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g the dog나온지 꽤 지난 'wag the dog' 비디오는 글씨 한토막이 잘려나간 오래된 간판이 걸려있는 비디오 가게를 찾아내고 나서야 겨우 빌릴 수 있었다. 다행히 어렵게 찾은 그 비디오 가게에는 ‘JFK’ 와 ‘Wag the dog' 을 아직까지 버리지 않고 있었다. 요즘엔 비디오 가게들도 사람들이 많이 찾고, 최근에 나온 비디오들만 갖춰 놓는 가게가 많기 때문에 둘 중 하나도 아닌 두 비디오 모두를 갖춘 비디오 가게를 찾은 건 정말 행운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어쩌면 둘 중 하나만 있는 비디오 가게를 찾는 것이 나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비디오를 다 갖추고 있다는 것은 둘 중 어떤 것을 빌려봐야 하는 지에 대한 갈등을 가져다주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내 눈길이 자꾸 'wag the dog' 으로 향했다. 제목이 왠지 흥미로웠다. 다른 비디오 제목과 비교했다면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JFK’ 보다는 매혹적인 제목이었다. 5분쯤을 그렇게 고민했던 나는 결국 내 눈길이 원하는 데로 ‘Wag the dog’ 을 카운터 앞으로 가져갔다. 대여료 300원이라는 가격은 이 비디오가 얼마나 ‘구프로’인지 짐작하게 해주었다. 300원에 비디오를 빌릴 수 있다는 생각은 꽤 오랜 몇 년 동안 해보지 않았던 터라 적지 않게 놀라기도 했지만 과자 한 봉지 가격도 안 되는 가격에 비디오를 빌렸다는 것이 왠지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비디오에 테입을 넣자 비디오가 입을 벌려 테입을 먹어치웠다.비디오를 다 보고 난 지금 내가 느낀 것은 솔직히 좀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이다. 마지막 자막이 올라가는데 “뭐야, 이게 끝이야?” 하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처음 영화 시작 장면에서 ‘더스틴 호프만’과 ‘로버트 드니로’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꽤 유명한 배우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이 영화에 대해 왠지 모를 기대감이 들었다. 이 영화는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처음 시작이 조금 쌩뚱 맞았다. 보통 영화에서 앞에 전개 부분을 모두 잘라 버리고 점점 흥미로워지는 중간 부분부터 틀어놓은 듯 한 느낌이랄까. 영화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재선을 앞둔 미국 대통령의 인기는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그런데 반딧불 소녀단이 백악관을 방문 했을 때 대통령이 한 소녀를 성추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상대편 후보자에게 상당히 유리한 카드를 안겨준 셈이 되었다. 그러자 대통령 측은 이 사건에 대한 소리가 더 이상 나돌지 않도록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브린을 불러들인다. 대통령의 스캔들 사건을 잠재울 만한 것은 전쟁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그들은 알바니아를 상대국으로 하여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현실이 아닌 그들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했다. 이들은 미국의 온 국민들을 관객으로 하는 자신들의 영화를 더욱 그럴싸하게 포장하기 위해 연예사업가인 모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모스는 그들의 청을 받아들이고,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제작하기에 이른다.영화의 제 1막. 그들은 온갖 첨단 기술을 동원해 전쟁터가 된 마을 속에서 뛰쳐 나오는 한 소녀의 화면을 만들어 내고, 그 화면을 상영하였다. 이제 국민들의 관심은 전쟁이라는 이슈로 쏠리고, 신문에서 대통령의 스캔들 기사는 뒤편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대통령 측이 환호를 미쳐 다 터뜨리기도 전에 상대 후보 측은 뭔가 수상한 점을 눈치 채고, 이들의 영화에 맞선다. 그러나 모스와 브린은 영화를 점점 더 흥미롭게 진행시키고자 제 2막을 제작한다.영화의 제 2막은 전쟁 영웅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이들은 ‘낡은 구두’ 라는 별명의 슈만이라는 군인을 만들어내고 국민들의 마음을 한데 모은다. 치밀하게 음악도 제작하고, 낡은 구두를 나무에 걸어놓고, 슈만에 대한 이야기를 보도하는 등으로 이들의 영화는 성공하였다. 이제 국민들의 관심은 온통 전쟁과 전쟁 영웅 슈만에게 쏠렸고, 어느 신문에서도 대통령의 스캔들 기사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이어 국민의 동정심을 더 끌어내고 영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슈만을 알바니아로부터 미국으로 소환하는 것을 연출하기에 이른다. 그러다 슈만을 소환하는 도중 슈만이 사고로 죽게 되자 슈만의 완벽하게 전쟁 영웅으로 남게 되었다. 재선을 11일 앞둔 이들의 영화는 성공을 거두고 대통령은 재선되었지만 이 모든 공이 유치하기 짝이 없는 광고의 덕으로 돌아가자 모스는 격분한다. 결국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모스는 죽게 되고, 모스의 죽음은 심장마비로 포장된다. 이렇게 이들의 영화는 성공하여 대통령을 재선시키고 그 제작자는 죽음을 맞는 것으로 끝이 난다.
“우리는 매일 미국적인 것들을 소비한다. 좋든 싫든 오늘날 우리가 소비하는 대부분은 ‘미국산 Made in USA’이다.”이 책 표지에 쓰인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패권을 장악한 미국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외교정책 등은 전 세계인들의 삶의 패턴을 이끄는 문명이 되었다. 나는 외국에 가본 적이라고는 단순한 여행을 목적으로 일본에 일주일을 다녀온 것이 고작이다. 그 외에 따로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문화를 궁금해 한다거나 알고자 한 적이 없다. 때문에 다른 나라들이 얼마나 미국산을 소비하고 있는지에 대해 잘은 알지 못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사는 이 나라, 한국만큼은 충분히 미국산을 소비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고, 느끼고 있으며, 직접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소비하고 있는 것들이 미국산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을까? 아마 내가 그렇듯 다른 사람들도 크게 인식하고 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현재 우리나라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진 ‘반미’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과연 ‘반미’를 외치는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미국산을 소비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은 철저히 미국산을 거부하고 있다고 생각 할지 모른다. 또한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미국산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 모든 미국산을 거부 하고 있는 지에 대한 문제는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럼 미국산은 과연 무엇인가? 이 책에서는 미국산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고 있다. 다만 내가 느낀 대로 이야기 하자면 친절하지만 좀 어렵게 설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이 책은 나 같이 평소 ‘보수주의’니 ‘자유주의’니 하는 싸움이나, ‘반미’니 ‘친미’니 하는 단어들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는 조금이라기보다 아주 많은 어려운 말들로 가득하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의 이야기들 중에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던 내용들에 한하여 느낀 바를 온 다양한 인종들을 마치 용광로처럼 융화시켰다. 또한 미국이라는 한 국가에는 두 문화가 존재하고 그 문화들 간의 전쟁이 늘 존재하고 있다. 진화론과 창조론사이의 갈등이 존재하고, 동성애자들 간의 결혼 문제, 인종차별 문제, 무기 소지 문제 등 미국에는 수많은 갈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미국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신에 대한 공통된 신념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또한 이 모든 문제들은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끊임없는 논쟁의 주제가 된다.1970년대 이후 미국에선 조깅과 헬스가 아침마다 해야 하는 의무사항이 되었고, 조각 같음 몸에 대한 열기로부터 새로운 산업이 창출되었다. 이것은 정보화 경제의 시기이며, 자신을 들어내고자 하는 현대 사회의 모습에 의해 등장한 새로운 미국산이 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미국산은 비만이라는 전염병과 타협해야 한다. 이 문제에 관해 미국의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논쟁을 시작한다. 비만은 개인주의적 원인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사회문화적 원인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칼로리와의 전쟁은 시장에 의거할 것인가 국가에 의거할 것인가. 그것은 예측 할 수 없지만, 이 새로운 미국산은 다른 미국산이 그랬듯이 다른 국가에 수출 될 것이며, 기 소르망은 유럽이 이 미국산을 곧 수입할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미국에서 종교는 무엇인가? 그들에게 신은 ‘내 안에 있는 존재’이며, 신흥종교의 신도들은 내세를 기다리는 것 보다 현실 세계에서의 구체적인 결과를 선호한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십자가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며, 그들의 종교는 모든 다른 신앙을 제압하고자 열정적으로 포교되고 있는 또 하나의 미국산으로 등장하였다. 사실 이 책에서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나를 가장 지루하게 만들었다. 나는 현재 기독교인 이지만 종교라는 것은 단지 마음의 안식처가 될 뿐 그다지 흥미로운 존재는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적 문제, 즉 이 뒤에 다루고 있는 사형제도에 대한 논쟁이 더 흥미로운 소재로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뒷장의 . 그것이 보수주의 혁명이며, 사회보다는 개인을 강조했던 이데올로기가 모든 형태의 처벌과 집단적인 설명에 대해 개인의 책임을 내세웠다. 이러한 범죄의 처벌 문제는 무관용주의인 톨레랑스 제로라는 개념을 정착하게 만들었고, 톨레랑스 제로의 정책을 내세우는 것은, 문화와 새로운 경제사이의 간극에 의해 범죄를 설명하는 것 보다 좀 더 직접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여겨져 여론의 환심을 사기가 더욱 쉬웠다. 그 증거로 이 톨레랑스 제로 정책은 대서양을 건너 유럽에 전파되었다. 이 정책은 유럽에서 사회의 무질서들과 소수 외국인들의 사회편입으로 인한 문제들에 간편한 해결책이 되었다. 이따금씩 이와 같은 미국식 통제의 이데올로기는 미국을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 함으로써 생기는 폭력의 근원들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된다.수많은 인종이 모여 있는 미국에서 결코 끊이지 않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인종 문제이다. 인종차별은 과연 아직도 존재하는가? 평등의 나라로 불리기를 원하는 미국에서는 어떻게 인종에 따라 고려하는 제도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대답으로 소수자우대 정책과 다양성의 원칙이 제시되었다. 다양성이란 개념은 인종이란 개념보다 광범위 한데, 그 이유는 다양성의 개념이 역사적?문화적 경험을 참조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다양성과 소수자우대 정책도 미국산이 되어 유럽에 성공적인 수출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기 소르망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놓고 있다.미국의 정치적 경향은 어떠한가. 쉽게 이해하자면 유럽에서 정치 지도자들은 그들의 의무가 대중을 교육시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며, 미국에서는 정치 지도자들의 의무가 대중을 따라가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미국의 정치적 경향이 어떠한가에 대한 답을 가장 빠르고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하나의 성경이고 숭배의 대상이다. 이 같은 신앙 속에서 직접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보다 좀 더 진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만큼 이를 비난 할 수 없으며, 대중의 권리며, 미국인들은 유럽의 민주주의가 귀족주의적 경향을 지닌 것에 유감을 표명한다. 미국의 직접민주주의는 과연 민주주의인가? 또한 직접민주주의는 미국의 미래가 될 것인가?앞서 우리는 미국의 사회, 종교, 인종문제, 그리고 정치적 경향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우월한 위치에서 절대 내려오지 않는 미국의 경제는 무엇에 기초하는가? 그것은 자본주의에 의한 것인가? 시장에 재편입하기 위해 시장에서 재빨리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미국 모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기 소르망은 말하고 있다. 창조적 파괴라고 은유되는 이 원칙은 현재 경험상 빠른 성장과 완전 고용을 가져오는 유일한 원칙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원칙을 실행할 수 있는 모든 국가들이 그것을 시도하고 있다.드디어 나는 숨가쁘게 마지막 장에 도달했다. 기 소르망은 마지막으로 제국적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 이야기에는 굉장히 낯익은 소재들이 등장한다. ‘반미’와 남북 문제, 미군 철수 등이 그것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미국이 가져다주는 한국의 평화에 대해 우호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그들은 미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한국이 주체적으로 국가를 수호하기를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부터의 보호를 원하는 것인가. 그들은 미군 철수 이후의 국가 수호에 대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다른 대안들에 대하여 얼마만큼 확신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기 소르망은 이 상황을 큰 장기판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장기판 안에서 팩스톤은 없어서는 안 되는 말이며 그것을 치우면 세계 질서는 무너질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이 논리에 동의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나는 이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나는 지금의 한국 젊은이들이 모든 일을 재처두고 뛰어다니는 문제들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이것은 결국 내가 앞으로 한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21세기의 무지한 젊은이들 범주에 속한다는 부끄에 동의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내가 어설픈 보수주의자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은 그야말로 나는 정말로 어설프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논쟁거리들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반미’를 외치는 거리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들은 얼마나 미국에 대해 알고 있으며, 왜 지금 ‘반미’를 주장하는지, 그리고 그렇다면 당신들에게 미국이 아닌 다른 대안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그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모든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한다면 나는 정말로 어느 누구보다 무지한 젊은이 속에 포함 될 것이다. 그러나 무지한 나 자신에 대한 위로 일지도 모르지만, 거리의 모든 젊은이들이 나의 질문들에 명쾌한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거리의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나처럼 어설픈 것에 지나지 않거나 유행은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도록 길들여진 한국 젊은이들의 특성일지도 모른다. 거리의 행진의 선두에 서 있는 몇 몇 젊은이들까지 포함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몇 몇을 제외한 젊은이들에게 이 책을 주었을 때 그들 중에 몇 % 의 사람들이 이 책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비록 나 자신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들에게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 할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얘기하고 싶다. 그들이 하고 있는 ‘반미’운동은 어린아이들이 부모 몰래 하는 불장난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비록 이 책에서 기 소르망은 자신은 어느 입장인지 확실히 밝히지 않았고, 반미가 옳은 건지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듯하지는 않지만 Made in USA 가 무엇인지는 뚜렷이 전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한국의 젊은이들이 이 책을 소화할 능력이 된다면 그들은 미국산이 무엇이고, 그들이 좋든 싫든 얼마나 많은 미국산을 소비하고 있는지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책을 소화할 만큼의 능력을 지니지 못했지만 한국의 다른 젊 한다.
이 영화는 로만 폴란스키가 감독을 맡고, 애드리언 브로디가 주연을 맡아 2002년 제 55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고, 2003년 1월에는 전미영화비평가협회(NSFC)가 선정하는 최우수영화상·감독상·남우주연상(애드리언 브로디)·각본상(로널드 하우디)등을 수상하였다. 이 영화는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피아니스트 스필만이라는 실존 인물의 생애를 다룬 영화로 그 감동을 더 하고 있다. 내가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피아노를 통해 흘러나오는 예술적 소재와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소재가 함께 다루어져 그 감동이 더욱 오래 남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개인적으로 나는 이 영화를 벌써 3번째 보는 것이다. 처음에는 주위 사람들이 이 영화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을 보고 영화를 선택하였고, 두 번째는 부모님께 이 영화를 추천해 드리면서 다시 한 번 감상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지금의 이 레포트를 쓰기 위해서 이 영화를 또 한번 뽑아 들었다. 벌써 3번이나 보았지만 이 영화는 좀처럼 지루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에 다시 보면서 몰랐던 상황들이 눈에 들어오기까지 했다. 아마도 이번 학기에 수업을 통해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에 대해 공부하고 나니 영화에서 말하는 것들 중 더 자세하고 깊은 것까지 보이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통해 모르고 보는 것과 알고 보는 것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 직접 느끼게 되었다.영화는 1939년 폴란드의 바르샤바라는 지역에서부터 시작 된다. 물론 주인공은 블라덱 스필만이고, 그는 폴란드 라디오 방송국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다. 처음 바르샤바가 폭격 당했을 때 스필만의 가족들은 빨간 드레스와 챙 넓은 모자 따위를 챙기기에 바빴다. 그들은 앞으로 조그만 캬라멜 한 개를 6조각으로 나눠서 먹어야 할 수 밖에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의 상황이 그냥 잠시 스쳐가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시내의 카페에도 공원에도 들어 갈 수 없었고, 보도로 다니지도 못했으며, 도랑으로 다녀야 했다. 곳곳에서 유대인을 거부하고 있었고, 스필만의 가족들이 바로 유대인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이 많은 부를 누렸다는 것을 보여주듯 스필만의 가족도 경제적으로 넉넉했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다.1940년 10월 31일 그들은 바르샤바에 사는 유대인들을 수용하는 수용소로 이주하였다. 그 시기의 장면들 중 가장 당시 상황을 잘 말해주는 장면은 소매치기가 바닥에 쏟아진 스프를 허겁지겁 먹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 장면은 소매치기가 얼마나 굶주려있었는지를 보는 이에게 뚜렷이 전달하고 있으며, 그 음식을 빼앗기고 흐느끼는 여인을 통해 이 음식이 그 여인에게도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인지를 표현 하고 있었다. 비록 남의 음식을 빼앗으려던 소매치기지만 그는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본격적으로 스필만의 외로움과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은 동부노동수용소로의 이주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이다. 스필만의 가족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동부노동수용소 즉, 죽음의 용광로를 향한 기차에 몸을 싣고 있을 때, 스필만은 지인의 도움으로 그 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제부터 스필만은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남아 독일군과, 외로움과,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프고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장면들은 유대인들이 무참히 죽어가는 모습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홀로 남은 스필만이 피로 물든 시체들이 널려져 있는 텅 빈 거리를 헤매는 장면과 영화의 거의 끝쯤에서 다리를 절며 폐허가 된 건물 사이를 헤매는 스필만의 모습을 담은 장면이 가장 슬프고 가슴을 저리게 했다. 또한 그 장면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은 내 눈으로부터 눈물을 불러내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는 영상들과 더불어 슬프고 자유를 부르짖는 듯한 음악들이 매우 인상적이고 영화의 감동을 더 해준다.스필만의 은신은 재니나와 안드레이 부부, 그리고 도로타와 그의 남편의 도움으로 계속 될 수 있었다. 스필만이 도로타와 재회하는 장면에서 나는 인간의 혈통이 바꾸어 놓은 스필만의 상황이 마음으로 와 닿았다. 도로타와 스필만은 전쟁이 나기 전에 분명 둘 다 음악을 했고, 쇼팽을 좋아하고, 서로에 대해 좋은 감정을 느끼는 공통점을 갖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이라는 혈통, 그 혈통의 차이가 한명은 피신자로, 또 한명은 피신자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주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것을 느끼자 나는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이 두 인물의 상황은 지금 내가 나와 차이가 없다고 느끼고 있는 내 주위의 사람들이 어느 한순간 내가 감히 어울릴 수 없는 존재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하였다. 그 순간 내가 얼마나 비참할지.. 정말 끔직한 상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스필만에게는 비참하다는 생각조차 사치일 것이다. 그는 오직 살아야한다는 마음 외에는 다른 마음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을 것 같이 느껴진다.두 번째로 마련된 그의 은신처의 문이 열리고 카메라 렌즈가 은신처 안으로 들어왔을 때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바로 피아노였다. 피아노와 스필만이 거의 3년 만에 만나게 되는 재회의 장면이다. 스필만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하얀 건반과 검은 건반이 화면에 들어왔다. 맑은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울림은 오직 스필만만이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스필만 가슴속에서 울려 퍼지는 피아노의 선율이었다. 카메라가 피아노 건반 위의 허공을 움직이는 스필만의 손을 잡았을 때 그의 손은 건반 위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었고, 그의 눈은 감겨져 있었으며, 그의 입가에는 어렴풋이 미소가 스쳤다. 그리고 스필만의 가슴에는 자신이 허공위에서 연주하는 음악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이 장면에 대한 묘사를 아끼지 않는 것은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감동받은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에 이 영화를 다시 보기 전에 이 영화를 2번 감상하면서 이 장면만큼은 늘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다시 보는 내내 이 장면이 나오기를 한편으로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이 장면은 수용소로 이주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스필만의 생활 중에 처음으로 스필만의 감정이 겉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장면 같아 스필만의 마음이 나에게 전해지는 순간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한 피아노를 앞에 두고도 소리 내어 연주 하지 못하는 스필만의 상황이 극적으로 표출되는 장면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가 어느 순간보다 애처롭고 안쓰러워 보인다.
이 영화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원작 소설 ‘닥터 지바고’를 영화한 것으로, 1965년 미국에서 제작되었으며, 데이비드 린이 감독을 맡아 아카데미 각본상·오리지날 작곡상·촬영상·미술상·의상상 부분이 5개 부문을 수상했다. 또한 이 영화는 주연을 맡은 오마 샤리프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영화이기도 하다. ‘닥터 지바고’는 오마 샤리프의 대표적인 출연작이며, 이 영화에서 오마 샤리프는 ‘토냐’와 ‘라라’라는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남자의 연기를 훌륭히 해냈고, 그는 1966년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여자 주인공인 줄리 크리스티의 어딘가 모르게 슬픔에 젖은 듯한 파란 눈동자와 훌륭한 연기 역시 보는 이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할 만 했다.이 영화는 광활한 러시아를 배경으로 러시아 혁명 전후의 상황을 그리고 있으며, 하얀 설원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영상이 영화 속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그 영상은 이 영화의 성공에 충분히 기여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상당히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특히 이복형의 도움으로 우랄지방을 통과하는 열차를 타는 장면에서 열차가 하얀 설원을 달리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면을 담고 있는 듯 보인다. 또 바리키노에서 지내던 유리의 집 창문에 얼은 얼음 결정을 담은 화면은 아름답다 못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이 영화는 무려 3시간짜리의 영화인데 3시간이라는 상영 시간 동안 중간 중간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이 영화의 감동을 더 해준다. 이 음악은 지금까지 사람들이 많이 찾는 노래로 그 영화만큼이나 유명해졌다. 영화 중간에 이 음악을 흐르게 한 것은 그 장면을 더 인상적인 장면으로 만들게 되고, 더 로맨틱하게 느껴지게 하며,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게 한다. 또한 아름다운 설원의 장면들과 이 노래가 함께 흐르면 그것은 마치 화랑에서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노래와 함께 멋진 그림 한 폭을 보는 듯한 착각을 들게 하기도 한다. 그 만큼 배경음악은 이 영화에서 빠져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부분이고,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을 수 있었던 요소 중에 하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영화는 현재에서 과거로 이어지며, 시간적 공간을 뛰어넘어 다시 현재로 돌아온 뒤 이야기의 끝을 맺고 있다. 과거 부분에 그려지는 이야기는 어머니가 사망한 뒤 어머니의 친구 부부인 그로메코가에 입양되어 시인이자 의사로 성장하여 살아가는 유리(지바고)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유리가 어느 정도 성장했을 당시 시대적 상황은 러시아 혁명에 시동이 걸리기 시작하고 있을 때였다. 사람들은 혁명을 위해 행진했다. 그 행진의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라라의 약혼자 파샤였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뒤에서 행진을 소극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유리였다. 혁명에 있어서 그 두 사람의 모습은 상당히 대조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파샤는 혁명을 위해서 앞으로 달려 나갔고, 유리는 가족과 사랑하는 라라를 위해 혁명을 피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파샤가 라라를 찾아가던 중 자살하여 죽음을 맞이한 것과, 유리가 라라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달려가던 중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그들이 죽음이라는 마지막 순간에 라라를 향하고 있었다는 점은 혁명에서 대조된 두 남자를 하나로 묶어 주기도 한다. 파샤와 유리는 혁명이라는 혼란 속에서는 대조적이었지만 ‘라라’라는 한 여자를 사랑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혁명의 결과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유리가 군의관 생활을 마치고 가족에게 돌아왔을 때의 장면이다. 집은 더 이상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고 나누어 갖은 공간이 되어있었다. 그들 사회에서 이제 더 이상 부르주아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개인 생활 역시 존재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개인주의는 존재 할 수 없었다. 아니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이 영화는 러시아 혁명이라는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유리와 라라의 운명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 혁명의 혼란 속에 유리와 라라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도 언제 말려들지 모르는 태풍 의 소용돌이 앞에 서 있는 듯 불안해 보였다. 그들의 첫 만남은 유리 혼자만의 것이었으나, 그들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군의관과 종군간호부로 6개월 간 함께 지내며,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지만 유리는 토냐와 그의 아들에게로, 라라는 그녀의 딸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따라 이별한다. 두 연인은 유리아틴에서 재회하고, 다시 한 번 사랑을 확인한다. 그러나 유리는 아내로서 토냐 역시 사랑하는 듯 해 보이는데, 여기서 두 여자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연기를 오마 샤리프가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 것이다. 라라에게 이별을 고하고 돌아가는 도중 빨치산에게 붙잡힌 유리는 그들의 군의관으로 2년 동안 생활하다가 가족들에게로 도망치는데 그의 가족은 바리키노를 떠나고 그가 찾아갈 곳은 이제 유리아틴에 있는 라라 밖에 없었다. 추운 눈밭을 헤쳐 라라에게 찾아온 유리의 모습을 통해 아름답게만 보이던 설원의 추위가 유리에게 얼마나 무서운 고통으로 다가왔을지 짐작하게 해주었다. 그의 얼어붙은 얼굴을 보니 그 추위가 나에게까지 전해지는 것 같아 오싹함이 느껴졌다. 한동안 유리아틴의 보금자리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들은 자신들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 속에 있게 된다. 위험을 피해 바리키노에서 시간을 벌던 그들은 잊고 싶은 기억속의 인물인 코마로프스키의 도움으로 라라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그때 라라는 유리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고, 유리는 기꺼이 라라를 피신시키고 홀로 남는다. 그것이 그들이 함께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이었다.유리의 또 하나의 사랑이었던 토냐는 매우 좋은 사람이라고 라라의 입을 통해 묘사되고 있다. 토냐는 바리키노에서 유리가 빨치산에게 붙잡혀 실종 되었을 때 라라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녀는 바리키노를 떠나서 언젠가 돌아올지 모르는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라라의 주소로 남편의 이름의 이름이 쓰여 져 보내진다. 자신이 사랑하던 남편이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음에도 토냐는 질투심에 휩싸인다거나 하지 않았던 듯 해 보이지만, 아마도 그녀는 라라를 인정하기 위해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라 짐작 됐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겠다고 말하며 유리아틴으로 향하던 유리의 뒷모습이 토냐가 본 유리의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말았다. 비록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긴 했지만 토냐는 유리의 아내로서, 유리의 두 핏줄의 어머니로서 그녀의 삶을 살았고, 그것은 결코 라라의 삶 보다 의미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쥐 >아트 슈피겔만의 작품 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학살을 그린다. 아트 슈피겔만은 적어도 내가 읽어봤던 작품들의 작가들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그 내용을 그리고 있었다. 작품 는 이 점에서부터 나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아트 슈피겔만은 등장하는 사람들을 모두 동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유태인 학살의 내용을 전하는데 만화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 바로 이런 점들은 내가 아닌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새롭게 느껴졌을 것이다. 아트 슈피겔만은 유태인 학살에 대해 다루면서 그 안에 있는 자신의 가족사를 얘기한다. 아니 어쩌면 가족사안에서 유태인 학살을 얘기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든지 이 책은 아트 슈피겔만의 아버지 블라덱의 입을 통해 2차 세계대전의 처참한 상황을 전해준다. 이야기는 아티(아트 슈피겔만)가 하루하루 아버지를 찾아가 그 당시 아버지의 경험담을 듣는 것을 통해 전개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아트 슈피겔만은 상당히 솔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버지의 너무나 빈틈없고 구두쇠스러운 모습에 반항하고 그런 아버지를 지긋지긋해 하는 자신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있는 그대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블라덱의 구두쇠스럽고 늘 잔소리만 늘어놓는 행동들을 책으로 접하는 나 조차도 그런 그에게 거부감이 들었는데 아마 실제로 그의 옆에 있었던 아티는 더 끔직 했으리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블라덱의 행동들이 2차 세계대전 당시 그가 겪은 고통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게되자 점점 그를 동정하게 되었다. 먹을 것이 늘 부족하고 나중을 위해 늘 아껴야 하는 것만이 그가 살수 있는 길이었다는 그런 사실들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말하려는 만큼 블라덱을 가엽게 바라 볼 수만은 없었다. 어쩌면 그의 최후까지의 생존은 그의 재산이 남겨준 것일지도 모른다고 보여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쟁 전 부유했던 다수의 유태인들이 무자비하게 죽어가기도 했지만 어쨌든 불라덱이 살아남기 위해 힘쓰는 과정에서 그의 재산이 한 몫을 단단히 한 것은 자명한 사실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그가 돈이 많은 경영인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가 살아남는 과정에서 그에게 도움을 주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을 알 수도 없었을 것이며 그가 여러 나라의 말을 공부 할 여건이 되지 않아 외국어를 잘 하지 못 했었다면 그는 몇 차례나 죽을 고비가 있었을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 그가 영어를 가르쳐주는 대가로 그이 카포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을 상상해보는 것 같이 말이다. 물론 돈 뿐 아니라 그는 뛰어난 두뇌가 있기도 했지만 그 전에 그를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 다름 아닌 돈이라는 것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아마 가난했지만 영리했던 다른 누군가의 생존이야기를 다루었다면 더 큰 감동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느낀 것은 이것만은 아니었다. 한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배워놓고 만약을 대비하여 늘 준비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라는 거였다. 블라덱이 때로는 함석장이가 되기도 하고 제화공이 되어 위기를 넘기듯이 말이다. 나는 지금껏 어떤 일에든 무방비한 상태로 살아왔다. 뭐든 일이 닥치면 그 순간순간 해결하기 바빴고 정작 어려움에 닥치면 당황하고 현실을 피하려고만 했던 것이다. 그런 점은 블라덱에게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블라덱은 늘 나중을 위해 대비했고 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항상 머리를 굴렸기 때문이다.이 책에서도 알 수 있듯이 2차 세계대전이 끔직 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살아남았다는 것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게된다. 전쟁은 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빼앗아 간다. 그의 가족들, 그의 친구, 그의 재산, 그리고 그의 행복.. 나는 도대체 누구에게 이런 것을 빼앗아갈 수 있는 권리가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죄 없는 사람들을 가스실에 집어넣어 죽이고, 목매달아 죽이고, 때리고 밟고 총으로 쏘아 죽이기까지.. 도대체 그 누구에게 이러한 권리가 있다는 것인가? 독일인들이 너무나 증오스럽고 미웠다. 죽음의 두려움과 하루하루의 고통에 못 이겨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그의 자식들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자식까지 약을 먹이는 어머니의 심정이란 지금의 나로서는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도 알 수 없는 그런 사랑일 것이다. 또한 그런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서로 살려고 발버둥 치는데, 동료를 밀고하고 탈출을 시도하며, 뇌물을 받치고.. 결국 최악의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깨끗할 수만은 없었다. 나는 그런 모습에서 인간의 한계를 느꼈다. 또한 나는 그런 학살을 받은 블라덱도 결국 흑인을 차별하는 장면에서 그러한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리곤 결국 사람이란 어떠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자신이 받은 상처는 고통스럽지만 자신이 남에게 주는 상처는 자신에게 별다른 느낌을 주지 못한다는 것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받은 상처를 남에게 똑같이 되돌려주는 것... 슬픈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런 어마어마한 희생자들을 남긴 이 전쟁이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당시에 이 전쟁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졌다. 이 전쟁을 통해서 당신들이 얻은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당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흐느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죽은 사람들보다 살아남아 그 가족들을 잃은 슬픔에 흐느끼고 있는 생존자들의 슬픔이 더 많이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는 그들의 생활을 감싸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그 시대를 겪은 사람들이 얼마 남아있지 않겠지만 나는 그들에게 더 이상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서 시달리지 말고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 죽은 자들을 대신해서 더 멋진 인생을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나도 그 죽어간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더 멋지고 아깝지 않은 시간을 보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라는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때의 유태인 학살을 통해 전쟁에 대한 인간의 고통을 전해주었고 또한 그것을 위 세대로부터 이어받는 그 후세의 솔직한 모습을 나에게 보여줌으로 나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