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사의 굴욕서론만약 대통령이 목사님 안수를 한다고 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아마도 한국 기독교 지도자 목사님들이 다 들고 일어나서 현 정부를 비판하며 신자들에게 세금도 내지 말라고는 하지 않을까? 아마 마귀라고 하지 않으면 다행일 듯하다. 또는 목사님들이 단체로 삭발하면서 시청 앞에서 투쟁할지도 모르겠다.역사란 역사사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E.H.Carr의 말과 함께 만약이라는 질문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용한가를 생각해 본다.우선 카노사의 굴욕 사건을 다루기 전에 몇몇 사실들에 대해 언급해야 하겠다.본론1.신성로마제국오토1세~프란츠 2세[962~1806]까지 844년간 유지된 독일지역의 제국이다. 이 국가는 로마 제국의 계승을 부곽 시키기 위해 ‘로마’라 이름하고, 기독교회와의 일치를 나타내기 위해 ‘신성(神聖)’을 수식했다.제국 초기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였으나, 이탈리아에 대한 간섭으로 독일 지역에 소홀해 지면서 여러 제후들에 의해 분열 되었다. 이후 30년 전쟁(1618~1648)에 패배하여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많은 영토를 잃었다. 나중에는 프랑스의 공격을 받아 제국을 유지하기 어려워진 프란츠 2세가 결국 제국 해체를 선언했다.2.주요 인물오토대제 (912-973) : 10세기 중반에서 11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독일은 강력한 지배자의 계승, 정치적 분열 방지, 교회와의 긴밀한 결합 등으로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 오토는 헝가리 인을 물리치고 황제 칭호를 얻었으며(962) 5공작을 누르고 왕국의 위신을 크게 높였다.이후에 태어난 황제들은 광대한 영토 (스위스, 동프랑스, 저지대 지방의 대부분, 북부이탈리아)를 통치하기 위해 교회와 제휴에 크게 의존했다. 황제의 중요한 행정관은 대주교 및 주교들로서 황제는 교황의 간섭 없이 임명했고, 그들은 황제의 가문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좀 심하게 말해서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원하는 교황을 임명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은 교회로 하여금 극적인 도전을 하게 만들었다.하인리히 4세(1050-1106) : 그는 6살 때 황제로 즉위 했고 그의 어머니가 섭정했다. 그는 섭정 때 상실한 영토 회복을 꾀하다 공작들과 대립하게 된다. 그 와중에 그레고리우스 7세와 주교 임명권 문제로 충돌하여 파문을 당했으나, 카노사의 굴욕 사건으로 왕권을 회복하고 곧장 그레고리우스에게 반격에 칼을 간다.그레고리우스 7세 (1020-1085) : 그는 왕의 권력에 복종하던 이전 교황들과 달랐다. 세속적 쾌락이나 부의 축적에 관심이 없었고, 다른 수도사들에게도 이러한 생활을 강요했다. 오토대제 이후 교회는 성직자들이 왕권과 결탁해 타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는 교회 내의 부패를 개혁하려 했다. 그는 교회 부패를 막기 위해 왕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교회 운영을 하고 싶어 했다.그는 엄격한 법을 통해 교회를 엄하게 다스렸다. 개혁은 고위 성직자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들에게 경건한 생활을 요구했다. 1074년 결국 성직 매매, 사제 결혼, 정치인(왕)의 주교 임명권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후에도 주교들을 순종 서약을 하게하고, 정기적으로 교황청을 방문할 것을 요구하였다.1075년 에는 세속적 주교 임명권을 엄격히 규제하고 교회의 모든 권리를 왕으로부터 찾아내려고 왕을 파문까지 위협하여 통보했다. 이것은 황제에 대해 칼을 들이민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카노사의 굴욕 사건으로 더욱 견고해 지는가? 했지만 곧 하인리히 4세에게 반격 당하면서 교황에서 물러나고 살레르노 망명지에서 죽었다.3.카노사의 굴욕독일 정부에 대한 도전은 하인리히 4세(1056-1106 )치세에 행해졌고, 그것을 주도한 인물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1073-1085)였다. 그는 권력으로부터 교회를 자유롭게 하고자 했다. 그는 즉각 다른 공들 및 다른 독일 제후들과 동맹함으로써 하인리히로 하여금 수세에 몰리도록 했다. 공들은 오토이후에 눌린 답답함을 그레고리우스와 해결하고자 했다. 제후들이 교황에 불복종을 이유로 황제의 폐위를 협박하자 하인리히는 도리어 그의 사면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1077년 한겨울 하인리히는 허겁지겁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의 카노사성에서 교황 앞에 엎드렸다. 그레고리우스는 제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사흘 동안을 내내 성문 앞에 서서 국왕의 기장들을 모두 옆에 둔 채로 맨발에 허름한 옷을 입고, 하인리히는 교황의 도움과 위로를 간청하면서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연구자가 생각 했을 때 조금 과장된 면이 있는 것 같다.)독일의 아니 세계의 어떤 황제도 교황에게 그 같은 굴욕을 당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사건이 하인리히가 폐위를 막기 위해 선수 친 사건일 지라도 황제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렸다.4.사건의 전개하인리히 4세는 제후들의 분쟁에 있어서 교황의 중재적 판결에 따른다는 조건으로 왕권을 일부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마음은 복수로 불타고 있었다.1077년 교황청의 승인 없이 루돌프를 새 황제로 선출하자 그 여파로 신성로마제국에서는 3년간 격렬한 내전이 일어났다. 이 내란을 중재하기 위하여 그레고리우스 7세는 ‘대화’를 발표하여 양측의 분쟁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를 재차 파문하고, 루돌프 공작을 승인하였다. 이것은 교황이 황제보다 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건이 될지 모르나 이것은 불안한 결과를 초래했다. 1080년 하인리히가 라벤나의 귀베르트를 대립 교황으로 선출하고, 1984년 직접 대군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오자 그레고리우스 7세는 살레르노로 피신하였다가 1085년 죽었다.결론연구자는 서론으로 돌아가서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OO대통령이 서울특별시에 대표 목사님 임명하는데 자기 조카를 임명한다. 그 교회로부터 벌어드리는 헌금의 일부는 OO대통령에게 바쳐지며 그것은 충성표현이 된다. 그 조카 목사님은 처음 설교 시간 때 디모데 전서 3:1절을 봉독한다.“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라고 읽어 놓고 칼빈이 말하는 소극적 교회와 적극적 교회에 대한 고민의 여지없이 국가에 충성하는 일꾼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말씀의 왜곡과 충성적인 표현 외에 다른 성구는 보이지도 않는다.그는 설교를 계속한다. 첫째, 둘째, 셋째…. 한주가 지나고 두주가 지나면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고 기름진 음식과 포도주에 취한다. 점점 이 목사님의 머릿속에는 본전 생각이 나기 시작한다. 한편 다른 먼 친척이 대통령에게 찾아와서 어마 어마한 뇌물을 주고, 충성을 약속하고 서울특별시 대표 목사님자리를 요구하고 대통령은 행복한 고민과 함께 연임 하고 싶어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마 군부를 이용해서라도 독재를 하고 싶어질 것이다.
2. 삼국의 발전1.고구려가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한국사 교재 연구 및 지도 교육학과 20051263 안대현학습 목표1.광개토 대왕 의 업적 -중국 세력의 분열에 대해서 이해한다. 2.장수왕의 업적 -장수왕의 한반도 남하 정책을 이해한다. 3.소수림왕의 업적 - 소수림왕의 문치주의에 대해서 이해한다.호우명 그릇의 의미..호우명그릇 : 乙卯年 -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 壺杅十 을묘년 -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 호우십 ①광개토왕이 죽은 3년 후인 을묘년(415) ②國岡上 - 廣開土境 - 平安 - 好太王 국강상 - 광개토경 - 평안 - 호태왕 큰 언덕에 안치된 - 땅을 넓고 - 평화롭게한 - 크고 좋은 왕 ③호우십(壺杅十) : 그릇신라 지역에서 발굴된 호우명 그릇은 고구려가 한반도에 미친 영향력을 상징!“중국 세력과 싸움을 통해 성장한 고구려”19대 광개토 대왕광개토 대왕은 강화된 국력으로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영토를 크게 넓혀 고구려의 전성 시대를 열었다. 그의 업적은 만주 집안에 남아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그가 죽은 뒤, 고구려 사람들은 그를 영토를 크게 넓혔다는 뜻으로 '광개토왕'이라 하여 그의 위업을 기렸다.(P47, 2문단)20대 장수왕의 남진 정책광개토 대왕의 위업을 계승하여 고구려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왕은 장수왕이었다. 영토가 넓어지자, 다시 안으로 체제를 정비할 필요를 느낀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성으로 옮기고(427) 남진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P48 1문단)후연 이전 전연과 악연소수림왕이 전연의 침략을 예방하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됨(340)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연의 침략이 이어짐 고구려 수도 환도성 일시 함락..(342) 전연- 아버지 미천왕 시신, 태후, 왕후를 포로로 삼고 퇴각함.불교수용 종교적 일체감율령반포 관습법- 법치국가태학설립 교육제도 정비수준높은 문화 콘텐츠 개발,지역문화 콘텐츠 산업에 기여고구려 강성의 강력한 배경소수림왕의 문치주의17대 소수림왕의 업적고구려의 팽창은 소수림왕 없이 이야기 할 수 없다. 따라서 교과는 17대 소수림왕과 19-20대로 이어지는 고구려 왕조 일부를 첨가하여 표로 작성해줄 필요가 있다.고구려 15~20왕까지 계보사진 출처..1번 이미지 : http://blog.naver.com/jangsumin/60051651823 3번 이미지 :1. 우측 http://blog.naver.com/sungguk815/70013242102 2. 좌측 비수전투 만듬.. 4번 이미지 : http://www.yonhapnews.co.kr/ 5번 이미지 : 1.좌측 장수왕 http://blog.naver.com/sungguk815/70013242102 2.우측 중원고구려비 네이버 포토앨범..중에서 6번 이미지: http://blog.naver.com/sungguk815/70013242102 8번 이미지: http://blog.naver.com/lovesender/60052161893 교육학과 20051263 안대현 연락처 010-2386-7177 메일주소tntone1@nate.com{nameOfApplication=Show}
예루 살렘 성전들 .. 제 0 성전 회막 제 1 성전 솔로몬 성전 제 2 성전 스룹바벨 성전 제 3 성전 헤롯 성전 ★성전미문 ★성전 이전 시기 회막성막 동영상 http://blog.naver.com/kingjong3?Redirect=Log logNo=70035383012제 1 성전 솔로몬 성전 아브라 함이 이삭을 바친 모리아산 BC958 년 부터 7 년간 솔로몬 성전 건축 BC587 년 바벨론 느부갓네살 2 세에 의해 파괴되었다 .제 2 스룹바벨 성전 BC 536 년 재건축 시작 말씀 에스라 3 장 : 12~13 절 (50 년 만에 돌아온 할아버지들의 울음 ) BC534 년 주변 족속의 방해로 중단 [ 메데 다리오왕 2 세의 중단 명령 ] BC520 학개 , 스가랴 의 책망과 권고로 다시 중건되기 시작 [ 에스라 5 장 13 절 : 페르시아 다리오왕이 허가 함 ]제 3 헤롯 성전 BC 20 년 그리스 - 로마 양식으로 공사를 시작하여 AD 64 년에 마무리 하지만 73 년에 로마에 의해 파괴 됨 헤롯의 성전은 큰 언억 위헤 세워졌다 . 성전산 이라는 이곳은 인공적으로 만들어 졌으며 탁월한 헤롯 풍의 석공술로 만든 높은 옹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성전 미문 예루 살렘 성전 동편에 위치한 문으로 고린도 양식을 따라 아름답게 지어졌다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 사이에 세워진 문이다 .성전 미문의 의미 .. 성전 미문은 이름 자체로는 美門 이라는 뜻이지만 사실은 이방인과 여인들의 출입을 금하는 장소 이다 . 그 당시 율법과 사고가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하는 관습이 강했다 .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나 베드로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자가 성전에 출입하며 하나님을 찬양한 사건이 된다 . 이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정한 자에서 깨끗함을 입은 우리 기독교의 역사 ! 은혜 입은 자의 역사로 그 상징성을 가진다 .현재 예루살렘{nameOfApplication=Show}
Ⅰ.서론1.소크라테스의 생애그는 기원전 470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아테네 시민이었고, 돈은 거의 없으면서도 애써 더 벌려고 하지도 않았다. 참으로 그가 좋아한 일은 자신의 친구나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는 일과 젊은이들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 달리 가르친 대가로 돈을 전혀 받지 않았다.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이란 작품에서 그에 대해 풍자한 것을 보면 그는 아테네 시내에 얼굴이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몇 가지 아테네를 해치는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고발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독약에 의해 사형을 당했다.- 고소장 -고소일 : 399년 O월 O일고소인 : 멜레토스(시인) 아니토스(정치가) 리콘(수사학 교사)피고인 : 소크라테스고소내용 :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 청년들을 타락시키고,나라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으며 다이몬이라는 정체 모를 신을 믿고 있다.그는 사실상 죽음으로 유명해 졌으며 그의 제자 플라톤의 덕분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 되었다.2.시대배경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은 BC640~546? 탈레스에서 시작 되었다. “우주의 만물은 물로 만들어진다.” 라는 말부터 아낙시만드로스의 “근본 물질”, 아낙시메네스의 “공기” 등 다양한 철학적 움직임들이 일어났다.기원전 5세기 에는 철학의 여러 학파가 발전하면서 어떤 의미에서 철학의 변두리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들이 바로 소피스트이다.소피스트들은 물질문제와 철학을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물질문제는 사실 과학이라고도 표현 할 수 있는데, 그들의 과학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것으로 초기 마술과 같은 형태로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마술 같은 철학은 상당한 고민과 고찰의 결과로 보인다. 물이나 공기 등 근원적인 것에 대한 연구 예를 들면 비가 내리는 것, 비로 인해 만물이 소생하는 것, 물(수소)의 여러 쓰임새 등을 관찰하지 않으면 이러한 것을 주장 할 수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들이 서로의 것을 주장하고 계속해서 다투는 동안 절대 진리나 보편타당한 것에 대한 것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리스 사람들은 여러 나라에 드나들면서 폭 넓은 경험을 하다 보니 국가 간에 좁힐 수 없는 관습의 간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결국 프로타고라스는 “사람은 만물의 척도다.” 라고 결론지었다. 무엇이건 저마다 나름대로 있다고 하면 있게 되고 없다고 하면 없게 되는 사람이 척도라고 규정하니 보편 타당한 진리에 탐구에 대해서는 거의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또 BC 5세기 때는 그리스의 민주주의 제도가 확산되면서 연설을 할 수 있는 능력이나 설득하는 능력이 중요시 되었고, 소피스트들은 실용적인 용도로 수사학을 가르치고 수업료를 받았다.Ⅱ.본론1. 소크라테스의 사상하지만 소크라테스 그는 달랐다. 그는 실용적인 학문으로 학생들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먼저 돈을 받지 않았으며 그들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를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었다.그는 사람이 태어나면서 육체를 입음으로 영혼을 망각한다고 생각하였다. 마치 지식을 알고 있지만 잠지 잊어버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그만의 독특한 교육 방법으로 arte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그는 또 다이몬이란 신을 모시며 자신은 신의 소명을 받아 아테네 청년들에게 참 영혼을 불어 넣어야 된다고 생각했다.그는 사람들이 평소에 소중히 믿고 사는 신념들에 의문을 일으켜 놓았다. 이런 의문을 제대로 처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불안감을 느끼게 마련이어서, 이러한 불안을 부정적으로 느끼는 자마다 소크라테스를 적으로 삼았다. 또 이것을 지켜보는 귀족들과 다른 이들은 그를 더욱더 경계했을 것이다.2.교육 방법(1)아이로니한 사람이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지혜의 시작이다.그러나 만약 그가 이것밖에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면,그것은 시작에 그치는 셈이 된다. 이 시작에 그치는 지식,그것이 소크라테스를 고고한 irony - 아이로니의 자세에 올려놓는다.- 키에르케고르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소크라테스가 대단히 생기 넘치는 유머 감각과 날카로운 기지를 지닌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다. irony는 understatement 삼가서 말하다 라는 뜻도 되는데 쉽게 말하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라고 (謹)삼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농담은 사실 무한하다고 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미지의 것에 비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도 표현 할 수 있겠다.예로 수학에서 1/∞, 1.000/∞, 1.000.000/∞ 무한, 모두 같은 의미가 되어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발표자가 잠깐 짬을 내서 한마디 끼어든다면 그는 아마 겸손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그렇기 때문에 그는 모른 다는 사실을 고백하도록 젊은이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했다. 결국 젊은이들은 소크라테스에게 매료되어 계속해서 답을 요구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간절한 지적 열망상태로만 만들어 두고 미련 없이 그 젊은이를 떠났다. 그는 어떤 지적 목표에 이르도록 돕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지적 열망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상태그 아이로니의 세계로 젊은이들을 빠뜨렸던 것이다.(2)회상이론소크라테스의 사상에서 말했듯 그는 영혼이 몸을 입으면서 지식을 망각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망각하기 전의 상태로 회상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모두가 arte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 했으며 문답법 (산파술)등을 통해서 그것을 실현 하고자 했다.그에게 있어 교사의 역할은 단지 학습의 우연적 계기를 마련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학습은 내면의 진리를 향한 외로운 탐구 이며 교사의 도움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거기에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없고 오직 독학자(獨學者)와 미(美)혹은 독학자와 진리의 관계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교사가 아무 역할도 없는 것은 아니다. 우연적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회상이론은 학생이 지식을 단편적인 것(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 하는 것)에서 종합적(어떤 진리의 상태)로 이해하도록 이끌면서 교사 자신의 역할을 감추는, 고도로 정련된 교육방법을 말한다. 회의론의 방법은 그의 후향적 태도로 말미암아 드러나지 않는 교사로서의 역할을 부각시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3)에로스소크라테스가 인용한 사랑에 관한 디오티마의 가르침은 사랑의 성역에 입문하려는 사람이 거쳐야 할 ‘교육의’ 단계를 제시하는 것으로 완결된다.1 교육의 단계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사랑의 최고 경지에 올라가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육체를 만나고 2.육체의 아름다움이 영혼에 아름다운에 비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고 아름다운 영혼을 만나 사랑하며 3. 제도(制度) 가지런한 질서를 아름다움으로 추구하며 다음에는 학문의 아름다움으로 눈을 돌려 여러 가지 지식을 얻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