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6편 1-10절 먼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인은 1절과 2절에서 자신은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 말씀을 보면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또 자신의 평생에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시를 듣는 청중들을 향해서 말을 하는데요, 3절과 4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아멘시인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우선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귀인이라는 것은 공동번역성경을 보면 권력가 라고 번역을 하고 있고, 새번역 성경에서는 힘이 있는 고관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귀인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힘이 있는 자들을 뜻합니다. 세상의 힘을 가진 자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세상적으로 힘이 있어보이는 자들을 의지하지 마라, 신뢰하지 마라, 라고 오늘 날 우리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마라, 라고 하는데, 개역개정 성경에는 인생으로 번역을 했지만 원어를 보면 사람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도울 힘이 없는 사람의 아들, 이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우리를 도와 줄 수 있을 것 같고, 굉장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도울 힘이 없는 것이 사람이니,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상적으로 힘이 있는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4절에서 말해주는데요 바로 숨이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힘이 있고, 불가능한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그들은 죽으면 고작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이기에 그들을 의지하지 말아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3절과 4절을 다시 정리를 하자면 세상적으로 힘이 있어 보이지만 결국엔 유한한 이 인간들을 의지하지마라, 이 말을 바꿔 말하면 무슨 말입니까? 무한하신 하나님을 의지해라! 이렇게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여러분은 무엇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유한한 세상적인 것들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힘이 있는 세상 사람들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돈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좋은 대학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친구를 의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무한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쉬고)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도 의지하고 있습니까, 한글자 차이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우상숭배의 죄는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우상숭배는 하나님과 함께 다른 신들을 섬긴 것입니다. 그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면서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그들을 섬긴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도 믿고 의지한 것입니다.우상숭배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도 믿으면서 세상의 것들도 같이 의지하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도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한 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이어서 오늘 시인은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3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바로 5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소망으로 두는 자는 복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이 무엇일까요 여러분, 구약성경에서는 복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는데, 원어를 살펴보면 본문마다 이 복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다릅니다. 실제로 우리는 복이라고 하면 물질적인 복, 창대해지는, 번영하는, 이런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때 쓰이는 히브리어는 바룩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쓰인 단어는 아쉬레이 라는 단어입니다. 이 히브리어의 뜻은 행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기쁨, 즐거움, 행복을 나타내는 단어가 바로 이 아쉬레이라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자는 행복하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여러분 왜 공부합니까? 왜 좋은 대학에 가려고 합니까? 사실 행복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행복할 수 있는 비결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자는 행복할 거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여러분, 행복하고 싶습니까? 날마다 즐거움, 기쁨, 이 행복감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싶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유한한 세상적인 것들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무한하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는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말하는 시인의 두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6절말씀입니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두 번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바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향한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 해야 합니다. 예를들어 자동차를 만드는데도 그냥 만들지 않습니다. 설계도가 있습니다. 만드는 순서가 다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사람이 설계도를 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동차를 만든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자동차가 안전할까요? 그 자동차가 제대로 굴러가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죠,우리가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 인생을 향한 완벽한 설계도를 가진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설계도를 보지 않고 자동차를 조립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망가진 자동차와 같이 고장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여러분, 하나님께서 정말 이 세상,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혹시 교회에 와서는 창조론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진화론을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창조 신앙인데요, 신앙생활을 하는데 이 창조신앙이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창조 신앙이 바로 믿음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창조신앙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가능하지 않습니다.처음 교회에 나와서 성경공부를 하거나, 성경을 읽으면 믿기 힘든 부분들이 참 많습니다. 제일 큰 사건만하더라도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 사건이죠, 동정녀에게서 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또 3일 만에 부활을 하셨다. 이러한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 겁니다. 이것뿐입니까, 많은 기적들도 믿기지가 않죠, 하나님께서 바다를 가르시고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른 바다 길을 걸어서 건너가고, 절대 무너지지 않는 성을 그저 사람들이 그 성 주위를 돌자 성이 무너지고, 사자 굴에 사람이 던져 져도 죽지 아니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 오래된 병자들을 고치시는 예수님,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예수님,성경에 나오는 상식을 초월하는 모든 일들을 믿는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창조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그 믿음이 없기에 초자연적인 모든 일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동정녀의 몸에서 나신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바다를 가르시고 구원하신 것을 믿으십니까? 성경에 나오는 모든 초자연적인 사건, 기적들이 믿어지십니까?
시편 23편 1-6절. 여러분의 소원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우리는 사실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하면서 살아갑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당장 뭐가 필요하냐고 물으면 줄줄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인데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시인은 1절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데요 뭐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1절 말씀 다시한번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이 고백이 오늘 날 우리들의 고백이 되기를 정말 소망하는데요,시인은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I shall not want’ 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없다는 거죠, 시인은 부족한 것이 없다, 나는 원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에’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기에 자신은 부족한 것이 없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이 말은 상황과 환경이, 조건들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4절과 5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위험한 골짜기를 다니기도 했고, 원수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그런 힘든 상황에도 놓여있었다. 그래서 상황적으로 완벽하고 자신이 만족하고 있다는 고백이 아닙니다. 상황이 어떻든 간에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기에! 자신은 만족하고 감사한다는 것입니다.여러분, 하나님이 목자라는 것은 시인 자신은 뭐라는 겁니까? 바로 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자이시고 나는 양이다, 와닿습니까?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목생활을 해왔었기 때문에 양과 목자라고 하면 이해가 확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의 목자이시다, 라고 하면 와 닿는게 우리와 다르다는 거죠, 우리는 사실 살면서 양을 쳐본적도 없고, 양을 사실 보기도 힘들자나요,이제 2절부터는 하나님이 어떤 목자이신지를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2절과 3절 말씀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하나님은 어떤 목자인신가? 먼저 2절에서는 양인 시인을 푸른 풀밭과 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양에게 풀밭과 물가는 어떤 곳이겠습니까? 음식이지 않습니까,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자신을 먹이고 살리시는 분이시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중동 지역은 푸른 풀밭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지만 좋은 목자란 바로 양들을 먹일 수 있는 이 풀밭과 물가를 아는 목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목자가 바로 좋은 목자입니다.실제로 양들은 겁이 많아서 흐르는 물은 먹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에게 물을 먹이는 방법이 세가지라고 하는데, 첫 번째는 아침에 풀에 있는 이슬을 먹게하는 방법, 두 번째는 고인 물을 찾아서 먹게하는 방법, 세 번째는 흐르는 시냇물에 가서 목자가 직접 돌들로 물을 막은 다음에 양들에게 손으로 떠서 먹이거나 그 막은 물을 먹게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직접 목자의 손길로 양들을 먹이는 모습이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그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이렇게 양에게 풀과 물을 공급해주시고, 3절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우리의 영혼을 소생, 회복 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지난 주도 이야기 했는데, 여기서 영혼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네피쉬라는 단어는 영적인 것을 강조하는 단어는 맞지만 그 단어 안에 육체, 생명 이런 뜻이 다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전 인격적인,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다 회복시키시는 이미지를 그리고 있구요, 또 하나님은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우리를 정의롭고, 바른 길, 깨끗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어떤 목자이시냐, 바로 양의 전 모든 부분을 회복시켜 주시고, 또 양이 위험한 길로 빠지지 않게, 바른 길, 깨끗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시기에 시인은 부족함이 없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또 우리의 모든 부분을 회복시켜주시며, 또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바로 인도하신다는 단어인데요, 히브리어로 ‘나하’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요, 이 ‘나하’라는 단어는 인도하다라는 뜻과 함께 앞서가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가시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는 모습이 바로 인도하신다는 말의 이미지라는 것입니다.그런 의미에서 순종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겠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먼저 걸어가신 그 길을, 예수님께서 먼저 걸어가신 그 발자취를 따라서, 우리가 똑같이 걸어가는 것이 바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우리는 때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굉장히 외롭고 고독한 길이라고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은 굉장히 좁은 길이고 너무나도 힘이 든 길이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맞습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좁은 길이고 힘이 듭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앞서 걸어가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또 우리는 하나님께 개인적인 명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닌데, 나에게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무언가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굉장히 나 혼자 힘이 든 것처럼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앞서 걸어가시고 우리는 그저 뒤따라간다는 겁니다.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아! 하나님께서 항상 나보다 먼저 앞장서서 걸어가고 계시는구나, 나는 그저 그 하나님께서 먼저 가신 그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구나, 나 혼자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구나, 나혼자 걸어간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구나! 이렇게 힘이 들 때마다, 내 혼자라고 생각이 들때마다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이어서 4절, 5절 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여러분 여기서 이상한 부분이 느껴지십니까? 뭐가 이상한가요?하나님이 목자이시고 우리가 양인데, 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을 수 있죠? 하나님이 잘못 인도하신건가요? 아니면 하나님이 일부러 그런 곳에 우리를 두셨을까요?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치는 것에 대해서 이해가 필요한데요, 실제로 이스라엘에서 양을 치는 것은 두 시기로 나뉩니다. 겨울에서 봄까지 양을 칠 때는 하루거리 안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만큼 양을 데리고 나갑니다. 그런데 여름에서 가을, 이 시기에 양을 칠 때는 양들을 데리고 몇 달씩도 유목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한 지역에가면 얼마 안지나서 풀들이 없을꺼자나요, 그러면 목자는 다른 목자에게 양들을 맡겨놓고, 다른 곳을 찾아 나섭니다. 더 좋은 곳이 없는지,
시편1편 1-6절. .여러분, 행복 하고 싶습니까? 행복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고 돈을 많이 벌고 싶은 것도, 또 좋은 대학에 가고 싶은 것도, 내가 원하는 직업과 직장을 가지고 싶은 것도 모두 사실 행복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오늘 말씀인 시편 1편에서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시편 1편의 말씀입니다. 처음, 그리고 시작이 중요하다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알 것입니다. 1편부터 150편까지 있는 시편을 시작하는 시인 오늘 본문 말씀은 시편의 문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시입니다. 그리고 그 시를 시작하는 첫 단어가 무엇입니까? 네, 바로 ‘복있는 사람’이라는 단어입니다. 복, 여러분 복이라고 하면 머가 제일 먼저 떠오르세요? 물질적인 복, 현실적인 복, 이러한 것들,구약성경에는 복이라는 번역되는 단어가 두가지가 있는데, 히브리어로, 바룩 이라는 단어와 에쉐르 라는 단어입니다. 바룩이라는 단어는 현실적인 복을 의미합니다. 쉽게 이해하는 물질적인 복을 의마힙니다. 에쉐르라는 단어의 의미는 행복입니다.오늘 본문 1절에 쓰인 단어는 에쉐르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사실 오늘 본문은 복있는 사람은 이라고 되어있지만 더 정확하게 번역을 한다면 ‘행복한 사람은’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행복은 어떤 행복이냐?신명기 33장 29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이스라엘을 향해서 왜 행복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원해주시고, 너희의 방패와 칼이 되어주시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말하는 행복, 에쉐르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방패와 칼이 되어주시는 그 때 느끼는 행복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시고, 나의 방패와 칼이 되어주시는다는 것을 경험했을 때 느끼는 그 행복!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그리고 1절에서는 그 행복한 사람은 세 가지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1절 말씀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먼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꾀라는 것은 계획을 말하는데요, 다시 말해서 악인들의 계획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 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친구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친구들이 ‘이거하자’ 라고 했을 때, 아 저거 하면 안되는건데, 좋은 행동은 아닌데, 이런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아닌가요? 목사님 친구들만 이상했던가요?^^그런 상황에서, 분명히 옳지 않은 행동을 제안할 때 그것을 따르지 않는 것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표현을 하고 있는 곳이 있는데요 바로 여호수아 9장 14절 말씀입니다.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이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 하면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가서 이제 그곳에 거주하던 민족들을 하나님께서 다 멸하라고 명령을 하셨기에 전쟁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대가 너무 강하다는 소식을들은 기브온 족속이 자신들이 다 죽을까봐 이제 꾀를 냅니다. 아주 멀리서 온 것처럼 분장을 한 다음 여호수아를 찾아가서 자신들이 아주 멀리서 왔는데, 자신들을 종으로 삼아달라고, 계약을 맺자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호수아는 그 기브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수락을 하는데, 그 수락을 하는 장면이 바로 14절의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같이 읽을까요?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어떻게 여호수아가 가나안 족속들을 다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기브온 족속들의 말에, 꾀에 넘어가게 되었습니까? 바로 하나님께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서 여러분, 악인들의 꾀에 따르는 삶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께 묻지 않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행동을 할 때, 무언가를 선택하고 따를 때,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께 물으면서 행동하고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면, 악인들의 꾀를 따르는 삶을 사고 있는 것입니다.더 무서운 것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르는 삶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절에서 뭐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이렇게 말하는데, 따르고, 서 있고, 앉는다. 이것은 바로 죄에 빠져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처음에는 계획에 따르다가, 어느새 그 길에 서 있다가, 결국에는 죄의 자리에 아예 앉아 있는 모습, 정말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성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사람은 이런 죄의 길을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이제 2절에서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고 있는데요, 2절 말씀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것은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인데요, 주야라고 하면 이제 하루 24시간 내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시니깐, 시적으로 이해를 해본다면, 주야, 라고 하면 이제 밝을 때나 어두울 때를 의미하니깐, 내 인생에서, 내 삶에서 밝을 때나 어두울 때나, 내가 즐거울 때나 힘이 들 때나,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언제? 내 인생이 밝을 때나 어두울 때나 항상!이제 중요한 것은 묵상하다 라는 단어인데요, 여러분, 묵상하다라고 하면 어떤 의미로 받아 들여집니까?먼가 조용한 곳에서, 기도원 같은데서, 먼가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경건하게 읽는 것이 떠오르지 않습니까,이 묵상하다 라는 히브리어 단어 하갈는 3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 찬양하다, 그리고 사자가 자기가 잡은 먹이를 두고, 으르렁거리다,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무엇이냐, 마치 사자가 자기가 잡은 먹이를 두고 으르렁거리듯이, 성경을 맛보고, 음미하고, 그 달콤하고 향긋하며 입에 침이 고이게 하는 단어들을 기대하고 받아 먹으면서 그것이 나의 일부가 되는 것, 여러분이 마치 치킨을 먹는 모습을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여러분 성경을 읽는 것이 치킨을 먹는 것처럼 기쁩니까? 즐겁습니까? 마치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보면서 으르렁거리는 모습과 같습니까? 그것이 바로 묵상이라는 것입니다.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울 때나 힘이 들 때 묵상하는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실 때 마치 사자가 먹이 앞에서 흥분하고 기뻐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국 에쉐르, 행복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9-20절. 오늘은 부활절 기념 주일로 지킵니다. 원래는 4월 둘째 주에 부활절로 드리는데, 이번에 코로나 19사태로 인해서 부활절 기념 예배를 미루었고, 오늘 이렇게 부활절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오늘 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는지를 살펴보기 전에 앞서서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참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사실 믿기 힘든 사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프랭크 모리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3년 동안 많은 자료들을 모우고,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서 이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부활이 허구라는 것을 밝히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쓴 책이 하나 있는데요 “누가 돌을 옮겼는가?” 라고 하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처음 시도했던 내용들을 포기하고 다른 것을 쓰게 된 하나의 고백록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책을 통해서 예수님의 일생의 마지막 7일을 철저하게 연구한 결고 부활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확실한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고 책을 통해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부활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시작을 했지만 결국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믿게 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정말 예수님이 부활하셨는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한 번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예수님이 부활 하셨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영상에 다루고 있으니, 아 집에가서도 목사님이 너무 보고 싶은 사람들은 한번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라는 것보다 그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오늘 날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는지 이것에 대해서 좀 더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여러분,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그 사실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서장훈의 유행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예수님의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니? 되니?저도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계속 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나에게는 정말 부활 신앙이 있는가, 예수님의 부활을 정말 믿고 있는가, 예수님의 부활을 정말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그 사실이 오늘 날 나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는지 계속해서 질문을 하고 묵상을 했습니다.예수님의 부활이 2000년이 지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다른 말로 죽음에 종노릇하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단순히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리가 느끼는 모든 종류의 두려움을 포함하는 말입니다.여러분 만약 내일 당장 죽는다면 어떻습니까?모든 사람들이 유한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다 죽습니다. 한번뿐인 인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을 하죠, 죽음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한번 뿐인 유한한 인생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악착같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을 하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갑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허무주의나 쾌락주의에 빠집니다. 어차피 죽으면 끝이고, 한번 뿐인 인생 다 부질없다, 다 허망하다는 허무주의에 빠집니다. 또는 쾌락주의에 빠집니다. 한번뿐인 인생 즐기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악랄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는 것이죠, 이번에 n번방 사건을 한번 보십시오, 저는 기사를 다 읽지도 않았습니다. 너무 이게 비상식적인 내용들이다 보니깐 읽다가 그냥 꺼버렸습니다.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살겠습니까? 정말 자신들이 죽어서도 부활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요? 죽음 후에도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못하겠죠, 한번뿐인 인생,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인권 같은 것은 신경도 안쓰는 것이죠, 죽음의 종노릇하는 인생인 것입니다. 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사람은 진리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 역시도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9절 말씀 한번 더 같이 읽어볼까요?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자신들이 모인 곳에서 문을 꼭 닫고 있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왜 유대인들을 두려워했습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듯이 자신들 또한 그렇게 죽임을 당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지금 코로나 19사태로 인해서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두려운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코로나가 무서운 것인지, 그냥 예배를 드리기 싫은 것인지, 분간은 잘 안가지만~^^두려워한다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그런 죽음에 대한 두려움, 나의 삶이 잘 못될까봐 걱정하는 두려움, 이런 두려움은 유한한 인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그런 죽음 앞에서 두려워서 떨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그런데 중요한 것은 두려워하고 있는 모습에서 성경은 끝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려워서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죽음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평강을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오늘 날 우리들에게도 평강과 평안을 주십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서 세상의 걱정과 근심을 넘어서서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들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이자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합니다.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걱정 근심 또한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유한한 세상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죽음의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자유함 속에서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8절. 여러분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교회 오는게 즐겁습니까? 예배를 드리는게 즐겁나요? 아니면 억지로 오나요? 안오면 부모님께 혼나서 오나요? 아니면 매주 나오는게 습관이 되어서 습관적으로 나오나요?만약에 교회 오는 것이,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즐겁지 않거나 행복하지 않다면, 왜 그럴까요?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이 신앙생활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오해를 만드는 요인 중에 하나는 바로 이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이 개념에 대해 잘못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여러분 하나님 나라 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까? 천국, 죽으면 가는 곳, 머 이정도가 떠오를 겁니다.오늘 읽은 말씀도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명인데요, 오늘은 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을 하자면 1절을 보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없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제 2절을 보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거기에는 새 예루살렘이 자리 잡고 있는, 여기서 새 예루살렘이라는 것은 교회를 상징하는 단어인데요, 다시 말하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 단정한 모습의 교회가 서있는 그림입니다. 그리고 3절을 보면 그 교회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 그리고 그곳에 세워져 있는 교회, 그리고 그 교회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이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에 눈물도 없고, 사망도 없으며, 아픔도 없다고 4절에서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우리는 하나님 나라 라고 하면 다가 올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죽으면 가는 곳, 천국,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나라,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나라라고 했을 때 한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라고 할 때 매우 중요한 개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already,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not yet, 오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바로 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어렵죠?쉽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 나라라고 했을 때 두 가지 개념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 이 두가지 개념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에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not yet, 아직 오지 않은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종말에 대해서, 또 심판에 대해서 교회에서는 많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놓치는 것이 바로 이미 임한 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삶속에서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힘이 든 것입니다. 짐이 무거운 것이죠, 신앙생활이 버거워집니다.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우리는 신앙생활을 특정한 행위를 실천하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주일 날 교회를 다니고, 헌금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새벽기도하고, 전도하고, 기도하고, 착한 일도 쫌하고, 이러한 행위, 그 어떤 기준에, 규칙을 정해놓고 그것을 잘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긴 하는데 무기력해지고 갈수록 힘들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외적인 행위에만 집중하고, 그것을 노력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재미가 없는 것이죠, 행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바로 종교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종교생활로는 아무런 능력도, 또 주위에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합니다.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 바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지금 이곳에서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찬양하고, 물론 맞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행동들은 결과론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내 삶속에서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여러분 왜 전도가 안될까요? 여러분 혹시 친구보고 교회같이 가자고 이야기해 보셨어요? 왜 친구가 안가려고 할까요? 내가 즐거워보이지 않으니깐, 내가 행복해 보이지 않으니깐, 내가 정말 이미 임한 이 하나님 나라를 나의 삶속에서 누리면서 살아간다면, 그저 추상적이고 성경에만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나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면서 살아간다면, 우리가 교회가자고 하지 않아도 친구들은 ‘니가 다니는 그 교회 한번 가보자, 나도 한번 따라 가보고 싶다’ 이렇게 먼저 말할 것입니다.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먼저라는 것은 우선순위를 말합니다. 우선순위 첫 번째를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에 두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첫 번째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헌금이 아닙니다. 찬양이 아닙니다. 기도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그러면 이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누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요?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하나님 나라는 누가 왕인 나라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왕인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린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씀은 너희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말씀 읽고, 찬양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다 좋은데, 먼저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해라, 하나님의 통치를 구해라 !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첫 번째 우선순위입니다.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내면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죄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내가 주인되려는 것 아닙니까,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가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을 천국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내가 왕이되고 내가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통치하는 나라에 누가 와서 살고 싶어하겠습니까, 내가 왕이 되고, 내가 주인 되고, 내가 다스리는 세상은 점점 작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된 나라는 볼 품이 없습니다. 갈수록 쇠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왕이 된 그 나라가 뭐가 대단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