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과 공민왕의 대원정책- 목차 -Ⅰ. 서론Ⅱ. 본론1. 대몽항쟁과 고려의 패배2. 충렬왕의 대원정책3. 공민왕의 대원정책Ⅲ. 결론Ⅳ. 참고문헌Ⅰ. 서론고려시대의 동아시아의 큰 특징은 유목의 민족들이 발흥하였다는 것이다. 10세기 초 거란족의 遼와 12세기의 金, 그리고 13세기 초 몽고는 칭기스칸 (본명 테무진 혹은 成吉思?) 에 의해 흥기하였다. 칭기스칸은 몽고고원의 통일을 이룩하고 중원을 정복하였다. 1227년 칭기스칸의 사후에도 오고데이(太宗; 1229~1241), 구육(定宗; 1246~1248), 몽케(헌종;1252~1258), 쿠빌라이(世祖;1260~1294) 등에 계승되어 유라시아 대륙 전반에 걸친 대 제국을 형성시켰다. 오고데이는 고종 17년(1231) 金을 정복하고 금 정벌의 일환으로 고려에 대한 침략전쟁을 하였다. 이러한 유목민족의 흥기는 동아시아의 세력권을 변화시켰으며 최씨 정권이 안정되어가던 고려사회의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다. 몽고는 30년간 6차례나 고려에 침입하여 결국 고려를 굴복시켰다. 고려는 이로 인해 전 국토가 황폐화 되었으며 황룡사 9층탑, 부인사 《대장경》 등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원은 동녕부(東寧府), 제주도에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 영흥지방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세워 고려의 일부지역을 직할령으로 만들고, 정동행성과 사신을 통해 고려 국정 전반에 간섭하였다. 또한 군사적으로는 제군만호부(諸軍萬戶府 )를 설치하여 고려의 군권을 장악하였으며, 경제적으로 수많은 공물을 강요하였고, 사회적으로는 원의 법제를 실시하여 고려의 자주성은 크게 약화가 되었다.그러나 고려는 이러한 시련의 시기에서 고려의 자주성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고군분투를 하게 된다. 충렬왕 때 부터 시작된 정치개혁은 공민왕 때 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충렬왕과 공민왕의 대원정책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아마 대원정책은 원의 세력의 여하에 따라서 그리고 국내정치개혁의 토대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따라서 본고에서 세계대제국이었던 원의음날인 7일에 강화에 천도하였으며, 이로써 고려는 끝까지 몽고에 항전하여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려 하였다. 고려가 최이를 중심으로 하여 강경한 항몽정책(抗夢政策)을 단행하자 8월에 몽고 태종은 고종의 출륙을 요구하며 다시 살례탑에게 명하여 고려를 공격하였다. 이것이 살례탑의 제2차 남침이다.제3차 침입은 1235년에 일어났는데 팔만대장경을 조판하며 곳곳에서 처절한 항전을 지속했다. 1239년 몽고는 남아가질 등 20명을 파견하여 고려왕의 친조를 조건으로 하여 몽고군을 철수시켰다. 이 문서의 요지는 「전에 보낸 문서의 요구에 따라 국왕이 친히 몽고에 입조하면 군대를 철수시키겠다. 요구에 따르지 않고 입조하지 않으면서 단지 외교문서만 보내고 병화를 면하려고 꾀한다면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몽고 병이 철수한 후에도 고려국왕은 입조하지 않았다.) 대신 고려는 현종의 8대손인 왕족 신안공전을 파견하거나 신앙공의 종형 영령공을 왕자라 하여 보내었다. 반면 몽고는 태종의 죽음으로 인해 새 대한(大汗)선정함에 따라 고종28년부터 33년까지 평화적 외교가 이루어졌다.그러나 고종34년부터 41년까지 몽고는 고종의 친조와 개경의 환도를 촉구하기위해 5 ? 6차 침입하였으나 팔만대장경이 완성되어가자 대항체제를 갖췄다. 마지막 제 6차 침입으로 몽고군은 경상도 내륙에 길을 따라 남진하여 경상도 남단지역 까지 이르렀다. 당시 『고려사』기록은 고종 41년 한 해 동안 몽고군에게 포로 된 자가 206,800여명 살육된 자는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고종 44년 최항이 사망하고 아들 최의가 집권하였으나 최의가 당시 나이가 어려서 권력의 취약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고종 44년 7월 당시 왕자를 파견하여 고려 요구에 응하자는 화의론이 고위 관리들의 공식적 의견으로 나왔고, 이것이 고종에 의하여 거부되자 최자와 김보정이 개경환도와 몽고에 대한 「출항(出降)」을 공식적으로 발의하였다.) 그리하여 고종45년 3월 최씨 정권의 붕괴이후 고려 태자의 몽고입조, 6월 강화도의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반의 정책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일련의 정책 중 충렬왕이 행한 첫 번째 정책은 몽고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여 여 ? 원 양 왕실간의 유대를 강화한 것이다. 이는 대외적으로는 원의 침략을 방지하는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왕권을 확립함으로써 무신들의 발호를 막고 원의 세력을 등에 업고 정사를 어지럽히는 간신들의 농간을 방지하려 한 것이다. 혼인관계를 통해 얻은 가장 큰 이득은 원의 여타 속국과는 달리 독자적인 국가운영이 가능하며 관인의 선발과 충원에 있어 독자성을 지닐 수 있었다. 물론 장기간에 걸친 항쟁 후에 스스로 귀부 한데다가) 남송과 대치하고 있었던 몽고로서도 고려의 남송의 연계를 차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기 때문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고려와 몽고의 왕실간의 결혼정책 때문이었다. 충렬왕과 몽고세조의 딸인 원성공주,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 충숙왕과 복국장공주, 조국장공주및 경화공주, 충혜왕과 덕녕공주의 결혼이 그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몽고는 고려 왕실의 수호자 이자 동북아 평화의 안전판이기도 하였다.)둘째, 다루가치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해결하였다. 1278년 2월에 충렬왕과 공주가 몽고를 방문하여 몽고 황제(세조)를 만나서, 다루가치를 비롯하여 여몽간의 정치적 현안에 관한의견 교환을 하였다, 충렬왕은 제주 다루가치는 역참을 마음대로 설치하니 이를 막아줄 것과 다루가치를 거치지 않고 고려가 국내의 사정을 바로 알리게 해줄 것, 다루가치가 순마소를 여러 곳에 두어 밤마다 순행하면서 사람의 내왕을 금하고, 또한 내왕하는 사람을 잡아갔으니 이들을 모두 석방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충렬왕은 다루가치에 의한 왕권약화와 국내에서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세조와 상의를 하였으며 결국 다루가치를 폐지하게 된다.셋째, 탐라도(耽羅島)를 다시 귀속하였다. 삼별초가 진도에서 탐라도(제주도)로 본거를 옮겨 고려 및 몽고에 항거하자 고려는 몽고군의 힘을 빌려 토평하였는데 세조는 탐라에 초토사를 두어 몽고의 직할령으로 삼았다. 이때 주둔군를 맞게 되어 재정을 맡고 있는 관리들은 자신의 재산을 다 털어도 관청의 창고를 채울 수가 없어 도망하는 실상이었다. 따라서 충렬왕은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함을 다음의 교서에서 볼 수 있다.5년 3월 하교하기를 “내가 들으니, 권세를 믿고 이치에 어두워 함부로 남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는 자가 있으며, 또 세력과 결탁하여 벼슬을 얻고 계급을 초월하여 승진하는 자가 있다 하니, 매우 부당한 일이다. 만일 바로 잡지 않는다면, 그 사람뿐만이 아니라 부탁을 받고 결탁한 사람도 모두 죄를 불 터이니, 원통하고 억울한 사람이 있는 자는 귀 ? 천 ? 존 ? 비를 막론하고 각각 어가 앞에서 글을 올려라. 청송관이 질질 끌고 판결을 늦춘다면 반드시 벌을 주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위의 기사 내용을 요약해 보면 왕의 측근세력들로 하여금 토지와 백성을 빼앗기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왕에게 직접 글을 올리게 함으로써 민생의 안정을 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충렬왕은 녹과전제 (祿科田을 분배하여 주는 제도)를 개정, 구급별감(救急別監))과 안집별감(安集別監))을 파견, 소금 전매제를 실시하여 국가재정을 확보하였다. 이러한 충렬왕의 개혁은 미비하였지만 애민을 발휘하여 피폐해진 백성의 삶을 어루만져 주었다.3. 공민왕)의 대원정책먼저 공민왕 시기의 대외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백여 년간 고려 및 세계를 지배하던 원이 쇠퇴의 징조가 나타나는 시기였다. 원은 제위계승과 귀족간의 내부갈등이 심화되었고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는 음락유연(淫樂遊宴)에 빠져 재정을 낭비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트리니, 이 틈을 타서 한족(漢族)의 반란세력이 사방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그 수는 무려 백여(百餘)에 달하게 되었다.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세력으로는 충목왕 4년(1348) 대주(臺州;折江省)에서 방국진이 군대를 일으키고, 공민왕 즉위년(1351) 영평(河北省 正定府)에서는 한산동, 한교아, 유복통 등의 홍건적이 일어나 세력을 키워 갔으며, 동왕 2년 호주(濠洲 ; 安徽省 鳳陽府 臨淮縣)에서는 곽자行中書省理問所) 혁파하는 등 자주정신을 고취시켰다. 이를 통해 대내적으로는 개혁에 반대하는 특권세력을 제압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실질적인 정치 독립을 획득했다.공민왕은 강남지방에 활거하고 잇던 군웅과의 빈번한 교빙을 통해 다원적 외교관계를 통하여 외압을 해소하려고 하였다. 남방의 군웅 가운데 가장 먼저 고려와 교빙한 세력은 장사성이다. 그는 공민왕 6년 7월 처음 내헌을 시작으로 동왕 14년 4월까지 전후 8년간 13회에 걸쳐 사절을 보냈다. 장사성 다음으로 사절을 많이 보낸 사람은 명주사도(明州司徒) 방국진이었다. 그는 공민왕 7년 5월부터 14년 10월까지 전후 7년간 5차례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와 같이 공민왕은 반원정책의 일환으로 강남에서 일어난 군웅과 자주 교빙하였으나, 중국대륙에 원을 누를 강대한 세력이 나타나지 못했다. )공민왕의 반원정책은 공민왕 10년 두 차례의 걸친 홍건적의 침공으로 인해 무너졌다. 반원정책을 포기하고 1361년에는 정동행성을 다시 설치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관제도 개혁이전의 상태로 돌려놓는다. 또한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김용이 ‘흥왕사의 난’을 일으키면서 원의 간섭이 다시 강화되었으며 공민왕 폐위음모가 일어나게 된다. 즉 원의 간섭이 다시 강화되자, 덕흥군은 최유등과 함께 순제의 어명으로 공민왕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 한 것이다. 또한 남해안과 경상도 일대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백성들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1365년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으로 인해 공민왕은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따라서 공민왕의 반원정책은 전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공민왕 12년 5월 무명의 승 신돈이 정계에 등장하게 되어 공민왕의 개혁을 이어간다. 신돈은 전민추정도감(田民推定都監)을 설치하여 권문세족들의 농장 확대, 농민을 노예로 삼는 등의 폐단을 시정하려고 하였다. 또한 공민왕 16년 국방병력을 강화하여 왜구 및 원명교체기의 군사적 압력에 대비하였다. 마지막으로 성균관을 중건하고 생원수를 증진시키고 오경사서재(五經四書齋 )를 분리하여 .
목차 :서론:본론 - 용어정리위안부의 역사생존자들이 요구하는 배상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일본정부의 입장일본정부의 위안부에 대한 사과독일과 일본의 전후배상 비교국제적 노력:결론서론우리나라의 입장에서 일본은 멀고도 가까운 나라이며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지리적으로는 매우 가깝다고 할 수 있으나 한국인들의 머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반일감정으로 인하여 또한 멀다고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양국의 우호적인 관계도 독도문제, 일본의 교과서 왜곡,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일본위안부’ 및 강제 징용자에 대한 보상 거부, 임나일본부설, 칠지도, 광개토대왕릉비 해석 등의 문제가 불거지면 관계가 악화되는데 이와 같은 문제는 과거 역사에서 청산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일 양국의 관계는 이렇듯 많은 문제들이 얽히고 섥혀 있는데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봐야 한다는 입장에서 일본위안부 문제에 대해 논해 보고자한다. 최근 국제적으로 전쟁 중 일본의 만행에 대하여 비난여론이 쏟아지고 있다. 지금부터 위안부해결을 촉구하는 국제적인 여론과 이에 대해 확실한 행동을 보이지 않고 있는 일본정부를 중점적으로 살펴 보도록 하겠다.본론1. 용어정리 - '일본군 위안부'란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되어 강제로 성폭행당한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이들을 '정신대'라는 말로 불러왔다. '정신대'는 전시체제 아래서 일본 제국주의의 전투력 강화를 위해 특별히 노동력을 제공하는 조직 등을 지칭한 일반명사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드는 1943년 이후엔 여자정신대 혹은 여자근로정신대에 한정해서 쓰이는 경향이 나타나다가 마침내 1944년 8월에 이르러 여자정신대근로령이 내려지게 된다. 이후부터 정신대란 말은 전쟁 노동력으로 동원된 여자에 한해서 쓰이게 된다. '여자정신근로령'에 의거하여 조직된 여자근로정신대는 남성들의 전쟁 동원으로 인해 부족해진 노동력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강점기 동안 더욱 심하게 수탈당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학교나 관청을 통해 근로정신대원으로 여성을 동원했다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또한 보국대, 봉사대, 근로대 등 여러가지 이름의 공식적인 동원 조직을 통해 공개적으로 동원된 여성들을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하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연행에는 이처럼 일제의 전시 총동원체제 하의 각종 노동력 동원 제도가 합법적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기 시작하면서는 군과 경찰이 나서서 폭력적으로 식민지 조선여성을 납치하기도 하였다. 또한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 현지 여성들을 강제로 연행하기도 했다. 게다가 노동자로 취업하는데 이용하던 일종의 직업소개소들은 매춘업에 여성들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소개소업자들이 취업을 희망하는 여성들을 모집하여, 이익이 많이 남는 매춘업으로 소개했던 것이다. 또 일제가 공공연히 매춘을 인정하고 공권력이 감독, 관리하는 공창제도를 이식한 후 사기수법에 의한 광범한 인신매매가 조장되었다. 특히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식민지 조선은 큰 타격을 받았고 이후의 전시체제 아래서 식민지 조선 여성들의 처지는 더욱 악화되었다.전쟁이 확대되고 군인의 수가 점점 증가하면서 일본군 위안부도 더욱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은 식민지의 여성을 손쉽게 동원함으로써 위안부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옛 일본군 군의관인 아소 테츠오의 증언에 따르면 1938년 12월 상해 위안소에 있던 대부분 피해자들이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일제는 더욱 광범위하게 일반여성의 위안부 동원에 힘썼다. 일반 조선의 젊은 여성들이 성병에 감염되어 있을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도 동원의 중요한 이유였다. 일제가 일본군 위안부 정책을 기획하고 수행하는 데 식민지 조선여성을 얼마나 잘 활용했는지 일본군 위안부 연행을 통해서 알 수 있다.2) 위안소 생활위안소는 군이 직접 설립, 경영했으며 민간에게 위임하기도 하였다. 민간 운영의 위안소는 군대의 보호, 감독 및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일본군 위안소 생활은 기을 쳤지만 사방에 군일들과 보초들이 있어서 갈수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나는 결국 잡혀서 엄청나게 맞았습니다. 그 일 때문에 나는 왼쪽 귀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처음 강간당하던 날, 도무지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너무 어렸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나는 하루에 열명 정도의 남자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매주 검진을 받았습니다. 만주의 위안소에서 나는 전혀 보수를 받지 못했고 외출도 허락되지 않았으며, 시설이 매우 나빠 서 삶이 견딜 수 없이 힘들었습니다. 몇몇 병사 들은 콘돔을 사용하지 않아서 나는 임신을 해야 만 했습니다. 약초를 먹어서 그 사태를 예방 해보려 했지만 효과가 전혀 없었습니다. 임신 중 에도 나는 6개월째까지 성 관계를 가져야 했습니다. 8개월째에 나는 아기를 낳았지만, 그 아기는 거꾸로 나왔기 때문에 곧 죽었습니다. 출산 후에 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서 이가 많이 빠졌 습니다. 그 후 다시 한번 임신했지만 역시 아기는 죽었습니다."3) 해방 후의 삶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군 위안소에 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위안소를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위안소의 존재를 은폐하려는 일본군에 의해 집단적으로 유기되거나 학살되었다. 한편 연합군의 포로로 있다가 귀국선을 타기도 하였다. 해외에 남겨진 대부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우처럼 위안소 경험에 대한 수치심으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 남아있는 경우도 많았다. 고국으로 돌아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도 여성의 순결을 중요시하는 가부장적 사회가 주는 심적 고통과, 위안소 생활의 후유증으로 남아있는 성병과 육체적 상처, 계속되는 빈곤으로 인한 생활고로 크게 고통받았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식당일, 파출부, 막노동 등 육체적 노동에 종사하면서 직접 생계를 유지하면서 생활하였다. 대다수 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위안부 경험에 대한 수치심과 경제적 어려움이었다. 보다 더 큰 고통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는 평범한 여성의 삶이 해를 줄이고 향후 재발을 막을 수 있도록 적절한 수준에서 배상한다.4. 일본군 성노예제에 대한 철저한 조사 및 자료에 대한 공개와 역사적 보존을 위한 절차를 수립한다.5. 생존자들의 자문으로, 전쟁, 과도기, 점령기간 행해진 성 범죄의 역사적 기록을 수행할 진실과 화해 위 원회 설립을 고려한다.6. 희생자와 생존자들의 기억과 "재발방지"에 대한 약속을 위해 박물관과 도서관과 같은 기념물을 설립하 여 희생자와 생존자들을 인식하고 예우한다.7. 국민과 청소년,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을 확보하기 위해 피해와 위반 사실을 모든 교과서에 수록하며 공 식, 비공식의 교육 관련 제안을 후원하고 학자와 작가들을 지원한다.8. 군 성노예 제도와 성적 불평등간의 관계에 대한 교육과 성 평등 구현의 필수조건들, 그리고 관련 지역 내의 모든 이들의 평등 존중에 대한 교육을 지원한다.9. 귀환을 원하는 생존자를 송환한다10. "위안소" 에 관한 모든 문서와 기타 자료들을 공개한다.11. "위안소" 설립 및 인사와 관련된 주요 가해자들을 밝히고 처벌한다.12. 사망자들의 가족과 친지의 요청에 따라 사망자의 유해를 찾아 되돌려 준다.일본정부는 그 동안 법적 의무가 없다는 이유로 의미 있는 권고안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들이 ‘형식적 의사표시의 보상’ 또는 ‘인도주의적’ 조치로 부르는 일부 제한된 조치들은 유용하기는 했으나 충분하지 못했다.4.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 14 조‘일본에 의해 전쟁기간 동안 발생된 피해 및 고통에 대해 배상을 해야 함이 인정된다. 일본의 재정이 현재로서 충분하지 못한다는 것이 인정되지만, 실행가능 한 경제력을 갖추게 되면, 이러한 모든 피해와 고통에 대한 완전한 배상과 동시에 다른 의무들 역시 이행해야한다.’‘연합국은 모든 배상 요구 및 전시 일본 혹은 일본인의 모든 행위에 대한 연합국이나 연합국의 국민들에 의한 기타 요구 등을 보류한다’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연합국 내의 일본 의 재산에 대한 제한적인 몰수와 일본의 점령에 의한 피해에 대한 배상을 결정했다. 조약의차 세계대전 동안 일어난 일들에 대한 수많은 사과들을 지적하며 "너무 많은 사과로 인해 피로를 겪는다" 고 말해 왔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과들은 일본 관리들의 ‘피해 최소화’ 의도로 이루어진 격앙할 만 한 발표였다. 이들의 실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사과의 부적절함이 드러난다. 그러한 발표가 개인의 입장인지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인지 불분명 하였다. 생존자들은 일본 최고 권력 기관으로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와 천황으로부터의 사과를 요구한다.2차 세계대전 중 발생한 범죄에 대한 많은 사과들은 ‘위안부’라는 특정 위반 사항을 언급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과거에 대한 후회를 표명하였다. ‘위안부’가 사과에 언급된 경우 에도 초점은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대한 피해였다. 2001년 국민기금을 통해 제공된 ‘일본 국민으로부터의 속죄’라는 ‘위안부’에 대한 사과문에서도 고이즈미 총리는 1995년 이후 모든 일본 총리들이 사용했던 공식을 따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일본군과 연관된 위안부 문제는 많은 여성들의 명예와 존엄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었다. 일본의 총리로서 나는 헤아릴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으며 위안부로서 치유하기 어려운 물리적, 정신적 상처를 입은 여성들에게 깊은 사과와 속죄를 보낸다. 우리는 과거의 무게와 미래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사과와 속죄의 마음으로 이 사건의 도덕적 책임에 대해 고통스럽게 인식하며 일본이 지난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이를 다음 세대에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일본은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대한 폭력과 여러 부당함을 다루는 데에 있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가슴속 깊은 진심으로 여러분 모두 남은 생에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 하는 바이다."이러한 사과가 속죄에 부합하는 표현이었기는 했으나 국제법 위반에 따른 법적 의무의 문제들을 명백히 비껴가며, 잘못한 행위의 성격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지 않다. 단지 ‘군의 개입’에 대한 언급은 잘못된 행동에 대해 일본 정부와 간격을 두려는 시도로 있다.
-인류의 기원과 진화-- 인류의 기원과 진화 -< 目 次 >>1.서론2. 인류의 기원3. 현생인류의 기원4. 문명의 출현5. 결론6. 참고 문헌1. 서론인류의 기원에 대한 문제는 한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찾기 위해 던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같다. 자신의 본원에 대한 탐색은 곧 자신의 자아정체성을 형성시킴과 동시에 보다 고차원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인류의 기원에 대한 질문 또한 오랜 세월에 거쳐 많은 학자들에 의해 다루어진 문제이다.중세시대에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인류의 기원은 하나님이 천지를 말씀으로 만들고 인류 최초의 남자 아담은 흙으로 만들어 그 코의 생명을 부어 만들었고, 인류 최초의 여자 하와는 그의 갈비뼈 중 하나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중세시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였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이다. 따라서 다른 동물에 비해 우월한 그리하여 그들을 다스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하였다.그러나 근대에 들어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으로 인해 이성적인 눈으로 합리적인 생각을 하게 된 근대적 사람들은 중세의 창조 관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였다. 1758년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는 그의 저서 『자연의 체계』에서, 인간을 이명법의 체계에 따라 ‘호모 사피엔스’라고 이름 붙이고 하나의 종으로 분류했다. 1859년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인간도 다른 생물로 부터 진화해 왔음을 다시 말해 인류의 조상이 원숭이임을 암시했다. 이로써 인류의 기원에 대한 시각은 창조론과 진화론 이 두 가지로 나뉘어졌다.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이 수수깨끼와 같은 문제는 과학자와 신학자들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이러한 두 논의 가운데 본인은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이분 화된 논리에서 벗어나 ‘역사가의 눈’으로서 인류의 기원과 발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특히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인류가 어떻게 만들어 졌으며 또 현재와 같은 인류가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인류가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루시라는 애칭으로 불리 우는 호미니드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호미니드 화석이 거의 완전하게, 약 40퍼센트 이상의 뼈대를 갖춘 채 발견되었다. 이는 300만 년 전의 것인데. 지질학상 연대로 볼 때 이 시기는 적어도 약 500만 년 전 인류와 침팬지가 공통의 조상에서 처음 갈라져나간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이다.이를 통해 고고학자와 인류학자는 인류의 역사를 재구성 하였는데 첫째 약 200만 년 전 인류의 진화 계통나무는 크게 두 개의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호모 가지로 가지 끝은 마침내 현생 인류에 도달하며, 또 다른 가지는 오스트탈로피테쿠스 가지로 결국은 절멸 했다. 믿을 만한 화석들이 발견되지 않아, 아직 두 가지가 언제 나뉘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500만 년 전에 갈라졌다고 해석한다. 둘째, 다윈이 주장한 ‘아프리카는 인류의 요람’이라는 예언이 적중하였다. 셋째, 스티븐 제이 굴드가 언급한 ‘큰 뇌우선 가설’에 관한 검증이 이루어졌다. 그는 두발로 걷는 자세가 일찍이 이루어졌으며, 점차 두뇌의 크기가 놀랍게도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고 보고 있다. 넷째, 인류가 직립보행 하면서 팔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연모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이로써 사냥과 채집이 가능해 졌고 이로써 사회생활 과 함과 동시에 음식 분배행위가 이루어 졌다.호모에레투스의 단순한 주먹도끼 문화는 그 보다 큰 암석의 박편을 이용해 만들어진 한결 복잡한 기술에 자리를 내주었다. 원시 사피엔스는 새로운 기술을 무려 60개나 되는 도구를 만들었다. 새로운 수준의 기술과 능력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약 3만5천 년 전 유럽에서 돌의 박편을 이용해 정밀한 도구를 만들었다. 뼈와 뿔을 이용해 옷을 만들기 위한 도구, 조각이나 돋을새김(양각)을 하기 위한 도구를 만들었다.3. 현생인류의 기원인류의 선사시대의 전반적인 모습은 네 가지로 그 주요단계를 나눌 수 있다. 최초의 단계는 사람과(科)의 기원으로, 두 발을 가지고 직립보행 하는 유인 진화해 간 인류라는 나무의 한 가지다. 네 번째 단계는 현생인류의 기원으로, 달리 찾아볼 수 없는 언어와 의식, 예술적 상상력, 그리고 기술 혁신의 능력, 도덕적 감각을 완벽하게 갖춘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진화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란 현대적 호모 사피엔스를 지칭한다.그렇다면 현대 인류의 기원은 언제인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었을까? 그러나 현대 인류의 출현 시점에 대한 논의는 아직 모든 사람이 만족할 만한 수준의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비록 화석 증거가 풍부하며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다량의 두개골, 비교적 완전한 스무 개의 골격이 복원되었으며, 네안데르탈인의 뼈가 최초로 발견된 1856년 이래 그 시원이 약 3만 년 전인가, 약 1백 50년 전인가에 대한 문제로 압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러하다.그러나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약 3만 4천 년 전의 인간의 유골 화석은 모두 완전히 현대적인 호모 사피엔스의 것이다. 몸통은 덜 억세고 근육의 발달 정도도 약하며, 얼굴은 평평해진 데다 두개골은 높아지고, 두개골의 뼈 두께는 얇아졌다. 눈 위의 돌출부위도 덜 두드러지고, 뇌의 용적도 더 커졌다. 따라서 우리는 정확히 그 시점이 언제인지는 여전히 알 지 못하지만 약 1백 만 년 전과 3만 4천 년 전 사이에 진화적인 발전이 이루어져서 현대 인류가 태어나게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에서 발견된 그 기간에 해당하는 화석과 고고학적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실제로 진화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인류의 해부학적, 행동적 특징이 나타나게 된 과정을 기술하는 진화적 패턴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모델이 있다.첫째, 다지역 진화설(multireginal-evolution hypothesis)라 불리는 것으로, 현대 인류의 기원을 구세계 전역을 포괄하는 현상으로 보았다. 즉 호모 에렉투스의 집단이 형성된 곳에서는 어디서나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크로스 걸쳐 광범위한 인구 이동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기존의 현세 이전 인류를 대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 현대 인류에 대한 새로운 모델은 분자유전학적 증거로 미토콘드리아 이브 가설이 있다. 미토콘드리아라는 작은 세포기관에 들어 있는 유전물질, 즉 DNA를 철저히 조사했다. 이를 통해 미토콘드리아의 DNA는 모계를 통해 유전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한사람의 여자 조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분석에 따르면 현대인은 아프리카에서 약 15만 년 전에 살았던 한 여성에게까지 유전적 선조를 추적할 수 있다. 이것은 아프리카 기원설을 뒷받침 하는 것으로서 이들이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과 아시아 대륙으로 이주함으로써 발전하게 되었다.현재의 인류는 진화과정 중 동물과는 다른 지능과 언어의 발달이 이루어지면서 적자생존의 자연세계에서 우월한 생존 방식에 의해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 차이 때문에 인류는 기술과 예술 그리고 정신세계에서, 새로운 단계인 참인간시대의 문 앞까지 발전하였다.4. 문명의 출현앞서 본인은 인류가 어떻게 기원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진화과정을 거쳐 현재의 인류가 출현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현재의 인류가 어떻게 사회를 구성하고 문명을 출현시켰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것은 더 이상 인류가 원시적인 유인원세계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프랑스 철학자인 르네 데카르트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이성적인 영혼이야말로 인간과 동물을 절대적으로 구분하는 특성으로 규정지었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합리성이 서로 다른 단어들을 배열하여 정리된 언어로 표현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 위에서 이루어진다면, 언어란 인간과 동물 사이에 가로 놓인 건널 수 없는 차이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도구라고 말할 수 있다. 언어는 생각한 것을 우리들의 세계로 전달하며 우리들의 세계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문화 그 자체를 뜻하는 것이다. 즉 언어가 현대 인간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우리의 조상들에게 언어또한 사회조직은 모방과 가르침에 따라 식량획득에 필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사회화를 가능하게 하였다.1만 년 전 까지 인간은 극지방과 열대 우림 같은 전혀 다른 자연환경에서 성공적으로 사는 방법을 익혀 지구의 구석구석을 인간의 생활 터전으로 만들었다. 그 후 5000년 동안에 인간은 중동 지방과 동남아시아,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및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각기 동식물의 사육방법을 반전시켰다.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이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은 최초의 농부가 되었다. 농업의 채택은 사람들의 수가 적고 유목생활을 하는 밴드조직보다 인구밀도가 높은 마을에서 정착생활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집단을 조직화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복잡하고 계층적인 조직으로 대체 되었다. 마을은 커져서 도시가 되고 이어서 국가로 성장하였다.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자연적으로 지역의 방어가 중요하게 되었다. 즉 ‘신석기혁명’은 사회시스템 전체를 변화시키게 되었고 문명을 출현시키게 되었다.인류학자들은 도시국가라는 존재가 곧 문명이라고 정의하며, 12,000년 전이나 또는 조금 더 오래 전에 최초로 정착사회가 일어났고, 6,0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 사회경제적 복잡성이 나타나는 대규모 도시국가들이 출현하였고, 그리고 2,000~3,000년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발전한 정치조직이 세계 주요 지역에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는 새로운 변화로 참된 질적 변화가 인류의 시대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문명은 다른 문명 속에 유산으로 흡수되었으며, 그 과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되풀이 되어 오고 있다.5. 결론인간과 침팬지가 유전학적으로 99퍼센트 이상 동일하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단 1%가 인간과 침팬지를 구분하게 되는 유전학적 특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마처럼 신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특권을 박탈당하고 동물의 한 후손으로 격화된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 1% 덕분에 우리는 자연적인 즉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자연적 본능상태의 삶이 아닌 문명.
蔚山 盤龜臺岩刻畵에서 볼 수 있는 고래사냥 문화1. 서론우리나라의 대표적인 巖刻畵는 상주 양아리 바위그림, 울산 대곡리?천전리, 고령 양전리, 경주 석장동, 영일 칠포리 등이 있다. 그 중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행정구역상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234-1번지 일원에 위치하며, 인접한 천전리 서석(川前里 書石, 국보 147회)과 함께 암벽에 조각된 암각으로서 국내?외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유적으로 인식되고 있다.)巖刻畵란 바위벽에 동물 ? 식물 ? 광물성 물감으로 그리거나, 돌이나 금속으로 쪼고 갈거나 그어 파내는 기법으로 그린 그림이다. 巖刻畵는 다른 유물이나 유적으로 밝혀내기 어려운 선사시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복원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사는 가운데 보고 느낀 자연 현상이나 경험 등을 바탕으로 신화 ? 전설 ? 주술 ? 종교 ? 역사 ? 교육의 사유체계를 뭉뚱그려 생생하게 표현한 종합언어이다.그러나 대곡리 반구대암각화에 대한 그간의 연구에서 수법, 내용, 연대, 성격에 대한 언급은 있어 왔지만, 일반적인 추론에 그친 단편적인 생각들이어서 그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하지 못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생활의 복원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암각화에 대한 개괄적 설명과 先史藝術, 특히 울산반구대 지역의 암각화를 중심으로 先史時代에서 고래사냥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2. 본론1. 巖刻畵란 무엇인가암각화란 주로 바위그림(rock art) 용어로 통칭되는데 동굴이나 한데 유적에 있는 바위벽에 동물 ? 식물 ? 광물성 물감으로 칠하거나 뿌려서, 혹은 돌이나 금속으로 쪼고 갈거나 그어 파내는 기법으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주로 이 바위그림은 선사문화를 연구하는데 다른 유적이나 유물로 밝힐 수 없는 자연환경, 정신세계, 생활 모습 등 다양한 문화와 환경, 신화, 주술, 종교, 역사, 교육 등 을 추측, 고증 할 수 있다. 바위그림의 성격을 풀이하는 데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 되고 있는데, 풍요주술신앙, 토템신앙, 감응주술신앙, 性상징, 지구의 사계절과 연관된 생산주술의 결과라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의 바위그림은 풍요주술, 감응주술, 죽음과 관련한 내세 신앙으로 천신에게 보내는 그림언어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철기 시대의 바위그림은 주로 그림을 통해 기념비적이거나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다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따라서 바위그림의 연구는 바위그림의 위치와 자연환경, 기법 및 양식의 변화 분석, 내용 분석, 편년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선사 문화를 복원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울산 대곡리의 고래잡이 그림은 배와 선원, 작살 잡이, 고래에 박힌 작살에 매달린 끈 등 고래잡이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바다의 수온, 고래의 분포, 식생, 생활상, 도구의 발달, 교육훈련, 고래 숭배신앙(whale cult) 등을 파악할 수 있어 역사적 고증의 자료가 된다.2. 先史藝術의 기원과 주제예술의 시작은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문화 속에 움터 왔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술품은 대상물뿐만 아니라 어떤 상징을 사람의 손으로 표현한 것, 어떠한 모습을 만들고 이 같은 행동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즉 어떠한 뜻을 가지고 어떠한 모습을 만들려는 행위로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선사시대의 예술품은 크게 벽 예술품과 지닐 예술품으로 나뉘는데, 진정한 예술품이 출현한 것은 일반적으로 후기 구석기 시대에 속하는 Aurignacian기가 처음이라고 알려져 오고 있다. 하지만 중기구석기시대의 네안데르탈인(Homo sapiens neander thalensis)은 물감을 몸에 바르기도 하고 죽은 사람을 묻어주고 슬퍼하는 등 죽음과 영혼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예술의 기원이 중기구석기시대 이전으로 올라가리라는 견해들이 있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1963년 웅기 굴포리 유적과 1864년 공주 석장리 유적의 발굴을 통한 구석기 유적이 확인된 이래의 단양 금굴에서 최고연대인 70만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3. 蔚山 盤龜臺岩刻畵蔚山 盤龜臺岩刻畵 (국보 제285호)는 행정구역상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234-1번지 일원에 위치한다. 천전리에서 사연리로 흐르는 대곡천변의 깍아 지른 듯한 절벽에 새겨져있다. 1971년 동국대학교 불적 조사단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을 당시 반구대 암각화는 하류에 위치한 사연댐의 담수량에 따라 물위로 드러났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상황 이었다. 또한 매년 한번씩 침수를 반복하면서 암벽의 표면은 계속적으로 탈락되기 시작하였고 암면의 전체에 커다란 균열이 발생했으며, 표면은 점차로 닳아 암각의 깊이가 얕아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보로 지정된 이후 관람인파의 증가로 인해 부작용이 제기 되었다.반구대에 대한 학계의 관심 속에 진전된 연구 성과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반구대 암각화가 대부분 물 속에 잠겨있어 접근하기 어려우며 국보로 지정되면서 암각화에 대한 접근이 현실적으로 제한을 받게되어 1971년 조사된 도면에 근거하여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또한 추가적인 도면의 보완과정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개별 암각 형상에 대한 해석에서 많은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암각그림의 수는 총296점이며 인물상이14점, 동물상이 193점, 도구상이 11점, 그리고 정확한 현상의 파악이 곤란한 그림이 78점이다.반구대 암각화의 내용은 크게 바닷짐승과 뭍짐승, 사람, 도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바닷 짐승으로는 고래, 물개, 바다거북등이 발견되며, 뭍짐승으로는 사슴, 호랑이, 멧돼지, 개 등이 여럿 보인다. 사람은 얼굴만 그린 경우와 정면상 및 측면상, 배에 탄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도구로는 배, 울타리, 그물, 작살, 방패, 弩와 유사한 물건 등을 볼 수 있다. 이외에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다수의 그림 또한 있다. 암각화의 표현기법은 표현 대상의 내부를 모두 쪼아낸 面刻, 윤곽만을 쪼아내는 線刻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두 기법이 혼합된 경우를 상정하기도 하지만 이를 제3의 기법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는 학자간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4. 蔚山 盤龜臺岩刻畵에서 볼 수 있는 고래사냥 문화전술했듯 반구대 암각화는 덧그려져 있는 그림으로 그 수법과 형태에 따라 따로따로 떼어낼 수 있어 평면그림과 선 그림으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그 수법은 각각 모두 面刻, 線刻이다. 평면그림(面刻)은 다시 물짐승〔고래중심〕 부분과 뭍짐승 〔사슴중심〕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고래그림 중 몇 가지를 예를 들어 살펴보겠다.먼저 벌거벗고 성기를 내민 채로 춤추는 듯한 남자를 향해 3마리의 거북과 10여 마리의 고래가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이 있다. 이것은 식량자원으로 중요한 고래들이 많이 자라나서 잡혀 주기를 바라는 것으로서, 고래사냥을 나가기 전에 행하였던 어떤 의식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남자는 의례의 주인공으로 고래사냥을 위한 의식집행인, 즉 남성의 생산력의 상징성과 함께하는 주술적 기도 인이거나, 고래사냥꾼들 가운데 가장 우두머리 일 것으로 생각된다. 돋새김으로 된 새끼고래를 업고 있는 어미고래 그림은 새끼 밴 고래로 보아 풍요의 기원, 죽은고래의 영혼, 영혼의 집 자리로의 재생을 상징한다는 견해, 새끼를 업고 훈련시키는 모습 (귀신 고래로 가늠) 이라고도 해석된다. 그 외에도 작살이 돋새김 된 고래(작살로 심장부를 정확히 맞힌 고래를 그림으로 사냥 공감 주술의 의미로 해석된다), 물을 뿜고 있는 고래(고래의 종류는 긴수염고래로 가늠된다), 배그림과 함께 그려진 고래 등이 있다.線刻은 3,4마리 정도의 고래를 제외한 거의 모든 그림이 멧돼지, 호랑이, 사슴 등 뭍짐승의 그림이다.이중 거꾸로 뒤집혀 그려진 큰 고래의 배에는 10여 줄 이상의 선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독특한 밭고랑 무늬의 표현이나 고래그림의 크기로 보아 흰긴수염고래로 가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