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화의 이해(프랑스 미술의 역사)프랑스.. 하면 떠오르는 것은, 에팔탑 이나 퐁뇌프 다리등 아름다운 도시나 건출물 들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바케트를 씹으며 루브르 박물관등을 돌며 여러 예술품들을 감상하는 여유로움을 상상한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나라이지만, 매체에서 보여 지는 프랑스는 예술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대표적인 나라 중에 하나이다. 세계각지에서 모여든 예술가들을 포용해 ‘예술가의 천국’으로 불릴 만큼 폭넓고 깊이 있는 문화예술을 자랑하고 있는 프랑스는 포도주와 고급요리, 그리고 자국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프랑스 문화의 근간을 이룬다. 하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프랑스를 예술의 나라라 일컫게 되는데 하나의 영향을 미친 피카소라는 예술가와 그 예술가가 활동했던 프랑스의 회화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았다.프랑스는 이탈리아와 더불어 서유럽의 대표적인 미술의 나라이며, 특히 19세기부터는 미술운동이 유례없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미술은 세계의 지도적 위치를 누려왔다. 뿐만 아니라 인류 최고의 회화라 일컽어지는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를 비롯하여 고대, 중세 ,근세, 근대의 각 시대에 갖가지 뛰어난 작품들을 남겨놓고 있어 프랑스 미술의 다양하고 풍성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프랑스 회화의 역사는 중세의 ‘미세화(miniature)’로부터 시작되었다. 필사본이나 기도서 따위에 삽화로 그려진 이 그림은 메롤링거 왕조(482-751)와 카롤링거 왕조(751-987) 시대에도 제작되었으나 프랑스, 특히 파리가 그 중심지가 된 것은 13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이 때의 화가들은 새롭게 자연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배경을 단조로운 금박에서 사실적인 풍경으로 바꾸었고 일상생활의 장면을 화폭에 담으려 하였다. 이러한 화풍은 14세기에 우아하고 세련된 프랑스 궁정 회화 양식으로 꽃을 피우게 된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화가인 주앙 퓌셀(Jehan Pucelle)은 이탈리아 회화의 원근법을 연상시키는 공간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파리파 필사본의 기준 양의 바로크적 특징을 고전주의로 대체하려 하였는데, 이는 17세기 중반의 프랑스 합리주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프랑스 고전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두 화가는 젊은 시절 프랑스를 떠나 주로 로마에서 활동하였던 니콜라 푸셍(Nicolas Poussin)과 클로드 로렝(Claude Lorrain)이다. 푸셍은 신화, 성서, 고대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엄격한 고증을 거쳐 명확하고 질서 있는 구도와 형태 속에 재현하려 하였다. 로렝은 지중해의 밝은 햇빛에 싸인 이상화된 고대의 정경을 그렸다.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는 촛불 등 인공의 빛을 이용한 강한 명암의 대비를 통해 장엄함과 신비로운 고요함의 효과를 만들어내었다. 르 넹 형제(freres Le Nain)는 소박한 농민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지금까지 프랑스 회화에서 볼 수 없었던 자연주의적 풍속화를 개척하였다.17세기 후반 프랑스 미술은 루이 14세(Louis XIV)의 절대 왕권을 위해 봉사한다. 샤를 르 브룅(Charles Le Brun)은 왕을 위해 베르사이유 궁전의 천장들과 거대한 계단을 장식하고 후세를 위해 왕의 초상을 그리면서 화려한 양식에 고전주의 미술의 장엄함이 자리잡게 하였는데, 그와 더불어 회화는 건축적이고 장식적인 특성을 갖게 되었다. 루이 14세의 통치 말기에 야셍트 리고(Hyacinthe Rigaud)와 니콜라 드 라르질리에르(Nicolas de Largilliere)는 초상화의 대가로서 이 장르의 발전에 기여한다.18세기말에 로코코는 새로운 고전주의에 자리를 내준다. 신고전주의(neo-classiciame; 1760년경에 시작되어 1780-1790년대에 그 절정에 달하였고 1850년경까지 계속되었다)의 이상은 고대 그리스·로마 미술을 규범으로 삼아 고귀하고 위대한 내용을 단순하고 간결한 형식 속에 담는 것이었는데, 이 고대 지향의 밑바탕에는 무절제하고 향락적이고 감각적인 로코코 미술에 대한 염증이 있었다.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과 폼페이(Pompei케치만 하고 그림은 아틀리에에서 완성하였다. 카미유 코로(Jean-Baptiste Camille Corot)는 바르비종파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이 유파의 기법보다는 고전주의적 기법에 충실하였고 자신의 그림에 낭만주의적 시정을 부여하였다는 점에서 구별된다.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사실주의(realisme)는 19세기 중반에 출현하여 지배적인 흐름을 형성한다. 이 흐름은 세 사람의 화가에 의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실현된다.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는 현실에 대한 냉철한 관찰을 통해 당시의 정치·사회상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하층계급의 비참한 삶을 그림으로써 사실주의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849년부터 바르비종에 정착한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는 『이삭 줍는 여인들(Les Glaneuses)』(1857)과 같은 작품을 통해 농민들의 노동하는 모습을 경건하고 엄숙하게 묘사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사실주의적 흐름은 고전주의적 이상과 낭만주의적 정서를 모두 거부하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간상을 그리려 하였던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에 의해 마련되었다. 그는 “회화는 눈에 보이는 것이므로 보이는 사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그리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돌 깨는 사람들(Les Casseurs de pierres)』(1850), 『오르낭의 매장(Un Enterrement a Ornans)』(1851)과 같이 일상에서 소재를 취한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인상주의(impressionnisme)는 이러한 사실주의적 흐름의 한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인상주의자들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정신에 입각해 자연이나 일상적인 삶을 비개성적으로 기록하는 사실주의적 태도에 일반적으로 공감하여 역사화를 비롯한 상상적인 예술을 거부하고 동시대에 자신들이 직접 체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를 개선하는 문제에 대해atte)』(1884-1885)라는 작품에 잘 나타나있다.후기 인상주의(post-impressionnisme)는 1880년경부터 야수주의가 등장하는 1905년까지 인상주의로부터 발전한, 혹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다양한 경향의 회화 운동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폴 세잔(Paul Cezanne), 폴 고갱(Paul Gauguin),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가 포함된다. 세잔은 1874년과 1877년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가하였으나 순간의 인상과 빛의 효과를 묘사하는 것보다 자연의 구조와 형태를 분석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미묘한 색조의 변화를 통해 그림에 입체감을 부여하였고 대상으로부터 추출한 기본적인 구조를 기하학적인 형태로 표현함으로써 뒤에 출현할 입체주의를 예고하였다. 그의 이러한 경향은 현대적인 방법으로 푸셍의 고전주의적 형식 구조를 실현하려 하였던 『목욕하는 여인들(Les Grandes Baigneuses)』과 『셍트 빅투아르산(La Montagne de la Sainte-Victoire)』 연작에 잘 나타나 있다. 고갱과 반 고흐는 색채와 선을 단순한 재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서적·상징적 가치를 위해 사용하려 하였다. 인상주의의 사실주의와 신인상주의의 과학주의에 반대한 고갱은 검은 윤곽선으로 분할된 단순한 형태 속에 선명한 색채를 평면적으로 칠하는 기법으로 관념적이고 장식적인 분위기를 창조하였는데, 그는 이를 ‘종합주의(synthetisme)’라고 불렀다. 고갱과 에밀 베르나르(Emile Bernard) 등 퐁타방파(ecole de Pont-Aven: 이들이 한 데 모여 그림을 그렸던 브르타뉴의 마을 이름에서 유래)에 의해 확립된 이 양식은 뒤에 나비파(Nabis; 이 이름은 ‘예언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Navi’에서 온 것이다)와 상징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 네덜란드 출신인 반 고흐는 처음에는 어두운 색조로 농민과 노동자의 모습을 그렸는데, 1886년 파리에 와 인상주의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상징적태의 표현에 관심을 가졌으며, 그 형태를 묘사함에 있어서도 원근법과 3차원적 공간을 포기하고 2차원의 평면에 대상의 입체성과 부피를 묘사하려 하였다. 이렇게 하기 위해 그들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관찰된 대상의 부분적인 모습 대신 그 대상의 다양한 모습을 기하학적 평면으로 분해하여 한 화면에 재구성하려 하였다. 그래서 이 시도가 계속된 1911년경까지를 ‘분석적 입체주의(cubisme analytique)’의 시기라고 부른다. 브라크와 피카소는 1912년경부터 콜라주(collage: 사진, 신문지와 그 밖의 사물을 배열하여 채색된 화면 위에 아교로 붙이는 기법)와 파피에 콜레(papiers colles: 콜라주의 일종으로 화면에 벽지 등 장식적인 종이를 붙이는 기법) 기법을 사용하여 실제 사물을 그림에 도입함으로써 자신들의 그림의 사실성을 강조하고 이를 회화 기법에서 비롯된 환영적 요소와 대비시키려 하였는데, 이로써 입체주의의 두 번째 단계인 ‘종합적 입체주의(cubisme synthetique)’의 시기가 시작된다. 이 시기는 그리려는 대상을 나타내는 상징을 이용하여 그것을 재창조하려 하였던 후안 그리스에 의해 주도되었다. 입체주의 시대의 레제는 원통 모양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추상화를 그렸다. 색채 이론의 미적 응용에 관심을 가졌던 로베르 들로네는 순수한 스펙트럼의 원색을 기하학적으로 구성하는 추상적인 입체주의 회화를 창시하였는데, 이는 ‘색채 입체주의’ 또는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표현에 따라 ‘오르피슴(orphisme)’이라고 불린다. 아폴리네르는 브라크, 피카소, 그리스의 엄격하고 지적인 입체주의와는 달리 서정적 요소를 도입하려 한 시도를 가리키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하였고 로베르 들로네와 그의 부인인 소니아 들로네(Sonia Delaunay), 프랑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페르낭 레제, 체코슬로바키아의 화가인 프란티셰크 쿠프카(Franti?ek Kup
“클레오파트라”우리는 종종 ‘미’를 대표하는 여자로 클레오파트라를 거론한다. 내가 가졌던 그녀에 대한 이미지 역시, ‘매력적인 이집트 여왕’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매혹적인 여성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무기로 남성들을 사로잡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 cm만 낮았어도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라는 파스칼의 말이 있을 정도로 그녀가 역사에 미친 영향은 컸던 것 같다.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를 단지 요부로서의 이미지만으로 인식하고 있다. 시저와 안토니우스와의 사랑 이야기나, 그녀의 미용에 관한 에피소드들이 너무 유명하기 때문일까? 클레오파트라가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왕이었다는 말은 많이 들어왔지만, 솔직히 우리는 그녀의 미모만이 그녀를 왕위에까지 이르게 했다고 생각해왔다. 그녀의 외모에 가려 그녀가 가진 현명함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결론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이번 과제를 위해 영화를 보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고정적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깰 수 있었다는 것이다.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1963년 작 “클레오파트라”는 시저가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남동생 톨레미 사이의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이집트에 오면서 시작된다.클레오파트라는 시저를 유혹해 결국 이집트의 왕좌를 차지하고, 그녀의 미모와 도도함에 반한 시저는 로마에 부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식을 올린다. 얼마 뒤 로마로 돌아온 시저는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무리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3년 뒤, 시저의 부하였던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하지만, 로마의 실권자인 옥타비안과의 전쟁에서 참패를 하고 만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자살하고, 이집트와 아들, 사랑하는 사람까지 잃은 클레오파트라도 자결하고 만다.여기까지가 이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허구가 아닌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스토리 자체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의 일생을 시저와의 만남부터 시작해 잘 압축해서 만만하기만 한 상대는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적 격하의 차원이라고나 할까? 그녀를 미모를 내세워 다른 능력을 폄하하려는 남성들의 의도가 숨어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또한 역사는 승리자를 위주로 기록되기 마련이다. 전쟁의 승리자를 찬양하고 기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쟁의 승자인 로마의 역사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좋은 기록을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 너무 과장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클레오파트라”는 누구인가?고대의 모든 작가들은 그녀가 매력적인 여인이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누구도 그녀를 묘사하지는 않았다.모두들 분명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플루타르크만이 그녀가 가진 매력의 비결이 무엇인가 자문했을 뿐이었다. 그녀의 매력은 미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플루타르크에 따르면 “모두들 이야기하는 그녀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 없이 뛰어난 것도, 보는 순간 사로잡힐 만한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넋을 빼앗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화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지적이고 생동감 있는 그녀의 이야기는 “그녀가 말하는 모든 것의 묘미를 돋우는” 달콤한 목소리를 타고 듣는 이를 사로잡아서 “그녀에게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어려서부터 클레오파트라라는 역동적, 능동적이며 조직에 능한 통치자의 자질을 보였다. 권력을 향한 그녀의 욕구는 18세에 왕위에서 쫓겨난 그녀가 복귀를 위해 주변정세를 이용하면서 나타난다.이집트 내부에서는 능숙한 정치 술을 펼치며 적대자들을 제거하고 성직자들, 토착민들과 연합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국부 증강을 위해 경제적인 조치들을 취한다. 악티움 해전 이후 그녀는 케사리온과 양자 안틸루스를 장정학교에 입학시켜 남자가 권좌에 오르기를 바라는 이집트인들을 안심시켰다.외교 분야에서도 그녀는 민첩하게 대응한다. 로마 정벌의 장기판 위에서 이집트가 졸로 전락하지 않도록 유념하며 이집트의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 애쓴다. 로마와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또한 주변 국가에 대해서는 동맹과 견제라는 복합적인 정치술을 편 왕가에서 이토록 유창하게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클레오파트라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처럼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훗날 이를 바탕으로 외교적인 흥정을 수월하게 해낼 수 있게 된다.- 젊고 아름다운 여왕은 백성들에게 날로 인기의 표적이 되어갔으며,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측근들이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 그녀는 자신이 백성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점을 이용하여 , 은밀히 군대를 움직여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측근들을 일소하려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 일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그녀는 도리어 궁전에서 쫓겨나 아라비아 국경으로 유배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그리고 3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로마에서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양대 거두의 대립이 격화되어, 마침내 BC 48년 그리스에서 파르살로스 대전의 결전에서 패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쳤으나, 환관인 포테이노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로 온 카이사르는 자신의 원수가 죽었음을 알고 크게 기뻐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도 언제 폼페이우스와 같은 처지가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연회를 베풀며 지냈다.그러던 어느 날 밤, 수도인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에 한 척의 작은 배가 닿았다. 배에서 내린 한 사내는 커다란 융단 두루마리를 들고 상륙하여 곧장 왕궁으로 향하였다. 왕궁을 지키던 군사가 그 것이 무엇인지를 묻자, 「 카이사르님에게 드릴 선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사내는 클레오파트라의 심복으로, 시찰리아의 아폴로도로스라는 자였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방에 운반된 융단 두루마리를 펼치는 순간 「 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안에는 거의 아무것도 걸치치 않은 눈부신 미녀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입니다. 마음에 드신다면 부디 받아주십시오.」 미녀는 거침없이 말했다. 그 뒤의 이야기는 전해오지 않지만 우리는 그 다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놀란 것은 프톨레마이오라와 회견하였는데, 그 미모와 재기에 사로잡혀 알렉산드리아로 함께 가 연인사이가 되었다. BC40년 안토니우스는 로마로 돌아와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와 정략결혼하여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가 끝난 듯 보였으나, BC37년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동방에 온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애정을 되찾는 동시에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그들 사이에는 남녀 쌍둥이가 태어났다. BC36년 파르티아 원정은 참패로 끝났으나 클레오파트라는 페니키아까지 사랑을 구하여 달려갔다. BC34년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에서 승리하자 관례를 벗어나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하였다.클레오파트라는 이시스 여신으로 분장하여 주변 여러 나라를 속국으로 거느리고 동방 헬레니즘 세계의 여왕으로 군림하였다. 이 소식은 곧 로마에 전해지고, BC35~BC34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활발한 선전과 비난의 문서 싸움이 시작되어 정치문제로부터 여성관계 추문을 폭로하기에까지 이르렀다.BC33년 안토니우스는 에페소스에 동방로마군단과 속국 군대를 집결시켰고, 클레오파트라도 군함과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BC32년 안토니우스는 드디어 옥타비아에게 이혼장을 보냈고, 옥타비아누스는 내란형식을 피하기 위하여 클레오파트라에게만 선전포고하였다. BC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서로 천하를 두고 겨루었으나 싸움 중 클레오파트라가 함대를 이끌고 달아나고 안토니우스도 이를 뒤쫓아 싸움은 가볍게 끝났다.BC30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가 자살, 클레오파트라도 로마개선식에 끌려다니는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독사에 물려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녀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로마인들조차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에 대해서만은 그 용기와 긍지를 칭찬해 마지 않았다. 시인 호라티우스는 그녀에 대해 “로마를 무너뜨리려는 미친 여왕”이라고 했으나, 그녀의 최후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녀는 당당하게 사나운 뱀을 다뤘으며, 의연히 뱀의 독을 받아들였다. 죽음을 각오한 그녀는 진전 용감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연약한 여자가 아니었으면 계속 플레브스와 에퀴테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마리우스는 제1시민(프린켑스)이 되어 한때 그를 경시했던 사람들에게서 높이 떠받들어지길 원했다. 그때문에 원로원파가 그에게 이제까지 그의 편이었던 혁명파에게서 나라를 구해달라고 요청하자 마리우스는 거절하지 못하고 혁명파를 적으로 돌렸다. 그러나 대가는 보잘 것 없어서 그는 플레브스의 지지를 잃었고 위기에서 벗어난 과두정에게도 외면당했으며 위신을 크게 잃었다. 한편 옛 부하 술라는 더 많은 지지자를 모아 마리우스를 공격했다.전쟁과 독재(Bc 91~80)대외적으로 BC 90년대에는 아시아가 문제였다. 아시아에서 폰투스가 흑해 주변에 제국을 세워 로마와 맞섰으며, 더구나 아시아 속주에서는 이탈리아인 사업가와 로마의 징세관들이 부정?부패를 저질러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었다. 원로원은 이를 척결하려 했으나, 가이우스 그라쿠스 이후 법정을 장악하고 있던 에퀴테스에게 오히려 역공(逆攻)을 당해 실패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도 불만이 점점 고조되어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시민권을 확대하려 했던 시도는 좌절되었고 마리우스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결과 이탈리아인 사이에서는 불만이 더욱 커져갔는데, BC 91년에 호민관이 된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농업과 관계있는 입법으로 빈민의 지지를 얻어 이탈리아인에게 시민권을 줄 것과, 법정을 원로원의 주도하에 두는 대신 원로원에 에퀴테스 300명을 새로 들여보내는 타협안을 내놓아 사법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BC 90년 이탈리아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동맹시 전쟁), 로마는 재빨리 정책을 바꾸어 모든 이탈리아인에게 시민권을 개방하는 법을 통과시켜 반란을 누그러뜨렸다.이처럼 로마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틈을 타 폰투스는 강력한 공세를 취해 로마 영토로 쳐들어왔다. 로마에서는 여러 장군이 그 전쟁의 지휘권을 두고 겨룬 끝에 BC 88년 콘술이 된 술라가 지휘권을 따냈다. 그러나 당시 호민관이었던 푸블리키우스 술피키우스는 새로 시민이 된 이탈리아인들에게 투표권을 주려고다.
나폴레옹은 영웅인가, 독재자인가?나폴레옹은 프랑스가 정신적 피해와 나약함이 극치에 이르렀을 때 프랑스를 구해낸 영웅이라는 평가를 받는 반면, 프랑스 국민을 억압하고 지나친 정복욕에 사로잡힌 독재자로 또한 평가 받고 있다.나폴레옹 그는 프랑스인이다. 그렇기에 일단은 프랑스 인들의 눈에 비친 나폴레옹은 어떠한가? 프랑스 인들은 39%정도가 그를 정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은 독재자라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외의 과반수가 넘는 프랑스 사람들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을 알았던 위대한 인물로 평가 하고 있다. 프랑스 내에서도 명함이 엇갈리는 인물이 나폴레옹이다. 그는 어쩌면 영웅으로 불리기엔 부족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저 세계사에 나타난 다른 침략자들과 같이 말이다.하지만 당시 유럽은 절대주의 시대 이후로 전쟁이 끊이지 않는 시기였다.?전쟁에 있어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를 넓히는 것이 목적이었을 뿐 명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나폴레옹이 유럽을 장악했지만 그것이 당시에는 선하다 악하다를 논할 필요가 없었다.예를 들자면 7년 전쟁이나 인도에서의 영,프 전투가 그런 것이다. 나폴레옹을 단순한 영토확장에 열을 올린 정복자라고 할 수만은 없다. 프랑스의 재정난을 해결했고 국가 질서 및 치안을 바로잡았으며. 국민교육제도를 실시해서 교육환경을 개선하고 최초로 명예훈장제도를 실시해 사병들에게도 성공의 희망을 심어주었다. 가장 주목받는 것은 나폴레옹 법전이다. 인권과 재산권, 가족제도의 틀을 제시한 나폴레옹 법전은 프랑스 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민법의 기초가 된다. 나폴레옹이 정복자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그가 스스로 황제가 되어 유럽의 많은 왕조들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신성로마제국이 나폴레옹에 의해 붕괴되어. 유럽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그가 무자비한 정복자 였을거다. 하지만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시대의 영웅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웅이 시대를 만든다' 라는 말이 있다. 나폴레옹은 말 그대로 시대를 만들어간 사람이다.영국 중심의 유럽질서를 프랑스 중심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전쟁에서 절대적인 힘으로 약한 상대를 굴복시킨 것이 아니라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등의 연합군과 싸워 이겼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 그가 엘바섬에서 탈출해 프랑스에 돌아왔을 때 프랑스 국민들이 열렬히 환영했다는 점, 그리고 7월 혁명 때?나폴레옹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점은 적어도 그가 프랑스에 있어서는 영웅이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영국의 자동차문화영국의 자동타 문화를 설명할 때 가장 먼저 애기하게 되는 것이 우리와는 반대인 자동차 핸들과 주행방향이다 그리고 영국인들의 철저한 양보와 신호준수이다.영국의 교통문화는 무질서 속의 질서 영국에선 경찰차나 병원차가 사이렌을 울리면 지나가면 모든 차량이 재빨리 옆으로 비킨다.그차가 잘 지나가도록 도와줘야 한다.또 런던의 명물인 검은색 택시는 어디에서든 u턴을 할수있다.그러나 신호는 엄격히 지킨다.반면 영국의 보행자는 한국인의 눈으로 본다면 매우 공격적이다.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빨간불이라도 보행자는 당연한 것처럼 좁은 차 주위를 헤집고 다닌다.런던에서는 관광객까지도 이 규칙을 따라 신호를 종종 무시한다.하지만 언 듯 보기엔 무질서 해보인지 몰라도 “사람 우선주의”교통 문화 덕분에 사고율이선진국중에서 최저다.영국은 우리와 다른 좌측 통행 즉 핸들이 오른쪽에 달려 있고 중앙선 왼쪽을 달리게 되어있다.그리고 4거리에는 신호등이 없이 회전하게 되어 있는데 일명 라운드 어바웃이라 해서영국의 독특한교차로 모습이다.또한 우리와는 다른 문화가 있다. 한예로 상대편 차가 헤드라이트를 켠채 접근해 올 경우이곳에서 나느 기다리니까 먼저 가라는 의미이다.그렇기 때문에 영국에서는 헤드라이트를 위로하고 자기부터 전진하면 정면충돌할 우려가 있다..그리고 경적의 사용도 엄격히 규제된다 야간에도 위급한 경우 이외에는 사용이 금지되며,점심시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경적을 함부로 울리거나 헤드라이트를 위로 켜면서도 길을 양보하지 않는 드라이버는 공격적인 사람으로 간주된다.런던은 신흥 계획도시가 아니라 로마시대부터 세워진 도시다 보니 길들이 좁고일방통행이 많다.그런 좁은길에 옆에는 주차가 되어 있고 보통 중앙선이 없이 점선으로 되어 있으니 적당히 넘나들며 다닌다. 하지만 그리 심한 정체는 없다.우리의 경쟁식 운전문화와 다른 양보와신호준수에 의해서라고 한다.영국의 모든 도로에는 M ,B,A 문자 다음에 숫자가 붙는다.숫자가 적을수록 중요한 도로이다.M도로- 한국의 고속도로에 해당한다 최고 속도는 112km(70마인)도로 사용료는 기본적으로 무료이다A도로- M도로 이외의 간선도로로서 일반 국도에 해당한다. 편도2차선,왕복 4차선 부분에서는 최고속도 96km(60마일)이며 그 외의 지점에서는 96km로 제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