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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통극 로미오와 줄리엣 감상문
    로미오와 줄리엣서울남산국악당에서 펼쳐진 음악극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의 가장 인기 많은 작품 이라고 할 수 있는 을 우리의 전통 복장과 무대, 그리고 전통 악기를 이용하여 재창작한 작품이다. 우리의 우리 몸짓과 장단이 어우러진 악(樂), 가(歌), 무(舞)의 마당놀이 형식으로 기존에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고전적인 의 드라마적 연극 요소들과 동양 연극의 전통적인 요소들을 조율하였다. 기존에 접했던 서양식의 연극이나 영화와는 내용이 같지만 그 느낌이 많이 달랐다.특히 우리말의 사투리를 이용하여 대사를 더욱 전통적인 느낌이 나게 하는 효과를 주었는데, 때문에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서양식의 연극을 볼 때와는 달리 구수하게 가슴에 와 닿았으며,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니라 마치 성춘향과 이도령을 보는 듯하였다. 연극의 중간 중간에 이어지는 전통춤은 구수한 대사와 함께 전통극의 깊이를 더해갔다. 캐플릿가의 잔치 장면이나 몬테규가와 캐플릿가의 칼싸움 장면등 전통춤을 응용한 배우들의 몸놀림이 하나하나 신선하게 느껴졌으며, 우리 전통 무용의 절제미와 시공간 여백의 아름다움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춤에는 음악이 빠질 수 없는데, 우리 전통 악기의 소리도 무대의 오른쪽 한 편에서 여러 가지 소리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이 연극에서의 모든 음악은 상여노래까지도 5율에 맞춰 구사하는 우리 장단의 진수를 보여주었는데, 전통의 율을 살리면서 전반적으로 통일된 느낌도 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전통음악 공연의 경험이 없는 나로선 사물놀이가 가장 익숙한 전통음악 공연이데, 이번 연극에서 들었던 전통 악기 소리는 사물놀이와는 달랐다. 연극의 밑바닥에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같이 고요하면서 때론 웅장하게 공연장 내부를 울리는 소리는 너무 아름다웠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무대와 의상이었다. 한국 전통의 미를 잘 나타내는 무대 장치와 조명, 은은하게 비치는 조명이 한복의 옷감을 통과하여 그 고운 색을 비추고 지나갔다. 줄리엣의 흰색 한복은 그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서양의 드레스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단아하고 순결하게 느껴졌다. 다른 의상에서도 백의민족 이라는 우리 민족의 특징을 보여주는 듯 색색의 한복의상을 배치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흰색의 의상을 선택해서 한국화에서와 같은 한국의 여백의 미를 보여주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첫날밤 장면에서는 흰색의 천을 깔아 그 분위기를 연출하였으며, 줄리엣이 죽고 비극이 시작되는 장면에서는 빨간색의 천을 무대 전체에 깔아 그 비극적인 느낌을 연출하였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무대의 색 만으로 우리는 극의 전개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고 연극을 보는 모든 관객들은 연극에 빠져들었다.한국 전통극의 특징이 그러하듯이 오태석연출가는 가무를 중심으로 극을 구성하였다. 어쩌면 뮤지컬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고 생각할 수 도 있을 정도로 노래와 춤이 주를 이룬다. 또한 한국 전통극의 특징인 희극적 처리도 보인다. 희화화된 연극은 그 중간 중간 관객을 웃기는 재치 있는 장면이 많았다.셰익스피어의 은 창작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유명한 영화로도 두 편이나 제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예술 작품에서 을 재창작하여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킨다. 또한 연극으로는 셀 수 없이 많은 공연이 무대에 올랐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이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망하는 무엇인가를 대변해 주고 있어서가 아닐까? 그렇다면 죽음을 초월한 낭만적 사랑은 인간이 소망하는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인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현실과 죽음을 초월하여 사랑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지독한 사랑을 꿈꾸고 원하고 있다. 그것을 아름답다고 말하고 찬양한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에서는 두 사람이 그런 애절한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사랑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그 사랑은 결국 죽음을 통해서 끝이 나 버리는 안타까움을 겪게 된다. 사람들은 이것을 통해서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는 것과 그것을 다시 놓쳐버리는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되고 그 변화는 연극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게 되는 것이다.
    독후감/창작| 2011.12.15| 2페이지| 1,000원| 조회(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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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점과 공통점 평가D별로예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점과 공통점다른 예술 분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문학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을 논의하는 데 앞서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모더니즘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일이다. 18세기의 신고전주의에 대한 논의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고전주의를, 리얼리즘에 대한 논의가 19세기 초엽의 낭만주의를, 그리고 모더니즘에 대한 논의가 19세기 중엽의 리얼리즘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는 모더니즘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많은 이론가들은 이 점을 간과할 채 모더니즘을 충분히 논의하기도 전에 성급하게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에만 급급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외국의 이론이 마치 뉴욕이나 파리의 유행 의상처럼 무분별하게 수용되기 일쑤인 우리나라의 경우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이론가들의 태도는 땅을 굳게 다지기도 전에 성급하게 그 위에 집을 짓는 행위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과 본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칫 모더니즘의 그것마저도 환원법적으로 그릇되게 파악할 위험이 있다.지금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 맺고 있는 관계는 흔히 포스트구조주의 구조주의와 맺고 있는 관계에 비유되어 왔다. 이 이론에 따르면 모더니즘은 구조주의에,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구조주의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이 경우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는 어디까지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이라는 옷으로 변장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때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과의 관계는 마술사의 개념인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사이의 관련성과 유사하다는 관점에서 논의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경제사의 개념인 산업 사회와 후기 산업 사회의 그것과 거의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겉에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간의 관계는 실제로는 지극히 복잡하고 미묘하게 이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노먼 O. 브라운과 미셸 푸코의 이론적인 글에서 윌리엄 버러우스와 장 주네 그리고 최근 노먼 메일러의 소설에서, 그리고 지금 우리 주위 도처에 산재해 있는 포르노-팝 문화에서 우리는 모더니즘 의도의 극치를 발견하게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특히 벨은 현대 개신교의 윤리에 기초하고 있는 서구 자본주의를 붕괴시키는 데 모더니즘과 더불어 포스트모더니즘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주장한다.그러나 누구보다도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이론가는 다름 아닌 프랭크 커모우드이다. 그는 『연속성』(1968)에서 아예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 자체의 사용을 거부한다. 그는 모더니즘을 크게 ‘팰리오모더니즘’과 ‘네오모더니즘’의 두 유형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팰리오모더니즘’과 ‘네오모더니즘’이란 문자 그대로 각각 ‘구(舊) 모더니즘’과 ‘신(新) 모더니즘’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모더니즘의 역사적 발전에서 볼 떄 전자는 초기나 중기의 모더니즘에 해당되는 반면, 후자는 후기의 모더니즘에 해당되는 셈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네?모더니즘’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미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따라서 커모우드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두 유형의 모더니즘 사이에는 시간적인 차이로 두고 일어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본질적인 면에서 별다른 차이점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두 전통이나 이론 사이에는 그의 저서의 제목이 명시적으로 가리키듯이 일종의 연속성이 발견된다. 커모우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로 흔히 일컬어지는 무관심과 무책임의 문제는 모더니즘의 몰개성와 객관성이 변형된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형식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 또한 모더니즘이 시도하는 형식상의 난해성과 결코 무???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커모우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혁명적인 혁신보다는 오히려 모더니즘의 한계적 발전으로 파악하는 것이다.한편 다른 일군의 이론가들은 포스트모더프리드리히 니체처럼 모더니즘이 죽음을 선고하는 한편 포스트모더니즘의 탄생을 선포한 바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피들러는 그의 유명한 논문 「경계선을 넘고ㅡ간격을 좁혀라」(1967)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모더니즘의 죽음의 고통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출생의 산고(産苦)를 겪으며 살아왔고ㅡ1955년 이후 그 사실은 한결 더 첨예하게 의식되었다ㅡ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겪으며 살고 있다. (감수성과 형식에 있어 가장 앞지르고 있으며, 앞으로 이보다 더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자신들을 스스로 ‘모던’이라는 이름으로 자처하던 유형의 문학,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시작되어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유형의 문학은 이제 사망하였다. 즉 그것은 이제 현실이 아니라 역사에 속해 있다. 그것은 소설의 경우 마르셀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 만의 시대, 그리고 시의 경우 T.S. 엘리어트와 폴 발레리와 몬탈레와 세페리스의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비단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이론가들한테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1980년대에 들어와 활약하기 시작한 최근의 이론가들한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영국의 이론가 크리스토퍼 버틀러는 『경야(經夜)이후』(1980)에서 모더니즘과의 단절이라는 맥락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파악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그는 “1950년대에 이르러 모더니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작가들과 음악가들 그리고 화가들에 의해 예술 언어에 매우 혁신적인 전통이 발전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입장은 버틀러말고도 사실상 몇몇 다른 이론가들도 마찬가지로 주창하고 있는 실정이다.그렇다면 마치 불과 얼음처럼 서로 상충되고 대립되는 이 두 가지 입장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고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절충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절충주의적 입장이란 바do)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 ‘모도’라는 표현은 ‘지금 방금’또는 ‘오늘’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어원에 충실한다면 ‘포스트모던’이라는 표현은 흥미롭게도 ‘오늘 이후’, 즉 ‘내일’이라는 미래 시재를 가리키는 표현이 되는 셈이다. 이와 관련하여 프랑스의 철학자 장-프랑수아 표타르는 전미래라는 프랑스어 문법 용어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논의한 바 있다.그렇다고 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단순히 ‘모더니즘 다음에 오는 현상’만을 가리키는 ?은 물론 아니다. 왜냐 하면 이 용어는 모더니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양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질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대략 말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러니까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현상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 당시 활약한 작가들이나 예술가들이 모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적 우산 속에 들어오지 않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동시대의 작가들과 예술가들 중에서도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범주화될 수 없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모스트모던’이나 ‘포스트모더니스트’라는 꼬리표는 오직 20세기 후반에 작품 활동을 하였거나 또는 현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한 무리의 작가들과 예술가들에게만 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의 관계는 단순히 연속이나 단절이라는 관점에서 파악될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한편으로는 모더니즘의 논리적 연속으로 파악될 수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모더니즘으로부터의 단절로도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필립 스티빅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 맺고 있는 관계를 크게 변증법적 관게와 대립적 관계, 그리고 적대적 관계라는 세 유형으로 범주화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 ‘변증법’ 관계라는 표현은 다소 부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 하면 모더니즘을 이제 더 이상 생존 불능한 개념,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사멸 이후 새로이 탄생된 개념으로 볼 때 이 두 전통이나 이론 사골목’에 해당하는 셈이다.그러나 유기적인 구성이나 형식 또는 예술의 자기 목적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는 상당히 대립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예술 작품을 흔히 ‘잘 빚어진 항아리’나 ‘언어적 상상’에 비유하는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과는 달리,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은 문학 작품의 유기적 통일성을 거의 모두 부정한다. 그들은 이러한 통일성이나 일관성 보다는 오히려 편리성이나 임의성 또는 유희성을 더욱 설득력 있는 예술적 원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문학 작품은 ‘잘 빚어진 항아리’가 아니라 오히려 ‘산산조각으로 깨어진 항아리’에, 그리고 ‘언어적 성상’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적 미로’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예술의 자기 목적성에 심각한 회의를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존재하지 않듯이 예술에도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예술적 소재의 고갈이나 소진을 누구보다도 첨예하게 깨닫고 있는 그들은 과거에 이미 존재했던 소재를 다시 재생하여 활용하고자 할 뿐 그들 자신의 작품에서 어떤 독창성이나 창조성과 같은 것은 아예 기대하지도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하여 흔히 언급되는 ‘작가의 죽음’이나 ‘문학의 죽음’또는 ‘인간의 죽음’과 같은 문제는 어디까지나 이러한 현상을 지칭하는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그런가 하면 프로이트가 말하는 이른바 ‘억압된 것들의 복귀’현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던니즘과 매우 적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동안 가부장 제도적인 모더니즘의 권위 아래에서 주변적인 위치밖에는 차지하지 못하면서 억압되었거나 무시되어 온 것들이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부상되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엇보다도 주변적인 것들의 부상이라는 점으로 특징 지을 수 있다. 기성 문화에 반기를 드는 청년 문화를 비롯한 반문화, 고답적이고 엘리트주의 한다.
    인문/어학| 2011.12.15| 10페이지| 1,000원| 조회(2,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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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모더니즘 시의 구체적 양상
    한국 모더니즘 시의 구체적 양상한국의 현대시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를 살피기 위해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가 생산된 미국의 경우 포스트모던 시가 어떤 특성을 보이는가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한다.미국의 경우 포스트모던 시란 퍼킨스가 지적했듯이 이른바 모더니즘의 미학을 해체한다는 특성을 띤다. 그에 의하면 포스트모던 시란 50년대 이후 나타난 영미시의 새로운 양상으로 그 특성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자발성, 개성, 자연성, 개방성 등이 그것이다.첫째로 자발성이란 좀 더 부연하면 자발적 언술을 뜻한다. 이런 언술이 노리는 것은 용어 자체가 암시하듯이 모더니즘의 시학으로 불리는 신비평의 시적 원리가 강조하는 인위적 형식성, 압축된 형식성에 대한 부정이다. 포스트모던 시가 이런 형식성을 해체하려는 것은 그것이 창조과정의 자발성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모든 형식은 그런 점에서 흐름을 구속한다. 포스트모던 시가 지향하는 자발성은 그런 점에서 우리들의 삶을 좀 더 자유롭게 실현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둘째로 개성이란 신비평의 시적 원리가 강조하는 이른바 몰개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해체를 노린다. 신비평의 원래에 따르면, 특히 엘리엇의 견해에 의하면 시인과 시적 화자는 단절된다. 시 속에서 이야기하는 자아는 탈 혹은 시적 자아로 정의된다. 시인과 시적 화자의 단절이 강조되는 것은 일상적 공간과 시적 공간이 변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는 이런 대립이나 단절을 부정한다. 따라서 시인의 목소리가 직접 들릴 뿐만 아니라, 그 목소리는 자전적 요소를 내포하며, 고백파 시인들의 경우처럼 도덕적으로 은폐되어야 할 개인적인 무의식의 세계마저 드러낸다.셋째로 자연성이란 시의 소재로 자연을 노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스러운 정서와 경험을 노래한다는 그런 의미로 사용된다. 앞 시대의 모더니스트들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런 정서와 경험을 노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경우에는 최소한 초월적 현실, 혹은 이상적 유토피아가 존재한다. 포스트모던 시는 이런있으나 정치적인 미래낙관주의와는 연결되지 않으며, 또한 탈승화된 세계상, 예술어와 일상어, 이념과 현상 사이의 골을 메우려는 개념으로 자기 경험이 곧 세계 경험이라는 새로운 현실주의를 토대로 한다.그런가 하면 안성권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신주관주의는 80년대에 오면서 이른바 신내면성의 시들로 변한다. 신주관주의의 시가 반인공적 시어, 무형식의 형식, 장시 선호, 의식적인 단편화 등 전통적인 미학과의 결별을 강조한다면, 신내면성의 시는 소재 대상의 일상화, 사적화, 개인화와 더불어 더욱 일상시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이런 일상성은 박상배 교수의 주장처럼 모더니즘의 미학을 거부하며, 따라서 독일시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불린다.결국 이상에서 간단히 살펴본 포스트모던 시의 특성은 한마디로 모더니즘의 미학에 대한 부정을 기본 개념으로 한다. 이때의 모더니즘은 이른바 고급 모더니즘을 의미하며, 따라서 포스트모던 시는 아방가르드적 양상을 띠지만, 그것이 후기 자본주의의 시대와 관련된다는 특성을 거느린다. 이런 미적 현상이 우리시의 경우에도 드러난다고 보면서 그 특성 중에서 해체 개념을 강조한다. 해체주의가 포스트모던 시의 철학적 토대라고 보는데, 코너 같은 이론가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전자가 공간성을 강조함에 비해 후자는 공간으로부터의 초월을 강조한다고 말 한 바 있다.모더니즘이 강조하는 공간성이란 부르주아적 시계 시작으로부터의 초월을 의미한다. 그것은 한 점으로 인식되는 순간의 영원성을 지향한다. 점으로 인식되는 시간이란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공간은 이른바 역사성을 부정한다. 말하자면 현존이라는 추상적 존재를 전제로 한다. 스파노스가 주장하듯이 포스트모던 시는 이런 형이상학에 대한 도전이라는 의미를 띤다. 모더니즘 미학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비판하면서 스파노스가 기대는 것은 하이데거 철학이다.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것은 이른바 서구 형이상학이 기대고 있던 존재나 동일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그 후 데리다 같은 철학자에 오면서 때 한결 흥미롭다. 문체화 된 세계란 낱말들(words)이 바로 세계(worlds)각 되는 그런 세계를 의미한다. 어째서 그럴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글쓰기에서 우리가 읽게 되는 것은 그에 의하면 인간들의 행동이 아니라 페이지 위의 낱말들이다. 문학작품의 경우 낱말들의 조직은 세계를 미적으로 반영하거나 세계를 새롭게 구성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읽는 것은 낱말이 지워지면서 세계가 전경화 되는 과정이다.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우에는 이런 과정이 역전된다. 전경화 되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낱말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텍스트에서 우리가 읽는 것은 세계가 지워지면서 낱말들이 전경화 되는 과정이다. 이런 문체의 전경화는, 맥할레도 말하듯이, 모더니스트 텍스트에도 나타난다. 이런 텍스트에 드러나는 문체의 전경화는, 특히 소설의 경우, 대체로 두 가지 상이한 기능을 보여준다고 맥할레는 주장한다. 하나는 인식론적 기능이며, 다른 하나는 자율적 기능이다.인식론적 기능이란 문체가 소설의 경우 주인공이 세계와 마주치면서 드러내는 의식을 재현함을 의미한다. 문체가 주인공의 의식을 재현하지 못하는 경우 그것은 조이스나 울프의 경우처럼 의식을 대리하거나 의식의 치환물이 된다. 그러나 자율적 기능이란 이와는 달리 문체가 내용을 털어버리고, 그러니까 어떤 모방적 속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내용이 없는 책’ 혹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 책을 의미한다.포스트모더니즘의 텍스트에서 강조되는 것은 인식론적 기능이 아니라 자율적 기능, 혹은 내용이 없는 책이다. 그러나 모더니즘과 다르게 이런 텍스트가 보여주는 것은 모더니스트들이 꿈꾼 완벽한 무 내용이 아니다. 그것은 내용의 그림자를 투사한다. 이런 텍스트는 비록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세계를 투사한다. 이런 텍스트의 목적은 세계의 재구성을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 과정에 방해하는 것들을 보여줌에 있다. 부연하면 이런 텍스트는 세계를 다시 구성하는 일이 더욱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한다.이런 대한 관심을 환기한다. 특히 이런 특성은 ‘도끼로찍으니안눕는나무가없공원에서’같은 시행들이 보여준다.넷째로 무한한 형태변환적 구성의 기법은 이른바 척추가 없는 문장들의 기법으로 불린다. 이런 기법은 예컨대 하나의 문장을 여러 가지로 변형시킴으로써 항상 변하는 문장의 표면을 강조한다. 이런 문장이 암시하는 것은 문장의 표면과 심층의 경계에 대한 해체이다. 말하자면 문장의 심층에는 선험적인 의미가 있고, 따라서 문장의 표면은 그런 의미를 전달한다는 전통적 언어 인식에 대한 미적 부정이다. 필자는 「사로잡힌 남자」라는 시에서 이런 기법을 원용한 바 있다. 여기서 기본 문장은 ‘나는 너를 꿈꾼다.’이며, 이 문장이 주어, 목적어, 서술어의 수준에서 끊임없이 변형된다. 이런 변형이 노리는 것은 ‘나는 너를 꿈꾼다.’는 문장의 의미가 마침내 사라지고, 따라서 문장의 의미가 아니라 문장 자체가 바로 의미가 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런 문장의 존재 의미는 문장 자체의 배열, 곧 자기 배열에 있게 된다.다섯째로 시니피앙의 원리에 의한 기법은 맥할레의 용어에 따르면 이른바 ABCD의 순서에 의한 구성을 의미한다. 이때 세계는 알파벳으로 대치된다. 이런 방법에 의해 하나의 텍스트가 성립될 때 거기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작은 허구성이다. 알파벳의 순서를 따르는 구성법은 또한 자의적인 구성법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경우 존 바르트는 이런 방향을 더욱 발전시켜 그의 문자 소설을 ‘문자들(letters)’이라고 부른 바 있으며, 여기서 그는 자신의 텍스트의 전체 구조를 위의 일곱 개의 알파벳에 의해 완성했으며, 이 세계는 그야말로 ‘문자들의 세계’로 인식된다. 이런 구성법이 다소 변형된 것이기는 하지만 박상순의 「열 번째는 전화기」에서 읽게 되는 구성법이 그렇지 않나 싶다. 원래의 알파벳의 순서를 따르는 구성법은 예컨대 ‘A는 archer/B는 butcher'같은 방식으로 텍스트가 구성된다. 그러나 위의 시는 '1은 나/2는 자동차’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엄격하게 말하면 알세계관은 정신이나 본질이 삶의 중심이고 육체나 현상은 주변이라는 위계질서적인 시각과 동시에 2항 대립체계를 철학적 토대로 거느린다. 문학의 경우에도 이런 철학적 태도는 은연중에 드러난다. 문학 작품의 특성은 에이브람스(M. H. Abrams)도 지적 했듯이 전통적으로 세계, 작가, 독자와의 관계 속에서 해명된다. 곧 그것은 작품/세계, 작품/작가, 작품/독자라는 2항 대립 체계를 전제로 한다. 역사적으로 이상의 두 항목 가운데 어느 한 항목이 중심이 되고 다른 것은 주변적인 역할을 해 왔다.리얼리즘의 경우에는 작품이 세계를 반영하기 때문에 후자가 전자를 지배하며, 작가나 독자 역시 세계에 종속된다. 모더니즘의 경우에는 작품의 자율성이 강조되기 때문에 세계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으며, 작가나 독자는 무시된다. 위에서 나는 텍스트 내적 해체라는 용어로 텍스트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유기적 통일성, 혹은 통사가 우리시의 경우 어떻게 해체되었는가를 간단히 살폈다. 이런 해체는 그런 점에서 모더니즘 텍스트와 관련된다.포스트모더니즘의 텍스트는 이런 자율성 혹은 폐쇄적 형식뿐만 아니라 찬찬히 읽어보면 이른바 텍스트 외적 관계도 해체한다. 말하자면 작품/세계, 작품/작가, 작품/독자, 나아가 작가/독자의 경계가 해체된다. 뿐만 아니라 텍스트/텍스트의 경계 역시 해체된다.첫째로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우 세계와 텍스트의 대립이 해체된다. 위에서도 살핀 바 있지만 이런 해체는 모더니즘 텍스트가 보여주는 텍스트의 자율성뿐만 아니라 리얼리즘 텍스트가 강조하는 이른바 세계 반영의 허구성이나 무익성을 반증한다. 그런 점에서 이런 텍스트는 반리얼리즘의 양상과 동시에 반모더니즘의 양상을 암시한다. 이런 양상은 예컨대 박순업의 「449」라는 시에서 보여준다. 시 속에서 노래되는 것은 우리가 흔히 믿는 현실이나 세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더니즘 텍스트가 암시하는 미적 자율성의 공간도 아니다. ‘일이 이에게 다가가다’는 어떤 세계도 반영하지 않고, 또한 어떤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지도 않는다. 그런다.
    인문/어학| 2011.12.15| 10페이지| 1,000원| 조회(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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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비교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비교19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낭만주의에 대한 반성과 현실이 문학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꿈과 이상과 주관적인 가치를 추구한 데 대하여 인간이 살고 있는 ‘실제문제’로서 문학의 내용을 대체하려는 것이 사실주의의 노력이었다.한편 문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리얼리즘(realism)을 사실주의란 용어로 표현해 왔는데 이는 매우 유용한 용어이기도 하지만 리얼리즘(realism)을 단순한 문학상의 기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의미도 내포하는 것이기에 ‘리얼리즘’으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사실주의란 용어는 프랑스 사실주의 파에 의해 쓰이기 시작하였는데, 1831년 신고전주의 회화의 시적 이상성과 반대되는 회화의 성격을 지칭하는 미술 비평용어로 쓰였다.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프랑스의 화가 쿠르베인데 그의 낙선화(落選畵) 전람회에서 ‘레알리스트’라고 자칭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그 후 1856년 뒤랑티가 『Realiam』이란 잡지를 창간하면서 문학 용어로 쓰여졌다.그 어원은 라틴어 realis(실재, 실물)이며, 관념과 상상에 대립되는 말이다. 자기 밖에 존재하는 대상과 자기가 파악한 대상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이 소박한 묘사론은 ‘여러 사실의 실재적 표현’의 가능성을 굳게 믿는다. 이것은 하나의 이데아가 인간 밖에 있고, 다른 모든 것은 그 이데아의 모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플라톤주의와는 대립된다. 이 사실주의의 속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역사소설의 허위성이다.둘째, 스타일의 불필요성이다.이렇게 뒤랑티나 샹플뢰리가 말하는 리얼리즘이란 결국 ‘본 것만을 쓰는 리얼리즘에 지나지 않는다.’ 이 모사론은 낭만주의적 경향에 대한 하나의 반동으로 형성된 것 이긴 하지만 끝내는 자기의 논리를 따라가지 못하고 공리론과 결부되어 버린 곳에서 모순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있는 그대로를 그리면서 동시에 공리적이고 교훈적인 모습이 부각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사물(대상)이 ‘ 문학사의 실증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의 객관적인 인식의 폭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그것이 추구하는 근본이념은 같다는데 리얼리즘 문학의 특성이 있다. 소설을 ‘현실의 연구(발자크)’, ‘현실의 탐구(도데)’, ‘인간의 기록(꽁꾸르 형제)’이라는 주장은 바로 사실주의가 소설문학의 본령임을 시사하는 것이다.둘째, 사회에 대한 이러한 탐구는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시켰다. 시민계급이 형성되고, 개인의 사회적 가치가 고조되자 한 시대, 한 사회를 탐구하는 문학은 개인의 사회적 삶의 문제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개인들의 삶은 사회적으로 조건지워졌으며,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사실주의 문학의 이상적 테마가 된다. 이러한 사회와 개인의 유기적인 관계를 조사ㆍ분석ㆍ제시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인 것이다.셋째, 사회의 어두운 면, 추악한 면을 추구하는 소설이 등장했다. 이것은 인간사회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탐구의 결과로 범죄, 싸움, 간통, 알콜중독 등이 주로 작품에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한 시대의 추악한 면을 폭로하는 데만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하고 인간과 사회를 탐구하는 데 있는 것이다.넷째, 사실주의 수법상의 진술 방법으로 ‘견자(見者)의 사상’과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의 객관묘사가 차지하는 중요성이다. 이것은 발자크에서 비롯되어 플로베르, 모파상에 계승되는데, 이런 시점 문제는 인간이 삶을 신의 입장에서 통제하고 주관하는 유기성에서 인식하는 결정론적인 태도와 관계가 깊다. 플로베르가 모파상에게 말한 ‘일물일어설’은 모든 사물에는 오직 하나의 명사, 하나의 품사, 하나의 형용사 밖에는 없어 작자는 그 하나의 말들을 찾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언어에 대한 신뢰성은 있으나 자칫 상상력의 억제에 빠질 우려가 있는것이다.이러한 사실주의 문제에 있어 자연주의와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가장 먼저 도입된 것은 미술분야였다. 그것은 졸라의 『떼레즈라껭』제2판 서문에서 비롯된 것으로 실험하는 하나의 방법이며, 어떤 독특한 작문(作文)의 스타일보다는 사물의 이해를 위한 분석의 필요성을 뜻한다.)그리하여 자연주의자들은 과학적 사상에 고취된 철학을 거쳐 여러 분야의 과학으로부터 작품에 표현할 명확한 인간의 개념을 추출해낸 것이었다. 그들의 생물학적ㆍ철학적 가정은 그들을 선입견 없는 객관적 태도를 취하는 사실주의자들과 구분시켜 준다.◇ 프랑스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사실주의는 프랑스에서 맨 처음 시작하여 전 세계로 퍼졌다. 19C에 이르러 보편적이고 이상화된 자연을 표현하는 것은 더 이상 예술가들을 이끌 수 없었다. 그래서 조형예술이나 문학은 사회적 상황을 수용해서 인간이 사는 사회적 환경과 시대를 재생해내는 리얼리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자연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하층민의 삶도 문학에 도입하는 등 주제에 제한도 없어졌다. 모든 사물도 동등한 미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실주의는 혁명적이고 민주적인 것이라 볼 수 도 있는 것이다.반드시 사실주의자(리얼리스트)라고만은 할 수 없는 스탕달(1783~1842)은 『적과 흑』에서 미학에 대한 견해를 밝혔는데, 그는 세계의 모든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현실적인 소설의 과제라고 말한다. 이는 현실 도피적인 낭만주의 문학보다는 진전된 것이며 그의 사실주의 방법론은 가상이 아닌 현실의 표현이라는 의미의 사실주의와 예술의 이상을 결합시키는 데 있다할 것이다. 『적과 흑』에서 당시의 정치ㆍ사회 현실을 문제 삼은 것도 곧 사실주의 문학의 성과이며 선구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한편, 『적과 흑』의 현실은 작자에 의해 선택된 현실이며, 작자의 역사ㆍ사회관에 의해 설명되고 해석된 현실이란 점에서 사실주의 반영론의 진정한 의미와 그 방법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스탕달이 밝혀낸 역사와 사회와 삶의 원리는 비록 그것이 흘러간 시대의 사실일지라도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구체적 현실과 보편적 사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발자크의 『인간 희극』에서 보여 주는 다양한 묘그 모임은 파리에 있는 졸라의 집에서 가졌다. 『르 골르와』지(紙)에서 그 그룹의 회원이었던 모파상은 『메당의 저녁모임』은 ‘낭만주의자들의 훌쩍거리는 감상주의’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프랑스에 있어서 자연주의 문학이론의 거의 모든 체계는 졸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 체계는 약 30년에 걸쳐, 1867년 『떼레즈라껭』, 제2판의 서문, 1879년의 『실험소설론』, 1881년의 『연극에 있어서의 자연주의』,『자연주의 소설가론』, 1897년의 『젊은이에게 주는 편지』들로 이루어져 왔다. 『실험소설론』과『떼레즈라껭』의 서문은 자기 방어적 입장에서 쓰여진 것으로 이런 주장은 자연주의 작가들의 한의 상투수단이 되었다. 즉 과학자와 같은 입장에 있어서 그들을 그들이 다루는 내용이나 방법론에 있어서 도덕의 기준을 초월해 있는 것이며 그들은 관찰된 사실에 대한 중립적 분석자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졸라의 과학적 접근 방법의 선언이라 할 수 있는 『떼레즈라껭』의 서문의 주요 요지이며 그의 표현대로 의사와 같은 태도로, ‘적나라하고 생생한 해부학적 표본’을 만들기 위해 그는 ‘과학적 분석’과 ‘이상한 생리학적 사례를 연구’하는 일에 몰두해 온 것이다.그의 『실험소설론』은 『떼레즈라껭』서문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한 그의 생각들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다만 그 서문에서는 한 소설 속에서의 그의 이론의 실천을 정당화시킨 데 반해 『실험소설론』에서는 모든 작가들을 위한 일반적 법칙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여기서 졸라는 ‘과학에 의하여 형성되는 문학의 개념’을 강조하는데 이것이 그의 기본 사상이다. 이 사상에서 작가는 완전한 객관적 태도를 취해야 할 필요성이 비롯된 것이다.한편 제재와 형식을 중시한 나머지 형식의 문제를 소홀히 한 것은 많은 비평가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고 사실 예술과 과학은 동일시하고 창조적 예술가에게 과학적 방법을 맡긴 것은 불합리한 것으로 이 근본적 결함은 그 이론을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게 했다.◇ 영국의 사실주의전통적인 미학에서 이탈하여 몇 작가만을 언급하겠는데, 특히 마크 트웨인은 모든 작가 중에서도 독창적이며 가장 폭넓은 아메리카인이다. 그의 걸작은 『허클베리핀』인데 그것은 소년에 관한 이야기 이상의 작품으로 허크의 순진한 눈을 통하여 우리는 전 문명(또는 문명에 결핍)을 보며, 아메리카 역사와 지리적 중심에 대한 서사시적 전망을 얻는다.아메리카 최고의 소설가로서, 미구에서 태어난 것 외에는 성년 생활을 거의 유럽에서 보내고, 사고방식도 유럽적ㆍ세계적이었던 헨리 제임스는 인간 성격에 대한 깊은 연구자이며 심리주의자다. 그의 작품 활동을 두 시대로 구분하면, 첫째 시기는 의지박약한 아메리카의 조각가를 주인공으로 한 『토데릭 허드슨』과 『데이지 밀러』, 『어느 부인의 초상』, 『아메리카 사람』들이 있다. 둘째 시기는 더욱 교묘하고 복잡해졌는데 등장인물에 대한 완전한 객관화를 시도했다. 등장인물은 아주 정상적이거나, 이상하고 어려운 처지 사이를 방황하는데 이것은 작자가 스스로를 위해 완전한 인간의 성격을 쌓는 과정을 그리었다. 『비둘기의 날개』와 『황금 대야』가 바로 그런 수법의 작품이다. 그 외에도 그는 훌륭한 단편 소설작가로, 비평가로도 활약하였다.◇ 독일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프랑스와 시기를 같이하여 독일에서도 현실에 맞는 시대소설을 창작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는데 봉건적인 압제정치에 반항해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청년 독일파는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비추어 그 문제들을 확실하게 반영하려는 목표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이념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소설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러한 소설관은 그들의 목표(혁명) 수행에 있어 역기능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문학에 있어서 사실주의의 객관성을 희생시키기도 하였다.헤겔의 『미학』은 19세기 독일 사실주의 예술이론에 많은 영향을 끼쳐 문학은 -이성적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할 뿐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이상과 현실성이라는 헤겔의 이원론은 독일 문학에 있어 미학의 근본이 되었다. 이런 견해는 후에 예술작품에서 현실과 시적인 것을 화해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끼쳤다.
    인문/어학| 2011.12.15| 11페이지| 1,000원| 조회(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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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달전에서 평강공주의 주체성
    제목: 연구목차Ⅰ. 머리말Ⅱ. 작품의 구성Ⅲ. 인물분석Ⅳ. 평강공주Ⅴ.결론※참고문헌Ⅰ. 머리말『삼국사기』는 삼국시대(BC. 36~AD. 935)와 그 이전의 우리 민족의 자취를 기록 한 책으로써, 한국인에 의해 기록된 가장 오래된 기록의 하나이다. 그 이전의 다른 기록들이 있었다고 하나 약간의 금석문을 제외한 다른 기록들은 지금 우리는 접할 수 없으므로 『삼국사기』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삼국유사』보다 1세기 가까이 먼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저자의 편찬태도 때문에 『삼국사기』는 『삼국유사』에 비해 문학연구자들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했다.『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년(1145)에 왕명으로 김부식 등이 편찬한 책으로, 이보다 앞서 고려 초에 편찬되었던 『구삼국사(舊三國史)』등의 고유한 사료(史料)와 중국 측 사서(史書)등을 참조하여 귀족의 입장에서 유교적 사관(史觀)으로 엮은 기전체(紀傳體)의 정사이다.『삼국사기』에 기록된 사실들은 실재 연대가 서기 200년부터 900년까지이므로, 이 책이 쓰여 지기 이전 250년 내지 950년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그 때문에 사건의 기록이 부정확하거나 왜곡될 가능성은 매우 크다.그렇기 때문에 『삼국사기』는 역사적 사실들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는 이유에서 지탄받고, 과거부터 전승되어 오던 구비문학들을 원형 그대로 전해 주지 못했다고 지탄받는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서술 대상이 삼국시대라는 점, 이 사서가 많은 사관들의 참여하에 이루어진 공동 저술이라는 점에서 여기에 드러나는 유교의식을 모두 12세기 김부식 개인의 것으로 귀속시키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또한 김부식은 12세기 사람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 자기가 속한 사회의 보편적인 사고를 뛰어 넘는 것은 쉽지 않다. 인간의 의식은 존재에 구속된다.) 더군다나 필자가 가장 보수적인 귀족계층에 속한 노신일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삼국사기』가 그 당시 저자가 속해 있던 계층의 시각, 즉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에 입 주체성을 유교주의 적인 측면에서 분석하여 여성의 자아실현에 있어서 주체성이 허용되는 범위가 어디 까지였으며, 유교주의 적으로 여성에게 요구하였던 주체적인 행동은 무엇인지 연구해 보도록 하겠다.Ⅱ. 작품의 구성(내용)은 구성면에서 다음과 같은 5장면으로 나뉜다.① 고구려 평강왕 때 형색이 누추하고 눈먼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동냥으로 거리를 헤매는 바보 온달이 있었다. 평강공주는 어릴 때 매우 잘 울었는데, 아버지인 평강왕은 딸이 너무 자주 우는 게 싫어서 그 때마다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겁을 주어 달래곤 하였다.② 딸이 자라 시집갈 나이가 되자 왕은 상류층의 똑똑한 사윗감을 골라 딸과 결혼시키려 했다. 딸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바보 온달에게 시집가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딸을 설득하려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화가 나서 딸을 내쫓았다.③ 평강공주는 온달을 찾아갔다. 온달의 맹인 노모가 온달 있는 곳을 가리켜 주어 온달을 만났으나, ‘온달이 사람이 아니라’하며 박대한다. 공주는 온달의 집 사립문 아래서 자고, 이튿날 다시 모자에게 자세한 전말을 말하니, 온달의 어머니가 ‘그 곳은 귀인이 올 곳이 못된다.’고 만류하였으나, 공주가 듣지 않고 오히려 설득하여 결혼하여 같이 살았다.④ 평강공주는 집을 나올 때 가지고 온 보물들을 팔아 집을 마련하고 밭과 노비(奴婢), 우마(牛馬), 기물(器物) 등을 사고, 온달을 지혜롭게 내조했다. 온달은 나라의 사냥대회에 나가서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드러내어 국왕에게 알려졌다. 전쟁이 일어나자 온달은 출전하여 크게 이겼다. 왕이 온달을 사위로 인정하고 작위와 벼슬을 내렸다.⑤ 다음 왕이 즉위하자 온달이 스스로 신라를 쳐서 실지를 회복하고자 하여 출전하였으나 전사하였다. 장례를 치르려 하자 영구(靈柩)가 움직이지 않아서 공주가 와서 어루만지며 달래자 비로소 움직여 장사(葬事)지낼 수 있었다.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좀더 추상화하여 단순하게 요약할 수 있다.① 평강왕은 딸을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딸과 약속했다.② 왕은 신분을 가진 분이 올 곳이 아니라고 하며 만류한다. 평강공주는 공주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온달과 온달의 어머니를 설득하기 위해서 집 밖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고, 평강공주는 결국 온달과 혼인을 하여 함께 살게 된다.부모님이 정해주는 집안의 사람과의 혼인을 당연하게 여겼던 당시 사회에서는 평강공주가 온달을 직접 찾아간다는 부분도 역시 낯설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온달과 온달의 어머니는 처음부터 공주를 반기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였다. 그런데 직접 설득을 하면서 까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것은 현대적으로도 그녀의 용기와 추진력을 높이 살만하다. 유교주의적인 관점에서 평강공주는 원칙과 도덕을 지키려 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주의 이런 행동은 비판받지 않음은 물론이고, 본받을 만한 행동으로까지 나타나고 있다.예를 들어서 온달이 결국 평강공주의 부왕인 평강왕에게 인정을 받고 훌륭한 장군이 된다는 것은 그녀가 선택한 행동들이 잘한 행동이며, 결국은 보상의 차원에서 그러한 결과가 이루어 졌다고 생각한다.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신념을 추진하는 추진력 있는 여성이며, 그것에 대해 위기가 닥쳐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끊기를 지닌 여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의 이런 성품이 그녀가 판단하고 생각했던 일을 결국 현실로 만들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온달과 결혼하였지만 결론적으로는 아버지의 잘못 된 식언을 바로잡고 그 이전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했던 말을 받들어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 점에서는 어찌 보면 평강공주가 현대적인 의미에서 완전히 주체적인 인물은 아니었다고 보여 진다. 하지만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녀의 행동은 충분히 주체적이고 자발적이다. 도덕과 원리 원칙에 의한 명확한 판단 기준과 확고한 의지가 그녀의 행동 원인이 되었고, 아버지나 남편과 같은 다른 이유에 의해서 결코 자신의 신념과 판단 기준이 흔들리거나 변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삼국사기』에서도 그녀의 이런 성품을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그의 어머니가 혼인을 말리는 것이다. 이러한 거듭되는 시련과 시험을 겪으면서도 공주가 온달과 결혼하는 것은 그의 약속이행 의지가 확고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시련의 다양함은 표면적으로는 서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데 기여하고 있지만 실상은 공주가 옳다고 믿고 있는 의(義)를 행하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Ⅲ. 인물분석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평강왕과 평강공주 그리고 온달과 온달모의 4명의 인물이 있다. 전체적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은 평강공주이며, 평강공주와 평강왕의 사건이 발단이 되어 온달과 평강공주를 이야기가 시작되고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 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면서 각각의 인물들을 통해서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각각의 인물들의 성격이 이야기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먼저 평강공주와 평강왕 그리고 온달과 온달모의 순서로 각각의 인물들에 대해서 간략히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1. 평강공주울기를 좋아하는 평강공주에게 평강왕은 온달에게 시집 보내다는 농담을 한다. 그러나 그 농담을 빌미로 공주는 온달에게 시집가겠다고 우기고, 그로 인해서 평강왕과 평강공주의 갈등이 야기된다. 실제로 어린 아이들이 울 때 부모들은 이러저러한 수단을 통해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한다. 부왕도 이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공주의 울음은 특별한 자질이나 능력이 현실적으로 발현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겉으로 드러난 결함일 수도 있다.)즉 공주는 어렸을 때부터 특별한 자질로 인해 남다른 욕구와 욕망을 지내고 있었는데, 부왕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보통 어린아이처럼 달래려 했기 때문에 공주는 불만을 해소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울어대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공주가 부왕의 말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울었다는 점에서 공주는 고집이 매우 강하고 주체적인 여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공주의 성격은만 아니라 지극한 효성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느티나무 껍질을 벗겨 먹고살아야만 하는 처지에서 눈먼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구걸을 마다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이 바보 온달이라고 놀리지만, 그는 이에 전혀 개의치 않고 다 떨어진 옷과 신발로 시정 사이를 왕래한다. 참으로 온달은 순박하고 착한 심성을 소유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온달의 순박하고 착한 심성은 평강공주의 첫 만남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난다. 보통 사람이라면 평강공주의 구혼에 웬 횡재냐며 좋아 했으리라. 그러나 온달은 ‘이는 어린 여자의 행동이 아니다. 반드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 귀신일 것이니 나를 박해하지 말라’고 말한다.구혼하는 공주를 여우 귀신일 것이라고 판단한 온달을 어찌 지성적이며 총명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바보에 가까울 정도로 순박한 온달의 성품을 여실하게 드러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이렇듯 온달은 순박한 심성과 지극한 효성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역학관계와 사회적 통념에 비추어 볼 때, 온달은 분명 거지이면서 바보에 불과하다. 다 헤진 적삼에 떨어진 신발을 신고 시정 사이를 왕래하면서 밥을 빌러 다니는 온달. 틀림없는 거지이면서 바보의 형상이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놀림에 구애받지 않고 구걸하는 온달은 더욱 더 바보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렇듯 현실적인 역학관계와 사회적 통념에 의거할 때 온달이 지닌 지극한 효성이나 내면적 가치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온달의 내면적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역학관계나 사회적 통념을 부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부정은 철저하게 원리 원칙을 고수하거나 엄밀한 도덕적 관점에 섰을 때 가능하다.)평강공주는 사회적인 통념과 대립해 원리 원칙을 주장하는 인물이었으므로 그녀만이 온달의 효성과 내면적인 순박함, 그리고 그가 지닌 가능성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반대로 사회적인 통념에 의해 행동하였던 평강왕은 온달의 바보 같은 겉모습만을 판단하고 그의 내면적인 면모를 읽어내지 못하였다.에서 온달은 매우 입체적인 인물이다. 그는 바보다.
    학위논문| 2011.12.15| 33페이지| 3,000원| 조회(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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