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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방견문록 -중앙아시아편 평가A좋아요
    동방견문록 2편 중앙아시아서론동방견문록을 이해하기 전에 마르코폴로부터 이해를 하고 시작해야 한다. 그는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서양인이고, 기독교인이자, 상인의 피를 가지고 있다. 아무래도 모든 현상, 사물을 볼때에 그 틀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절망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 당시의 서양인, 상인의 생각과 눈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리고 동방견문록이 직접 여행에 의한 것이니, 지어낸 것이니 논란이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개별 지역들에 대한 기술이 겉으로만 훑는 정도가 아니고, 굉장히 세밀한 부분도 보인다. 그리고 단기간 머물러서 알 수 있는 것들이 아닌 것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경험을 하지 않고, 다신이 경험한 것처럼 기술하는 부분도 보인다. 상상력에 의해서거나, 주워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징기스칸과 프레스터 요한의 전투 내용이 예가 될 수 있겠다. 일본에 직접 가지 않았으면서 간 것처럼 서술하는 것도 또 다른 예가 될 수 있겠다. 즉, 본인은 마르코폴로가 분명히 이 지방들을 여행은 했지만, 주워들은 이야기도 많이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동방견문록을 통해서 당시 서양인의 관점을 살펴볼 수 있고, 당시 그 지역의 생활상을 엿볼수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1. 주요여행경로 (뒤에 지도에 표시되어 있음)사푸르간 → 발크(발흐) → 타이칸(탈리칸) → 스카셈 → 바다샨 → 파샤이 →케시미르(카쉬미르) → 바다샨 → 파미르 → 카스카르(카쉬가르) → 사마르칸(사마르칸드)→ 야르칸 → 코탄 → 펨 → 차르단 → 롭(롭 노르) → 사초우 → 카물 → 긴긴 탈라스 →숙추(주천) → 캄프로(감주) → 에치나 → 카라코롬 → 바르구평원(바이칼호부근) →에르주울(서량) → 텐둑2. 마르코폴로의 주안점① 정치적 - ▶ 도시의 위치 (어느 방향으로 몇일을 가야 하는 거리...)▶ 나라의 구역(데카안의 영향권인가..)② 종교적 - ▶ 마호메트를 믿는가, 이단숭배자(불교)인가, 기독교를 믿는가..③ 경제적 - ▶ 경제활동(수공업, 교역을 하는가, 사냥을 하는가..)▶ 특산물 (석면, 낙타천..)④ 문화적 - ▶ 언어(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지..)▶ 음식(무엇을 먹는지, 포도주는 담그는지...)▶ 장례방법▶ 독특한풍습(남편이 여행으로 집을 20일 이상 비우면 재혼할수 있는 것..)▶ 삶의 형태 (동굴에 들어가 사는지, 동물처럼 사는지...)⑤ 그냥 눈에 보이는 것 - ▶ 주민들 외형▶ 자연경관3. ‘중앙아시아편’을 읽고 유추해 볼 수 있는 것들.▶ 중국본토가 무대인 4장, 5장 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난다. 환경적으로 고원지대, 사막 지대가 무대이기 때문에, 마르코폴로가 삶의 형태로 중요시 생각하는 상공업, 교역 같은 것이 발달할 가능성이 희박했을 것이다. 그것이 2편에서는 여실히 나타난다.▶ 중국여행에서는 불교를 믿는 주민들을 ‘우상숭배자’라고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무슬림 들을 마호메트를 신봉하는 자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를 통해 마르코폴로가 살고 있는 당시 유럽인들도 이슬람교에 대해, 마호메트에 대해서 까지 알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 다.▶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들이 눈에 띈다. ‘나쁜사람들’, ‘살인자들’ 과 같은 언급을 통해서이다. 당시 국제무역이 활발했던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동쪽으로 의 교역길을 막은 이슬람인 들에 대한 악감정이었다고 생각된다. 단순히 막은 것만이 아니라 다른 방해행위도 있었을 것이다.▶ 약간 섣부른 감이 있지만, 당시의 미인관도 엿볼수 있다. 바다샨지방에 대한 설명중 “남 자들이 살찐 여자들을 더 좋아한다. 뚱뚱하게 보일수록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는 언급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유럽에서는 뚱뚱한 여자가 미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만약 유럽에서도 그러했다면, 당연스럽게 기술했을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을 주술을 외운다고 했는데, 염불을 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역시나 크리스트교인의 관점이 나타나는데, 승려들을 도미니크파나 프란시스코 파와 비교를 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승려들의 외형적 모습을 상 상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장사활동이나, 수공업 같은 것이 언급이 많이 되어있지 않다. 이 지역은 사람 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도 아니고 환경도 열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동물 이 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마치 야생의 상태인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마르코폴로가 상인 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상업활동이 없는 이곳은 매우 미개한 지역으로 생각되었 을 것이다. 또 그렇게 진술하고 있다.▶ 사마르칸은 기독교 도시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매우 특이하다. 어떻게 이 지역까지 기독 교가 전파 되었는지도 놀랍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놀랍다. 징기스칸에게 점을 쳐주고 인정받은 크리스트교인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진실판명은 안났지만, 이 지역에 서양의 기독교가 존재했다는 자체만으로 매우 흥미를 끄는 이야기이다.▶ 유럽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알렉산더와 관련되어 이야기를 많이 하는 부분이 나 온다. 일부 지역에 알렉산더와 관련된 것들이 있는데, 프라이드를 같은 서양인으로써 프 라이드를 프라이드를 느끼는 것 같다.▶ 사막에 대해서 언급할때는 매우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몇일동안 식량이 나오지 않 는다는 이야기와 함께 정령들의 목소리가 들린다거나 유령들이 있다고 사막을 두려워 하는 모습이 보인다. 사막의 황량하고, 또 있었던 지형이 사라지고, 죽음의 공포를 느끼 기 쉬운 지역이라 그러했을 것이다. 또한 크리스트교들이 느끼기에 사막은 시련과 시험 의 공간이었다. 개인적으로 수도를 하는 사람들도 사막에서 수도를 하였고, 예수도 사막 에서 마귀와 만난적이 있다.
    사회과학| 2007.01.27| 3페이지| 1,000원| 조회(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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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란 무엇인가 1~6장 전체요약, 고찰
    1. 역사가와 그의 사실서론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의미있고, 필요한 질문이다. 이 장에서는 역사가와 사실과의 시대에 따른, 가치관에 따른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본론1) 역사에 대한 시각? 액턴 : “우리는 어떤 정보든지 입수할 수 있고 어떤 문제든지 해결가능하므로, 전통적인 역사를 마감할 수 있고...”? 조지 클라크 경 : “후대의 역사가들은 조금치도 그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객관적인’ 역사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교리 속으로 도피한다”2) 19C는 사실을 숭배한 시대였다.“역사는 확인된 사실을 모아놓은 것이다”? 1830년대 랑케 : “역사가의 임무는 단지 그것은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것”? 실증주의자들 : “우선 사실들을 확인하고, 그리고 나서 그것들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 라”? 경험주의적 인식론 : “결론과는 다른 경험자료” 두 과정을 명백히 분리시킴? 조지 클라크 경 : “사실이라는 딱딱한 속알맹이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논쟁의 여지 가 많은 해서깅라는 과육”? C. P. 스콧 : “사실은 신성하고, 의견은 자유롭다”3)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 하우스먼 : “정확성은 의무이지 미덕은 아니다”좋은 재료들은 작업의 필요조건이지만 그의 본질적인 기능은 아니다. 역사가는 비문을 판독하거나 천문학상의 계산을 위한 기술을 구비할 필요는 없다. 그 기본적인 사실을 확정해야 할 필요성이 사실 자체의 어떤 성질에 따라 좌우되지 않고 역사가의 선험적 결정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 피란델로 : “사실이란 마대다. 그 안에 무엇인가를 넣을 때까지는 서 있지 못한다”어떤 사실에 발언권을 줄 것이며 그 서열이나 차례는 역사가가 결정한다. 루비콘 강을 건넌 사람은 수없지만 카이샤르가 루비콘을 건넌 것을 역사라고 하는 것은 역사가가 결정한 일이다.? 지금 남아있는 ‘사실’은 수많은 사실들 중 극소수의 선택된 사실만이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알려져 있는 사실이 전부이기 때문에 성가신 구별은 사라지는 것이다.ex) 그리스에 대한 사실은 그리스 인들의가하는 문제는 암탉과 달걀에 관한 문제와 같다. 그것은 필수적 보완적인 것이지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본론1. 개개인은 사회에 속해있다.①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세계는 우리에게 작용하기 시작하여 단순한 생물학적 단위로부터 사회적인 단위로 변화시킨다.②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도 개인적인 상속물이 아니라 성장해온 집단에게서 사회적으로 취득된것. 언어뿐 아니라 환경도 인간 사유의 성격을 결정하는데 기여한다.③ 사회와 교육의 민족적 배경이 다른데에서 비롯되는 민족성의 차이는 부정하기 어렵다.2. 개인 숭배의 역사① 부르크하르트 - “개인 숭배는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이전까지 오직 어느 한 종족, 주민, 집단, 가족의 구성원으로서만 자신을 의식해 왔던 인간은 그 시기에 비로소 정신적으로 개인이 되었다”② 그 후, 자본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의 발흥, 산업혁명의 발달, 자유방임의 학설③ 몰리 - “개인주의와 공리주의를 인간의 행복과 번영의 종교”④ 근대세계의 발흥과 함께 진행되었던 개별화의 확대는 전진하는 문명의 정상적인 과정.3. 상식적인 역사관은 역사를 개인에 의해서 쓰여진 개인에 관한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가?① 역사의 지식은 오로지 그만의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니다. 그들은 과거의 사회와의 연관 속에서, 그 사회의 충격을 받으면서 행동.② ‘움직이는 행렬’ - 역사가는 그 행렬 사이에 끼어서 걷고 있는 존재. 역사가는 역사의 일부이다 그 행렬 속에서 그가 있는 그 지점이 과거에 대한 그의 시각을 결정한다.ex) 그로트는 진보적이던 영국의 중간계급의 열망을 아테네 민주정을 이상화함.테오도르 몸젠은 굴욕적인 독일혁명에 환멸을 느낀 자유주의자인데, 카이사르를 이상화 한다.4. 위대한 역사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통찰이 과거에 대한 역사가의 시야를 밝혀주는 바로 그때 쓰여진다. ex) 1차 대전 이후 등장한 네이미어는 1920년대의 변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시기에 살았다. 즉 그는 보수주의 역사가로 등장하였다.5. 급속한 변화하는 시기의 역사가들 중에는 세계관의그리고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것, 이것이 역사의 이중적인 기능이다.3.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서론역사는 과학일까? 지리를 하는 사람으로써 역사와 지리는 학문의 분류에 있어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한다. 역사와 지리는 다른 순수과학, 응용과학의 길과는 약간 다른 목표, 방법,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경험적이며, 인간중심적인 이 학문을 현재 과학적 사고와 시각이 판을 치고 있는 이 시대에서는 어떻게 바라볼까? 또 어떤 범주에 넣을수 있을까? 또한 과학적이지 않다는 결론이 나오면 가치가 없는 학문인가? 성격이 급해서 미리 말하자면 절대 “No"이다.본론1. 역사에 대한 과학적 방법의 19C① 자연계의 연구에 적용되었던 과학의 방법론이 인간의 문제에 대한 연구에도 적용됨. 사회도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기계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되었다.② 다윈은 또 하나의 과학혁명을 이룩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사회과학자들은 생물학에서 단서를 얻고 있던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사를 과학 안으로 끌어들였다. - 귀납적 역사방법을 과학의 방법으로 여김.③ 베리 “역사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과학”2. 19C에 ‘법칙’ 이란 무엇이었나?① 과학자 - 과학자의 직무는 관찰된 사실로부터 귀납적인 추론과정을 통해 그러한 (뉴턴의 운동법칙, 중력법칙, 보일의 법칙) 법칙들을 더 많이 발견하는 것이라 생각.② 사회연구자들 - 이러한 논리 실증주의가 판을 치는 시대에 편승해서 자신들의 연구가 과학적 지위를 가지기 원해서 과학에서의 용어를 사용하고 과학에서와 같은 연구방법을 따르고 있다고 믿음. ex) 그레셤의 법칙, 에덤 스미스의 시장법칙, 멜서스의 인구론 등등 버클은 “인간사의 행로에는 보편적이고 일관된 규칙성이라는 영광스러운 원리가 스며들어있다”3. 최근의 역사의 과학적 방법① 앵카레 - “ 과학자들의 제출한 일반명제들은 그것들이 단순한 정의이거나 또 다른 형태의 용어사용에 관한 규칙이 아닌 한, ‘가설’ 이다. 증명과 수 있다.ex) 로즈버리 “영국인이 나폴레옹에 관해 알고 싶어하는 것은 그가 좋은사람 이었는가 아니었는가 하는 점이다.㉢ 역사가의 도덕적인 판단은 개인에 대해서 도덕적 유죄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집단과 사회 전체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이다.ex) 독일인들이 히틀러의 개인적인 사악함에 대해 비난하는 것을 환영하는 것5. 추상적인 도덕적 개념에 특정한 역사적 내용이 담겨지는 그 과정은 하나의 역사적 과정이다. 우리의 도덕적 판단은 그 자체가 역사의 산물인 어떤 개념적 틀 안에서 내려진다.① 개념은 추상적이며 보편적이다. 하지만 그것에 담기는 내용은 역사가 흐르는 동안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변해왔다.② 역사란 운동적이다. 그리고 운동은 비교를 의미한다. - ‘선’, ‘악’처럼 타협이 불가능한 용어보다는 ‘진보적’, ‘반동적’ 이라는 말과 같이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용어로 도덕적인 판단을 표현하는 경향은 이 때문이다.6. 해결책① 역사학의 수준을 향상 시키는 것, 더욱 과학적으로 만드는 것,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요구사항을 더 엄격하게 제시하는 것.② 과학자, 역사가는 분야는 다르지만 동일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과 환경에 관한 연구이다. 그렇기에 물리학의 방법을 따라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됐다.결론역사가 역시 “왜?”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다른 모든 학문 또한 그러하다. 이 장을 통해서 역사에 관한 오해가 풀리길 바라고, 과학적인 것 또한 시대적으로 상대적이라 지금 현재에 그러하다고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길 바란다.4. 역사에서의 인과관계서론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원인이 있다. 그러므로 많은 학문, 역사도 마찬가지로 “왜”라는 물음을 던져서 그 원인을 탐구하고, 알고 싶어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우연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을 많이 느낄수 있었을 것이다. 부산이 고향인 내가 왜 지금 여기 대구에서 생활하는 것도 우연의 하나 일 수도 있다. 우연적으로 경북대세계대전 이후, 독일민족의 재앙의 원인을 황제의 허영, 힌덴부르크의 대통령 선출, 히틀러의 편집광적인 성격등 우연적인 사건탓으로 돌림.4. 역사가와 그의 원인의 관계는 이중적이고 상호적인 성격을 가진다.① 원인은 역사과정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을 결정하며, 그의 해석은 원인에 대한 그의 선택과 배열을 결정한다.② 때론 역사의 경로를 바꾸게 한 우연들도 있지만 그것은 역사의 어떤 합리적인 해석이나 중요한 원인에 대한 역사가의 등급화에 끼어들지 못한다.5. 역사란 역사적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의 과정이다.① 파슨스 - “역사는 실체에 대한 인식적 지향의 선택체계일 뿐만 아니라 인과적 지향의 선택체계이다”② 역사가는 무수한 인과적 전후관계 중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만 추출해낸다. 그리고 그 역사적 중요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그 전후관계를 자신의 합리적인 설명과 해석의 모형에 짜맞추는 역사가의 능력이다.③ 우리는 어떤 설명이 합리적이다 비합리적이다를 인정했다면 일정 목적에 기여하는 설명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별할 수 있다고 본다.④ 역사에서의 해석은 언제나 가치판단과 밀접하게 연관되며, 인과관계는 해석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결론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역사에서는 그러한 상황, 행동이 발생할 수 밖에 없게 하는 원인이 있는 것도 같고, 우연이라는 묘한 존재도 큰 영향력이 있는 것같다. 하지만 역사가 조금더 체계적이고, 과학적이려면 우연이란것에 너무 손을 들어줘서는 안될 것 같다. 퍼센테이지 개념으로 봐야 할 것같다. 우연이란 것도 역시 영향을 미치지만 그 퍼센테이지는 낮다는 생각이 든다. 우연 역시 원인의 일부인, 뜬금 없이는 아니기 때문이다.5. 진보로서의 역사서론우리는 ‘진보’란 단어를 많이 쓰는 것 같다. 특히나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심한 우리나라에서 진보란 말은 굉장히 낯익지만, 무조건 바꾸려는 것이 진보라는 의미로 쓰이는 것도 같아서 의미를 정확히는 모르겠다.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나아가는 것이 진보적일까? 역사에서의 진보는 무엇을 뜻하는가? 다
    독후감/창작| 2007.01.27| 15페이지| 1,000원| 조회(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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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흑사병 평가A좋아요
    동방으로부터 전해진 페스트라는 이 새로운 질병은, 1347~52년의 기간 동안 유럽 전역을 휩쓸면서 전 유럽인들의 1/3에서 1/2의 목숨을 앗아갔던 것이다. 이러한 전대미문의 사건을 겪었으면서도 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들은 틀림없이 예전과는 크게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살아나갔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먼저 페스트의 개념과 페스트가 전파되기 이전의 중세 유럽 사회의 양상에 대해 살펴보고, 페스트가 유럽에 전파되어 확산되는 과정과 이에 대한 당대인들의 인식과 대응, 그리고 페스트가 물러난 이후의 유럽 사회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1. 왜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 이란 이름인가?이름에서부터 강하게 드러나는 검은 색의 이미지의 유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설명이 시도되었다. 즉 페스트 환자의 몸에 발생하는 검은색이나 자주색의 반점에서 유래하였다는 설, 페스트가 창궐하기 직전에 나타났다는 검은 혜성에서 유래하였다는 설, 너무나 많은 이들이 검은 상복을 입어야만 했다는 점에서 유래하였다는 설, 심지어는 당시 페스트에 대한 당대인들의 인식이 검은 말을 탄 남자 혹은 검은 거인의 이미지였다는 점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다.하지만 이러한 모든 설명들은 정작 ‘흑사병’이라는 말 자체가 한창 페스트가 유행하던 14세기 중반에서는 쓰이지 않았고, 1555년에 이르러서야 스웨덴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그 신빙성을 잃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설명은, 원래 페스트를 뜻하는 라틴어 ‘페스티스 아트라(pestis atra)' 또는 아트라 모르스(atra mors)'의 아트라라는 단어는 검다라는 뜻 외에도 지독한 혹은 무서운 이라는 뜻도 함축하는 것이었지만, 이를 영어나 스칸디나비아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검은 죽음이라고 곧이곧대로 옮기는 바람에 그대로 굳어졌다는 것이다.2. 페스트란 무엇인가?14세기 중기 전유럽에 대유행한 이래 흑사병(黑死病:Black Death)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야생의 설치류( 齧齒類:다람쥐·쥐·불어 40℃ 전후의 고열을 내고 현기증·구토 등이 있으며 의식이혼탁해진다. 잠복기는 2∼5일이고, 순환기계(循環器系)가 강하게 침해받는다. 몇 가지 병형으로 나누어지는데,주된 것은 선(腺)페스트와 폐(肺)페스트의 두 병형이다. 또 페스트균(Pasteurella pestis)는 그람음성균인단간균(短桿菌)으로 조건에 따라 변형하기 쉽다. 운동성은 없고 아포(芽胞)도 없다. 1894년 프랑스세균학자예르생이 홍콩에서 발견하여 분리하였다.3. 재앙 이전의 유럽5세기의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줄곧 ‘암흑시대’ 속에 가라앉아 있던 유럽은, 12세기를 전후한 시점부터 어둠 속에서부터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오늘날보다 온화했던 기후, 그리고 삼포제 농법, 물레방아, 새로운 쟁기와 멍에, 역축(役畜)으로서의 말(馬)의 사용 등 농업 기술의 진보는 농업 생산성을 향상시켰고, 이로 인한 인구 증가는 다시 경작지 확장의 원동력으로서 작용하였다. 또한 11세기부터 서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영주 직영지가 축소·소멸되고 농민들의 부역의 부담이 줄어들면서 영주에게 부역 대신 생산물이나 화폐를 지대로 바치는 새로운 형태의 장원제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농민들의 부담을 줄이고 경제적 성취 욕구를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성 향상에 힘입어 수공업과 상업이 발전하면서 도시가 부활하였다. 서유럽전역에서 마을은 읍으로 성장했으며, 1만에서 2만 정도의 도시도 상당수 등장했다. 독일의 경우 1000년경에는 약 150개였던 도시의 수가 1200년경에는 1,000여 개로, 그리고 14세기 중엽에는 무려 3,000여 개로 급증하였던 것이다. 또한 동방과 서방, 그리고 남유럽과 북유럽을 잇는 육·해상 교역로를 따라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그러나 마치 유럽 문명의 화려한 부활을 보여주는 듯한 이러한 발전 양상은, 사실 그 기반이 대단히 취약한 것이었다. 즉 농업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이나 새로운 생산 수단의 등장이 수반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증하는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할 수 있었는데, 특히 이러한 위험은 지금까지 온화했던 기후가 변하여 13세기 말부터 유럽에서 소빙하기가 시작되고 기상 이변이 빈번해지면서 더욱 심각해졌다. 그리고 기근과 식량 부족, 전염병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상황 하에서, 유럽인들은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의지마저 잃어버린 채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졌음을 절감해야 했다. 결국 14세기 중반의 유럽인들이 기근과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지배 계급의 수탈과 잦은 전쟁으로 인한 약탈로 고통 받고, 이에 대해 어떻게 저항해 볼 의지마저 꺾여버린 상태에서 페스트라는 최악의 파국이 닥쳐왔던 것이다. 흑사병의 불가피성에 대한 주장이 무엇이건 간에, 흑사병이 유럽에 도래했을때 저항할 힘조차 없는 사람들이 그 병을 맞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또 하나 유럽인들은 대개 흑사병에 직면하여 불가항력적인 운명이라는 생각에 압도되었다. 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무감각과 운명론적인 체념에 익숙해지 사람들은 페스트에게 이보다 더 달콤한 먹이는 없으리라.4. 흑사병의 유럽전파 확산 과정14세기의 유럽인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페스트는 과연 언제, 어디에서 기원하였던 것일까? 당시 유럽과 중동의 역사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새로운 질병이 ‘동방’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페스트는 1330년대에 중앙아시아 지역을 시작으로 하여 유럽으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중앙아시아의 이시크 쿨(Issik Kul) 호반 부근에서 발견된 네스토리우스 기독교 교도들의 공동묘지에는 1337~39년 사이에 ‘역병’으로 사망하였다는 수많은 이들이 매장되어 있는데, 학자들은 이것을 페스트 발생의 최초의 사례로 간주하고 있다. 한편 학자들에 따라서는 페스트는 1250년대에 몽골 군대가 운남성과 버마 지역을 침공한 뒤 귀환하는 과정에서 몽골의 초원 지대로 옮겨졌고, 그 뒤 1331년부터 중국 전역에 걸쳐 페스트가 유행하였으며, 그 뒤 1340년대부터 중앙아시아의 대상로를 거쳐 서방으로 전파되었다고 주장한다. 러 1345~46년에는 흑해 연안의 킵차크 칸국에 이르렀다.한편 유럽으로의 전파는 보다 극적인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1346년에 페스트가 흑해 연안의 크림 반도에까지 이르렀을 때, 그 곳은 자니벡(Janibeg, 1341~57)이 이끄는 킵차크 칸국의 군대가 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제노바 상인들의 무역 근거지인 카파(Kaffa)를 3년째 포위한 상태였다. 그러나 페스트로 인하여 몽골 군대 내에 사망자가 속출하게 되자, 자니벡은 부득이하게 포위망을 풀고 철수할 것을 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몽골 군대는 페스트에 감염되어 죽은 시체들을 투석기에 담아 성 안으로 날려 보냈는데, 이로 인해 카파 시내에도 페스트가 퍼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극적인 사건이 아닌, 단지 몽골 군대 진영으로부터 몰려온 쥐들에 의해 페스트가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어쨌든 몽골 군대의 포위에서 벗어난 제노바 상인들은 페스트를 피하기 위해 1347년 여름에 앞 다투어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향하였는데, 이 때 쥐와 벼룩, 그리고 페스트도 함께 배를 타고 그 뒤를 따랐다.그리고 이때부터 페스트는 배편을 통해 지중해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시계 방향으로 커다란 반원을 그리면서 불과 5~6년 만에 유럽 대륙 전역을 휩쓸고 지나갔다. 즉 1347년에는 콘스탄티노플과 시칠리아로, 1348년에는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프랑스, 이베리아 반도 및 발칸 반도로, 1349년에는 영국과 독일 중부, 덴마크, 그리고 헝가리로, 1350년에는 독일 북부와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1351년에는 폴란드 북부와 리투아니아 등 발트 해 연안 지역으로, 마지막으로 1352년에는 러시아 지역으로까지 확산되었던 것이다. 특히 12~13세기에 상업이 발전하면서 육·해로를 통한 이동과 교역이 활발해진 것이 오히려 페스트의 신속한 확산을 도운 꼴이 되고 말았다. 물론 폴란드와 플랑드르 지역, 그리고 밀라노 등과 같이 페스트의 영향을 그리 심하게 받지 않은 지역도 존재하였지만, 유럽 대륙의 거의 두 배 가까이 많은 임금을 주고 농경 노동자들을 고용해야만 했다. 그리고 페스트로 인한 인구 감소는 지역에 따라 그 편차가 심하였기에, 페스트의 화를 간신히 면한 지역의 농민들은 자신들보다 운이 없었던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오히려 더 많은 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때부터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자신이 속해 있던 장원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 빈번해졌다. 한편 페스트로 인한 인구 감소는 곧 수요 감소로 이어지면서 농산물의 가격이 급락하였고, 반면 공산품의 경우 숙련공들의 사망으로 인해 오히려 가격이 상승하였다. 이처럼 임금의 상승, 농민들의 활발한 이주, 농산물과 공산품의 가격 변동은, 장원으로부터 들어오는 현물(즉 농산물) 수입에 의지하여 살아야 했던 영주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이와 같이 지배 계급이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고 봉건적 질서가 위협받게 되자, 이에 대한 반동적인 조치들이 즉각 취해졌다. 즉 영국에서는 1349년 6월에 왕령으로 ‘노동자 조례’가 발표되었고 1351년에는 이것이 ‘노동자 법’으로 수정되어서, 페스트 이후 급등한 임금과 급락한 물가를 안정시켜 그 이전 수준으로 동결하고자 하였고, 아예 노동자와 장인의 임금을 성문화하기까지 하였으며, 농민들의 이주를 제한하고 이들에 대한 부역의 부과를 더욱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법 제정만으로는 당시의 시대적 흐름을 되돌릴 수 없었고, 페스트라는 대재앙을 겪은 이후 막연하게나마 변화를 바라고 있던, 그리고 실제로 페스트가 물러난 직후 어느 정도의 경제적 이득을 맛보았던 농민들은 이러한 복고적인 정책에 크게 반발하였다. 결국 봉건제 자체의 모순이 심화되고 이에 대한 농민들의 불안이 가중되면서 14세기 말부터 농민들의 저항이 봉기의 형태로 격화되었고, 이러한 투쟁에 의해 마침내 봉건제는 점차 소멸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페스트는 분명 하나의 촉매이자 신호탄의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페스트는 중세 교회의 위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중세 유럽 사회에 단.
    사회과학| 2005.11.08| 6페이지| 1,000원| 조회(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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