코메디로 보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나 심오하다고 할까. 그 특이한 상상력과 주변을 단순히 보지 않는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이 영화를 감상한 후에 나의 기분은 마치 어떠한 환상적인 게임에 빠져들었다가 뛰쳐나온 듯 한 흥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하지만 즐거운 흥분 뒤에는 기호학과 철학, 정신분석을 넘나드는 온통 궤변들과 행동들의 여운으로 인한 정신적 혼란이 나를 덮쳐왔다. 영화의 겉모습은 환상과 섹슈얼리티라는 흥미있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속이 맛은 의외로 인간의 정체성과 무의식이라는 문제까지 파고들게 된다.붉은 커튼이 오르면 줄이 매달린 인형의 아름다운 연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인형의 연기는 단순한 즐거움이 아닌 듯 하다. 인형은 고뇌의 표정으로 거울을 보다 스스로의 놀람과 분노로 인하여 거울을 깨뜨리게 된다. 하지만, 이런 분열적인 모습이 나를 놀라게 하지는 않았다. 거울을 바라보는 주체 의 고뇌는 숱한 연극, 문학에서 거의 관습적으로 사용된 익숙한 장면이 아닌가. 스스로 자각하는 것은 저주이다 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인형에게 넣어주는 인형술사는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덥수룩한 수염에 안경 쓴 크레이그 슈바르츠(존 쿠삭)이다. 콘 에어, 시티 홀 등의 영화에서 매끄럽고 완벽한 도회 남자였던 존 쿠삭의 변신은 놀랍다. 크레이그의 아내는 한 술 더 뜬다. 어수선하게 엉클어진 머리와 너저분하고 촌스러운 옷차림의 카메론 디아즈 라니! 설정 자체가 약간은 엽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자각은 저주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의 핵심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달리 말하면 주체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실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사르트르는 근원적인 인간성은 없다고 말한다. 인간이 살아오면서 만들어 가는 것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다만 그가 스스로를 생각하는 그대로일 뿐 아니라 그가 원하는 그대로이다. 그리고, 사람은 존재 이후에 스스로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크레이그는 인형극을 좋아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 한다. 하지만, 그는 현실적으로 부인의 수입으로 살아가는 실업자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이 현실 세계에서 맞는 괴리감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즉 본질을 인형을 통해 확인하려는 것이다. 재능은 있는 듯 하지만 경제력이 없는 크레이그는 인형을 조절하던 빠른 손놀림을 인정받아 서류정리원으로 취업이 된다. 회사가 사용하고 있는 7과 1/2층이라는 공간은 무척 흥미롭다. 모두가 허리를 접고 다녀야 하는 불편한 공간. 소인국에서 걸리버가 겪었던 불편함과 같은 물리적인 차원일 수도 있지만 건물주가 당돌한 난쟁이 연인을 위한 공간으로 설립했을 때부터 난쟁이라는 전통적 타인의 그림자가 낮게 드리워져 있는 불편함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공간은 결핍 의 공간이다. 결핍은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다. 이 결핍의 공간, 7과 1/2층에서 크레이그가 발견한 비밀 통로는 타인의 무의식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 의 진입로이다. 7과 1/2층과 통로는 각각 결핍과 욕망을 영화적으로 시각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크레이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회의를 벗어나기 위해 타인의 무의식속으로 도피하려던 것은 아닐까. 그 비밀 통로는 존 말코비치라는 헐리우드 스타의 무의식에 연결되어 있고 크레이그와 크레이그의 아내, 라티(카메론 디아즈)가 말코비치의 의식속에 15분씩 들어가 본다. 크레이그는 자신이 짝사랑만 하여 애태우는 직장 동료 맥신(캐더린 키너)과 동업하여 이 통로를 이용한 신종 여행 사업을 시작하고 라티는 단 15분간 말코비치가 되어 본 후 자신 속의 남성을 깨닫고 성전환수술을 욕망하며 관능적이고 매력적인 맥신과 사랑을 나눈다. 라티와 맥신의 사랑은 정말 기발한 경계선, 혹은 고정관념의 파괴 이다.【말코비치의 의식을 차지한 라티(여성)+말코비치의 육체(남성)】이 맥신(여성)과 맺는 육체적 관계는 이성애인가 여성 동성애(Lesbianism)인가. 아님 양성애? 진보적 성 담론의 다양성을 향한 진일보 혹은 자유주의적 다원주의(Liberal-pluralist)를 이렇게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다니!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탁월한 상상력과 영화적 기법의 능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크레이그는 맥신을 사랑했는데, 오히려 라티와 맥신이 사랑에 빠지자 불같은 질투의 사로잡히게 된다. 그 사이에도 맥신과 라티는 말코비치의 육체를 통해 뜨거운 밀회를 즐긴다. 이에 크레이그는 아내 라티를 감금하고 말코비치의 몸을 빌어 맥신과 성공적으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인형을 움직이던 탁월한 솜씨로 말코비치의 무의식과 의식을 마음껏 조절하게 된 크레이그는 아예 말코비치의 머릿속에 주저앉아 살며 배우 말코비치가 아니라 인형술사 말코비치가 되어 버리고 맥신은 말코비치의 부를 탐내 크레이그인 말코비치와 결혼하게 된다. 인상적인 장면은 크레이그가 말코비치의 몸을 이용하여 즉 줄 인형대신 말코비치의 몸으로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인형 을 표현한 장면인데, 이 장면에서 어떤 전율과 같은 아름다움을 느꼈다.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가. 크레이그는 타인의 무의식을 통한 타인의 육체를 소유하게 되었지만 정작 자신의 정체성은 완전히 버릴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말코비치가 되어서도 자신의 인형극을 계속 해나가는 크레이그를 통해 정체성의 회의를 느꼈던 그였지만, 결국은 자신의 본 모습을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타인의 의식(크레이그)이 줄 인형처럼 신체(말코비치)를 지배한다. 무의식은 타인의 편지를 배달하는 배달부 였다. 사실 말코비치의 육체는 임시 방편일 뿐이다. 다른 누구의 몸일 수도 있었다. 크레이그는 맥신과 함께 사회적인 명성과 부를 얻게 되지만, 맥신은 라티와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라티 역시 맥신을 잊지 못하고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사실 크레이그가 발견한 말코비치의 비밀통로는 그의 직장 사장인 레스터의 통로였다. 레스터는 사실 그 건물주의 의식이 수많은 세월을 지나 레스터 에게까지 옮겨간 것인데 그가 다음으로 옮겨갈 육체가 바로 말코비치였던 것이다. 크레이그를 말코비치에게서 나오게 하기 위해 레스터는 맥신을 납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라티와 맥신은 말코비치의 수많은 무의식속을 누비게 된다. 결국 크레이그는 말코비치에게서 나오게 되고 통로의 규칙을 알지 못해 맥신의 딸의 무의식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영화의 결말이다. 그런데 이 결말 또한 흥미롭다. 크레이그는 딸이 되고 연인(맥신)과 부인(라티)이 엄마와 아빠가 된 것이다. 라티(여성〈남성, 양성〉가부장)과 크레이그(남성〈여성, 양성〉딸)?? 정말 대단한 관념의 파괴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